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w. 세이

 

 

 

 

 

“아가, 너무 깊게 들어가면 귀신이 너 잡아간다.“

 

“할머니 나 애 아니거든. 그런 말 안 믿어.”

 

 

지훈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산바람에 눈을 내리감았다. 지훈은 할머니 집이 있는 마을 뒤에 있는 귀신산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이름만 귀신산이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오랜만에 온 할머니 집에 가만히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 할머니를 조른 지훈은 결국 할머니 손을 잡은 채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다섯 살 이후로 한 번도 할머니 집을 방문하지 않은 지훈이었기에 마을 어르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지훈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질문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친절하게 답해 드리면서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걸어 다녔다.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강아지 이제 몇 살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저 열아홉 살이에요! 하면, 대부분의 어른이 윗집 손자가 저렇게 컸단 말이야? 하고 웃어주시는 모습에 지훈은 기분이 좋았다.

 

지훈의 엄마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이 집에서 스마트폰 게임만 하는 것을 보다 못해 여름 방학에 와이파이가 있긴커녕, 전파도 잘 터지지 않는 깡 시골인 할머니 집에 지훈을 두고 갔다. ‘우리 아들, 경치 좋은 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개학 전날 만나자!’라는 엄마의 인사는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이건 말이 좋아서 공부지 그냥 유배 아니야? 첫날은 그래도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를 여기 놓고 갔겠어, 하는 수능 기출 수학 문제집을 꺼내 한두 장 풀었다. 그다음 날은 수능 영단어 스무 개 정도를 침대에 누워 외웠다. 그다음 날은 비문학 챕터 중 그나마 흥미 있는 예술 분야를 골라 두세 문제 정도 풀었다. 그래,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던 것이다. 정녕 내가 가진 게 수능 기출 문제집과 단어장뿐인가 하며 절망하던 그 때, 지훈은 12년 만에 온 할머니 집을 한 번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이 깡 시골에서 공부 말고 할 것을 찾아냈구나. 장하다 나 자신.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할머니를 피해, 지훈은 집 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발견했는데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지훈은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가 다락방 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락방엔 안 쓰는 책상, 할아버지가 사용했을 것 같은 공구함, 고장 난 시계 같은 것들이 어지럽지 않게 잘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뭔가 없는 것을 확인한 지훈은 다락방을 보고 내심 수험생 시골 판타지 같은 것을 기대했던 터라, 한숨을 내쉬며 다락방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을 열자 보이는 산의 모습이 환상이었다. 어라, 산? 지훈은 할머니 집 산이라고 하니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 하여 미간을 찌푸렸지만, 쉽게 생각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을 미뤘다. 지훈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다시 창문을 닫고, 다락방을 나가려 걸어가던 지훈의 뒤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돌았다. 종이였다. 지훈은 종이를 집어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내가 그린 거 아니야?”

 

 

 

엄마가 집에 모아놓은 지훈이 어렸을 적 사용했던 스케치북 속 그림들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다섯 살 때 할머니 집에 한 번 와본 적 있다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때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림을 이렇게 들고 서 있으면, 무언가 기억날 만도 한데, 지훈은 ‘일곱 살’ 하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이상하다? 왜 전에는 이게 전혀 이상한 거라고 깨닫지 못했지? 지훈은 갑자기 등 뒤로 느껴지는 한기에 입술을 꾹 물고 그림을 손에 쥔 채 다락방을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그 그림에 밑에 서툴게 쓰인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다섯 살의 지훈은 서툰 글씨체로 ‘산굽이 산도깨비 관린’이라고 적어 놓고 그 위에는 도깨비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지금 지훈 나이 또래의 한 소년을 그려놓았다. 도깨비? 도깨비 하면 어렸을 때 배웠던 노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제목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지훈은 정말 이 그림이 자신이 그린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할머니 집에 올 만한 아이는 지훈 하나뿐이었기에 틀림없이 지훈이 그린 것이었다. 지훈의 아빠는 할머니의 외동아들이고, 지훈은 지훈의 아빠와 엄마의 외동아들, 즉 할머니의 하나뿐인 손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 지훈은 귀신산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유는 그 다락방 그림과 이 산이 관계된것 같다는 촉이 왔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자신의 촉을 맹신했고, 실제로도 지훈은 촉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지훈은 자신의 촉을 따라 이렇게 귀신산 앞에 섰다. 지훈은 자신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곗바늘은 각각 12와 4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훈은 적어도 여섯 시에는 산에서 내려오자 생각하며, 귀신이 잡아갈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귀신산으로 성큼 걸어 올라갔다.

 

분명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험한 길인데 지훈은 결코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고, 한 번도 헤매지 않은 채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이상함을 자신에게 하이킹에 소질이 있었나 하며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지훈은 산굽이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시계가 멈춰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멈춰있던 거지? 지훈은 더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뒤돌아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지훈은 같은 곳을 돌고 있었다. 할머니 말대로 귀신이라도 만난 걸까 하는 생각에 지훈은 점점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산을 오르며 느꼈던 이상함을 그냥 넘겨선 안 됐을지도 모른다. 집을 나와선 안 됐을지도 모른다. 다락에 오르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모든 순간을 후회로 만들었다. 결국 지훈은 신당 앞의 커다란 신목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나무도 오늘만 다섯 번째 본다.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신목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무서운데, 시원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두려움에 휩싸여 이 근방을 그렇게 배회해 놓고 시원하다니. 시선을 손목으로 옮겼다. 시간은 아직도 아까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지훈은 할머니 댁에 오기 전 시계 배터리를 갈아 끼웠다. 그 때문에 시계가 멈출 이유는 없었다. 지훈은 다시 시선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시계가 멈춘 건지, 시간이 같이 멈춘 건지 알 도리가 없어 답답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쉬다 내려가자고 결론을 내린 지훈은 눈을 내리감았다. 아까는 당황해서 길을 못 찾았던 것이라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얼마 지나자, 지훈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어차피 할머니 집에만 갇혀 있으면 그놈의 수능 공부만 주구장창 해야 할 텐데.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할머니 집 바로 뒷산인데 누군가는 찾으러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지훈은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기대고 있는 나무와 눈을 뜨면 보일 신당이 익숙해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기 전 지훈은 누군가 자신을 안고 토닥이는 듯한 나른함에, 조금만 쉬다 가려 했던 다짐과는 다르게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엔 행동 로딩이 너무 느리다. 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깜깜한 주변과 신당을 발견하고 나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몇 시지?”

 

 

 

주변이 깜깜한 걸 보니, 해가 진 게 틀림없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멈춰있던 시곗바늘은 각각 12와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 초침을 바라보고 있으니, 잠들기 전엔 잘못 봐서 시계가 멈춘 줄 알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지훈은 서둘러 일어나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두워 시야가 확보되지 않자, 산을 오르며 길을 잃었을 때처럼 두려움에 휩싸인 지훈은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뎠다. 두려움은 인간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잠시 멈춰, 아랫입술을 깨물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 애썼다. 다시 조급함이 담긴 발을 내딛는 순간 지훈은 나무뿌리에 걸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아, 넘어진다.

 

 

 

“조심해.”

 

 

 

지훈은 큰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지훈의 팔을 잡아 세웠다. 설마 귀신일까 싶어 뻣뻣하게 굳은 지훈이 앞만 응시하고 있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잡은 팔의 주인을 확인했다. 팔의 주인은 지훈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년이었다. 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년은 영문 모를 상황에도 지훈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 사실 무서웠거든.”

 

 

 

소년은 그래 보였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지훈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자, 마음을 추스른 지훈이 일어났고 소년은 그런 지훈의 손을 잡았다. 지훈은 시선을 맞잡은 두 손에서부터 소년의 눈으로 옮겼다. 소년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지훈은 그냥 무서웠는데 잘 됐다 싶어 잠자코 소년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 채 걸음을 옮겼다.

 

 

 

“귀신산의 것은 귀신산으로 돌아온다.”

 

 

 

소년이 중얼거렸다. 지훈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소년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소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지훈은 소년에게 먼저 말 걸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소년이 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긴 왜 올라온 거야?”

 

 

 

뜻밖의 질문에 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소년의 손에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입모양으로 ‘나?’라고 물으면서 말이다. 그런 지훈의 모습에 소년의 얼굴에는 조금전의 심각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웃음이 가득했다. 괜히 쑥스러워진 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다, 오늘 처음 만난 소년에게 대답했다.

 

 

 

“산에 도깨비가 사는 것 같아서, 진짜 사는지 보려고.”

 

“오늘 내가 아니라 도깨비를 만났다면 너는 좀 위험하지 않았을까?”

 

“아냐, 착한 도깨비 같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아니 이 세상 모든 도깨비가 나쁘다는 법은 없잖아.”

 

 

 

지훈의 말에 소년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소년은 지훈의 손에 있지 않은 손으로 입은 가린 채 웃었다. 소년이 그렇게 웃어대자 지훈은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했나 싶어, 자신의 조금 전 말을 돌아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은 항상 긴장이 풀리면 자신이 말을 많이 한다는 걸 알았다.

 

 

 

“이름이 뭐야?”

 

“박지훈. 너는?”

 

“나는 관린이야.”

 

 

 

너 도깨비랑 이름이 똑같구나? 지훈은 깜짝 놀라 소년, 관린을 향해 말했다. 지훈의 말에 관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지훈이 관린의 손을 잡은 채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니 금세 산 초입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산 초입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나온 지훈의 집 앞에서 관린은 지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지훈이 인사하려 뒤로 돌았을 때, 관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문에 지훈은 잠들기 전까지 관린이 도깨비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했다.

 

 

 

 

 

 

 

 

 

 

지훈은 다시 귀신산에 올랐다. 이번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 자신감 뒤에는 관린이 어제처럼 데리러 와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금방 신당 앞 나무에 도착했다. 일부러 지훈은 관린을 만날 수 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관린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일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지훈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툴툴거렸다. 관린이 물론 지훈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냥 시원섭섭했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도와준 은인 같은 존재라 그런지, 관린에게 마음이 갔다.

 

지훈은 혹시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관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 넓은 귀신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돌아다녀봐야, 처음 지훈이 위치했던 귀신산 산굽이 산당과 신목 근처겠지만, 수풀이 우거져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지훈은 한 시간 정도 주변을 돌아보다 잔뜩 지쳐 다시 신목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물론, 털썩 앉으면서 어제 관린과 헤어지기 전 어디 사냐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어제 물어봤으면 오늘 이렇게 땀 나게 돌아다닐 일 없을 텐데. 지훈은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어제부터 이 나무 앞에만 앉으면 눈이 감겼다.

 

지훈의 뺨 위에 시원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자 지훈의 시야에는 관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네가 찾아올 줄 알았으면 돌아다니지 않는 건데.

 

 

 

“찾았다.”

 

“오늘은 도깨비가 아니라 나를 찾으러 온 거야?”

 

“아니 그냥, 어제 고마웠다고.”

 

 

 

사실 ‘찾았다’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관린의 커다란 감청색 눈을 보고 있다, 그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이 느껴졌다. 분명 붉어졌을 것이다. 마치 복숭아처럼.

 

 

 

“너 여기 손 치워봐.”

 

“어? 어어?”

 

 

 

코앞에서 들리는 듯한 관린의 음성에 지훈은 재빠르게 손을 내렸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밴드를 하나 꺼내 지훈의 이마에 붙여 주었다.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밴드였다.

 

 

 

“피 나길래. 뭘 하면 이마에서 피가 날 수 있어?”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네가 지금 날 놀리는 것 같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런데 이 병아리 밴드는 어디서 났어? 매일 가지고 다녀?”

 

“예전에 친구가 줬어.”

 

 

 

관린이 친구라는 단어에 묘한 강세를 주어 지훈에게 답했다. 아아, 친구도 있구나. 지훈은 괜히 입술을 내민 채 삐죽거렸다. 이렇게 잘생긴 관린이라도 이런 깡 시골이라면 그동안 친구가 없지 않았을까 했는데. 자신이 첫 번째 친구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설렜던 지난 밤을 떠올리며, 지훈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꽃 좋아해?”

 

“꽃?”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지훈은 관린의 질문에 담긴 의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관린은 지훈의 손을 덥석 잡고, 마냥 웃으며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관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너도 좋아할 만한 곳”

 

“확실해?”

 

 

 

관린은 지훈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갑자기 멈춰 지훈을 돌아본 채 웃었다. 와 예쁘다. 지훈은 웃는 관린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훈이 관린의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관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산에서 내려갈 때도 관린이 웃었었지. 지훈은 문득 그때 어둠에게 관린의 웃음을 빼앗긴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가서 걸음을 멈춘 관린의 등에 머리를 콩 하고 부딪힌 지훈이 뭐냐고 중얼거리며 관린의 뒤에서 나와 옆에 섰다. 마치 별이 부서져 내린 것처럼 노랗게 반짝이는 꽃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와아-”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지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관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꽃밭의 중앙을 향해 걸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관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관린, 얼른 와!”

 

 

 

그런 지훈을 바라보는 관린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서렸다. 관린은 웃으며 지훈에게 다가갔다. 지훈은 관린이 다가오자 관린의 손을 잡고 무작정 꽃 위로 드러누웠다. 뜨거운 햇살이 우거진 나뭇잎에 가려져 있었고, 살랑이는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귓가에는 매미 우는 소리와 서로가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사브작 소리가 다였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한참을 누워있던 지훈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훈이 주변의 꽃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관린, 이거 보고 배워.”

 

“화관 만드는 거야?”

 

“응. 너 쓰면 잘 어울리겠다.”

 

 

 

관린이 상체를 일으켜 지훈의 옆에 앉았다. 지훈의 손가락을 유심히 관찰하며 줄기를 엮었지만 쉽지 않았다. 지훈은 금세 화관을 완성하고 고개를 돌려 관린을 바라봤다. 입술까지 내밀고 고전하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지훈은 결국 작게 웃으며 관린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지.”

 

 

 

관린은 즐거워 보이는 지훈의 모습에 덩달아 즐거움을 느꼈다. 그저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을 뿐이었지. 관린의 손은 지훈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움직였다. 관린은 손을 지훈에게 맡기고 지훈의 이마를 바라봤다. 아까 지훈의 이마에 상처가 있을 땐 정말 놀랐다. 하지만 지훈이 상처 때문에 산을 내려가 버릴까 봐, 말하지 않고 밴드를 붙여줬다. 관린은 지훈의 이마에 생긴 작은 상처가 지훈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다 됐다.”

 

“…….”

 

“관린, 어디 봐.”

 

 

 

정신을 차린 관린의 앞에 지훈의 얼굴이 정말 가까이 와있었다. 관린은 머쓱해 보이는 웃음을 짓다, 지훈이 완성한 두 화관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진짜 예쁘다”

 

“다음번엔 네가 만들어 줘.”

 

 

 

관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이 관린의 머리 위로 노란 화관을 씌웠다. 자신의 모습을 고동색 눈동자에 가득 담은 채 웃는 지훈을 가만히 응시하던 관린은, 다른 화관을 지훈의 머리 위에 씌워줬다. 이제 관린의 감청색 눈동자엔 지훈만이 가득했다. 각자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관린과 지훈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었다. 늦은 오후, 두 사람의 머리 위엔 별빛이 앉아있었다.

 

 

 

 

 

 

 

 

 

 

지훈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관린이 다시 산에 올랐다. 관린이 산굽이에 들어서자 귀신들이 웅성댔다.

 

 

 

“저 분이시죠?”

 

“뭐가?”

 

“관린 님이 기다린 인간이요.”

 

“아니야.”

 

“이유 없이 저희가 인간을 좋아할 경우는 단 한 가지라는 것, 관린 님도 아시잖아요.”

 

“좋아해? 그런데 왜 오늘 지훈의 이마에 상처가 났어?”

 

 

 

지훈은 귀호가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들은 지훈을 이유 없이 좋아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불행한 기질을 타고 났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훈의 경우는 달랐다. 지훈은 인간에게만 받는 사랑으로 부족해, 모든 존재에게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늘에서 내린 기질이 틀림 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지훈을 좋아했지만,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신이니까. 귀신은 혼령에 불가해 인간과 접촉할 수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관린은 달랐다.

 

 

 

“관린 님도 귀신은 귀신이신가 봐요. 저 인간에게 호감을 느끼시는 걸 보니.”

 

“귀호가인이기 때문이 아니야. 지훈은 소중해. 그러니까 너희도 지훈이 12년 전처럼 위험에 빠지면 지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희가 산도깨비 님의 명령을 무슨 수로 어기겠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사랑스러운 그 인간을 위해.”

 

 

 

관린은 아주 오래전 고려 시대, 귀신 산에 장마가 내리던 날 태어난 산도깨비였다. 산도깨비는 산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관린은 이내 모습을 감췄다.

 

귀신산에 비가 내렸다.

 

 

 

 

 

 

 

 

 

 

“관린 얼른 이거 먹어봐.”

 

“이게 뭔데?”

 

“아 얼른.”

 

 

 

관린은 지훈의 재촉에 못 이겨, 지훈이 다짜고짜 입술 앞에 가져다 댄 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으로 달큰한 복숭아 향이 퍼지는 것을 느끼고 관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복숭아 빵. 할머니께서 읍내에서 사 오셨어. 진짜 맛있지?”

 

 

 

관린의 반응에 뿌듯함을 느낀 지훈의 광대가 봉긋 솟아올랐다. 관린은 지훈이 내밀고 있던 빵을 아예 직접 잡고 먹었다. 지훈은 그런 관린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하나 더 가져온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안 먹어봤어?”

 

“응. 진짜 맛있다.”

 

“네 친구는 이런 것도 안 사주고 뭐 했대.”

 

 

 

방금 느꼈던 뿌듯함에 이어 지훈은 왠지 모를 승리감에 광대를 씰룩거렸다. 관린은 복숭아 빵을 열심히 먹으면서도 지훈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저기 토끼다.”

 

 

 

이어진 지훈의 말에 관린은 고개를 들어 지훈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응시했다. 토끼 한 마리가 조금 멀리서 풀을 먹고 있었다. 관린은 산에서 토끼를 본 건 처음이라며 신난 지훈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작게 토끼를 불렀다. 토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관린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이, 관린과 지훈이 앉아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뛰어온 토끼를 보며 지훈은 한껏 신나있었다.

 

 

 

“나 이런 적 처음이야 진짜…….”

 

“이거 주면 더 좋아해.”

 

 

 

관린이 내민 세 잎 클로버를 손에 쥔 지훈은 조심스럽게 토끼의 입가로 세 잎 클로버 가져갔다. 토끼가 지훈이 내민 세 잎 클로버를 오물오물 먹자, 지훈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관린을 바라봤다. 사랑스럽다. 관린은 사랑스럽다는 말 외엔 자신의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이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 잎 클로버를 다 먹은 토끼가 지훈의 손바닥에 머리를 몇 번 부비고 관린에게 인사를 한 뒤 멀리 뛰어갔다. 지훈은 여전히 신이 나서, 관린도 모두 보고 있었던 지훈과 토끼의 교감하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정말 예쁘게 컸구나. 관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훈은 어렸을 때처럼 순수함이 가득했고, 사랑스러웠다. 인간은 자라면서 어렸을 때의 모습을 하나둘 잃어간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관린의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지훈은 그 말을 정확하게 반박하는 인간 같았다. 그랬기에 지훈은 관린에게 과거와 똑같이 소중했다. 관린이 지훈에게 가진 마음을 소중하다는 말로 모두 묶을 수 없겠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소중한 것이 맞았다.

 

관린은 12년 전 지훈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의 지훈도 좋아한다. 그때와 지금의 ‘좋아한다’의 의미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은 관린 뿐만 아니라 관린의 주변에 모여있는 귀신들도 알고 있었다. 귀호가인이라는 지훈의 기질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관린은 지훈을 정말 좋아했다. 어쩌면 훗날엔 사랑이 될 수도 있을 만큼.

 

 

 

“관린아?”

 

 

 

지훈의 목소리에 관린은 생각을 멈추고 지훈을 응시했다. 지훈의 머리 위로 관린의 팔이 얹어져 있었다.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관린이 저도 모르게 귀를 붉히며 손을 내리려 하자 지훈이 복숭아 같은 얼굴을 하고 관린의 손목을 잡았다.

 

 

 

“나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좋아해.”

 

 

 

그리고 어쩌면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랑의 순간은, 모든 이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한다.

 

 

 

 

 

 

 

 

 

 

지훈은 관린이 집 앞까지 데려다줄 때마다 관린은 어디에 사는가에 대한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는 집에 들어가는 척하다 뒤를 돌아 관린이 가는 길을 인해 보려 했는데, 관린은 항상 그랬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훈은 책상 위에 펼쳐진 연습장의 빼곡히 적힌 수학 공식 아래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관린’

 

 

 

관린이라고 쓰고 옆에 관린에 대해 아는 것을 쭉 써보려고 했지만 지훈은 얼마 적을 수가 없었다. 관린과 본 지도 벌써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과 취향 외엔 아는 것이 없다니. 지훈은 책상 위로 엎어져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은 무슨 친구도 못 하겠다. 지훈은 자신이 한 생각을 되짚다 놀라서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았다. 애인이라니 미쳤어? 지훈의 두 뺨이 달아올랐다. 분명 처음엔 하나뿐인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언제 혼자 진도를 나가 애인이 되고 싶어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관린이와 사귄다면?’

 

 

 

지훈은 혹시라도 누가 볼까 손으로 글씨를 가렸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관린이는 잘생겼고, 착하고, 다정하고, 동물을 사랑해. 지훈은 관린을 떠올리면 따라오는 수식어들이 마음에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책상 옆에 걸린 거울을 보자,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한 자신에,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나 물이라도 먹고 올 생각으로 방을 나섰다.

 

물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던 중에, 지훈은 다시 관린이 사는 곳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산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산이나 산 근처에 사는 건 확실한데. 지훈은 방에 들어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가지런히 꽂아둔 문제집 사이로 튀어나온 도화지가 보였다. 그 도화지를 꺼내 확인한 순간 지훈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짐을 느꼈다.

 

 

 

‘산굽이 도깨비 관린’

 

 

 

관린을 만나 함께 노는 것에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깨비. 지훈은 관린이 도깨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닌 확신이었다.

 

 

 

 

 

 

 

 

 

 

 

 

“와 이게 누구야. 인터넷도 안 되는 시골 할머니 댁에 갇혀 이모한테 휴대폰까지 뺏겼다는 지훈이 형 아니야?”

 

“야 대휘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보기 전에 내가 이모한테 연락해서 형이 전화했다고 하면, 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시지 않을까?”

 

“너 진짜 개학하고 죽는다. 그리고 이거 할머니 휴대폰이야.”

 

“안 일러, 안 일러. 뭐 물어보게? 뭐가 궁금하길래 거기서 나한테 전화를 해.”

 

 

 

지훈은 평소 도깨비 같은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 산굽이 도깨비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그때 떠오른 게 지금 통화 중인 대휘였다. 대휘는 지훈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인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판타지 동아리를 개설해, 고등학생 판타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쥔 판타지 광이기도 했다.

 

 

 

“너 산도깨비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당연히 있지. 와, 형 판타지에 눈을 떴구나? 형은 고3이지만 내가 특별히 동아리에 끼워 줄게.”

 

“됐고, 산도깨비는 뭐 하는 도깨비야?”

 

“뭐 하긴 뭐해, 산에 살지. 그냥 산에서 태어나 그 산을 지키며 평생 산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다른 건? 더 없어? 막 그 도깨비가 귀신산에 산다거나,”

 

 

 

지훈은 초조함을 느꼈다. 대휘가 귀신산까지 안다면, 자신이 어릴 때 그려둔 그림 밑에 쓰인 내용이 사실이 되고, 자신이 도깨비를 만났던 게 되는 것이었다.

 

 

 

“어, 형이 귀신산을 어떻게 알아?”

 

 

 

지훈은 다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귀신산, 산도깨비……, 관린.

 

 

 

“귀신산의 것은 귀신산으로 돌아온다는 말 들어봤어? 여기 나오는 귀신산의 산굽이에서 산도깨비를 봤다는 사람이 꽤 있나봐.”

 

“…….”

 

“그 사람들이 말하길, 평소엔 사람처럼 하고 다녀서 모르는데, 하는 행동에서 딱 보인대. 사람이 아닌 게. 형 듣고 있어?”

 

“……응.”

 

 

 

귀신산에 산다는 산도깨비가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데 행동에서 사람이 아닌 게 보인다는 대휘의 설명이, 관린이 산도깨비라고 지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귀신산의 것은 귀신산으로 돌아온다는 그 말은 희미하긴 했지만, 분명 관린을 처음 만났던 날 관린이 한 말이었다. 지훈은 대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고, 할머니의 화장대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었다. 혼이 빠진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던 지훈은, 별안간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집을 나서 귀신산으로 향했다. 관린이 보고 싶었다.

 

지훈은 관린을 만나기 위해 귀신산에 올라 단숨에 신목 앞에 섰다. 평소 같으면 금방 모습을 보일 관린이었는데, 관린은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관린이 도깨비일 것 같아서가 아니다. 그냥, 그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관린과 이 산에서 만든 추억들이 지훈의 눈앞을 스쳤다. 지훈은 작게 관린을 불렀다. 하지만 관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지훈은 혼란스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떨궜다. 그리고 신목에 기대 숨죽여 울었다. 관린이 도깨비일 것 같다는 생각은 관린을 만나며 종종 했던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황이 관린을 도깨비라고 말해 주고 있는 이 상황에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지훈을 눈물 흘릴 정도로 혼란스럽게 한 것은 출처 모를 그리움이었다. 수증기 같은 그리움이 지훈의 가슴 속에 꽉 차 있었다. 그 수증기가 어디에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른다. 그저 이제 공간이 부족한 지훈의 가슴 속으로 점점 피어날 뿐이었다. 지훈은 그 수증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길 바라며 결국 엉엉 울었다.

 

지금 관린이 옆에 있었으면 덜 울었을까? 아니었다. 지훈은 관린의 앞에서도 울었을 것이다. 관린이 지훈의 앞에 나타났으면 아마도 울면서 왜 도깨비인 걸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것 같다. 지훈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주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울다 보니,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관린 오늘 안 올 거구나.”

 

 

 

조금 섭섭했다. 이 바보, 친구가 울고 있는데 얼른 와야지.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지훈이 심호흡 몇 번을 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지훈의 앞으로 인영이 드리웠다. 곧이어 지훈의 머리 위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닿았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왔어.”

 

“……관린.”

 

“약속 지킨 거다.”

 

 

 

지훈의 머리에 노란색 화관을 씌운 채 웃고 있는 관린의 모습에 지훈은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았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관린이 씌워준 화관이, 지금 관린의 웃는 얼굴만큼 예쁠 것 같아서, 그래서 웃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지훈의 눈가를 문지르며, 시선은 지훈의 입술에 두었다.

 

 

 

“입술엔 밴드를 붙일 수가 없는데.”

 

 

 

비릿판 피 맛이 느껴졌다. 눈물을 참는다고 세게 물었던 탓에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지훈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다, 아까 낮에 했던 생각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가 관린이랑 연애를 한다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훈은 이 모습을 관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어서 내려가자며 고개를 숙인 채 관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지훈을 불렀다. 관린의 목소리에 지훈은 결국 고개를 들었다. 또다. 관린은 지훈이 저번에 보인 복숭아 같은 얼굴을 기억했다. 지금도 지훈의 얼굴은 복숭아 같았다. 왜 부르냐며 툴툴거리는 지훈의 입술이 반짝였다. 관린은 가만히 지훈의 입술을 바라보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별빛이 두 사람의 위로 쏟아지는 밤이었다.

 

 

 

“밴드 대신이야.”

 

 

 

관린의 입술이 떨어지자 지훈의 입술에 났던 상처는 관린에게 가졌던 섭섭함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

 

.

 

.

 

 

 

 

 

 

 

“관린 님, 인간의 아이예요.”

 

“보고 있어.”

 

 

 

12년 전, 관린은 어린 지훈이 산에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훈의 주위에는 귀신들이 아주 많이 모여있었다. 딱 보기에 귀신 중 누구도 지훈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기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때, 지훈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관린은 넘어진 지훈을 보고 깜짝 놀라 지훈에게 가려 했지만, 금방 일어나 웃고 있는 지훈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지훈은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고, 곧 있으면 산에서 내려갈 것 같았다. 굳이 관린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린은 웃는 얼굴의 지훈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지훈의 무릎에 난 상처를 봐줘야 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지훈에게 내려갔다.

 

지훈 또래의 모습으로 변해 지훈의 앞에 나타나니, 지훈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관린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지훈의 앞에 앉아 지훈의 무릎을 살폈다. 꽤 아팠을 것 같은데 지훈의 눈에는 전혀 아픈 기색이 없었다. 관린은 지훈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지훈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지훈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관린에게 내밀었다.

 

 

 

“이거 병아리 밴드 붙이면 돼.”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밴드였다. 지훈은 다짜고짜 고맙다며 관린의 손에 밴드를 쥐여줬다. 꽤 많았다. 관린은 지훈을 바라보며 이걸 다 붙여야 하냐 물었고, 지훈은 답했다.

 

 

 

“아니이, 다른 건 친구 다쳤을 때 써.”

 

“나는 안 다쳐, 산도깨비라서.”

 

 

 

그리고 친구가 아니라 라이관린. 지훈의 말을 정정하면서도 관린은 친구라는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친구? 살면서 관린을 친구라고 부른 이는 없었기에, 처음 듣는 친구라는 말은 관린에게 흥미가 되었다. 이미 사라진 상처 위에 병아리 밴드 하나를 붙이고 다시 일어나 지훈의 손을 잡았다. 관린은 지훈의 손을 잡자 느껴지는 지훈의 기질에 숨을 멈췄다. 분명 귀호가인의 기질이었다. 지훈의 기질을 알고 나니, 귀신들이 지훈의 근처에 득실거렸던 모습이 이해됐다. 관린은 지훈에게 흥미를 느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던 마음이 더 커져, 지훈을 곁에 오래 두고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귀호가인은 다른 인간들보다 상대적으로 기가 약해, 단명한다는 것을 관린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린은 욕심을 내서, 얼마 안 될 이 아이의 운명의 시간 속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자리하고 싶었다.

 

 

 

“너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노래 알아?”

 

“아니, 몰라. 알려줄래?”

 

 

 

그래서 관린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노래하는 지훈의 손을 잡은 채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일주일을 관린과 지훈은 함께 있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토끼를 보여주기도 하고, 꽃반지를 만들어 지훈의 손가락에 끼워 주기도 했다. 지훈의 손을 잡고 숲을 다니며 여러 동물과 인사하는 법을 알려주고, 산딸기를 따서 먹었으며, 나무 위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법 또한 알려줬다. 지훈은 관린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마다 해사하게 웃었다. 지훈이 웃을 때면 관린은 마음속 깊은 곳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그렇게 마음속이 간질거릴 정도로, 어느새 관린은 지훈을 좋아하고 있었다. 관린은 지훈의 단순함을 좋아했고, 지훈의 순수함을 좋아했으며, 지훈의 호기심을 좋아했다. 지훈의 기가 점점 미미하게 느껴졌지만, 관린의 곁에 있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지훈에게 안전한 것이었기에 관린은 지훈을 품고 놓지 않았다.

 

관린은 지훈을 데리고 산속 계곡에 갔다. 밤의 계곡은 달빛이 가득해,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지훈은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조약돌을 모아 풀로 엮더니 관린의 손목에 묶어줬다.

 

 

 

“산도깨비는 이런 거 해야 해. 선물이야. 잊어버리면 혼난다.”

 

 

 

관린은 지훈이 참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사랑스럽다, 그래 지훈은 사랑스러웠다. 관린은 지훈이 선물한 팔찌를 바라봤다. 조약돌이 빛나는 모양새가 꼭 지훈의 눈동자 같았다. 관린은 지훈의 손을 꼭 잡고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관린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훈에게 남은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관린이 잠시 지훈의 손을 놓고 뭍으로 올라갔고, 지훈은 웃는 낯으로 관린을 부르며 다시 들어오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훈이 갑자기 물 위로 쓰러졌다. 관린은 크게 놀라 지훈에게 다가가 지훈을 살폈지만, 지훈은 눈을 뜨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공포를 느낀 순간이었다. 관린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가 된 지훈을 이렇게 잃어버릴 수 없었다. 지훈의 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지훈의 운명이 여기까지임을 의미했다. 인간에게 사랑받는 걸로도 모자라, 귀신에게까지 사랑받게 만든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이렇게 쉽게 거두어 가십니까. 관린이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관린 곁의 귀신들이 웅성댔지만, 관린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방법은 단 하나였다.

 

 

 

“다 기억하고 있을게, 돌아와야 돼.”

 

 

 

너와 함께 봤던 모든 것들과, 느꼈던 감정, 그때 들렸던 소리,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노래까지.

 

관린은 지훈의 입술로 자신의 기를 불어넣었다. 도깨비의 기를 몸에 담고 살아가는 인간은 도깨비가 사는 만큼의 시간을 살 수 있지만, 특정 기간의 기억을 잃고 살아가게 된다. 지훈의 특정 기간은 관린과 산에서 함께한 일주일이었다. 특정 기간은 인간에 따라 다른데, 살아온 시간 중 가장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날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관린은 지훈에게서 사라질 특정 기간이 자신과 보낸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자신의 손목에 묶여 있던 팔찌를 풀어 지훈의 손목에 묶었다.

 

 

 

너는 나를 잃고 떠나가는 순간까지 사랑스럽구나.

 

 

 

관린은 지훈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울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딱 일주일간, 귀신산과 그 주변 마을에는 장맛비가 쏟아졌다.

 

 

 

 

 

 

 

.

 

.

 

.

 

 

 

 

 

 

 

지훈은 관린이 씌워줬던 화관을 매만졌다. 지훈이 매일 살핀 덕에, 꽃잎에 예쁜 모양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산에 못 간지 벌써 이틀째였다. 지훈은 한동안 공부를 한다고 산에 오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공부와 관린을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관린 쪽이 우세했지만, 외부의 압력은 공부 쪽에 힘을 실었고, 저울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불시검문에 나선 것이다. 다행히 엄마는 지훈이 관린을 만나기 전 풀어놓은 꽤 많은 양의 문제집 페이지에 흡족해했다. 문제는 엄마가 할머니 댁에 며칠 머물다 간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보고 있는 한 지훈은 산에 갈 수 없었다. 꼼짝없이 집에 갇혀 문제만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

 

 

 

관린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지훈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얼마 전 관린의 입술이 여기 닿았었다. 지훈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매 순간 따뜻하게 대했고, 입술마저 따뜻했다. 지훈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찬물이라도 마셔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지훈은 물을 한입에 다 마시고, 관린이 그려져 있던 도화지처럼 흥미로운 게 있을까 찾아보려는 심산으로 다락방으로 향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리려던 지훈은 그 옆 할머니 방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요즘 지훈이가 산에 올라가는 것 같더구나.”

 

“산에요?”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러다 그때처럼 아이를 잃는 거 아닐까 무섭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지훈은 멍하니 앞만 응시했다. 산에 올라가? 나를 잃는 건 뭐고, 다시 일어나겠냐는 그 일은 뭐야? 지훈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할머니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 몰래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보아, 절대 이야기해줄 리 없다는 것을 지훈은 알았다. 온갖 궁금증을 가진 채 다락방에 도착한 지훈은 물건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충 도화지가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상자를 발견하자, 곧바로 들고 내려와 방에 들어갔다. 지훈은 상자를 책상 위에 놓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관린도 만나러 가지 못하는데, 이럴 땐 자는 게 상책이다.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지훈이 일어난 것은 새벽 두 시였다. 아 목말라. 지훈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물을 찾아 방을 나섰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지훈은 침대 위에 멀뚱히 앉아 창문을 바라봤다. 자다 깨서 그런지, 평소보다 정신이 더욱 몽롱했다. 하품하며 다시 누우려던 순간, 지훈의 시야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지훈은 눈을 비비고 반짝이는 물체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가까이 가지 않고선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결국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반짝이는 물체는 오후에 다락방에서 가져온 상자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물체의 정체는 조약돌이었다. 분명 다락방에서 가지고 나올 때 언뜻 봤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빛나지 않았다. 책상 위를 비추는 달빛 때문에 빛나는 것 같았다. 지훈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조약돌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상자 안을 찾아보니 조약돌이 몇 개 더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두니, 더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지훈은 왠지 들뜬 기분으로 가지런히 모아놓은 조약돌을 응시하다, 침대 위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내일 엄마가 집에 가면, 저 돌을 들고 관린이에게 가야지. 빛나는 돌이라면 관린이도 좋아할 거야. 아니면 팔찌로 만들어 선물할까?

 

지훈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돌로 만든 팔찌가 그려졌다. 틀림없이 예쁠 것 같았다. 아니 예쁠 것이다. 아니지, 예쁘다. 지훈은 눈을 번쩍 떴다. 지훈은 저 돌로 만든 팔찌를 본 적이 있었다. 혼자 만든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훈은 상체를 일으켜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팔찌, 선물, 조약돌, 귀신산, 병아리 밴드, 토끼……,

 

 

 

“라이관린.”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신목 앞에서 관린을 아무리 불러도 만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뛰어나오느라, 지훈의 발은 맨발에 흙투성이였으며, 곳곳에 피가 나고 있었다. 지훈은 관린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고 싶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마음이 관린을 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지훈은 관린이 도깨비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확신했다. 라이관린은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지훈은 나타나지 않는 관린에게 보라는 듯이 기억을 더듬어 계곡을 찾아갔다. 새벽 달빛이 계곡을 비추고 있었다. 지훈이 손에 쥐고 온 조약돌이 새벽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지훈은 계곡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얼마 전 내린 비로 인해, 기억 속에서는 발목까지 오던 계곡물이 꽤 깊었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엔 이런 계곡따위 무섭지 않았는데, 자신이 이곳에서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하니 무서운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지훈이 한 발을 더 내디뎠을 때였다.

 

 

 

“위험하잖아. 뭐 하는 거야.”

 

 

 

다급한 관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관린의 팔이 지훈의 허리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뭍으로 올라와 있었다. 지훈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관린을 바라봤다. 지훈의 가슴 속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훈은 관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보고 싶던 관린이 앞에 있었다. 관린은 영문도 모른 채 지훈의 등을 토닥이다, 고개를 든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잃어버리면 혼난다고 했지, 라이관린.”

 

 

 

관린은 지훈을 다시 만나, 이름 전부를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관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훈은 관린의 손을 펴더니 손바닥 위에 자신이 쥐고 있던 조약돌을 올려놓았다. 관린의 입술 사이에서 물기 어린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훈은 아프지 않게 관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다, 다시 관린을 끌어안았다. 드디어, 완전해졌다. 함께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공간이. 무엇 하나 잃어버린 것 없이, 모든 것이 완전했다.

 

 

 

 

 

 

 

 

 

 

“도깨비는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소년의 선물을 받아줬어요.”

 

“반짝거려서가 아니고, 네가 준 거라서 받은 거야.”

 

“내가 딴지걸지 말고 들으라고 했지.”

 

“네, 네, 계속하세요.”

 

“그리고 도깨비와 소년은 평생 함께하는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죠.”

 

“언제 그랬어? 나 친구 한다고 약속 안 했는데?”

 

 

 

지훈이 세모눈을 한 채 관린을 쏘아보았다. 관린은 지훈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관린이 손을 뻗어 지훈의 눈가를 매만지니 금방 다시 웃으며 책을 읽어가는 모습이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책을 다 읽은 지훈이 관린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어때? 이야기 재밌지. 그림도 예쁘고.”

 

“나 출연료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많이 나오는데.”

 

“도깨비가 무슨 돈이 필요해. 아니 재밌냐고.”

 

“네, 너무 재밌고 감동적이에요. 저 눈물 나려고 그래요.”

 

 

 

지훈이 장난치지 말라며 관린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둘은 신목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훈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첫 번째 동화책이었다. 관린이 수고했다며 손을 지훈의 머리에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관린은 지훈이 다시 팔찌를 묶어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팔찌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지훈이 다시 한번 잃어버리면 접근 금지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관린과 지훈은 오래 만나고 있다. 잊고 지냈던 시간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만나고 있다. 귀신산의 것은 귀신산으로 돌아온다. 귀신산은 라이관린 본인이며, 귀신산의 것은 박지훈이다. 필연적으로 지훈은 관린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 둘은 떨어질 수 없다.

 

 

 

“다음 책은 언제 나와?”

 

“그건 도깨비 당신이 저와 이야기를 만들어야 나오죠.”

 

“소년과 도깨비의 연애물은 어때?”

 

“너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연애물?”

 

 

 

관린은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관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훈은 읍내에서 사 온 복숭아 빵을 가방에서 꺼냈다. 빵을 본 관린의 눈이 빛났다. 지훈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모르는 척 관린에게 빵을 건네지 않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말해 주면 줄게.”

 

“대휘.”

 

“아 그럴 줄 알았어.”

 

 

 

틈만 나면 할머니 댁으로 달려가는 지훈을 지켜보던 대휘는 어느 날 지훈을 따라나섰고, 그렇게 관린을 만났다. 사실 대휘가 소문난 판타지 광이라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니다 관린이 누구한테 잡혀가는 거 아닐까 싶어 지훈은 숨기고자 했지만, 지훈이 보고 싶어 집까지 내려온 관린 때문에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다. 그 후로 관린은 대휘의 동양 판타지 소설 조언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휘는 생각보다 입이 무거웠기에 관린이 어디론가 잡혀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관린이 대휘에게 너무 인간적인 말을 배워 온다는 것이었다. 관린은 지훈의 속도 모른 채 지훈의 손에 들렸던 복숭아 빵을 어느새 가져가 먹고 있었다.

 

 

 

“너 그 판타지 조언 해주는 거 그만두면 안 돼?”

 

“응 안 돼.”

 

“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한 관린은 주머니에서 한 사진을 꺼냈다. 지훈의 어렸을 적 사진이었다. 이것들이 내 사진으로 거래를 해? 지훈은 다시 세모눈을 하며 관린을 쏘아보았지만, 복숭아 빵을 다 먹은 관린은 그저 웃다, 다시 손을 뻗어 지훈의 눈가를 문질렀다. 결국 지훈은 한숨 섞인 웃음을 뱉어냈다.

 

 

 

“맞다 지훈, 손 줘봐.”

 

“손?”

 

 

 

관린의 말에 순순히 내밀어진 지훈의 손, 그중 네 번째 손가락에 꽃반지가 끼워졌다. 지훈은 꽃반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관린의 눈을 응시했다. 관린의 감청색 눈동자 속엔 자신만이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아마, 지훈의 눈동자 속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지훈은 관린과 함께라 행복했다. 그리고 관린도 행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 매일 봐?”

 

“응 나 오늘 여기 밑으로 이사 왔으니까 매일 봐.”

 

 

 

관린이 보조개가 파이도록 웃었다. 관린의 보조개가 보인다는 건 정말 기분이 좋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훈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관린의 보조개를 꾹 눌렀다. 지훈을 지켜보던 관린이 지훈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 지훈을 안았다. 기분 좋은 떨림을 느끼며 지훈이 눈을 감았다. 완벽한 뽀뽀 타이밍이다.

 

 

 

“그런데 지훈, 나 궁금한 게 있어.”

 

 

 

지훈이 눈을 슬그머니 뜨더니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동화책 제목이 뭐야?”

 

 

 

지훈은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 옆에 펼쳐져 있던 동화책을 접어 표지를 관린에게 보여줬다. 제목을 확인한 관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내 관린은 지훈에 입술에 입 맞췄다. 복숭아 향이 나는 입맞춤이었다. 지훈은 관린의 목에 팔을 둘러 더욱 밀착했다. 관린과 지훈의 주위로 바람이 살랑이며 지나갔다. 완연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