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기를
W. 공성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랑과 눈물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살아갈까.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결국엔 그의 사랑을 쟁취한다.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렇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모든 인연은 헤어지기 위해서 만나지는 거라 생각했다. 내 전 애인과의 관계가, 전전 애인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뭐, 그 생각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사랑에도 결국은 끝이 있다, 어차피 끝날 사랑을 왜 하냐 등의 회의적인 말을 하는 관린에게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에 어느정도 공감이 갔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꽁꽁 숨겨놓고 빗장을 열어 훔쳐보듯 키워왔기 때문에 사랑했던 날들이 절절했다. 어느샌가 시작된 사랑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받아들였다.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끌어안아 연소해 나갔다. 타들어 가는 사랑에게서 매캐한 연기가 났다. 그렇게 천천히 사랑을 태워 나가며 나는 참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

 

 

원래 게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관린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란 말이다.

 

“지훈아. 먹고 키 좀 커.”

“좆까, 관린아.”

 

라이관린과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같은 곳을 다녔다. 걔는 우리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침마다 내 손에 텐텐을 쥐어주곤 했는데, 그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내내 텐텐이라고 불렸다. 처음에 텐텐을 받았을 땐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어느 날 2교시쯤 넘어가니 배가 살살 고파져서 수업 시간에 몰래 까먹었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맛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서 3, 4교시는 그걸 열심히 까먹으며 버텼다. 그 뒤로는 걔가 주는 텐텐을 군말 없이 받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전에는 관린을 꽤 피곤한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걔는 엄친아, 우리 엄마의 친구의 아들이었는데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완벽하게 행동해서 엄마에게 너도 좀 보고 배우라는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 했다. 관린은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고무장갑 먼저 껴들었다. 나는 매일 저녁 가자미눈을 하고 걔를 째려보다가 엄마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찔끔하며 쪼그라드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입이 이만큼 튀어나와 설거지를 거들면 관린은 내 입에 젤리를 하나씩 물려줬는데, 그 젤리가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그래서 괜히 입술을 더 내민 적도 있었다.

 

사실은 관린의 엄마, 지수 이모는 우리 엄마의 오랜 친구였는데 우리가 정말 어렸을 때부터 걔를 우리 집에 맡겼었다. 지수 이모는 어디를 가도 TV를 틀면 바로 볼 수 있었을 정도로 바쁘셨다. 걔는 지루한 얼굴로 채널을 돌리다가도 이모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꼭 멈췄다가 이모 얼굴을 충분히 보고 나서야 또다시 채널을 돌렸었다. 그런 걔가 어린 나의 마음에도 안쓰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부터 억지를 써서라도 걔와 뭐든지 함께하려고 들었다. 관린과 나는 정말 어디든 함께 다녔다. 둘이 쌍둥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주 그리고 항상.

 

아무튼 라이관린에 대한 나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이다. 걔를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형태가 조금 달랐다. 빳빳한 재킷과 목 끝까지 잠근 흰 와이셔츠. 걘 우월한 기럭지를 가져서 그런지 교복 바지를 입고도 핏이 완벽했다.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와 은테 안경 그리고 등교 시간이 이른 탓인지 잔뜩 예민한 얼굴, 제법 짙게 흩뿌려진 머스크 향이… 오랜 친구를 자꾸만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었고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

 

 

나는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아무것에도 무게를 지우고 싶지 않아.

 

언젠가 관린은 이 문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며 읊어줬었다. 어디서 저렇게 제 인생의 목표를 깔쌈하게 한 줄로 정리해놓은 문장을 주워왔는지. 내 모든 기억의 시작에서마저도 어린 관린은 이것과 유사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 걔가 조잘조잘해댔던 말을 잘 요약하면 바로 저 문장이 될 테다. 말 그대로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받아온 걔는 사람에게 질린 듯 보였다. 쏟아지는 관심에 지겨운 얼굴을 한 어린 걔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 속에서도 외로움에 젖은 얼굴을 한 걔를 본 적이 있다.

 

가볍게 살고 싶단 그 말이 걔의 염원이었음은 분명하나,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제 얼굴과 존재감은 걔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음도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 걔는 가벼운 삶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긴 했다. 문제는 공기처럼 존재한 듯 안 한 듯한 가벼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독히도 다정한 심성을 뽐내며 어떤 것에도 무게를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다툼이 많다가 결국엔 이혼해버린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 유명 배우였던 그들 때문에 외로움을 습관처럼 익혀버린 것의 영향이었을까. 걔는 모든 것에게 그러했지만 특히 사람에게는 더 그러했다. 관린은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걔는 그렇게나 좋아하는 시바견을 키우지 않았다. 이따금 갤러리에 시바견 사진을 잔뜩 저장해 놓고선, 함박웃음을 지으며 너무 귀엽다고 소리를 질러 대는 주제에 절대로 반려견을 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반려묘도 절대 들이지 않을 것이라 미리 못 박았다.

 

그런 걔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마도 걔를 평생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보고 있는 걘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치….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게 되면 애써 믿지 않고 부정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걔가 안쓰러웠다. 조그만 짐승에게마저도 정을 주는 것이 두려워서 지레 겁을 집어삼킨 걔가, 그렇게나 안쓰럽고 그렇게나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4반 여자아이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온 관린은 질린다는 얼굴로 사랑의 필요성을 물었다.

 

‘왜 다들 사랑 타령일까?’

 

어차피 사랑은 깨지는데. 애써 걔가 말을 잇지 않아도 뒤에 찾아올 문장이 들렸다.

 

‘야, 지훈아. 진짜 난 너뿐이다.’

‘..엉?’

 

‘너 밖에 없는 것 같아, 진짜….’

 

나는 이따위 말을 들을 때마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마도 평생 관린의 주위를 맴돌면서도 절대 입 밖에 내지 못할, 뭐 그런 뜨거운 어떤 것들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가 걔를 안쓰러워하는 동시에 잔인하게 여기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관린의 말대로 내가 걔에게 유일하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곁에 두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유일함을 칭하는 그 말들이 그저 참 간질간질한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걔와 함께 보낸 세월만큼 심장 한편에 쌓여온 그 말들이 심장의 경계에서 넘실대다가…. 이내 자꾸만 넘치려 들었다.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노력했는데도 어느 순간 꿀렁이며 넘쳐 흘러버렸다. 넘쳐버린 마음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를 약해지게 만들었다. 내 마음을 들킨 후에 더 걔의 옆에 설 수 없어진 상상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자학을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꿈을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마음속에 새기며 그렇게 꿈을 꾸게 된다. 그렇다면 어릴 적부터 걔의 꿈은 실낱처럼 가볍게 사는 것이었을 테고, 반대로 나의 소원은 걔가 최대한 무겁게 사는 것이었을 테다. 날 유일하다 칭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꾸 넘쳐서 흐르는 마음을 손으로 틀어막고 제발 걔의 꿈이 박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수없이 간지럼을 타던 심장이 쌓아놓았던 감정들을 둑이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난 이후이다.

 

수학여행 3박 4일 중 제주도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전의 일정을 다 소화한 학생들은 죄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버스에 올라야 했다. 보트를 타고 10분 20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거기는 차귀도라는 곳이었는데 대충 흘려들은 말로는 섬 자체가 천연기념물이라고 했다.

 

차귀도에 도착한 우리는 맑은 바닷물을 첨벙이면서 놀다가 사이좋게 잔소리를 듣고 나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투덜대며 오른 언덕길의 끝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있었다. 드넓은 들판, 높고 푸른 하늘, 바다 내음, 두 볼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에 감동 받은 나는 얼른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할 말이 그득한 얼굴을 하고 옆을 돌아봤을 때, 관린의 모습은 새장 밖을 나와 창공을 가르며 날갯짓하는 새처럼 보였다. 비유가 이상했나? 아무튼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 보였다. 관린은 초록빛 억새 사이에서 두 팔을 벌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푸른 하늘, 억새, 들판. 꼭 푸른 것들을 모두 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부셨다.

 

우리는 차귀도를 다녀오고 항구 근처의 조그만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소주를 샀다. 신분증을 달라고 할까 봐 심장을 졸였는데 무사히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린 레크레이션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방의 모든 불을 끄고 2층에 모여서 조용히 술을 깔 수 있었다. 답지 않게 단정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술은 처음이었다. 홀짝홀짝, 술을 아주 조금 마셨는데 금세 열이 올랐다. 야 텐텐 얼굴 봐, 피 나겠다! 얼굴이 발갛게 변한 나를 본 관린은 밖에 나가서 산책하자며 이끌었고, 우리는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발을 굴리며 대화를 나눴다.

 

“박지훈, 기억나?”

“뭐가?”

 

멍하니 하늘의 별을 세며 발을 구르고 있을 때, 관린이 대뜸 질문을 했다.

 

“우리 할로윈에 놀이공원 갔던 거.”

“아, 그 어릴 때?”

“응. 그때 나도 같이 안 가면 너 안 간다고 밥 먹다 말고 바닥에 드러누워서 떼쓰고 그랬잖아.”

“…야, 너는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바라본 관린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늘을 보던 관린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 두 눈이 별 박힌 것처럼 빛났다.

 

“그리고 내가 무서워하니까 너 어디 안 간다고, 막 너만 믿으라고 했던 거도 기억하냐?”

“어…. 아마도? 그때 너랑 둘이 부둥켜안고 찔찔 울었었나…”

“그때 정말 고마웠어.”

 

어릴 적의 기억을 되짚는 관린은 뭔가…. 꿈을 말하는 아이 같았다. 이것도 비유가 이상한가? 고마웠다며 그 큰 눈이 모두 접히도록 웃은 관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에 진지함이 피어났다.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할 말을 잃고 손톱만 뜯고 있었다.

 

“아, 술김이니까 하는 말인데… 그때부터 나는 진짜….”

“……”

“네가 내 세상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화악-

 

순식간에 열이 얼굴로 몰렸다. 훅 더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진짜 얼굴에서 피라도 나올 것 같아서.

 

“우리 또 할로윈에 가자. 스무 살 되면 기념으로, 어때?”

“어, 어…. 그러자.”

“박지훈, 너 얼굴 지인-짜 빨개졌어.”

“야! 아니야! 진짜, 나 술 먹어서 그래!”

 

볼을 콕콕 찌르면서 놀려대는 관린을 밀쳐내며 애써 부정했지만, 쿵쾅대며 존재감을 뽐내는 심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가랑비에도 옷이 젖는다. 수없이 쌓인 감정들이 사랑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외면했고 애써 부정했지만, 결론적으로 관린을 사랑하게 됐다. 가능하다면 평생을 이 사랑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곁에 머물고 싶었고, 관린을 오래 봐온 만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걔를 사랑하는 내가 배신자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밖에 없다며 웃던 관린과 상상 속에서 배신감에 젖어 든 얼굴을 한 관린. 머리가 아팠다.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다짐했던 것과 같이 나는 결코 내 마음을 입 밖으로 낼 생각이 없었다. 걜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 사랑의 끝은 서로의 상처뿐이라는 걸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겠더라고. 그런데 술은 웬수라더니… 수능이 끝나고 난 뒤에 친구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나는 술에 꼴아 관린에게 키스했다. 빌어먹을 내 주량은 고작 맥주 한 캔 정도였다. 누가 얼굴이 붉어져도 제법 마시는 경우가 있다고 그랬는데 다 개뻥인 것 같다. 나는 일이 있고 나서 앞으론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다시 컵에 담을 수 있겠느냐고.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큰 감정들을 끌어안고도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무의식중에 이 허기짐을 해소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걸 그렇게 한순간에 망쳐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 뒤로 관린을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굳이 관린을 찾진 않았다.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도 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하질 못해서. 변명을 해서 평생을 친구로 남을지, 아니면 이대로 라이관린의 궤도에서 떨어져 나갈지. 정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일을 걔와 나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울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사실은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떠넘기고 싶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제 코트를 쥐어잡은 내 손을 차분히 떼어내던 그 곤란함이 잔뜩 묻은 얼굴이 생각났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뒤돌아서던 순간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서럽게도 울었다. 소리 엉엉 울기도 했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자학하기도 했다. 엄마는 둘이 애도 아니고, 싸우기는 왜 싸우냐고 면박을 주면서도 꽤 오래 집에 들지 않는 관린이 걱정되는 눈빛이었다. 벽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화해나 하라는 엄마의 말에 눈물을 닦으며 물기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이제 걔랑 친구 못해!

 

그 뒷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습관처럼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와중에도 관린의 입술이 따뜻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눈물 몇 방울을 더 흘렸다. 그러나 울고불고 하던 것도 잠시뿐, 관린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보지 못한 건 처음이라서 자꾸만 그리움과 두려움을 불러왔다. 이제 곁에 머물지 못하는 걸까?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았다. 사랑해서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서글펐다.

 

참다못해 관린을 보고 오겠다며 방문을 박차고 나온 나를 붙잡은 엄마는 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손에 쥐주었다. 관린의 집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일단은 고백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슬퍼하고 후회해보아도 난 이미 관린에게 입술 박치기에 가까운 키스를 했고, 어차피 관린의 유일했던 친구로 남는 건 불가능할 거란 결론이 나서. 애써 좋게 생각해보려 노력도 했다. 하지만 날 끈질기게도 괴롭히던 걔의 친구 자리에서 박탈당한 것도 썩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

 

 

“안녕.”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관린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 반찬 가지고 왔어.”

 

엄마가 싸준 반찬을 쥔 손을 얼굴 높이쯤으로 올려 달랑달랑 흔들었다. 관린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옆으로 비켜섰다. 오랜만에 들린 관린의 집은 여전했다. 헉 소리 나게 넓은 공간인데도 숨이 막혀서 자꾸만 입을 열게 됐다. 반찬을 하나하나 꺼내며 이건 빨리 먹어라, 저건 좀 오래 둬도 괜찮을 거다. 그것도 잠시 반찬을 다 정리하고 나니 할 말이 떨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관린을 따라 소파에 앉아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브라운관 안의 예능인들의 재치있는 입담에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의무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만 보내는 게 답답해 입술만 자꾸 달싹거렸다.

 

“박지훈. 왜?”

“응?”

“할 말 있는 것 같아서.”

“어…. 할 말, 그치… 많지.”

 

관린은 내 말을 경청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리며 관린 쪽으로 돌아 앉았다.

 

“일단…. 우리 수능 끝나고… 그때 키스했던 거. 그거 사과할게. 너무 놀랐을 거 같아서…. 술김에 충동적으로 했던 거긴 한데, 근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너 진짜, 2학년 때부터 좋아했어…”

“……”

 

눈을 질끈 감고 횡설수설 말을 뱉어냈다. 어찌어찌 고백을 하려는 순간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관린의 얼굴을 확인했다. 매번 상상 속에서 나를 괴롭게 만들었던 배신감 가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 걔는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린의 눈빛에는 체념과 안쓰러움이 어려 있었다. 설마.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했다. 설마. 설마….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묻잖아.. 알고 있었냐고!”

“..그래,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알았어.”

 

관린은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똑바로 서 있는데도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야, 너는….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너무 웃기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관린을 내려다 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야 너 진짜 대단하다… 나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자꾸, 하.. 웃음이 나오네…”

“……”

 

눈물이 고일 때까지 배를 감싸고 웃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관린을 바라보다 웃음을 거두고 뒤를 돌아 현관문 쪽으로 걸었다. 왈칵 쏟아져 얼굴을 더럽히는 눈물을 계속 닦아냈다. 빠른 걸음으로 당도한 문 앞에서 손잡이를 잡은 순간,

 

“네가 필요했어.”

“……”

“박지훈, 네가 아직 필요해서 그랬어..”

“내가 필요했다고? 아직 필요했어? 야, 너는…! 넌 나 불쌍하지도 않았어? 내가…,”

“…지훈아,”

“그래서. 언제까지 날 필요로 할 건데? 필요 없어지면… 이제 필요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건데? 버릴 거야?”

“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흥분해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공허한 공간을 메꾸었다. 잔뜩 비뚤어진 말로 관린을 할퀴고 동시에 스스로를 할퀴었다. 오랜만에 격앙된 표정의 관린을 본 것 같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웃기기만 했다. 머리통이 뜨끈한 열기를 뿜어냈다. 생각들이 마구 엉켜서 흐려졌던 머릿속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럼.”

“……”

“내가 필요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건데.”

“……”

“나도 네가 필요하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성큼성큼 관린이 앉아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온 나를 올려보는 관린에게 입을 맟추었다. 관린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쳤다.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관린의 입속을 탐하는 키스가 이어지다가 혀가 섞였다. 서로의 옷을 벗기며 몸을 더듬었다. 이로 관린의 어깨를 깨물면서 왈칵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섹스를 하면서 지하 밑바닥에 파묻힌 기분을 느꼈다. 관린아 나는…. 진짜, 나는… 네가 너무 미워.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미워하기를

 

 

*

 

 

옛날 사람들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 별이 기우는 것, 해가 뜨고 지는 것, 기온이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날을 정하고 달과 계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달은 이름에서처럼 달이 차고지는 것을 기준으로 했는데 기준대로라면 가장 중간은 15일이 된다고 한다. 열닷샛날을 달리 부르면 보름이라고 하니 그날 뜨는 달을 보름달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꽉 찼다고 해서 만월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기울었던 달이 점차 차올라 만월이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사람의 감정도 같다고 생각했다. 차올랐던 달이 다시 스러지듯, 사람의 사랑도 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나의 사랑은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넘쳐흘러 시작된 거니까 그만큼 천천히, 그리고 서슴없이 끝을 향해 타들어 가겠지.

 

섹스를 한 뒤에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한숨처럼 연기를 뱉어냈다. 뉴스에서 올해 추위는 10월 말부터 시작될 거라더니 진짜였네. 도시의 불빛들이 깜깜한 밤을 밝게 비췄다.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어두움. 그 위에 박혀진 잘 보이지도 않는 별들을 세어보려고 노력했는데 하나? 둘? 진짜 없었다. 오늘 달은 상현달이었다. 아니.. 왼쪽이니까 하현달인가?

 

어쩌다 보니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엄마는 뛸 듯이 기뻐하며 둘이 같이 살면 되겠다고 했다. 그 길로 난 몰래 기숙사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들켜버려서 꼼짝없이 관린과 같은 집에서 살게 됐다. 라이관린과 박지훈은 겉으로 봐선 고등학생 때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때와는 사실상 관계 자체가 다른데도. 그날 이후로 온통 엉망이었다. 매일 같이 부대끼는 몸과 다르게 한없이 멀어졌다. 그 간격이 계속해서 커졌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사실 별 도움은 안 되지만 생각이 많아지면 버릇처럼 찾게 돼버렸다. 원래도 섹스를 하고 난 뒤에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오늘처럼 취해서 감정적인 상태로 섹스를 하면 더 그랬다.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머릿속에서 후회감에 절여진 눈동자가 떠나질 않았다.

 

으슬으슬 추워서 거실로 들어왔다. 관린은 대충 씻었는지 젖은 머리를 털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컵을 들고 방에 들어가려는 관린을 붙잡았다.

 

“관린아.”

“……”

“내일 할로윈이야. 안 잊었지?”

“어.. 당연하지.”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마음이 답답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옷의 소매에서 담배 냄새와 머스크 향이 났다. 관린의 셔츠였다. 짜증스럽게 얼굴을 쓸어올리다가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드러누웠다. 옷에 남은 머스크 향이 자꾸만 해묵은 감정들을 불러왔다.

 

 

*

 

 

PM12:30

 

시끄럽게도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더듬더듬 손을 짚어 폰을 잡아들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앉아서 관린의 셔츠를 벗었다. 셔츠를 손에 들고 비척비척 욕실로 향하면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한 내가 거울에 비친다. 멍하게 거울을 바라보다가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비누칠을 하는데 너무 껌껌했다. 얼른 헹궈내고 눈을 떠 답답한 어둠에서 벗어났다. 얼굴의 물기를 닦은 수건을 목에다 걸고 욕실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여니 관린이 사놓은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와 단 간식거리들, 커피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것들을 손으로 밀어 한쪽으로 몰아넣었다. 끝이 조금 찌그러진 우유갑을 들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우유를 컵에다 따르고 식탁에 가서 앉으니 텐텐 박스가 보였다. 손을 뻗어 텐텐을 만지작거리다가 포장지를 까서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어먹는데 귓속에서 자꾸 관린의 말들이 맴돌았다. 지훈아. 진짜 난 너뿐이다. 지훈아. 진짜 난. 너뿐이다.

 

아 씨발….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랑한 걸 후회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스스로 후회를 만드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트고 갈라진 입술에서 피가 났다. 입에서 피 맛이 돌았다. 건조해진 피부가 온몸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추운 계절이 돌아온다고. 벌써 가을이다.

 

검은 코트 안에 초록색 니트와 슬랙스를 걸치고 자취방을 나섰다. 중간고사 막바지라 그런지 건물 곳곳에 홀가분해 보이는 사람들과 하얀 A4용지나 노트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버릇처럼 자주 가던 빵집에 들러 사 온 또띠아와 아메리카노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빨대를 입에 가져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면,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잘 마시지도 않는 걸 왜 산 거야.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스윽 밀어버렸다. 심술이 나서 또띠아를 와구와구 뜯어 먹는데 망할. 강의실을 나오던 라이관린과 눈이 마주쳤다. 냄새 풍긴다고 강의실을 나와 근처에 앉아서 빵을 먹은 게 화를 불러왔다. 사레가 들려 쿨럭대며 급하게 저 멀리 밀어놓았던 아메리카노를 꼴깍꼴깍 삼켰다. 좀 진정된 후에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관린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공기만 날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진짜 미친놈이 맞다. 시험 하루 전에 술 퍼마시고, 섹스하고…. 단 한 장의 프린트도 보지 않고 시험을 치러 들어갔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문제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부 공부를 했어야 적절한 답을 적을 수 있을 문제들이었다. 대충 끄적이고 최소 시험 시간? 아무튼 조교가 가도 된다는 말을 하자마자 튀어나왔다. 그래봤자 3시 강의 때문에 학교에 묶인 몸이지만. 모든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면서 메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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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나 먼저 갈까?

 

라이관린 나 강의 듣는 중

맘대로 해

 

먼저 가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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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조금 더운 것 같더니…. 늦은 오후가 되니 제법 쌀쌀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덜터덜 걸었다. 굳이 먼저 갈 필요는 없지만.. 마음의 준비 차원이다. 오늘은 꽤 슬픈 날이 될 것 같으니까. 학교의 가로수들이 전부 색동저고리를 입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다가 조금이라도 더 세게 불어오면 툭 떨어져 내린다. 빨갛고 노란 것들이 푸른 하늘과 아주 잘 어울렸다.

 

지하철을 탔다. 운 좋게도 자리가 꽤 있어서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앉으니 피곤함과 나른함이 훅 느껴졌다. 건조증이 도져서 가려운 눈가를 비비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포털 사이트를 켜서 어제 떴던 달이 무슨 달인 지 검색해봤다. D 모양인 달이 상현달이라고 한다. 그럼 하현달이었네.

 

If I didn’t hide it

Wouldyoustillsayyouneededme?

GuessIwalkedrightintoit

GuessImadeittooeasy

Ifanywordthatyousaid

Couldhavemademeforget

WouldIgetupoffthefloor

‘Causethisisallinmyhead

 

반복재생 기능을 켜놓은 뮤직 어플은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내내 같은 노래만을 재생시켰다.

 

 

*

 

 

놀이공원. 소풍으로 몇 번 왔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엄마와 라이관린이랑 왔던 것 말고는 개인적으로 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할로윈이라 그런지 평일에 이른 시간인데 생각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들의 좀비 분장은 전부 믿기지 않게도 생생했다. 곪아 터지고 그을린 상처들을 어쩜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어린 애가 보고 안 울면 이상한 거 아니냐고.

 

할로윈 기념으로 꾸며진 매직 아일랜드를 구경하다가 성이 모두 보이는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내 뒤에 줄 서 있던 커플에게 부탁했는데 나도 똑같이 부탁받았다. 놀이기구를 하나라도 타고 싶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줄이 너무.. 너무 길었다. 한 20분인가… 30분이었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박차고 나왔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져서 음산하게 꾸며놓은 장소에서 분장을 한 사람들을 보니 오싹했다. 좀비 퍼레이드가 한창이었고, 빨간 조명 아래서 현란하게 춤을 추는 좀비들은 정말이지.. 기괴했다. 근데 춤은 진짜 잘 춰. 퍼레이드를 구경하면서 좀비 분장을 한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함께 셀카도 찍었다.

 

지쳐서 너덜너덜한 상태로 놀이공원 내부에 들어와서 츄러스를 뜯어먹었다. 이 새끼는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웅얼웅얼 욕지거리했다. 벤치에 앉은 채로 반짝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게 식은 몸을 데워주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따뜻한 빛을 발하는 게 야속했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등 뒤에 누군가 서는 느낌이 났다.

 

“왔네.”

“……”

“…야, 인간적으로 너무 늦게 온 거 아니냐?”

 

….미안해. 관린은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하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회전목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라이관린.

 

“너는… 아직도 내가 필요해?”

 

질문은 했지만, 사실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옆을 돌아봤다. 관린은 묵묵히 회전목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라이관린 여전하다 지인-짜… 야, 너 나 미워가지구 막, 이러는 거지? 나랑 텔레파시 게임하냐 무슨? 근데 웃기지 나 그 텔레파시 받았어. 너 입 벙끗도 안 했는데 무슨 말 했는지 들린 것 같아. 너 나 많이 밉냐? 근데, 너 그거 알아야 돼… 나도 너 진짜 미워….

 

라이관린이 옆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감정에 절여진 눈, 그 속에 숨어있는 감정들은 아주 많고 복잡해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었다. 언젠가 후회로 절여진 눈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사실은 그건 보는 사람 나름이지. 정말 후회였을 수도 있고, 동정이었을 수도 있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어려웠다. 관린의 눈빛을 읽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영어권에서는 서로 간 불화를 끝내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수단으로 다리(bridge)를 비유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여기서 다리는 둘 사이의 관계가 나아질 수 있는 수단이고, 다리를 불태워버리면 둘은 더는 만날 수 없게 되니까 결국 관계가 단절된다. 우릴 둘러싼 모든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 나는…. 라이관린과의 다리를 불태울 거다.

 

 

그러니까 관린아… 우리 그만하자. 나 이제 너 안 필요해. 너도 나 필요해 하지 마. 그냥…. 그냥, 나 미워해줘 관린아.

 

 

*

 

 

“와, 춥다…”

 

지하철역을 나오며 숨을 몰아쉬었다. 적당히 깜깜한 하늘에 입김이 흩날린다. 도시의 불빛을 받은 밤하늘은 희미한 어둠을 지니고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둥근 반달이 떠 있다. 어제랑 비슷한데…. 어제가 조금 더 동글동글? 오늘은 완전 반달 모양이다. D 모양이 상현달이라고 했으니까….

 

“저건 하현달이겠네.”

 

차올랐던 달이 기울고 있었다. 매일 얼굴을 바꾸는 달의 모습이 꼭 내가 관린을 사랑하는 모습과 같아 보였다.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 하다가도, 하루가 멀다고 미워서 놓아버리고 싶다며 울었다. 놀이공원에 관린을 홀로 두고 오기 전, 걔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관린은 벌떡 일어선 날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를 품에 끌어안더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지훈아. 미안해…. 나 미워해, 나 미워하고… 원망해.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볼이 파이도록 깊게 빨아들였다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진짜…. 미워나 할 수 있었음 좋겠네.

 

 

 

 

 

미워하기를

攻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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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만큼만 – 캐스커

Bridges-Broo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