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지난 계절과의 시리즈 연재입니다.

지난 계절 보러가기 

 

 

 

 

가을의 숲길
(A Wooded Path In Autumn)

w. 아란드

 

 

 

 

 

“거 젊은 양반은 여길 떠나지 않는거요?”

 

“네.”

 

“항구 앞에서 그림 그리던 양반들은 전부 덕유산이며, 마이산이며 단풍 그리러 떠난다고 난리던데.”

 

“…전 주로 인물화를 그려서 굳이 풍경은 필요 없어요.”

 

“음,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지만, 고맙게도 더는 묻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더라. 산이 단풍으로 물듦과 동시에 몇몇 그림쟁이들은 이 항구 도시를 떠나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다시금 돌아오겠지만 1년에 단 한 번뿐인 그 절경을 놓칠쏘냐. 누가 누가 더 아름다운 단풍을 화폭에 담느냐에 따라 겨울에 소고기를 먹을지, 돼지고기를 먹을지, 그게 아니면 날아가는 참새를 총으로 쏴서 먹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난 다시 잘 갈려있는 목탄을 손에 쥐고 지문으로 더럽혀진 캔버스위에 기다랗고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동글동글한 머리통, 그리고 매끈하고 길게 빠진 목, 넓은 어깨와 살짝 튀어나온 골반은 꽤나 남자답다. 목탄으로 그린 호선에 담긴 몸매는 참,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내가 이 항구 도시를 떠날 이유가 없잖아. 여기에 피사체가 있는데, 굳이?

 

커피콩을 갈던 그는 노골적인 내 시선을 눈치챈건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다가왔다.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그는 이젤에 가려진 내 캔버스 끝과 날 번걸아 봤다. 맑은 갈색 눈동자는 마이산을 물들인 단풍들보다 더 다채롭고 아름답다.

 

 

 

 

 

“뭐 그려요?”

 

“…그야, 가을에 가장 예쁜거요.”

 

“흠….”

 

 

 

 

 

목을 쭉, 빼어 캔버스에 너저분하게 그려져있는 검은 선을 확인하는 그.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인간일지라도 지금 이 그림에 담긴 인물은 스프링 카페의 사장 ‘라이관린’이라는 것을 알테다. 커피콩을 열심히 갈고 있는 가을과 닮은 이 남자를 완전하게 그림에 담기에는 내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그는 피식 웃으며 날 쳐다봤다.

 

 

 

 

 

“저-번엔 겨울에 가장 예쁜거라고 해서 날 그렸잖아요.”

 

“그랬죠.”

 

“그리고 저번에는 봄에 가장 예쁘다며 날 그렸고.”

 

“예, 예.”

 

“얼마전에도 여름에 가장 예쁜거라고 하면서 날 그렸단 말이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에요, 관린씨?”

 

“지훈씨 눈에 제가 안 예쁠때는 언제인가요?”

 

“…나 참.”

 

 

 

 

 

능글맞은 말에 나도 웃었고, 그도 날 따라 웃었다. 곧 문가에 달린 종이 딸랑이며 손님이 들어왔고 그는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며 카운터로 돌아가려다, 이내 내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만지작 거리며.

 

 

 

 

 

“내일 혹시 뭐해요?”

 

“그림쟁이는 매일 그림 그리느라 바쁘죠.”

 

“그럼 내일은 그림쟁이 말고 박지훈의 계획 좀 알려줄래요?”

 

“…음, 그 사람은 내일 별 계획이 없네요.”

 

“그럼 시간 좀 비워둬요.”

 

 

 

 

 

‘주문할게요’라고 부르는 손님에 의해 그는 카운터로 향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도 어떤 의미론 참 섹시해서, 그림에 그려넣고 싶어 눈으로 잔뜩 찍어뒀다. 찰칵, 찰칵.

 

 

 

 

 

“이제까지 그렸던 그림들.”

 

“네?”

 

“그것 좀 전부 가져와 줄 수 있어요?”

 

 

 

 

 

어, 뭐지. 이제와서 기분 나쁘다는 건가. 아니면 그 빌어먹을 초상권 타령을 하며 내 그림을 다 찢어버리려나. 하지만 저 표정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지금 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가게에서? 무드없이?”

 

“…아, 음.”

 

“예술가 나으리가 그렇게 감수성이 없으셔야 되겠어요?”

 

 

 

 

 

찡긋, 윙크를 남기곤 손님에게 달려갔다. 주문을 받고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귀에서 이명처럼 모든 소리들이 들렸다. 무드와 감수성을 찾는 남자의 목적, 애매모호한 사이의 두 남자, 내일 시간 있으세요? 라고 묻는 원인.

 

이거 그거잖아. 나한테 고백하려고 하는거잖아.

 

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더러워진 스케치북에 얼굴을 묻었다. 아마 목탄 가루가 얼굴에 지저분하게 묻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붉은 얼굴보단 검은 가루 묻은 얼굴이 덜 창피할 것이니까.

 

 

 

*

 

 

 

 

 

그대로 허겁지겁 이젤과 도구들을 챙겨 스프링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덧 해가 지고 달이 떠버렸다.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 달빛을 보고 난 허리를 일으키며 일어났다.

 

 

 

 

 

“하, 답답해.”

 

 

 

 

 

달빛과 함께 스며들어오는 것 같은 찬 기운에 신경질적으로 낡은 하숙집방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다가 결국 나는 방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문득 완벽하게 정의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 이 낡아빠진 하숙집에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속을 걷는 것만 같은 불투명한 나의 미래, 그리고 스프링 카페 사장과의 관계. 이렇게 세 가지가 나를 복잡하게 했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며 하숙집 마당으로 나오자, 평상에 앉아 달을 보고 있는 30대 중반 고시생 민호형이 보였다. 저 사람도 답답해서 나왔으려나. 낯선이의 발소리에 어깨가 살짝 떨린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그와 10cm 떨어진 거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의 곁에 이미 매캐한 담배냄새가 잔뜩 묻어있는걸 보니 이미 담배를 몇 개비 태운게 분명했다.

 

 

 

 

 

“넌 왜 단풍 그리러 안 떠나냐. 어제 사진가며 화가며 단풍 담으러 떠나야 한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짐싸던데. 그래서 하숙집 방 4개나 빠졌어.”

 

“난 풍경화 그리는 화가 아니야.”

 

“그래? 돈 되는건 뭐든 한다고 하지 않았냐.”

 

“…….”

 

“…그래, 어련히 잘 살겠지. 괜한 오지랖 부렸네.”

 

“민호형.”

 

“응?”

 

 

 

 

 

담배 연기를 아래로 뿜어댄 뒤, 옆에 앉아 혼잣말을 열심히 해대는 형의 이름을 불러봤다.

 

 

 

 

 

“이건 내가 아는 화가 이야긴데요.”

 

“응.”

 

“그 화가가 저번 겨울부터 어떤 인물만을 그리기 시작했거든요.”

 

“응.”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화가한테 그림을 전부다 가져오라고 했어요. 이게 뭐에요?”

 

“아, 당연히 그림 내놓으라는 거지. 내 얼굴 들어간 그림 기분 나쁘니까 내놔라. 이거잖아.”

 

 

 

 

 

아, 아니. 그 사이에 껴있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니까. 그리고 그 사이에 껴있는 감정들도 많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버린 민호형에게 더한 설명을 해줘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아뇨. 그런데 이게 보통사이가 아니란 말이죠.”

 

“그럼 채무관계야?”

 

“아뇨!”

 

“아, 깜짝이야. 야, 담뱃재 떨어졌어. 담배를 피던가, 말을 하던가 한 가지만 해.”

 

“아니 형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아무튼,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싫었으면 싫다고 말했겠죠. 그런데 그런 말 하나도 안 하고, 오히려 포즈도 취해주고 그랬다구요. 그런데 갑자기 그림을 가져오라는 건 뭘까요? 혹시 뭐….”

 

“그건 이제 자기 권리를 행사한다는 거네! 포즈 열심히 취해주고 자기 얼굴도 줬으니까 이제 다시 가져가겠다.”

 

“…….”

 

“이거지. 다른 의도는 전혀 안 느껴져. 권리 행사를 위한 절차를 밟는거네.”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연인 사이도 파토내는게 그런 사소한 일이야. 그 친구한테 너무 상심말라고 해. 새로운 모델 찾아서 새롭게 시작하면 되지.”

 

“…….”

 

“잘 전해줘.”

 

“…….”

 

“응? 야, 재 떨어져. 야.”

 

“…형은 언제 공부해요?”

 

“갑자기 뭐야.”

 

“이렇게 나와서 담배 필 시간에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야, 너 이새끼.”

 

“전 들어갈래요.”

 

 

 

 

 

원하는 대답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며 가슴에 못을 박으니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괜히 민호형에게 심술을 부린 뒤, 모래 바닥에 담배를 지져 끄고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젠장. 진짜로 그 그림들을 다 가져간다고? 그럴거면 처음부터 말을 해줄 것이지.

 

아, 이렇게 끝날 운명이였던가.

 

 

 

방으로 들어와 한 쪽에 쌓여있는 캔버스와 종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젠장.

 

 

 

 

*

 

 

 

 

 

 

– 빵빵!

 

 

 

 

 

 

 

잠을 깨우는 소리는 요란한 참새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클락션이였다. 하숙집에 사는 인간들 중에 자차가 있는 인간이 없을텐데. 누군가 돈을 빌려서 갚지 않아 독촉을 왔던가, 그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등골 빼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소리겠지.

 

나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를 막기 위해 이불을 끌어다가 얼굴을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정신을 놓고 숨소리에 집중했다.

 

 

 

 

 

– 빵빵!

 

 

 

 

 

하지만 빛은 차단할 수 있어도 소리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고, 얇은 벽 사이로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가 그대로 꽂혔다. 아, 도대체 어떤 새끼가 아침부터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거야.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었나. 이번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귀를 막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귀를 강렬하게 꿰뚫는,

 

 

 

 

 

 

 

– 지훈씨!

 

 

 

 

 

목소리. 목소리? 벌떡. 얼굴을 덮고 있던 이불은 바닥으로 툭하니 떨어졌다. 그리고 내 정신도 번쩍 들었다. 방금 그 3음절이 ‘지, 훈, 씨’라고 부른거지. 그리고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건, 스프링 카페의 주인 관린씨가 유일하다. 내 주변엔 담배에 쩔어서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 뿐이였고, 귀에 확 꽂히는 목소리를 내는건 그사람 뿐이니까.

 

아니, 잠깐만. 무슨 그림을 가지러 우리집까지 찾아온거야? 우리집은 어떻게 알고? 아, 생각해보니 예전에 한 번 집에 데려다준 적이 있구나. 제기랄. 내가 미쳤지. 살인자에게 집을 직접 안내해주는 꼴이라니. 불안감이 몰려와 방의 이리저리를 빠르게 훑어봤다. 내 방에 들어와서 그림을 모조리 회수해갈 셈인가. 나는 숨을 죽이고 없는 척을 했다.

 

 

 

 

 

– 지훈씨!

 

– 빵빵!

 

 

 

지훈이 없어요! 그만 불러요!

 

숨을 죽인채 있으면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지훈ㅆ…!

 

– 누구세요.

 

 

 

 

 

타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민호형의 목소리다. 그래, 민호형! 어제 저녁에 했던 대화를 유추해보면 그그림 독촉자가 저 사람인걸 알아챌 수 있을거다. 고시 공부를 헛으로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나 없다고 해.안 그럼 내 그림 다 빼앗긴다구.

 

 

 

 

 

– 저 오늘 지훈씨를 좀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방에 있나요?

 

– 아.

 

 

 

 

 

 

 

조용해졌다. 나는 창문 곁에 서서 대화에 집중했다. 민호형은 지금 열심히 상황을 어떻게 꾸려갈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그림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짱돌을 굴리고 있겠지. 빨리 보내줘.

 

내 소중한 그림들은 포기할 수 없어. 살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광경을 그렸던 것인데…. 아버지에게 얻어 터지며, 동생들을 지키던 인생만을 살아온 내게. 커피를 타며 여유로운 광경을 보인 그의 모습은 정말 신세계였다. 내 인생과 어울리지 않는 그 광경은 내겐 상상화였으며 추상화였다.

 

 

 

그러니까, 지훈이 없으니 돌아가요.

 

 

 

 

 

“야! 박지훈! 니 친구 왔다!”

 

 

 

 

 

갑자기 번쩍 열리는 미닫이 창문과, 그 사이로 갑자기 침입해 온 햇살. 눈치없는 민호형의 너머로 보이는차. 그리고 운전자석의 열린 창문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 나와 눈이 마주하자 선글라스를 벗고 손을 흔든다.

 

민호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내게 속삭인다.

 

 

 

 

 

“저 차 수입차 아냐? 죽인다. 니 친구야?”

 

“닥쳐요.”

 

“뭐? 왜!”

 

 

 

 

 

…죽이고 싶은건 형이야.

 

 

 

 

 

 

 

 

 

*

 

 

 

 

 

차 트렁크에 잔뜩 그림이 담겼다. 어딘가로 향하는지 모르는 차 안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가끔 나를 힐끗힐끗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 시선은 정면만을 주시하며 모른척 했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는 긴장한채로 힘이 들어가서 만약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제스쳐를 취하기만 하면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던지려고 했다. 물론, 관린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사람일은 혹시나 모르니까.

 

항구 도시에서 벗어난 차는 어느덧 국도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 산으로 향했다. 목구멍에 솜을 우겨넣은 것처럼 말을 하지 않던 나는 궁금함을 못이겨 결국 입을 열었다.

 

 

 

 

 

“…어디가는 거에요?”

 

“가보면 알아요.”

 

“아, 예….”

 

“긴장했어요?”

 

“내, 내가 무슨 긴장할 일이 있나요. 관린씨가 절 죽이는 것도 아니고.”

 

 

 

 

 

은근슬쩍 그의 의도를 떠보려는 말을 해봤지만 그는 씽긋 웃으며 정면을 바라볼 뿐이다. 차 내부는 그를 닮아 깨끗했다. 그를 닮아 깨끗한 차는 도로를 가르며 산을 올라갔다.

 

바깥 풍경을 보는 동안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감탄을 했다. 곱게 물들여진 단풍나무들에 산이 주홍빛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년에 단 일주일. 겨울을 앞둔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 모습은 가히 절경이였다. 난 창문을 열어 고개를 빼내서 조금 더 가까이 보려했다.

 

 

 

 

 

“지훈씨, 위험해요. 몸을 그렇게 빼면.”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걸요.”

 

“조금 있다가 내리면 봐요. 곧 도착해요.”

 

 

 

 

 

곧 도착한다.

 

그 말은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단풍 속에 들어와있는 지금이 너무나도 경이로운 풍경이었기에 그의 알수없는 본심은 잊기로 했다.

 

 

 

 

 

*

 

 

 

 

 

 

 

“도착했어요.”

 

 

 

 

 

커다란 나무 밑에 차가 세워졌다. 그 나무는 족히 몇백년은 산 것과 같이 커다랗고 위압감이 넘쳤다. 그는 시동을 끄고 의아해하는 내게 내리라며 턱짓을 했다.

 

오는 동안 풍경에 취해서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찾아와 어깨를 뭉근하게 만들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차문을 열고 내려 나무 그늘 밑에 서있는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을을 온 몸으로 뽐내고 있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이 나무는 아직 푸르렀다. 가을이라고 생각이 들지않았고, 마치 아직 여름에 머무른듯 하였다.

 

 

 

 

 

“그림.”

 

“네?!”

 

“아, 왜이렇게 놀라요?”

 

“그, 그림 달라구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림 달라고 하려는 거.”

 

 

 

 

 

하, 씨발. 이렇게 멋있는 곳에 데려와서 고작 한다는게 그림 달라는 거야? 그럴거면 하숙집에서 달라고 하면 됐잖아! 나는 손을 올려 마른 세수를 했다.

 

 

 

 

 

“그 전에 말해주지 그랬어요. 빨리 줬을 텐데.”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죠. 언제 말을 할까 망설였는데 딱 오늘이 제격일 것 같아서요.”

 

 

 

 

 

그림 가져가는 날에 제격이 있고 아닌게 있나. 참 예민하다니까.

 

 

 

 

 

“난 생일 때마다 운이 좋았어요. 항상 그랬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기념일이 내 생일이에요. 내 인생의 축복이죠. 아버지의 사업이 커진 것도 10살 내 생일 때였고, 그렇게 대만에서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도 내 생일이죠. 그리고, 처음 지훈씨를 우리 도시에서 보게 된 것도 내 생일때였어요.”

 

“…….”

 

“난 내 생일에만 행운이 이루어질거라 생각했는데, 이번 여름 태풍이 북상한다는 날에 우리 가게 앞에 서있는 지훈씨를 보고 최고의 행운이 왔다고 생각했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에게는 언제나 따르지 않던 행운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항상 달라 붙어있었다는 것과, 그 행운 이야기중 절반이 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그것의 의미는? 나는 공부를 하지 않은 그림쟁이라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행운의 신에게 기대는 이유는 뭘까?

 

 

 

 

 

“그림들. 전부 저한테 돌려주세요. 내가 주인이니까요. 그림값은 전부 지불할게요.”

 

“…알겠어요.”

 

 

 

 

 

그건 운이 아니라 권리를 행사하는 걸텐데.

 

 

 

 

 

“그림은 모두 우리집으로 옮길게요.”

 

“…….”

 

“그림이 숨쉬기 좋은 컨디션의 방에, 모두 걸어놓고, 목탄가루가 하나도 날리지 않게 보관해서 둘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집엔 겨울에만 피는 꽃, 봄에만 피는 꽃, 그리고 여름, 가을에만 피는 사계의 꽃들이 함께 있어서….”

 

“잠깐, 잠깐. 무슨 소리 하려는거에요? 나, 멍청해서 이해력이 떨어지니까 본론만 이야기 해주세요.”

 

“…음. 나도 원래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 타입은 아닌데 조금 떨려서.”

 

“뭐 때문에 떨리는데요?”

 

 

 

 

 

 

 

쏴, 갑자기 바람이 부는 듯 했다. 그 바람은 겨울의 것도, 봄의 것도, 여름의 것도 아닌 가을의 바람이였다. 그것도 그의 생일을 품은 행운의 향이 나는 바람.

 

 

 

 

 

“우리 같이 살래요?”

 

 

 

 

 

행운의 신이 이번에도 과연 보살폈을까?

 

 

 

아니.

 

사실 처음부터 행운의 신은 필요없었다. 어느날이여도 상관없다. 우리의 사계는 이미 함께였고, 마침 오늘이 신기하게 그의 생일이였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오늘의 일을 되새기며 생일의 축복을 기억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어제였어도 오늘이였도 전혀 상관없었을텐데 그의 귀여운 미신을 깨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있는 힘껏 웃어보았다.

 

 

 

 

 

“네.”

 

 

 

 

 

 

 

 

 

이제 서로를 향해 어떠한 값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