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 Step Jump
W. 프라페

 

 

 

“관린아, 너 키스해 본 적 있어?”

 

맑은 날이었다. 떨어지는 나뭇과 빛바랜 잔디가 선선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교정 한 구석 화단의 녹슨 울타리 너머, 제멋대로 자라난 정원수 사이에 벤치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긴 의자에, 나로부터 꼭 한 사람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은 그가 물었다.

 

“네?”

“키스, 해봤어?”

 

빨대로 쭉쭉 빨아올리고 있던 망고주스가 목에 걸려 강렬한 역회전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들어갔던 곳과 다른 곳으로 도로 튀어나오는 대참사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한참을 켁켁대야 했다. 천천히 마셔야지, 관린아. 제 몫의 딸기우유를 다 마신 그가 자못 도도한 태도로 꺼내 준 손수건을 입가에 대고, 나는 한 쪽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론데. 넌 해봤을 거 같아서.”

 

아, 부모님은 제외야.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하여간 가까운 친척도 안 돼. 손가락을 꼽아가며 진지하게 덧붙이는 소리에 겨우 가라앉은 기침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두 번째로 호흡을 갈무리하며 방금 들은 말을 천천히 해석해 보았다. 키스를, 해 봤냐고? 내가? 그게 왜 궁금해? 멍청한 심장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건 왜 물어봐요?”

“난 안 해 봤거든.”

“그래서요?”

“무슨 느낌이야?”

 

그냥, 궁금해서. 말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정말 순수한 호기심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얼떨결에 달아오르려 했던 머리가 빠르게 실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지훈이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진짜로 키스가 무슨 느낌인지 궁금해지신 모양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해 볼래요?”

 

진짜로 한숨만 내쉬려고 했다. 정말이다. 그러나 내 입이 함께 뱉어낸 건 방금 박지훈의 발언에 뒤지지 않는 미친 소리였다. 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랑?”

“여기 선배랑 나 말고 다른 사람 있어요?”

“없긴 하지?”

“궁금하면 해 보면 되죠. 안 될 게 뭐 있어요.”

“어…….”

“아니, 안 해보면 모르는 거잖아요, 뭐든.”

“그런가?”

 

그렇기는 개뿔. 그러나 대충 주워섬기는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박지훈 앞에서, 내 머리는 앞뒤로 왕복 운동을 하느라 바빴다. 그래, 알았어. 그는 사뭇 진지해진 눈빛으로 결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좋아, 하자.”

“지금? 여기에서요?”

“네가 하자고 했잖아.”

 

안 할 거야? 조금 뾰로통해진 눈초리가 날아와 박혔다. ……난 도저히 이 사람한테는 이길 수가 없다. 이번에는 정말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방금 내가 말했던 대로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가을의 날씨는 좋고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학교 구석에 처박힌 오래된 화단이란 우리 학교의 불량학생들이 선호하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명령을 내렸다.

 

“눈 감아요.”

 

지훈은 순한 아이처럼 내 말을 따랐다. 팔랑거리던 속눈썹이 발그스름한 볼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드럼처럼 쾅쾅 울리고 있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는 들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희미한 숨결이 코를 간질인 다음 순간, 말캉하고 따뜻한 것이 입술에 부드럽게 눌렸다. 머릿속에서 폭죽 비슷한 것이 터졌다.

 

정말로, 이건 어린 아기에게 해 줄 법한 입 쪽 뽀뽀에 지나지 않았다. 지훈의 입가에 희미하게 감도는 우유 냄새가 더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짧디 짧은 시간 동안 얄팍한 이성이라도 잡고 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야 했다.

 

키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그것이, 우리의 첫 키스였다.

 

 

*

 

 

박지훈을 처음 본 장소는 입학식 날의 강당이었다. 그는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연단에 선 학생회장이었고, 나는 아침 내내 밍기적대다 결국엔 고등학교 첫 날부터 지각을 해 버린 싹수 노란 신입생이었다. 선생님들의 눈총에 떠밀려 간 강당의 맨 뒤에서는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밝은 목소리에 또박또박하고 정확한 발음은 뻔하고 지루한 신입생 환영사를 내 귀에 쏙쏙 꽂아 넣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앞으로 잘 부탁해요!”

 

원고지를 접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여기가 무슨 아이돌 공연장이냐. 무심코 나온 코웃음 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주변에 서 있던 교사들의 눈길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느릿느릿 손뼉 치는 대열에 합류했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고등학교 첫 날이 벌써부터 피곤했다.

 

알고 봤더니 학생회장, 3학년 3반 박지훈은 학교의 아이돌이 맞았다. 집안도 좋고 성적도 좋으며 얼굴 역시 진짜 아이돌보다 더 곱게 생겼지만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천하에 다시없는 철벽이기까지 하다는 그는, 당연한 결과로 선생님들의 신뢰와 학생들의 선망을 넘치도록 받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세상 살기 편하겠네. 소문에 대한 내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어차피 상관없는 사람인데 알아서 뭐 해, 나는 한껏 시니컬한 태도로 그를 의식 저편으로 몰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소위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남들보다는 살짝 늦게 찾아온 사춘기엔 학교생활을 포함한 세상만사가 의미 없고 무료했다.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맨 먼저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키는 멀쑥하게 먼저 커 버린 아들이 뒤늦게 까칠해지자 부모님은 꽤 많이 당황하셨다. 그러면서도 당신들의 아들이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엇나가진 않을 거라는 순수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그들 앞에서, 차마 대놓고 비뚤어질 수는 없었던 나는 온갖 핑계를 동원해 수업 출석률을 적당히 낮추는 정도에서 내면의 불량 청소년과 타협을 맺었다.

 

내가 박지훈과 만난 것도, 그렇게 적당히 흘려보내던 어느 봄날의 오후였다.

 

매번 양호실에 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복도를 배회하다간 누군가에게 잡혀 갈 것이 뻔했다.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 교정 끄트머리 건물의 뒤편 화단까지 갔다. 화단이라고 부르기엔 꽃은 없고 잎이 무성한 나무뿐이었지만, 어쨌든 무릎 정도까지 오는 녹슨 울타리 너머를 들여다보자 뜻밖에도 숨겨진 벤치가 있었다. 앉거나 누우면 나무에 쏙 가려지는 게, 마치 나 같은 수업 거부자를 위해 신이 만들어 둔 선물 같았다.

 

“1학년이네? 거기서 뭐 해?”

 

거기에 누워 반쯤 잠이 들어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서 한쪽 눈만 뜨자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내 명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나 흐릿한 의식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여과되지 않은 불퉁한 목소리를 그대로 내보냈다.

 

“자는데.”

“수업 안 들어가?”

“어.”

 

다시 눈을 감았다. 선생님이면 몰라도, 선배나 동급생이면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손가락이 어깨를 꾹꾹 찔렀다. 무시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만큼 집요한 손길이었다.

 

“1학년 라이관린, 일어나.”

“…….”

“일어나라니까.”

“아, 뭐야.”

 

이번엔 두 눈을 떴다. 당연하지만 한껏 찌푸린 채였다. 그러나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명찰이 이번에는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으로 수놓아진 것을 보니 3학년이었다. 3학년, 박지훈. 익숙할 만도 한 이름이었다. 하필 걸려도 학생회장한테 걸려서, 젠장. 거친 말과 욕의 중간 단계에 있는 단어들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는데……요.”

“여기 내 자리야.”

“네?”

“내 자리니까, 좀 비켜 줄래?”

 

평범한 훈계 대신 들려온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 텐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학교가 선배 거예요?”

“아니?”

“아니면 선배가 이 벤치 기증했어요?”

“그것도 아닌데.”

“그런데 여기가 왜 선배 자린데요?”

“왜냐하면 내가 너보다 먼저 발견했거든, 여기.”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뻔뻔하고 해맑았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게 뭐지, 학생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말에 반박할 논리를 백 가지도 넘게 궁리해 둔 지금의 내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역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긴 했다. 나는 그 뒤로도 박지훈의 웃는 얼굴을 앞에 두면 종종 말 잃은 멍청이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

 

 

사람을 소문만으로는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를, 나는 박지훈을 보며 뼛속 깊이 깨달았다. 내 상상 속의 전교 회장은 훨씬 더 현실적이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부족할 것이 없고 늘 자신감에 차 있으며 모든 것에 완벽한, 소위 말하는 재수 없는 타입의 사람. 그러나 진짜 현실의 그는 그런 한 두 마디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날 이후로도, 나는 계속 그 장소에 찾아갔다. 더 나은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반쯤은 오기였다. 벤치의 한쪽 끝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입을 비죽 내밀며 궁시렁대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별 말 없이 다른 쪽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수업 안 들어가?”

“그러는 선배는요.”

“3학년은 원래 자습이 많아.”

“여기가 3학년 자습실인가 봐요? 그걸 몰랐네.”

 

대놓고 비꼬는 말투에 지훈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 학생회장이거든. 다 아는 이야기를 뭘 새삼스레 하나 싶어 똑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고등학생에게 일 더하기 일을 설명해야 하는 선생님 같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교실에선 집중 안 되니까 다른 데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다들 봐 줘.”

“……와. 권력 남용.”

“후배야, 너 진짜 권력 남용하는 게 뭔지 아직 못 봤구나?”

 

학생부 선생님이랑 면담 한 번 주선해줄까?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만드는 그의 미소는 어딘가의 왕자님처럼 오만하고 당당했다. 내 침묵을 피식 웃어넘긴 지훈은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너, 그래도 웬만하면 수업은 들어가.”

“왜요.”

“곧 여름이잖아.”

 

엄청 더울걸. 책장을 넘기며 가볍게 던지는 말은 여느 학생회장이 할 법한 모범적인 충고는 아니었고,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뻔한 훈계가 돌아올 줄 알고 지레 불퉁해져 있던 내 볼은 허탈한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햇살이 비치는 옆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장난처럼 묻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배는 날 더워지면 여기 와요, 안 와요?

 

결국 묻지는 못했다. 첫 데이트를 신청하는 소년처럼 갑자기 굳어 버린 멍청한 입술 때문이었다.

 

 

*

 

 

박지훈의 말대로 날은 금방 더워졌다. 불성실한 학생처럼 얼굴만 잠깐 내비추고 사라진 봄 뒤로, 성실한 여름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볼을 살살 쓰다듬던 햇살은 이제 따가운 가시로 변해 살결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확실히 예전처럼 벤치에 드러누워서 꾸벅꾸벅 졸 날씨는 아니긴 했다. 심지어 난 더위에 약한 편이어서 더 그랬다.

 

그렇다고 거기에 안 갔냐 하면, 아니었다. 첫 중간고사가 지났을 즈음, 박지훈의 충고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나는 적어도 수업에는 꼬박꼬박 들어가게 되었다. 대신 점심시간마다 출석 도장을 찍었다. 한창 더운 시간에 멀고 먼 1학년 교실에서 굳이 굳이 땡볕 아래로 찾아와 널브러져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난 박지훈이 미개한 중생을 바라보는 표정과 함께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안 왔으면 나도 안 갔을 텐데, 하여간 후배의 건전한 학교생활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선배였다. 라이관린 넌 친구도 없냐, 사실도 모르면서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에게 똑같은 말을 돌려줬다가 한 대 얻어맞을 뻔 했다.

 

“야, 근데 그거 맛있어?”

 

매점에서 손에 잡히는 걸로 대충 끼니를 때우던 나에 비해, 그는 늘 도시락을 들고 왔다. 무슨 요리책에 나올 것처럼 화려한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이던 박지훈은, 곧 내가 먹던 빵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더위에 녹았는지 줄줄 새어나오는 크림을 낼름 핥아 올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맛있어요.”

“무슨 맛인데?”

“……이거 안 먹어 봤어요?”

“응.”

 

내가 먹고 있던 건 흔하디흔한 크림빵이었다. 이 학교 매점의 영원한 고정멤버라 3학년쯤 되면 크림 냄새만 맡아도 고개를 저을 정도라던데, 이걸 안 먹어봤다고?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자 지훈은 입술을 삐죽댔다.

 

“나 매점에서 뭐 안 사먹어. 건강에 안 좋잖아.”

“……무슨, 고등학생 맞아요?”

 

사실 불로장생 노리는 80대 노인 뭐 이런 거 아니죠? 진심이 섞인 의문에는 답 대신 볼록해진 뺨과 뾰족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너 진짜 말 그렇게 할래, 미워 죽겠어. 볼을 한껏 부풀리고 말하는 그는 좀, 어른들이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아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정말 박지훈은 소문대로, 혹은 소문 그 이상의 도련님이었다. 도시락도 그렇고 간식도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싸주시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따로 뭘 사 먹어 본 적이 없다는 말에 나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정말로 귀한 집 자제분이었구나. 처음으로 그에 관한 소문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나 한 입만.”

“네?”

“한 입만 주면 안 돼?”

 

어릴 적 봤던 어느 애니메이션의 고양이처럼, 그는 나를 향해 크고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 당황스러워 눈을 마주 깜빡이자, 금방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울상이 되었다. 안 줄 거야? 이건 솔직히 내가 아니라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가 와도 이길 수 없는 얼굴이었다.

 

“……여기요.”

“고마워!”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내 손에서 빵을 받아든 지훈은, 냉큼 끝 부분을 왕 베어 물었다. 낯선 맛을 음미하듯 눈이 몇 번 깜박였다. 입술이 말라가기 시작하던 중, 그의 눈꼬리가 입술과 함께 한껏 휘어졌다. 이상하게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맛있어요?”

“응!”

 

한 입이라고 했던 약속은 잊은 것 같았지만, 한껏 행복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서 먹을 걸 뺏어 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어버리자 그는 당근을 앞에 둔 토끼처럼 본격적으로 빵을 파먹기 시작했다. 코끝에 하얀 자국이 남은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신나게 오물거리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엄지손가락 끝이 지훈의 코끝을 훔치고 지나갔다.

 

“조심해요, 선배.”

“어?”

 

그에게서 나에게 옮겨 온 하얀 자국에서는 방금까지 입에서 감돌던 것과 같은 달콤한 맛이 났다. 훨씬 더 희미하지만 오래 혀끝을 맴도는 그 맛을 음미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관린아, 너 더워?”

“네? 아, 음, 좀.”

 

그러게, 여기 덥다 그랬잖아.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가볍게 나무랐다. 나는 피가 몰린 얼굴을 한 손으로 감췄다. 이래도 되는 걸까, 두 살이나 위의 선배가 음식 먹는 걸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내가 무슨 고뇌를 하고 있든, 옆에 앉은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응, 맛있다. 이거 맛있어. 흥얼대는 노래하는 목소리가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그 뒤로 내가 매점에서 파는 온갖 종류의 간식을 그에게 갖다 바쳤다는 사실은 굳이 남에게 말하고 싶진 않다. 무슨 빵셔틀도 아니고, 모양 빠지게. 하지만 박지훈이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얌냠냠 먹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웠을 것 같다. 절대 나만 그렇게 생각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나만 봐서 다행이다.

 

자연스럽게 내려진 결론이 말하는 건 하나였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

 

 

내 마음이 어쨌든, 우리의 관계는 그냥 그 정도였다. 땡땡이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보통 선후배 사이보다는 조금 더 가깝지만 그렇다고 선후배 말고 다른 말로 칭할 이유도 없는 관계. 거기에 사춘기의 필수 요소라는 짝사랑이 곁들여진 건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나는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갔다는 부잣집 도련님을 생각하며 방구석에서 뒹굴었다. 수험생이 팔자도 더럽게 좋을 일이었다. 그가 없는 한국에서는, 원래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와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흥미가 떨어졌다.

 

지금쯤 박지훈은 어디 별장에 딸린 해변에서 놀고 있을까, 아니면 파라솔 밑에서 늘 보던 책이라도 읽고 있을까. 못 만나면 덜 좋아질 줄 알았는데 완전 틀린 생각이었다. 따가운 햇살, 후덥지근한 바람, 녹아서 떨어지는 아이스크림, 뭘 보고 뭘 먹어도 박지훈만 생각났다. 중증이었다.

 

내 생에서 가장 길었던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마주친 지훈은 살짝 탄 얼굴로 기념품이랍시고 이상하게 생긴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동그란 머리에 톡 튀어나온 볼이 빨간 인형이었다. 절대 어딘가에 달고 다닐 일은 없을 것 같은 디자인이었지만 여름 내내 모나 있던 마음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이 사람도 내 생각 했겠구나, 길고 길었던 여름 동안 적어도 한 번은. 대책 없이 기뻐지는 기분에 따라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와, 요새 누가 선물로 열쇠고리를 줘요? 하여간 취향 올드해.”

“야, 싫으면 내 놔.”

“싫다고는 안 했는데.”

“이게 진짜.”

 

혹시나 진짜 뺏어갈까 봐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익숙해진 뾰로통한 얼굴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 미쳤나 봐. 왜 이렇게 귀엽지? 이거 말고 박지훈 달고 다니면 안 되나? 늦더위를 정통으로 먹은 것 같은 본심이 코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사실 맘에 드는 거지?”

“하하하.”

 

적당히 마주 웃어주며, 이제는 좀 서늘해진 바람에 무심코 팔을 쓸어 올렸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 얼굴을 더 볼 수 있을까.

 

날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와 내가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한 학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부분이 말라가는 잔디를 바라보며, 나는 틈틈이 센티멘털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

 

 

그러던 와중에 그걸 한 거다. 뽀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입술과 입술의 접촉. 센티멘털이고 뭐고, 내 멘탈은 모래알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박지훈은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 키스해 본 적 있어?

 

있을 리가. 죄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웃음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경험도, 눈꺼풀이 깜빡이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도, 누구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을 피부의 접촉에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것도. 그 밤 내내 코끝에는 달콤한 딸기 우유 냄새가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밤새 박지훈의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 눈꺼풀은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래도 반쯤 눈을 감은 채 학교에는 갔다. 죽을 만큼 졸렸지만, 오늘 박지훈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았다. 조금만 있다 나가야지. 그렇게 기절하듯 책상에 엎드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점심시간은 반 넘게 지난 뒤였다.

 

“아, 젠장.”

 

생각보다 먼저 다리가 움직였다. 교실 문을 밀어젖히고 허겁지겁 달려가다, 휙 몸을 꺾어 매점에 들어가 손에 닿는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너무 늦었나, 시간 아깝게 내가 왜 잤을까. 꽉 쥔 주먹 안에서, 비닐 포장된 초콜릿 바만 속절없이 우그러들었다.

 

한창 축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을 빙 둘러 달렸다. 아직 따가운 햇살에 땀이 송송 맺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펑 터질 것처럼 느껴질 때쯤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있겠지, 있을 거야. 매일 있었잖아. 왜 없겠어. 같은 말을 자기세뇌처럼 되뇌는 이유를 나는 애써 모른 척 하려 했다.

 

유난히 마음이 급해서였을까, 평소에 잘만 뛰어넘던 울타리에도 발이 걸려 넘어졌다. 흰 셔츠에 초콜릿빛 물이 들었다. 쪽팔리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나를 보고 있던 지훈의 웃음소리가 들려올까봐 귀를 쫑긋 세운 채로.

 

“…….”

 

풀밭을 버석이던 발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화단에 인기척은 없었다. 텅 빈 벤치 앞에서,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한숨을 내뱉었다.

 

 

*

 

 

 

다음 날도 박지훈은 그 곳에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아니, 뭐야. 그렇게 피할 일이야? 입술 한 번 부빈 게 뭐라고, 그렇게 싫었어? 나는 텅 비어버린 딸기우유팩을 한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처음엔 시무룩하던 마음이 약간의 분노와 오기로 슬금슬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좋아 죽을 만큼 멋있는 키스였냐 하면, 그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다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고, 원래부터 굵은 편도 아니었던 내 인내심은 마침내 뚝 끊어졌다. 늘 외딴 구석에서만 남몰래 만나는 통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박지훈도 이 학교 학생이었다. 1학년과 3학년의 건물이 달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해도, 맘만 먹으면 못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죄송한데, 박지훈 선배님 좀 불러 주시겠어요?”

“어? 어, 그래. 잠깐만.”

 

4교시 내내 시계를 노려보다, 끝나자마자 3학년 건물로 달려갔다. 본격적인 대입 준비에 들어간 3학년 교실 앞 복도는 점심시간이 시작했는데도 조용한 편이었다. 교실 문에서 나오는 선배를 아무나 붙잡고 부탁하자, 이름 모를 선배는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다시 교실로 들어가 주었다. 나는 초조하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1학년에 시선이 좀 몰렸던 것도 같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훈아, 누가 너 찾아.”

“누구?”

“몰라, 1학년이던데. 키 크고 잘생긴.”

“……나 없다 그래주면 안 돼?”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오랜만에 듣는 박지훈의 목소리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반가웠지만, 내용은 그렇지가 못했다. 참다못해 교실 문을 밀어젖혔다. 의문에 가득 찬 낯선 눈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뒤에서 두 번째 줄, 가장 창가 쪽.

 

“지훈 선배.”

“……아.”

“바빠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의 앞에 섰다. 늘 옅은 홍조가 어려 있는 뺨은 전보다 조금 여윈 듯도 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데구루루 굴렀다. 초조하게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손등을 건드리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책상 위로 몸을 기울인 채, 나는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움직여 말을 꺼냈다.

 

“선배, 나랑 얘기 좀 해요.”

“……지금?”

“네, 지금.”

 

가요. 우물쭈물대는 손목을 잡아 올리자 그는 생각보다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박지훈도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뒤를 돌아볼까 했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손목을 쥐었던 손을 고쳐 잡았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그의 손은 그 때의 입술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우리의 벤치에 도착해서야 나는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지훈은 사람을 본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나에게서 먼 쪽의 끄트머리에 쪼르르 가 앉았다.

 

“왜 거기 앉아요?”

“……어.”

“네?”

 

별 뜻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잘 들리지 않아 가까이 다가갔더니,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왜 이러는 거야.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얼굴이 보이지가 않았다. 아예 그 앞에 쭈그리고 앉자 이번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좀 더 명확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싫어.”

“…….”

“너 보기 싫어.”

 

충격이었다. 싫어. 겨우 그 한 마디에,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싫어? 뭐가 싫다고? 내가?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우르르 밀려나오던 말과 전하고 싶은 감정들이 저들끼리 뒤죽박죽 섞여들었다.

박지훈이 무언가를 싫다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점에서 파는 엄청 시큼한 캔디를 입에 넣어 주었을 때도, 그는 미간을 찌푸릴 뿐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박지훈에게 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몰랐다. 지금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일단 그의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았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선배, 나 좀 봐요. 다시 강하게 손목을 쥐었지만 그의 손은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 싫어요?”

“…….”

“아니면, 뭐야. 키스했던 게 싫었어요?”

“…….”

“궁금하다고 했으면서.”

 

목소리에 지우지 못한 원망이 섞여들었다. 그 바보 같았던 시도에 잠 못 들고 설렌 건 나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거부할 건 없지 않은가. 짝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체념과는 별개로 그냥, 억울했다. 일주일 내내 초조하고 애타고, 조금 들뜨기도 했던 그 감정들이 전부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현실이.

 

“……알았어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는 끝내 대답하지도 얼굴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를 잡고 있던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데려와서 미안해요. 갈게요. 겨우 내뱉은 포기의 말 끝에 꾹 눌러 담았던 진심이 한 조각 튀어나왔다. 그런데요, 선배.

 

“난 좋았어요, 다.”

“…….”

“그냥 그렇다고요.”

 

그를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햇볕은 아직 따스했지만 한 겹 셔츠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차가웠다. 그새 초록보다 갈색이 더 짙어진 화단은 기억보다 황량하고 삭막했다. 저번 주에 울타리를 뛰어넘다 넘어진 무릎이 이제야 시큰댔다. 이곳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도 전부 박지훈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서글펐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아들은 괜히 반항아 짓 하다가 첫사랑한테 실연이나 당합니다. 이제 착실하게 살게요. 뒤늦은 참회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가려던 나의 등을 무언가 붙들었다. 무슨 나뭇가지에라도 걸렸나 싶어서 돌아봤더니, 셔츠 끝에 걸려 있는 건 손가락이었다.

 

“……뭐예요?”

 

한 손으로 나를 잡은 그는 다른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 숨기기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언뜻 비치는 얼굴은 빨갛게 물든 단풍잎 빛깔이었다. 바람결에 흘러가는 한숨 같은 목소리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아니야.”

“뭐가요.”

“나 너 안 싫어해.”

 

옅은 색의 목소리는 한껏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나는 동작과 숨을 동시에 멈췄다. 학습 능력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심장이 또 소란스럽게 굴기 시작했다.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거기까지만 말하고 도톰한 입술은 다시 꼭 다물어졌다. 그러나 끄트머리가 젖어 있던 그 말에, 방금 전까지 물 먹은 솜뭉치처럼 눅눅하던 마음은 혼자 제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여전히 뻣뻣한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 손 안에 쥐었다. 발갛고 촉촉한 물이 든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순간, 나는 또 참지 못했다.

 

닿은 입술은 여전히 보드라웠다. 이건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서 생긴 환각이 아닐까.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두 번째 키스는 비현실처럼 달았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며 단 숨을 내뱉었다. 조심스레 혀끝을 건드리자 그가 힘을 주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게 더 꿈만 같았다.

 

“왜 나 보기 싫다고 했어요?”

 

숨이 거칠어질 즈음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그는 또 화들짝 놀란 작은 동물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어, 음, 그러니까, 그게. 강당의 단상 위에서 막힘없이 낭랑한 목소리로 환영사를 읽어 내려가던 입술은 한참 동안 우물쭈물 달싹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꾸, 생각이 나서…….”

“무슨 생각이요?”

“그, 너랑, 키, 키, ……그거 했던 거.”

 

키스 해 본 적 있어?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그렇게 묻던 뻔뻔함은 어디로 갔는지, 박지훈은 애매한 대명사와 함께 또 반대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 그랬구나. 자꾸 생각이 났구나. 엉클어져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생각 좀 나면 어때서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집중도 안 되고. 또 생각하면, 그게 좀, 기분이 이상해서…….”

“이상해요? 어떻게?”

“몰라. 물어보지 마.”

 

옅게 찌푸린 미간을 살살 쓸어내리다가, 입가에서 실룩이던 웃음을 결국엔 터뜨리고야 말았다. 허리를 구부린 채 숨이 넘어갈 듯 웃는 나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지훈은, 곧 평소처럼 샐쭉하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야, 라이관린. 너 지금 나 놀리지?”

“아니, 아닌데……, 큽, 하하하.”

“뭐가 아니야?!”

“진짜, 진짜 아니에요, 선배. 아……, 진짜 아니라니깐.”

 

내가 이래서 너 보기가 싫었어, 화를 내며 어깨를 찰싹찰싹 내리치는 손길이 의외로 매웠다. 어떻게든 손바닥을 마주 대 깍지를 끼었다. 정말로 화가 난 건 아닌지 순순히 잡혀는 주었지만, 발간 눈꼬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큼큼, 나는 헛기침을 했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려면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박지훈에 비하면 더 잘 아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자꾸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요?”

“……응.”

“그건, 선배가 안 익숙해서 그래요.”

“어?”

“자꾸 해 보면 괜찮아져요.”

“정말?”

“그럼요. 뭐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잖아요.”

 

아마도. 박지훈과의 키스가 아무렇지도 않아질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는 신뢰감 가는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뒷말을 삼켰다. 그래? 의심 가득하던 눈초리가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몸속을 그득 채운 욕망 사이로 죄책감이 한 줄기 선을 긋고 지나갔다. 이거 너무 사기 아닌가? 분명 나보다 두 살 연상인데도 어린아이를 꼬드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역시 박지훈은 박지훈이어서, 돌아온 것은 죄책감이고 뭐고 다 지워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좋아. 그럼, 한 번 더 할까?”

“……네?”

“이게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인가? 몇 번 해야 돼?”

“…….”

 

해맑기까지 한 물음에, 잠시 그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날 갖고 노는 건가? 사실 다 알고 이러는 거 아냐?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 들이미는 입술을 내가 거부할 입장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지독하게 자기 좋을 대로만 받아들이는 상황 인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바보 같아진다고 그러지 않는가, 다들.

 

“좋아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새 경험치가 늘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박지훈은 저 혼자 눈을 감고 있었다. 반들한 입술엔 아까보다 붉은 기가 돌았다. 어지러울 정도의 충동에 머리가 핑 돌았다. 허겁지겁 입부터 맞추고, 한 템포 늦게 그의 뺨을 감쌌다. 그의 팔 역시 뒤늦게 내 목을 끌어안았다. 서늘한 바람에 식어 있던 살갗에 무섭도록 뜨거운 열기가 돌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감정도, 순서도. 그러나 몇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멀리 운동장에서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닿았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가, 곧 다시 닿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비워진 부분을 채우듯,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

 

 

여담. 이게 뭐야, 하나도 안 익숙해지잖아. 박지훈이 내 거짓말을 눈치 채고 화를 낸 건 아주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