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서 사랑으로의 발전가능성
w. 세월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태양이 시뻘갰다. 덩달아 내 얼굴도 터질 듯이 붉었다. 더는 못 참겠다 싶어서 빙수를 먹으러 갈 파티원을 모집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한 명 한 명 전화를 때렸다.

야 빙수 먹으러 갈래? 아니. 빙수 먹으러 갈 00이 구해요~ 안 가. 내가 사줄게, 제발 나와… 너무 더워서 못 나가겠다. 미안.

전부 다 거절당한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명에게 더 걸어봤다.

“여보세요?”

“지훈이랑 빙수 먹으러 갈 사람 구해요!!!”

“미안, 나 지금 알바 중이라…”

“아… 알겠어… 아무도 안 간대…”

“아무도? 걔도 안 간다고 그랬어?”

“어? 누구?”

“라이관린.”

“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걸었는데 마지막이 아니었다. 아직 진짜 마지막 사람이 남아있었다. 근데… 요새 좀 그런데. 왜 좀 그러냐고? 걔는 아닌데 나만 좀 그래.

라이관린이랑은 고등학교 때 만나서 같은 대학교를 왔다. 성적이 비슷비슷해서 그냥 거기 맞춰서 제일 갈만한 대학교를 지원했는데 둘 다 붙어버린 것이다. 고등학생들 답게 학창 시절에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지냈는데… 요새 그랬던 게 엄청 후회되고 걔랑 사소하게 장난쳤던 것들도 괜히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못 하겠더라. 그리고 걔 앞에서 일부러 더 알짱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걔한테 감정이 생기려 하는 거 같다. 그거다.

…사실 이미 생겼다.

이걸 인정하는 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자각하는 데에 오래 걸렸을 뿐이지. 한 번 자각하고 나니까 적당히 부정기를 거치다가 어느 순간 훅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더라. 자기 객관화가 적당히 된 인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걔한텐 연락 안 해?”

“어, 어. 해야지. 까먹고 있었는데 덕분에 기억났다. 땡큐.”

“그래 잘 다녀오고, 학교에서 봐.”

“그래.”

툭. 전화를 끊고 방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휴대폰 소리만 울렸다. 다녀오긴 어딜 다녀오냐… 어색해서 얼굴도 못 보겠는데. 근데 사실 막상 만나면 티 안 내려고 노력해서 그런지 별 티가 안 났다. 그래서 라이관린도 모르는 눈치였고 주변인들 아무도 몰랐다. 자기 자신만 숨기면 모두가 편했다. 그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래야 나도 편했다. 드러낸다고 해서 그게 다 좋게 돌아오는 감정 같은 건 없다는 걸. 살면서 깨달은 거라고는 그런 거밖에 없었다. 의도가 어쨌든, 내 맘이 어쨌든 간에 상대방이 느끼기에 그게 불쾌하거나 불편하면 그 관계는 쉽게 부서진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간단하게 부수기에는 내 감정이 너무도 하찮게 느껴졌다.

대충 흰 티에 츄리닝 바지를 챙겨 입고 슬리퍼를 끌며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 통에 가서 뒤적거리다가 고른 것은 쌍쌍바였다. 근데 혼자 먹는 쌍쌍바. 씨발, 왠지 처량했다. 내가 처량한 것 같기도 하고 몸통은 두 갠데 막대기는 하나인 이 녀석이 처량한 것 같기도 하고. 막대기 하나 줄였으면 가격도 줄여주지.

“10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을 까서 멍하니 쳐다봤다.

막대기 하나로는 턱 없이 부족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몸통이 너무 컸다. 마치 나 같았다. 내 마음은 너무나도 크고 명확한데, 그게 너무 크고 나만 아는 거라서 나 혼자서 버티면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게. 그게 스스로가 좀 불쌍했다.

띠링.

한 입 물며 발신자를 확인하니 라이관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엥? 재빨리 패턴을 풀어 내용을 봤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좆됐다. 이제 생각났다.

며칠 전 과제로 나온 것인데, 두 명이서 짝을 지어 데이트를 하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보고서로 써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느껴야 할 감상은 쉽게 말해서 그런 거였다.

친구끼리도 연애 감정이 싹틀 수 있는가.

그래서 교수님은 평소 본인이 보기에 나름 붙어 다니던 학생들을 파트너로 지정해줬다. 지정해버렸다.

어차피 늦은 김에, 그리고 옷차림도 후줄근한 김에 될 대로 돼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갈 때쯤 라이관린이 기다리고 있는 영화관 건물 앞에 도착해서 막대기는 귀찮은 맘에 아무 데나 던졌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막대기를 집어 들고선 내 손에 다시 쥐어줬다. 낯선 감각에 토끼눈을 뜨며 쳐다보니 녀석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교수 근처 옆자리에서 얘랑 밥 한 번 같이 먹었다는 이유로 파트너가 됐다. 그날 학식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너 약속 있는 거 까먹었지.”

“어? 아니. 정말 기억했는데. 진짜로.”

“구라 치네.”

“야 네가 구란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니 신발. 데이트 나간다는 사람이 슬리퍼 신고 오냐?”

“… 아.”

까먹은 거 맞다. 사실 문자 온 거 보고 생각났다.

“아무튼… 이건 왜 줍는데? 버린 거야.”

“쓰레기통에 버려.”

“허참, 진짜 고지식한 새끼.”

“야 너는 데이트 상대한테 새끼가 뭐냐, 새끼가? 이쁜 말 쓰도록 오늘 하루만이라도 노력해봐.”

“싫은데.”

“전 정말 슬픕니다, 박지훈 씨…”

“악 씨발 뒤질래?! 여기 소름 돋은 거 봐.”

“박지훈 씨께서 계속해서 욕설을 하신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아, 진짜 또라이새… 아니, …예. 라이관린 씨…”

“네. 지훈 씨.’

“…발.”

네가 그럼 그렇지, 툴툴대며 라이관린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영화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 손은 왜 잡는 건데? 이렇게까지 리얼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나만 지금 이상해?

“영화 뭐 볼 건데?”

“내가 다 생각해뒀어. 이거 두 장이요.”

“요오올~ 라이꽝린~~~ 웬일이세요?”

“슬리퍼 신고 오는 누구랑은 다르게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라.”

“아, 미안하다고! 새로 사서 신어? 어? 그러길 바라?”

“괜찮아. 다음번에 제대로 신고 나오면 되지.”

“어? 다음?”

-티켓 두 장 여기 있습니다.

방금 되게 자연스럽게 애프터 신청하지 않았나? 이거 데이트 한 번만 하고 작성해서 제출하는 거랬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생각하는 새에 정신 차려보니 이미 근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라이관린을 곁눈질로 훑었는데, …나한테 뭐라 해도 될 정도로 오늘 진짜 잘 빼입고 왔네. 할 말이 없었다. 운동화를 신고 왔어도 미안할 정도로 셔츠부터 슬랙스까지 깔쌈한 차림이었다. 나 만나러 오는데 뭐 저렇게 차려입고 왔대? 설마 나에게 착각이나 설렘을 주려는 생각이었다면 오산이다. 난 그 정도로 설레지 않는다고.

“지훈아,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 어. 그래…”

근데 뭐 방금 눈 마주친 건 좀 설렜던 것 같기도.

혼자서 괜히 애꿎은 폰만 만지작대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박지훈?”

몇 년 전 잠깐 만났던 전 애인이었다.

내가 이별을 통보받고 존나게 힘들어했던.

왜 보기 싫은 광경은 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눈 앞에 비치는 걸까. 특히나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그랬다. 견딜만하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견뎌보라는 듯이. 그러니까, 지금 내 눈 앞에 이것처럼. 이제 좀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오랜만이다, 지훈아.”

“……”

“왜 말이 없어. 무안하게.”

“우리가 이렇게 얼굴 보고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아?”

내 말에 전 애인이 웃었다. 쌍꺼풀 없는 눈이 샐쭉 휘어진다. 한때는 저 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럽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쟤 눈에 욕심이 저렇게 많이 담겼었나. 마주하는 것조차 싫고 버겁게 느껴져서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말했다.

“가던 길 가.”

“가던 길 없어. 요새는 뭐 상영하나 보러 왔는데 너 있길래 너 보러 온 거야.”

“미쳤어? 빨리 꺼지라고.”

“박지훈.”

전 애인 뒤로 라이관린이 서있었다. 나는 걔가 보이자마자 옆에 달려가서 숨었다.

“싫다잖아요. 누구신데 자꾸 말 거세요.”

“얜 또 누구야. 박지훈 너 새 남자 생긴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그렇다 쳐도 너랑 상관없잖아.”

“그런 게 아니면 누군데?”

“친구야.”

“친구 아닌데요.”

휙 고개를 들어 라이관린을 쳐다봤다. 어딘지 분위기가 싸하게 내려앉은 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남자 친군데요.”

“네?”

“제가. 지훈이, 남자 친구라고요.”

“방금 지훈이가 친구라고,”

“그러니까 꺼지시라고. 말귀 못 알아들어?”

.
.
.

상영관에 들어가서 앉기까지도 라이관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옆에서 계속해서 눈치만 봤다. 이게 뭐야… 그 새끼 때문에 데이트도 망치고. 아니,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과제를 위한… 만남? 만남도 망치고. 기껏 시간 내준 라이관린한테도 미안하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다. 반대로 고마워서도.

“아까 그 사람.”

“어어?”

“누구야.”

“아… 그, 왜, 내가 전에 말한 적 있나? 전 남자 친구.”

“아, 그 새끼. 알고 보니 바람피운 거였다며.”

“어. 근데 너 화났어…?”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그럼 다행이고…”

“……”

“……”

“…박지훈.”

“응?”

“아까 왜 친구라고 했어?”

“어? 아니… 그럼 뭐라고 해?”

“거짓말로라도 애인이라고 하면 그 새끼 그냥 갈 거 아냐.”

“에이,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냐… 그냥 친군데.”

“너한테 나는 그냥 친구야?”

그렇게 말하는 라이관린 눈이 너무도 선명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어서, 나는…

“그럼…?”

무어라 확실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걔한테 대답을 떠넘겨버렸다.

“…박지훈, 실망이다. 나는 너랑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한텐 그냥 친구였나 보네.”

“…뭐라는 거야. 영화 시작한다. 영화나 봐.”

상영관 불빛이 꺼졌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마침 꺼져서. 안 그랬으면 다 보였을 것 같아서. 그럼 내가 더는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빨갛게 익은 얼굴도, 투명해진 내 마음도.

.
.
.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까 할 게 없었다. 친구로 지내면서 안 해본 게 없는데, 데이트라고 하니까 뭔가 새로운 걸 해야 할 것만 같이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건 이게 고작이었다.

“빙수 먹으러 갈래?”

.
.
.

알아서 주문하겠다며 나를 자리에 앉혀둔 라이관린은 카운터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메뉴를 시켰다. 멀리 있어서 입모양이 잘 안보였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고민도 안 하고 시키는 거지? 항상 만날 때마다 결정 장애인 라이관린 대신 내가 주문을 도맡아서 했던 터라 혹시 이상한 빙수를 고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뚱시뚱시 자존심이 있지, 맛없는 빙수는 먹을 수 없다. 맛없으면 너 혼자 먹어라. 메롱.

“어?”

“왜?”

“이거 이 카페 비밀 메뉸데, 어떻게 시켰어?”

“뭘, 새삼스럽게.”

묻는 질문에 대답은커녕 빙수만 푹 뜨는 라이관린이었다.

“아 어떻게 알았냐니까? 주문도 안 해본 애가.”

“네가 맨날 이거만 먹었잖아.”

“…”

“그렇게 주구장창 이거만 시키는데 안 봐도 외우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가로 스푼을 옮기며 아, 하는 라이관린 때문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도망치듯 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도착해서 거울을 보니 더 그랬다. 이렇게 붉어진 얼굴로 어떻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절대 못해. 대체 오늘 왜 저러는 거야. 평소랑 미묘하게 다른 라이관린 때문에 신경 쓰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동안 다른 애인들한테 저렇게 해줬겠지, 질투도 존나 났다. 내가 걔한테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감정싸움하는 게 지치지도 않나 보다. 자각하고 나면 줄어들긴커녕 자꾸만 부풀어버려서 걷잡을 수가 없었다.

.
.
.

“어디 아파? 오래 걸렸네.”

“아니 괜찮아…”

“왜 기운이 없어?”

“너 왜 평소랑 말이 다르냐… 평소 같았으면 똥 싸고 왔냐? 개 늦어. 이랬을 애가 돌려 말하니까 기분 이상하잖아.”

“오늘 내 데이트 상대라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괜찮다고 생각했던 게 갑자기 울컥했다. 살면서 종종 겪는 순간들이 있다. 애써 피해가려고 해도 그 노력들은 감정이라는 이름 앞에 이성으로써 처절히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뭉개지는 것 같았다. 그걸 숨기려고 더 날카로운 척해대는 것도 모르고.

“원래 그래?”

“뭐가?”

“원래 그렇게, 니 데이트 상대라면 다 그러냐고.”

다리를 꼬고 빙수를 먹던 라이관린은 가시 돋친 말에 자세를 고쳐 앉고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냐며 타이르는 눈빛이어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쪽팔렸다. 그동안 잘 숨겨오던 걸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거에 뾰족하게 표출해버린 게. 스스로가 싫은 순간이었다.

“지훈아, 오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그럼 진짜로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안 아파.”

“이상하네. 내가 아는 지훈이는 이유 없이 화낼 애가 아닌데.”

“…그리고, 평소엔 지훈이라고 하지도 않잖아.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는데? 이질감 느껴져.”

“그래, 박지훈.”

“……”

“나 오늘 너한테 최대한 잘 보이려고 엄청 열심히 노력하는 중인데 니 눈에는 안 보이나 보다?”

“……”

“그렇게 무턱대고 화부터 내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나도 모르겠거든. 이유가 말하기 싫은 거면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나 때문에 그런 거면 계속 같이 있어봤자 좋은 꼴 못 볼 거 아냐. 나 이대로 집에 갈까?”

“……”

“대답해주면 좋겠는데. 나 그냥 가?”

눈 딱 한 번만 감고.

“가지 마.”

한 번만 욕심부려보면 뭐가 달라지나.

“알겠어.”

그냥 그게 궁금해서.

.
.
.

카페에서 나오니 8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여름에는 해가 느리게 진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7시면 어둑해졌는데 아직도 채 다 숨지 못 한 태양이 건물 너머로 지는 중이었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해가 뜰 것 같지 않아도 아침은 반드시 오리라는 걸 누구든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일상은 반복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얽힌 복잡한 감정선들을 라이관린과 풀어내야 했다. 앞으로 더 긴 미래를 보기 위해서.

“…야.”

“왜.”

“야아아…”

“왜.”

“이 자식아.”

“그래.”

“관린아.”

그래서 겁쟁이 박지훈은 알코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라이관린이 피식 웃었다.

“넌 술만 들어가면 내 이름 부르더라. 성 안 붙이고.”

“그래. 관린아…”

“왜 맨 정신으로는 안 불러줘?”

붉어진 뺨을 하고서 녀석을 봤다.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나를 살짝 올려다보고 있었다. 짜식이 앉은키는 작아가지고. 귀엽게.

“…귀엽다, 너.”

“갑자기? 박지훈 제대로 취했네.”

“아냐… 넌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까리하게 흔드니까 라이관린이 빵 터졌다. 입 안으로 보이는 밥알들이 동글동글… 역시 귀여운 자식. 쟤는 잘 취하지도 않아서 낯빛도 멀쩡하다. 나만 빨개. 항상 나만 붉다.

“왜 너 이름 취하면 부르냐고?”

“응. 평소엔 라이관린 라이관린 하잖아.”

“그거는… 비밀인데.”

“열쇠 값은 뭔데?”

열쇠 값… 옛날 생각난다. 내가 항상 비밀이라고 하면 관린이가 하도 알려달라고 떼를 써서(순전히 박지훈의 시각으로 해석된 기억이다) 열쇠 값으로 과자 사달라 하면 과자 사주고, 아이스크림 사달라 하면 아이스크림 사주던 관린이… 진짜 뭐든 다 들어줬었는데… 나 업어주기까지 했지. 근데 나 진짜로 받고 싶었던 건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술도 마셨고, 빨갛게 해도 지고 있고, 눈 앞의 남자는 너무 이쁘고. 그래서 그랬나.

“뽀뽀.”

“…”

“야,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긴… 여기서 뽀뽀를 어떻게 하니~ 볼에라도 해 주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어?”

민망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팔이 아래로 잡아 끌렸는데 볼에 뭔가 통통한 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빨리 말해. 비밀.”

“너 방금 진짜 했냐?”

“그럼 가짜로 했냐?”

“와, 와…. 어우야, 술이 확 깨네.”

“미친… 정신 차리고 이유나 말해.”

“너 괜히 부끄러우니까 욕하는 거지? 오구! 부끄러워쪄요 우리 관린이?”

“아 진짜, 뭐하는데! 말해준다며!”

“어? 너 취했냐? 얼굴이…”

빨간데.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돼, 나.

“너 이름을 부르면 너무 커질까 봐. 들킬 거 같았어.”

“무슨 소리야 그게. 정확히 말해 봐.”

“내 마음이.”

“…”

술은 아까 전에 뽀뽀로 다 깼다. 노을 때문인지, 눈 앞의 남자가 너무 이뻐서 거기에 취한 건지. 취한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취소라고 외치면 장난처럼 다시 웃으며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라이관린도 나랑 같은 마음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라는 게 무서운 거였다.

너무 시시각각 변해서.

내가 멋대로 해석하기가 너무 쉬워서.

“지훈아.”

“…그래서 일부러 이름 정이라도 떼려고, 라이관린, 라이관린, 했는데.”

“박지훈.”

“나 술에 약한 거 알잖아. 그래서 술 들어가면 내가 졌나 봐. 그래서 매번 너 이름 불렀나 봐.”

“그만해.”

“…왜 그만해. 너가 뭔데 그만하라고 해.”

“그런 게 아니야. 지훈아,”

“그래 알아. 너한텐 이런 내 맘이 부담스럽겠지.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하고 조건도 뽀뽀라는 무리수 뒀는데 니가 한 거잖아. 근데 왜 그만하라고 그러는데!”

서러웠다. 네 앞에만 서면 나는 자꾸 어린애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나이가 몇 갠데, 자꾸 애처럼 굴게 됐다. 사랑하면 애라더니 진짜 그 말이 맞았나 보다. 나는 너한테 어린애였다. 그렇다고 내 마음 책임지라고 엉엉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에는 좀 더 커버린 아이였다. 책임을 전가할 양심의 나이마저 내 멋대로 되지 않는 탓이다.

울먹이며 자신을 쏘아보는 나를 보고는 라이관린이 어깨를 감싸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내일 술 깨면 다시 얘기해. 응?”

“나 안 취했어. 다 깼어.”

“얼굴이 빨간데 무슨 소리야. 너 취했어.”

“이건!!!”

“…깜짝이야, 그건?”

“…이건 너 때문에 빨개진 거고 이 멍청아!!”

“아니, 왜 나 때문에?”

“내가!!! 너 좋아하니까!!! 씨발!!!”

헙.

황급히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라이관린이 눈에 띄게 굳은 게 느껴졌다. 육안으로도 다 보였다. 라이관린이 팔을 들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해는 이미 넘어간 지 한참이었다. 돌이킬 타이밍은 한참 전에 놓쳤다는 소리다.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좆됐다.

“하아…”

라이관린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진짜 끝이다. 내가, 내가 다 망쳤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 그럼 내일부터…”

“야 잠깐,”

“내일부터 얼굴 못 봐?”

“뭐?”

얼굴에서 손을 치운 라이관린은 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관린 얼굴이 너무 빨개서. 쟤는 한국인도 아니면서 홍익인간인가 왜 저렇게 불그죽죽해. 설마 화났나?

“뭐라는 거야, 너. 얼굴을 왜 못 봐?”

“…너 내가 그런 말 해서 부담스러워진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무슨… 야 나는 너가… 아니, 됐다.”

“뭐야. 끝까지 말해. 내가 뭐.”

“나는 너가, 아 씨… 오늘부터 라길래 1일이냐고 하는 줄 알았다고!”

“뭐라고?!”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다. 대체 저게 뭔 소리야?

“너 취했냐?”

“이건 지가 먼저 고백해놓고 왜 오리발 빼?”

“아니 그건 맞는데 너 나 안 좋아하잖아.”

“옛날부터 좋아하면 어쩔 건데.”

“말도 안 돼…”

“말 되게 해줄까? 그냥 다 없던 일로 하고?”

“아니 아니! 그럼 왜 아깐 그만 말하라고 한 건데?”

“너 진짜로 취한 거 같아서 내일 각 잡고 다시 얘기하려고 했지.”

“와.”

꿈이라고 해도 좀 행복할 것 같다. 이런 꿈이라면 깨고 나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부정적인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지훈아.”

“응?”

“많이 늦었지만, 나랑 연애할래?”

“으허엉, 끅! 관린아… 윽, 좋아…”

페인트 냄새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술병 옆에 두고 받은 고백이라기엔 오지게 좋았다. 내가 운 것만 빼면.

.
.
.

[우정에서 사랑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하여]

박지훈

한쪽의 감정이 변하는 것 까지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양쪽의 감정이 모두 같아지는 일은 아주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각각 따로 보면 한 사람이긴 하지만 둘을 같이 두고 봐야 우정이라는 카테고리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과제를 통해 깨달은 것은 그동안 제가 살면서 구축해온 가치관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의 저는 주제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이었으나 데이트를 마치고 나서는 낙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가능하다입니다. 저는 이번 데이트에서 파트너와 첫 번째 활동으로 영화를 보고 (중략) 인간의 감정은 멈춰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 라는 말도 있죠. 흘러넘치는 감정을 동사로 정의할 수는 없듯이 우정에서 사랑으로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기에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