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y Flower
W. RUBATO

 

 

개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졸다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강의실은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추웠다. 나는 뒤늦게 휙휙 주변을 확인하고는 다시 철푸덕 엎어졌다. 새학기가 스치는 가을은 분주하다. 강의실 밖으로 들리는 산란한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멍청히 누워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는 느릿느릿 엎드린 상태로 화면을 확인하다 뻔한 내용에 눈가를 구겼다.

 

[야, 박지훈. 개강파티 와라.]

[이번에도 안 오면 정우 선배가 너 죽여버린 댔음.]

[야아아. 오늘만 알바 빼라아.]

 

휴대폰을 기어이 뒤집어 버렸다. 나이가 몇 갠데, 지겨워. 개강이 뭐 즐겁다고 파티씩이나 하는 건지. 가방을 대충 챙겨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시답잖은 곳에 참가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여유롭지 않다. 폐 속까지 공기를 들이마시자 눈가가 아려왔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자고 일어나서 쌀쌀한 게 아니었구나. 진짜로 여름이 갔구나. 바닥에 향한 시선의 끝에는 낙엽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봤다. 듬성한 나무는 여름의 푸른빛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말린 나뭇잎과 건조한 바람의 냄새가 났다. 옆을 두리번거리니 다들 두꺼운 옷을 껴입곤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변화는 익숙치 않다. 나는 멋쩍게 얇은 남방을 여미며 코를 훌쩍이다 버스 시간 안내화면을 바라보았다. 1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가방을 뒤져 이어폰을 꺼내 꽂고는 이 시간쯤 하는 라디오를 켰다.

 

요즘은 날씨가 쌀쌀해서 반팔은 꿈에도 못 꾸죠, 저도 가을 맞이 옷장 정리를 싹했답니다. 사실 입추는 하안참 지난지 오래지만 오늘은 923일 추분, 밤이 길어지는 시기라고 해요. 더 많은 별이 태어날 이번 가을을 위해, 또 이글이글 타올랐던 여름을 보내기 위해, 오늘도 시와 음악 한 편 들어볼까요?

 

 

막바지 뙤약볕 속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 듯 쟁쟁쟁

천지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시를 듣다 버스가 와 서둘러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찬 의자에 앉으니 낮은 온도가 더 실감이 났다. 몸을 부스스 떨며 귀에서 빠진 이어폰을 집어 드는데 문득 든 생각에 멍한 숨을 쉬었다. 정말 여름 내내 낮잠을 방해했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어폰을 도로 귀에 꽂으며 볼륨을 높였다.

 

♬드라이 플라워-9와 숫자들

정말 가을이구나.

 

 

 

버스에서 내린 정류장은 녹이 슬어 다 쓰러질 기세였다. 오늘은 알바가 없는 날이었지만, 나는 또 시답잖은 거짓말을 했다. 나는 사람이 어렵다. 다 같이 모여서 떠드는 그 무리 속에 소속되어 있어도, 같은 학과 점퍼를 입어도, 같은 술을 마셔도, 같은 대화 주제로 잡담을 해도. 무리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이질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버스를 타고, 내려서 혼자 집에 가고, 혼자 밥을 먹나 보다. 끝없는 오르막길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우리 집은 저 맨 꼭대기. 서울의 끝.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 나의 외로움이 숨어있는 곳.

 

가파르기가 엄청난 오르막길에 발을 내딛으며 청춘이라는 말을 곰곰이 곱씹어봤다. 인생의 봄. 봄이라. 언제서부턴가 계절감을 잊게 됐다. 나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에 느렸던 것 같다. 지금처럼 15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민소매에 얇은 남방을 걸친 걸 보면.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여전히 기피하는 걸 보면. 가을이 돼서야 봄을 알고. 겨울이 돼서야 여름을 안다. 콘크리트가 여기저기 패여 있는 오르막길을 걷다 허리를 쭈욱 펴고 뒤를 돌아봤다. 제법 해가 빨리 떨어진다. 하늘 밑으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별들이 향연하고 있었다. 저어기는 대학로. 한쪽 눈을 찡그려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오늘 개강파티가 열리는 곳이다.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손을 내렸다. 아무렴, 관심 없다.

 

 

우리 집은 걸어 올라가기에 너무 멀어 나는 항상 중간에 슈퍼 앞 평상에서 앉았다 가곤 한다. 음료수라도 마실까 싶어 낡은 슈퍼 문 앞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와 평상에 앉았다. 나뭇잎이 가득한 평상은 꼴사나울 정도로 나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잘 찾지 않게 된다. 애정이 없는 것은 늘 닳아있다. 살이 아닌 뼈가, 꽃이 아닌 줄기가. 평상에 앉아 숨을 돌리다 솜털이 오소소 돋은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가을바람이 얇은 옷 사이로 차게 들어온다. 분명 낮까지만 해도 하나도 춥지 않았는데. 나는 침통해져 기어이 팔짱을 끼고는 주절거렸다. 내가 이래서,

 

“이래서 가을이 싫단 말이야.”

 

가을이 싫다. 늘 싫어했다. 엄마와 나를 버리고 간 아빠가 죽은 것도 가을이다. 기억 속 품이 큰 상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던 바닥에는 낙엽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텅 비어버린 나뭇잎을 보는 어린 눈에는 눈물 하나 고여있지 않았었는데. 그랬었는데. 홀로 남겨져 악착같이 삶을 물어뜯고 늘어질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도 변화에 약하다. 철저히 나의 기준을 만들고 그에 맞지 않는 건 내쳐왔다. 그게 어린 내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터득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늘 어딘가 살아있던 아빠가 죽은 것도, 매시간 공기의 온도가 다른 것도. 나에게는 불편하고 낯선 새로움일 뿐이었다.

 

“가을 되게 싫어하시나 보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평상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나는 낯선 옆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방금 왔어요.”

“아…, 네.”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멋쩍게 발로 바닥에 흙만 뒤지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니 남자도 나를 흘긋 보더니 따라 일어난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서지듯 사락사락 눈가를 간질였다. 이상하게도 로맨틱했다.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과 노을빛에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 순간이.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시선이.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자세히 바라보니 정말 가을 같은 사람이다. 노을에 덮인 갈빛 머리칼과 가을볕 같은 눈동자. 따뜻하게 밝은 피부에 입꼬리를 당겨서 웃는 저 웃음. 등에 내려앉은 공기마저 온도가 높아 보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침을 꼴깍 삼켰다. 그와 눈이 마주할 때마다 온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돌아왔네요.”

“네?”

“아니요, 이제야 진짜 가을이 온 것 같다구요.”

“그러게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남자가 빙긋 웃으며 숨을 깊게 쉬더니 말한다. 가을 냄새가 제법 깊어졌어요. 나는 그 입가를 바라보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에 시선을 돌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역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행위였다. 눈이 부신지 눈가를 찡그린 채 떨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가을이 왜 싫어요?”

 

또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해를 등지고 선 남자는 베이지색 니트를 붉게 물들이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은 물에 젖은 흰나비처럼 희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피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주한 눈이, 왜 나를 싫어하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대답을 하면 그 낯선 눈동자 속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피해버렸다. 어차피 처음 만난 사람이잖아. 그냥 대충 말 맞춰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일종의 소극적 자기방어행위였다.

 

“음…. 저는 얼마 전에 이사를 왔어요. 저 위에.”

“원래 이런 데 잘 안 오는데. 힘들잖아요.”

“그러게요. 그래도 여기가 제일 잘 보여요”

“…뭐가요?”

“가을이요.”

 

일부러 모난 말만 골라 내뱉는 나에게 남자는 처음 그대로의 미소로 말을 이어갔다. 여기가 좁고 외져도 제일 가을을 보기 쉽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네…. 근데 혹시 이름이 뭐예요? 묻는 말에 나는 말 없이 그를 앞질러 계단을 올랐다. 낡고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가로등을 지나, 매일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쓰레기봉투도 지나쳤다. 대답을 듣지 못한 남자도 뒤따라 조용히 오르막길을 올랐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에 바람 소리와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엇갈렸다. 귀를 스치는 찬 바람에 이를 꼭 물고 걸으니 파란 대문의 우리 집이 코앞이었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들어가세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니 남자가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네, 들어가세요.

 

“저기.”

“네.”

“저는 라이관린입니다.”

 

이름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지만 그 정보 하나로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인간은 그렇게 이어진 관계로 감정을 실어 보내는 생물이니까. 나는 가만히 멈춰서 입에 라이관린이라는 네 글자를 넣고 천천히 곱씹었다. 라이관린…, 라이관린. 대답이 없는 나를 가만 보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몸을 틀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박지훈입니다. …박지훈.”

 

그리곤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 쾅 닫아버렸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생생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또 다른 나에게 속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문득 든 생각에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고 말았다.

 

♬K.-Cigarettes After Sex

이름, 무슨 뜻일까.

 

 

 

 

중앙도서관 벤치 쪽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상훈이가 어깨에 팔을 둘러온다. 야, 어제 너 안 와서 정우형 레알 개 빡침. 나는 팔을 슬쩍 빼내며 대답했다. 그 선배는 참 화날 일도 많네,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잖아.

 

“너 조심해라. 17들이 존나 벼르고 있대.”

“왜.”

“과탑이 얼굴도 안 비춘다고.”

 

그리고 오티 엠티 개파 쫑파 다 안 오는 새끼가 어디…. 야! 박지훈! 슬슬 잔소리를 피해 자리를 떴다. 과탑인 거랑 선배들한테 얼굴 비추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대한민국의 서열 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쓰레기통에 빈 캔을 던져 넣곤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중앙 시계를 보니 벌써 알바를 갈 시간이다. 잘하면 늦겠는데. 걸음을 빨리해 짐이 있는 열람실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고 말았다.

 

“박지훈. 이거 가지러 왔나 봐?”

“…?”

 

이정우 선배였다. 나는 작게 탄식했다. 가지가지 한다. 입에 가득한 화살들을 애써 목으로 넘겨버린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선배가 내 가방을 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이해관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네. 선배 안녕하셨어요?”

“어어. 어디 가나 보지?”

“네. 알바갑니다.”

“어제는? 어제 우리 개강파티 있었던 거 알지?”

“네. 어제는,”

“어제도 알바 갔었다고?”

 

대체 이 선배와 여기서 왜 이런 논쟁을 벌이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나에게 중요한 알바에 늦지 않게 가야 하고, 짐을 받아야 한다.

 

“아니요. 어제는 집에 갔습니다. 선배, 가방 주시죠.”

“아, 그래?”

 

선배의 한쪽 입꼬리가 얄밉게 말려 올라가고, 손은 허리춤에 안착한다. 나는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위계질서 속 우위에 선 사람의 근거 없는 자존심. 나는 그 자존심을 건든 서열 하위 먹잇감.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 위치였으니까. 욕이 날라올지도, 아니면 손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너 이 새끼 선배한테 말버릇이 이게 뭐야. 선배한테 어디 거짓말이야. 버르장머리를 어디다 팔아먹었어. 선배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화살들을 가만히 보고만 섰다. 삼킬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이런 관계들이 지긋지긋하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다.

 

“주시죠.”

 

참다 못해 그의 손에 들린 가방을 힘껏 빼앗아 왔다. 선배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는 한껏 톤이 올라간 선배의 욕지기가 들려왔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발을 멈춰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더 세게 주며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이미 지각이다. 문 앞을 지나다 계단을 올라오는 상훈이와 눈을 마주쳤다. 야! 박지훈! 너 왜 연락이 안 되냐?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모난 사람일까. 왜 모두가 동그란 세상에서 혼자 각져있을까.

 

버스에 올라타고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동동 떠있다. 나는 가만히 화면을 내려보다 끝이 벌개진 손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야, 너 정우 선배한테 깨졌다며.]

[미친꼰대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괜찮냐?]

 

문자를 가만히 보다 화면을 꺼버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전화번호도 저장하지 않았는데, 상훈이는 그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둘 사이에 별말도 없었고, 내가 먼저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친구라는 카테고리 속에 속해있었다.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참 보잘 것 없으며, 참 가볍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가벼운 관계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다 구겨진 가방을 털어 품에 안았다.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늦게 도착한 카페에서도 좋은 일은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주문을 받고 돈을 받고, 청소도 하고, 컵을 정리한다. 하지만 알바를 하는 시간은 어쩌면 가장 편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렇게 더 이상 내 삶에 변화라는 것이 파장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밋밋해도 나는 이런 것이 좋았다.

 

사장님이 들어오자 모두가 부산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도 마음에도 없는 빗자루질을 하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의자에 앉아버렸다. 등을 기대고 본 하늘은 맑았다. 떨어져 가는 해는 주변의 작은 것들을 더 잘 보이게 한다. 나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가 작아서 그런지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아 오늘도 회식을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물어물 거절하는 것보다 미리 퇴근하는 게 훨씬 편하니 나는 맡은 구역 청소를 끝내곤 락커룸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나왔다. 어? 지훈아, 가? 유진 선배다. 나는 선배가 입에 문 사탕을 바라보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헐, 오늘 회식 있는데 얻어 먹구 가지! 에이, 지훈이 과탑이잖아. 공부해야지. 역시 회식 있을 것 같더라. 나는 멋쩍게 웃다가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인사하며 문고리를 잡고 말았다.

 

 

아마도 나는 복에 겨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소위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이 있는 걸 보면. 정말 복에 겨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꼬인 이어폰을 풀며 코를 훌쩍이는데 머리가 멍하니 어지럽다. 아마도 감기에 걸린 게 분명하다. 옷깃을 여미고,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 드디어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정말 나의 시간이. 집으로 가는 길은 지겹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신경 쓸 필요 없는 시간. 오로지 혼자인 시간. 카페가 완전히 마감됐는지 불이 꺼지고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입, 어깨에 둘러진 팔, 장난을 치는 다리들. 휘어진 눈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에 나는 그들은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들과 나 사이에 퍼석퍼석한 콘크리트 사이로 선이 그어진 것만 같았다. 난 길고 긴 흰 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찬 손을 주머니에 넣어 볼륨 버튼을 두어번 누르자 더이상 선배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접속-김사월

역시 나는 혼자가 편하다.

 

 

다 쓰러져가는 버스정류장에 내려 늘 가던 길로 걸었다. 평소보다 피곤한 감에 뒷목을 잡고 고개를 젖히니 귀와 머리가 멍멍하다. 태워 죽일 듯이 더울 때는 언제고 며칠 만에 이렇게 추워져 버렸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오르막길에 발을 올리고 추위에 도망치듯 걸었다. 그런데도 결국엔 슈퍼 앞 평상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숨이 차 호흡을 빨리하니 눈가가 벌개진다. 평상에 앉으니 해는 이미 떨어져서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정말 빨간색이다. 구름의 끝을 물들인 하늘을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낯설면서도 익숙한, 딱 가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 씨, 이제 오네요.”

 

분명 해는 져버렸는데, 햇빛이 눈으로 사정없이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신음하고 말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분명 변화라면 변화였고, 남들과 같았으면 벌써 이미 내쳤을 사람인데.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경계심이 생기지 않았다. 오묘한 감정에 멍청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는데, 인중 사이로 무언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지훈 씨, 코피 나는 거 아니에요? 그가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볼 때조차, 흐르는 코피도 닦지 않은 채 나는 굳어있었다. 저번에 그를 봤을 때, 온몸에서 피가 흘러나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젠 진짜 피가 흐른다. 관린의 뒤로는 가로등의 빛이 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아슬아슬하게 지켜왔던 나의 마음이, 그 무엇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의 세계가 아마도 꺾이려 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손바닥을 바라보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는 반대 손에 힘을 더 줬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피에 고개를 젖히자, 그가 부드럽게 뒷목을 감싸 안아 고개를 바르게 세워줬다. 그거 고개 젖히면 위험해요. 나는 수치스러운 기분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흰 손수건이 더럽혀진 것도 신경 쓰였고, 어느새 나의 바운더리 라인 보다 훌쩍 가까이 들어온 그의 존재도 신경 쓰였다. 가까워.

 

“혹시 시험기간이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코피가 나요. 건강은 챙겨야죠.”

 

네, 그래야죠. 실없이 웃어 보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슈퍼에 들어가 물티슈를 가지곤 나타났다. 이거 써요. 나는 괜찮다며 손사레 치다 인중에 잔뜩 묻은 피에 결국 받아들고 말았다. 하늘이 보라색이 되었다. 새빨갛게 붉은 태양이 지고, 밤의 주인인 남색 하늘이 고개를 들기 전, 그들이 스쳐 가는 짧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색깔이리라. 물티슈를 뽑아들고 인중과 손가락 사이사이 굳은 피를 닦아냈다. 피가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닦아내는데 젖은 물티슈가 더 축축해진다.

 

“지훈 씨, 울어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물티슈가 닦아줄 수 없었나 보다. 결국, 손에 꾹 쥐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앞으로 쏠리는 머리카락처럼 코로 피가 몰렸다. 이러다가 또 코피가 날지도 몰라. 그런데도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는다. 눈에 몰린 핏줄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깨문 잇새 사이로 듣기 싫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힘들면 더 울어도 돼요. 괜찮다면 내가 지훈 씨 옆에 있어 줄게요.”

“…….”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요.”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를,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더 기대어 울어버렸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것.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누군가와 웃으며 마주하지 못하는 것. 항상 도망가는 것. 항상 뒤를 보이는 것. 다 나의 모자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뒷걸음질 치고, 더 어두운 곳으로 숨었다. 내가 모자라서 도망가버린 아빠처럼 결국엔 모두가 도망쳐 버릴 것 같아서. 새로운 인연 때문에 또다시 상처받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인 게 편하다. 사람들 속에서 나를 지우고, 빛을 지우면 된다.

 

그런데,

 

“이거 받아요.”

 

또다시 내밀어주는 손수건을 보면 도망치고 싶다. 어둠 속이 아닌, 빛이 있는 곳으로. 축축하고 눅눅한 곳이 아닌,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내가 모자라지 않고, 사랑받을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넌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라고만 말해주는 것 같아서.

 

“지훈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나는 지훈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믿고, 좋은 감정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 배우는 거니까요.”

 

나를 사랑해도 돼. 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슈퍼에서 사온 맥주를 나누고 난간에 앉아 캔을 땄다. 우와, 여기는 야경이 진짜 예쁘네요.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몰래 웃었다. 그는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며 한참 동안 우는 나를 말 없이 안아주었다. 눈가가 빨갛게 부어 쓰라렸지만, 아프진 않았다.

 

“한란이라고 알아요? 꽃인데, 가을에 펴서 겨울을 나요. 신기하죠, 그러다 봄에 지거든요. 보통 꽃은 봄에 펴서 여름이나 가을에 지는데 말이에요.”

“음, 그렇네요.”

“다들 가을은 쓸쓸하고, 생명력이 없다고 그러잖아요. 푸르던 잎이 죽은 색이 돼서 바닥을 구르고, 나무는 텅텅 비어가니까요.”

“…네.”

“근데, 그런 가을에게도 사랑받는 꽃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한란이구요.”

“…”

“지훈 씨의 세상이 아마도 지훈 씨에겐 차가운 가을 같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훈 씨가 가을 속 한란이었으면 좋겠어요.”

“…”

“차가운 가을 속에서도 사랑받는 존재요.”

“…”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요.”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춤췄다. 나는 반쯤 남은 맥주캔을 손에 들곤 그를 바라봤다. 영화같은 사람. 나에게 기적 같은 사람. 눈에는 별을 담고, 가슴에는 사랑을 담은 사람.

 

“관린 씨는 나에게 가을 같은 사람이에요.”

“네?”

“그런 차가운 가을 말구요. 내가 싫어하던 그런 가을 말구요.”

“그럼 무슨 가을인데요?”

“…내가 사랑할 가을이요.”

 

♬Sweet-Cigarettes After Sex

그에게 한란을 꺾어다 주고 싶다.

 

 

그 때문에 하루하루가 달라져 갔다. 관린는 늘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쯤이면 처음 봤던 그곳에서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저녁 내내 그와 시간을 보냈다.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그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기도 했다. 가끔은 맥주를 마셨고, 아주 가끔은 평상에 앉아 옷깃을 여미며 소주를 마셨다.

 

오늘은 처음으로 집에 관린 씨를 초대했다. 어느새 두꺼운 점퍼를 입고 목까지 잠근 나는 그에게 줄 따뜻한 우유를 들곤 계단을 올랐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 컵을 건네곤 서둘러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응, 지훈 총각. 다름이 아니라 월세가 좀 밀려서. 아, 아주머니 며칠 뒤에 국가 장학금 들어오거든요. 네, 죄송해요. 다음부턴 제때 드릴게요. 나는 뒷머리를 괜히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차가워져 오는 맨발을 꼼지락거리면서.

 

“근데 집에 누구 있나 봐?”

“네?”

“아니, 그냥… 누가 있나 싶어서.”

“아니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응 들어가. 아주머니를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방으로 들어오자, 그가 문틈 사이로 숨어있다 나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이끈다. 어…. 관린 씨, 지금 뭐하는….

 

“왜 아무도 없다고 그랬어요?”

 

그는 구석에 나를 가둔 채 물었다. 문을 등진 그의 웃는 얼굴엔 반쯤 그림자가 어려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가 나에게만 허락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은연중에 튀어나왔나 보다. 나는 서로 숨 쉬는 것도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그의 옷깃을 더 잡아끌었다. 심장이 손끝에서도 뛰는 느낌이 들었다. 목이 타들어갔다. 꼴깍 삼키는 침도, 옷이 덮고 있는 피부도 모두 뜨거워져 갔다. 그에게 키스하고 싶어졌다.

 

“관린 씨가…”

 

관린 씨가 나에게만 친절했으면 좋겠어요. 짧은 문장을 길게 늘였다. 더 천천히 입에 굴렸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달달 떨려 왔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감정을 고스란히 고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느새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온 그가 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지훈 씨는 비밀스러운 걸 좋아하나 보네요. 이렇게 솔직한데. 그가 이번엔 입술을 맞대어왔다. 맞물린 입술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시금 감아버렸다. 그에게선 어렴풋이 비의 젖은 낙엽 냄새가 났다. 나의 손목을 감싸 쥔 손은 따뜻했다. 더이상 바랄 게 없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더 깊게 입을 맞췄다.

 

한란의 씨가 발아하기 시작했다.

 

 

 

*

얼굴이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는 한참을 웃었다. 아, 웃지 마요.

 

“미안해요. 근데 너무 귀여운 걸 어떡해요.”

 

나는 눈썹을 구기다 결국 그를 따라 웃어버렸다. 이번만 넘어갈 거예요. 그와 나는 각각 손에 따뜻한 우유 잔을 들곤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도 야경이 예쁘네요. 꼭 지훈 씨 같아요. 굽이굽이 이어진 내리막길과 노란 가로등을 바라보던 나는 멍하니 듣고만 있다가 머릿속으로 이해하자마자 그에게서 떨어졌다. 관린 씨는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숨 쉬듯 해요.

 

“그거야 지훈 씨가 숨 쉬듯 예쁘니까?”

 

아, 진짜 미쳤나봐…, 왜 그래요, 진짜. 결국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어버렸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했다. 그와 함께하는 이 기적 같은 시간이 예뻤다.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역시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비가 내렸다. 창가를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다 창문을 닫아버렸다.

 

“곧 장마래요.”

“그래요?”

“네, 이제 슬슬 겨울이 오나 봐요.”

“…그렇군요.”

 

제가 내리네요. 그가 읊조렸다. 내가 되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라이관린, 뜻이 가을장마거든요. 누군가 심장을 깨문 것 같이 두근거렸다. 가을장마구나. 그와 퍽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일어난 김에 장롱을 열어 어딘가 틀어박혀 있던 담요를 꺼내와 그에게 건넸다.

 

“지훈 씨는 좋겠네요. 겨울이 오잖아요.”

“네? 그게 왜요?”

“가을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요?”

 

가볍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질문도 아마 그랬지. 가을 되게 싫어하시나 보다.

 

“아니요, 지금은 싫지 않아요.”

“그래요?”

“네, 오히려 좋아졌어요. 가을에 어울리는 좋아하는 음악도 생겼고, 가을에 나는 좋아하는 음식도 생겼어요. 더이상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게 됐고, 가을이면 떠올릴 추억도 만들었어요.”

“…”

“그리고 무엇보다.”

 

가을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조근조근 한 글자 한 글자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한 후, 그를 바라보자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꼭 껴안는다. 가까이서 보는 그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어떤 예술가도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문득 든 호기심에 관린 씨에게 질문 했다.

 

“근데 왜 내가 솔직해요?”

“네?”

“아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의도치 않게 멍청한 모습들만 보였는데 왜 내가 솔직해요?”

“아하하, 뭐예요 그게 궁금했어요?”

“아, 웃지만 말구요.”

 

지훈 씨는, 맑은 사람이에요. 늘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얼굴에 다 써있거든요. 진짜요. 나는 다 알아요. 누구보다 지훈 씨는 알기 쉬운 사람이에요 나에게. 나는 또 울컥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타는 목만 축여버렸다. 늘 나에게 놀라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다정한 그의 손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이거 봐요.”

“네?”

“지금도 얼굴에 다 쓰여있잖아요.”

 

키스해도 돼요? 라고. 그의 도톰한 입술에 시선을 내렸다가, 눈을 깊게 깜빡였다.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워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꿰어진 입 대신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볼을 감쌌다. 가끔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마음을 잘 전할 수도 있다. 그의 향이 훅 차고 들어왔다. 그는 파도처럼, 아니 어쩌면 가을 폭풍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어설프게 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관린은 입술을 맞댄 채 웃음을 흘렸다. 그의 가슴과 나의 가슴이 맞닿은 곳은 늦가을 낙엽을 태우는 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순간에는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나는 떠는 입술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의 옷깃을 더 세게 말아쥐었다. 쿵쿵. 쿵쿵. 두 개의 심장 소리가 엇갈린다. 빗소리는 어느새 아득하게 들리지 않았다. 비가 그쳤나? 나는 관린의 입술을 물고 늘어지며 생각했다. 너무도 가까워서 이젠 그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지퍼가 내려가고 드러난 목에 그가 입술을 묻자, 심장의 어느 깊숙한 한구석에서 한란이 생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에 뿌리를 박고 흙을 가득 쥐어낸다. 이제는 외롭지 않기 때문에, 줄기는 닳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끝을 맞댄 채 또 생각했다. 한란이 개화하기 전까지,

 

♬The Good Side-Troye Sivan

가을장마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수요일은 오전수업이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옆에 누워있는 관린에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관린은 앉은 나의 허리를 안고 몇 번 투정을 부리더니 입을 쭉 빼곤 놓아주었다. 지훈 씨가 학교 안 갔으면 좋겠어요. 나는 푸흐흐 웃다가 까치집이 된 그의 머리를 더 헝클어버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온기가 없는 공기는 어느새 소름이 돋아올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양팔을 슥슥 쓸어내리며 따뜻한 물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입에 추워, 추위가 진득하게 눌러붙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다. 생각만할 뿐이지만 말이다.

 

보송해진 얼굴로 나오니 관린이 우유를 데우고 빵에 잼을 바르고 있다. 바삭바삭한 빵이 눈에 들어온다.

 

“일어났네요.”

“지훈 씨가 밥도 안 먹고 가게 할 순 없어요.”

“괜찮은데…”

“지훈 씨의 아침밥은 내가 책임진다!”

 

장난스러운 그의 모습에 또 웃어버렸다. 흰도화지 같은 그를 볼 때면 늘 물감을 칠하고 싶어진다. 더 웃고 싶어진다.

 

“아, 맞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겼다고 했잖아요.”

 

그는 두 번째 빵에 잼을 골고루 펴바르며 말했다. 한조각 먼저 먹었는지 입에 묻은 부스러기가 귀엽다. 나는 그 입가에 묻은 빵조각을 떼며 대답했다.

 

“네. 생겼어요.”

“그거 알려줄 수 있어요?”

 

관린이 나의 그릇에 빵을 올리며 말한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어, 그냥 별 건 아닌데…

 

“원래 알고 있는 노래긴 했어요.”

“응, 뭔데요?”

“Elliott Smith의… Between the bars… 라구….”

“음, 꼭 들어보고 싶어요. 지훈 씨랑.”

 

그냥 얘기하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내가 만든 노래도 아닌데 말이다. 관린 씨는 집에 안 들어가봐도 돼요? 물으니 손을 멈칫하더니 말한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아뇨! 전 오래 있을수록 좋죠….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입꼬리가 주욱 올라간다. 나도 덩달아 주욱 올리고는 빵을 한입에 물었다. 딸기향이 입안 가득 퍼지자 눈을 감고는 행복한 듯 푸스스 웃었다. 툭. 머지않아 그가 나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쳤다.

 

“그러다 늦어요.”

 

진짜 학교에 가야겠다. 겉옷을 겹겹 챙겨입곤 그의 앞에 섰다. 나 좀 부해보이지 않아요? 외모에 신경을 잘 쓰진 않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나를 가만 지켜보던 관린은 눈동자를 입술에 고정한 채 말했다. 지훈 씨, 부라고 다시 해봐요. 부-? 네. 엄청 귀엽네요.

 

“아, 뭐예요. 부해보이지 않냐구요.”

“사랑스러워요.”

“진짜….”

“지훈 씨에 관한 거라면 난 어떤 판단도 객관적으로 내리지 못할 거예요.”

 

나에게 지훈씨는 너무 절대적이니까요. 결국 그의 품으로 안겨버렸다. 그는 안기는 힘에 몇번 뒷걸음질 치더니 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관린 씨에게 꽃내음이 나요. 그도 웃으며 말했다. 지훈 씨에게도 꽃내음이 나요.

 

“잘 갔다와요.”

“가기 싫어요.”

 

오늘도 비오니까 우산 챙기구요. 나는 손에 우산을 쥔 채 발로 땅을 몇 번 직직 끌다가 관린의 앙다문 입에 알겠다며 문을 닫았다. 허름한 바닥을 짚고 선 신발의 끈은 내 흐물흐물한 마음처럼 풀려있었다. 아, 귀찮게 됐네. 매듭을 지어 두어번 힘을 준 뒤 일어나는데 눈앞에 현관문을 열어젖힌 그가 가득 채워졌다. 다시 문을 열어준 거구나.

 

“진짜로 잘 다녀,”

 

그대로 달려가 그의 목을 힘껏 안았다. 그는 어어, 소리를 내며 끌려오더니 나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끝이 발간 귀가 눈앞에 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더 바짝 대곤 속삭였다.

 

“사랑해요.”

 

갑자기 고백? 그가 푸스스 바람빠진 풍선처럼 웃더니 허리춤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어, 귀끝이 더 빨개졌네. 관린 씨 귀 빨개요. 지훈 씨 귀는 더 빨개요. 우리는 장난을 치다 입을 맞췄다.

 

가끔은 맥주를 마시고, 아주 가끔은 소주를 마시고. 그리고 아주 자주 우리는 입을 맞췄다.

 

 

“야 박지훈, 하이. 오늘 학식 콜?”

 

상훈이다. 학식을 먹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훈은 에코백에 든 필통을 힘없이 꺼내다 입을 틀어막았다. 헐.

 

“헐, 미친!”

“왜 그래.”

“너 2년 만에 처음 받아준 거 알냐? 아니, 아냐?”

“뭐가…”

 

학식 먹자는 거… 맨날 개무시하더니…. 상훈은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는 척 하더니 엄지를 들어올린다. 정상훈 존나 최고. 박지훈의 철벽을 부수다니. 나는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볼멘소리를 하다 얼굴을 살짝 풀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금껏 다가가주지 못해 미안했고, 또 다가와줘서 고마웠다. 아직까지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근데 너 얼굴 좀 좋아졌다.”

“응?”

“아니, 요즘 알바 좀 덜하냐? 얼굴이 좋아졌네.”

“아니, 그냥 뭐…”

“혹시 연애하는 건 아니겠지.”

 

웃긴다 상훈아. 과탑 박지훈이 연애라니. 1일 2알바 박지훈이 연애라니. 그는 혼자 피식피식 웃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내가 헛소리 했다 지훈아. 나는 혼자 킥킥거리며 혼잣말을 하는 상훈이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애, 그 비슷한 건…”

 

하는 것 같아. 작게 주저리곤 필기를 시작했다. 귓가가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손에 땀이 차 볼펜이 몇 번 미끄러졌지만 나는 고개를 더 푹 숙인 채 아무말이나 끄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상훈은 수업 중인 강의실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내질렀다가 교수님의 눈치를 받곤 덩달아 고개를 푹 숙였다. 존나 배신자 새끼. 소개 해줘야 된다. 나는 그를 마주보다 장난을 치며 웃는 그를 따라 웃었다. 생각해보고. 야, 오늘은 학식 니가 사라. 나 지금 배신감 오지니까. 그것도 생각해보고. 아아- 박지훈!

 

그에게 고맙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차갑지 않은 가을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한란을 품게 해줘서 고맙다.

 

♬젊은 우리 사랑-검정치마

오늘은 그의 어깨를 꼭 안아줘야지.

 

“와, 왠 라디오?”

“들을만해서. 원래 옛날부터 들었어.”

“와, 아날로그 갬성도 갖고 있었네. 우리 과탑”

 

그냥 피식 웃어주고는 볼륨을 높였다. 상훈은 과제를 하겠다며 노트북을 켰고, 나는 오랜만에 누군가가 타준 커피를 휘적이다 조금씩 마셨다.

 

오늘은 117, 다들 건강하셨나요.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라고 하네요. 며칠 전 북상했던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입동이 왔다고 해요. 이제 슬슬 김장 준비를 하시는 집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오늘 아침에 출근하다 엄청 추워져서 놀랐지 뭐예요. 그러면 자, 오늘도 이런 날에 딱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보았어요. 시와 함께 들으실까요?

 

바삭한 낙엽이 바닥을 안고

그 위를 촉촉한 가을장마가 덮으면,

낮에는 쨍하고 밤에는 냉하던

가을이 간다.

낙엽이 모두 바스러져 갈 때쯤에는,

콧속 시리게 온몸을 얼리는

겨울이 온다.

 

가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이렇게, 젖고 나면

언제 왔냐는 듯 사라져 버리니까.

 

이제 정말 올해의 가을이 가네요. 여러분도 감기 조심하시고 돌아올 겨울에게, 떠날 가을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 그러고보니 벌써 겨울인가? 정말 라디오의 시처럼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모두 바스라져 간다. 나는 어쩐지 더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에 옷깃을 여몄다. 알바도 없는 날이기에, 상훈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곤 카페를 나섰다. 비도 그쳤네. 구름이 흩어지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장마가 정말 끝났나보다. 우산을 들지않아 뭐라도 사갈까 싶어 빵집을 기웃거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에서 온 전화다.

 

“여보세요.”

-지훈 씨 지금 어디에요?

“저 이제 들어가려구요.”

-아, 그래요? 얼른 들어와줄 수 있어요?

“네? 네. 혹시 급한 일 있어요?”

-장마가… 아니, 비가 그쳤잖아요. 빨리 와줄 수 있나 해서요.

“그럼 얼른 갈게요.”

 

알아들은 순 없었지만 어쨌든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급하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쇼윈도에 걸린 목도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 빨리 가야되는데.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와 잘어울리는 남색의 목도리. 기어이 손에 쇼핑백을 집어들고 매장을 나왔다. 그가 하면 예쁠 것 같았다. 새하얀 눈 아래에 목도리를 한 관린. 숨을 크게 마시자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추워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아마도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른 그를 보고 싶었다.

 

오르막길을 빠르게 올랐다. 이렇게 빨리 올라가 본 적이 있었나. 사랑의 힘은 역시 대단한가 봐.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까지는 사랑이라는 말은 어색했다. 숨이 차 고개를 젖히자 구름이 거의 갠 어둑한 하늘이 쏟아져 내릴 듯 나를 덮고 있었다. 장마 전선이 아주 멀어졌나 보다. 나는 멀지만 선명한, 가을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걸음을 빨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집은 어쩐지 냉기가 돌았다. 겨울이 진짜로 오기는 했나 보다. 보일러를 틀어야겠네. 나는 쇼핑백을 품에 안고 작은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관린 씨! 저 왔어,”

 

요. 마지막 말은 뱉지 못했다. 누군가 집을 청소한 것처럼 텅텅 비었다. 이불이 개어진 침대, 빵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은 식탁은 낯설었다. 잠깐 집에 갔을 거야. 생각을 해봐도 아무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쇼핑백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고, 목도리가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나의 심장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가 그답지 않게 전화를 했던 것. 빨리 들어와 줄 수 있냐고 물었던 것. 평소와 달랐는데 왜 나는 몰랐을까. 어두운 방에 불 하나 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았다. 불안했다. 그가 정말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무서웠다. 다시는 볼 수 없을까 두려웠다. 손톱을 물어뜯다 까진 살갗 사이로 핏방울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인지하니 따갑다. 가만히 상처 난 손을 바라보니 코끝이 찡해온다.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어깨와 날개 죽지가 떨려온다. 분명 손가락도. 그를 만나고 나서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쇼핑백과 함께 안긴 낡은 레코드가 보인다. 레코드? 오래됐는지 가장자리가 닳은 레코드를 들어 올리니 내가 모를 수 없는 커버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뻑뻑한 눈을 떠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Elliott Smith의 세번째 정규앨범. [Either/Or] 레코드 판을 들추니 오랜 종이 냄새가 났다. 햇빛에 말려진 바랜 냄새. 아무런 편지도, 마지막 말도 쓰여있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했다. 가을장마와 함께 가을이 떠나고,

 

 

♬Between The Bar-Elliott Smith

그는 떠났다고.

 

 

학교에 나가지 않은 지 벌써 이틀이 되어간다. 나는 휴대폰을 꺼놓은 채 시간을 보냈다. 아니, 시간을 보냈다기보다는 시간을 죽였다. 그와 창밖을 바라보던 바닥에 누워 별안간 시도때도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그가 준 레코드 판을 품에 안았다. 시체가 사는 방처럼 차갑게 얼어버린 공기 때문에 나는 벌써 심한 감기에 들었다. 목이 퉁퉁 부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온통 머릿속을 통째로 찢어버린 생각은 떠나질 않는다.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정말 저 위쪽 어딘가에 사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전화번호는 뭔지. 학교는 다녔는지. 혹시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좋아하는 영화는 있을까. 즐겨듣는 음악도 있을까.

 

그도 나를 사랑했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은 아니니, 집전화다. 받지 않으려다 신경을 긁는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지훈이니?

“엄마?”

-집 앞이야, 문 열어.

 

나는 퉁퉁 불은 코와 눈을 한 채 문을 열었다. 웬일이야, 다리도 안 좋으면서. 아들 학교도 안 나온다는 소리 듣고 찾아와봤다. 누가 그래. 네 친구라더라. 엄마는 못 본 새에 더 늙어있었다. 나는 빨개진 엄마의 손끝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훈아.”

“왜.”

“너 요즘 약 안 챙겨 먹니?”

“무슨…”

 

무슨 약을 말하는 거야. 라고 마지막 음절을 말한 뒤 나는 작게 탄식했다. 아, 약. 맞다. 잊고 있었다. 아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내려가 찬장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매만졌다. 밀려버린 약이 한 움큼이다.

 

“병원에 다시 가볼까? 요즘도 잠 잘 못 자니? 약이 안 맞아?”

“아니야. 그냥 감기 걸려서 못 나간 거야. 내일부터는 학교 가.”

“그래, 그럼. 그래도 약 잘 챙겨 먹고.”

“알겠어. 알겠으니까 엄마 몸이나 챙겨.”

 

엄마가 나갈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잘 감기지도 않는 눈을 꼭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손에는 잔뜩 구겨진 약 봉투가 쥐어져 있다. 항우울제. 수면제, 뭐 그런 것들이 든. 나는 약을 털어 넣고 엄마를 보냈다. 엄마가 다녀가고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미동도 없이 누워 생각했다. 그는 정말 내가 만들어낸 가을의 신기루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나를 떠난 사람들 중 하나인 걸까. 어느 하나의 질문에도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팔로 눈을 가리곤 몸의 힘을 쭉 뺐다. 그저 확실한 건 하나.

 

나는 그에게 주인도 없이 피어버린 한란을 꺾어다 주고 싶었다.

가을 장마에 흐드러지게 피어버린 박지훈을 꺾어다 주고 싶었다.

 

 

 

 

*

 

[야 박지훈. 오늘 개강파티 오지?]

[야 우리 복학하고 첫 개파 아니냐, 오늘은 가자]

[아 나 뻘쭘하단 말이야. 같이 가자고]

 

시끄럽게 울리는 문자를 가만 바라보다 휴대폰을 들었다. 나는 그 가을 이후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쉬다 군대를 다녀왔다. 상훈이는 버티고 버티다 결국 나랑 비슷한 시기에 같이 입대를 하게 됐다. 쉴새 없이 추가되는 문자는 읽기도 벅찰 정도로 길어진다. 하여간.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답장했다.

 

[알겠어.]

 

개강파티는 별다를 게 없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아진 것 빼고는 술 마시고 술 마시고 술 마시고 지겨울 정도로 식상했다. 나와 상훈이는 눈치를 보다 빠졌다. 상훈은 자기도 이젠 늙어서 예전 같지 않다며 울상이다.

 

“늙긴 뭐가 늙어.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가.”

“박지훈 이거 무서운 새끼네. 아우 그래도 너 처음 봤을 때는 조용해가지고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간다.”

 

야! 박지훈! 뒤따라온 상훈이 남방을 여미며 코를 훌쩍인다. 야, 이제 슬슬 춥다. 군대에서 여름에 삽질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킥킥 맞장구를 치다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제법 높아졌다. 상훈은 버스를 탄다며 샛길로 빠지고 나는 지하철을 타러 골목길로 들어섰다. 혼자 남으니 또 뼛속까지 얼려오는 공허함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는 두꺼운 점퍼를 잘 챙겨입어 주머니에 손을 단단히 집어넣고선 신발을 질질 끌으며 걸었다. 어느샌가 더이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파른 달동네의 사다리를 타듯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곤 눈을 꼭 감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뜨거운 아스팔트가 식고 매미 소리가 뚝 끊기는 이맘때가 되면 머릿속에 문신이라도 한 듯 옛 기억들이 가시질 않았다. 차라리 하루종일 잠들어있을 테니 가을이 끝날 때쯤 아무나 나를 깨워줬으면 좋겠다. 차마 평상에는 앉지 못하고 멍청히 서선 누군가와 같이 지켜봤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맞네. 가을이 가장 잘 보이는 곳. 여기가 맞네. 그의 눈동자와 닮은 별들이 끝없이 하늘을 유랑한다. 나는 언젠가 그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가을을 삼켰다. 또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다. 폐가 부풀고 귀가 터질 만큼 숨을 들이마시자 이어폰을 꽂은 음악이 멍멍히 들려왔다. 나는 바람에 머리칼이 눈을 간질여 일부러 눈을 세게 비볐다. 가을이 싫다.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자꾸만 머리를 맴도는 가을이 싫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또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이맘때 라디오로 들었던 시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를 만나기 전 들었던 시. 별이 태어나고 밤이 길어지는 시기에 나에게로 와 온전한 가을이 되어주었던 나의 계절을 만나기 전 들었던 시.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결국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쳐들었다. 목이 메어와 자꾸만 침을 넘겨봐도 나오는 건 울음소리였다. 목을 세워 바라본 머리 위에는 높게 자리한 나무가 쏟아질 듯 자리하고 있었다. 함께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지난여름의 푸르렀던 뜨거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마른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Green Day

나는 말라간다.

 

 

Dry Flower

Fin.

 

 

Back Ground Music List

 

드라이 플라워-9와 숫자들

K.-Cigarettes After Sex

접속-김사월

Sweet-Cigarettes After Sex

The Good Side-Troye Sivan

젊은 우리 사랑-검정치마

Between The Bar-Elliott Smith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Green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