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w. 88

 

 

*TRIGGER WARNING 전개의 필요한 부분이라 판단하게 약간의 폭력적인 장면을 포함하였습니다. 또한, 가상의 세계관을 창조하긴 하였으나 이 픽션에서 다루어지는 미성년자에게 행해지는 불법적인 노동력 착취는 절대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지지하거나 미화하지 않음을 알려 드립니다.

 

 

 

 

나의 가느다란 피리 선율은 그대를 위한 칼과 방패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을 위해 금이 간 방패는 전혀 아깝지 않지요. 답례 또한 예의이거늘, 신뢰란 깨지기 십상 아니 덥니까.

 

아름다움에 눈과 귀가 먼 자는 죄가 없지요. 나 또한, 그대 또한.

 

 

 

지훈의 홈타운인 ‘딥베리’와 옆 마을 ‘모코’는 두 마을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강 ‘홈’에서 나는 민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강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었으며, 더러운 몸을 씻어냈다. 예로부터 맑고 힘찬 물줄기를 가진 나라가 양식으로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 있듯이 두 마을에게 홈은 너무나도 중요한 생명의 물줄기였던 샘이었고, 공생을 위해서는 초인적인 배려가 필요했다. 어린이들은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어른들의 탐욕이 문제였지. 물 한 바구니로 인한 작은 다툼으로 언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모았다. 입들이 모이고 입에서 뱉어지는 화살의 개수가 늘어나 서로의 폐부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이들은 죄가 없다. 하지만 서슬퍼렇게 빛나는 칼의 날은 가장 유약한 존재에게 겨눠졌다. 그 끝에서 터진 맑고 싱그러운 핏방울은 유독 붉었다.

 

두 개의 작은 마을은 홈을 차지하기 위해 결코 작지 않은 전쟁을 일궈냈고 모코가 딥베리의 수호신인 ‘그루크’를 베어냄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승리기를 거머쥔 모코는 딥베리까지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홈을 독점하게 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딥베리 주민들을 찾아내 노비의 낙인을 찍었다.

 

지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집과 학교가 가까웠던 탓에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다용도실에 바닥을 뜯어 은신처를 만들어 몸을 숨겼고, 새벽에 터진 폭탄으로부터 유일하게 목숨을 건져낼 수 있었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집과 부모를 잃게 되었고 모코의 특산품인 손바닥만 한 인형을 만들기 위해 공장에 반감금 당해 하루에 수십 마리 쥐의 가죽을 뜯어내야 했다.

 

아이들은 무지했다. 어른들과 대치할 힘도, 진심을 뱉어낼 수단 또한 없었다. 아이들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지훈과 도이 뿐이었다. 그나마 지훈은 쓰고, 듣고, 읽을 줄 알았지만 도이는 띄엄띄엄 읽는 데에만 그쳤다. 그랬기에 아이들의 손과 눈이 되어줄 사람은 지훈 뿐이었다. 서너 해만 지나면 성인식을 치를 나이인 아이들이 절반이 넘었지만, 아이들은 한없이 무지했고 자신의 이야기조차 써내려 갈 수 없었다. 지훈이 아이들에게 글자를 알려 주려고 하는 낌새만 보이면 감시관인 ‘프랑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허벅지만 한 곤봉을 휘둘러가며 위협을 가해왔고 그 후로부턴 간간히 몰래 책을 얻어와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허름한 지하에서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의 무지는 자의적인 게 아니란 말이었다.

 

“형! 책 가져왔어?”

“쉿, 프랑크가 듣겠다.”

 

지훈은 혹시나 소리가 새나갔을까 문을 한 번 쳐다본 후 마른 배를 덮고 있던 옷을 걷어내 책을 꺼내 들었다. ‘와아-!’조용히 울려퍼지는 함성에 개구지게 눈을 도록 굴린 지훈이 두꺼운 표지를 엄지손가락을 쓸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마침내 표지를 넘기고 몇 장을 더 넘기자 빼곡한 활자들이 그득 들어찼다.

 

“형아, 제목이 뭐야?”

 

‘쿠’는 무리 중 가장 어린아이었다. 글을 배울 때를 놓쳐 단 한 글자도 읽지 못하면서 책에 대한 욕심은 누구보다 컸다.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알아?’ 쿠는 지훈의 나긋한 음성에 동공으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더니 이내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몰라! 낭랑한 목소리에 주위에서 팝콘이 터지듯 고요하게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멜른에 쥐들이 고양이도 두려워할 정도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공포에 떨던 마을 사람들은 쥐를 제거한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는 공고문을 붙였답니다.”

 

지훈의 손목에는 낡디낡은 손목시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시계의 밴드를 쓸어내린 지훈이 시간을 확인하고 아쉽다는 표정으로 책을 닫았다. 11시가 넘으면 프랑크가 문을 벌컥 열어 인원수를 파악할 게 뻔했고 새벽 5시에 눈을 뜨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재워야만 했다. 아이들이 저마다 아쉬움에 목소리를 내도 어쩔 수 없었다. 입이 대빨 나온 쿠의 입술을 장난스레 톡톡 친 지훈이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봄내음은 순식간에 스치듯이 지나가 따가운 뙤약볕을 몰고 왔다. 아무리 더워도 배를 드러내고 자면 분명 다음날에 탈이 날 게 뻔했기에 빈틈없이 보듬어주는 게 지훈의 하루일과 중 마지막 일이었다.

 

아이들의 일과는 단조롭고도 빡빡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2평도 되지 않는 쿱쿱한 화장실에서 서로를 재촉하며 얼굴에 물을 묻히고 닦아낼 틈도 없이 작업복을 꿰어 입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문을 열면 햇빛 대신 푸른빛이 비치는 작업공간이 나온다. 고개를 돌려 프랑크가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저마다의 이름이 적힌 기계 앞에 앉아 썩은 내가 풀풀 풍기는 쥐 시체를 움켜쥐고 칼집을 내 한 번에 가죽을 뜯어낸다. 뜯어낸 가죽은 두꺼운 종이로 감싸 손잡이를 대신한 칼심으로 고르지 못하게 튀어나온 모서리를 매끄럽게 다듬고 독한 향을 풍기는 액체에 한참을 담궜다 뺀다. 뻣뻣해진 가죽을 온종일 망치로 두드리면 제법 재단할 모양새가 나오는데 잘 들지 않는 가위로 도면 따라 번듯이 자르고 재봉틀로 박음질을 한 다음 솜을 욱여넣고 마지막으로 부속품까지 달아주면 비로소 인형이 완성된다. 오롯이 아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인형은 모코라는 이름을 달고 대륙을 넘어서 다른 이에게 추억을 선사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강행되는 건 노동이 아닌 착취였다. 좁아터진 공간에서 독한 냄새를 가려줄 천조각도, 손가락을 보호해 줄 골무 하나 없이 여린살을 혹사시키며 하루수량을 맞추는 데에만 허덕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보수는 따라오지 않았다. 정작 본인과 몇 개월 차이 나지 않는 동생들이 수두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빛도 보지 못한 채 궂은일을 하는 동생들이 한없이 가엽다고 생각했다.

 

예견은 했지만, 예방은 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찜통 같던 더위에 서늘한 비 소식은 괜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체감상 낮아진 온도와 지붕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에 묘한 리듬감을 느끼려는 찰나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 세명이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이 샌다고 한들 대처를 할 수 없었을뿐더러 작업량에 비해 결과가 박했기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래, 그때 한 번이라도 시선을 진득하게 주었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빗소리를 가르고 찢어질 듯한 괴성이 귀를 찔러왔다. 형! 지훈형!! 정수리부터 등의 골의 타고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귓속을 울렸다. 고개를 반듯하게 들 수 없었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잔상 사이로 익숙한 정수리가 보였다.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쿠야. 쿠야, 내 소중한 쿠야.

 

형 탓이 아니야. 아니, 내 탓이야. 형 탓 아니라고.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그 축축한 손을 꾹 잡아보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내 탓이야. 내 탓이라고. 나 때문에 죽었어. 소리 한 번 내지르지 못했을 그 아이가. 아득히 놓아지는 정신을 겨우 붙든채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던 아이는. 그 애달픈 손을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서 홀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버렸다. 나조차도 잡아주지 못해서. 등 떠밀어준 꼴이 되어버렸지. 누구의 잘못이겠니.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요. 아니, 해주셔야죠.”

“그깟 꼬맹이 하나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쯧.”

 

프랑크의 미간이 두툼한 주름을 그리며 구겨졌다. ‘갑’이라는 인장을 단 상급자의 뻔뻔한 표정과 위선적인 걸음걸이. 프랑크가 귀를 후비며 한 걸음씩 걸을 때 마다 눅눅해져 버린 바닥이 삐그덕 거렸다. 아직 장마의 중간도 지나가기 전이었다.

 

“이봐, 아까운 인력 하나 줄은 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그뿐이라고.”

“살릴 수 있었잖아요.”

“내가 왜? 그렇게 간절했으면 입구멍에 손가락이나 쑤셔보지 그랬어.”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지훈의 정수리 위를 유영했다.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었다. 저와 아이들은 고용주가 정당한 대가를 주고 고용한 노동자가 아닌 음지에서 수익만을 창출해내는 기계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안 들면 때려치우는것이 아닌 목숨이 담보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뼛속 깊이 알고 있었기에 이런 순간에서조차도 끝없이 삼켜야만 했다. 너네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응?, 묵직한 악력이 수차례 머리를 강타했다. 그의 심기를 건들어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고꾸라지려는 상체를 몇 번이고 다시 세웠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결국 휘어 잡힌 머리칼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땅에 박고 말았다. 흐트러진 앞머리에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끈적한 무언가가 코안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입안으로 흘러들어온 액체는 짭짤하면서 비린 향을 풍겼다. 고개가 억지로 들려지자 입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바닥과 맞다은 관자돌이에 고통이 일었다. 빨개진 눈으로 저를 보며 손을 뻗으려는 아이를 향해 입을 벌렸다. 오지 마. 성대에서 소리를 내기도 전에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먼저 터져 나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돈을 달라 한 게 아니었고, 거창하게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햇빛이 듬뿍 내려지는 곳에 묻어주고 각자 꽃 한 송이만 놓고 오게 해달라고 한 것뿐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가다 배가 걷어차이자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분에 찬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나 아니었음, 벌써, 디졌을것들이! 감각이 둔해져 갔다. 다시 한 번 무언가를 토해냈다. 어른들이 없는 세상에 있다면 이대로 너를 만나러 가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프랑크에게 짙은 구타를 당하고 장장 삼일을 앓아누웠다. 비가 진득하게 오던 그날과 다를 것 없었다. 벽 너머에서 울려오는 환청과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천조각이 다였다. 날숨은 더뎠고 뱉은 숨은 뜨겁고, 비렸다. 얼굴 곳곳에는 굳은 핏자국이 가득해 눈을 뜨기조차 버거웠다. 화장실보다 작은 방에 혼자 격리된 듯 싶었다. 폐쇄증이 없는 저조차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골방이었다. 자의로 상체까지는 들어 올렸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허억-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묵직한 공기가 폐에 들어찼다.

 

지훈은 최고의 일탈을 강행하기로 했다. 사실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며칠 동안 지훈을 감시하러 오는 사람조차 문 너머의 잠금장치만을 확인할 뿐, 지훈의 생사 따위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프랑크의 눈에 지훈은 가시 같은 존재였으니 충분히 굶겨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고로 나가야만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에 커다란 지도를 펼친 다음 펜을 집어 들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겠지. 지도 모퉁이에 가지런하게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일단 모두가 잠든 새벽에 문고리를 부수고 나가자. 나간 다음, 나간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돌아가지 않는 사고회로에 끙, 소리가 절로 났다. 지도를 한참 두드리다 모코 건너편 작은 마을에 펜촉을 세웠다. 이 곳을 가려면 숲을 지나야 할 텐데. 응어리진 잉크가 짙게 번져갔다. 망설이던 손끝에 힘을 주어 굵게 별표를 쳤다. 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죽을만큼 이를 물었다. 어깨가 아려왔다. 5초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중에 신발이 걸려 오른발은 맨발로 바닥을 헤쳐나가야했다. 아파. 뒤 돌아보지마. 더는 못 뛰겠어. 숨 쉬어, 새끼야. 두 개의 자아가 동시에 멱살을 움켜쥐었다. 등 너머로 소란스럽지 않은 것을 보아 탈출해 성공한듯싶었으나 발이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숲에 들어섰을 때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홍채가 자극을 받아 눈을 뜰 수 없었다. 얼마 만에 해를 마주한 것인지 손으로 헤아릴 수 없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간간히 지훈의 행색을 보고 걸음을 멈추거나 말을 걸려는 낌새가 보이면 고개를 숙이고 다른 인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괜히 소매에 코를 묻어 냄새를 맡았다. 윤기나는 원단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북한 향이 났다. 골목 사이사이를 돌고 돌아 간판 없는 작은 가게 앞에서 안을 들여다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잔한 빛이 책장을 비추고 있었다. 손때묻은 책을 파는 가게. 몇 달에 한 번씩 프랑크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갈때면 모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책을 구하러 왔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다 읽고 나면 반드시 쿠를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지훈은 주머니 속에 버석거리는 지폐 대신 빳빳한 종이를 손톱으로 꾸욱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늘 이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가게주인이 인사를 해주었던 것 같은데. 긴장한 나머지 입안에 고인 침이 불규칙한 소리를 내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며 소설 칸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책장을 눈으로 훑었다. 가장 최근에 사간 책과 동일한 책을 발견해 서둘러 뽑아들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표지도, 두께도 모든 게 일치했다. 뭉텅뭉텅 페이지를 넘기다 졸지에는 모서리를 붙잡고 털어도 보았으나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았다.

 

“혹시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고개를 돌리자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맞다은 시선에 지훈이 황급히 책을 덮었다. 그게 아니고…. 앞니와 아랫니 사이로 입술을 밀어 넣다 느껴지는 따끔함에 적지않은 소리를 냈음에도 남자는 차분히 지훈을 기다려 주었다. 곧 지훈이 주머니에서 반쯤 구겨진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얼마전에 이 책을 사갔었는데…, 혹시 진짜 인가해서요…. 남자가 하얀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손바닥의 반도 채우지 못한 종이의 모서리는 보기 싫게 구겨져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도움…이 필요하긴 한데요…. 제가 가진 건 없는데….”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지훈의 어깨가 말려들어 갔다. 일퍼센트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온 게 맞았지만, 예상과 다른 전개에 머리에 입력해둔 예상 답안을 모두 솎아내야 했다. 남자는 크고 긴 눈으로 지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유영하는 눈동자는 곧 지훈의 동공에서 멈추었다.

 

“충분해요.”

“네?”

“가진 거. 그 정도면 충분하다구요.”

 

다행이네요.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리다 애매하게 멈춰 섰다. 손끝으로 입매를 매만지자 작고 검은 피딱지가 묻어나왔다. 남자는 지훈에게 잠시 앉아있으라며 의자를 내어준 후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잠구기 시작했다. 커튼도 치고, 향초만을 남겨둔 채 모든 불빛이 소멸시켰다. 원래 루트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하면 그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남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넋을 놓고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도 불현듯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모코에서 벗어나면 작은 집을 지어서 함께 살아야지. 늦었지만 글자도 알려주고, 당번을 정해서 매일 저녁마다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뒹굴다가…,

 

서로를 꼭 껴앉고 잠이 들어야지.

 

지훈은 한참 동안 소원의 안갯속에서 잠식되어 깊은 침묵에 빠졌다. 무릎 위로 다부지게 쥔 두 주먹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장면 한 조각 한 조각을 곱씹으며 가지런히 정리했다. 지금의 시도가 발등에 칼을 꽂는 행위이건, 불구덩이에 제 발을 담그는 행위이건 지체할 틈없이 제 앞에 주어진 칼을 쥐어야만 했다.

 

“제 이름은 라이에요.”

 

그 쪽은 지훈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입을 열기도 전에 통성명이 끝나버렸다. 자신은 ‘라이’라고 칭한 남자는 자신이 가끔 들리던 책방의 주인이자 자신을 이미 통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름을 알려준 적은 맹세코 없었다. 등골 사이에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라이는 건물의 깊은 곳에 위치한 응접실로 자신을 이끌었다. 금색 띠가 둘러진 자그마한 찻잔에 라즈베리 향이 함뿍 적셔져 있었다. 라즈베리티는 딥베리에서 수확이 가능했다. 지훈또한 전쟁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보는 비주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이 알기론 딥베리에 라즈베리 나무는 모두 폭발했다고 들었는데. 짜잘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지를 키워나갔다. 별 수 있나. 지훈은 티스푼으로 맑은 액체를 휘휘 저었다.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어쩌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아는데 뭔들 모를까 싶었지만, 제 3자의 배경지식과 저의 견해는 너무나도 다름을 알기에 결국 토해내기로 결정지었다. 짧게 심호흡을 뱉은 지훈은 간결한 문장만을 고르고 골라 테이블 위로 뿌렸다. 자신의 마을이 전쟁에서 졌고, 그 결과로 인해 강제적인 노동착취를 당했으며, 착취를 당하는 과정에서 가족과도 다름없는 아이가 감전사를 당했다고. 지훈은 이 대목에서 숨을 천천히 골랐다.

 

라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하게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훈이 말을 끝마치자 라이는 손에서 굴리던 티스푼을 다시 찻잔 안으로 밀어 넣곤 옅게 웃어 보였다. 제일 먼저 저를 찾아와 주셨다니 기쁘네요. 지훈은 커다란 눈알을 정처 없이 굴렸다. 누군가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이리도 당황한 적은 없었다. 괜히 라이의 어깨너머로 비치는 벽지의 무늬를 헤아렸다. 진득한 라즈베리 향을 머금은 이 공간이 갑작스럽게 뜨뜻하게 느껴졌다.

 

자문을 던졌다. 왜 하필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이 마을을, 또 하필 이 책방을, 어째서, 무엇을 믿고? 혼란스러웠고, 속이 좋지 못했다. 혹시 라이가 이 차에 무언가를 탔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잔 안에 담긴 액체는 너무나도 투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라이는 지훈을 쳐다봤다. 한순간도 자신의 프레임에서 지훈이라는 피사체를 벗어나게 한 적이 없었다.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뺨이며, 곳곳에 피가 터진 흔적이며, 태연한 얼굴로 볼만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큰 눈에 걸맞게 도록도록 굴러다니는 눈동자와 다채로운 표정이 흥미를 유발시켰다. 본인의 이야기를 다 들려준 이후에도 순간순간 자신만의 세상에 빠지는 듯 했다. 집중을 해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혼자 심오해졌다가 화들짝 놀랐다 하는게 퍽 귀여워보였다.

 

“그때 가져간 책은 다 읽었어요?”

 

긴 정적을 깬 건 라이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아직….’ ‘그럼 어디까지? … ’ ‘마을 사람들이 쥐를 쫓아줄 사람을 찾는데까지요.’ ‘ 아,’ 라이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뒷 내용을 모르는 게 분명해 보였다. 라이는 루트를 조금 수정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방향을 직접 제시해주는 쪽보다는 제시를 받는 쪽으로.

 

“내가 지훈을 위해 무엇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가령, 그 프랑크라는 작자를 다시는 안 보이게 해달라든지, 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지훈은 라이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듯했다. ‘진짜로 절 도와주실 생각이세요?’‘ 물론이죠.’‘왜요?’‘도와달라고 찾아온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쪽인데?’라이는 지훈이 앉아있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융단을 휘두른 남색 빛의 작은 소파는 두 사람을 담아내자 가득 들어찼지만 라이는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지훈이었으면 말이죠. 이런 허름한 책방이 아닌 병원이나 경찰들을 찾아갔을 거예요. 난 거기서 지훈의 간절함을 본 거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아무 사람이나 도와주는 거 아니고, 허투루 도와주지도 않아요.

 

“하지만…!.”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려고 하지 말아요. 만족치만큼 기쁨과 진심을 환산해 주세요.”

 

지훈은 부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선단체 혹은 이상한 취미를 즐기는 억만장자 딱 그쯤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내일을 기대하며 사는 여유 또한 없었기에 굳이 복잡한 근미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하문을 부수고 악착같이 달려었던 그때를 시작으로 어쩌면 이런 상황을 은근히 바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나중에라도 심장이니 간이니 뜯어내라고 하면 기꺼이 응해줄 자신이 있었다.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요. 나의 감정이 9조각이라고 가정했을 때, 웃고 있거나 좋다라는 감정을 느껴도 항상 한 조각이 응어리진 것 처럼 걸렸거든요….”

 

팍팍하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웃는 순간은 존재했다. 웃겨서? 어이가 없어서? 허탈해서? 스스로 물음을 던져보았다. 환하게 웃던 그 순간에 너는 행복했니? 무엇 때문에 그리도 근심하였니? 당장은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무엇을 하면 지훈이 행복해 질까요? 한층 나긋해진 라이의 말투에 입술을 곱씹었다. 경험이 없으니 답이 순식간에 튀어나올 리 만무했다. 행복. 행복한 삶. 행복한 나. 이런것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저를 종속시키는 게 없어지면, 그러면 행복지지 않을까요….”

 

스스로가 던져놓고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포괄적인 답안이었다. 라이는 스무고개를 맞추러온 마법사가 아닌데. 지훈의 걱정과는 다르게 라이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도망쳐오면서 뒤를 돌아봤나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돌아봤나요? 지훈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손등에 상처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쫓아올까 봐요. 어떤 사람들이요?

 

“… 나를 가둔 사람들이요.”

 

지훈은 오늘의 새벽을 떠올렸다. 홀로 남겨진 독방. 힘없이 부서진 자물쇠.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던 고요한 새벽. 달리면 달릴수록 느껴지던 죄책감과 조급함. 오로지 자신의 숨소리로만 채웠졌던 그 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목욕물과 옷을 준비해 줄테니 씻고 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 라이가 일어나자 소파는 순식간에 허해졌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건데요. 지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라이의 발소리가 멈췄다. 지훈이 나를 찾아왔잖아요. 라이는 담담하게 말을 뱉곤 찻잔을 정리했다. ‘그게 이유가 돼요?’‘ 나중에 가면 그런 말 안나올껄요.’ 라이가 작게 웃어 보였다.

 

 

 

 

 

 

 

 

라이가 전해준 옷은 가운 형식의 옷이었다. 답지 않은 감성으로 은방울꽃이 수놓아져 있던 옷은 말만 들어봤지 초면인데다 끈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람에 대충 허리에 몇 번 두르는 게 끝이었다. 욕실에서 한 발을 내딜때마다 물자국을 그려냈다. 뿌연 수증기가 걷혀 시야가 깨끗해지는 것도 잠시, 흥건해진 바닥 닦으랴, 풀어진 끈을 다시 허리에 감싸랴, 세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걸음이 멈춰버렸다. 똑똑. 어, 잠깐…! 대답을 못들은 건지 문은 무심하게 열렸고 어정쩡한 자세로 라이와 눈이 마주친 지훈은 어설프게 풀려버린 옷의 앞섬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라이는 손에 작지 않은 상자를 들고 지훈에게 다가왔다.

 

“딥베리가 이곳보다 기온이 높다는 걸 잊어버렸네요. 다른 옷으로 가져다줄까요?”

“괜찮아요! 좋아요…, 이 옷.”

 

하하…. 하하…. 지훈의 어색한 웃음에 라이의 한쪽 눈썹이 묘하게 뒤틀렸다. 과한 배려는 뜻하지 않은 상황은 만들어내기도 하지. 가져온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도 지훈에게 시선을 떼지 않던 라이는 그제서야 작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을 정도로만 성큼성큼 걸어온 라이가 곧 바닥과 맞다은 두 개의 끈을 집어 들었다. 더 긴 끈, 이걸로 허리를 한번 감고 짧은 끈이랑…, 묶은 다음에 고리를 만들어서 리본을 묶어주면 돼요. 하얗고 유연한 손가락이 금세 예쁜 리본을 만들어냈다. 고마워요. 짧게 고마움의 표시를 남긴 지훈이 재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라이의 말과 그 사이에 2초간의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살짝 벌어진 천 사이로 붉고 보랗게 차오른 멍을 본 게 틀림 없겠지. 씻기 위해 옷을 벗던 자신도 적지 않게 놀랄 정도였으니 타인이 보기에는 오죽할까 싶었다. 라이는 물은 알아서 마를 테니 침대에 앉으라고 하였다. 멋쩍게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에 앉자 라이 또한 침대에 걸쳐 앉아 지훈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조심히 턱도 돌려보고 팔도 뒤집어 본 라이가 상자를 열어 여러 가지 용품을 침대 위로 나열시켰다. 소독약을 가득 머금은 솜뭉치로 얼굴에 있는 여러 상처들을 헤집고선 끈적한 연고를 발라주었다.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지만, 피부밑으로 스며드는 쓰라림을 감춰낼 재주 따윈 없는 지훈은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많이 아파요?’‘조금이요….’‘지금 말고, 얘네 생겼을 때요.’ 저보다 아픈 표정을 지어보이곤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쿡쿡 들쑤시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좋게 말하면 단도직입적인 사람이고, 안 좋게 말하면 배려 없는 사람일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음…, 일종의 배경지식을 다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쉬울까요. 지훈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선사하려면 지훈을 종속시키는 모든 것을 배제시켜야 하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최대한 지훈에게 이입하는 거죠. 보다 정확한 일 처리를 위해서는 내 개인적인 감정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되니까요. 알 듯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투성이였다. ‘라이는 박지훈에게 이입한다.’이 문장하나가 머리를 시발점으로 발끝까지 휘감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기에, 어디까지 알고 있기에 이리도 당당함을 뽐내는 것인지. 라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치부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낯선 땅과 낯선 공간.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푹신한 침구는 딱딱하게 배겨버린 근육을 바쳐주기엔 지나치게 포근했다. 언젠가 읽었던 장발장의 기분이 이랬을까. 어쩔 수 없이 머물렀던 그곳에서. 이질적인 호의를 느끼면서. 당신도 그랬을까.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별들의 강도 그저 꿈만 같았다. 달빛과 별빛이 이렇게도 밝았구나. 나에게 밤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는데. 눈을 감았다가도 눈꺼풀에 내려앉는 푸근한 손길 덕에 다시금 눈을 떠야 했다.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일어나야 할 필요도 없었고, 모두를 깨워 씻길 필요도 없었으며, 하루 수량을 고민하며 바삐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들이닥친 평화와 고요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지훈은 라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이는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훈이 종이를 건넸던 그 순간부터였다.

 

어쩌면 지훈은 라이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주위를 멤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수차례 책을 빌렸갔음에도 이제까지 빌렸간던 책에는 그 어떠한 것도 꽂혀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책방에서 찾았던 똑같은 책에도 자신이 발견했던 종이는 그 어느 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라이가 날 부른것은 아닐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예견했다는 듯이 굴던 행동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종이를 받아들었을 때 지었던 그 표정. 애써 감추는 듯 했지만, 살짝 비쳐 보였던 환희에 찼던 그 미소.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니. 나의 이야기를 내 입으로 전해 들었을 때는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얼마만큼 알고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나의 이름은 뱉었던 거니.

 

라이, 넌 도대체 누구니.

 

 

 

 

 

 

 

 

지훈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인형을 만들기 위해 망치질을 해야만 했다. 쿠가 감전사를 당했던 자리는 정리가 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누구도 그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훈과 쿠의 자리에는 마지막 날의 흔적만이 남겨진 채 먼지만 쌓여갔다. 장마는 한츰 물러나 무더위가 시작되었고, 조그만 작업을 할라치면 땀이 줄줄 나와 온몸을 적셨다. 슬픔은 생존욕을 이기지 못했다. 아이들은 지훈의 빈자리가 채워지길 바랐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앉길 원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렸고 정신적 지주의 부재는 무리의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훈이형. 도망간 거 아닐까?”

“뭐?”

“아니 그냥….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다시 안 오는 거 보면 그냥 우리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

 

말을 뱉은 아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솔직히 그 시간이면 경찰 불러오기엔 충분하지 않아?’ 다른 아이가 추임새를 얹자 다른 목소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오빠 많이 아팠잖아, 병원에 갔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우리를 까먹어?’ ‘억울하면 너도 나가던지.’ 손에 들려있던 가죽을 집어 던진 순간부터 서로에 대한 믿음에 불똥이 튄거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뒤틀리면 크게 솟아오를 불꽃. 난 솔직히 대장 노릇 하는 것도 별로였어. 기어코 손톱만 한 불씨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도이가 아이의 얼굴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맥없이 뒤로 밀린 아이의 얼굴에는 공포와 배신감으로 얼룩졌다.

 

“인간이면! 너희가 인간이면! 그딴 소린 지껄이면 안됐어. 알아?!”

 

형이 얻어터질 때 한 명이라도 말린 사람 있어? 난 떳떳하지 못해. 무서웠거든.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형이 도망을 갔든, 무엇을 했든, 여기서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도 없어. 위태롭던 그것은 금이 가다 못해 깨져버렸다. 누구 하나 베이지 않는게 이상해 보일만큼 서로의 조각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도이는 지훈이 불쌍했다. 형, 제발 돌아오지마. 여기엔 형을 반겨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새로운 감시관이 왔다. 그녀는 골방에 갇혀 미씽질을 하는 아이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열악한 환경과 앳된 얼굴이 한몫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애써 포악해 보이려는 말투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천성이 유해서 가시돋힌 말조차 말캉한 두부처럼 흐느적 거렸다. 프랑크가 꽤나 먼 출장을 간 모양인지 며칠이면 사라지겠지 싶었던 그녀는 아침마다 얼굴도장을 찍어 보였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감시관치고는 너무나도 허술했다. 수량을 맞추지 않아도 저녁때가 되면 득달같이 우리를 지하로 밀어 넣었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도 종종 있었다. 이제는 일상이 무료하게까지 느껴지던 참이었다. 적응이 아니었다. 우리를 억누르던 무언가가 느슨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루는 검정 옷을 빼입은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했다. 감시관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 길이가 족히 1미터는 넘어 보였다. 남자는 전기선이 합선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전선을 뒤적거렸다. 그거 잘못하면 감전되요. 영혼없는 메아리가 울렸다. 남자는 아이의 말에 손을 털고 일어났다. 프랑크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니? 남자의 말에 큰 소리를 내던 모든 기계가 멈췄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물어볼 게 있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꼭 한 명씩 애기해야 해요? 아이의 말에 남자는 짧게 웃어 보였다. 때로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압도당하는 거 아니겠니.

 

– 프랑크는 어떤 사람이었니?

– 못된 사람이었죠. 매일 욕하고 때리고.

– 때린 이유가 뭘까?

– 정신병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자기를 무시한다 싶으면 마구잡이로 손을 올렸거든요.

– 많이 아팠겠구나.

– 저는 맞아 본 적이 없어요.

– 모두를 때린 건 아니었다…. 이 이야기네.

 

모두라기 보단…. 한 사람만 때렸어요. 한 사람? 남자의 말에 아이는 주춤거렸다. 경찰 아저씨는 모르실 텐데 저희 중에 제일 형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지만. 아,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 형은 어떤 형이었을까?

– 착했어요. 저희도 잘 챙겨줬구…. 또….

– 또?

 

아이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입안에 사탕을 굴리고 있는 것처럼 한참을 삐쭉거리다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금 형이 많이 그립겠구나. 남자의 말에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좀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왜? 잘 챙겨줬다고 하지 않았니?’ ‘…엄마가 보고 싶어요. 형 말고.’ 남자가 팔짱을 꼈다. 눈썹은 비틀려진 지 오래였다. 아이는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분명 잘못한 게 없는데 목 너머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리는것만 같았다. 아이는 입술을 꾹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 책상 위로 팔꿈치를 올렸다. 엄마가 보고 싶은거니. 아니면 그 형이 보기 싫은 거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본은 대여섯 개가 전부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프랑크를 죽인 범인을 찾겠다고 수사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라이는 범인을 알고 있었다. 프랑크는 자택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샹들리에에 목이 달린 채 발견되었다. 대륙을 건너건너 배까지 빌려 공수해 왔다는 예술가의 작품. 마지막까지 괴랄한 거품을 흘리는 모습이 찬란히 빛나는 조명과 더욱 대조되어 보였다.

 

라이는 지훈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샤워를 마치고 편안하지만 가벼워 보이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코의 향을 묻혀 방안에 흘리는 행위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힘없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살짝 턴 라이가 문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다. 한 뼘 정도의 크기로 열린 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라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훈의 눈을 쳐다봤다. 딱히 꺼낼 말은 없었다. 지훈은 아무말 없이 문을 더 열어주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이 방은 지훈이 오기 전까지 한 점의 온기조차 없는 방이었다. 무색무취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공간. 그나마 관리를 잘 해두었기에 쿱쿱한 냄새가 안 날뿐이었는데 고작 지훈이 며칠 지냈을 뿐이라고 공기에서 진한 색채를 풍겨왔다. 비강이 붉게 물든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지훈의 침대 옆에는 몇 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한 권은 이미 읽고 있었는지 침대 위에 곱게 펴져있었다. 더 읽고 싶은 책 있어요? 구해다 줄게요. 지훈은 손까지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지훈은 책을 곱게 접어두곤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팡팡 쳤다. 옆에 와서 앉으라는 신호였다. 라이는 괜스레 뒤목을 긁었다. 두 사람이 앉자 침대가 살짝 일렁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책방은 언제부터 연 거예요?”

 

하루종일 라이를 기다린 사람치곤 질문이 꽤나 소박했다. 라이는 짧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원래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였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지훈의 눈동자가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아마도 부모님의 부재에 대한 호기심 혹은 놀람 정도로 해석되었다. 라이는 말에 살을 붙였다. 제가 맡기 시작한 건 몇 년 안됐어요. 그마저도 매일 여는 게 아니라서. 라이의 말에 지훈의 눈이 토끼처럼 띄였다.

 

“이상하다. 내가 갔을 땐 매번 열려있었는데.”

 

라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다음 말을 삼켰다. 지훈이 올때만 문을 여니까요. 혀로 아랫니를 훑었다가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 우리가게로 온 거에요? 책하나 사겠다고 오기엔 너무 멀지 않아요? 지훈에겐 꽤나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일하는 공장에서 절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프랑크가 몇 박 며일로 출장 갈 때만 몰래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괜히 모코에서 돌아다니다가 걸리면 안 되니까…. 걸릴까 봐 숲을 지났는데 생전 처음 와보는 마을인 거예요. 그래서 그냥 무작정 발이 가는대로 걸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되게 신기하네요. 일부러 찾아온 것도 아닌데 발이 이끌려서 책방으로 오고, 한 번도 문이 닫혀있던 적도 없고.

 

라이는 지훈이 보따라마냥 풀어놓는 모든 말이 흥미로웠다. ‘운명’처럼 이 모든 상황을 ‘운’과 ‘우연히’라는 말을 번갈아 씀과 동시에 굉장히 놀랍다는 그 표정까지 라이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라이가 파악했을 때 지훈은 매번 프랑크의 눈을 피해서 무사히 숲을 나올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많고 많은 골목길을 돌아서 한번에 책방 앞까지 도착할 만큼의 선구안도 없을뿐더러 매번 책방의 문이 열렸을 때만 찾아올 촉 또한 없었다. 지훈이 일생을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훑어보면 충분히 액땜했으리라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라이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었다.

라이는 지훈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말리지 않았다. 대륙을 발견해낸 모험가처럼 들뜬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선율을 그대로 고막까지 흘려보냈다. 라이는 생각했다. 홀린대로 홀려주었으니 오히려 ‘운’은 자신에게 기울었던 것이라고.

 

 

 

 

 

 

 

 

아이들이 실종되었다. 스스로 문을 부수고 달아난 것인지, 누군가의 소행으로 이끌림을 당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이는 알고 있었다. 프랑크를 대신해 출근도장을 찍던 감시관은 그날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모코의 특산품을 구할 수 없었다. 대륙 너머에서는 마니아들이 웃돈을 얹어 겨우 구할 정도였다. 딥베리의 특산품이었던 체리모양의 와펜 또한 웃돈을 얹고 얹어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정작 지훈과 아이들은 잊어버린 딥베리가 그들에겐 수집욕을 일구는 활탄이 되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지훈은 몇 달 동안 라이와 생활하면서 라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을 잠가두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건물의 위치상 지훈이 머무는 곳은 3층으로 짐작되었는데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끝에는 바깥에서 잠군것마냥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았다. 지훈은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를 종속시키는 모든 것을 배제시키겠다고 했잖아. 내가 말했지. 나를 가둔 사람이 미치도록 싫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초 단위로 뭉툭한 숨이 밀려 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뜨겁고 빠른 숨이었다. 배신감. 지훈은 몸을 돌려 다시 계단에 올라섰다.

 

책이 읽혀질 리 만무했다. 답답한 마음에 발코니로 나섰다. 계단 끝의 문과는 다르게 발코니의 문은 쉽게 열렸다. 지면이 달궈진 향과 느리게 걸어오는 밤의 향기가 섞여있었다. 곧있으면 라이가 올것이다. 지훈은 최대한의 분노를 집어넣었다. 손끝에 피가 몰랐다. 정리가 필요했다. 때마침 건물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이 눈에 비췄다. 라이임이 틀림 없었다. 그는 발목까지 오는 검정색 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침과는 다른 옷차림이었다.

 

지훈의 예상과는 다르게 라이는 몇십 분이 지난 후에야 방문을 두드렸다. 지훈은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라이가 문을 열지 않고 돌아서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지훈이 문을 열기위해 다가가는 순간 문이 열렸다.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 자는 줄 알았는데 깨어있었네요.”

 

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곧장 뒤돌아섰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평소대로 침대에 함께 앉았다. 작은 일렁임에 자극을 받아 다시금 숨이 차올랐다. 지훈이 햇빛을 듬뿍 머금어 달궈진 지면과 같았다면 라이는 그 반대였다. 둘은 뜨꺼움과 차가움이 만나 최상의 온도가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날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잖아요.”

 

당신은 나에게 신뢰를 요구했었고,

 

“라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일어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시답지 않은 상상을 할수 있을 정도로요.”

 

나의 진심을 엿보았다고 했었지.

 

“이제 그만해도 돼요.”

 

깨져버린 신뢰는 다시 붙지 않아. 오히려 그 틈새로 다른 감정이 차오르기 마련이니까.

 

대가 없는 호의는 이쯤에서 그만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지훈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득한 피냄새가 났다. ‘대가없는 호의’라는 말이 라이의 전두엽을 치고 달아났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튀어나올 판이었다. 보기 드물게 깜찍하고, 앙큼한 사람이었네. 여름밤의 별을 모조리 때려 박은듯한 눈으로 처연함을 마구 흘려대면서 뱉은 말이 고작 저거라니. 라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러가지 루트중 가장 끌리는 루트를 선택해 지훈에게 던졌다. 결말은 그가 매듭지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라이의 말에 지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긍정의 말을 뱉었을 텐데 희한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쩌면 라이가 그토록 바라왔을 순간일지도 몰랐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이 순간이 한없이 황홀하다고 느꼈다.

 

“아니면 동생들이 보고싶은 건가?”

 

라이는 기어코 지훈의 급소에 날카로운 총구를 겨눴다. 여기서 라이가 한마디라도 더하면 그대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목구멍에 커다란 사탕이 걸린 것 마냥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지훈은 가슴께로 찔린 총구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동생들이 보고 싶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왜 대답을 하지 못해? 이제서야 꺼내 보인 자신의 진심은 내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인 답안들이었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동생들이 보고싶은 건가요. 아니면”

 

그들에게 잊혀지길 바라는 건가요.

 

기어코 라이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지훈은 자신이 간과해버린 사실을 상기시켰다. 라이는 모든걸 알고 있었다. 지훈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토해냈다. 라이는 지훈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 눈물의 의미는 혼자서 도망쳐버린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이고, 그럼에도 선뜻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응어리진 것이라고. 라이는 한순간도 지훈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지훈은 날카롭고 아픈 조각을 애써 포장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본인 스스로 속이는 것만큼 비참하고 어리석은 건 없으니. 라이는 조금만 더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때 나랑 했던 말 기억나요? 지훈은 종속시키는 모든 것과 가두는 것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그래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그걸 찾아야 해요.”

 

라이가 바라본 지훈의 눈망울은 한없이 붉었다. 자기혐오를 가득 머금은 저 눈동자를 반드시 바꿔주어야만 했다. 라이는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서 용사가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꺼내 들듯, 라이는 핀을 뽑아들었다.

 

자살이었나요?

아직 감식결과는 나오지 않아서 확답을 줄 수가 없는데.

자살은 아니에요. 그 인간은 절대 자살하지 않아요. 보름 뒤에 밴베에 가서 양탄자를 구해올 거라는 말을 제가 들었어요!

그래? 그럼 자살이 아닐 수도 있겠네.

범인을 알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도망쳤다는 그 형이요! 그 형이 범인이에요!

왜 그 형이 범인일 거라고 생각해?

…….

네가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형이 사람을 죽였으리라 예상되는 이유

지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라이는 백색소음을 끊어내고 다음 트랙으로 넘기기 위해 힘있게 버튼을 눌렀다.

 

프랑크의 심기를 건드렸었거든요. 쿠를 묻어주고 꽃을 놓게 해달라고. 근데 전 좀 이해가 안 갔어요. 물이 샜을 때에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었거든요. 우리 모두가 방관자였어요.

 

다음으로.

 

방패 같은 역할이었어요. 없으면. 큰일 나는. 우리 중 대부분은 무서워서 아무말도 못하거든요.

 

그 다음으로.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줬던 것 같긴한데 기억은 잘 안 나요. 전에는 글씨를 알려주려다가 모두가 기합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조금 미웠는데.

 

혹여나 끝도 없는 벼랑으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어요. 아무 말도 없이.

 

지훈은 라이의 손에 들려있던 녹음기를 뺏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미처 다 플레이 되지 못한 테이프들이 둘둘 풀려 바닥을 메웠다. 지훈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거렸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라이의 얼굴은 지나치게 담담해 보였다. 손톱만한 폭탄을 던져 산산조각을 내놓고 오히려 그 파편을 밟아 누르고 있었다.

 

“내가 몰랐을 것 같아? 당신도 날 가뒀잖아!”

 

녹음기의 부서진 조각을 손에 쥔 지훈이 애달프게 소리 질렀다. 내가 당신을 가뒀다고? 라이의 미간이 구겨졌다. 지훈의 손에서 붉은 선혈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내가 도망칠까 봐 2층으로 내려가는 문까지 걸어 잠갔잖아!

2층으로 내려가는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요.

뭐?

왜 모르는척해요..

그건 내가 아니라!

스스로 가뒀잖아요.

…….

내 탓을 해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런데 제발, 자기 자신을 속이지는 마요.

 

지훈은 결국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아무말도 안들을래. 피가 엉겨붙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 막았다. 안들을거야!! 귓바퀴부터 굵은 상처가 파였다. 지훈은 이마를 바닥에 처박고 흐느꼈다.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누가 누굴 속이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애초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거면 어떻게 깨어나야 해?

 

라이, 난 대체 누구야?

 

 

 

 

 

 

 

 

헝클어져 버린 테아프는 다시 되감을 수 없었다. 서랍 속에 망가져 버린 테이프를 집어넣던 라이는 원래 서랍속에 들어있던 테이프를 꺼내들었다. 지훈은 깊게 잠들어 족히 이틀은 깨어나지 못할 터였다. 지훈에게 피리소리를 들려주면 덥석 안기는 게 참 귀여웠다. 본인은 앞뒤로 다 잘라먹고 기억을 못하니. 그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오늘은 귀를 소독하는데 꽤 애를 먹었지만. 라이는 녹음기에 멀쩡한 테이프를 꽂아넣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찻잔에선 라즈베리 향내가 풍겨왔다. 라즈베리티는 아무래도 딥베리에서 밖에 나지 않기에 꿋꿋이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올해는 유독 장마가 길어 수확철이 작년보다 조금 늦은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렴, 이제는 티를 타지 않아도 그 향에 흠뻑 취할 수 있었으니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라이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배경 삼아 허밍을 불렀다. 실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형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형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아, 참으로 유쾌하다.

 

오빠가 마지막으로 읽어주던 책이에요.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했는데 저는 글씨를 읽을 줄 몰라요.

 

그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니?

 

아이들을 찾고 있어요. 9명이고 학교 뒷산에 올라간다고 말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시체를 찾지 못했으니 살아있는 게 확실해요! 그리고 혹시 키가 큰 남자를 봤나요? 그 사람을 찾아야만 아이들을 찾을 수 있어요! 피리를 늘 상 지니고 다….“

 

오늘따라 차가 참 다네..

 

 

 

 

 

 

 

피리 부는 사나이를 아니? 하멜른에 쥐들을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소리로 유인해서 강물에 다 빠뜨리잖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나이에게 값을 지불하기 싫어서 마을 밖으로 쫓아내 버렸데. 화가 난 사나이는 아이들을 피리 소리로 유인해서 숨겨버렸고 다시는 찾을 수 없었나 봐. 정당한 값을 치르지 못한 벌이지. 피리소리 하나로 현혹이 되냐고? 그건 나야 모르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아이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 또한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 아이들은 어떡하냐고?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 사나이는 아주 멋진 환상 속에 가둬버렸데. 가족과의 추억은 저 멀리 보내버리고. 그들만의 추억이 쌓이도록. 아이들은 죄가 없잖아.

 

아, 딱 한 명만 빼고.

 

 

 

나의 가느다란 피리 선율은 그대를 위한 칼과 방패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을 위해 금이간 방패는 전혀 아깝지 않지요. 답례 또한 예의이거늘, 신뢰란 깨지기 십상 아니덥니까.

 

아름다움에 눈과 귀가 먼자는 죄가 없지요. 또한, 그대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