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지난 계절과의 시리즈 연재입니다.

지난 계절 보러가기 

 

 

유리 사이 그 높은 벽을
w. 라시솔

 

 
 

날은 더웠다. 몇 달포 전까지만 해도 얼어 죽을 것을 걱정하던 이들은 이제 말라죽을 것을 염려했다. 가만 서 있는 것뿐이라도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다. 지나가는 바람의 한 조각이 어찌나 달던지. 백성들은 저마다 손바닥보다도 큰 이파리를 들고 힘껏 부쳐댔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부끄럼도 잊고 저마다의 손발을 냇가에 담갔다. 볕에 닿아 부서지는 빛무리가 청량하도록 찼다. 그리 몸을 적시고도 돌아서면 금세 더웠다. 습기와 더위를 머금은 바람에게 한 번이라도 휩싸인다면 당장에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모두 뜨거웠다. 그늘이라도 만들지 않는다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덥고 더운 날씨 덕에 과일만은 달게 익었다. 내리쬐는 볕은 그 과육을 단단히 하고 다디단 과즙을 채웠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모두는 그 더위를 저주했으리라. 그들의 왕이자 제사장인 어린 린을 통해서.

 

린과 그의 신인 훈이 머무는 궁이라 하더라도 더위에 빗겨가지는 않았다. 훈은 제가 만들어낸 더위임에도 소매를 동동 걷어 선이 고운 손목을 그대로 내보였다. 간혹 팔을 높이 들어 넓은 소매가 팔꿈치께 까지 후루룩 올라갈 때면 린은 눈을 돌렸다. 꽃 색으로 물든 그 팔꿈치는 요상스러웠다. 훈의 냄새는 달고 따스하지만 덥지 않았다. 훈은 그 누구보다도 가볍게 걷고 모든 움직임으로 춤추었다. 훈의 입에 담기는 린의 이름은 조금 다른 울림이었다. 그것은… 요상스러운 일이었다.

 

“린아.”

“예.”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훈은 더위에 지친 린의 몸 이곳저곳에 찬기를 휘감으며 물었다. 그 찬 바람조각은 훈만큼이나 달았다. 훈이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 한다면 또 그러하지만.

 

“당신은 제 신이시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또?”

“제 마음은 제 것이 아님을 아시면서도요.”

“내 죽기 전에 네 맘이 네 손아귀에 들어서는 것은 보아야 할 터인데.”

 

침대 위로 드러누우며 훈은 볼멘소리였다. 린은 솜털이 보송한 복숭아를 들고 가만 다가가 훈의 옆에 자리해 앉았다. 눈을 감은 훈은 어여뻤다. 어여쁘다는 말보다도 그랬다. 별을 닮은 눈동자를 숨긴 그 눈꺼풀마저도 꽃잎 같았다. 고운 아미로 드리운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손을 뻗자 훈의 눈이 드러났다. 린은 움찔해 물러났다.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말랑한 복숭아를 만지작대며 입을 열었다.

 

“어디 멀리 떠나시는 분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날 그리워해 줄 테야?”

 

린은 답하지 않았다. 사실, 훈도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훈은 손을 뻗어 린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린은 훈의 손을 알면서도 모른 척, 복숭아의 얇은 껍질을 벗겨냈다. 그 안에 들어찬 끈끈한 과육이 조금씩 드러났다. 훈은 애써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린을 다 알았다. 일부러 더 손을 떼지 않은 것은 저를 모른 체 하는 린이 얄미웠던 탓도 있었다. 살결이 부드러워진 것도 확실하고 조금의 살이 오른 것도 틀림없었다. 이 아이를 살찌우기란 어찌 이리 힘든 일인지. 린은 복숭아의 껍질을 모두 벗겨낼 때까지도 제 얼굴에 닿은 훈의 손을 물리지 않았다.

 

“잠시 천계에 가야겠다. 내게는 찰나라도 네게는 찰나가 아닐 터라 기다림이 길 수는 있으나… 얌전히 잘 있을 수 있겠느냐?”

“훈이 없었던 그 오랜 겨울도 기다렸습니다.”

“이 녀석아.”

 

훈은 린의 얼굴을 끌어당겨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갑작스러운 닿음에 린은 귀 끝까지 모두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손 안의 과육이 조금 뭉개졌다. 린은 작은 과도로 복숭아를 잘라내 훈에게 건넸다. 훈은 린의 손 안에 들린 끈적한 과일을 입에 넣었다. 훈의 입술 사이로 린의 손가락이 물렸다가 빠져나왔다. 아까보다도 더 붉어진 얼굴을 하고, 린은 복숭아를 한 조각 더 잘라 제 입에 넣어 우물댔다.

 

“부끄럽니?”

“물으심에 더 그렇습니다.”

“내가 몹시 그립겠지.”

 

린은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도. 훈은 제가 먼저 말했다. 내가 몹시 그리울 테야. 암, 그렇고말고. 그렇다 해도 울어서는 안 돼, 너는 왕이잖니. 네 백성들의 이끄는 이잖니? 그러니 울지 말고 가만히 잘 기다리렴. 나의 착한 아이야.

 

“아이가 아닙니다.”

“내 눈에는 팔십의 할아범도 아이란다.”

 

훈은 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린은 고개를 조금 숙여 훈이 편히 쓰다듬을 수 있게끔 도왔다.

 

 

-*-

 

신이 직접 키워낸 꽃나무는 잘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크더니 이제는 린의 품에도 모두 안기지 않았다. 훈은 그 앞에 섰다. 나무는 훈의 앞에 머물기 위해 자라난 것인 듯 그와 어울렸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즉 지지 않은 훈의 꽃은 그 아리따운 자태를 뽐냈다. 훈은 나무의 기둥에 선명한 결을 쓰담으며 말했다.

 

“린아. 너는 네가 누구에게 속한 이라고 생각하니?”

“제 사람들에게 속하여 있다 생각합니다.”

“네 어미는 사람들을 위하여 너를 바친 게 아니지 않느냐?”

“신을 위함이 곧 사람들을 위함이 아닙니까.”

 

훈은 린에게로 돌아 서 나무에 기대었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린의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훈의 대신에 쓰담기라도 하는 듯이.

 

“신과 사람은 달라. 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지. 네 어미가 바랐던 대로. 내가 바랐던 대로.”

“훈이 저를 바라셨습니까?”

“이해가 빠른 아이는 좋아한단다.”

 

린은 눈썹을 찡그렸다. 훈은 린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단 웃음이었다. 늘 맡아도 늘 새로운 풀꽃 향이 터지듯 퍼졌다. 뜨거운 바람의 등에 타 멀고 먼 곳까지 향했다.

 

“린아. 너는 내 아이야. 그렇게 되어 있지.”

“허나…”

“하지만, 그래. 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나도 알고 있어.”

 

훈은 동그란 손끝을 흔들어 린의 머리며 어깨 위로 몇 개의 꽃잎을 더 떨어트렸다. 린은 제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의 무게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나를 그리워 해 주겠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를 그리워 할 때마다 비가 내리게 할 작정이다. 조심하렴, 까딱하면 이 모든 땅이 물로 뒤덮여 버릴 수 있으니.”

 

짐짓 엄한 얼굴을 하고서 말하는 것이 꽤 진지해 보여서, 그리고 그것이 참말일 듯 해서. 린은 작게 웃었다.

 

“전혀 농 같지 않음을 아십니까?”

“너도 내가 널 그만치나 그리워 한다는 걸 알기는 아는구나!”

 

훈은 정말로 놀란 눈을 하고 웃었다. 또다시 풀꽃이 피었다. 머리가 다 어찔했다. 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었다. 몇 걸음 다가와 린의 앞에 선 훈은 린의 쇄골 밑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날 기다려.”

 

휙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휘돌았다. 분홍의 바람이 눈앞을 가렸다.

눈을 뜬 순간, 훈은 온데간데없었다.

 

 

 

과연 비가 왔다. 처음의 나흘은 내도록 비가 왔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정말로 비가 오니 요상한 기분이었다. 덥고 더웠던 땅과 작물들은 때 마침의 비를 달게 마셨다. 훈은 저를 기다리라 말했지만 어째 그다지 혼자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린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빗물에 저도 모르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 기쁨을 깨닫기도 전 하늘은 개었다. 내내 비가 오는 것보다야 오지 않는 것이 농번기의 모두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분명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린은 조금 요상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볕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모든 땅의 물웅덩이를 말렸다.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나이다.

 

 

린은 모든 가구를 하나하나 살폈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으나 그리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얼마 전의 비를 단비라고 말했다. 그리고 린에게도 그것은 단비였다. 온 세상을 뒤덮을 만치 내리게 하겠노라 하던 훈의 엄포는 다 무엇이었는지. 땅은 여전히 맑았다.

 

 

가지고 싶은 아이가 생겼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왕이자 제사장은 퍽 힘든 일이었다. 늘 웃어보여야 하며 약해서는 안 된다. 린의 약점은 곧 모두의 약점. 린은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제 감정에 둔한 법. 린은 농번기를 위해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왕의 마음과 당장이라도 숨 쉴 틈 없이 쏟아졌으면 하는 훈의 마음으로 뒤섞여 온통 흐렸다. 여전히, 야속하게도. 하늘은 더없이 투명했다.

 

 

그 자신보다도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다정한 아이입니다.

 

 

늘 린의 곁에 머물던 훈은 확실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분께서는 오지 않으셨습니까? 어디 아프신 거랍니까?’ 의 그 분이 누구인지 너무나 명백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린은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그 분홍의 분이오.’ 물은 이는 답답한 듯 보였으나 린은 그저 미소할 뿐이었다. 훈의 이름은 오로지 린만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훈을 알면서도 알지 못했다. 린과 훈이 그것을 바랐으니, 그리 됨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를 부릴 수 있는 강함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강제하지 않는 상냥한 아이입니다.

 

 

보상 없는 책임이란 고된 일이다. 농사가 덜 되어도 제 탓, 해가 너무 내리쬐어도 제 탓, 홍수가 나도 제 탓. 린은 그것을 모두 감당할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제 책임이 아닌 일까지 모두 제 탓으로 돌려 원망할 구석이 되는 일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속내부터 꽉 차게 단단한 사람, 그렇게 길러진 아이. 사람들은 린을 잘 알았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했다. 모두를 돌아보며 제 옆을 지키는 이들 조차도 린의 깊숙한 곳까지는 알지 못했다. 미미하게 풍기는 들꽃 향을 맡으며 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누구도.

 

 

무엇보다도, 제가 그를 사랑하며.

 

 

비가 그친 후 다시 엿새. 소낙비도 아닌 이슬비가 내렸다. 내도록 비를 기다리던 것과는 반대로, 린은 그 비가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내리기만 한다면 족하다 여기던 때와는 다른 마음이 우스웠다. 온 몸으로 맞아도 족할 여린 비였으나 부디 제 집의 처마에서 비를 피하여 주시라는 부탁에 그네의 집으로 들었다. 머리 위를 덮은 처마의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집주인은 차를 낸다, 과일을 깎는다, 야단이었다. 린의 흰 손 가득 빗방울이 앉았다. 그 부드러운 물에서 꽃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주먹 쥔 젖은 손을 들어 향을 맡았다. 비, 그리고 꽃.

 

 

그가 저를 사랑합니다.

 

 

이슬비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쳤다. 린은 이내 그의 작은 궁으로 돌아왔다. 극구 사양에도 약초꾼 김 씨가 굳이 안겨 준 술병을 탁자 위에 올리고 침상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피로했다. 훈이 없는 만큼 다른 사람을 만나려 애쓴 것인가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비가 와도 요상했고 비가 오지 않아도 요상했다. 다른 것은 다 알 수 없었어도 그것이 훈의 탓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흰 술병과 작은 잔을 들어 창가에 앉았다.

 

보름에 가까운, 배가 부른 달이 뜬 밤이었다. 비가 왔던 덕에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린은 술잔에 가득하도록 술을 따랐다. 맑은 소리와 맑은 액체가 차올랐다. 가만 들여다보는 잔 안의 달이 꼭 꽃잎 같았다. 꽃잎은 꼭 훈 같았다.

 

린은 훈을 마셨다. 꽃잎을 마셨다. 다시금 잔을 채웠다. 잔 안으로 또다시 꽃잎이 떠올랐다. 술의 가장 바깥 면만을 떼어내 한 모금. 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한 모금, 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린은 잔의 바닥에 깔린 달을 모두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본디 술은 맑을수록 독하다 했다. 린의 약주는 물만치나 맑았다. 술은 린의 목을 태우고 속을 데웠다. 연거푸 들이킨 석 잔만으로도 금세 열이 올랐다. 자꾸만 떠오르는 달이 야속했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이 미웠다. 달이 보이지 않았으면, 숨을 다 밀어내 버릴 정도로 몹시 비가 왔으면. 다시 잔에 달을 따랐다.

 

 

시선의 끝을 창 너머로 돌렸다. 흐르는 바람에 비춘 달빛이 일렁였다. 해만치는 아니더라도, 밤 치고는 밝은 어둠이었다. 다 져 버린 꽃들의 자리는 푸르른 녹음이 대신했다. 단 한 군데, 훈이 직접 피워낸 꽃나무 이외에는.

 

그러고 보니 그동안은 훈의 나무에 가지 않았었다. 훈이 없으니 그의 나무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리라는, 그런 알량한 마음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붉어진 얼굴의 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버석한 땅바닥을 밟자마자 더운 바람이 온 몸을 감아 돌았다. 이렇게나 깊은 밤에도 여전히 더웠다. 술기운을 덧씌웠으나 여전히 단정한 걸음으로 린은 꽃나무의 앞에 섰다. 나무는 린을 위로하는 것처럼, 린의 어깨 위로 꽃잎을 하나 드리웠다. 그 여린 꽃잎 한 장의 무게가 어찌나 중하던지. 린은 제 아름보다도 큰 나무에 등을 기댔다. 나무는 꼭 체온을 닮은 온도였다. 바람은 자꾸만 달빛을 흔들었다. 하다 하다 헛것까지 보였다. 술에 취해서인지, 달에 홀려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하여간 헛것이었다. 그리던 이를 보여 꼬드기려는 삿된 것의 속셈임에 틀림없었다.

 

“다녀왔어.”

 

이런, 말까지. 린은 어지러운 머리를 기울였다. 훈은 어여쁜 분홍의 옷을 걸치고, 그가 떠나간 열흘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훈은 살짝 웃었다. 그렇게나 그리워했으나 그 어떤 풀꽃의 향과도 같지 않았던 그의 내음이 터졌다. 진짜의 훈인가. 취기로 막힌 머리의 사고는 느렸다.

 

“나를 그리워했니?”

“비가 오는 날보다 많이요.”

덥고 습해 무거운 공기가 린을 휘감았다. 훈에게로 다가가겠다 생각도 하기 전부터 멋대로 다리가 움직였다. 훈은 제대로 곧장 다가오는 린이 조금 놀라운 눈치였다. 린은 성큼 걸어 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 몸을 답싹 안았다.

 

“린아?”

“그리워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코끝에 머무는 모든 꽃의 향이 훈 같아서, 비추는 모든 상이 다 꽃 같아서, 그래서 괴로웠습니다.”

“어째 내가 없는 동안 마음을 찾은 모양이구나.”

 

훈은 제게 안겨버린 린의 등을 도닥였다. 린은 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고 있는 그 단 향이 났다. 익숙한 그 꽃 향이 났다. 그리웠던 훈의 향이 났다. 훈은 린의 숨이 골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야 린은 얼굴을 뗐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았어요.”

“그랬니? 그래도 꽤 내렸다 생각했는데.”

 

“매일, 매 시간. 그치지 않고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랬다간 네 백성들이 곤란하지 않느냐.”

 

훈이 없던 평생보다 훈과 함께 있었던 몇 달포가 더 무거웠다. 훈은 빙긋 웃었다. 꽃 향이 퍼지듯 터졌다. 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부정의 의미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좋다는 의미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훈이 저보다도 제 백성에 마음을 쓰는 것이 어째 심통이 났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꾸 비뚤게 생각이 들었다. 아주 복잡한 기분이었다.

 

둘의 눈이 아주 가까이서 닿았다. 린은 귀가 모두 붉어지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다. 훈은 린의 손을 찾아 잡았다. 잘게 떨리는 손의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바람 한 점 없이 꽃잎은 휘돌아 떨어졌다.

 

 

-*-

 

 

어째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그리던 이를 꾸는 꿈이라니 지독했다. 아니, 그것은 정말 꿈이었나? 취한 자의 주정이었나? 길게 숨을 내쉬며 몽롱하게 덜 깬 눈을 부볐다. 초점이 흐릿한 시선에 닿은 것이 정말 훈인가 생각했다.

 

“어제는 솔직하고 귀엽더니, 오늘은 다시 매끈한 얼굴을 하고는.”

 

눈앞에는 훈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가장 안심이었다. 린은 씩 웃으며 훈을 끌어당겨 안았다. 잠에서 막 깨난 이의 더운 체온이 훈에게로 와락 스며들었다. 훈은 말없이 린의 등을 토닥였다. 철이 난 이후의 첫 어리광이니 얼마든지 받아줄 만도 하지 않은가.

 

훈은 린의 뺨에 손을 얹었다. 린은 고개를 숙여 훈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비슷한 따스함이 맞닿았다. 그것이 우습고, 즐겁고, 그립고, 슬프고, 부드럽고, 좋았다. 훈은 고개를 들어 린의 입술에 입 맞췄다. 린은 훈을 더 세게 안았다.

 

혼자가 아니던 날들로부터 혼자 된 날이 얼마나 지났다고.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어찌나 위로인지. 린은 훈의 손을 꼭 잡고 뒤뜰로 나서며 종알거렸다.

 

“제가 그립지도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비가 오질 않던데요.”

“기다린 모양이구나?”

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을 덜어내니 본 나이에 맞는 어린 얼굴이 어찌 이리 귀여워. 훈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얼마나 내릴 것이라 여겼느냐?”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을 바랐습니다.”

 

“내가 없던 것은 열흘이 아니냐?”

“그만치도 내리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한번 없던 것으로 이렇게나 어리광이 는다면 가끔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더군다나 천계의 하루는 지상의 하루가 아닌가. 린이 알았다간 기함을 했을 상상을 하며 훈은 소리 내 웃었다. 린이 알았던 그 향이 퍼졌다.

 

“네가 나를 그리워 할 것이 뻔 해 이리 선물도 두고 갔건만 알아채지 못한 것은 또 무어냐?”

 

큰 가지 위로 손을 뻗었다. 새빨간 띠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퍽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간 꽃나무에게 한 번이라도 걸음 했다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여겨질 만큼. 린은 뒷목을 긁적였다. 당신이 없는 나무에 혼자 가서 무슨 소용이랍니까.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훈은 손을 뻗어 띠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틈에 끼워져 있던 깃털이며 가지도 함께.

 

흰 깃털을 받아들었다. 몽글한 구름의 냄새가 났다.

작은 가지를 받아들었다. 부드러운 나무의 냄새가 났다.

분홍빛 띠를 받아들었다. 포근한 들꽃의 냄새가 났다.

 

훈은 손을 뻗었다. 린은 그 손을 잡았다.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