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삐뚤어질게요
W. 세월

 

*

“야.”
“…”
“야.”
“왜.”
“오늘 나한테 하루만 투자하면 안 돼?”
“어. 안돼.”
“왜?”
“바빠.”
“얼마나?”
“넌 무슨 애가 그렇게 끈질기냐?”

나는 슬리퍼로 바닥을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너도 애야, 등신아.”
“어쨌든 못 놀아.”
“…사실 나도 엄마한테 허락 안 받았어.”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였어.

나는 친구들이 뭘 하자고 하거나, 어딜 가자고 할 때,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엄마한테 여쭤보고.”

그러자 늘 나에게 먼저 놀자고 제안하던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로 먼저 가서 묻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런 내 처지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아니다. 불만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연하게 적당히 빠져나가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을 뿐, 중학생 때는 꽤나 불만이 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삐뚤어질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착실한 모범생으로 살았다.
부모님 입장에서 그게 모범생이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지만.

나만큼 학교생활이랑 복장, 두발을 바르게 하고 다니는 애가 어딨다고, 나한테 그렇게 학교 다닐 거면 자퇴를 하랜다. 친구랑 시내에서 논다고 거짓말하고 서울에 몰래 다녀온 게 늘 화근이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사회악이라고, 그럴 바에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했다. 아니, 대체… 나 친구들한테 너는 왜 그렇게 도덕적이냐는 소리 듣고 다닌다고요.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적당히 넘어도 되는 선만 넘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으로 자라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중학교 2학년 때 까지는 가정이 내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중3부터 시작하여 고등학생인 지금까지는 학교가 가장 큰 원인이자 구원이었다. 어느 정도 겉으로 보이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만 지키고 딱히 지키지 않아도 되는 허울뿐인 교칙과 규칙들은 내 마음대로 넘어 다녔다.
등교할 때 체육복을 입고 오지 말라던지 아니면 겉옷 안에 교복 마이를 반드시 입으라던지. 그런 허울뿐인 것들 말이다.

친구와 놀 때면 허락을 맡아야 했고, 허락을 맡는 것은 어느 정도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화목하기야 했지만, 쓸데없이 보수적인 엄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는 무언가 사달라고 울며 떼를 쓴 적이 없었다. 말하는 게 두려워서 갖고 싶은 게 있어도 말하지 못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많이 갖고 싶었던 것도 어차피 말 못 할 것이란 걸 알았는지 내 무의식이 자기 멋대로 합리화를 하기 일쑤였던 것 같다. ‘근데 사실 저거 그닥 갖고 싶지는 않아. 있으면 괜찮긴 하겠다.’ 하고.

 

*

우리 반에도 나 같은 애가 있었다. 걔네 부모님은 우리 집보다 더 엄격한 것 같았다. 왜냐면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말 안 하고 머리를 바꾸고 온다던지 그런 것에 대해 조금 더 두려움이 사라져서 그나마 자유롭게 살고 있었던 나와 달리, 걔는 그냥… 그래 보였다. 중학생 때 자기 의견 같은 거 없이 그냥 하자는 대로 하던 열다섯 살 박지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 눈이 갔다.

“라이관린.”
“어?”
“너 학교 끝나고 뭐 해?”
“학원 가.”
“인생 진짜 재미없게 산다, 너.”
“뭐 어때. 다 미래를 위한 건데.”

답답해.

“그게 무슨 미래를 위한 거야. 공부만 하면 밥 먹여준대? 누가 그러냐? 아무도 보장 안 해줘.”
“그러는 너야말로 학원은 안 다니지만 알아서 공부하잖아. 성적도 어느 정도 나오고. 너는 공부 왜 하는 건데?”
“엄마 아빠가 그러라고 가르쳤으니까.”

말하면서도 좀 호구 같았다.

“나도 그래서 하는 거야.”

근데 돌아오는 대답도 호구였다.

“관린아.”

그래서 그날 나는 녀석과 함께하는 첫 일탈을 실행했다.

 

*

“이래도 돼…?”
“안될 게 어딨냐.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먹고사는 거랑 코노랑 관련 있어?”
“… 스트레스를 풀어야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성적이 잘 나올 거 아냐. 하루 공부한다고 성적 오르냐? 하루 안 한다고 안 떨어져.”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노래방 기계로 ㅃㄸㅎㄱ를 검색하니 삐딱하게가 떴다.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단 말이야.

“나 먼저 부른다. 부르는 동안 예약해.”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ㅈ1~ 열심히 열창을 해대는 나를 한심하게 보던 라이관린이 눈빛은 밥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헤매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지는 뭐 얼마나 잘 논다고. 얼마나 잘 부른다고! 노래도 나보다 못하더구만! …사실 비등비등했지만. 어쨌든 간만에 집에 오는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서 시내로 빠졌다.

“우리 밥 먹자.”
“지금 학원 가도 안 늦는데…”
“지도 존나 잘 놀아놓고 이제 와서 발뺌이야. 그냥 오늘은 째. 그러기로 했잖아?”
“누구랑?”
“나랑.”

대체 언제…? 라이관린의 얼굴에 그렇게 써져있었다. 아까 학교에서, 이 자식아. 물론 나 혼자^^.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라이관린이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차도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관린네 영어학원 차량이었다.

“관린아! 왜 교문 앞에 없고 여기 있어?”
“아, 저…,”
“관린이가 아파서요! 제가 같이 병원 가려고 데리고 왔어요!”
“뭐?”
“그릏드그흐르…”

운전기사님께 맑게 웃어 보이며 이를 꽉 물고 낮게 읊조리자 라이관린이 체념이라도 한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아파서 쉴게요.”
“그래, 그럼 내일 보자.”
“내일 봬요.”

초록불로 바뀌어 차량이 떠나고, 우리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분위기가 어쩐지 별로였다. 우리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너가 학원 가버리기 전까진 야자도 같이하고 조별 활동도 몇 번 했잖아…? 떠올려봐, 관린아…
라이관린은 초롱초롱한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시선을 회피하며 손가락으로 한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가자. 맛있어.”

기다란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한 백반집이 있었다.

 

*

가게에 들어와 메뉴판을 보니 된장찌개, 김치찌개, 청국장… 정말 정직한 백반집이었다.
오! 제육볶음도 있네! 난 저거! 눈을 빛내며 말했는데 라이관린이 그건 2인분 이상이어야 돼. 딱 잘라 말했다. 뭐가 문제지…? 우리 두 명인데?

“난 제육 안 먹어.”
“왜? 너 소고기 안 먹어?”
“제육볶음 소고기 아니야. 돼지야.”
“…돼지라고 그랬냐?”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돼지고기라고.”
“그럼 돼지고기라고 하던가 왜 하필 돼지라고 하는데?”
“아니, 아 진짜 아니라고. 아니… 아 아닌데 그런 거…”
“푸하하! 야 장난이야. 그럼 난 된장찌개. 난 된장이 좋아.”
“나도 그걸로.”

여기 된장찌개 2인분이요. 네~ 아주머니의 경쾌한 대답과 함께 우리 사이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할 말도 없고, 휴대폰을 만지자니 내가 먼저 땡땡이치자고 해놓고 뭔가 웃기고… 애를 앞에 앉혀놓고 폰 하는 건 좀 예의에 어긋나잖아. 여윽시. 여윽~시 예의범절이 존나 바른 박지훈. 햐, 이런 사람을 두고 어머니 아버지는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혼을 내셨다 이겁니다… 이러니 내가 억울해 안 억울해? 안 삐뚤어진 게 기적이라고 학교 애들이 입 모아 말한다 이거야.

“지훈아.”
“어?”
“너는 왜 공부해?”
“아까 말했잖아. 시켜서 하는 거야.”
“그런 거 말고, 공부해서, 그다음 단계에 뭔가 하고 싶은 거 없어?”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전부다 예술 쪽이었어서.”
“그래도 요새는 성적으로 대학을 많이 가잖아. 그게 좀 더 안정감 있고, 전형도 다양하고.”
“음… 잘 모르겠다. 그러는 너는 하고 싶은 거 있어? 공부 왜 해? 시켜서?”

걔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랬던 거긴 하지만, 속에서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답하지 않는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자 무료함을 느낀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어젯밤에 올라온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곧바로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찌개와 밥, 반찬을 서빙하고는 직원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젓가락 짝을 맞춰 라이관린에게 건네는 순간,

“염색, 하고 싶어.”

돌아온 대답이 뜬금없다거나 의외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밥 먹자.”

녀석과 나 사이에 놓인 찌개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

나는 하루에 한 시간.
나는 허락받고 눈 앞에서.

이게 우리의 주된 대화였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에 대해서.
나는 언제, 무슨 어플, 얼마나를 했는지 샅샅이 볼 수 있는 어플을 부모님께서 깔아놓으신 상태였고 라이관린은 그런 건 없었지만 눈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다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남들이 들으면 경악하거나 웃을 것이었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뭐 먹었어. 그래? 난 이거 먹었어. 같은 뉘앙스로 덤덤하게 대화를 해나갔다.

참 피곤하게 산다, 우리.

 

*

다음 날 학교에 오자마자 나는 라이관린의 자리로 찾아갔다. 아홉 시까지 등교여서 나는 보통 55분에 학교에 도착하곤 했는데 라이관린은 항상 30분쯤에 도착해있던 터라 나도 일찍 가고 싶었다.

“야, 어떻게 됐냐?”
“뭐가.”
“학원 말이야. 엄마한테 전화 안 갔어?”
“가긴 뭘 가. 내가 평소에 성실하게 잘 다니니까 무슨 말을 해도 학원에서는 음, 그렇구나. 하지.”
“와, 너 진짜… 근데 무슨 말을 해도? 그럼 그 전에도 거짓말한 적 있어?”
“……아니.”
“있구만.”

평소에 온갖 모범생인 척은 다 하더니. 역시 라이관린도 사람이었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사냐. 가끔 어제처럼 바람도 쐬고 해 줘야 숨통이 좀 트이지. 말하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나도 하라는 대로 하고 살면서.

“수학여행 때 같이 앉을 사람 없지.”
“몰라.”
“에이, 없잖아~”
“모른다고.”
“나랑 같이 앉자.”
“생각 좀.”
“비싸게 구네. 나도 그럼 생각 좀 해볼게.”
“그러던가. 나 어제 밀린 숙제 해야 되니까 니 자리로 좀 가라.”

핵 인싸(자칭)인 박지훈 님께서 핵 아싸(추정)인 라이관린 자식 옆에 앉아주기로 결정했다. 오늘도 역시 독단적으로.

 

*

수학여행 당일, 멀미를 한다는 라이관린 때문에 두 번째 앞자리에 앉은 나는 가방에서 어제 사 온 과자들을 하나하나 꺼내 뾰로통한 표정의 짝꿍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는 간식이지. 초록 케이스 시리얼은 컵홀더에 꽂아버리기~

“그만 줘도 돼. 자꾸 뭐 먹으면 멀미해.”
“헉, 알겠어… 너 정말 예민한 아이구나.”
“비꼬지 마라.”
“알았어… 잘 자…”
“다 와가면 깨워.”

심심하다.

 

*

수학여행은 학교에 따라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락 말락 한 5월에 가기도 하고, 우리 학교처럼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락 말락 한 시기에 가기도 한다. 그래도 수학여행지는 주로 제주도나 부산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수학여행 동안에는 완연한 가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반 아이들은 부산으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고, 왜 제주도가 아니냐고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그닥 상관없었다. 어디든 간에, 수학여행을 핑계로 하루에 휴대폰 사용량을 한 시간보다는 조금이라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

부산에 도착해서 첫 숙소는 번호순으로, 두 번째 숙소는 반 아이들을 모두 커다란 한 방에 밀어 넣었다. 첫날밤을 보내게 될 상대는 우연의 일치로 라이관린이었다. 우리 반엔 목 씨라던지 마 씨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공부만 하는 거 아니야? 설마.

*

“야. 관린아.”
“왜?”
“우리 요 앞에 편의점 갈래?”
“뭐 살 거 있어?”
“우리 그거 마시자. 그거 있잖아, 그거.”
“좀, 돌려 말하지 말고 한 번에 말해.”

알코올로 만든, 우리나라에선 법적으로 만 19세 이상만 섭취할 수 있도록 규정된 음료 있잖니…? 괜히 그 단어를 입에 담기가 쑥스럽고 금기된 일 같아서 머뭇거리는 나와 달리 라이관린은 겁나 쉽게 말했다.

“술?”
“…어.”
“우리 아직 미성년잔데.”
“누가 모르냐? 어차피 내년이면 성인이고, 12월 생인 애가 내년 1월에 술 먹는 것보다 올해에 1월생인 애가 먹는 게 신체적으로 더 자랐기도 하고, 뭐 그렇게 우리나라에는 매우 허술한 법이 많…”
“그래. 먹자.”
“엉?”
“점호 시간 되기 전에 사러 가야지. 가자 빨리.”
“어… 이렇게 쉽게…? 너 완전 바른생활 사나이 아니었냐? 이래도 돼?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오늘부터 삐뚤어지기로 한 거야? 괜찮냐?”
“싫음 말던가. 말 진짜 많다, 너.”
“아냐 아냐! 가자 가자.”

이렇게 쉽게?

*

관린아.
응.
관린아.
왜.
관린,
할 말 없으면 자라. 추태 부리지 말고.
너, 너… 너 안 취하냐? 치해? 어? 안 치해??
…제발 자는 게 어때.
나는, 나는 너가 자꾸, 눈에 밟혔다? 왠지 알아? 모르지? 알 리가 없지… 그치?
왜 밟혔는데.
너무 비슷해서.

너가 나랑… 너무 비슷해 보이는 거야.

웃기지.
아니…
근데 너무 답답한 거야. 너무 막, 여기가… 가슴이 막 막혀있는 느낌이야 맨날. 숨은 어떻게 쉬고 사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구나.
너 왜. 너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해. 아니야? 나만 그러냐… 내가 밝은 척하는 거 다 몰라. 아무도 몰라.
몰랐네 그건. 난 너 되게 생각 없이 사는 애로만 봤는데.
야! 일어나 봐. 몸이 가볍다? 막 어? 어질 하네 조금. 근데 기분은 좀 뭐… 괜찮네.
그거 취한 거야.
안야. 나 머릿속에 생각도 잘 돌아가는데? 말도 지금 막 다 생각하고 하는 건데. 근데 말이 좀 많네. 아! 또 말했어. 아 또 말하네 말이 막… 그러네. 근데 나 안 취했어.
아니, 음… 말해도 못 알아듣겠네.
나 멀쩡한데.
그래, 너 멀쩡해.

*

내가 원래 좀 이상해. 이상한 애야.
아냐.
원래 그래, 내가 좀… 이상한 애거든?
너 하나도 안 이상해. 특이한 거야. 그냥 좀 다른 거고.
……안 이상하다고 해주네. 처음이다 그런 거.
그냥 넌 특이한 사람인 거야.
고마워.
그래.

*

넌 별로 안 답답해 보였어. 너는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건드리기가 무서웠는데…

관린아… 나 졸리다…

“… 나도… 힘들어.”

*

좆됐다.
다음 날 눈을 떴는데 아무 기억도 안 났다. 뭔가 취해서 일어나서 몸이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두둥실했던 감각은 두리뭉실하게 기억이 나는데, 옹알거리면서 라이관린이랑 했던 대화들은 새까맣게 변해서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나 무슨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일어났어?”
“헉. 어, 어.”
“왜 놀라고 그러냐.”
“아니, 어… 술병은…?”
“새벽에 몰래 나가서 치웠어.”
“아… 미안. 내가 잠들어서 혼자 치웠네. 안 힘들었어?”
“그냥 빈 병 버리는 건데, 뭐. 어차피 두 병밖에 안 마셨고. 근데 너 술 진짜 약하더라.”
“처음 마셔보는 거라 주량을 몰라서 그냥 마셨지, 뭐.”
“네 주량 소주 두 잔 이던데.”
“미친, 뭐라는 거야. 장난하지 마라. 그 정돈 아니거든.”
“안 속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웃어본 적이 언제였지.

 

*

두 번째 날은 바람의 언덕에 갔다. 이름이 이름인 만큼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는데, 다른 학교에서 온 여자애들 머리가 다 날리는 걸 보고 이 정도는 심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멍하니 산발이 되어가는 여자애들을 보고 있는데 라이관린이 옆에 다가와서는 말을 건넸다.

“맘에 드는 애라도 있어? 빤히 쳐다보네.”
“엥? 무슨 소리야.”
“아니, 저쪽만 쳐다보고 있길래.”
“맘에 드는 애는 무슨, 그런 거 없어.”
“… 그럼 말고.”

뭐야, 갑자기. 머쓱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커다란 풍차가 보였다. 바람이 이렇게나 부는데도 날개를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특이했다. 돌아가지 않도록 설계된 풍차인가? 아니면 이 정도 바람으로는 끄떡도 없나.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우리 저기서 사진 찍자.”
“갑자기?”
“수학여행 와서 사진 한 장 못 찍고 가면 좀 그렇잖아.”
“너 혼자 찍어. 내가 찍어줄게.”
“이런 게 나중에 보면 다 추억이란 말이야. 같이 찍자. 응?”

여윽시 설득의 신 박지훈. 라이관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순순히 이끌려와서 사진을 찍혀줬다. 풍차 앞에 나란히 앉아서 어색함을 풍기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기다. 진짜 하나도 안 친한 게 팍팍 티나네. 나중에 보면 추억거리가 될 것 같기는 했다. 갑자기 말 건 친구랑 갑자기 술 마시고 갑자기 사진 찍기. 새로운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내 폰 액정을 흘긋 쳐다본 라이관린은 옆에서 조용히 웃기만 했다.
내 얼굴이 웃겨서인지, 자기 얼굴이 웃겨서인지. 아니면… 모르겠다.

 

*

3일 째엔 벽화마을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멀미로 인해 잠든 라이관린 옆에서 나도 곯아떨어졌다. 낯선 잠자리 탓도 컸고(현실은 집에 없는 침대에서 존나 잘 잤다. 침대 최고.), 3일 내내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공부만 하느라 앉아있다가 활동적으로 생활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다니는 동안은 재밌었지만… 후유증이…

다시 정상 등교 후,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다녀온 2학년들에게 설문지를 내밀었다. 수학여행 만족도 설문지. 숙소, 식사, 코스 등등… 만족도에 대한 체크를 빠르게 슥슥 해 나가는데 질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기억에 남은 활동이 뭔가요?]
( )

저 공백에 써넣을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써넣을만한 적당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첫날밤 라이관린과 함께 술을 마셨던 것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

[가장 기억에 남은 활동이 뭔가요?]
( 바람의 언덕 )

내 인생에서의 제대로 된 첫 일탈은, 세상 밖에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만큼 간직하기에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

그 뒤로 라이관린이 학원을 땡땡이치거나, 내가 야자를 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쩌면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지, 네가 가는 길이 맞는 건지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는 않게 된 것 같았다. 더는 겁내지 않고 내 눈 앞을 가린 암막 커튼을 걷을 용기를 얻게 해 준 건, 너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나가기로 했다.

*

안녕.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너에게 쓰는 편지라는 걸 알아챌까? 그러리라고 믿어. 우리 같이 밤을 지새우기도 했잖아.(비록 내가 먼저 잠들었지만..)
네 이니셜을, 초성을, 더군다나 이름을 쓰기에는 혹시라도 누가 알아챌까 봐 못 쓰겠다. 너 의의 제기하는 거 좋아하잖아. 미안한데 오늘만 그냥 읽어라. 아, 화난다고 여기서 덮지는 마.
우리가 그동안 다른 삶을 살아왔을 거고, 지금도 그렇잖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너랑 나는 평생을 각자 다른 길 위에서 살아갈 거야.
그치만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만나서, 그 만남이 특별하게 기억될 거라고 믿어. 너는 안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마 꽤나 오랜 시간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 같아. 불쾌하더라도 이해해 줘. 근데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고. 상처 받으니까.
나 너랑 그날 그렇게 놀고, 또 다른 날에 그렇게 밤에 놀아본 것처럼 일탈한 건 처음이었어. 삐뚤어지기가 무섭더라. 그래서 그 정도가 최선이었던 것 같아. 너한테는 되게 내가 막 자유롭게 사는 영혼인 척했는데 안 통했지? 넌 다 아는 것 같은 눈치더라.
너 내 전화번호 알아? 아마 모르겠지. 010-25XX-XXXX야. 첫 X는 네가 태어난 달이더라. 두 번째 X는 우리가 같은 반을 했던 학년의 숫자. 그리고 뒷자리는 내 생일이야. 내 생일을 모르겠지만 요즘 SNS는 꽤나 발달돼 있으니까 열심히 찾아봐.
왜 이렇게 복잡하게 알려주냐고? 그리고 내 번호는 갑자기 왜 알려주냐고?
번호는… 음… 너랑 졸업하고 나서도 연락하고 싶어. 아직 한 번도 연락한 적은 없지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이유는,
훗날 너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내가 맘껏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네가 나한테 연락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그래서 네 생일의 달을 끼워 넣고, 우리가 같은 반이었던 그 해를 떠올리도록. 그 안의 나도 같이 떠올려주면 좋겠다. 그리고 뒷자리를 채워 넣기 위해서 수소문을 하든 SNS를 뒤지든 간에 나에 대해 한 개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기까지.
마지막으로 키패드에 네 손가락으로 내 번호를 하나하나 입력해서 나에게 전화를 거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너무 기쁠 것 같아서.
연락해, ( )아. 어색하다면 문자도 괜찮아. 자니? 아, 이건 너무 전 남친 같은가. 뭐 어때. 너한테 연락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그 정도로 나는 너를 오랫동안 품고 살아갈 것 같아. 짧은 시간이지만 긴 시간을 기억할 것 같아.
졸업 축하해. 멋진 사람이 되겠네.
나도 독특한 사람이 될게.

-00고등학교 졸업장, 3학년 2반 박지훈-

*

[010-xxxx-0923]
[자냐?]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