K의 모더니스트
W. 럼

 

경성이었다. 조선인 유모의 손에 자라 조국이랄 것도 없는 관린이 유일하게 그리던 도시였다. 경성 땅을 밟은 순간엔 이곳이 제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개가 깊었다. 관린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까페 아네모네로 가 마담을 만나라는 지령도 잊고 신작로를 따라 걸으며 거리를 눈에 담기도 바빴다. 양장 차림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관린은 특히 신식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나치는 풍경마다 눈길을 머무르게 두며 하염없이 걸었다. 본정에 들어서면 아네모네의 큰 간판이 보일 거라 했는데, 관린은 본정까지도 가기 전에 발걸음이 멈췄다. 새삼스럽게 조선은행과 경성 우체국의 외관을 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보는 경성의 모습은 마냥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 화려함 이면에 자리하고 있을 것들을 잊지 말라던 대장의 말을 떠올렸다. 대장은 수 년 전 경성 우체국 앞에서 순사의 손에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방금도. 관린의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총을 맞은 것은 소복을 입은 어린 소녀였다. 소녀의 복부에 퍼지는 핏자국을 보자마자 관린은 달려갔다. 벌어진 상황 앞에서는 함부로 일에 휘말리지 말라던 지령도 잊어버렸다. 총에 맞은 소녀를 구해야겠단 다급함이 전부였다.

 

 

“朝鮮人か。 조선인인가?

 

 

관린을 불러 세운 것은 일본군 제복을 입은 사내였다. 오른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방금 저 소녀를 죽게 만든 총이. 관린은 눈에서 분노를 숨길 줄을 몰랐다.

 

 

“ あの少女とはどんな関係だ。 저 소녀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지?

 

 

사내가 총을 더 내밀었다. 관린은 그대로 굳어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관린은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열기가 남은 총구가 관린의 어깨에 닿았다.

 

 

“答える気がないようだな。 대답할 생각이 없나보군.

“たいへん失礼しました。私の使用人です。小さい頃、ひどい目ばっかりあったので誰か怪我をしたことを見ると、つい飛び込んでしまいますので。少尉に迷惑をかけてしまいました。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집 하인입니다. 어릴 때, 험한 꼴을 많이 봐서 누군가 다친 것을 보면, 그만 뛰어들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께 폐를 끼쳤네요.

 

 

갑자기 팔을 잡아온 사내는 자신의 뒤에 관린을 숨겼다. 관린보다 조금 작은 키에, 양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차림새만 봐도 여간 잘사는 집안의 도련님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관린은 와중에 발음이 비슷한 ‘소위’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는데, 그 일본인 소위가 별안간 관린 앞에 선 이 도련님을 보고는 놀라며 총을 거두었다.

 

 

“お見間違えて失礼を犯しました。 몰라봐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ちゃんとしつけをつけなかった私のせいです。これで失礼してもいいでしょうか。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제 탓입니다. 이만 물러가도 괜찮겠습니까?

“もちろんです。 물론입니다.

 

 

예의를 갖추어 말하고는 경례까지 했다. 관린은 이 양장 차림의 사내에 이끌려 경성 우체국을 지나왔다. 저대로 죽어갈 소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저렇게 죽은 조선인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니 손이 떨렸다. 사내는 아예 다른 길로 들어선 후에야 관린을 놔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마땅했지만 관린은 아무래도 소위가 이 사내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관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사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사내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치기 어린 눈빛을 숨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경성에서 살아남긴 어려울 것입니다.”

 

 

여유로운 말투였다.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사내에게 관린은 반감이 들었다. 사내의 말은 관린의 미성숙을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반박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쨌든 이 사내에 의해 구해진 것이 맞기에 관린은 가만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여기까지만 동행하도록 하죠.”

 

 

사내는 골목으로 빠졌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본정이었다. 관린의 시선 끝에는 아네모네, 하고 큰 글씨가 박힌 간판이 보였다. 관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까페 아네모네 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지령을 따라 서둘렀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생각하며 의자와 탁자가 부서진 채 굴러다니는 것을 보는데 2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동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달려와 관린의 손을 잡고 쪽지를 넘겨주었다.

 

 

“뭔가 꼬였어. 관린아 이제 너만 남았다. 네가 해야 돼.”

 

 

그렇게 말하는 동지는 오른쪽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관린이 본 경성의 첫 모습이었다.

 

 

 

 

K의 모더니스트

W. 럼

 

 

 

 

관린이 저택의 하인으로 들어온 지 벌써 사흘이었다. 사흘 간 관린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집 주인인 박 기준은 관린이 그 날 만난 사내의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경성 우체국 앞에서 관린을 구해준 사람이 앞장서서 일본에 머리를 조아리는 박 기준 회장의 아들이란 소리였다. 곧 나카무라라는 대위의 사위가 될 예정이고. 과연 소위가 그에게 경례를 할만도 했다. 관린은 사내가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회장의 아들인 지훈은 관린이 제 전용 사용인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말끝마다 관린아, 관린아. 들이지도 얼마 되지 않은 하인을 그렇게나 찾아댔다. 덕분에 관린은 한 시도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 그 ‘치기 어린 눈빛’을 본 지훈에게 이미 자신을 다 꿰뚫린 것 같았다. 지훈은 이상할 만큼 관린에게 친절했다.

 

복도 끝에 위치한 지훈의 침실에서 보는 풍경은 대문을 들어설 때 보는 것과 많이 달랐다. 마치 지훈만을 위해 꾸며진 공간 같았다. ㄴ자로 꺾인 지훈의 침실과 서재 사이로는 작은 못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매실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여기 매화꽃이 그렇게 예쁘다고, 지훈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고 보니 관린을 키운 유모도 매화가 좋다던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관린의 거처는 지훈이 직접 마련해주었다. 복도 끝에서 반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방이었다. 지훈의 방 바로 위인 셈이었다. 나무로 된 바닥은 관린이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렸다. 고요한 밤중에는 꽤 크게 들릴 소리였다. 지훈이 관린을 감시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관린은 저 도련님의 눈을 벗어나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절망감이 밀려올 때면 관린은 동지의 말을 생각했다. 이젠 나만 남았다. 내가 해야 돼. 그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훈이 서재에서 무언가에 집중한 틈을 타 관린은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 저택에는 방도 문도 참 많았다. 회장의 방은 관린의 거처와는 꽤 멀었다. 거실을 지나 관린은 회장의 방으로 가는 발걸음을 익혔다. 한낮에 일을 벌일 수는 없었으니 어둠속에서도 한 번에 길을 찾는 게 중요했다. 관린은 눈을 감고 복도를 걸으며 회장의 방까지 가는 걸음 수를 셌다.

 

 

“아버지 방은 왜?”

 

 

뒤에서 들린 지훈의 목소리에 관린은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관린은 뻣뻣하게 굳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

 

 

시치미를 떼려 했으나 당황스러움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지훈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관린을 보고 있었다.

 

 

“그냥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이쪽에는 아버지 방밖에 없는데?”

 

 

관린은 입술을 꾹 다물고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지훈은 뭐가 재밌는 것인지 관린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지훈은 격려라도 하듯 관린의 팔을 두드렸다.

 

 

“이렇게 표정을 감추지 못해서야 쓰겠니.”

 

 

마치 표정을 감춰야만 하는 사람임을 다 알기라도 하는 양.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관린은 도리어 답답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어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목소리 들으니까 좋구나. 적적한데 자주 말이나 걸어주련.”

 

 

무엇보다 관린이 신경 쓰이는 건 저 출처 모를 호의였다. 지훈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아 관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는 나카무라 대위의 딸이 들이닥쳤다. 들이닥쳤다는 그 표현이 딱 맞았다. 지훈은 표저에서 시종일관 불쾌함을 드러낸 채, 일절 숨길 줄을 몰랐다.

 

 

방문하기 전엔 연락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매번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잖아요. 백화점에 갔다가 당신 생각이 나서 만년필을 샀어요. 회장님께는 말씀드리고 온 거예요.”

고작 이런 걸로 여기까지?”

우리가 고작 이런 걸로 얼굴 보는 사이도 못 되나요? 그래도 내가 당신 약혼녀인데.”

당신 상냥함에 눈물이 날 것 같군.”

 

 

지훈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약혼녀가 건넨, 예쁘게 포장된 만년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관린조차 분위기가 지극히 살벌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어지는 침묵은 관린의 숨통을 조일 듯 무거웠다.

 

 

“도련님, 차를 내오라고 할까요?”

“필요 없어. 이 사람 금방 갈 거야.”

 

 

관린에게 보였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한껏 날을 세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만 살피는데 여자의 시선이 관린에게 닿았다.

 

 

못 보던 사람이네요. 새로 온 하인?”

 

 

자신을 향한 질문에 관린은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지훈은 그녀의 관심이 관린에게 향하는 것을 불쾌해 했다.

 

 

언제부터 내 하인에게까지 그렇게 관심이 많았소?”

당신 사람이 곧 내 사람이 될 건데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것이지요.”

그건 두고 볼 일이죠.”

어쩜 당신은 그렇게 한결같이 나에 대한 반감을 숨길 줄을 모를까. 내가 왜 그렇게 싫어요?”

“첫 번째, 당신 일본인이니까. 두 번째, 이 말도 못 알아들을 테니까.”

 

 

지훈은 대놓고 그녀를 비웃었다. 관린은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입술 안쪽을 깨물며 참았다. 별 말도 아닌데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인이 약이 올라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은 볼 만 했다.

 

 

조선말은 정말 들을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네요.”

그거 고맙군요. 지금 두 개 말했으니까 돌아가는 길에 잘 생각해 보도록 해요.”

좋아요. , 곧 아버지가 만주에서 돌아오세요. 조선에 있는 동안 식을 올리는 게 좋겠다고 회장님께 의견을 전했어요.”

졸업까지는 기다려준다는 게 조건이었을 텐데요?”

아네모네 일로 회장님도 마음을 돌리셨어요. 학문은 결혼한 후 일본에서 배우는 게 당신에게도 더 나을 거예요.”

 

 

아네모네. 별안간 튀어나온 그곳의 이름에 눈이 번쩍 뜨인 관린은 갑자기 상을 부서져라 내려치며 일어나는 지훈 때문에 더 크게 놀랐다. 내내 적당한 비웃음을 담아 대꾸하던 지훈이 무엇 때문인지 격노했다. 관린은 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거길 아버지가 어떻게……!”

그러시는 걸 보니 그곳에 무언가를 숨겨두긴 했던가 보군요. 여자?”

 

 

둘의 표정으로만 상황을 읽어봤을 때, 관린은 여자의 압승이라고 판단했다. 지훈은 주먹을 계속 고쳐 쥘 뿐 어떤 말로도 맞서지 못했다. 여자는 꽤 만족했다는 얼굴이었다.

 

 

かわいいぽっちゃんもうるからのための準備するの誠意せてくださいよ귀여운 도련님. 이만 갈 테니 다음번엔 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성의라도 보여 보세요.”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지훈은 초조한지 잘근잘근 손끝은 물어댈 뿐이었다. 관린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어 지훈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지훈은 꽤 심각해보였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관린에게 말했다.

 

 

“지금 나가봐야겠다.”

“지금 바로요?”

“본정에 가야 해. 너도 같이 갈 거니까 채비해.”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관린은 서둘러 지훈의 외투를 꺼내왔다. 그 후에 관린도 외출복을 입고 방에서 내려왔다. 지훈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낯선 모습이었다. 관린은 지훈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본정의 까페 아네모네로 향하는 길에 지훈을 마주쳤었다.

 

 

“도련님, 기사를 준비시킬까요?”

“아니. 걸어서 갈 거야.”

 

 

지훈은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표정이 어두워서 관린은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숨은 계속 차오르는데, 지훈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도착한 아네모네는 이미 죽어버린 장소처럼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탁자와 의자들이 여전히 쓰러져 있는 형태를 보니 그날 이후로 인적이 끊긴 모양이었다. 지훈은 관린을 문 앞에 두고는 익숙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지훈에게 이곳이 어떤 의미의 장소였을지, 무슨 일을 하던 곳이었을지 관린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지훈은 모자를 벗어던지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관린은, 제 생각이 맞다면, 지훈이 찾는 것이 어디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문 앞에 자신을 세워둔 지훈의 지시도 뒤로 한 채 계단을 올라가 지훈의 모자를 주워주었다. 그리고는 왼쪽 끝으로 가 벽에 걸린 암막 커튼을 젖혔다. 이미 다 걷힌 것처럼 보이던 커튼을 걷어내자 벽처럼 보이던 곳에 달린 문고리가 드러났다. 지훈에게 이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꽤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으나 관린은 제 직감에 맡겼다. 지훈이 숨겨둔 것이 이곳에 있다면, 제게 주어진 상황은 많이 바뀔 것이 틀림없었다.

 

구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숨겨진 방을 찾은 것보다도 그 문을 연 관린을 보고는 놀란 것 같았다. 관린은 꼭 지훈이 찾는 것이 이 방에 있기를 바랐다.

 

 

“책장을 살펴보십시오, 도련님.”

 

 

지훈은 방에 들어서서도 한참동안 관린만 보고 있었는데, 결국은 물건을 찾는 것이 먼저였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관린은 폐허가 된 아네모네의 이 방에서, 제 손에 쪽지를 쥐어주던 동지의 얼굴을 기억했다.

 

책장의 세 번째 칸에서 지훈은 원하던 장부를 찾았다. 관린은 언뜻 보고 그것을 장부라 착각했으나 실상은 문학 전집 비슷한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펼쳐진 페이지를 보고야 알았다. 책은 불타고 있었다. 딸깍, 하고 라이터를 덮는 소리가 나고서 관린은 상황을 받아들였다. 지훈은 초연한 표정으로 라이터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지훈은 책장의 단에 손을 얹고 물었다.

 

 

“관린아. 이곳에 온 적 있니.”

“도련님, 이게 무슨…….”

“대답해.”

 

 

지훈은 단호한 눈으로 보았으나, 결국 관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훈이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훈의 손에 의해 책장의 장부와 책들이 불이 붙은 자리 위로 쏟아졌다. 관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부정으로 받아들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불길은 거세졌다. 타고 있는 장부 중엔 관린과 관린의 동지들의 이름이 적힌 것도 있을 터였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관린은 망연자실하게 재가 되어가는 기록들을 보고만 있었다.

 

 

“무엇 하니, 어서 나오지 않고.”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곧 신분이 지워진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로 느껴졌다. 관린은 마지막으로 지장을 찍었던 작전일지가 타는 것을 발견하고는 넋이 나갔다. 지훈은 제가 쓴 모자를 관린에게 씌워주고는 관린의 손을 잡았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미련 두지 마.”

 

 

아마 불길은 아네모네를 통째로 삼킬 것이다. 지훈은 본정에서 한참 멀어질 때까지 관린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라서야 지훈은 관린에게 씌웠던 모자를 도로 가져갔다.

 

 

“오늘 일은 너랑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것이야. 누구에게도 보고해선 안 돼.”

“예.”

“정 집사에게도.”

 

 

지훈은 마치 관린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집사는 관린에게 유일하게 남은 연락망이었다. 그는 박 기준 회장을 쫓아 처리하는 일이 많았기에 막상 관린이 지훈을 보필하기 시작하고는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관린을 이곳으로 보낸 조장의 육촌으로, 그나마 도움을 구할 마지막 방법이긴 했다. 그런 정 집사를 하필 지훈이 꼭 집어 말했다. 관린은 정말 지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마지못해 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린은 지훈을 따라 태연한 태도로 걸어 들어갔다. 박 기준 회장은 마루의 소파에서 거만하게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훈을 봤다. 관린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본정에 다녀오는 길인 게로구나.”

“……시즈코 상을 위한 선물을 보러 백화점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다음번엔 자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달라고 하더군요.”

 

 

지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능청스레 회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지훈은 자신의 모자와 외투를 벗어 관린에게 건넸다.

 

 

“방에 가져다 둬.”

“예, 도련님.”

 

 

관린의 팔에 걸린 외투에서는 묘하게 탄내가 났다. 복도를 걷는 관린의 뒤로는 계속 지훈의 목소리와 회장의 것이 섞여 들렸다.

 

 

“못 보던 아이로구나.”

“일한 지 닷새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통 집에 계시질 않으니 얼굴 익힐 겨를이 없으셨나 봅니다. 일이 많이 바쁘셨는지요?”

 

 

지훈의 침실과 가까워질수록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관린은 최대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으나 웅얼거리는 불명확한 소리만이 들렸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 같더니 지훈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았다. 관린은 지훈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내 제게 보여주던 호의와 오늘의 단호함, 그리고 숨기지 않고 드러내던 적개심.

 

 

“뭐하니, 들어가지 않고.”

 

 

생각에 잠겨 복도 끝에서 발걸음이 멈춘 줄도 몰랐는데, 등 뒤에서 지훈이 불렀다. 관린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외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바닥을 때리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지훈이 그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관린은 그 소리의 정체가 지훈이 안주머니에 넣은 라이터인 줄 알았다. 라이터 치곤 무거운 소리임을 알았어도 생각은 그곳에서 그쳤다.

 

지훈이 외투 주머니에서 꺼낸 건 총이었다. 침실 문 옆의 서랍 첫 번째 칸에 넣고 잠갔다. 지훈은 관린의 손목을 잡고 손을 내밀게 하더니, 그 열쇠를 관린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나보단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구나.”

 

 

관린이 멍하니 열쇠를 내려다보고 서 있자 지훈이 관린의 손을 잡고 주먹을 말아 쥐게 했다. 제 손을 감싼 지훈이 두 손을 보고, 다시 지훈의 눈을 보고 관린은 혼란해졌다. 지훈의 눈을 읽고 싶었다. 단순한 신뢰라고 보기엔 그것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에 관린은 아네모네가 화염에 휩싸이는 꿈을 꿨다. 그 앞에는 지훈이 서 있었다.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깐 꿈에서 깼다. 소리는 아래층에서부터 들렸다. 그게 지훈의 목소리인 것 같아 관린은 몸을 일으켰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지훈과 정 집사였다. 둘은 대화를 마쳤는지 곧 집사도 돌아갔고, 관린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참 후에야 지훈의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잠기운이 가득한 관린은 그런 것도 모른 채 다시 잠에 빠졌다. 꿈에서 지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관린은 다음 날에도 여전히 한 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말을 걸어주련, 그 말이 일종의 허락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괜한 말을 잔뜩 늘어놓을 것 같았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먼저 말해주지도, 먼저 보여주지도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유모가 건넨 충고였다.

 

지훈은 하루 종일 서재에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인지 내내 조용했다. 관린은 그 근처에서 서성였다. 회장은 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그래봐야 나라를 팔아먹는 일일 것이다. 지훈과 몇 하인들만 남은 집은 지독히도 고요했다. 관린은 하릴 없이 툇마루에 앉아 꽃이 다 진 매실나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심심하면 못을 들여다보았다. 못에는 관린의 얼굴과, 그 위로 드리운 매실나무가 비쳤다. 언뜻 잉어처럼 보이는 것이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불현듯 못 안에 지훈의 얼굴이 함께 비쳐 관린은 하마터면 그대로 물에 얼굴을 처박을 뻔했다. 간신히 땅을 짚고 버텼다. 손을 털며 일어나는 관린을 보고 지훈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문득 지훈이 순수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외로워 보이지, 이 아이.”

 

 

‘이 아이’라며 지훈이 가리킨 것은 못 안의 비단 잉어였다. 관린은 지훈과 시선을 나란히 했다.

“가끔 얼굴을 비추어주려고 해도 나만 보면 도망가기 바쁘더라. 이 애마저 나를 피하는 걸 보면 나는 사람도, 사람 아닌 존재도 사귀긴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관린은 그런 말을 건네는 지훈이 유독 안쓰러웠다.

 

 

“그렇게 말하는 너마저 날 피하고 있지 않니.”

 

 

그렇게 말하는 눈은 제법 처량했다. 관린은 처음으로 지훈의 눈에 짙게 깔린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관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훈은 마당의 구석으로 가 뒷짐 지고 있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태웠다. 관린은 조심스럽게 지훈을 뒤쫓았다.

 

 

“글을 쓰셨습니까?”

“응.”

“태우시는 이유는 뭡니까?”

“어차피 누군가 읽어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야.”

“제게 보여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지훈의 잡고 있던 모서리까지 종이가 타들어갔다. 뚫어져라 관린을 보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관린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글을 아주 조금…… 읽을 줄 압니다.”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시무룩해진 관린의 얼굴을 보고선 지훈이 다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미소가 온화했다.

 

 

“내키면 네게는 읽어주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그런 지겨운 일상은 반복됐다. 관린과 지훈,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저택은 한없이 잔잔했고, 지훈은 글을 썼다. 관린은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이따금씩 하녀를 시켜 지훈에게 매실차를 대령하곤 했다.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면, 지훈이 쓰던 글을 읊어주곤 했다. 지훈이 들려주는 글들은 꽤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경성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던 이야기, 동무들과 독서 클럽을 가지던 이야기, 서재에 앉아 그저 글을 쓰는 이야기. 글을 다 읽고 나면 지훈은 묻곤 했다.

 

 

“재미없지?”

“아뇨.”

“내가 쓰는 글이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관린은 지훈의 글이 따분하다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더 솔직해지자면 지훈이 글을 읽어주는 시간이 따분한 적은 없었다.

 

일상이 지루하다 싶을 때는 시즈코, 지훈의 약혼녀가 이따금씩 찾아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곤 했다. 여전히 관린은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지훈과 시즈코 사이의 기 싸움을 구경하는 것은 지루함을 싹 가시게 했다. 한 번은 지훈이 시즈코에게 안경을 선물했다. 약혼녀의 도수 같은 것은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고, 시력 좋은 관린의 도수에 맞춰 대충 안경을 맞췄다. 그걸 선물하는 날 지훈이 했던 말이 가관이었다.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선물이오.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바로 옆에서 들은 관린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그런 날이면 지훈은 묘한 승리감을 관린과 나누곤 했다.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좀처럼 해가 나지 않아서 저택도 우중충하니 스산한 분위기가 돌았다. 빗소리에 발걸음도 말소리도 묻힐 것만 같았다. 지훈은 그런 날엔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지 관린은 내내 곁에 가까이 두었다. 글을 쓸 때만큼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더니 비가 오는 날엔 관린은 서재 안에 세워두었다. 어느새 서재 안에는 아예 관린이 앉을 자리까지 마련되었다. 관린은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다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집중한 채 글을 쓰는 지훈을 보곤 했다.

 

 

“악!”

 

 

우중충한 공기 때문에, 관린은 잠시 졸다가 지훈의 외마디 비명에 놀라서 깼다. 지훈의 왼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손날에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어쩌다 다친 건지 파악할 새도 없이, 치료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관린은 지훈의 손을 대충 붕대로 감고, 기사를 불러다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정작 다친 본인보다도, 관린이 더 지훈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지훈은 아픈 것도 잊었는지 무언가를 생각하는 데에 집중했다. 관린은 지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면 그가 낯설고 무서웠다.

 

병원에 도착하고, 지훈은 손을 몇 바늘 꿰매야 했다. 왼손을 가급적 사용하지 말고, 힘도 주지 말라고 의사는 당부했다. 왼손에 붕대를 두껍게 감은 지훈은 혼자서 하는 일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관린의 손을 빌리는 일이 잦아졌다. 당장 옷을 입고 벗는 일만 해도 그랬다.

 

지훈의 옷을 벗길 때, 그리고 벗은 몸을 씻길 때. 자신을 향해 뚫어져라 꽂히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지훈의 벗은 몸을 훑게 되는 시선을 멈추기 위해 관린은 꽤 애를 써야 했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게 되면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지훈은 손을 다치니 어린 아이라도 된 것 마냥 굴었다. 관린은 지훈을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목욕을 끝낸 후에, 잠옷을 입히려는데 지훈이 관린의 팔목을 느릿하게 주물렀다.

 

 

“관린아.”

“예, 도련님.”

“내 방에서 같이 자지 않으련?”

“예?”

 

 

관린은 놀라며 잡힌 팔을 빼냈다. 지훈은 다시 관린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꿈자리가 사나워.”

“잠드실 때까지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지훈은 입을 꾹 다물고는 불만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은 관린의 패배였다. 세상에 하인이 도련님을 이기려 들 수는 없었다.

 

 

“그럼 침구를 가지고 내려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지훈은 장에서 베개만 하나 더 꺼내고는 제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넓었다. 지훈은 먼저 이불 안에 들어가 제 옆자리를 팡팡 쳤다. 관린은 한숨을 푹 쉬고는 하는 수 없이 지훈의 옆에 들어가 누웠다.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이 바로 위가 원래 제가 눕던 자리일 것이었다.

 

 

“네가 와서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왜요, 도련님?”

 

 

관린이 지훈을 보고 모로 누우며 물었다.

 

 

“그냥. 네가 곁에 있는 게 참 마음에 들어.”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웃었다. 그 웃음이 자꾸 관린을 허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형이 죽고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그냥 이렇게, 누군가랑 가까이 있다는 게 참, 그리웠던 것 같아.”

 

 

쓸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감히 사정을 묻기도 어려울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지훈은 조금씩 관린에게 파고들었다. 관린은 감히 도련님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관린의 가슴께에 지훈의 이마가 닿았다.

 

 

“관린아.”

“예.”

“나는 네가 궁금해. 한 번도 네 얘길 들려준 적이 없구나.”

 

 

관린은 그 찰나에도 할 수 있는 말고, 할 수 없는 말을 생각했다. 만주와 조선인 유모. 유모의 남편은 독립 운동을 하다 작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제 자식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귀하게 자신을 키워준 유모 때문에 관린은 그 뜻을 이었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관린은 이제 제법 임기응변에 강했다.

 

 

“저는……. 고모 밑에서 자라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엔 옥천에서 살았는데 육촌 어르신을 따라 경성에 왔고…….”

“괜한 이야길 했구나.”

“아닙니다.”

 

 

관린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훈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둘의 말소리가 사라지자 방 안을 거센 빗소리가 채웠다.

 

 

 

 

 

지훈이 다쳤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것인지 시즈코가 호들갑을 떨며 찾아왔다. 지훈은 이제 그녀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듯이 굴었다. 혹은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든 끌어보려는 그녀에게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지훈은 예전처럼 시즈코의 말에 성의 있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즈코는 지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지훈은 시즈코를 앞에 두고도 관린과 이야기 하는 것을 즐겼다.

 

 

“나는 정말 항상 그런 생각을 하긴 하지만 특히 이 사람 볼 때면 아버지를 잘못 만났다 생각해. 이렇게 싫다는데도 굳이 이 여자와 결혼시키려는 이유가 뭘까.”

“회장님께서는 언제나 도련님을 위한 거라 말하지 않으십니까.”

 

 

시즈코를 뻔히 앞에 앉혀두고도 지훈은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험담을 늘어놓았다. 관린도 시즈코를 상대로 승리감을 느끼는 게 때론 통쾌했기 때문에 지훈에게 곧잘 대답했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을 시즈코가, 웬일로 차분하게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선말을 배워보려고요.”

당신이 왜.”

당신 하는 게 좋아보여서요.”

언젠 죽이고 싶다고 하더니?”

사람 마음은 바뀔 수도 있는 거죠.”

 

 

시즈코는 지훈이 종종 짓곤 하는 여유 있는 미소를 따라했다. 관린은 그 얼굴이 참 재수 없다 여겼다.

 

 

그리고 당신, 저 하인을 아주 총애하나 봐요. 아주 질투가 날 정도야.”

당신이 신경 쓸 만 한 사람 아닙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당신과 결혼할 사이에요. 당신 사람에게 정도는 관심 가질 수 있어요.”

허튼 짓 하지 마시죠.”

그럼 또 봐요, 관린.”

 

 

관린. 시즈코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관린이 기억하기론, 그녀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었다. 지훈은 또 분하다는 표정을 했다. 지훈은 그날 유독 관린을 빤히 보고 있는 때가 많았다. 무슨 생각하시냐며 관린이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 떼고는 곧 다시 관린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그 얼굴이 꽤 심각해서 관린은 지훈이 걱정되었다.

 

그 주에만 두 번 시즈코가 지훈을 찾아왔다. 시즈코는 들어오던 순간부터 승리를 확신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문이 잦군요, 시즈코.”

내 이름을 부를 줄도 아시네요, 지훈. 당신이 지금까지 나카무라가 제 이름인 줄 알까봐 걱정했어요.”

용건만 말해.”

당신이 흥미로워할 만한 소식을 몇 개 주웠어요.”

 

 

아-노-코-노-코-토(あの子のこと). 시즈코는 관린을 빤히 보며 무어라 덧붙였는데, 관린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일본어를 조금도 못하는 게 후회된 적은 처음이었다.

 

 

“관린아. 차 좀 내올래?”

“……네.”

 

 

한 마디로 자리 좀 비켜달라는 얘기였다. 관린은 자리를 떠야만 하는 게 분했으나 지훈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주방에서 차를 타게 시키고, 나무 쟁반에 올려 다시 마루로 나왔는데 둘은 자리를 옮겼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관린은 지훈을 찾아서 저택 안을 살폈다. 지훈과 시즈코를 다시 발견한 것은 뒷마당의 정원이었다. 관린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둘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관린은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관린은 툇마루에 쟁반을 내려두고 자리를 떴다.

 

시즈코가 간 후에도 관린은 지훈 앞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괜한 원망이 자꾸만 피어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지훈은 관린을 찾으려는 건지 저택 안을 계속 돌아다녔지만 그렇다고 관린의 이름을 먼저 부르지는 않았다.

 

밤에 되어서야 지훈은 관린을 방으로 불렀다. 지훈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에 이토록 거부감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훈은 왼손의 붕대를 얼마 전에 갈았다. 찢어진 환부가 붙기는 했지만 상처가 완전히 아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다. 관린은 지훈에게 잠옷을 입히고는 침실을 나서려 했다.

 

 

“화가 났니?”

“제가 도련님께 화가 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내 곁에 한시도 머물지 않았잖아.”

“부르지 않으셨잖습니까.”

“지금도 나를 보지 않고 있구나.”

 

 

지훈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관린이 지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관린을 안았다. 관린의 팔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었다. 차마 지훈을 감쌀 수는 없어서 괜히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관린은 곧 자신의 허리를 감싼 지훈의 팔을 떼어냈다. 다시 뒤를 돌아 문고리를 잡는데 지훈이 오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자.”

“올라가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여기서, 내 옆에서 자라고 했어.”

 

 

그 말이 너무 단호해서 관린은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관린은 문고리를 놓았다.

 

 

“제가 없으면 불안해요?”

“……어떤 대답을 원해?”

 

 

마주보고 누워서, 관린은 달빛을 받은 지훈의 얼굴을 보았다. 배신감을 느꼈을 건 관린 자신인데, 지훈이 괜히 더 억울하고 서럽다는 얼굴이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린은 점점 시선이 지훈의 입술로 향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 그리고 혀. 문득 낮에 시즈코와 입을 맞추던 지훈의 모습이 떠올라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지훈은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관찰했다. 지훈의 다리가 관린의 무릎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해우이라는 것을 관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건 미친 짓이다, 이건 정말로 미친 짓이다. 관린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그 밤은 유독 잠을 깊이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거세게 뛰던 심장의 움직임도 몸이 기억했다. 보통은 관린이 먼저 일어나 일과를 준비하는 편이었는데,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지훈이 없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이었다. 관린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지훈을 찾았다. 침실을 나오자마자 뒷마당에 서 있는 지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훈은 담장 너머를 보고 있었다. 왼손의 상처가 터진 건지 붕대는 이미 완전히 붉게 물들고 손을 타고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관린은 맨발로 뛰쳐나가 지훈을 붙잡았다.

 

 

“도련님, 병원에 갑시다.”

“일어났구나.”

 

 

지훈은 또 그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괴리감이 들었다. 새벽안개 속에 서 있는 지훈의 모습이 그랬다. 관린은 재빨리 붕대를 새로 가져와 지혈을 하고는 날이 완전히 밝자마자 지훈을 데리고 경성 시내의 병원으로 갔다. 상처가 어찌나 크게 벌어졌던지 아예 처음부터 다시 봉합을 해야 했다.

 

 

“관린아.”

“예.”

 

 

대답하는 관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에 주었던 서랍 열쇠, 잘 가지고 있지?”

 

 

갑자기 그것을 왜 묻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관린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다였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지훈은 관린을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지훈은 관린을 문에 기대게 하고는 입을 맞췄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관린도 지훈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벌리고, 끌어안았다.

 

 

 

 

관린과 지훈의 관계도 무언가 바뀌기 시작하는 만큼, 상황도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박 기준 회장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늘 함께하던 정 집사를 어째서인지 자꾸 찾았다. 저택의 하인들마다 대답했다. 며칠 전부터 집사 어르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관린도 그의 행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 집사는 곧 뒷산에서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그 과정에서 오직 지훈만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은 채 태연하게 굴었다. 관린은 문득 어느 새벽에, 지훈이 담 너머를 보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박 기준 회장은 어딘가 초조해졌는지 지훈을 쪼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나카무라 시즈코와의 결혼을 재촉했다는 뜻이다. 지훈은 아버지와 있는 시간을 눈에 띄게 불편해 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훈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훈이 대노하며 날뛸 줄 알았던 관린의 예상과는 달리, 정작 지훈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관린은 그럴수록 더 불안했고, 지훈과 한시라도 더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박 기준 회장이 본격적으로 지훈의 결혼 준비에 뛰어들면서, 관린은 완전히 그 일에서 배제되었다. 더군다나 지훈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관린을 밤에도 찾지 않았다. 관린이 은근히 같이 있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쳐도 어서 올라가 보련, 하는 말로 관린을 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관린은 지훈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다보니 홀로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 지훈이 없는 저택을 혼자 지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지훈이 언젠가 건네주었던 서랍의 열쇠를 찾아보았다. 관린은 처음 이 저택에 오던 날, 입고 왔던 외투 주머니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다 낡은 외투를 보니 만주에서 경성까지 오던 길이 생각났다.

 

관린은 방에서 내려와 서랍장 앞에 섰다. 왼쪽 첫 번째 칸, 열쇠를 돌려 여는데 지훈이 넣어두었던 총 밑으로 하얀 노트 같은 것이 있었다. 관린은 그것을 꺼내 들었다. 습작, 표지 위로 큰 글씨가 적혀 있었다. 관린은 글을 거의 읽을 줄 모른다며 지훈을 속였던 게 생각이 났다. 지훈의 노트를 펼쳤는데, 대부분의 페이지가 찢겨나가 있었다. 아마 지훈이 태워버렸던 페이지들일 것이다. 쭉 넘기다가, 관린은 온전하게 남아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머니, 부디 그 침실에서 또 다시 사람을 죽게 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관린은 총과 노트를 다시 넣어두지 않았다. 서랍을 잠그지도 않았다. 관린은 방으로 올라가 두 손으로 총을 꼭 쥐고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지훈은 박 기준 회장과 함께 아주 늦게 들어왔다. 좋은 자리라도 있었는지 회장은 만취한 상태였다. 지훈은 취한 회장을 부축해 방으로 들여보내고, 다시 복도의 반대편 끝으로 걸어왔다. 관린은 지훈이 서랍이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관린은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지훈의 방문은 굳세게 닫혀 있었다. 관린은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는 이내 조장의 지령을 되새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민족을 배신한 박 기준 회장을 처단한다. 아직 어린 관린에게는 무거운 임무였다. 그러나 관린이 해야 했다. 관린은 태세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회장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관린은 고개를 디밀어 확인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지훈은 울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아버지의 피를 잔뜩 묻힌 채. 관린은 서둘러 방에 들어가 지훈을 데리고 나왔다. 지훈의 손을 잡고 달려서 뒷마당으로 향했다. 지훈은 완전히 넋이 나간 건지 아무런 행동도 못했다. 관린은 못 앞에 지훈을 앉히고, 지훈의 손을 씻겼다. 오른손에는 펜촉을 날카롭게 간 것 같은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회장의 숨통을 찢었을 것이다. 관린은 지훈이 쥐고 있던 만년필도 못 속에 버렸다. 증거를 인멸해야 했다.

 

집 안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지훈과 관린이 뛰는 소리에 누군가 깬 것이 분명했다. 손에 묻은 피가 다 씻겨 나가자 지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관린아…….”

“네 도련님.”

 

 

지훈은 관린을 데리고 담장의 구석으로 갔다. 아래로 돌이 잔뜩 놓여 있어 그 위로 올라간다면 담을 충분히 넘을 높이가 됐다.

 

 

“이건 네가 한 것이다, 관린아.”

“……예, 도련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부디 만주로 무사히 돌아가련.”

 

 

만주를 말하는 지훈에 놀라 관린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곧 저택에 불이 켜지고, 관린은 더 지훈과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관린이 서둘러 담을 넘도록, 지훈은 밑에서 받쳐 주었다. 관린은 마지막으로 지훈의 얼굴을 눈에 담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외투 안에 지훈의 습작을 꼭 품은 채로, 뒷산을 달려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