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지난 계절과의 시리즈 연재입니다.

지난 계절 보러가기 

 

 

 

우리는 자라 어른이 되겠지만
w. 포인

 

 

다음 날이 없을 것 같은 하루를 산 적이 있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주어진 내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그땐 아직 내 병에 대해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 전이었고, 하루종일 내 옆에서 우는 엄마와, 걱정으로 한숨만 쉬는 아빠 때문에 나조차도 나의 생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결국, 내 병이 흔한 병은 아니지만, 완치가 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자마자 우리 가족에게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평화일 뿐, 실제 내게 찾아온 것은 다시 지루한 일상이었다. 나는 관상식물처럼 그저 보기에 좋게 그리고 정해진 일조량과 수분을 받으며 자라나는 중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른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   리   는

자         라

어   른   이

되 겠 지 만

 

 

 

 

교복 소매가 짧아진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쌀쌀한 날씨가 길어져 이번 여름은 그리 덥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름은 지독하게도 바닥에 흩뿌려졌다. 숨을 헉헉거리는 날들이 많아지고, 이마엔 언제나 땀을 달고 사는 계절이었다.

 

이 시골 학교에도 아이들 손에는 저마다 핸디 선풍기 하나씩을 쥐고 있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라이관린은 더워 죽으려고 하는 내 얼굴에 제 선풍기를 가져다 대며 아까부터 내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이 빨갛게 익었다며 놀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할 기운을 잃은 상태라 대충 고개만 주억거리며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유독 여름에 취약한 나는 여름만 되면 책상과 하나가 되거나 침대와 하나가 되거나 아무튼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상이었다. 그래도 에어컨이 빵빵한 학교에선 나름 살만한데 집에만 가면 눅진한 공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해 차라리 한동안은 학교에서 살았으면 싶기도 했다. 하필이면 뉴스에서도 폭염 때문에 매일 같이 더위 조심하라고 하는 이 판국에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우리 집은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며칠을 사는 중인 탓이었다.

 

“아줌마 에어컨은 언제 고치신대?”

“어저께 아저씨 왔다 갔는데 고치는 거보다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새로 산대. 근데 수리 아저씨 부르는 것도 귀찮아서 한참 뒤에 한 사람이 새 에어컨은 또 언제 사겠어.”

“더워서 어떡하냐.”

“그러니까. 더워서 어떡하냐아, 진짜.”

 

밖에 나가기만 하면 진득하게 달라붙는 옷이나 앞머리 같은 것들이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눅진한 공기와는 달리 더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신경은 되려 예민해져서 애먼 사람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하게 되는 날씨기도 하다. 어저께만 해도 엄마에게 도대체 에어컨은 언제 고칠 거냐며 짜증을 부리질 않나, 나 덥지 말라고 자기 선풍기까지 내어주는 애한테 귀찮다고 대충대충 말하질 않나. 아무튼, 여름 이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아니면 형 우리 집에서 잘래?”

“뭐?”

“아줌마한테 말하고 그냥 잠만 우리 집에서 자면 안 되나?”

 

아빠가 자기 전까지 에어컨 틀어줘서 우리 집은 저녁에도 시원해. 라이관린은 어느새 나와 같이 책상에 엎드려 기댄 채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팔에 얼굴을 부빗거리며 나직하게 ‘누구 놀리냐’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수업이 시작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라이관린은 제 선풍기를 내 손에 쥐여주며 ‘그럼 나중에 봐’라는 말을 남기고선 제 반으로 올라갔다. 내게 남겨진 라이관린의 노란 선풍기가 ‘위잉’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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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해는 길어서 보충수업이 끝난 시간에도 여전히 하늘은 파랗다. 여름의 좋은 점은 딱 그거 하나뿐이다. 낮이 길고 밤이 짧다는 것. 백 명도 안 되는 학생들이지만 하굣길에 우르르 정문을 나서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백 명의 학생이 있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 물론 이마저도 3년 안에 다 시내로 나가거나 더 큰 도시로 나가거나 할 테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아이들이 아닌가. 나도 마찬가지고.

 

습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나도 운동장의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즈음이면 이 학생 중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오는 것인지 모를 라이관린이 내 옆에 와 같이 걷는 것이 이젠 일상이었다.

 

오늘부터 시험 기간에 대비해 공부할 요량으로 챙겨온 문제집 때문에 무거운 가방이 자꾸만 아래로 축축 쳐져 내 몸도 아래로 푹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운 날씨 때문도 있지만, 더운 것보단 습한 게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형 뭐 시원한 거라도 마실래?”

 

라이관린의 집은 학교랑 가까워 학교 정문을 나오고서 조금만 걷다 왼쪽으로 빠지는 골목에 들어서면 되지만, 라이관린은 항상 나와 함께 다리를 건너 내가 사는 동네까지 와서야 제집으로 돌아갔다. 다리 아래에서는 거의 말라서 없어질 것 같은 강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까.”

 

라이관린과 나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신익슈퍼로 들어가 각자 마실 음료를 음료 진열대에서 하나씩 꺼내 계산하고 컨테이너로 이동했다. 거기엔 집에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거나 혹은 학원에 가기 위한 아이들이 이미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라이관린과 나는 구석 어딘가에 대충 서서 캔음료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아줌마한테 얘기 한번 해 봐. 오늘 우리 집에서 잔다고.”

 

“됐어.”

“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뭐 굳이 덥다고 너희 집 까서 자냐 싶은 거지. 그리고 우리 엄마보다 너희 아저씨한테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저씨가 싫다고 하면 어쩔래. 나는 순식간에 비운 알로에 캔을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런 거지. 괜히 번거롭잖아. 내 집에 남이 오는 거.”

“그럼 나도 아빠한테 물어볼게.”

“나 안 갈 거야. 괜히 물어보지마.”

“흐음?”

 

집에나 가자. 가서 쉴래.

그리고 그렇게 말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땀범벅이 된 채 마루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아, 진짜 너무 더워. 너무 덥다. 방 안에 있어도 덥고 마루에 나와 있어도 덥다니. 샤워를 벌써 두 번이나 했는데도 집 안에 있기만 하면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 진짜 그냥 오늘은 라이관린네 집에 가서 잘까.

 

창밖의 매미는 짝을 찾기 위해 거세게도 울어댔다. 맴맴맴맴. 쟤네는 잠도 안 자나. 이제 저녁인데 아직도 맴맴맴맴이야. 나는 가만 누워 엄마가 보고 있는 티브이 소리와 창밖의 매미 소리를 들으며 얼른 이 지긋지긋한 더위가 가시기만을 바랐다. 그즈음, 얼굴 옆에 놔뒀던 핸드폰이 징징거리며 울렸고 손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라이관린이었다.

 

“응.”

-형. 아빠가 형 와도 된대.

“엉? 뭐야. 물어 봤어? 안 물어 봐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아….”

 

아까까지만 해도 안 간다고 했던 말이 이제 와서 목에 턱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아 나는 괜히 ‘아’소리만 반복해서 내뱉었다. 그냥 가서 잘까. 가서 자는 것까지야 문제없지만 자러 가기 위해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역시 남의 집에서 자는 게 내 집만큼 편할 리가 없음이 걱정되기도 했다. 게다가 라이관린네 아저씨는 아직 좀 무섭단 말이야.

 

나는 몇 분간의 고민 끝에 핸드폰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싸 쥔 채 몸을 돌려 엄마에게 ‘나 관린이네 집에서 자고 와도 돼?!’라며 목청껏 소리쳐 물었다.

 

“갑자기 관린이네 집은 왜?”

“우리 집 덥잖아.”

“걔네 집은 시원하대?”

“시원하대!”

“괜히 남의 집 가서 폐 끼치지 말고 그냥 집에서 자.”

“아아, 우리 집 너무 더워! 엄마 내가 에어컨 고쳐달라고 한지가 언젠데!”

“아저씨 내일 오신대!”

“아, 그럼 내일까진 덥단 거잖아!”

“이게 아주 며칠 전부터 자꾸 짜증이야.”

“더우니까 그렇지!”

“그럼 관린이네 집으로 가! 가서 아주 오지를 마!”

 

누가 가라면 못 갈 줄 알아? 나는 핸드폰 아래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라이관린에게 바로 가겠다는 말과 동시에 종료 버튼을 누르고서 방으로 향했다. 가방에 내일 입을 교복도 넣고, 문제집도 넣고, 아무튼 이것저것 넣은 뒤에 엄마에게 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쌩 집을 나와 라이관린네 집으로 뛰어갔다.

 

사춘기 시절은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사춘기는 현재진행형인 건지 아니면 진짜 여름이라서 더워서 그런 건지. 실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괜히 툭툭 튀어나오는 못난 말들이 자제가 안 되는 요즘이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에 가시를 돋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그만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남는 것은 속상함과 후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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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라이관린의 동네로 접어들었을 때 길 위에서 걸어오고 있는 라이관린이 보였다. 라이관린도 걸어오고 있는 내가 보였는지 걷고 있던 걸음이 빠른 걸음으로 바뀌었다. 라이관린은 숨을 고르며 내 앞에 서서 어서 가자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문득 나는 언제 나와 라이관린이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불편함과 부담 따위 없이 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 어색했던 겨울을 지나 어느새 여름에까지 와 있게 되었는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름만큼이나 갑작스러운 감정이었다.

 

이제서야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따라 라이관린의 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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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적당히 놀다가 자라.”

 

네에-.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려 라이관린과 나는 집까지 빠르게 뛰어 와야만 했다. 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나는 라이관린의 방에 어색하게 서서 그의 방을 둘러봤다. 라이관린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벌써 두 계절이 지났는데 라이관린의 집으로 들어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가 반찬 가져다주라고 했을 때도 마당 앞에만 잠깐 왔다 간 게 전부였으니. 라이관린의 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게 깔끔했다. 내가 온다고 해서 치운 건지 아니면 평소에 이렇게 사는 건진 모르겠으나 딱히 어지럽혀진 곳도 없었고 어딘가 과한 느낌도 없었다. 그냥 딱 라이관린처럼 깔끔한 방.

 

라이관린은 하늘색 이불 위에 올라앉아 ‘형 이리로 와’라며 제 옆자리를 툭툭 쳤지만, 나는 젖은 수건을 의자 뒤에 걸어두고 책상 위에 문제집을 턱턱 꺼내 앉았다.

 

“헐, 설마 공부하게?”

“다음 주가 시험이야.”

“와, 그래도 놀러와서 공부하는 건 좀 아니다.”

“내가 지금 여기 놀러 온 거야?”

“놀러 온 거지.”

“나는 놀러 왔다고 한 적 없는 거 같은데.”

 

아, 뭐야. 재미없어. 라이관린은 뒤로 엎어져 ‘박지훈 재미없어’를 중얼거리며 이불을 발로 뻥뻥 찼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문제집을 펼쳐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다 어느새 잠잠해진 라이관린은 우당탕탕거리는 소리가 나는 핸드폰 게임을 했고 나는 그 핸드폰 게임을 백색소음 삼아 계속해서 문제 풀기에 집중했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오는 에어컨의 냉기가 서늘하게 느껴질 즈음, 라이관린은 ‘이제 그만 좀 하고 나랑 놀지’라며 다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나 또한 정해진 분량을 거의 끝낸 상태라 알겠다며 몸을 돌려 라이관린의 옆자리로 힘차게 뛰어들었다. 침대가 한번 꿀렁이며 스프링 소리를 냈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무료한 시간이 길어졌다. 놀아달라고 한 라이관린은 정작 내가 오니까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고 나 또한 딱히 할만한 것이 생각나 천장 바라보기만을 오래갈 뿐이었다.

 

가족을 제외한 누군가와 이렇게 나란히 침대에 누워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이렇게까지 긴장될 일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손바닥은 긴장의 정도만큼 축축하게 젖어갔다. 라이관린의 집은 우리 집처럼 덥지도 않은데 왜 이러는 거지. 나는 괜히 민망해져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한번 닦고서 라이관린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바짝 붙은 몸에선 열이 폴폴 올라왔다.

 

밖에선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소리가 타닥타닥거리며 들려왔다. 장작이 타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고, 기름이 튀는 것 같은 소리기도 했다.

 

“뭐야. 놀자며.”

“그러게.”

“뭘 그러게야. 아, 근데 이렇게 붙어 있으니까 덥다. 잘 땐 내려가서 자야지.”

“왜. 같이 자.”

“덥잖아.”

“그래도.”

 

그래도 남자끼리 붙어 자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라이관린이 나를 데리러 나온 순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느끼는 일련의 감정들을 이상하다 느끼는 건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았다. 라이관린과 내가 남자라서. 우리가 같은 성을 가진 남자라서.

 

별로 그런 것에 대한 편견은 없다고 생각했었으나 사실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는 라이관린에게 확인받고 싶은 건지 무의식에 걸쳐 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라이관린은 입을 다문 채 둥그런 눈만 굴리면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회적 관념, 이라는 게 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추세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은 여전히 정해진 틀 안에서 굴러가기만을 바란다. 정해진 틀이란 것은 일종의 관습 같은 것이기도 해 쉽게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정해진 틀이나 관습을 만드는 건 다수의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소수에 끼기를 기피한다. 어떻게든 다수의 편에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서, 문제 되지 않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원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 건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것. 그저 오늘 먹고, 오늘 자고, 오늘 사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을 뿐이다.

 

그렇지만 다수를 탓할 이도, 소수를 탓할 이도 세상엔 없다. 설사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는 우리의 삶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언제나 저마다의 이유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며 옳고 그름의 기준 또한 각자의 가치관에서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일까. 문득문득 나를 치던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에 선연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모르는 척 살아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어차피 1년, 1년 조금 넘게 버티고 나면 ‘그땐 그랬지’라며 지나가며 웃을 추억 정도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나 또한 무탈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 남들 속에 섞여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살고 싶은 사람이라 지금 느끼는 어떤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닌데, 분명 틀린 게 아닌데. 고작 열아홉 먹은 나는 그저…, 그런 사회적 관념이라는 것이 무섭게 느껴질 뿐이라서.

 

“나는 좋아.”

“…….”

“형이랑 붙어서 자는 거.”

 

싫지 않은데. 마지막 말은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불투명하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붙어 있는 거리가 가까워 알아듣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이상하지 않아?’라고 물은 물음에 ‘싫지 않은데’라도 돌아온 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가늠이 안 됐다. 그보다 앞서 말한 ‘좋다’는 말보다도 ‘싫지 않다’는 그 말이 더 오래 귓속에 맴돌았다. 지나칠 정도로 아무것도 덧칠해지지 않는 감정들이 계속해서 입가에 걸렸다 삼켜졌다.

 

그래서 나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런 식으로 몸을 움직여 생각을 환기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나를 담고 있는 라이관린의 눈을 마주하면 멀리하려는 생각들이 중력에 당겨지는 것처럼 내게로 덮쳐왔다.

 

“너 내가 좋아?”

 

어쩌다가 여기까지, 그러니까 낮에 교실에서 떠들 때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여태 이런 순간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잖아.

 

솔직해지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솔직해진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문득 욱하고 터지는 성질머리나 예민함이 그런 솔직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니길 바랐다. 착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나에게 솔직한 것이란 예민한 것으로 곧 귀결되곤 했는데 왜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을까를 생각해봤을 때 여기서도 사회적 관념이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예민한 사람은, 불편하니까. 왜 예민한 사람이 불편하지? 예민한 사람은 까칠하니까.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지치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내 감정에 솔직한 것이, 그러니까 화가 나는 상황에 화를 내는 것이 나쁜 일인가 싶었다. 그저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한 것 뿐인데.

 

살다 보면 솔직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로 갈등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갈등을 만드는 과정은 쉬운 반면에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은 힘들고 까다롭다. 내 사정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하면서 설득해야 하고, 또 타인의 사정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들으면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때때로 우리는 솔직해야만 하는 순간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좋아.”

“나는 너랑 키스도 하고 싶어.”

“나도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관린도 나랑 다르지 않을 것이란 확신, 그런 무모한 확신이 나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고백이란 건, 내가 좋아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일방적인 고백은 정말 일방적인 고백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고백이 짐이 되지 말자는 말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나는 라이관린에게 나의 말이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같이 자는 거지?”

“그래도 밑에서 잘래.”

“왜.”

“더운 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런 영양가 없는 말씨름이 실타래처럼 길어졌다.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와, 어떻게든 침대에 붙잡아 놓으려는 라이관린과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나의 몸짓이 침대에 부딪혀 쿵쿵 울렸다. 갑자기 내린 비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갑작스러운 감정이 쏟아졌다. 아직 장마는 오지 않았는데 어쩐지 당분간은 내내 이 감정 속에 흠뻑 젖어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