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월장옥(李生越墻屋)
W. 산만

 

 

* 고전 소설 ‘주생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글입니다.

 

“형, 오늘 대본리딩 때 메이크업 하고 가야 할까요?”

“촬영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래도 하고 가는게 좋지 않겠어? 샵 예약은 했는데”

“아 알겠어요. 그럼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 도련님. 창 사이의 밀회(密會)는 이제 그만입니다.’

“헉”

“응? 벌써 깼어? 아직 도착하려면 십 분 정도 더 남았는데”

 

며칠째 같은 꿈이다. 젖은 눈동자, 미색의 도포를 입은 이의 뒷모습, 심장을 옥죄는 것만 같은 마지막 인사. 대체 누굴까…

 

“저기 회의실로 들어가면 돼. 형은 밖에서 기다릴게. 혼자 잘 할 수 있지?”

“드라마 처음 찍는 것도 아닌데 뭐. 일 봐요 형.”

 

메이크업을 마치고 도착한 회의실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시대극은 처음이라 답지 않게 긴장한 건가 싶었지만 문을 열고 그와 눈이 마주하는 순간 알았다. 꿈속의 주인공이 그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내 심장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박지훈입니다.”

 

 

이생월장옥(李生越墻屋)

W. 산만

 

 

“도련님. 오늘은 일찍 들어오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주인어른께 쇤네 진짜 혼쭐이 납니다.”

“알겠어. 아버지께서 퇴궐하시기 전에 돌아올게. 걱정 말아.”

“도련님이 약속을 지킨 적이 있으셔야 제가 걱정을 아니 하지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오늘도 내가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가가 아니라 옹가일세. 마음 놓고 일 보게.”

 

“임금의 행차라기에 기대했는데. 별거 없네. 소란하기만 하고.”

운종가에서 임금의 거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실망스러운 마음에 애꿎은 돌만 툭툭 차며 걸어오던 중 기골이 장대한 이가 자줏빛 명주 보자기로 누군가를 덮어씌워 업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겉으로 드러난 몸뚱이가 어린아이의 것이 아닌데, 저리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집으로 가던 발을 돌려 그 종과 걸음을 맞추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오늘은 늦지 말라던 아범의 말이 떠오른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돌개바람이 일어나며 자주 보자기가 반쯤 걷히었다.

‘어…. 남자….?’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짙은 어둠과 같은 머리칼, 버들잎 눈썹, 버선과 같은 코, 복숭앗빛 뺨, 붉은 입술.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의 절대가인이었으나, 업히기 위해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어깨는 여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넓었다. 사내의 것 치고는 조그마한 발까지 바라본 나는 시선을 올렸고, 그 순간 별을 품은 눈과 부딪혔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소년은 잘 익은 과일같이 빨간 얼굴을 하고 보자기를 겉잡아 다시 덮어써버렸고, 아범의 말을 까맣게 잊은 나는 그를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소광통교를 지나 소공주동 홍살문 안에 당도하자 그는 한 중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를 붙잡을 수도,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던 나는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머엉하니 그 주변을 한참을 배회했다.

 

“도련님, 어디를 갔다 이제 오십니까. 대감님께서 찾으셨습니다.”

“…….”

“도련님.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으신겝니까? 도련님!!!!”

“어.. 뭐라고 했어 아범?”

“대감님께서 찾으십니다. 얼른 사랑으로 들어가 보세요.”

 

“아버님, 저 왔습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게냐? 과거는 보지 않을 셈이냐?”

“말씀드렸다시피 아직은 뜻이 없습니다.”

“쯧쯧… 대대로 이조 판서를 지내 온 우리 이 씨 가문의 명맥을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내 몇 번을 말해야 듣겠느냐.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거라.”

 

평소였다면 나의 말은 들으시려고 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의 얼굴, 특히 별과 같이 반짝이던 그 눈이 아른거려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아…..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하던 나는 주변을 휘 둘러보던 중 한 노파와 눈이 마주쳤고, 혹시 무엇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까하여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말씀 좀 물읍시다. 혹시 저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아시오?”

“박계사(計仕) 댁을 말씀하시는겝니까? 호조에 계시다가 은퇴한지 2-3년쯤 되셨는데요.”

“아 그럼 그 집 자식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자(子)만 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혼인을 하였고, 둘째는 얼굴을 아는 이가 없다 들었습니다.”

“얼굴을 아는 이가 없다…..그 이유도 아는가?”

“너무 흉하게 생겨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릴 때 병을 심하게 앓아 몸이 온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정설로 떠도는 것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노파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의 얼굴을 직접 본 나로서는 두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노파의 말에 더욱 호기심이 동해 귀를 가까이 대주었다.

“여인과 혼인을 할 수 없는 몸이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그 집 종의 말에 의하면 아이의 이름을 받기 위해 부른 노승이 혼사를 치르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라 했다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다 찼음에도 불구하고 혼례를 치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만, 알겠네.”

“네 도련님. 그럼 쇤네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한 사연을 간직한 미인이라니. 그에 대해 더욱 궁금증이 생긴 나는 한참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고, 결국,

 

‘휙’

구름에 가려진 달이 빛을 내지 못해 그의 눈을 닮은 별만 더욱 반짝이던 그 밤, 그의 집 담을 넘고 말았다. 이가의 도령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관아로 끌려가기 전에 아버지의 손에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은 생각을 이기지 못했다. 사위가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 별채와 같이 생긴 곳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고, 본능적으로 그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갔다.

 

“하아….”

“애기씨, 그런다고 땅이 꺼지겠어요? 어제부터 왜 이렇게 한숨을 쉬실까?”

“하아….”

“아니, 애기씨! 애기씨!!”

“…응? 왜?”

“무슨 일 있어요? 어제 잠깐 밖에 다녀온 후부터 좀 이상한데. 밖에서 뭔 일 났었어요?”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멈도 이제 그만 건너가서 쉬어. 고단할 텐데.”

“애기씨 자리에 눕는 것보고 갈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고 어멈이 나왔으나, 방 안의 인영이 한참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아침 해가 움을 트기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휙’

그의 집 담을 넘은 지 벌써 이레째. 그에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다만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매일 밤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몇 시진이 지났을까, 저려오는 다리에 양반의 체면도 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순간, 매일 밤 굳게 닫혀있던 그의 방문이 열렸고, 그가 어둠에 가려져 있는 내 옆을 지나갔다.

 

‘탁’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그의 손을 잡은 것인지 그가 가볍게 휘청거리며 내 옆에 섰으나, 그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놀란 내가 그의 손목을 놓은 순간-

 

“그때 그 도련님이시지요? 저와 눈이 마주쳤던.”

“……”

“벌써 이레째입니다. 왜 자꾸 저희 집의 담을 넘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저잣거리에 떠도는 저에 대한 소문은 들으셨겠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이런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저를… 흔들지 마세요.”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혜야, 내 오늘밤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러니 방문을 걸어 잠글 수 있도록 큰 자물쇠를 가지고 오너라.”라며 시종을 불렀고, 시종이 오기 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매일 밤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근데 왜… 그리고 그 목소리… 분명 울음을 감추는 목소리였어. 뭐지….’

 

한 번만 더 그를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향한 여러 의문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와중에 단 하나 명확한 것은,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비가 오나 날이 좋으나 나는 계속 그의 집 담을 넘었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두 번 반복하고 나자 날씨는 부쩍 쌀쌀해졌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나는 깜박 잠이 든 것인지 앞으로 몸이 크게 쏠렸다. 비몽사몽간에도 넘어지면 아프겠지라고 생각하며 몸을 더욱 웅크렸는데, 땅을 마주하기 전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무언가에 기대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고, 처음 보았을 때처럼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찌…..”

“….저를 흔들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도련님이야말로 어찌하여 이곳에 계속 오시는 것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그냥 그대가 눈앞에 어른하여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소. 그대야말로 내가 집의 담을 넘는 것을 알면서도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거요?”

“….그날 광통교에서 도련님을 본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것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날이 추운데 일단 방으로 드시지요.”

 

….방? 가족 외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을 그의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으나, 그가 꿈꾸게 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마음이 더욱 컸기에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색색의 방석과 베개가 이곳저곳 놓아져있는 아기자기한 그의 방이 그와 꼭 닮은 것만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먕!”

아래에서 무언가 꼬물거리는 것 같더라니, 조그마한 강아지가 꼬리를 휘휘 저으며 내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연파랑의 도포를 왕왕 물기도 하며 자기 주인이 데리고 온 자가 과연 누구인가 탐색하는 모양이 퍽 귀염성 있게 느껴져 등을 쓸어주니 자연스럽게 안겨 왔다. 웃으며 그를 쳐다보니 그는 또 빨개진 얼굴로 조용히 “으뜸아…”라고 읊조렸는데, 그 모습이 또 강아지와 닮아 웃음이 나왔다.

 

“제가 담을 넘은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 도련님은 도련님의 키를 가릴 수 있다 생각하셨습니까. 본디 그림자가 없는 곳에 그림자가 생겼는데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적일 수도 있지 않소.”

“도적이라면 불이 꺼지기를 기다려 바로 습격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저의 처소는 저희 집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도적이라면 이런 곳보다는 아버지와 형님이 계시는 곳을 노리지 않겠습니까.”

 

다소 짓궂을 수 있는 질문에도 총명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던 나에게 이번에는 그가 질문을 던져왔다.

 

“도련님이야말로 왜…. ”

 

“아가야! 괜찮으냐!”

큰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고, 깜짝 놀란 그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내 품을 파고드는 바람에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강아지를 쉼 없이 다독였다.

 

“아버지…”

“덕삼이가 네 방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기에 놀라서 왔다. 괜찮은 것이냐”

“아버지 그게…”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무슨 변고라도 생긴 줄 알고 네 어미와 내가…”

“아버지, 진정하세요. 보시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저 도련님은 누구신 것이냐.”

“그것이…”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하나 귀한 집 도련님 같은데 동무가 가당키나 하느냐. 저 집에서 알면 경을 칠 것이다.”

“아버지 저 분은 저의 동무가 아닙니다.”

“그럼…”

“아버지, 저 이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노승이 지나가듯이 한 말에 더 이상 저의 인생을 걸고 싶지 않습니다.”

“아가야”

“누군가를 은애하게 되면 단명하게 될 거라구요. 그럼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평생 이렇게 숨어서, 그 누구에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과연 제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가, 아비와 어미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뱃속에 있을 때 한 번 너를 잃을 뻔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이러지 마라.”

“네, 압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아버지의 말씀, 한 번도 거역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소광통교에서 처음 도련님의 맑은 두 눈과 마주쳤을 때,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모든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 더 이상 벽 안에 갇히고 싶지 않습니다. 앞날은 알 수 없다지만, 저는 도련님과… 함께 사랑하고 싶습니다.”

 

물먹은 별과 같은 그의 눈이 아버지가 아닌 나를 향한 그 순간, 나에 대해 아무것도, 심지어 나의 이름도 알지 못하면서 나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눈을 마주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도련님!”

붙잡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의 방을 뛰쳐나와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그의 집을 나온 지 이레가 지나도록 나는 그의 집 담을 넘지 못 했다. 그의 감정이 마치 무거운 추처럼 나의 다리에 주렁주렁 달렸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말하는 그의 눈은 너무나도 깊고, 또 깊어서 나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을 대신하여 이 곳 저 곳으로 밤마다 걸음을 옮겼다. 난생 처음 친우를 따라 기생집도 가보았다. 즐거운 듯이 웃고 떠들며, 여인의 가는 허리에 내 팔을 맡기며, 인위적으로 반짝 빛나는 술에 취한 탁한 두 눈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내 다리를 가볍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아….”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오다 세상이 빙글 도는 느낌에 그 자리에 털썩 누워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마주친 별을 보며 그의 눈을 떠올렸다.

 

“보고 싶어…”

뱉고 나서 스스로도 놀라 주변을 보며 입을 틀어막은 나는, 마치 막았던 둑을 터친 것 마냥 쉼 없이 쏟아지는 그의 생각에 젖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휙’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집 담을 넘고 있었다.

‘나 진짜, 뭐하는 거야….’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원에서 은은하게 묻어나는 그의 향기가 발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술기운을 핑계로,

‘오늘만, 진짜 오늘만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리를 모아 품 안으로 당겨 이마를 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앞에서 “먕먕”이라며 자그맣게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고, 그 후

“으뜸아, 어디가는거야, 으뜸!아….”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거불거리는 눈을 뜨자 나를 보며 반갑다는 듯이 꼬리를 홰홰 젓는 강아지와, 놀라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 그가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레 동안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해지며 나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으음…..”

“정신이 드십니까.”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에서 깬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나에게 내밀어진 물 한 잔을 숨도 쉬지 않고 다 마셨다. 그리고,

 

“쿨럭 쿨럭 쿨럭!”

“괜찮으십니까?! 천천히 드시지 않고..”

사레가 걸려 꼴사납게 기침만 해대는 나를 다독여주는 작은 손길에 묘하게 안정감을 느끼며 진정해 간 나는, 서서히 상황을 인지해 가면서 이제 다른 의미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식사는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아니오. 아버지께서 찾으시기 전에 집에 가야하오. 실례가 많았소. 미안하오.”

몸을 벌떡 일으킨 나를 따라 일어선 그의 얼굴은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심히 가라는 인사만 전했고, 나 역시 눈인사를 하며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도련님, 제 이름은 박지훈입니다.”

라며 그가 자그만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일러주었고, 나는 문을 닫았다.

 

‘지훈… 박지훈….’

두통을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누워 하루 종일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중인답지 않게 잘 지어진 이름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자랐을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을 말하던 그의 눈은 울멍거리기는 했지만 단호했고, 유약하고 앳된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 앞에서도 단단했다.

 

‘……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은애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지 한 번도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기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젯밤의 추태에.. 새벽에 그렇게 나온 것에 대해 사과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가 또 보고 싶어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담 앞에 다시 한 번 섰다. 오늘따라 높아 보이는 담을 넘으려 호흡을 고르던 때에

 

“도련님…?”

“……? 그 누구인가?”

“지훈 아기씨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그.. 그것이…”

“아기씨께서 행여 도련님이 찾아오시거든 지체 말고 문을 열어 주라 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민망한 기분도 잠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는 시종을 따라 그의 집 대문을 통과하여 들어갔다. 그의 집을 드나드는 동안 대문으로 출입한 것은 처음이기에 헛기침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대문을 열어준다는 것이 그가 나에 대한 경계가 없다는 표시인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중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을 여럿 부릴 수 있다는 것에서 알아 봤듯이, 그의 집은 꽤나 부유한 편에 속했고, 대문에서 그의 방인 별채까지 이어지는 길 역시 잘 꾸며져 있었다. 특히 사랑과 별채 사이의 정원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는데,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그를 배려한 것으로 보였다.

 

“아기씨,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컥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문을 열던 기세와는 달리 수줍은 목소리로

“오셨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오.” 라며 웅얼거렸고,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방 안에 들어가자 쫄쫄 따라오는 강아지를 안아주며 자리에 앉았고, 그와 나는 한동안 허공만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안겨 있다가 버둥거리며 지훈에게 가려는 강아지를 놓아주며 나는 어제 일은 미안했다며 작게 사과했고 그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십니까.”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도련님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물론 같은 마음이 아니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 또 담을 넘으신겝니까.”

“그것이…… 친우가 되어 주고 싶었소.”

 

그의 곧은 눈앞에서 망설이던 나는 한참 만에 대답을 내어 놓았고, 시무룩한 어조와는 달리 기대감에 반짝이던 그의 얼굴이 가라앉는 것을 보며 변명하듯 주저리 말을 덧붙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듯한데, 자유스럽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집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워… 말동무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낯선 이라 경계할 듯하여 담을 넘었던 것이오. 미안하오.”

 

이 마음이 가까운 친우인 성우에 대한 마음과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보고 싶고, 이름을 대뇌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한참을 말없이 강아지의 등만 쓰다듬고 있던 그는

“도련님의 그 마음…. 고맙습니다. 저희 집에는 도련님께서 오고 싶으실 때 언제든 오셔도 됩니다. 시종들에게 일러두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뒤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 했다.

 

“도련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도련님의 존함을 여쭤볼 수 있을까요…”

“내 이름은.. 이관린이오. 장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소.”

“관린….. 장마….. 참으로 멋진 이름입니다. 도련님과 잘 어울립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낮은 목소리, 부드러운 눈웃음. 타인에게 불리는 내 이름이 이토록 나의 가슴을 뛰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친우’라는 말 아래 숨어 매일 밤 그를 보러 갔고,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져가는 만큼, 심리적 거리도 점차 가까워져 갔다.

 

“도련님은 강아지를 좋아하십니까 고양이를 좋아하십니까?”

“그건 왜 묻소?”

“그냥 궁금해서요. 으뜸이하고도 잘 놀아주시지만 지난 번 정원에 들어온 나비를 굉장히 예뻐하시는 것 같아서요.”

“고양이답지 않게 잘 따라서 예뻐했던 것뿐 강아지를 더 좋아하오.”

“저도 강아지가 더 좋습니다. 으뜸이를 제가 어찌 키우게 되었나면-”

강아지가 더 좋다는 나의 대답에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으뜸이의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를 만져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졸졸 따라오는 것을 차마 그냥 두지 못하고, 어…..”

“…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아.. 아닙니다. 조금 갑작스러워서…. 괜찮습니다.”

 

빨개진 얼굴로 입술에 꾹꾹이를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슬며시 웃는 그가 귀여워서 떼려던 손을 한참 머리 위에 두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구려. 오늘 으뜸이 산보는 틀렸는걸.”

“으뜸이가 들으면 실망하겠습니다. 하루 종일 도련님만 기다리면서 문만 바라보던데.”

“그대는 어떠했소?”

“예?”

“그대도 으뜸이와 함께 문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오?”

“….. 아니, 아니, 저는-”

“되었소. 농이오. 많이 오는 것이 아니니 슈룹을 쓰면 괜찮을 듯하오.”

 

당근처럼 발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는 그가 우스워 더욱 놀릴까도 생각했지만, 혹여라도 자기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오해할까 이쯤하기로 하고 문을 열었다. 풀 냄새와 비 냄새가 섞인 싱그러운 향이 바람을 따라 방으로 들어 왔고, 이러한 향과 함께라면 이 날씨의 산책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며 한 팔에는 나가려 보채는 으뜸이를 안고 한 손에는 슈룹을 든 채 처마를 나섰다. 가볍게 씩씩대던 그도 차분한 분위기에 동화된 것인지 어느덧 얌전해져 조금 뒤에서 나를 따라 종종 걸어왔고, 그 모습이 또 퍽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정원이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다 하나 매해 같은 모습을 보는 것이 지겹지는 않소?”

“…..그래도 철마다 다른 꽃이 피니까요.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 저의 낙이기도 하고.”

“내 말은… 이렇게 갇혀있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지겹지는 않느냐는 것이오.”

“… 압니다. 하오나 어찌하겠습니까. 못난 저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욕심을 부릴 수는 없지요.”

“그 노승의 말을 진짜라 믿소?”

“글쎄요… 믿고 싶진 않지요. 전 오래오래 도련님을 보고 싶으니까.”

 

나는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고, 장난스러운 입매와 달리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얕은 슬픔으로 젖어있는 것을 보았다. 왼쪽 가슴에 아릿하게 이는 통증을 외면한 채, 그의 시선을 돌리고자 시답잖은 질문들을 했고, 그 역시 순간 어색해진 나를 눈치 챈 것인지 장단을 맞춰주었다.

 

“어, 그럼 그대는 딱 하루만 자유롭게 집밖을 나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소?”

“해보고 싶은 것이라기 보단.,,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매년 이맘때 – 중앙절이라고 하던가요? 광통교 주변에 큰 국화들이 흐드러지게 핀다던데, 그것을 꼭 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이유가 있소?”

“본디 노란 빛깔을 좋아하기도 하고… ‘동동’에 보면 국화꽃으로 약을 만들며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기원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소원이 꽃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아 국화를 좋아합니다.”

 

그 눈, 사랑을 말하며 다시 또 단단해진 그의 눈을 보며 나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휘청이는 나를 그가 빠른 움직임으로 잡아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

 

나의 허리 양쪽을 붙잡은 그의 작은 손, 둘 다 슈룹을 놓쳐버린 탓에 젖어가는 머리와 몸에서 나는 그의 체향, 놀란 탓인지 거세게 쿵쾅거리는 그의 가슴. 살짝 벌어진 입술. 우리 둘을 중심으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아찔한 느낌.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떠한 묘술을 부린 것인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먕먕”

본의 아니게 우리 사이에 낀 으뜸이가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짖기 시작했고, 그와 나는 황급히 몸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옷도 많이 젖었는데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어색한 웃음과 마치 목각인형 같은 빳빳한 걸음걸이로 방까지 돌아오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계속 두근거리는 심장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나는 평소보다 이르게 귀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으뜸이는 왜 거기서 짖어가지고..’

“아악!!!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아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나는 머릿속에 갑자기 두둥실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 당황하여 뺨을 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와의 묘했던 분위기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넋을 놓았고, 내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는 것을 아범이 기침할 시간이라며 찾아와 나를 부를 때야 깨달았다.

 

“중앙절… 국화….”

“자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건가?”

“아, 아무것도 아닐세.”

“싱겁긴.”

 

오랜만에 들린 성우와 차를 마시면서도 나는 눈앞에 있는 친우에게 통 집중하질 못했다. 혼자 뭘 자꾸 중얼거리냐는 잔소리를 몇 번이나 들으면서도 내 신경은 오직 어젯밤의 대화에만 쏠려있었다.

 

“그…”

“뭔데? 아까부터 계속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자네 중앙절에 광통교 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뭐 나야 워낙 풍류를 즐기는 자가 아닌가- 작년에 가 보았지.”

“어떤가?”

“뭐 사람도 많고 장도 서서 맛있는 것들도 있고.. 근데.. 그것은 왜 묻는가? 자네 혹시.. 관심 있는 여인이라도 생긴 것인가?”

“아-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닌 것이 아닌데-, 뭔가, 어디서 만난 것인가? 아리따운가?”

“아니, 그 다른 친우가 가보고 싶다고 하여..”

“자네가 나 말고 친우가 어디 있나? 얼른 말해보게.”

“아 설명해주기 싫으면 됐네! 이만 집으로 가보게!”

“아, 알겠네 알겠어. 앉아 보게.”

 

‘… 꽃이 활짝 피어있는 한낮과 등이 켜져 있는 초저녁 때에 사람이 많다라.. 사람이 많은 곳에 갈 수 있으려나….’

“도련님, 도련님!”

“….응?”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몇 번을 불러도 대답도 않으시고.. 많이 피로하십니까?”

“아, 아니오. 괜찮소. 그…”

“…..?”

“친우에게 물어보니, 아, 그 친우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아는데, 중앙절 때 광통교가 한낮과 초저녁에 사람이 많다고 하오. 근데 또 그때가 제일 아름답다고 하는데, 갈 수.. 있겠소?”

“…. 저를 위해서 그곳에 대해 알아보신 겁니까…?”

“그것이.. 그.. 가고 싶다고 하니까.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이러다 얼굴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이 느껴져 창피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 앞에서 말을 더듬은 적도, 망설인 적도 없는데, 그의 앞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는 낯선 내가 자꾸 튀어나오는 것 같아 어색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제 가도 괜찮으나 부모님께서 걱정하실듯하여…아버님께…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의 마음, 고맙습니다.”

 

정말 행복하다는 듯,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내가 왜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와아”

“그리 좋습니까”

“너무 예쁩니다. 이렇게 많은 꽃은 처음 봅니다.”

 

달빛 아래 자신의 노란 얼굴을 자랑하듯 활짝 핀 국화를 바라보며 웃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천진하기 그지 없었다. 사람이 많은 낮에 돌아다니는 것을 걱정하는 그의 아버지 덕에 결국 새벽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맙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사실 도련님이 그날 그렇게 가버리신 후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도련님은 그냥 한낱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는데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

“그렇지만 지금은 다 괜찮습니다. 도련님께서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저… 그저 지금처럼 정월에는 함께 달을 보고, 돌아오는 봄에는 흩날리는 벚꽃을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연노랑의 도포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물먹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를 안아주고 싶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이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도련님…”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그리고 그 후년에도, 함께 가을을 맞이할 것이오.”

“…….흑…”

 

내 말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 그를 꽉 안아 머리에 입을 맞추며 지난 그때처럼 그에게 좀 더 닿고 싶다고 생각했고, 조심스럽게, 그가 놀라지 않게 숨결을 나눠 가졌다. 어설프고 서툰 입맞춤에 결국 둘 다 웃음이 터졌지만, 서로를 안은 손은 풀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소?”

“…. 도련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아픔이라면, 아픔이 아닐 것입니다. 괜찮으니.. 안아주세요.”

 

열기에 흐려진 눈동자, 짙어진 눈꼬리에서 흐르는 눈물, 자꾸 짓이겨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릴 때마다 솟아오르는 목빗근,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 판판하면서도 보드라운 배, 제법 사내다운 어깨와 대조되는 얇은 허리, 선이 아름다운 허벅지, 뜨거운 그의 안, 평소보다 낮고 축축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분명 고통스러울텐데도 모든 것을 감내하는 그의 마음. 새벽이 가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그를 안으면서 이번 생에 이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어쩌면 다음 생 까지도 잊지 못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이 시간까지 대체 어디 계셨던겁니까! 주인어른께서 찾으셨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었네.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

“이미 입궐하셨습니다. 오늘 퇴궐하실 때까지 도련님을 어디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품 안에서 잠든 그를 두고 갈수도, 가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가 깨기를 기다리다가 귀가가 평소보다 훨씬 늦어 버렸다. 본디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와 문안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버지에게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아버지”

“네 이놈 요즘 대체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게냐”

“그것이…”

“무릇 학업에 정진하는 자는 이른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법. 근데 네 녀석은 그것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필시 여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겠느냐.”

“당치도 않습니다 아버님. 저는 그런”

“네 이놈 아비에게 거짓을 말할 참이냐. 아범의 입만 다물게 하면 될 줄 알았어! 내 모를 줄 알았느냐 고얀것. 당장 이 놈을 끌어 반야사에 보내거라. 내 이미 지주스님에게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아버지 저는 못갑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과거도 볼 것이니 제발..”

“듣기 싫다. 당장 끌어가지 못하겠느냐!”

“아버지 그럼 제발 그 사람에게 상황이라도 설명할 수 있도록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말미를 주십시오. 이렇게는 못 떠납니다. 아버지!”

“오냐 이제야 네 놈이 사실을 고하는구나. 뭐하느냐 이놈을 얼른 썩 내 눈 앞에서 치워버려라. 과거에 합격하기 전까진 절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야.”

 

아버지와 부딪히고 난 열여섯 이후, 정말 처음으로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대답과 손찌검뿐이었고, 결국 나는 장정들에 이끌려 절에 감금되었다.

 

“하아…..”

“또 도망치다 잡혀왔는가. 첫 달에는 식음을 전폐하더니 이제는 도망..벌써 몇 번 째인가. 그러다가 몸 상하네.”

“성우…”

“자네 몰골을 보게. 창백하게 비쩍 말라서는.. 그 사람이 보면 놀라 까무러칠걸세.”

“……”

“그 사람의 이야기만 나와도 눈물을 흘리니 내가 말하기가 민망하네 그려. 차라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빨리 과거에 급제를 하여 그 사람을 만나러 가게. 아버님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은가.”

“혹시 편지는….”

“말했잖은가. 아버지께서 나에게도 사람을 붙이셨다고. 절에서 나가기 전 후, 거의 몸수색을 당하다시피 하네. 우리 아버지께도 너무 과하시지 않느냐 하소연 해봤으나 꿈쩍도 안 하시네. 아들보다는 친우이신 모양이지….”

 

‘정월에는 함께 달을 보고, 돌아오는 봄에는 흩날리는 벚꽃을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켜주지 못한 그의 바람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고, 보내지 못한 연서는 서랍에 쌓여갔다. 탈출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꿈에 보이는 상처받은 그의 얼굴은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날 악몽으로 밀어 넣었다.

 

“하….”

하지만 현재 이 상황에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성우의 말처럼 과거 급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밤낮없이 코피를 쏟아가며 학업에 정진한 결과 그해 가을 이루어진 특별시에서 급제를 했고, 나에게 주어진 금족령이 풀린 날 바로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쾅’

“도련님 이게 무슨… 도련님!”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 아버지!!!”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느냐.”

“아버지, 그러니까 제가 단 하루만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게 설명할 수 있는 시간 단 하루만 달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네가 지금.”

“그가… 그가….”

 

‘이리 오너라. 지훈! 내가 왔소. 지훈! 이리 오너라!’

도령의 체면도 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찾는 나에게 그의 형이 나타났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덥석 붙잡고 지훈의 행방을 물었다.

‘지훈은 어디 있소. 내가 돌아왔다고 어서 일러주시오.’

‘이제야 와서 그 아이를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년이 다 되도록 기별도 없으시더니.’

‘사정이 있었소. 화가 많이 난게요? 내가 다 설명할 것이니 얼굴 좀 볼 수 있게 해주오.’

‘그 아이 얼굴, 우리도 보고 싶어도 못 봅니다.’

‘그게 무슨… 어디로 멀리 간 것이오?’

‘…..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도령 때문에 그 빌어먹을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 띄기 전에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을 보면 양반이고 뭐고 아마 가만두지 않을겁니다.’

‘쾅’

……. 그의 형이 입고 있던 옷은…. 하얀 상복이었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절 그렇게 절에 보내지만 않으셨어도…! 아버지께서… 흐윽…”

“쯧쯧 한심한 놈,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아비에게 말하는 꼴 하고는… 과거에 급제해서 사람 구실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네 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여봐라 이 놈을 내 눈 앞에서 썩 치우거라.”

 

….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은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도련님’

‘………’

‘도련님, 쇤네 혜입니다.’

‘…… 그래…자네가 어이..’

그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문밖으로 밀려난 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넋이 나가 한참을 나무 아래 주저앉아 있던 나에게 그의 계집종이 다가왔다.

‘아기씨가… 언젠가 혹시라도 도련님이 자길 찾아오거든 드리라 하였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 여인이 나에게 건넨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도련님….. 뭐라도 좀 드세요. 이러다 병나십니다.”

“생각 없네. 물리게.”

“성우 도련님.. 저희 도련님 좀 살려주세요. 며칠 째 이러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신 지가 벌써 사흘이 넘어갑니다.”

“자네 진짜 목숨이라도 버릴 생각이야?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

“이루지 못한 연심에 자네가 힘든 건 알겠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도 자네가 이러고 있기를 원하진 않을걸세.”

“……..”

“자네 진짜. 내색은 안 해도 아버님도 술이 느셨다하네. 가족들의 마음에 대못이라도 박을 생각인건가.”

“…….”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걸세. 얼른 일어나-“

“자네가… 자네가 뭘 아는가..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내가 어떤 마음인지 자네가 어떻게 아느냐 말이야… 어떻게…! 쿨럭…”

“도련님!”

“……. 내말이 자네 심기를 건드렸다면 미안하네. 오늘은 이만 물러갈 것이니 제발 식사 챙기게. 응?”

 

성우와 아범이 물러난 후, 너무 많이 만져 끝이 닳아버린 그의 편지를 다시 꺼냈다. 그의 손 끝을 닮은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보이는 순간, 메말라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도련님께

도련님, 아마도 이 편지가 제가 도련님께 올리는 마지막 편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솔직해도 되겠죠?

사실 도련님을 만나기 전 저는 운명 같은 것을 믿지 않았어요.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 때에 저에게 겨누어진 칼과 같은 노승의 말 따위 믿고 싶지 않았어요. 부모님께서 저를 잃을까 워낙 걱정하셔서 부모님의 말씀을 따른 것일 뿐, 제가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그러한 걱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날, 너무 답답한 마음에 시종들을 졸라 부모님 몰래 외출을 한 날, 도련님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도련님의 맑고 깨끗한 눈과 마주한 순간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거부하고 아무리 믿지 않아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도련님이 저를 처음으로 찾아오신 날부터 도련님을 방으로 들이던 그 날까지, 저는 매일 밤을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도련님도 계속 나를 찾아오는 것을 보면,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믿고 저의 마음을 표현해도 될지. 그리고 가장 아름다울 때에 비극적일 저의 삶의 결말을 도련님과 함께 바꿀 수 있을지.

그래서 그날, 사랑한다는 저의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나신 도련님을 보며, 흔들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저를 계속 찾아오신 도련님을 원망하기도, 도련님께 너무 성급히 마음을 표현한 제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련님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혹여라도 다시 도련님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시 저를 보러 와주신다면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도련님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친우가 되어주고 싶다고 하셨을 때, 다시 한 번 다짐했었어요. 너무 좋아하는 티도 내지 말아야지, 그 이상의 자리는 욕심내지 말아야지 하고. 하지만 저를 향해 웃어주시는 도련님을 보며, 도련님의 맑은 눈에 제가 담기는 것을 보며 하늘도 날아오르는 풍등처럼 제 마음은 계속 부풀기만 했어요. 죄송해요.

도련님이 저에게 찾아오셨던 마지막 날, 도련님께서 그날의 분위기에 충동적으로 저에게 미래를 약속하셨다 해도, 그리고 그 마음으로 저를 안으셨다고 해도, 저는 그날 정말 행복했어요. 처음으로 달이 아닌 해 속에 빛나는 도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도련님이 달뿐만 아니라 해하고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욕심을 냈나 봐요. 밤뿐만 아닌 낮에도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도련님의 옆자리에 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마주 보고 오랫동안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결국, 제가 이렇게 더 이상 도련님을 뵐 수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하나 봐요.

도련님께서 오시지 않는 동안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다시 가을이 돌아왔어요. 도련님을 기다리며 도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그것보다도 그냥 내내 보고 싶었어요.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자존심도 다 버리고 제가 마음을 잘 감출 터이니 다시는 가시지 말라 매달릴 수 있을 만큼. 도련님께는 잠시 스쳐갈 기억이겠지만, 저에게는 모든 것이 되어버려서, 마음에 도련님만 분명히 남아서, 다른 것은 담을 수 없었거든요.

손에 자꾸 힘이 빠져서 붓을 놓칠 것만 같아요.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때인가 봐요.

도련님. 창 사이의 밀회(密會)는 이제 그만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을 향한 제 마음은 저의 세계가 끝나더라도 영원할거에요.

마지막이니까 도련님의 이름 한 번만 불러 봐도 되겠죠?

…..관린, 관린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노란 국화가 필 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생각 해줄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정말 그것 이상 욕심내지 않을게요. 그러니 부탁해요. 그리고 내 첫 정이자 마지막 정인 그대가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요. 그럼….

비단 장막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고 새벽은 멀었지만

텅 빈 뜨락에 이슬 내려 구슬 병풍은 더욱 차갑다.

못 위의 연꽃은 시들어도 밤까지 향기 여전하고

우물가의 오동잎은 떨어져 그림자 없는 가을.

물시계 소리만 똑딱똑딱 서풍 타고 울리는데

발 밖에는 서리 내려 밤벌레만 시끄럽구나.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 써 놓았는데

내일 아침 남쪽 동네로 전해 준다네.

편지 봉하고 뜨락에 나서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별만 밝네.

차디찬 금침에서 뒤척이며 잠 못 이룰 때

님과 함께 보았던 달이 정답게 내 방을 엿보네.

 

생각해보면 그와 만났던 마지막 밤, 그를 안으면서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그대를 은애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은 그가 나를 기다릴 수 있도록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내 탓이었다.

 

“이관린, 장난이 아니라 너 이러다 진짜 죽어. 어의가 처방한 약도 거부하면 어쩌자는거야. 너 지금 몰골 정말 말도 안 나와. 제발 약도 먹고 밥도 좀 먹어.”

“……..”

“관린아, 제발.”

 

성우의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감은 눈으로 보이는 그의 웃는 얼굴이 너무 선명해서, 너무 좋아서. 뜨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

감은 눈 사이로 다시 또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난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그의 모습이 흐려져서 싫은데.

 

“너도 그러다가 그 사람 곁으로 가버릴까봐 무섭다고 새끼야. 제발…”

 

미안해 성우야. 근데 난 그렇게 되면 너무나 좋을 것 같아.

미안해 지훈아. 한 번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서. 내 마음을 좀 더 일찍 알아채고 표현하지 못해서.

만약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내가 먼저 널 알아볼게. 그리고 먼저 말해줄게.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관린아, 관린아! 아범! 얼른 의원을 불러오게. 어서-”

 

“우리 지훈이, 기분 좋아 보인다? 드라마 하는 것이 그렇게 좋아?”

“아유 말도 마요 언니~ 지훈이 얘가 관린씨 팬이잖아요. 근데 관린씨가 그 드라마 주연이거든.”

“아 그래?”

“심지어 핸드폰 배경화면도 라이관린씨에요. 맨날 바꾸고 자랑한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코디누나 옆에서 “지훈이 오늘 그럼 머리 예쁘게 해줘야겠네~”라며 웃는 디자이너쌤께 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좋다 못해 하늘을 뚫고 갈 기세였다. 5년 전, TV에서 “그냥 자꾸 네가 보여”라며 슈트를 입고 누워 섹시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이에게 심쿵사를 당한 뒤 덕질을 시작한 나에게 ‘관린파티’에서 만난 누나가 흘러가듯이 한 말, “그냥 네가 데뷔를 해 와꾸가 되잖아” 에 영감을 받아 정말 연기학원에 등록, 데뷔를 한 나였기에 그야말로 ‘성덕, 계탔다’라는 말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관린님을 뵈면 뭐라고 해야 하지… 존경한다? 이건 좀 오바고… 팬이다? 아 초면에 좀 부담스러울 것 같고.. 좋게 봤다? 너무 건방지잖아. 아이씨 뭐라고 하지…’

 

대본 리딩에 30분이나 일찍 와 손끝을 물어뜯으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이 배변패드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며 내 주변을 빙빙 도는 맥스와 비슷하다 느껴 헛웃음이 터진 찰나,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맑고 깨끗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고, 그 순간, 나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의 흐름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자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박지훈입니다.”

 

다시 허리를 들기도 전에 바람 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온 그는 갑자기 한 품에 나를 안았고, 그 순간, 어떠한 감정의 순환도 없이, 맞닿은 품과 내 눈이 바로 연결된 것 마냥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찾았다.”

“……..”

“이제, 다시는, 혼자 아프게 하지 않을게. 놓치지 않을게.”

“…….”

“우리가 운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게.”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