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를 사랑한 자는 누구인가
W. 새벽

 

 

모두가 그렇게 말하곤 했다. 현대판 백설 공주. W그룹 둘째 아들 있잖아. 친엄마 병으로 죽고 제 아빠가 새엄마 데리고 왔는데, 새엄마가 둘째 아들보다 한 살 많은 아들내미도 하나 데려와서는 덜컥 후계자로 만들어 버린 거. 그러니까 원래는 둘째가 외동아들이었으니까 유산도 다 물려받고 후계자도 둘째 아들인 게 맞지.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셈이니까. 거기다 새엄마가 제 아빠 안 보는 데서 구박도 존나 한댄다. 나 같으면 그렇게 못살아. 누구 얘기하냐고? 너도 이름 들어봤을걸? 알잖아. 박지훈.

 

관린의 입사 동기인 A가 그렇게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관린은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딱히 남에게 관심을 주고 싶지도,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박지훈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W그룹 회장의 새 부인. 그러니까, W그룹의 새로운 사모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비서였으니.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제가 모시는 사모님은 그 박지훈이라는 작자를 끔찍이도 싫어해, 그가 회사 건물에 있다는 소리만 들려도 난리를 치며 차를 돌리라고 빽빽 소리를 질러냈기 때문에. 사모 옆에만 붙어 다니는 게 관린의 일의 90% 이상이었기에 사모가 보지 않는 것은 저도 보지 않고, 사모가 보고 싶은 것만 주야장천 보게 되는 관린. 그래서 A가 박지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홧홧한 열기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관린이 지훈을 만나게 된 건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날따라 회사에서 관린을 애타게 호출하는 대단한 사모님 덕에 관린은 밥도 다 먹지 못하고 뛰쳐나가야 했다. 차를 급하게 몰아세워 건물 밑에 아무렇게나 대고 내리니, 곧 근처로 허리를 숙이며 차 키를 받아가는 시늉을 했다. 대충 차 키를 건네고 제법 가을 티를 내는 날씨에 재킷을 빠르게 둘러 입으면서 엘리베이터도 패스. 조금만 늦어도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사모님을 알기에 관린은 무려 9층까지 긴 다리를 성큼하며 올랐다.

 

“미친년이!”

 

사모가 불렀던 방으로 들어가려는 참에 외마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세게 열렸다. 그리고 순간 마주친 눈, 버석하게 메마른 눈가 끝이 붉었고 눈매가 위로 살짝 솟아 있었다. 빨간 머리와 후드티, 무릎이 뚫린 까만 바지. 그리고 눈 밑에 그인 작은 상처. 이 회사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후줄근한 차림으로 방을 막 나서려던 사람이었다. 짧고 길게 얽힌 시선을 빠르게 빼낸 남자가 먼저 빠르게 다리를 놀려 관린이 밟았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동그란 뒤통수에 달린 빨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저 싸가지 없는 년!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아까 나간 사람은 분명 남자였는데, 사모는 그를 년이라고 칭했다. 여전히 사모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양털로 한가득 덮어낸 어깨를 바들바들 떨어댔다. 관린이 바닥으로 나뒹구는 연필과 잡동사니들을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리를 굽혔다. 차마 잠그지 못한 단추 때문에 넥타이 끄트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관린이 넥타이를 손으로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으면서 바닥에 나뒹구는 사무용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올렸다. 이 정도는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어도 대충 눈치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강, 정리를 마친 관린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숨을 가쁘게 내쉬는 사모의 진정을 위해, 따뜻한 물을 끓였다. 작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다 끓었고 탁 소리가 나며 포트의 불이 꺼졌다. 관린이 유리 컵을 꺼내 물을 따르고 커피를 털어 넣을 때쯤, 관린을 돌아보지도 않은 사모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를 냈다.

 

“관린아.”

“네, 사모님.”

“내가 좋아하는 거, 조용히. 알지?”

 

유리컵 안을 부드럽게 휘젓던 쇠 스푼이 별안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유리컵과 마찰했다. 그 소리에 사모가 눈을 살짝 찢으며 관린을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관린이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손에 찬 땀을 살짝 느끼면서 유리컵 손잡이를 잡아 사모가 앉아있는 소파 앞 책상에 천천히 내려놨다. 사모가 그 움직임을 천천히 눈동자로 쫓다가 관린이 앞에 놓은 컵을 살짝 들어 올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너 거두느라, 많이 힘들었다.”

“…네.”

“여태껏 일 잘해서 내가 너를 참 많이 아껴.”

 

그래서 말인데 관린아. 사모가 관린의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관린이 불법의 소굴에서 한참 떠도는 걸 사모가 거두어주고 새사람으로 거듭나 여태 사모와 함께 한 몇 년간, 사모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밟고 일어섰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사모가 잘 밟고 올라설 수 있게 도왔던 관린. 그 과정에서 사모는 매번 관린을 다정하게 불렀다. 관린아. 평소 불렀던 성과 이름 라이관린이 아닌 관린아. 그러면 관린도 이제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나는,

 

“이번에 사람 하나 좀 조용히, 처리해줘야 되겠다.”

 

또 다른 사람을 조용히, 멀리 보내야 하는구나.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너무 성가시게 구는 년이 하나 있어서 그래. 말을 끝마친 사모가 짧게 혀를 차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관린의 작게 말아쥔 손바닥 사이로 땀이 차다 못해, 줄줄 흐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모가 멍석같이 굳어있는 관린을 향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원래 선천적으로 몸이 좀 약한 애야. 제 아비도 이제 바빠서 잘 신경 못쓰니까, 이참에 그냥 확실히 해두자고. 누가 누구 위에 있는지. 걘 그걸 모르더라고. 제 어미 싸가지 없는 것만 다 닮아서.

 

사모가 건넨 종이엔 정확한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관린에게 거부할 권리 따위는 이미 사모가 관린을 거둘 때부터, 저 멀리에 집어던진 것이 분명했고 관린도 그걸 알았다. 날카로운 종이를 받아드는 순간, 이 가벼운 종이의 무게는 사람 목숨 무게를 달겠지. 관린의 시선이 종이 위의 사진으로 떨어졌다.

 

‘이름 : 박지훈’

 

무표정한 얼굴이 아까 그 남자의 얼굴이었다. 확실히 남자가 맞는데 왜 자꾸 사모는 년이라고 칭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직도 남은 분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행동이 거칠었기 때문에.

 

 

 

 

 

 

 

 

 

 

사모는 관린에게 사람을 죽여라, 칭하지만, 관린은 단 한 번도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지나가다 칼로 푹. 뭐 이런 건 너무 티가 나니 애초에 강도도 아니고, 무엇보다 애초에 사모가 부탁하는 사람들은 죽을 만큼의 죄도 없었다. 아무리 불법의 소굴에서 구르다 온 관린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린은 사람을 죽이라는 지시에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다. 그러기 위해 지훈의 정보가 필요했다. 생일이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거 말고, 자주 가는 곳이나 선호하는 것들. 최대한 자주 마주치고, 자주 봐야 했다. 그리고 모든 신뢰를 얻어낼 때 말하겠지. 당신은 멀리 떠야 해요.

관린은 A를 앉혀놓고 마주 앉아 카페라테를 건넸다. 공짜 커피라며 좋아하던 A가 금세 관린의 말에 마시던 커피를 덜컥 내려놓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지훈? 걜 왜 물어.”

“목소리 낮춰.”

“너 설마….”

 

여전히 관린의 시선은 창문 밖 갈색으로 물들어 흩날리는 낙엽에 머물러있었다. 쟤네도 저렇게 떨어지는데, 나라고 언제까지 여기 붙어있을 수 있을지. 불우한 가정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와서는 불법의 소굴에 짱박혀 있는 그때보다는 지금처럼 멀쩡히 커피를 마시고, 떨어지는 낙엽 구경을 하는 평범한 삶이 훨씬 나았지만, 그 외에 평범한 일은 없었다. 말이 불법이 아니지, 관린은 사모가 죽이라고 명한 사람들을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만들고는 조용히, 멀리 보낸다.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리고 멀리. 지구 반대편이든, 그보다 조금 더 돌든. 그리고 당부의 말을 하나 남기지. 당신이 이 범위를 넘어서면, 그녀가 찾아낼 거에요. 그러니 여기서 더 도망갈 생각도,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요. 이번에 멀리 보내야 할 사람은 박지훈이었다.

 

“이번에 그 잘나신 여왕님이 둘째 아들내미를 보내라고 했다고.”

“다 알면서 뭘 물어.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야, 근데…. 나도 별로 줄 수 있는 정보가 없어.”

“왜.”

“박지훈 그 인간, 나 따돌리고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라. 이젠 따라다니지도 않아.”

 

관린의 동기인 A는 지훈의 비서였다. 그는 사모를 여왕이라고 불렀다. 지훈의 별명으로 백설 공주를 단 것도 아마 A겠지. 말이 비서지. 맨날 클럽 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걸 보면 꽁으로 돈 받아먹는 게 분명했다. 관린이 또 한 번 꽁으로 돈을 받아먹는다는 뉘앙스로 얘길 하자 A는 꽤 억울한 표정으로 상을 몇 번 내리쳤다.

 

“박지훈 걔 아픈 거 알아? 어릴 때부터 왜, 몸 약해서 난리였잖아.”

“몰랐는데 들었어.”

“아무튼, 근데 잘만 싸돌아다녀. 내 생각에 걔 하나도 안 아픈 거 같거든.”

“…..”

“저번에는 내가 끝까지 쫓아다니니까, 막다른 길에서 담을 넘더라.”

“….”

“거기서 내가 어떻게 더 쫓아가냐. 그래서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

 

관린의 눈앞으로 담을 넘는 지훈이 그려졌다. 눈 밑에 상처를 달고, 그런 담들을 넘어 다녔으니 무릎이 훤한 바지를 입고 다니지. 모든 게 정확히 어울렸다. 후줄근한 둘째 아들내미와 그가 담을 넘는 것. 생각을 마친 관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A는 벌써 일어나냐며 관린을 붙잡았다.

 

“박지훈 어디 자주 가는지 알아올 때까지 공짜는 없어.”

“….야.”

“그렇게 알아.”

 

좋아하는 건 내가 알아올 테니까, 넌 비서라는 이름 달고 있으면 어딜 자주 가는지 쯤은 알아올 거라 믿는다. 그렇게 말을 남긴 관린이 카페를 나섰다. 코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딱 가을바람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이제 더는 이곳에 머물지 말아야지. 낙엽처럼 떨어져서 저도 멀리멀리 갈 곳을 찾아야겠다고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관린이 지훈을 두 번째로 마주친 건, 그 뒤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왜 자꾸 쫓아다녀.”

“…언제부터 알았어요.”

“존나 티 나요.”

 

나름 몸을 숨긴다고 숨겼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는데, 관린이 조용히 지훈의 뒤를 따르던 3일째 되는 날, 여느 때처럼 아침에 들리는 빵집에서 팥빵을 사고 나오던 지훈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관린의 까만 차 앞에 세웠다. 관린의 계획과 맞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지훈이 짙게 선팅된 창문으로 손가락을 뻗어서 톡톡 두드려냈다. 어차피 안에 저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못할거라 생각하고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려던 관린이 곧 열리지 않는 창문을 깰만한 도구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몽둥이 같은 걸 질질 끌고 오는 지훈의 행동에 결국 창문을 내렸다. 지훈은 언제부터 알았냐는 관린의 말을 비웃듯이 흘리고는 열린 창문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문을 열었다. 달칵 소리가 나고 지훈이 꽤 쌀쌀한 바람을 안고 조수석에 착석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고민 따위는 없는 행동이었다. 마치 오늘 관린을 만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래서, 왜 따라다니는데요? 당신 그 여자 비서잖아.”

 

익숙하게 봉지를 뜯어 빵을 한 입 베어 문 지훈이 입안에 있는 빵조각을 몇 번 씹다 말고 아, 하고 단말마의 음성을 냈다. 지훈의 고개가 관린의 쪽으로 틀어졌다.

 

“나 보내래요?”

“…..”

“어디로. 저 멀리? 돈은 준대?”

 

지훈의 짧고 도톰한 엄지손가락이 잠깐 천장을 가리켰다. 지훈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굳이 알려고 안 해도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걸 꿰고 있는 셈이었다. 어지간히 티가 나야 말이지. 그 여자 나 존나 싫어해. 지훈이 여전히 빵을 깨작이다가 말 없는 관린을 재촉하듯 고개를 들썩였다.

 

“그래서 어쩔건데.”

“….”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면 뭐가 나와요? 아니면 납치라도 하려고?”

“아니요.”

“그럼 어쩌자는 건데요.”

 

제 목숨을 빼앗을 것을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지훈은 전혀 쫄거나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태 봐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특이함. 그게 관린의 계획을 방해했다. 사모가 명령을 내린 이상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서야 여기서 버티긴 힘들 테고, 만약 여기서 버틸 생각이 없다 한들 사모가 조용히 저를 보내 주지는 않을 거라는 걸 관린은 알았다. 관린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지훈은 빵을 모두 먹어치우고는 다른 빵을 하나 더 꺼내 관린에게 건넸다. 의문의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는 관린의 시선이 웃긴지, 살짝 웃음을 터뜨린 지훈이 빵 봉지를 탈탈 흔들어댔다.

 

“빵 몰라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네.”

“…독이라도 들었을까 싶어서요.”

 

관린이 괜히 꺼낸 말은 지훈을 더욱 웃음 짓게 하기 충분했다.

 

“웃기지도 않아. 당신이 나 죽이러 온 거면서.”

“…..”

“그냥 빵이니까 먹어요. 들킨 건 모른 척해줄게.”

 

지훈이 건넨 빵을 떨떠름하게 받던 관린이 곧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정말 말 그대로 죽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놀란 표정. 그 표정에 지훈이 한 번 더 아이 같은 웃음을 빵 터뜨리곤, 떠날 기세로 옷을 여미기 시작했다. 그때 봤던 후드랑은 다른 색의 까만 후드, 그리고 여전히 빨간 머리를 한번 정리한 지훈이 곧 차 문을 열었다.

 

“그 여자보다 당신이 키는 훨씬 크지? 근데 그 여자 무서워요. 조심해.”

“……”

“모른 척해줄게요, 진짜로. 표정 풀고 일 열심히 하시고.”

 

지훈이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저 가벼운 몸짓을 보니, 대충 담을 넘는다는 그 몸짓도 어렴풋이 그려지는 법. 관린은 여전히 지훈이 남기고 간 온기와 빵부스러기들을 가만히 보다, 일이 많이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하기 직전, 옷매무새를 정리하다 문득 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봤다. 일 열심히 하시고. 뒤에 당연한 듯 무심하게 따라온 한마디.

 

‘당신도 언제 뒤질지 모르니까, 열심히 살아요.’

 

언제 뒤질지 모른 다라. 대충 의미를 알고도 들으니 웃긴 말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을 하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일이 꼬인 건 확실했다. 관린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그 이후로도 관린은 지훈을 자주 마주쳤다. 여태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지훈의 얼굴을 본 적은 그때 사모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마주친 것 말고는 없었는데, 관린이 지훈에게 미행하는 것을 들킨 날로부터 이상하게도 관린은 지훈을 자주 마주쳤다. 회의실 앞에서 한번, 화장실에서 한번, 탕비실에서 한번, 로비에서 한번. 관린이 회사에 올 일이 있다는 것은 즉 사모가 회사에 볼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관린이 지훈을 일주일 내내 마주하고, 여덟 번째로 지훈을 본 관린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지훈을 끌고 빠른 걸음으로 빈 회의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 뒤로 사모가 걸어들어올 것이 분명해서. 얼떨결에 관린에게 끌려 빈 회의실로 온 지훈이 눈을 끔뻑끔뻑 떴다. 관린이 빠르게 문을 닫아내고 잠금장치를 걸어 잠그는 동안, 지훈은 회의실을 한 번 둘러보고 근처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관린이 확실히 잠긴 문을 확인하고는 뒤를 돌았다.

 

“왜 자꾸 와요?”

“내가 내 회사 오는데 뭐가요?”

“원래는 안 왔었잖아요.”

“오면 안 되나요?”

 

알면서, 그렇지않으면서,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가득 지은 지훈이 관린과 제 발 사이의 간격을 재는 듯싶더니, 한 발을 당겼다. 지훈의 행동으로, 네 발자국 차이가 세 발자국 차이로 줄었다.

 

“있잖아요, 당신.”

“…..”

“혹시 나 걱정해요?”

 

지훈이 또 한 발자국을 줄였다.

 

“내가 저 여자한테 해코지 당할까 봐?”

“…..”

“나를 죽여야 하는 사람이?”

 

한 발자국을 더. 관린과 제 사이로 한 발자국 차이를 남겨놓은 지훈이 가볍게 웃었다. 당신 진짜 웃겨. 빵은 잘 먹었어요? 난데없이 딴소리를 하는 지훈을 가만히 쳐다보던 관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지훈을 여기로 끌고 온 이유. 그게 무엇일지 굳이 생각하고자 한 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걱정의 의미가 맞으려나. 제가 누구 걱정하고 살았던 처지가 아니라서 잘 몰랐는데.

 

“혹시나 당신이 그 여자한테 들켰다가,”

“…..”

“그날처럼 맞고 눈 밑에 상처가 난다면 마음이 조금 아플 것 같긴 해요.”

“….”

“이게 걱정인가요.”

 

관린이 ‘이게 걱정인가요.’라고 물었다. 정말 이 감정이 지훈을 걱정하는 감정인지 잘 몰라서. 곧 지훈이 슬슬 웃던 얼굴을 뭉개면서 대답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되게 웃긴데.”

“…..”

“그거, 걱정 맞아요.”

 

그러면서 눈가를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사모가 관린을 찾는 듯 관린의 핸드폰이 쉴새 없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회의실 의자에 관린을 마주 보고 앉아 휴지를 꼭 쥐어낸 지훈의 손이 한없이 작았다. 관린이 폰 전원을 끄는 동안, 지훈은 코 먹은 소리로 걱정 아닌 걱정을 건넨다. 그 여자한테 맞아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럼 관린도 심심한 답변을. 맞아 죽진 않아요. 내가 맞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근데 아까 울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 갑자기 누가 나 걱정해준다니까. 아직 살만은 한 거 같아서.”

 

지훈이 관린의 감정을 걱정으로 정정하자마자, 제가 정정해놓고는 제가 울기 시작했다. 사소한 눈물 한 방울은 두 방울로 세 방울로 번졌고, 그 눈물이 길을 만들어 폭포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지훈을 보면서 관린은 생각했다. 이대로 모든 걸 집어 던지고 낙엽처럼 흩날리고 싶다고. 제가 낙엽이 되어 흩날리면, 지훈은 옆에서 다른 나무의 낙엽이었으면 좋겠다고. 딱히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의 생각을 잠깐 품었다가 휴지를 뽑아다가 지훈의 눈물길을 막아줬다. 곧 코를 먹은 지훈이 물었다.

 

“근데 맞은 건지 어떻게 알았어요?”

“많이 봤어요.”

관린이 눈 밑에 난 상처를 정확히 맞았다고 표현한 말이 의외였다. 상처 같은 거 하나도 모르고 곱게 자랐을 거 같은데, 어디서 많이 봤대. 과거가 꽤 볼만하겠어요. 지훈이 농담을 던지자, 관린이 미세하게 웃었다. 별로 볼만한 과거는 아니죠. 왜 맞은 거예요? 그냥, 맞을 짓을 했나 보죠. 미세한 웃음이 천천히 지훈에게 스며들었다. 적당한 온도의 웃음.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지훈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언젠가 죽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늙어 죽는 자연사 말고. 그게 자살이든, 타살이든 돌연사든. 근데 아마 타살일 확률이 가장 높았겠죠. 당신도 그 때문에 날 미행했잖아요. 맞죠?”

“..그렇죠.”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말을 믿어요. 어디든 여기보다 지옥인 곳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죽는다는 걸 딱히 무서워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방금은 잠깐 무서웠어.”

“…..”

“당신이 날 걱정한다니까, 잠깐 더 살고 싶어져서. 그래서 무서웠어요.”

 

당신은 날 왜 걱정해요? 지훈이 마지막 말을 건네면서, 관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물기를 머금고 한참 울어 약간의 핏줄이 선 눈으로 관린을 깊게 쳐다봤다. 약간 시선이 위에 있었음에도 관린은 저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빨간 머리칼이 살짝 눈썹을 덮고, 그 밑으로 눈매가 살짝 휘어진 눈이 저를 응시했다. 예쁘게 솟아오른 애교살이 열에 붉었고 조금 밑으로 난 상처. 관린은 그 상처로 엄지를 가져다 댔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

“너무 많이 들었죠.”

 

거의 아물었을 법도 한데, 관린이 부드럽게 엄지를 내리니까 간지러움이 퐁퐁 솟아올랐다. 괜히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훈이 제 상처를 어루만지는 크고 하얀 손가락을 잡아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내서 면적을 넓히고는 제 볼 위로 가볍게 올려냈다. 마치 내 온도를 확인해달라는 듯이. 관린은 그런 지훈의 볼을 살짝 감아서 이번엔 얕게 홍조가 일어난 볼을 쓰다듬었다. 너의 온도를 확인했다는 듯이. 곧 지훈이 눈을 한 번 더 길게 감았다 뜨고 말했다.

 

“많이 들어봤는데 처음이에요.”

“…..”

“당신한테는요.”

 

 

 

 

 

 

 

 

 

 

A는 말했다. 박지훈이 백설 공주면, 넌 사냥꾼이지. 새엄마가 죽이라고 심어놓은 애가 공주한테 반해서 살려주면. 관린은 커피를 홀짝이는 A의 질문에 의문을 가진다. 왕자도 없고, 난쟁이도 없는데 과연 내가 사냥꾼일까. 그럼 A가 말했다. 그래도 넌 걜 죽여야 하잖아. 백설 공주 동화에서 백설 공주를 죽이려는 건 딱 둘이지. 여왕이랑, 사냥꾼. 근데…. 백설 공주 살려준 사냥꾼이 사지 멀쩡하게 살았을 것 같냐? 사지가 멀쩡했으면, 사냥꾼이 아니라 왕자 역할이었겠지. 사과 먹고 쓰러진 백설 공주를 키스로 깨우고, 행복하게 사는 왕자. 근데 아니잖아.

 

A의 말이 모두 맞았다. 왕자는 백설 공주에게 반해 키스하고 백설 공주는 왕자를 사랑한다. 왕자의 키스가 백설 공주를 살리고 그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그렇다면 백설 공주에게 사냥꾼은?

 

“만약 사냥꾼이 백설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백설 공주가 이야기의 끝까지 살아남아 행복할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뭐 니가 박지훈이라도 사랑하겠다는 소리야?”

“여전히 너는 공짜 커피를 마실 자격이 없다는 소리지.”

 

관린이 영수증과 함께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A가 카드에 적힌 제 이름을 보자마자 작게 탄식했다. 진짜 빠른 놈. 그러게 정보를 알아왔어야지.

 

“어차피 너 걔 사랑한다며. 안 죽일 거 아냐? 정보가 다 무슨 필요,”

“사랑. 그걸 하면 난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니가 사지 찢길 때 가만히 있겠냐.”

“그러니까.”

 

결국, 의미를 모를 말만 가득 남긴 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다.

 

 

 

 

 

 

 

 

 

 

관린은 새벽마다 지훈을 만났다. 아침은 회사에 일이 바빴고 저녁은 쇼핑하는 사모를 내내 따라다녀야 했으니, 잠을 조금 줄여도 지훈을 보려면 새벽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다. 사모가 쇼핑하는 내내 이건 어때 저건 어때 묻는데 관린이 보기에는, 하나 같이 다 똑같은 색깔의 립스틱. 그러다 오늘은 지훈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립스틱을 하나 발견했다. 이거, 예쁜 것 같아요. 예쁘다라. 한 번도 관린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모는 짧게 웃고는 직원을 불렀다. 이거 하나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그리고 관린에게 한 마디. 너 연애하니?

 

“립스틱?”

“응, 근데 지훈 씨 머리 색이랑 똑같더라고. 근데 이젠 아니네요.”

 

사모가 선물한 립스틱을 갖고 지훈을 만나러 온 관린은 이제 볼 수 없는 지훈의 빨간 머리에 아쉬움을 비췄다. 지훈은 대기업 아들답지 않게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내내 알바를 했다. 지훈에게 떨어지는 돈도 딱히 쓸데도 없고 받아먹기도 싫어서 그렇다는데, 그 사이 관린은 지훈이 알바를 하는 카페에서 내내 죽치고 앉아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염색을 했어요? 그것도 까만색으로. 오늘 만난 지훈은 까만 머리로 주문을 받고 있었다.

 

“다음 주에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요.”

“..다음 주면,”

“네, 유산 상속건 다루는 중요한 회의요.”

 

지훈이 커피 가루를 정리하다 말고 쓰게 웃었다. 지금 관린이 맛보는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쓴웃음. 어차피 누가 상속받을지는 다 정해져 있는데 굳이, 굳이 나더러 참석하래.

 

“근데 나도 어차피 재벌이나, 뭐 유산 상속 같은 거 관심 없어서.”

“왜요? 돈 많으면 좋잖아.”

“그 돈은 다 총구에요.”

“….”

“자리를 물려받는 순간, 언제 총알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총구를 직면하는 거나 똑같죠.”

 

당신도 어느 정도 알면서. 살포시 웃은 지훈이 앞치마에 손을 살짝 털고는 관린의 앞에 앉았다. 옆에 놓인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지훈의 목소리를 듣던 관린이 앞으로 앉은 지훈의 손가락을 잘게 쓸다가, 제 입술을 묻었다. 지훈이 물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아마, 그럴걸요.”

 

모호한 답에 지훈은 찡그린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딱 지금의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아닌가. 관린이 살고, 지훈이 살 수 있는.

 

“다음 주에 회의 끝나면.”

“…..”

“그때 날 죽여요.”

 

지훈의 손등을 내내 쓰다듬던 긴 손가락이 운동을 멈췄다. 잠깐 얽힌 눈동자에서 관린은 지훈의 의미를 읽으려고 했지만,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 자체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진심이에요?”

“네.”

“갑자기 왜요.”

“갑자기라니. 말했잖아요. 언젠가는 죽을 거라 생각했다고.”

 

그리고 나는 천국을 믿는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사는 건 그냥 지옥이에요. 내 옆에 아무도 없거든. 당신이 있지만,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하니까.

 

지훈의 담담한 목소리에 관린이 조용히 손등을 쓸던 손가락에 힘을 줘냈다. 그 힘을 느낀 지훈이 고개를 살짝 틀어 관린의 표정을 확인하면서, 관린의 볼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마치 관린의 온도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내가 죽는 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내가 죽어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친다면,”

“…..”

“그것만큼 천국인 곳은 또 없겠죠. 안 그래요?”

 

정말, 쓴맛이 확 올라올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어투였다. 지훈이 말을 마치고 예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당신들은 왜 미워했을까. 잠깐 봤었던 굴러들어온 돌 첫째 아들, 그리고 박지훈을 죽이기 위해 필사적인 사모. 그들 모두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결국 죽을 결심을 해놓고 모든 걸 정리했을 것이 분명했다. 관린이 뜯어말리고 아무리 말해도 꿋꿋한 표정은 변함이 없을 거라는걸, 관린도 알았다. 그래서 그냥 가볍게 입술에 입술을 맞춘다. 당신의 천국을 위해. 나의 백설 공주를 위해.

 

 

 

 

 

 

 

 

 

 

유산 상속 건으로 마련된 회의실은 로비만큼이나 컸다. 까만 양복에 썩 잘 어울리는 흑발이 지훈을 더 돋보이게 했다. 빨간 머리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지훈에 대한 사모의 감정에 불을 붙일 것 같다고 관린은 생각한다. 지훈이 말한 대로 유산 상속은 당연히 굴러들어온 돌인 첫째 아들에게. 대단한 첫째 아들의 어미인 제 옆에 앉은 사모는 씰룩거리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했다. 관린은 짧게 시선을 들어 멀리 앉아있는 지훈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 막 지훈이 단상으로 나와, 인사를 할 때 사모가 관린의 향해 작게 손짓했다. 허리를 숙여 귀를 가져다 대니, 사모가 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려둔 거지?”

“….”

“똑똑해. 저 년한테 꼭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그게 나름대로 사모를 만족시킨듯했다. 관린이 짧게 고개를 까딱이곤 옆에서 전달하는 꽃다발을 받아냈다. 마지막으로 사퇴하는 임원진들에게 갈 꽃다발. 지훈도 이 자리를 빌려 아예 모든 직급을 내려놓았다. 쓸모도 없고 괜히 총구만 겨눠진 기분이 싫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말. 단상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관린은 그대로 느꼈다.

 

관린이 꽃다발을 들고 지훈의 앞에 섰다. 여전히, 아무 감정 없는 표정에 관린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꽃을 건네주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관린은 눈으로 지훈을 어루만지고 키스를 나눴다. 지훈이 자리를 빠져나가자마자, 관린은 사모에게 말했다.

 

“이제, 일 그만하고 싶습니다.”

“…뭐?”

“마지막으로 주신 일 처리하고, 이제 새로운 길 찾아볼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딱히 꼽아보면 감사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 어버버 하는 사모를 뒤로하고 사원증을 바닥에 내팽개친 관린이 목을 갑갑하게 조르는 넥타이를 손으로 살짝 풀어내면서 발을 빠르게 굴렸다. 저 앞에서 혼자 꽃다발을 안고 걸어가는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의 주인인 지훈의 손목을 잡아채고 다시 한번 달려, 조수석으로 태웠다. 이제 죽으러 가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조금의 아쉬움도 없고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 백설 공주를 태운 관린이,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다.

 

“천국으로 갈 거예요.”

 

 

 

 

 

 

 

 

 

 

관린이 지훈이 탄 조수석 문을 열어 재꼈다. 공항이었다. 큰 소음이 귀를 윙윙 울려 지훈이 작게 인상을 찌푸려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관린이 뒷좌석을 열어 작은 가방을 하나 꺼내 지훈에게 넘겼다.

 

“여권이랑, 나머지 돈들.”

“…..”

“뒷조사 좀 했네요. 무슨 알바를 그렇게 해서 돈을 차곡차곡 모아두고 떠나려고 했어요.”

“이게 뭐….”

“당신이 있는 곳을 지옥으로 만드는 걸 모두 찾았어요.”

“…..”

“그것들이 없는 곳이면 당신에겐 천국이겠죠. 천국으로 떠나요.”

 

관린이 그동안 A를 들들 볶아 얻은 모든 정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장소. 그리고 신상 정보까지. 그 모든 걸 알아낸 관린은 여태 지훈을 천국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지훈이 죽여달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밤새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지훈의 앞으로 놓인 모든 자금을 다 끌어모았다. 지훈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장소. 그리고 지훈이 싫어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그곳. 관린은 그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지훈 씨 비서가 당신을 백설 공주라고 불러요. 당신이 백설 공주와 비슷한 처지래요. 그리고 나보곤 사냥꾼이래. 새엄마 명령을 받고 당신을 죽여야 한다고.”

“…..”

“하지만 당신에겐 왕자와 난쟁이가 없죠. 키스로 잠을 깨워줄 왕자도, 혼자 있을 때 도와줄 난쟁이도 없어요. 그래서 난 당신이 백설 공주도 아니고, 내가 사냥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

“백설 공주의 모든 이야기는 사냥꾼이 백설 공주를 죽이지 않고 놔주는 것부터 시작돼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놔주고 당신이 떠나면, 이제 당신을 반겨줄 난쟁이도, 그리고 언젠가 만날 왕자님도 있다는 뜻이에요. 모두, 천국으로 가면 만날 거에요.”

 

거기서 절대 다시 돌아오지 말아요. 도망가지도 말고,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요.와 같은, 평소에 쭉 내뱉었던 말들을 모두 지우고, 관린은 오늘 지훈의 행복을 빌었다. 지훈이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을 줘냈다. 꽃다발을 감싼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한껏 움츠러들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의 앞에 한 발자국 더 당겨가, 지훈과 자신의 간격을 좁혀냈다.

 

“지훈 씨, 결국 백설 공주를 가장 사랑한 건, 왕자도, 난쟁이도 아닌, 사냥꾼이었어요.”

“…..”

“사지가 찢기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공주를 살려내니까.”

“……”

“동화에 적혀있지 않지만, 공주는 사냥꾼을 항상 기억할 거에요. 맞죠?”

 

모든 이야기는 사냥꾼이 공주를 살려주면서 시작된다. 그 말은, 모두 맞다. 지훈도 백설 공주 이야기를 알았으니까. 여태 확신을 가지고 멋지게 말하다가, 끝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얼버무리며 맞냐고 지훈에게 답을 요구했다. 지훈은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 침착했다. 오히려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건 관린의 쪽이었다. 이건 마지막 선물로 가져가요. 그래도 날 기억할 수 있게. 하나같이 다 똑같은 꽃다발 중에 지훈의 것만 유독 다채롭고 예뻤다. 관린이 고민고민을 해서 고른 꽃다발이니, 그렇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관린이 꽃다발을 한번 쓰다듬었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관린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지훈이 곧, 꽃다발에 있는 꽃들을 줄기째 꺼냈다. 관린보다 한참은 작은 손으로 그 꽃들의 줄기를 양손에 쥐고, 한 번에 꺾어냈다. 두둑, 소리를 내며 허리가 반이 꺾인 꽃들이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그 꽃들을 모두 눈동자로 따라가던 관린의 고개가 지훈의 손에 의해 올라갔다. 금방 닿는 따뜻한 온기가 떨어지고, 지훈이 말했다.

 

“마지막 선물은 누구 맘대로 마지막 선물이에요.”

“……”

“당신이 모르는 게 있는데,”

“…..”

“백설 공주가 가장 사랑한 사람도, 사냥꾼이에요. 왕자? 눈 떠보니까 키스로 날 살렸다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죠?”

 

관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냥꾼이 엄청난 미남이었나 보죠.”

 

지훈이 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아. 나는 사냥꾼만큼 잘생긴 남자를, 여태 본 적이 없어요.”

 

지훈이 그렇게 말하면서 까치발을 서 관린의 목에 팔을 둘러냈다. 그리고 관린이 가장 좋아하는 예쁘고 맑은 웃음을 지어내면서 말한다.

 

“같이 가요. 당신이 만든 나의 천국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냥꾼이 사지가 찢기도록 내 버려두지 않아.”

 

꽃이 꺾이고, 죽겠다는 지훈의 결심이 꺾이는 그 모든 순간. 어쩌면 그 훨씬 전에, 관린의 결심이 꺾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멀리 보낼 거라는 결심.

 

그 모든 게 지훈의 손안에서 꺾였다.

 

관린은 내내 생각했다. 이 일만 끝나면 제 눈앞에서 멀리 날아가는 낙엽들처럼 날아가고 싶다고. 그럼 지훈은 그 옆의 다른 나무의 낙엽이었으면 좋겠다고. 가을을 맞아 멀리멀리 함께 날아가 새로운 곳을 찾아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둘 다 낙엽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훈은 낙엽이 아닌, 뿌리가 다른 꽃이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지훈은 제 줄기를 꺾고, 기꺼이 낙엽이 되기로 한다. 백설 공주는 사냥꾼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낙엽을 관린도 받아들인다. 사냥꾼은 백설 공주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백설 공주를 사랑한 자는 누구인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