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게

w. 비체

 

*아주 조금의 엠프렉 요소가 있습니다.

 

 

이름에게

 

 

 

 

 

1.

[처음으로 편지를 위해 펜을 잡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4개월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신지, 계시는 그 곳은 전쟁의 그늘을 벗어나 무탈한지 걱정이 됩니다. 무엇보다 떠나던 마지막 날 많이 놀라셨을 당신이 생각나 쉬이 잠에 들 수 없습니다. 아직은 혼란스러워 그간 보내주셨던 편지는 뒤늦게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소식이 닿지 않아 가슴 졸이며 잠에 들지 못하던 밤들은 아이와 당신께서는 안녕하다는 편지에 모든 것이 감사한 밤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눈 앞에서 목도한 동지의 죽음에도,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 앞에 나는 슬퍼할 틈도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그 의미는 모두 잃고 오로지 살기 위해, 살아서 돌아가 당신을 품에 가득히 안기 위해 그렇게 버텨내고 있습니다. 가끔은 거울을 통해 마주한 내 모습이 당신이 기억하던 그 모습과 이리도 많이 달라진 것을 볼때면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한편, 당신은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되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약속했던 그 꽃밭을 말입니다. 당신은 처음 본 그 모습처럼 내내 어여쁘셨습니다. 부서지는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셨고, 나는 그 보드라운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 손은 당신의 손을, 다른 한 손은 만개한 꽃들을 스치며 우리는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날 수가 있다면, 우리가 다시 손을 잡을 수가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꽃놀이를 가자고 할 생각입니다. 꽃을 좋아하셨던 당신이니 해맑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는 그 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겠지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하면, 나는 지금 이 순간들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을 처음 보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지겨운 전쟁이 끝난다면 내가 사랑했던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마지막까지 어여쁘던 당신의 품에 무너져 그리웠노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노라… 그렇게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보고싶습니다. 모든 날, 모든 순간이 아름답던 당신이 보고싶습니다. 가끔은 이 전쟁터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그대 생각이 흐려지는 날이면 혹, 내가 사랑한 그 모습이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때면 눈을 감고는 당신을 그려봅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선명한 당신의 미소에 안도하며 잠을 청합니다.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유독 자주 열병을 앓던 당신이 생각나 걱정이 됩니다. 부디 올해 겨울은 당신께서 혼자 아프지 않기를, 당신의 곁에 내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50년 10월 16일.]

 

 

 

 

2.

[한 푼이 아쉬울 걸 알기에 사진은 꿈에도 꾸지 않았는데 보내주신 아이와 당신의 사진에 주책맞게도 저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당신을 닮길 바랐는데 태가 벗겨지기 전에도 유독 나를 닮은 아이라 당신은 못내 서운해 하셨지요. 이다지도 사랑하는 두 얼굴을 보니 어쩐지 지나온 모든 것들이 스치우는 밤입니다.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자국의 건장한 사내가 목숨 받쳐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어찌 이리 야속한지. 그래도 이곳에서의 생활도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사소한 즐거움에도 실 없이 웃기도 하고, 쉬이 잠 들지 못하는 동지들과 두고온 이들을 함께 떠올릴 때면 담담히 당신을 그려보기도 하고. 가족이 있냐는 말에 자랑스레 당신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리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걱정을 덜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스치는 것 조차 인연이라 부르기에 숱하게 많은 인연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진짜 소중한 인연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거라, 당신이 더욱 소중합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여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기엔 부족하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신은 내게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선임께 잘 보인 것인지 가끔은 이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사탕을 선심쓰듯이 건내주십니다. 어느새 거칠어진 손바닥 안에 내려앉는 사탕을 보면서도 나는 당신을 떠올립니다. 손바닥 위의 사탕은 꼭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 같습니다. 어떨 때는 쓰고, 또 어떨 때는 혀가 뻐근해질정도로 달고, 그리고 어느새 그 맛에 취해버린 것이 꼭 닮았습니다.

 

 

그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다보면 입안이 얼얼하도록 달달함이 퍼집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짧은 터라, 단단하던 사탕이 입 안에서 서서히 녹아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후에는, 지독한 그리움에 빠집니다.

 

 

내가 하는 그립다는 말은, 당신께서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묵직한 말이기에 아끼고 또 아끼고 싶은 말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유독 그리운 날입니다. 오랜만에 사진을 통하여 당신과 아이를 보았더니 주책맞게도 이러한 마음들을 당신께 비춥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1951년 3월 17일.]

 

 

 

 

[괜찮지 않을 거란 건 알았지만, 자꾸만 후회로 얼룩지는 나날입니다. 미련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매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사랑했다, 나의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다 자신했지만 어쩐 일인지 못해준 것들이 떠오릅니다. 이것만은 해줄걸. 그 말 한마디라도 더 해줄 걸. 투정부리는 당신을 꼭 한번 껴안아줄 걸.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해도 나는 꽤 미적지근한 사내이기에 또 거기에서 그칠 것을 알지만 아쉬운 것은 저라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주 가끔, 당신이 꿈에 나옵니다. 당신의 꿈과 함께 맞이한 아침은 그 어떤 아침보다 따스하고 향긋합니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당신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당신의 꿈에서 깨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면, 꼭 앞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웃는 날도 있습니다. 뜨거운 것을 삼켜낸 것처럼 가슴 깊숙이부터 피어오르는 마음에 당장 끌어안고 곳곳에 입을 맞추고 싶은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럴 때면 마치 세상에 우리 단 둘만이 남은 듯, 다른 것들은 잊고 우리들만의 세계를 영위하며 머무르는 듯한 기분입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 그 유효한 시기가 지나면 다 잊혀진다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 겪어도 당신에 대한 감정은 더욱 더 열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까요. 가끔은 스스로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몸을 던지고 영원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꿈에서 깨면 모든 것이 거품 뿐인 것이 사랑임을 알면서도. 꿈인 것을 알면서도 끝 없이 잠 들고 싶습니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평화로운 육신에도 마음은 그러지 못해 쉽사리 가라 앉지 않고 당신을 떠올린 순간부터 뛰고 있습니다.

 

 

내가 이 곳에서 당신을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미미한 것이지만, 내가 이 곳에 와 있기에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사소한 것들로 부디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1952년. 1월 12일.]

 

 

 

 

 

 

 

[하늘이 맑습니다. 바람도 고르고, 하이얀 구름도 잔잔히 흐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에 맑은 날입니다. 장마가 그친 후라 아직은 축축하지만 깨끗이 씻겨나간 기분도 듭니다.

 

 

오랜 안개가 걷힌 기분입니다. 흐려지는 지도 모르고 눈이 가려지고 있었고, 걷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보이지 않던 앞이, 그리움에 잠겨가는 지도 모른 채 빠져들었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후련해진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떠나 온 그날부터 묵직하게 내리 눌리던 갑갑함이 어느새 그렇게 평온하게 떠나갔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1952년. 9월 6일.]

 

 

 

5.

 

 

[사랑합니다.

 

 

 

1952년 10월 29일]

 

 

 

6.

 

전사통지서

賴冠霖 귀하.

계급 : 상병 군번 : 0401868 성명 : 朴志訓

위 자는 단기 4285년 11월 6일부로 00지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애석하게도 전사 하였음을 통지함.

 

 

 

 

7.

 

 

[이름에게.

 

이 편지를 당신이 읽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끝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끝이 나긴 할까요.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도 이제는 지친 것인지,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을 그리기 보다는 지나 온 우리의 날들을 더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 만났던 그 곳은 많이 변했을까요. 우리가 약속했던 그 꽃밭에도 봄이 왔을까요. 지난 겨울 당신은 따뜻했을까요. 내가 사랑한 당신은 여전히 어여쁠까요.

 

 

잘한 것이 하나 있다면 당신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알았을까요. 전쟁이 터지자 우리가 사랑을 했던, 우리가 사랑했던 그곳을 도망치듯 떠나던 순간.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여 이 곳 저 곳 떠돌다 마지막까지 내몰렸던 그 산 바로 아래까지 군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안 그 순간. 거칠게 흔들리는 문을 뒤로 하고 아이와 겁에 질린 당신을 숨기고 혀를 잘라 스스로 말을 잃던 순간. 내가… 라이관린이 박지훈이 되던 그 순간. 어쩌면 나는 알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쩐 일인지 꿈에 그리운 당신이 나왔습니다. 꿈에서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나봅니다. 이것이 꿈이라하더라도 깨고 싶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일찍 떠진 눈에 원망을 하며 문득 바라 본 밖은 비가 내립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요. 그 날도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어찌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냐며 투정부려도 저는 아무렴 좋습니다. 빗속을 뚫고 나를 처마 밑으로리당겨주셨던 당신의 손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내리는 빗소리의 틈을 비집고 가슴에 박히던 웃음 소리는 얼마나 따뜻했던지. 내 이 전쟁터에서 다 잊는다 하더라도 절대 잊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이 곳에서 당신을 그리는 동안 시간도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꽃이 지는 계절이 다가옵니다. 또 한번 꽃 피는 계절을 보내는 동안 당신의 곁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도 꽃은 피고 집니다. 동지들은 이 험한 곳에도 꽃은 끝내 피어난다고 답지 않게 좋아하지만 글쎄요. 제가 보기엔 우리가 약속한 그 꽃밭이 더 어여쁠 것입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두 손 맞잡고 갈 수 있다면. 가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 당신과 함께라 더욱 아름다울 그 곳을요. 기억나십니까. 태어난 날이 당신을 닮은 토끼풀을 뜻한다며, 길가에 피어난 토끼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한참을 그 앞에 앉아있던 당신을요. 막사 뒷편으로 펼쳐진 숲에 피어난 토끼풀들은 당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움에 지쳐 가슴이 아프다가도 뜻하지 않게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곳이 생겨 시간아 날때면 부러 서성이고는 합니다.

 

 

계신 곳은 평안하십니까. 그립습니다. 함께라는 것이 곧 행복임을 알지 못하고 사소한 다툼으로 흘려보냈던 시간이 원망스러워 그리움만 쌓여가는 지금, 내가 이다지도 사랑한 당신이 그립다,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까 두렵다는 솔직한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위태롭게 버티고 계실 당신이 무너질까 봐. 그 여린 당신의 성정에 스스로를 원망하실까 봐. 그립다, 두렵다는 말은 차마 부치지 못하고 접어내어 찢어내던 날들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매일 당신만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당신을 품에 안고 싶지만, 그리 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당신에게 그 날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는 그 날, 만나 뵐 그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賴冠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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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의 소식만을 기다리던 지훈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전사통지서를 받았을 때, 그는 힘 없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지훈은 넋 나간 얼굴로 연신 고래를 저었다. 아직도 선명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관린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떨리던 입술로 내려 앉던 입술. 품 안의 아이와 저를 애닳게 바라보던 눈빛. 마지막으로는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 목소리도. 그는 뒤돌아서던 찰나 두 뺨을 떠나는 손의 온기까지도 선명했다.

 

아니라는 말만 중얼거리던 지훈의 시선이 박힌 곳은 전사통지서와 함께 도착한 소포였다. 멍하니 소포를 바라보던 지훈이 천천히 다가갔다.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포장을 풀어내던 손이 이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박지훈. 제 이름 석자가 새겨진 군복 위로 놓인 사진 한장. 관린과 연락이 닿자 마을에 잠시 머물던 종군 기자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찍은 아이와 지훈의 사진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 관린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고작 사진 한장을 찍는 것인데도 사진을 받게 될 이의 생각에 유난히 가슴이 뛰었었다. 사진을 받아들었을 때 저는 울었던가. 아니면 미소를 지었던가.

 

아이와 지훈의 얼굴을 제외한 부분들은 이미 닳고 닳아 그 색을 잃은지가 오랜 모양이었다. 혹, 손이 닿으면 사진이 닳을까 얼굴 쯤의 허공을 더듬고 또 더듬었을 관린의 모습이 그려지자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무너지는 마음에 주먹으로 연신 가슴을 내려치는 지훈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관린과 지훈의 아이였다. 제 아비가 스스로를 해하는 모양새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그렇게 지훈을 위로했다. 부르튼 제 손 위로 얹어지는 희고 작은 손에 지훈의 움직임이 멈췄다.

 

유독 관린만을 닮아 내심 서운했던 아이였는데, 오늘만큼은 그 닮은 얼굴이 이리도 고마웠다. 그리운 이가 떠오르는 아이의 맑은 얼굴에 지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돌아온다면 웃으려고, 괜찬은 척 웃는 얼굴로 그리운 이를 반기려 지난 날들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소용이 없어졌다. 순수한 아이의 눈엔 슬퍼하는 아버지가 보였는 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깊게 생각하지 못하여도 지훈의 감정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 아버지의 곁에서 그 슬픔을 느끼고 있던 아이가, 제발 울리말라고. 슬퍼하지 말아달라 지훈을 달랬다. 어쩐지 그 손길이 어느 날의 관린을 떠올리게 했다.

 

관린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막혀있었다.

 

하늘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훈은 지금 차라리 하늘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박지훈이 되기를 자처해 전선으로 뛰어든 관린이었다. 받아온 몇통의 편지에서는 결코 비치지 않았던 관린의 진심이 적힌 마지막 편지에 지훈은 그렇게 무너졌다. 그립고 두려운 마음들이 혹시나 자신으로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할까 관린은 그렇게 그 마음들을 숨겼었다.

 

관린이 꿈 꾼다던 그 곳을 지훈 자신도 함께 꿈을 꾸었고 기다린다던 그 날도 지훈 역시 함께 꿈꾸었는데, 하늘은 또 한번 지훈에게 잔인했다.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훈의 속눈썹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당신이 조금만 덜 내 생각을 해주었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때 빗속을 거닐던 당신을 무시했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행복에 살고 있을까. 자꾸만 지나 온 날들을 돌이켜 후회를 했다. 막상 돌이킨다하더라도 또 다른 모습에서 후회했을 걸 알면서도.

 

편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다 힘 없이 바닥으로 떨궜다. 꾹꾹 참아내었을 관린이 보고싶었다. 알지 못했다. 그저 그리운 제 마음 하나만 돌보았기에 미처 알지 못했다. 아무리 닦아내어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 하나 알아채지 못한 제가 원망스러웠다. 멀리서 저와 아이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홀로 외로웠을 관린이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이더라도 사랑해주고 싶었고, 고맙다고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하며 품에 안기고 싶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에 가슴이 울렁였다. 관린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꽉 찬 머리가 아파왔다. 보고싶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한번만 더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고 싶었다.

 

지훈은 대답없는 관린을 불렀다. 아이는 가만히 지훈의 품에 안겨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지훈은 아이를 꼭 껴안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관린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누군가에게 한 없이 따스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었다.지훈은 한번 더 제가 사랑한 이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겨울이었고, 돌아오지 않는 밤이었다. 그토록 그리던 계절은, 다시금 시리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