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비체

 
 

01.

 

 

그러니까, 박지훈은 지금 다섯 번째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싫다고 했다.”

 

“후배랑 밥 한번 먹는 게 어때서.”

 

 

라이관린도 다섯 번째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고.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반말은 이런 거고. 지훈아 나랑 밥 먹자.”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와 자신을 기다리는 관린을 본 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벌써 몇 주 째인 지 모르겠다. 모든 일은 박지훈이 복학을 하면서부터 생긴 일이었다. 대한 건아로서 박지훈은 나라의 부름에 응했고 약 2년 후 다시 돌아온 학교는 못 보던 얼굴들로 가득해 새로운 설렘을 안겨줬다. 괜찮은 신입생 하나 물어다 제대로 된 연애라도 해볼까 싶어 던져놨던 낚싯대는 웬 20살 대만인이 물어버렸다. 새로이 시작하는 2학기, 9월의 캠퍼스. 박지훈은 복학 일주일 만에 휴학을 꿈꿨다.

 

 

그래, 선배가 되어서 후배한테 밥 한번 사줄 수 있지. 근데 라이관린이 그냥 후배냐고. 이렇게 얼굴만 맞대고 있어도 그날이 떠오르는데.

 

 

그날 일은 사고였다. 대어를 낚아 연애를 해보겠다는 박 태공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개강 총회에 참석했던 것부터 잘못이었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한 잔 두 잔, 분위기를 안주 삼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술은 결국 박지훈을 머리끝까지 취하게 했고 그의 주사는 모조리 맞은 편에 앉아있던 신입생 라이관린에게 쏟아졌다. 근데 지짜 잘생겼다 너어. 취해서 발음도 잔뜩 꼬인 주제에 박지훈은 라이관린에게 끊임없이 감탄을 보냈다. 술기운에 발개진 얼굴로 같은 말만 반복하던 모습을 보다 못한 관린이 그를 일으켰고 데려다줄 테니까 이만 나가자는 말에 지훈은 잊고 있던 목적이 떠올랐다.

 

 

‘안되는 데에… 나 애인 만들어야 하는데.’

 

‘애인?’

 

‘웅… 나 오늘 애인 찾을 때까지 집에 안 갈 거야.’

 

 

라이관린은 취해버린 박지훈이 웅얼웅얼 연애 타령을 해대는 동안 그 앞에 몸을 말고 앉아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다 듣고 나서는 예쁘게 웃어주기까지. 그 미소에 홀린 듯 멍하니 눈을 껌뻑이던 박지훈은 업히라며 몸을 돌린 라이관린의 등에 얌전히 업혀서 자취방까지 돌아갔다. 그리고 박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확인했으니 돌아가려는 라이관린의 소매가 박지훈의 손에 잡혔고 시선이… 입술이… 결국엔 몸까지 섞었다.

 

 

다음 날 멀쩡히 돌아온 정신은 안타깝게도 지난 밤 어둠을 타고 넘어온 모든 것들을 기억해냈다. 차마 얼굴을 보진 못한 박지훈은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는 라이관린에게 사과했다. 끝으로는 선후배로 잘 지내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와 함께. 잘 지내기는 무슨… 안 피하면 다행이지.

 

다행히도 라이관린은 학교 안에서 박지훈을 보면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이렇게 귀찮게 굴었다.

 

 

“왜 나랑 밥 안 먹어줘?”

 

“대답해야 해? 그리고 너 아까부터 말이 짧네.”

 

“좋은 선후배로 지내자며.”

 

 

아 진짜. 내가 미쳤었지.

 

 

 

 

02.

 

 

복학한 학교는 다를 것이 없었다. 라이관린만 빼고. 지치지도 않는 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나를 매일 찾아왔다. 주변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 박지훈 껌딱지 라이관린.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핑계를 대며 라이관린을 쫓아냈을 텐데.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사소한 것들까지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한껏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다. 어김없이 라이관린은 박지훈에게 밥을 먹자 졸랐고 박지훈은 처음으로 라이관린에게 화를 냈다.

 

야. 라이관린. 평소와 다른 반응에 라이관린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해 너. 내가 뭘요. 그래 우리 잔 거 그거 내 실수였던 거 인정할게. 그러니까 그거 걸고 넘어지는 짓 그만하라고. 이렇게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기분이 태도가 되어버린 나머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고 역시나 라이관린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다. 걸고넘어져?

 

 

“지켜야 할 선은 좀 지키란 소리야.”

 

“그러는 형은 잘 지켜서 나랑 잔 거고?”

 

“야,”

 

“형이 하자는 대로 했어요. 좋은 선후배 그거 하자며. 실수였다는 거 그거 나도 아는데 시발. 그래서 아무 말 안 하잖아요.”

 

“…너”

 

“됐어요.”

 

 

라이관린은 내가 한 번에 처리하기 힘든 말들을 쏟아내고는 그대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걔가 지나가며 생긴 작은 바람이 순간이었지만 너무 시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황스러움에 놀란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나를 스쳐 지나간 라이관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가던 라이관린은 제자리에 서더니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고는 몸을 돌려세워 다시 다가왔다.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이제 그만할 거니까.”

 

 

그러고는 다시 나를 등지고는 멀어져갔다. 뭘 그만할 건데.

 

 

 

03.

 

 

애꿎은 핸드폰만 노려봤다. 사과를 해 말아… 그날 나는 그렇게 말하고 2시간 만에 후회를 했다. 좋은 선후배로 지내자고 먼저 말한 것도 박지훈이었고 선배 말에 착실하게 좋은 선후배가 되려던 라이관린에게 예민함을 이기지 못하고 쏘아붙인 것도 박지훈 자신이었다.

 

 

“아아, 진짜…”

 

 

관린아 미안ㅎ, 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아 이것도 아니야. 노란 박스라고는 전혀 없고 흰 배경의 메시지 박스만 가득한 카톡창을 노려보던 지훈이 결국엔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걸 모조리 지워버렸다. 내일 보내자 내일…

 

 

내일은 무슨. 그날 오후에 딱 하고 마주쳐버렸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그래도 지나쳐가는 라이관린의 옷 소매를 잡은 건 박지훈이었다. 라이관린은 자신의 옷 소매를 잡은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

 

“네.”

 

 

아 씨 대답하지 말아봐. 미안. 그때는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 같아.

미안해.

…안들려요.

미안했다고.

네? 뭐라구요?

…이씨. 미안하다고!

 

 

대인배 라이관린. 라이관린은 내 사과를 쿨하게 받아줬다.

 

 

“형 미안하면 소원 하나만.”

 

“…안 미안해지려고 하네.”

 

“네?”

 

“아니 말해봐.”

 

 

내일 농구하는 거 보러와줘요, 뜬금없는 그의 부탁에 멍하게 입을 벌리고 라이관린을 쳐다봤다. 무슨 농구? 내일 농구 경기 있나. 근데 이게 왜 라이관린 소원이지? 정말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보던 라이관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설마 형 몰라요? 진짜?”

 

“…왜에. 뭔데?”

 

 

나 농구부잖아요.

…아.

와 나 이건 좀 섭섭하네.

 

 

이건 뭐 사과하려다가 오히려 더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니이… 내가 요즘 바빠서… 괜히 끝말을 늘리며 라이관린의 눈치를 보는데 이번엔 진짜로 상처를 받은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과 여자애들이 말하던 농구 존잘남이 너였구나.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에 다급히 소리쳤다. 갈게! 보러 갈게. …됐어요.

 

 

“…밥! 내일 끝나고 밥 사줄게!”

 

“콜.”

 

 

아. 또 속았어.

 

 

 

04.

 

 

결과적으로 라이관린은 농구를 꽤 했다. 아니, 농구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잘했다. 코트 여기저기를 제 집마냥 누비는 라이관린을 보며 나는 혼자서 감탄을 했다. 이런 모습은 의외인데. 경기가 끝나가는 지도 모르고 라이관린만 집중해서 봤다. 어느새 끝나버린 경기는 당연히 라이관린이 있는 팀의 승리였다. 경기 끝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울리고 상대 팀과 인사를 한 라이관린은 빠르게 내가 앉아있는 좌석까지 성큼성큼 올라왔다.

 

 

“형 봤어요?”

 

“어. 잘하더라.”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이었다. 내 칭찬에 라이관린은 잇몸을 드러내며 예쁘게도 웃었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한 덕인지 얼굴이 땀으로 온통 젖어있었다. 눈가에 맺힌 땀이라도 닦아주려 손을 뻗자 라이관린은 빠르게 피했다.

 

 

“아 미안.”

 

“아니 그게 아니고.”

 

“…”

 

“형 손 더러워지니까.”

 

 

라이관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수건을 잡은 내 손목을 감싸 잡았다. 라이관린에게 잡힌 손목은 걔가 이끄는 대로 그의 얼굴로 끌려가 얼굴을 닦아냈다. 닦아달라는 걸 표현하는 게 귀여워서 내가 직접 힘을 주어 라이관린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줬다. 마지막으로 라이관린의 머리 위로 수건을 덮어주며 말했다.

 

 

“얼른 씻고 와. 밥 먹으러 가자.”

 

 

그 말에 라이관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샤워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빨리 올 테니까 꼭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저렇게 보니 강아지 같기도 하고…

 

 

 

 

05

 

 

박지훈이 라이관린과 밥 먹는 게 익숙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라이관린은 대뜸 박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체육관으로 그를 불러냈다.

 

 

형. 밑에 봐요.

 

 

갑작스러운 말에 관린을 올려다본 후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관린의 발과 내 발 사이에 그어진 하얀 선.

 

 

이게 하프라인이라는 거에요. 이 선을 기준으로 여기는 내 구역, 거기는 형의 구역. 잘 알지는 못했지만 농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대뜸 농구 얘기를 꺼내는 관린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관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길게 그어진 선에 닿아있었다. 라이관린은 하프라인을 보며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나는요, 형.”

 

“…”

 

“이게 나랑 형 사이의 선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 선을 넘고 싶어요. 내뱉는 말은 다짐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관린과 허공에서 시선이 엉켰다. 체육관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시간이 멈춘 듯한 우리 둘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조차 그 빛을 받아 반짝이고 마주한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올곧고 따뜻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할지도 모르겠다고.

 

 

“…키스, 해도 돼요?”

 

 

천천히 다가와 내 두 볼을 소중하다는 듯 큰 손으로 감싼 관린은 말했다. 내려간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관린은 천천히 다가왔다. 시야 안으로 그의 얼굴이 점점 가득히 들어차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부딪혔다.

 

 

결국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라이관린을 피했다. 뺨으로 관린의 숨결이 닿았다 흩어진다.

 

 

“…미안.“

 

 

라이관린은 어색하게 틀어진 내 옆얼굴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이번엔 한숨 같은 숨이 닿았다. 억지로 참고 있던 숨에 가슴이 막혀올 때쯤 라이관린은 내 쪽으로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형 나 좀 봐요. 그리고는 부드럽게 내 몸을 돌려세웠다. 나는 라이관린을 올려다봤다.

 

 

“선 넘을 준비가 다 되면요, 형. 그때. 그때는 형이 넘어와 주세요.“

 

 

라이관린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복잡함에 흔들리는 내 눈을 바라보던 관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왼손에 자신의 오른손을 깍지 껴 잡았다. 입가로 잡힌 손을 가져간 라이관린은 그래도 뒤집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엄지로 맞잡힌 손을 살살 쓸기도 했다. 그 부드럽도 간지러운 움직임을 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못했다. 처음 그날처럼.

 

 

 

 

06

 

 

다음 날부터 지훈이 관린을 피해다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 번째로는 관린의 갑작스러운 고백이 당황스러웠고 두 번째로는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닌 자신 때문이었다. 볼에 퍼지던 숨결을 기억한다. 맞잡은 손의 온기를, 그 위로 내려앉던 입술의 촉감도 기억한다.

 

 

박지훈이 학교에서 마주친 라이관린을 몇 번 피하기 시작하자 관린 역시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마주쳤다 싶으면 먼저 피하기까지.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백한 그 시점이 너무 예상치 못했기도 했고. 매번 방심한 사이에 그러는 건 반칙이지 않나. 거기다가 고백 비슷한 걸 해놓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건 라이관린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매번 아무 말 못 하는 거지. 억울하기까지 해서 튀어나오려는 아랫입술을 억지로 깨물었다. 끝까지 대답을 해달라고 하지 그랬어.

 

 

나도 속상하단 말이야.

 

 

 

 

라이관린이 박지훈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2주 후였다.

 

 

2주 동안 서로 징하게도 피해 다녔다. 라이관린이 박지훈의 생각을 알지 못하듯 박지훈도 라이관린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짐작과 오해들로 가득한 2주가 지나가고 3주째로 접어들 때쯤 라이관린은 박지훈의 자취방 앞으로 찾아왔다.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과제에 집중하던 박지훈의 핸드폰 액정에 뜬 라이관린의 이름에 당황한 나머지 전화가 끊길 때까지 받지 못했다. 어쩌지. 다시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시 한번 라이관린으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행여나 끊길세라 다급한 손길로 전화를 받고는 조심스럽게 귓가에 가져다 댔다. 한동안은 서로의 숨소리만이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여보세요.]

“…응.”

 

 

형. 잠깐 나와요. 집 앞이야.

 

 

지금? 집 앞이란 말에 급하게 몸을 일으켜 확인한 창밖에는 라이관린이 가로등 밑에 서서 지훈의 자취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붕붕 흔들어 보이기까지. 그 모습에 지훈은 그대로 벽을 타고 주저앉아 버렸다.

 

 

꽤 차가운 밤공기를 기억해낸 지훈은 재빨리 욕실로 튀어들어갔다. 급하게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는 가디건을 주워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래된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어서 그런가. 가까이서 본 라이관린의 얼굴은 꽤 상해있었다. 그게 또 괜히 속상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쓸어보려다 꾹 참았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너 또 아무 일 없던 척 할거지. 속마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형,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이것 봐, 또. 어제 본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건네오는 장난 섞인 말.

 

 

“너 할 말이 그게 다야?”

 

“형은 나한테 할 말 없고?”

 

 

말이 왜 그렇게 날카롭게 나간 건지 나도 모르겠다. 나랑 뭐 하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스스로가 울컥한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대로 몸을 돌려 들어가려 했다.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해 손목이 잡혀 몸이 돌려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라이관린의 표정은 아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 번쯤은 먼저 용기 내주면 안 돼요?”

 

“…”

 

“나는, 아닌 거죠. 그런 거죠 형.”

 

뭐라고 해야 할까. 체념한 듯한 관린의 얼굴에 입술을 떼기 어려웠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라이관린의 얼굴은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열릴 기미가 없는 내 입술로 꽂히는 시선이 어느 때보다 아프다. 갈게요. 이번에도 대답을 못 하는 박지훈 때문에 또 한 번 돌아서는 건 라이관린이었다. 라이관린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나도 내가 뭐라 해야할 지 답을 몰라서. 골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학교에서 더는 라이관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07

 

 

[너 몰랐어?]

 

[뭘]

 

[걔 오늘 출국인데. 인천공항.]

 

[어디 가는데?]

 

[대만. 이제 안 올 거래.]

 

 

 

라이관린의 소식을 들은 건 며칠 후였다. 요즘 라이관린이 있어서 점심 걱정은 없었는데 걔가 사라져버리니까 같이 먹어 줄 사람도 같이 사라져서. 동기와 점심 약속을 정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라이관린의 얘기가 나왔고 어이없게도 라이관린의 귀국 소식을 들었다. 동기가 보낸 마지막 카톡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만으로 돌아간다고? 나한테 말도 없이?

 

 

앞에서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로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날이 마음에 걸렸다. 그날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을까. 끝내 대답이 없는 나를 눈가가 붉게 물든 채로 바라보다 체념하고서 돌아가던 뒷모습.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라이관린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다는 것을.

 

 

잊고 지낸 것 같았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라이관린과 또 거기에 맞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동안 애써 괜찮다고 믿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놓쳐버린 건 나의 마음과 라이관린의 마음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그어버린 선 앞에서 걔는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이미 선 넘을 준비를 마친 채로. 나도 그 선을 함께 넘어주기를.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나는 급하게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강의 중이시던 교수님과 강의실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나에게 쏟아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돌아오지 않은 이 순간, 놓쳐버린 내 마음을 잡으러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문으로 미친 듯이 달려 택시를 급하게 잡아타고 인천 공항을 외쳤다. 지훈을 태운 택시는 빠르게 도로를 내달렸다. 오늘 인천공항을 통해 대만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만 알 뿐이지 몇 시 비행기라는 것은 몰랐다. 혹시나. 혹시나 내가 도착하기 전에 가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평소였다면 미터기에서 눈을 못 뗐을 텐데 오늘은 그저 조금만 더 빨리 가달라고 기사를 재촉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하염없이 보는 동안 그동안 내가 놓쳐버린 시간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애인 잡으러 가나 봐요?”

 

 

손가락 끝을 물어뜯으며 시계를 확인하는 내 모습을 룸미러를 통해 본 기사님이 말했다.

 

 

“네. 그러니까 빨리 가주세요, 아저씨.”

 

 

 

택시가 빠르게 인천 공항 앞에 도착을 하자 나는 오만 원짜리와 만 원짜리 몇 개를 기사님께 아무렇게나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거스름돈은 받을 정신도 없이 그래도 공항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중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만행.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는 수속 중이었다.

 

 

게이트 번호를 확인하고는 그 주변에서 미친 듯이 관린을 찾아 헤맸다. 혹시 이미 가버렸을까 봐. 떠나버렸을까 봐. 길어지는 통화연결음에 더욱더 불안해졌다. 계속해서 전화하며 탑승구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다시 한번 달렸다. 그렇게 라이관린을 찾아해매는 중 구석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귓가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라이관린은 한참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듯했다. 연결되지 못한 전화는 끊어진 지 오래였다. 언젠가 보았던 닮아있는 뒷모습에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라이관린은 창 밖을 보는가 싶더니 잠시 후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라이관린]

 

 

발신자는 라이관린이었다. 액정 위로 뜨는 라이관린의 이름에 푹 숙어진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우리는 말 없이 한참을 있었다.

 

 

형.

…형 저 사실 오늘 대만 돌아가요.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진짜 못 갈 것 같아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우리가 실수로 잤다는 사실도 아니고, 우리가 선후배로 잘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가려져 지금, 이 순간에야 돌아본 너와 나의 마음이었다.

 

 

[좋아해요.]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좋아했어요.]

 

 

그때, 형 집 앞에 찾아갔을 때 말하고 싶었는데 형이 또 나 피할까 봐 못했어요. 이 정도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형 미워서 그냥 가려다가 그래도 이 말은 하고 가고 싶었어.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절절한 고백 타임이었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는데. 선수를 빼앗겨버린 나는 가슴께를 더듬었다. 관린아, 나 지금 심장 되게 빨리 뛰는데.

 

 

“뒤돌아봐.”

 

[…네?]

 

“돌아보라고.”

 

 

형. 핸드폰 너머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관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보라니까 왜 그러고 서 있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뒷모습에 타박하듯이 말을 뱉자 관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시 시선을 더듬던 관린이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리와.

 

 

오라는 내 말에도 좀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리 와줘. 보고 싶으니까. 내가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하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야겠네.

 

 

라이관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섰다. 형이 여기 어떻게… 나는 우리가 어떻게 마주 보게 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냐가 중요하지.

 

 

“밑에 봐.”

 

 

라이관린은 나와 함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 어느 날 농구 코트 위에서 라이관린이 그랬던 것처럼.

 

 

“선 보여?”

 

“…네.”

 

 

복잡한 공항 속 길을 안내하는 테이프가 만든 선이 보였다. 우리는 그 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기억나? 준비가 다 되면, 그땐 나보고 먼저 넘어와달라고 했잖아.”

“형.”

 

“관린아.”

 

 

 

선 넘어보려고. 너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