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지난 계절과의 시리즈 연재입니다.

지난 계절 보러가기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Farm Garden With Sunflowers)

w. 아란드

 

 

 

 

 

 

난 돈이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직물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를 원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복과 신발을 팔아 물감을 사왔다.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썩어 문드러진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난 집을 나왔다. 물감과 캔버스를 들고 돈이 모이는 항구도시로 갔다. 항구에는 사람이 많았고 그곳에서 그림을 팔면 어느정도 삶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부는 칼바람이 뺨을 때리는 눈덮인 겨울을 지나, 꽃내음이 가득했던 봄도 지나쳤다. 여름이 된 이곳은 활기가 넘쳤다. 바다와 갈매기를 보러 온 여행객들이 수산시장에 들러 횟감을 먹고 갔으며 어부들은 어망에 걸려 들어온 물고기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다. 예술가들은 각자의 구역에 이젤을 펴고 자리를 잡아 흐트러진 여름의 풍경을 그렸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반짝이는 햇볕과 아래에 만들어지는 잔 그림자는 붓을 잡고 싶게 하는 간지러운 욕구를 자극했다. 내 욕망은 완전히 그림에 미쳐있었다.

 

 

 

 

 

“해바라기를 심으셨어요?”

 

“아, 오셨어요.”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이젤을 카페 한편에 내려놓고 카운터로 가자 이제 왔냐는 듯 인사를 하는 이 남자의 욕망은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엔 혹시 나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라는 의심만 들었지만 완연한 봄이 왔을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잘나가던 ‘라바쿠르’ 카페를 넘기고 언덕 아래의 작디 작은 ‘스프링 카페’로 옮기는 것을 보고 이 남자는 완전 나한테 미쳤구나. 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빠지면 저렇게 앞뒤구분없이 직진할 수 있다는 것이. 미안하게도 난 그저 그를 잘생기고 그리기 좋은 피사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오늘도 라떼?”

 

“오늘은 너무 더워서 차가운 레몬에이드가 마시고 싶어요.”

 

“가게 앞에 있는 레몬박스 보셨구나.”

 

“네. 직접 짜주시는 건가요?”

 

“그럼요. 미국에서 시킨 해밀턴비치 스퀴즈가 어제 도착했거든요. 2주동안 기다렸는데 드디어 첫 개시를 하겠네요. 자리에 앉아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어컨 바람과 선풍기 바람을 쐴 수 있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만드는 바가 정면으로 보였다. 사장님은 바구니에서 레몬 한 개를 꺼내어 스퀴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나는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손이 느린 편이라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마음에 드는 스케치들이 눈에 보였다.

 

겨울의 항구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언덕 위의 라바쿠르에서는 따뜻한 라디에이터 옆에서 커피콩을 볶는 그의 모습을 그렸다. 봄의 언덕을 올려다 볼 수 있었던 스프링카페에서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커다란 리트리버와 놀고 있는 그를 그렸다. 그리고 여름이 된 지금은.

 

하얀 반팔을 입고 레몬을 반으로 쪼개어서 스퀴즈에 넣는 모습이 보인다. 근육이 잡힌 팔에는 힘줄이 더 도드라지며 레몬을 위에서 아래로 있는 힘껏 짜낸다. 작은 레몬에서는 그의 압력에 의해 아래로 즙이 쏟아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고이는 노란 레몬즙이.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건 단지 레몬때문일까. 나는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다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연필을 들어 딴청을 피웠다.

 

나는 정말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에 대한 욕망이 크다.

 

 

 

 

 

“민트잎 하나도 추가했어요. 시원하게 마시면서 그림 그려요.”

 

“…감사합니다.”

 

 

 

 

 

맹렬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다르다. 나는 피사체를 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시선이기 때문에 사장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르다. 라운드넥 위로 그의 기다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이 보인다. 순간 목이 타서 탄산이 방울방울 올라오는 레몬에이드를 들이켰다.

 

아니야. 달라. 정신차려. 나는 집을 버리고 온 매정한 예술가이기 때문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 어서 작품들을 완성시키고 그림시장에 팔아서 돈을 번 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

 

 

 

 

 

“아….”

 

 

 

 

 

‘CLOSED-매주 화요일은 쉽니다.’

 

깜빡했다. 매주 화요일은 스프링카페가 쉬는 날인데 오늘같이 가끔씩 그 사실을 깜빡하곤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이젤과 물감을 들고 허겁지겁 나왔는데 꽉 닫힌 문을 보니 허망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낮은 정원의 대문을 나와 멈춰섰다. 너무 더워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고 수요일 휴무인 라바쿠르라도 가서 그림을 그릴지 고민에 빠졌다. 안되겠다. 라바쿠르라도 가야지. 곧 결심이 섰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그때.

 

 

 

 

 

“어, 손님?”

 

 

 

 

낯익은 목소리가 반가워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지프차에 올라타있는 사장이 창문을 내린채 나를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리트리버가 나를 보고 반가운지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 날 향해 웃는듯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휴무인데.”

 

“요일 개념이 없어서 가끔 까먹어요. 그러는 사장님은 휴무인데 나오신거에요?”

 

“레피 장난감을 두고 가서요. 그거 없으면 하루종일 시무룩해져 있어요. 그림그리러 오신거에요?”

 

“네. 아, 더워서 레몬에이드가 계속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겸사해서 왔는데 휴무니까 뭐.”

 

“흠.”

 

 

 

 

 

사실은 레몬에이드를 짜는 동안 그의 바짝 선 팔뚝과 목의 핏줄을 다시 보고 싶다. 레몬에이드의 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얀 반팔 티셔츠, 손목에서 어깨까지 이어진 핏줄. 목에도 잔뜩 서있던. 아, 그만해야지. 어쩔 수 없지만 돌아서야겠다.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 다시 스케치북을 고쳐들었다.

 

 

 

“레몬에이드 만들어 줄까요?”

 

 

 

 

 

망설임없이 뒤를 돌아 사장님을 보았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마음을 표했다. 그는 싱긋 웃었고, 뒷좌석에 탄 리트리버도 좋은지 꼬리를 미친듯 흔들더라. 그는 차를 카페 뒷편에 주차를 시키고 온다고 한뒤 핸들을 돌렸다. 핸들을 돌리는 손목에도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중에는 운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네.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해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해바라기를 관찰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사랑한 물의 요정 클레티에가 아폴론을 기다리다 뿌리가 박혀 만들어졌다는 해바라기. 사장님도 그렇고 신기하다니까. 사랑이라는 감정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핸들 방향 바꾸듯이 쉽게 바꾼다는 것이.

 

 

 

 

 

“들어와요.”

 

“네.”

 

 

 

 

레피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이한다. 내 손을 핥는 말랑하고 축축한 혀가 느껴졌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앞에서 문을 열고 있는 너른 등에 꽂혀있다. 오늘은 검은 셔츠를 입고 있다. 코를 박으면 향기가 날 것만 같은 말끔한 목이 보인다.

 

 

 

 

“오늘 뉴스 보셨어요?”

 

“아니요. 봐도 안좋은 이야기만 나오니 안봐요.”

 

“왜요?”

 

“보면 답답하잖아요.”

 

“그게 현실인데요. 거기서 시선을 돌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적어도 현실은 직시해야지 않겠어요?”

 

“나한테 설교하려고 지금 뉴스 이야기 꺼낸거에요? 나 설교 듣는거 싫어해요. 계속 말할거면 나 갈래요.”

 

“아니, 잠깐만. 손님. 아, 그러고보니 우리 통성명도 안했어요.”

 

“사장님은 사장님이니까요.”

 

“내 이름이 사장님은 아니잖아요. 나도 성이 있고 이름이 있는 사람인데. 우리 예술가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을거잖아요.”

 

“…….”

 

“이름 알려줄래요?”

 

 

 

 

 

바구니에서 큼직한 레몬을 꺼낸 사장님은 괜히 톡쏘며 말하는 나를 보고도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자리에 앉아 눈을 깜빡이고 있던 나는 그 웃음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입술만 달싹거리며 아무말 하지 못하고 있자 그는 도마에 레몬을 올려 반토막 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듯 이따금 바라보았다.

 

 

 

 

 

 

 

“이름 없어요?”

 

“…있죠. 사장님 이름부터 알려주세요.”

 

“내 이름 궁금해요?”

 

“…사장님도 날 궁금해하니까, 나도 궁금해 해줄게요.”

 

 

 

 

 

그게 이치에 맞잖아. 레몬을 조각낸 그는 팔을 걷어붙였다. 걷어 붙인 소매 안에 핏줄 서있는 단단한 팔목이 보인다. 핏줄이 바짝 선 성난 팔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있는 그의 입술이 곧 열렸다.

 

 

 

 

“라이관린.”

 

“라가 성이고 이름이 이관린이에요? 한국인치고는 상당히 독특한 이름….”

 

“하하, 나 한국인 아니에요.”

 

“네? 하지만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데요.”

 

“아주 어릴때 이민왔으니까요. 나 대만사람이에요.”

 

“대만이면…. 어디에 있어요? 죄송해요. 제가 잘 몰라요. 그런걸.”

 

“중국의 오른쪽, 필리핀 위.”

 

 

 

“그렇게 말해두 모르겠다. 아무튼, 놀랐어요. 그렇지만 사장님은 폴란드에 계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직업 특성상 어릴 적에 많이 돌아다녔거든요.”

 

“아….”

 

“그리고 내 이름 사장님 아니고 라이관린. 이름 알려준 보람은 있어야죠.”

 

“아, 네. 관린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럼 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스퀴즈 위에 레몬 반쪽을 올린다. 스테인리스로 된 지랫대를 아래로 누르자 레몬이 뭉개졌다. 유리글라스 안으로 뿜어져 나오는 레몬즙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가 다시 한 번 ‘응?’이라며 대답을 재촉하였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박지훈이요.”

 

“…….”

 

“왜요?”

 

“이름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요.”

 

“뭐가요?”

 

“얼굴이.”

 

 

 

 

 

쾅. 쾅. 쾅. 지렛대가 열심히 움직인다. 그리고 그 때마다 목줄에 핏줄이 섰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왈칵 쏟아지는 레몬즙이 글라스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저것을 내가 마시겠지. 군침이 돈다니까. 얼음이 글라스에 예쁜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레몬즙과 탄산으로 보이는 물이 들어간다. 민트잎 한 장이 위에 올려졌다. 나를 위한 레몬에이드가 이내 완성됐고 그는 쟁반에 레몬에이드와 쿠키 몇 점을 들고 왔다. 잔을 내려놓는 손가락은 얇고 길었다. 피아노를 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고운 손이다. 그림으로 그려서 소장해놓고 싶을만큼 예쁜 것들을 많이 가진 자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무료에요. 쉬는 날 왔으니 해주는 서비스.”

 

“…다른 사람이 와도 이렇게 문 열어줘요?”

 

“아니죠. 지훈씨라서 열어준거죠.”

 

“왜요?”

 

“계속 옆에서 보고 싶으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줄은 알고 그러시는거에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그리고 또 웃는다. 즙을 짜다가 레몬이 튄 것인지 그의 팔목은 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가만히 레몬에이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할 말이 생각나 그를 올려다 봤다. 항상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노골적인 행위와 시선. 감언이설로 나를 꼬아내려고 한다. 나는 그림을 더 좋아하는 예술가다. 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고 나온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사랑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바꿀만큼 여유가 넘치는 인간이 아니야. 지금은 사랑할 때가 아니다. 사랑을 하기엔 여유가 없다. 사랑이 밥 먹여줘?

 

 

 

 

 

“사장님은 좋겠어요.”

 

“라이관린이라니까.”

 

“입에 안 달라붙어요. 그렇게 안 부를래요. 그리고 그렇게 부를만큼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여기 있는 이유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있는거에요. 사장님을 가끔씩 바라보는 것도 피사체로서 바라보는거지 그 이상은 없어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난 지훈씨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달라고 요청한 적 없는데.”

 

 

 

“시선이 부담스러워요.”

 

“…….”

 

“노골적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잖아요. 난 그런거 못해요. 여유도 없구요. 사장님은 좋겠어요. 넓은 라바쿠르 카페에서 이 좁은 곳으로 와도 여유가 넘치니까 별 불만이 없잖아요.”

 

“…….”

 

“난 그림이 좋아서 여기 있는거에요. 절대 이 공간이 좋아서 오는게 아니라구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건 사장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입 밖으로 내민 말이였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이 좋아서 그곳에 있는게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저곳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나는. 나는 가족들을 버리고 나와서 아무런 결과물도 만들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무서웠다. 그 무서움과 괄시의 시선을 받는 것이 싫어서 괜히 사장님에게 화를 낸 것이다. 집으로 가기위해 서둘러 화구통을 고쳐맸다.

 

 

 

 

 

“지훈씨!”

 

“…….”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 번 더 잡으면 난 감정에 휘둘리는 쓰레기가 되고말텐데.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하지만 내 뒷통수에 대고 지르는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뉴스에서 그러는데, 조만간 장마래요!”

 

“…….”

 

“비맞지말고 조심해요!”

 

 

 

 

 

*

 

 

 

 

 

몸이 아팠다. 많이 아팠다.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렸다. 일주일만에 살이 5kg이 빠져버렸다. 누가 보면 굶주린 배로 겨우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과 같은 예술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열병의 주체는 스프링카페의 사장 라이관린 이라는걸.

 

그의 말처럼 정말 장맛비 쏟아졌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장맛비가 세상을 뒤덮고 나는 방에 누워 비를 피했다. 비를 맞으면 정말 나 자신을 놓고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

 

 

 

‘CLOSED-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용기내어 발걸음을 옮겼지만 카페의 문은 닫혀있었다. 해바라기들은 해를 보지 않은지 오래라 고개가 축 쳐져있었고 정원의 꽃들은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목을 축이고 있다. 리트리버의 은색 스테인리스 밥통은 사료 대신 빗물이 고여있었고, 레몬박스도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우산을 잡고 돌아갔다. 어딜 간거지. 레몬에이드가 마시고 싶었는데.

 

 

 

*

 

 

 

‘CLOSED-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뭘까. 개인사정이란게 무엇일까.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화구통도 이젤도 없이 가볍게 나온 마실인데, 오늘도 마실의 주체가 없었기에 돌아갈 수 밖에.

 

 

 

*

 

 

 

‘CLOSED-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

 

 

 

‘CLOSED-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혹시 나때문일까? 내가 너무 매정하게 굴었던건 아닐까. 나 좀 살아보겠다고 그를 몰아세운건 아닐지. 갑자기 마음 속에 커져가는 그가 너무 당혹스러워서 밀어냈는데, 사실 그랬으면 안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 오는건 그를 보기 위해 오는 것이였다. 라바쿠르에도 그를 보기 위해 갔으며, 스프링카페는 그가 언덕에서 리트리버와 노는 모습을 보려고 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모두 핑계였다. 나는 그를 보러 다녔던 거다.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그에게 쏟아냈던 말들은 모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

 

 

 

‘CLOSED-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다신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집안을 버리고 뛰쳐나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젖어 타인에게 화를 내는 잘못된 행위를.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는 내 피사체이기 이전에, 내 가슴을 뛰게 해주는 사람이다. 힘을 줄때마다 단단하게 솟는 팔과 목도. 그리고 그 위로 날 보며 웃고 있는 얼굴도. 친절하고 나긋하게 불러주는 목소리도. 강아지를 쓰다듬는 길고 예쁜 손가락도.

 

하늘에서 매정하게 퍼붓는 장맛비처럼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이걸로 2주째.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고 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카페 문을 영영 닫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언젠가 이 카페를 팔러 올텐데 그 때라도 한 번만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잘못했다고 말한 뒤, 나도 당신을 좋아했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는 이미 내게 질리고 상처받았겠지만. 우산을 뚫을 듯 비가 계속 내린다. 언제 이 장마가 끝나려나.

 

난 뉴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장마가 언제쯤 끝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뉴스에선 여전히 안좋은 소식이 가득하다. 어느 회사가 파산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제 8시 뉴스를 보다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장마가 곧 끝난다는 이야기와 그와 동시에,

 

 

 

 

 

“지훈씨?”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이였다.

 

 

 

쏟아지는 빗속에 또렷하게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보았다. 검은색 우산 아래로 반갑다는 표정으로 웃고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간 참아온 미안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패배자가 맞다. 가족을 버리고 나와 감정에 치우쳐서 그림도, 생계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패배자. 하지만 그 패배의식에 젖어 그를 외면하게 되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신 느낄 수 없을정도의 두근거림과 욕망. 설렘.

 

 

 

 

“레몬에이드, 먹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걸 짜는 동안 보여지는 목의 핏줄, 팔, 그리고 당신의 얼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