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 水宮歌
w. 환각

 

 

 

 

“이번에는 어떠한가.”

별주부는 다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 애석하도다. 이제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실은 아직 한 가지 계책이 남아있사옵니다만…”

“아뢰어라.”

“토끼이옵니다, 폐하.”

“토끼라… 계속하라.”

“예, 폐하. 우리 동해 으뜸의 백팔선녀들의 거처인 해선궁 앞에 누지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능히 아실 것이옵니다. 그 우물에 사는 자가 바로 백팔선녀의 맏이인 청선을 모시는 무녀 흑희이온데, 그 신묘함이 저승을 놀라게 하고, 또 하늘의 이치를 꿰뚫는다 하옵니다. 흑희에게는 육지에 사는 백희라는 누이가 있나이다. 백희의 신기는 흑희의 것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그 기이함이 하늘의 해를 숨게 하고, 지하의 귀신들을 춤추게 한다고 들었사옵니다. 얼마 전, 백희가 흑희에게 연락을 취하기를, 꼭 알맞은 토끼를 찾았다는 소식입니다.”

“헌데, 토끼는 본래 육지의 동물로, 어찌 산 채로 용궁까지 데려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 아니더냐.”

“이 토끼라는 자가 보통 토끼가 아니옵니다. 이 토끼는 지상 몇 안되는 수인獸人(짐승인간)으로, 수인은 본디 천상과 저승의 출입이 자유로운 것으로 압니다만.”

“내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이 있다면 토끼는 예로부터 꾀가 많고 간사한 동물이럇다. 잡는 과정도 수월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잡았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 틀림없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방도가 달리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별주부야, 빨리 토끼를 생포해 오너라. 그래야 내 심신의 병이 나을지어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부디 동안 옥체를 보존하소서.”

 

 

 

 

 

 

 

 

 

 

수궁가 水宮歌

 

계간 판윙 ‘여름’ 호 참가작

물 소용돌이쳐 흐를 우

雷官霖 x 朴志訓

환각 쓰다.

 

조선의 밤나무고을에 참으로 기이한 운명을 타고난 자가 있었으니, 그 성이 박朴, 이름이 지志 훈訓으로 그 이름조차 범상치 않았다. 두 눈알은 옥구슬을 빼닮았고, 피부는 상아로 조각한 듯 매끄러웠으며, 양 입술은 앙 다문 모양이 마치 앵두를 한 입 베어문 듯 하였으니 과연 천하의 미인이었다. 지훈이 태어난 날 대지의 틈 사이로 오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는 사실조차도 범인凡人과는 다른 모양새였으니, 고아인 지훈에게 토끼가 젖을 물려주어 키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포도청 옆 기와집의 조 대감네 소가 벌러덩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밭일이 한 시 급한 조 대감네 머슴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길을 지나던 지훈이 하는 말이,

“잉태를 한 것이 날이 다 되었으니 곧 새끼 셋을 낳겠지요.”

그로부터 한 시진 후에 산통을 시작한 어미 소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식은 땀을 질질 흘리더니, 반 시진만에 비실비실한 송아지 하나가 낑낑거리며 나더니 또 반 시진 만에 성한 송아지가 세상 빛을 보고는 눈을 움찔움찔, 또 반 시진만에 튼실한 송아지가 제 어미 배에서 나오자 마자 조 대감네 사랑채를 세 바퀴 빙빙 돌고 꼬리를 턱턱 치니, 정확히 세 마리를 낳았다. 이 때 지훈의 나이가 다섯이었다.

지훈은 일찍부터 세상 물정에 밝아 장사를 시작하였으니, 옷감을 염색하여 팔았는데, 그 빛깔이 진하다가도 연하고, 연하다가도 진하며, 보는 방향에 따라 바뀌니, 참으로 오묘하여 보는 사람마다 홀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훈이 물건에 관해 줄줄 덧붙인 뒤 왕방울만 한 왼쪽 눈을 한 번 크게 꿈-뻑거리면 어언일인지 큰집 마님, 혼인을 앞둔 새색시, 고을 원님 작은 딸, 기방의 으뜸 기녀 향월이, 주막에서 술 따르다 나들이 나온 주모 할 것 없이 아녀자란 아녀자는 정신이 해까닥 돌아버리고 앞다투어 그 많던 옷감을 모조리 집어가니, 지훈의 옷방에 물건이 남는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허나, 지훈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아직까지 제 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연지사 고아이고 집안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지훈에게 제 자식을 주려고 하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정확히 사흘 전 약방 우돌이가 하던 말이, 용하기로 소문 난 무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지훈의 귀가 솔깃하여, 무당을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그 무녀라는 게 어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돌이도 무녀에 대한 지훈의 물음에

“한양에 있다고도 하고, 지리산에 있다고도 하고…” 와 같은 시원찮은 대답만할 뿐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한 가지 묘수를 번뜩 생각해냈다.

“어이, 향월이. 내가 부탁한 건…”

“성이 참 급하셔. 물건부터 보여줘요.”

지훈은 참으로 은밀하게 품 속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그러더니 누가 볼세라 후다닥 창고로 뛰어들어가 장롱을 열기 시작하니, 하나를 열면 또 다른 장롱이 나오니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후 지훈이 꺼낸 것은 옥빛 비단이었다. 그 때깔이 과연 복희씨의 비늘과도 같았고, 동해의 정기를 한데 모은 것과도 같았다. 지훈은 그 신묘한 비단을 나무 판자에 둘둘 말기 시작하더니 돌연 향월이의 손을 턱 잡더니 나뭇조각에 말린 비단을 반 쯤 도로 풀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 팔도를 다 뒤져도 구하기 힘든 옥비단이다.”

“옥비단이라니, 그게 무엇이어요?”

“옥비단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냐? 향월아, 네가 높으신 분들과 가까이 지낸다고 하던데 그 중 알짜배기는 없는 모양이구나. 옥비단이라 함은 말 그대로 옥을 물에 개어내서 그 물로 비단에 색을 입힌 것을 말한다. 요새 사대부 가문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진귀함이 금덩이보다 더 해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네 마님이 옥비단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가 앓아 누웠다고 하였다. 그런 물건을 내가 너를 위해 구해왔다는 것 아니겠느냐?”

“어머, 그리 귀한 것을 제게 주시다니요. 호호호!”

“자, 이제 말해보거라.”

“속리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더군요.”

“속리산이라니, 그건 또 어디인가?”

“속리산을 모르신단 말이어요? 이제와서보니 조선 팔도 다 돌아다니며 장사했단 이야기는 순 거짓말이었군요? 속리산이라 함은 말 그대로 풍속 속俗에 가를 리離 자를 써서 산에 오르면 속세와 갈라서게 될 만큼 험난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요새 유랑객들 사이에서 그 험준함과 경치가 찬사받고 있는데, 가파르기가 낭떠러지와 같아서 한 걸음만 내디뎌도 한 시진 씩 쉬어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 곳에 여쭈신 무당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근 싱싱한 걸루 다섯 근만 주시오.”

“어허, 웬일로 이리 많이 사간담. 자네 어디 야반도주라도 하는 것 아녀? 껄껄.”

지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당근을 포대에 옮기는 김 씨의 말에 괜히 심장이 벌름벌름하였다.

“자, 이제 당근도 넉넉하니, 떠날 채비도 되었겠다. 여정을 떠나볼까? 정든 한양이여 잠시 안녕!”

지훈은 노잣돈을 꿰어 두루마기 안에 소중히 감추고, 당근 포대기를 나귀에 올려놓은 후 턱 하며 나귀의 등에 올라탔다. 나귀가 놀랐는지 이히힝 거리며 우짖으니, 지훈이,

“예끼! 옛 말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였다. 아직 갈 길이 머니 우리 둘다 힘내보자꾸나.”

나귀는 지훈의 말이 끝나자 놀랍게도 울음을 멈추고 제대로 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 답례로 나귀의 엉덩이를 두어번 팡팡 두드려주었다. 호기로운 시작이었다.

허나, 지훈은 속리산에 발을 들여놓을 때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얼굴은 떼가 껴 거뭇거뭇해져 있었으며, 삼베 두루마기는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나귀 근처에도 파리가 엥엥거리며 나귀의 힘을 빼놓았다. 갈증이 나서 무작정 바위 위에 누워 있는디, 갑자기 뉘신가 고운 자태의 여인이 지훈에게 한 발짝 다가오더니,

“이 곳은 처음이신가 봅니다. 보아하니 목이 마르신 듯 한데, 물 한 잔 받으시지요.”

하였으니, 지훈은 흔쾌히 여인이 건네주는 호롱박을 받아 벌컥 벌컥 들이키자, 물에서 참으로 은은한 연꽃의 향이 베어 나오고,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감과 동시에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이었다.

지훈이 번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인기척조차 없는 것이 꿈이 분명했으나, 목의 갈증은 씻은 듯 없어져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눈만 끔뻑끔뻑하며 생각해보니, 과연 평범한 여인은 아님이 분명했다. 온 몸에서 광채가 나고,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향기가 진동한 것으로 보아 여인은 선녀가 틀림 없다고 지훈은 믿었다.

‘미천한 내가 선녀의 은혜를 입었던 것이로구나.’

지훈은 마저 힘을 끌어모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당근 하나를 꺼내 오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더니 긴 장대 위에 나무로 된 새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분명 이 근처에 무당이 있다는 표식이리라. 지훈은 정신을 집중하고 안개를 헤쳐 장대를 향해 갔다. 순간, 하늘이 번쩍하더니 앞이 껌껌해졌다. 다시 주위가 밝아지더니 지훈이 이미 나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웠다. 순간 암자 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어허! 어디 미천한 짐승 따위가 신성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냐. 당장 물럿거라.” 하였다.

“짐승이라니, 나는 인간이오.”

“지금 누구를 속이려 드는 것이냐. 네 몸에는 천한 토끼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으냐.”

“먼길을 왔소이다. 한 번만 도와주시오.”

“선녀님께서 크게 노하실 것이다. 아니된다.”

“혹시 자네가 모시는 그 선녀님이 산 밑까지 나들이를 오시지는 않으셨는가?”

“무슨 꾀를 부리는 것이냐.”
“오는 길에 선녀님께 물 한 잔을 얻어마시게 되었소. 분명 이 곳까지 인도하시려는 뜻임이 분명하다.”

무녀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하였다.
“좋다. 들어오거라.”

무녀의 가에 들어서자 화한 향이 피어올라 지훈을 당황하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진기한 풍경에 넋을 놓고 있는 지훈에게 무녀가 입을 열기를,

“배필을 찾으러 이 곳까지 왔구나.”
“알다시피 이 몸이 온전한 인간의 몸이 아니라 혼기가 찼지만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하였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닐 텐데.”

“…”

“남색男色이 아니더냐.”

“…”

“어디 네 입으로 한 번 말해보거라.”

“과연 소문대로 용하구나.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남자를 밝히는 토끼라. 참으로 불경하고 어렵구나.”

지훈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만?”

“내가 일러 준 방법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다시 짝을 만날 기회는 없을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하여라. 토끼야, 정녕 묘수를 알고 싶느뇨?”
“…부탁하오.”

무녀는 뒤를 돌아 고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가 돌연 번뜩 뜨더니 하는 말이,

“토끼야, 인당수에 몸을 날리면 배필을 만나 백년해로, 아니 천년해로도 더 할수 있을 게다.”

“인당수라면,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바다가 아닌가. 나더러 죽으란 말인 것이오?”

“무튼,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길일을 정해 주시오.”

무녀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다,

“토끼라. 올해가 을해년이니 팔월 첫날 진시가 적당하겠구나.”

“팔월의 첫째날이라면, 열흘도 채 남지 않았구나.”

무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자네만 믿겠네. 고마웠소.”

“토끼야, 몸조심하거라.”

지훈은 무녀에게 다녀온 이후로 매일을 뒤척였다.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 거사를 치를 전날이 되자 지훈은 눕고도 잠을 청할 수 없이 전전반측하였다. 배필을 드디어 만난다는 기쁨도 그 원인이었지만, 두려움도 원인이었다. 결국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수탉이 꼬끼오 하며 팔월 첫날이 밝은 것을 알렸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였다. 물에 빠지더라도 곱게 단장하여 서방님을 뵐 것이다.’ 하며 지훈은 최상품 두루마기를 두르고, 갓을 고쳐맸다. 지훈이 두루마기의 각을 세우려 두어번 옷자락을 펄럭거렸다. 두루마기의 빛깔이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연한 분홍색 천이 이리 저리 휘날리며 때론 자주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연두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지훈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인당수에 닿기 위해 나루터로 향했다. 나루터에 배는 많았지만, 인당수를 지나는 배는 어언 일인지 딱 한 척이었으니, 지훈은 그 배에 올라 탔다.

 

“거 젊은 총각이 가족도 없이 뭐하러 그 험한 인당수로 향하는거요?”

“…”

“세상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소. 곱게 자란 것 같은데 말이오.”

“인당수가 정확히 어떤 곳이오? 물길이 세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어허, 큰일날 사람이네. 잘 들어보시게. 인당수라 함은 우렁찬 파도가 종일 몰아치고 마치 동해의 용왕이 행차하는 것과 같은 물보라가 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천둥이 쾅쾅 쳐대고, 좁은 물길로 쉴새없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그런 위험한 곳이라오.”

지훈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동안 지훈은 인당수에 대해 깃털만치로 가볍게 여겨 그래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뱃사공의 말을 들어보니 다 틀린 일인 것 같았다. 이제 죽을 일만 남은 것인가 하고 망연자실하여 먼 바다를 바라보며 털썩 앉아 있는데.

“자, 여기가 인당수요. 이제 한 번 보았으니 된 것이 아니오?” 하는 것이었으니,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바깥 풍경을 보니, 과연 뱃사공이 말한 대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모르긴 몰랐으나 지훈은 특히 오늘 더 바람과 폭풍우가 세차며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고운 낭군님을 만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로구나.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는 걸 보니.’

지훈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니 인당수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미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훈이 이 모든 일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치르는 법이지. 아무렴, 원래 이루기 힘든 꿈을 이루려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말도 안되는 허상이라면 나를 인도해준 선녀는 무엇이고, 내 그릇된 취향을 맞힌 무녀는 또 무엇이냐. 이번 생,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하더니,

“잠깐!”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뱃사공과 선원들이 모두 지훈만을 쳐다보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더니, 이내 갑판을 뛰어 넘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내던진 것이었다. 바로 그 때, 소용돌이가 용솟음치더니 엄청난 크기의 물기둥이 지훈의 주위를 감싸는 것이었으니, 지훈은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훈은 바닷속에서 번뜩 깼는데, 자신이 웬 자라 등딱지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기를,

“뉘신데 이 바닷속에서 나를 태우고 가는 것이오!” 하자 지훈의 밑에서 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화를 내는 것이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곳은 어디이며 나를 등에 업고 어디로 가는 중이란 말입니까?”
“나는 용궁 제 1 대신 별주부요. 자네가 물에 빠져 아래로 고꾸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이렇게 자네를 업고 용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 아니겠소.”

“이 곳은 분명 바다인데 어째서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것인가?”

이번에는 지훈의 밑에서 휴 하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은 본디 하늘 땅 그리고 바다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을 몰랐단 말이냐?”

“그런데 내가 수인이라는 사실은 누가 일러 준 것이오?”

“용궁 사람들은 모조리 수인이니. 수인이 같은 수인을 알아보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지.”

“오해했다면 사죄하리다. 그런데 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용궁까지 데려가 극진히 대접하려 하는 것이오?”

지훈의 밑에서 흥 하며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났다

“가 보면 알 것이다. 이제 곧 용궁에 도착하니 자네는 말을 삼가토록.” 하더니, 갑자기 별주부는 네 발을 파다닥 거리더니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하여 이들 일행은 정말로 용궁 앞에 다다랐다.

“이런 곳이 정말 바닷속에 존재했단 말입니까?”

지훈이 감탄하며 말하였다. 지훈의 눈 앞에는 태산만한 궁궐이 하나 위치해 있었으며, 그 궁은 어찌나 화려한 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구름도 뚫을 기세로 높은 기둥은 자개와 거북이 등딱지로 덕지덕지 장식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의 거북이와 조개가 희생되었을지 헤아릴 수 없어 눈 앞이 아찔하였다. 문패에는 수정궁이라는 글자가 각인되어있었다.

‘수정궁이라면, 용왕의 궁이겠구나. 익히 들어 아는 바로다.’

“뭐하고 있는 게냐. 얼른 움직여라.”

‘당신네도 곧 저 기둥에 박제되겠지. 불쌍하여라.’

“예, 갑니다요.”

문은 굳게 닫혀 외부인의 출입을 경계하는 듯 하였다. 그 앞에는 수문장 둘이 마주보고 서있었는데, 가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집게가 무척 위협적이었다. 대문에 다가갈수록 지훈은 그 기세에 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재 수문장이 지훈에게 달려와 지훈을 포박하기 시작하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왜 무고한 백성을 이리 마구 다룬단 말이냐! 풀어라! 얼른 풀란 말이다!”

억센 두 집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포줄을 칭칭 감다가 매듭을 꽁꽁 묶기만 하였다. 포박이 완료되자, 집게들은 쉴 틈을 주지도 않고 지훈을 들쳐 업고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놓으란 말이다! 놓으라고오오오오!”

지훈은 쉴새없이 괴성을 질러댔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지훈 일행, 즉, 집게 둘과 업혀 있는 지훈, 그리고 그 뒤를 유유히 따르는 별주부는 이윽고 궁 안의 경전에 도착하였다. 용궁의 규모에 걸맞게 경전 또한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느샌가 지훈은 용왕의 앞에 놓여 있었다.

자, 한 번 용왕을 보자. 풍채를 보니 꼭 육중한 바위가 왕좌에 앉아 있는 것 같았고 새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으니 그 길이가 어림잡아 십오 척은 될 것 같았다. 용안을 살피니 눈에는 푸른 빛이 서려 있어 몹시 매서웠다. 눈썹 산이 높이 꺾여 올라가 있어 호랑이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입술은 두꺼운 편이어서 당당한 느낌이었으나, 안색은 좋지 않아 아픈 것처럼 보였다.

용왕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다.”

용왕의 딱 두마디 말에 온 경연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저들끼리 수군수군거리기 시작했는데, 워낙 많은 사람이 있다 보니 그 소리는 금새 시끄러워졌다.

“저어어어엉수우우우욱!”

용왕이 직접 입을 열었으니, 그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 경연장 안의 사람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구머니!”

지훈은 용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 매우 놀라 자연스럽게 놀란 소리를 뱉었다. 이에 신하들 중 넙치처럼 보이는 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하였다.

“저리 심약해서야 원, 쯧쯧”

그 말은 지훈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하였다.

“자네들은 누구길래 남에 대해 이리 왈가왈부하는 것이오!”

그러자 넙치 말하길,

“심지어 드세기까지!”

지훈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끌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포승줄로 어찌할 수 없어 분을 삭이고 있었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아귀가 용왕께 아뢰길.

“폐하, 하오나 이 자는 사내가 아닙니까. 무릇 왕실의 운명을 맡기기에 사내는 적절치 않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조정의 대신들은 아귀의 말을 뒤따라 곧 합창하며 절을 하였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경들은 가만히 있으시오!”

대신들은 용왕의 말에 깨갱 하며 입을 다물고 한 발짝 물러났다. 용왕이 이어 말했다.

“이 일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것이기도 하다만, 짐과 태자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도 하기에, 과인은 이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태자에게 맡길 것이다. 태자를 들라 하라. 태자야!”

태자로 추정되는 자가 경전 벽의 주렴을 걷고 나왔는데, 그 용모가 몹시 빼어난 것이, 얼굴에는 흰 광채가 일고, 용왕을 닮아 입술이 두꺼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턱은 또 어찌나 뾰족한지 마치 베일 것만 같았고, 눈은 언뜻보면 온화해 보였으나 그 안에는 냉기가 사려 있었다. 특히, 눈썹이 가지런히 나있는 모양새가 마치 갈대숲 같았다. 그야말로 왕의 자리에 적합한 용모라 할 수 있겠다.

지훈은 태자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필히 반해버린 것일게다.

‘내 스무 해 인생은 다 동해 바다의 태자를 만나려 살아온 것인가보다. 이리 완벽한 미모는 전에도 본적이 없구나. 설마 이분이 내 배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백 번 바다에 더 빠져도 아쉬울 것이 없겠구나.’

태자가 거동하며 말하기를,

“부르셨사옵니까, 아바마마.”

태자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였는데, 붉은 두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동굴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낮은 목소리와 함께 황홀한 향이 퍼지자 지훈은 그동안의 자제력을 잃게 되었다. 바로 그때, 토끼 귀가 뿅 하며 지훈에게서 솟아올랐고, 두루마기를 뚫고 토끼 꼬리가 삐져나왔다.

조정이 다시 술렁였다.

“망측하기 짝이 없도다!”

“신성한 궐내에서 본모습을 보이다니, 예의범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구나!”

용왕은 지끈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소리쳤다.

“정숙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태자도 옆에서 몇 마디 거들기를,

“몹시 소란하구나.”

그러자 대신들은 씻은 듯이 조용해졌다.

“관림아, 어떠냐.”

태자의 이름이 관림인 듯 하였다. 관림은 흡족한 듯 웃으며,

“예정대로 닷새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네 뜻대로 하여라. 경들은 들으라. 이 토끼는 오늘부로 아흘 간 귀빈 대접을 받을 것이다. 짐의 말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게 누구든 간에 매우 칠 것이다. 과인은 이제 너무 늙고 병들었으며, 지쳤다. 이 토끼만이 짐의 근심 걱정을 해결하고 안녕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해의 운명이 토끼에게 달려있으니 협조하여라.”

용왕의 말이 끝나자 경전이 한동안 정적이 되었다. 보다못한 태자가 이를 수습하였다.

“뭣들하는 것이냐. 얼른 모셔라.”

아까의 집게 둘이 지훈을 양쪽에서 부축하는 자세를 취한 뒤 이동하려 하였다. 지훈이 포승줄에 자꾸 걸려 넘어지려 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태자가 가만히 보더니 지훈을 지탱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지훈은 관림과 퍽 가까워졌다. 관림의 숨결이 지훈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아까와 같은 황홀한 향이 났다. 지훈의 얼굴은 붉게 올라왔다. 그 순간, 관림의 얼굴이 살짝 빗겨나가 이제는 관림과 지훈의 볼이 마주보게 되었다,

“토끼야, 또 보자꾸나.”

 

툭, 툭 하며 지훈을 옥죄던 동아줄이 집게에 의해 잘려나갔다. 지훈이 있는 곳은 매우 화려하면서 아늑한 방이었다. 사방의 벽은 금으로 장식되어있었고, 옆쪽의궤짝에는 온갖 패물과 금은보화가 담겨있었다. 지훈이 앉아 있는 요는 또 어찌나 푹신한지 그 편안함을 말로 다 이룰 수 없었다.

“이제 다 됐습니다.”

“왜 아까는 그리 무섭게 사람을 칭칭 감아 맸던 것이오?”

“도망칠까봐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폐하의 명이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지요. 그럼, 평안한 시간 보내십쇼. 곧 태자 저하가 사람을 이곳으로 들르게 할 것이니 그 때까지는 이 방 안에서 어떤 것을 해도 좋습니다.”

집게들이 나간 후 지훈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잊고 있던 찜찜함이 밀려 왔다. 분명 용왕의 명이라 하였으니 제가 용궁에 온 것이 우연은 아닐 터였다. 가만 보니 아까 ‘용궁의 운명’ 뭐라 하였던 것 같은데.

‘과인은 이제 너무 늙고 병들었으며,’

‘동해의 운명이 토끼에게 달려있으니’

‘토끼야, 몸조심하거라.’

순간, 지훈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토끼들에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이천 삼십 삼 년에 한 번씩 용왕이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즉위식이 행해진다. 이 때 필수적인 것이 바로 토끼의 간이다. 즉위식에서 용왕은 태자에게 토끼 간즙을 건네주고, 태자가 이를 마시는 의식을 행하는데, 육지에게까지 영향력을 떨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토끼는 예로부터 음기가 강한 동물이었다. 그렇기에 왕으로서 음기와 양기를 잘 다스려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음기가 더욱 강한 여자 토끼의 간은 효용이 더욱 좋다.

‘이제야 조금씩 모든 것이 끼워 맞춰지는구나. 늙고 병든 용왕은 곧 양위를 할 것이고, 관림이 태자이니 즉위식을 하겠지. 그 때 내가 꼭 필요하니 동해의 운명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겠고. 사내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대신의 말은 여자 토끼가 의식에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요즘 세상에 여자 토끼는커녕 수인을 찾기도 힘든 판국이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를 잡아온 것이리라. 눈앞의 달콤한 이익을 좇다 잘못된 길로 빠져버리고 말았으니, 아아 어리석도다. 이제 내 앞에는 수렁만이 자리하는데 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이제 나는 글렀구나.’

지훈이 한참을 침통해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까지 친히 행차하시니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무엇보다 나와 가장 관련된 일이 아니더냐. 내가 있다는 걸 너무 유념치 말고 편하게 있거라.”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태자 관림이 안으로 들어왔으나 지훈은 멍하니 정신을 팔은 채 관림의 방문을 알아채지 못했다.

“뭘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냐.”

지훈이 화들짝 놀라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는 말이,

“오신 줄 몰랐사오니, 용서하십시오.”

관림이 미간을 옅게 찌푸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한 번 촤악 펼쳐 살랑살랑 부치는 것이었다.

“긴 말 하여 무엇하겠느냐. 어서 나갈 채비나 하거라.”

지훈은 태자가 저와 단둘이 어딘가로 나가려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려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일단 나가려면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데 옷은 한 벌이었을뿐더러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입어야 하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관림을 복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아까의 화려한 어의와 비교하면 훨씬 단촐한 쪽빛 도포를 두르고 갓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하여도 금장으로 연잎 무늬가 수놓인 것이 지훈의 두루마기보다는 한참 화려했다. 지훈이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 제, 관림 왈

“어떤 복식을 해야 할지 고민이라면 이미 네 뒤편의 농에 있느니라.”

지훈이 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머쓱하며 농을 열어보니, 속옷부터 각종 두루마기 하며 형형색색의 조끼, 그리고 바지가 정돈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치마와 같이 아주 넓게 퍼지는 옷도 있었고, 진주와 산호로 장식된 허리띠도 있었다. 지훈은 고심 끝에 화사한 샛노란색의 두루마기를 골랐다.

“신경써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우니, 얼른 나가자꾸나.”

말을 마친 관림이 방을 나와 성큼성큼 긴 다리를 옮기니, 지훈은 총총거리며 뒤따르는 모습이 마치 토끼가 깡충깡충 뛰노는 모습과 같았다.

“이곳은 내 침소이다. 이제 닷새간 내가 필요하거든 이곳으로 와서 바로 나를 찾거라.”

지훈이 고개를 올려다보니 과연 태자의 침소답게 휘황찬란하였는데, 옥기와가 그 웅장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지훈이 넋을 놓고 있으니 관림이 이를 보고는, 부채를 턱 하며 접더니 지훈의 턱을 부채로 요리조리 움직여 제 눈을 보도록 한 후, 낮고 찬 목소리로

“대답은 어디에 팔아먹은게냐.”

하는 것이었다.

지훈은 태자의 음성에 심장이 벌름벌름, 얼굴이 달궈지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토끼야?”

“아아, 예 저하. 저하께서 너무 가까이 오셔서 심히 놀랐사옵니다.”

“내가 싫느냐?”

“그것이 아니오라…”

“앞으로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도록 하마.”

관림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발걸음을 옮기며 궁 안내를 계속하였다.

“이곳은 하인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구경이 끝난 후에 닷새간 너를 시중들 하인을 직접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태자 저하.”

“왜 그러느냐.”

“닷새가 흐르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걸 내게 묻는단 말이냐? 모든 것은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아니겠느냐. 오늘부터 닷새간 우리 왕실은 네게 여러 가지 시험을 할 것이다. 다섯째 되는 날에는 그저 운명만이 너를 심판하겠지.”

지훈은 관림의 말을 곱씹으며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앞에서 관림이 돌연 멈춰서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관림을 들이받고 말았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제가 그만 실례를 범하였…”

“토끼야.”

“예?”
“아까부터 무얼 그리 생각하는 게냐. 나에게도 좀 알려주련.”

“태자 저하, 저하께서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으십니까.”

“운명이라함은 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 사이의 인과 연. 능력. 사고. 신분. 혈통.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지 않는 것 또한 모두 운명일 것이다.”

“만약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운명은 필연 다른 이의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운명이 바뀌면 곧 수천, 수만명의 운명을 바꾸어 세계의 질서를 파괴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운명을 바꿀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바꿀 것입니다.”

“오호라, 해 볼 수 있으면 어디 해보아라.” 하며 관림은 부채를 촤악 펼치더니 살살 부채를 부치며 그 뒤에서 뱀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훈은 처음으로 관림이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지훈은 자신이 고른 시종인 태봉이를 옆에 끼고 제 거처로 향하였다.

“나으리,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그래. 태봉이 너도 잘 자거라.”

참 신기한 일이었다. 지상에서는 하인을 거느리기는커녕 오히려 양반들로부터 천시받기 일쑤였으나 바닷속에서는 이렇게 시종도 생긴 것이 말이다. 지훈은 아직 바다에 있다는 것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바닷속의 일들은 모두 꿈만 같구나. 용궁부터 온갖 물고기들 하며 눈부신 태자까지. 오늘 하루는 벌써 지나갔구나. 경전에서 심판당한 것, 그리고 태자와 산책을 나간 것 또한 내가 제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시험의 일부분일 것이다. 이제 나흘동안 나는 운명을 거스를 것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 말이 있듯이, 작은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테다. 다만 지상에는 저처럼 잘생긴 태자가 없으니 그것만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지훈은 다짐 또 다짐하였다.

‘분명 시험 결과에 따라 내 운명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왕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음의 기운을 타고 난 토끼이니 나는 최대한 양의 기운을 타고 난 것처럼 행동하면 될 것이다. 양의 기운이란 즉 수컷을 가리키고 음의 기운이란 즉 암컷을 가리키니 나는 내가 본래 태어난 대로 양의 기운을 뽐내면 될 것이다.’

 

“나으리, 일어나셔요. 해가 중천에 걸릴락 말락 하옵니다.”

지훈은 태봉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밖에 나가서 보니 정말 해가 중천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태봉아, 그동안 저하께서 나를 찾으시지는 않았느냐.”

“아, 조금 후 미시未時에 사람을 보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지훈은 몸을 단장하고 차분히 앉아 미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똑똑똑-

사람이 찾아온 모양이었으니 지훈은 문을 열고 그 앞에 있는 자를 맞이하였다.

“미천한 곳까지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궁중의 어의입니다. 따라오시지요.”

어의를 따라 도착한 곳은 역시 의원이었다.

“이곳에 누워주시지요.”

“그러하겠습니다.”

지훈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두루마기, 마고저, 그리고 조끼를 모두 벗은 후 어의의 지시에 따라 유리로 된 상 같은 곳 위에 누웠다. 옷을 입었지만 옷을 뚫고 유리의 한기가 서렸다.

“신체 검사가 행해질 것입니다.”

신체 검사라니. 잡아먹을 토끼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지훈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왕실의 시험이 이런 종류의 시험이었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허나, 이는 지훈에게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 하여도 내 본래 태생은 양기를 타고난 남자이다. 신체검사를 행한다면 이 인식을 더욱 깊이 심어줄 수 있으리.’

“빨리 해주시오.”

어의는 입에 희고 네모진 천을 두르더니 검사를 시작하였다. 눈을 면밀히 살펴보더니 쓰윽 쓱 하며 종이에 무어라 적더니 다시 코를 찬찬히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아까 종이에 마저 무언가를 적는 식이었다. 그림도 그리는 것 같았다. 어의가 지훈의 손을 이리 쥐고 저리 쥐고 한 번 꼬집어도 보고 손톱을 가볍게 당겨도 보고 할 적에 무언가 싸해 누운 상태에서 뒤로 고개를 젖혀보니, 거꾸로 뒤집힌 태자 관림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로다.

“헉!”

“여태 이 자리에 있었는데 눈치가 참 빠르구나.”

이때 어의가 소리쳤다.

“저고리를 벗으시오.”

태자가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다면 신체검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양기를 뽐내겠다는 지훈의 알량한 계략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관림이 조금의 개입이라도 한다면 제 몸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지훈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저고리의 매듭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어진 저고리 틈새로 지훈의 매끈한 속살이 드러났다. 뽀얀 살 위에 솜털이 송송 나있는 것이 영락없는 흰 토끼였다. 관림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지훈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토끼야. 시간이 남아 도나 보구나.”

관림은 뒷짐을 풀고는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가볍게 펼쳐 살살 부쳤다. 저런 가시 돋친 말을 실실 웃으면서 하는 걸 보자 지훈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 옷을 빨리 좀 벗으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일 테니 태자의 눈에 나지 않으려면 그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고 마저 저고리를 벗었다. 그러곤 부끄러워 천장이 겨우 보일 정도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어의는 나가보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지금 나를 거역하려 드는 것이냐?”

어의는 태자의 위세에 눌려 하던 말도 못다 하더니 의원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의가 나간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지훈이 누운 상의 왼쪽 모서리로 자리를 옮겼다.

“버선과 바지도 벗거라.”

이건 또 무엇인가.

“벗지 않겠다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러할 때까지 기다리겠지.”

“…”

“그런데 토끼야, 벗지 않을 것이냐?”

‘마치 손을 쓰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벗을 것이라는 어투이구나. 내가 저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로다. 어째 이 자는 내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가? 너무도 강한 적수를 만났구나.’

지훈은 제가 관림에게 말려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훈은 바지를 벗기 시작했으니, 곧 삼베로 된 희고 얇은 속바지만이 남았다. 관림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부채를 접고는 이내 감정을 시작하였다.

관림의 부채가 턱 하더니 지훈의 목에 안착했다.

“흐음, 살결이 곱고 보드라워 마치 계집이라 해도 믿겠구나.”

‘계집이라니. 사내의 면모를 드러내려 검사에 응한 것인데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구나. 이제 어찌한담?’

관림의 부채는 그 새 목을 타고 내려와 어께 선으로 향했다.

“어께가 다부지구나. 마음에 들어.”

‘작지만 강인한 사내라는 것을 인정받았으니 하나는 패했으나 하나는 승리한 셈이다.’

어느새 부채는 어께선을 한 번 훑고 쇄골에서 멈췄다.

“여리지만 강단있는 호선이 예쁘구나.”

‘패로다.’

쇄골에서 부채가 지훈의 몸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부채는 전보다 느리게 가슴을 지났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지훈을 덮쳤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조금 가빠지기 시작했다. 지훈은 제가 태자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으.”

지훈의 입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관림은 잠시 부채를 움직이기를 멈췄고, 지훈 역시 자신이 그러한 소리를 낸 것에 놀란 눈치였다.

‘이대로 가면 내 계책이 다 무너지게 된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체향이 짙은 편이구나. 복숭아 꽃 향이라.”

지훈의 수치스러움도 잠시, 부채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내려왔다. 지훈의 앙상한 갈비뼈의 굴곡을 따라 부채는 통통 튀며 아래로, 아래로 향했고, 움푹 팬 지훈의 배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더 내려오면 위험해진다. 제발.’

기적처럼 부채가 지훈의 아랫배에서 멈췄다. 대신 관림이 입을 열었다.

“저런. 피골이 상접한 것이 어여쁘도다. 오늘은 맛난 저녁을 대접하마.”

너무 거리가 가까웠던 탓일까. 그 순간 관림의 체향이 훅 끼쳤다.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부풀어올랐다. 관림이 이를 보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밥은 며칠 굶었어도 건강은 한 모양이구나.”

‘참패이구나.’

그날 저녁은 관림이 일러주었던대로 아주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진수성찬이었다. 용궁에 온 뒤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 더욱 구미가 당겼다. 상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용궁에서는 나지도 않을 쌀밥과 고기 산적, 신선로와 구절판, 고구마줄기, 해파리채와 탕평채, 청포묵, 배추, 감주, 그리고 삼계탕이 올라와 있었다. 군침을 다시며 가장 먼저 삼계탕 국물 맛을 보니, 귀에서 새벽에 꼬끼오! 하고 우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맛난 음식이 흥취를 돋우니, 지훈이 콧노래를 부르며 게걸스럽게 닭다리를 쩝쩝 소리 내며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니나 다를까 태자 관림이었다.

켁-

아까의 수모를 생각하니,

켁, 크켁, 케 콜록 콜록 콜록

목에 사레가 들린 듯 싶었다,

지훈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해댔다.

관림은 지훈과 있으면서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지훈의 뒤로 와 등을 두들겨주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하구나. 괜히 찾아와서 네게 고통을 주었구나.”

지훈의 기침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관림이 급하게 지훈의 입을 벌리고 감주를 부었다. 동시에 지훈의 입 속에서 감주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지훈의 사레는 감주 덕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넘쳐 흐른 감주가 지훈의 턱을 받치고 있던 관림의 손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관림은 감주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흐르기 전에 재빨리 손가락의 감주를 쏙쏙 빨아먹었다.

“아주 맛나구나!”

“예?”

차마 태자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지훈은 적잖이 놀랐다.

“육지의 음식은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다의 음식보다 더 훌륭해.”

“그렇다면 음식을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 모든 걸 저 혼자가 다 먹기에는 조금 많습니다.”

 

이들은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오직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하여 상 위의 음식을 모조리 해치웠다.

“육지에서 살고 싶은 맛이로다.”

“그렇게 아예 육지로 올라가는 건 어떠십니까?”

지훈이 농으로 던진 말에 관림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더라.

“육지로 가고싶더냐?”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육지이온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저도 용궁에 계속 머무르고 싶사옵니다.’

지훈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용궁에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육지를 그리워하는 게냐?”

태자는 어쩐 일인지 노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아니오라, 저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훈은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토끼야. 나는 네가 좋다. 하루빨리 남은 시험을 무사히 치렀으면 좋겠구나.”

지훈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으음…태봉아, 조금만 더 자면 안되겠느냐아……”

“일어나시오.”

“태봉아?”

“나는 태봉이가 아니오.”

그 말을 들은 지훈은 정신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저하께서 이른 아침부터 여긴 웬일로…”

“조용히 하거라. 가벼운 복장으로 나갈 채비를 하여 내 거처 뒤편으로 와서 대기하고 있거라.”

황급히 옷을 주워입고 약속한 장소로 나가니 자주색 모시 도포를 두른 관림과 요상하게 생긴 두 마리의 짐승이 있었다.

“이건 무엇이랍니까?”

“해마이다. 육지에 말이 있다면 바다에는 해마가 있지. 말 탈 줄은 아느냐?”

“알고 말고요. 심지어 잘 타기까지 합니다.”

“그래? 내가 먼저 출발할 터이니 내 뒤를 바짝 쫓아오거라.”

관림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호숫가였다. 여름인데도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 꽃이 하나 둘 떨어지며 작은 물결이 이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었다.

“너를 보면 이곳이 생각난다. 아마 복숭아꽃 때문에 그런 것 같구나. 오늘은 뱃놀이나 해보자꾸나.”

“어째서 바다 한복판에 또 호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추호도 들어본 적이 없사온데.”

“육지에 사는 사람은 일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려 하더구나. 세상에는 아직 그들이 모르는 신묘한 장소가 많은데 말이다. 자. 잔말 말고 배에 타거라.”

이들은 강가에 정박된 작은 나룻배에 올랐다. 직접 노를 저어야 했기에 노를 젓다가 둘의 손이 닿을 때가 많아 그 때마다 지훈의 손이 움찔움찔하였다.

“헌데 이곳 경치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내가 제일 아끼는 곳이다. 외롭고 지칠 때 이 곳에 와 혼자 뱃놀이나 낚시를 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지.”

“용궁에 벗이 없으십니까?”

“주위에 있는 거라곤 죄다 생선대가리들 뿐인데 어디서 벗을 찾는단 말이냐?”

풉,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오늘만이라도 제가 태자 저하의 벗을 해드리겠습니다.”

관림이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그래, 좋다. 내 벗이 되는 것을 허락하노라. 대신 오늘 뿐이다.”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인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지훈의 표정이 좋다가 도로 시무룩해졌다.

그때, 복숭아꽃잎이 지훈의 코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관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꽃잎을 떼어냈다. 허나 그 후가 문제였다. 균형을 잃은 배가 이리 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배가 뒤집힐 차였다. 지훈은 재빠르게 일어나 마저 균형을 맞추려 했으나, 배는 오히려 더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 큰 물살로 배가 요동치자 지훈은 관림 위로 고꾸라져 함께 엎어졌다. 나룻배가 전과 다르게 잔잔해졌다.

정적이 흘렀다. 관림의 갓은 넘어지며 뒤로 벗겨져 갓끈만이 목을 죄고 있었다.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관림은 뒤로 자빠져서 놀라서 그런 것일 테지만, 지훈은, 지훈은……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빈 공기 사이로 지훈의 심장이 쿵쿵 큰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에만 있어도 이리 심장이 크게 뛰는 것으로 보아 저도 모르는 새에 지훈의 감정은 점점 깊어져 있었던 것이다. 용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평생 태자를 잊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지훈은 잡생각과 함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색한 공기 속 먼저 입을 연 것은 관림이었다.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물에 빠지기 직전까지 갔다왔으니, 이만하면 물놀이는 충분히 하였지?”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노는 그만 젓고 장기나 두자꾸나.”

바닥의 판자를 들어내니 실로 장기판과 말이 있었다.

“이것도 시험의 일종이옵니까?”

하하. 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토끼야, 오늘은 내 너에게 휴가를 주는 것이다. 오늘 일은 아무것도 시험이 아니니 마음 놓거라.”

휴 하고 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패자가 승자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는 것은 어떠니?”

“좋습니다.”

장기라면 지훈은 자신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로부터 장기 신동이라는 소리를 밥 먹듯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비둘기 영감이 옆에서 훈수를 둘 때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시작하도록 하자.”

결과는 관림의 승이었다. 초반부에는 엎치락 뒤치락하며 승부가 나질 않았으나, 마지막 수에서 관림이 단 한 점차로 이기고 만 것이다. 지훈은 경기 내내 관림이 일부러 조금씩 져주며 경기를 끌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자신이 관림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관림이 실로 대단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두려웠다.

“소원을 말해보십시오.”

지훈은 부러 경기에 진 것이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한 판 더 두고 이야기하지. 이리 강한 적수는 네가 처음이로다.”

관림이 능글능글 구렁이같은 미소로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경기를 쥐락펴락 했으면서 저런 말을 뱉는 것에 지훈은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었다.

“하시지요.”

지훈이 어느때보다 살벌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 판은 지훈의 압승이었다. 전 판과 달리 너무 쉽게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하여 얼굴을 옅게 찌푸리며 관림을 쳐다보자 관림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실실 웃는 것이었다. 말은 못해도 일부러 져 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소원을 얻었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분명 나중에 이 소원이 비장의 패가 될 터였다.

“토끼야.”

“예, 저하.”

“관림아, 해보거라. 내 소원이다. 매번 저하, 저하 하는 것이 지겨워 신물이 나는구나.”

관림이 부채를 부치자 한 가닥 삐져 나온 머리털이 나풀거렸다.

“예?”

“어서.”

지훈은 당황스러웠다. 어찌 하늘같은 태자에게 감히 낮춤말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인륜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해보래두.”

“저하 아니되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부터 임금과 아랫사람은 유별하였습니다. 임금의 도가 따로 있고, 신하의 도와 백성의 도가 또 따로 있는 것이옵니다. 임금의 도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임금을 잘 섬기는 것이며, 백성의 도는 임금을 잘 따르는 것이온데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저하를 아랫사람 다루듯 한단 말입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토끼야, 너는 내 신하도, 백성도 아니지 않느냐.”

“하오나…”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싶구나.”

지훈은 계속 갈등하다 입을 뗐다.

“관….림아..”

“예, 저하”

“…예쁜 호수에 데려와 구경시켜준 것 고맙구나. 덕분에 잠시나마 근심을 털어낼 수 있었다,”

“저하가 기쁘시다니 다행입니다.”

지훈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는데, 태자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조금씩 죄책감이 옅어졌다.

“관림아.”

“예.”

“네 체향은 무엇이냐. 맡아보아도 도통 모르겠구나. 너는 내 체향을 알면서 나는 모르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면 할수록 뻔뻔해지는 것이 지훈은 점점 관림에 빙의하는 것 같았다.

“음, 연꽃향이라 하더군요. 궁금증이 풀리셨나이까?”

“그래. 그럼 너 몇 살이니.”

“이천 삼십 세 살이옵니다.”

“……뭐라?”

“이천, 삼십 ,세 해를 살았습니다.”

“관림아.”

“예, 저하.”

“슬슬 돌아가자꾸나.”

“그러하지요, 저하.”

지훈은 태자와 놀 때에는 그리 신명이 나더니 방에 돌아오니 잊었던 근심 걱정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고민은 전보다 한 층 깊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태자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인 듯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육지에 올라가도 계속 태자를 그리워할 것만 같고, 그렇다고 바다에 남아 있으면 잡아먹히지 않느냐. 나는 선택의 기회도 없는 처지이니 이를 한하노라.’

그때, 태봉이가 드르륵 문을 밀어 열고 들어왔다. 전날 밤새 이야기를 하였는데, 태봉이는 인간으로, 세 살 때 바다에 버려져 이곳에서 시중을 들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육지로 올라가고 싶은 지훈을 누구보다 이해해주었다.

“무얼 그리 고민하세요, 나으리?”

“내가 용궁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는데, 뾰족한 해결책이 없구나.”

“태자 저하?”

지훈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어떻게 안 것이냐?”

“모르는 사람이 바보 아닙니까. 나으리께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태자 저하 밖

에 없는데요, 뭘.”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느냐?”

“용궁 살다보면 조개랑 거북이랑 눈 맞는 꼴도 보는데요, 뭘. 이정도는 약과입니다, 약과. 저가 용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할 수 있습죠.”

“…”

“그냥 같이 사랑의 야반도주를 하자고 말하싶쇼.”

“태자는 나에게 마음이 있을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매일같이 찾아가는 미련탱이가 어디 있단말입니까?”

“하긴, 어제 나더러 좋다고 하긴 하더라.”

“나으리, 참말로 이것은 초록불이옵니다.”

“초록불이 무엇이냐?”

“예로부터 초록은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록불이라 함은 파릇파릇한 사랑이 피어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냐. 정말 초록불이란 말이지,”

“그렇다니깐요, 저하. 제가 뭐 틀린 말 하는 거 보셨습니까?”

 

벌써 용궁에 온 지 나흘 째였다. 이말인 즉슨 잘못하면 살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관림이 찾아와 덜컥 문을 열었다.

“오늘은 넉넉히 시간을 주마. 천천히 옷 입거라. 내가 밖에서 기다리마.”

넉넉히 시간을 준다 하였으나, 지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어찌 밖에서 태자를 기다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후다닥 옷을 아무거나 집어 입고는 우리 저하 기다리실까 뛰쳐나왔다. 앞마당에는 어제 탔던 해마 둘이 또 있었다.

“타거라. 오늘은 전처럼 멀리 가지는 않을 것이다.”

태자의 뒤를 따라 도착한 것은 한 우물이었다. 그 깊이가 워낙 깊고 모레 속에 우물이 박혀 있어 관림이 우물이라 말해주지 않았다면 우물인 줄 몰랐을 법한 그런 곳이었다.

“이곳은 누지정이라는 곳이다. 이 속에 사는 무녀가 그리도 용하다고 하는구나.”

“헌데 이곳은 왜?”

“들어가 보면 알 것이다, 토끼야.”

“저하, 저 또한 토끼, 토끼 소리만 들으니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네 이름을 모르구나.”

“지훈입니다, 박지훈.”

“그래, 지훈아.”

새끼줄을 타고 내려가니 어디선가 본 듯한 무녀가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저하께서 몸소 찾아와 주시니 소인 영광이옵니다.”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전부터 뵙고 싶었으나 이제 겨우 방문하게 되었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으로 보시겠습니까?”

“사주를 봐주시오.”

“예, 그러하지요 저하. 시간이 조금 필요하오니 위에 올라가 계심이 어떠신지요.”

무녀가 우물 바닥에서 점 볼 준비를 하는 동안. 태자와 지훈은 다시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지훈은 원망하는 투로 관림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사주는 대관절 뭣하러 본단 말입니까?”

“네게 용궁의 운명이 달려있는데 사주를 보는 것이 어찌 이상하단 말이냐.”

“치. 어차피 잡아먹히면 다 똑같은 맛일 텐데 운명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잡아먹히다니?”

“내일 저 잡아먹힐 운명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마는, 토끼야. 아니, 지훈아. 잡아먹는다는 그 말이 너무 음험하고도 상스럽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때마침 밑에서 징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다시 내려오십시오.”

다시 밧줄을 타고 내려오자 무녀 앞에는 고문서 하나와 붓과 종이, 그리고 벼루와 먹이 놓여 있었다.

“우리 토끼 나으리부터 먼저 하지요. 태어난 해, 달, 날, 시각을 불러보십시오.”

“을묘년 오월 스물아흐레 자시입니다.”

“을묘년 오월 스물아흐레 자시에 출생한 토끼수인!”

무녀는 손에 불이 붙은 것마냥 고문서를 무서운 속도로 넘겼다. 무언가를 찾았는지 종잇장은 더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물 불 나무 흙 쇠 중 나으리께서는 쇠의 기질을 타고나셨습니다. 결단력 있고 강인하며 잡 생각과 잔 술수가 많으십니다. 허나, 중요한 순간에 둔하실 수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개벽하는 시간인 자시에 태어나셨으니, 세상을 바꾸게 되실 겁니다.”

‘세상을 바꾸겠지, 잡아먹혀서.’

“여기까지 걸음하셨으니 저하의 사주도 봐드리겠습니다.”

“임오년 구월 스물사흘 진시요.”

“임오년 구월 스물사흘 용궁의 태자!”

아까와 같이 무녀는 다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또 어느 지점에 책 넘기는 것을 멈추었다.

“저하께서는 물의 기질을 타고나셨습니다. 바다의 태자이시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융퉁성있고 주변 사람을 잘 포용하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을 잘 구슬려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그런 힘 또한 타고나셨습니다. 분명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실 것이옵니다. 허나, 굉장히 신중한 성격을 가지셔서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실 때가 종종 있으실 것이온데, 쇠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자를 베필로 삼으면 좋을 것입니다.”

“좋은 풀이 고맙구나. 내 너에게 일이 마무리 된 후 큰 상을 내리리다.”

 

“너는 네 사주 풀이가 마음에 드느냐?”

관림이 해마의 안장을 고치며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말 같으나 잡아먹혀서 세상을 바꾸게 된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합니다.”

“잡아먹힌다니, 상스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제하여라.”

“잡아먹히는 걸 잡아먹힌다 하는데, 별게 다 상스러우십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

“저하의 풀이가 저하와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부디 성군이 되소서.”

하하하. 하며 관림이 호탕하게 웃었다.

“돌아가자꾸나.”

지훈은 관림의 뒤를 따르며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하였다.

‘사주에서는 분명 태자와 내가 베필로 이어지면 대길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꼭 맞는 베필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속리산 무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단지 태자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꼬이고 꼬여 이상한 날짜에 만나 이렇게 된 것일 뿐. 안타깝고도 한스럽구나. 그래도 마지막까지 노력은 해 봐야지.’

지훈은 그 뒤로 계속 관림에게 말을 꺼낼 순간을 찾고 있었다. 곧 용궁 안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저하.”

“바람 때문에, 잘, 안들리는구나.”

정말 바람 때문에 태자의 말소리가 끊겨서 들렸다.

“태자 저하! 잠시 말을 멈춰 세워주십시오!”

이히힝 하는 소리와 함께 관린이 고삐를 황급히 잡아끌어 타고 있던 해마를 멈췄다.

“왜 그러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해보거라.”

“이튿날 제 방에 오셨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암. 기억하고 말고.”

“그 때 하셨던 말도 기억하시겠지요?”

“…”

“제가 좋다고 하셨지요.”

“…그래.”

“정말이십니까.”

“지훈아, 왕위를 이을 사람들은 말이다, 일찍부터 불필요한 말은 입에 담지 말라고 배운다. 쓸데없이 사족을 붙였다간 이쪽 저쪽에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 내가 왜 네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단 말이냐.”

“그렇다면 저하, 말도 안되는 말인 것 압니다만.”

“…”

“함께 육지로 나가 지내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저하의 벗, 계속 해드리겠습니다.”

관림의 얼굴 안색이 어두워지고, 살기가 엿보였다. 맹수의 눈빛이었다.

“나더러 동해를 져버리고 나라를 배반하란 말이냐.”

“…”

“네 말은 반역죄로 엄중히 처벌할 말이다.”

“저는 저하의 신하도 백성도 아니지 않습니까!”

관림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지훈을 빤히 쳐다보는 커다란 두 눈에 슬픔이 서렸다.

“그리도 육지가 그립더냐. 나를 위해 남아있으면 안되겠느냐.”

“내일이면 이 몸은!”

관림이 지훈의 말을 자르며 말하였다.

“못 들은 것으로 해줄 터이니 들어가서 다른 소원을 다시 생각해보거라.”

관림은 저 혼자 궁으로 들어가버렸다. 지훈은 앞서 저만치 가버린 관림을 한참동안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태봉아,”

“어떻게 되셨단 말입니까?”
“계략이 먹히지 않았으니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 아니겠니?”

“이상하네. 분명 초록불 맞았는데.”

하아아. 지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걱정이구나.”

“내일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배가 갈라진 뒤 못된 것들이 간을 꺼내서 즙을 만들겠지.”

“그렇게 끔찍한 일을 왕실에서 행한단 말입니까?”

“용궁에 있으면서 몰랐던게냐?”

“아무리 용궁살이를 하고 있다 하여도 용궁 분들이 워낙 무병장수하셔서 말이죠. 혼례식이나 대관식은 본 적도 없구요, 제사는 더더욱 없지요. 이런 의식같은 것은 저도 처음이란 말입니다.”

“네게 조언을 구하려 했으나 큰 쓸모가 없겠구나.”

휴. 태봉이와 지훈 둘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간을 빼먹는다 하셨죠.”

“그래.”

“간을 잃어버렸다 하십쇼.”

“…”
지훈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스쳐지나갔다.

“아니다. 이건 너무 터무니 없는 말이네유.”
“고맙다, 태봉아.”

 

드디어 닷새 되는 날이었으니, 곧 지훈의 운명이 결판나는 날이로다. 오늘은 아무리 지훈이라도 번쩍 눈이 뜨였다. 마음이 복잡하여 느릿느릿 내의 위에 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고, 꾸물꾸물 저고리를 입고, 저고리 위에 배자를 입고, 배자 위에 조끼를 입고, 조끼 위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갓 끊을 조여 매고 신을 신고 터덜터덜 태자의 거처로 향하였다. 담장을 돌던 참에 멀대 같은 것에 퍽 하구 부딪쳐 황급히 위를 보니 행차 중인 태자로다.

“어딜 그리 맥 빠진 송장처럼 가는 것이냐.”

“아, 저, 그게. 저하께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하더냐? 나도 네게 가는 중이었으니, 하마타면 길이 엇갈릴 뻔 했구나.”

어제 일은 다 잊은 것인지 얼굴 표정이 전과 같고 지훈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전과 다름이 없었다.

“오늘은 내 방으로 가자꾸나.”

방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열고 궁녀 하나가 들어왔다. 차림새로 보아 상궁이든지 높은 궁녀 같았다.

“유모, 앉으시오.”

늙은 여인이 다소곳이 지훈과 관림의 맞은 편에 앉았다.

“소인은 저하의 유모이옵니다. 지금부터 조금 후 있을 의식의 진행 순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수가 보이면 폐하께서 노하실 테니 모든 절차를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 잘부탁드립니다.”

 

‘태자 저하께서는 먼저 경전에 가 계실 것이옵니다. 나으리께서는 저와 함께 움직이셔야 합니다.’

지훈은 유모와 함께 경전으로 몸을 이끌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장내에 가득하였다. 이들이 경전에 들어서자 마자 수백개의 눈이 지훈을 보았다.

 

‘태자 저하는 폐하의 바로 옆에 서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평상복을 입은 모습만 보다 용궁에 온 첫날 이후로 태자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 하였다.

 

‘나으리께서는 폐하의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지훈은 몸을 옮겨 방석이 놓인 큰 의자에 앉고는,

‘이것이 용궁에서 태자를 볼 마지막 시간이 되겠구나.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어떻게 되든 간에 태자를 잊지 않으리.’

생각하였다.

 

‘그 후에 폐하께서 저하께 몇 가지 질문을 하실 것이옵니다. 자세를 꽂꽂히 유지하시고, 어떤 상황이라도 가만히 있으셔야 합니다.’

“태자야,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거라.”

“예, 아바마마. 저기 앉아 있는 토끼 박지훈은 예의범절을 갖추었고, 붙임성이 좋아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것 같이 보였습니다. 또한, 남들은 쉽게 내지 못할 용기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제 몸을 날려 저를 지켜 내기도 하였고, 꽤나 지혜로운 면모를 지녔습니다.”

“식에 적합한 인물이냐?”

“예, 저하. 이 토끼는 분명 의식에 적합한 완벽한 인물이옵니다.”

“그래, 네 마음에 들었단 말이지.”

용왕은 경전에 모인 신하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들었느냐? 이 토끼의 운명이 결정 났구나. 태자야, 준비해놓은 물건을 가져오너라.”

“예.” 하고는 태자가 주렴 달린 곳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물음이 끝나면 나으리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으실 것입니다.’

“토끼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주마.”

‘지금이다.’

“용왕 폐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사실 제 뱃속에는 간이 없사옵니다. 우리 토끼는 예로부터 신묘한 능력을 타고났으니 바로 간을 몸 밖으로 빼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라?”
“예, 들으신 대로입니다. 달에 사는 토끼라는 말도 있듯이 저희 토끼는 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달이 차올라 보름이 될 때까지는 간을 빼내어 깨끗이 씻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의 바위 틈 사이에 끼워 넣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달이 야위어 가면 간을 넣어 음기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토끼의 간이 예로부터 명약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술수를 쓰는 것입니다. 지금은 보름이 되기 하루 전으로, 제 몸에는 간이 없습니다. 대관식에 간이 필요하다 언질을 미리 주셨으면 이곳에 올 때 함께 가져왔을 것인데, 이것이 다 미리 말을 하지 않은 별주부 탓이옵니다. 다시 육지에 올라가게 해주신다면 대관식에 쓰일 제 간을 다시 가져와 기쁘게 드리겠습니다.”

파하핫.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토끼의 간이 대관식에 쓰인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더냐? 별주부야, 토끼에게 식에 대해 미리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냐?”

모든 시선이 별주부에게 모였다. 별주부가 느릿 느릿 말을 꺼내어

“저… 소신 미쳐 말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하였다.

“헌데, 전설 속에서 음기가 강한 토끼의 간을 대관식에 쓴다 하였고, 폐하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 하셨으니 대관식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용왕이 다시 와하하 하며 우레와도 같은 웃음소리를 냈고, 뒤따라 경전의 모든 신하들이 우하하 하며 용왕을 따라 하였다.

“토끼야, 우리가 치르는 의식은 태자빈 간택과 혼례식이다.”

“…?”

“지금까지 찾아본 태자빈감은 모두 관림이가 싫다 하여 거절하였다. 짐은 늙어서 하루 빨리 태자를 혼인시키고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는데, 혼례가 계속 깨지니 자연히 근심걱정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리산의 무녀에게 혼사를 의논하였더니, 네가 괜찮은 신붓감이라 하더구나. 헌데,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관림이가 싫다 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네가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이구나. 토끼의 간이라니, 과인은 그런 것 알지 못한다.”

지훈의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환희로 차올랐다.

“관림아, 나오거라.”

“예.”

태자는 옥 가락지를 들고 나와 의자에 앉아있는 지훈의 약지에 살포시 끼워주었다. 태자가 속삭이기를,

“정말 몰랐단 말이냐. 섭섭할 뻔 했구나.” 하였다.

용왕 왈,

“내일 정식으로 혼례식을 치를 것이다. 오늘은 피곤할 터이니 태자는 어서 토끼를 이끌고 네 방으로 들어가거라.”

“오늘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니, 건들지 않으마.”

“그렇다면 내일은?”

“네가 그리 노래를 부르지 않았느냐.”

“예?”

“예쁜 내 토끼 잡아먹어야지.”

지훈은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었으나 관림은 멀쩡히 신난 얼굴이었다.

“짖궂으십니다.”

“네가 한 말을 빌린 것 뿐이다.”

“다 알고 계셨지요?”

“…”

“제가 헛다리 짚었다는 것 말입니다.”

“글쎄.”

관림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우스우셨습니까, 제 꼴이.”

큼- 하고 관림이 헛기침을 하였다. 지훈이 이를 보고는 눈을 흘겼다.

“너와 단둘이 있으니 이리 좋구나.”

“…”

“그래, 아직도 그리 육지가 그리우니?”

“그것은 제가 간이 빼먹힐 줄 알았던 때였고, 지금은 육지에 미련이 없사옵니다. 저하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을 뿐입니다.”

“내가 좋으냐?”

“…”

“대답하여라.”

“예, 좋습니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예쁜 말만 하는 구나.”

“…”

“그럼 이제 소원은 무엇이냐.”

지훈이 잠깐 생각하였다.

“하나 있사온데,…”

“무엇이든 들어주마.”

“수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고 싶사옵니다.”

 

궁중에서 악단이 신나는 풍악을 올렸다.

신하들은 한입으로 말하였다.

“용왕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태자 저하 만만세!”

“태자빈 마마 만만세!”

정식으로 부부가 된 관림이 지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였다.

“부인, 준비 되었소?”

“무엇을 말입니까?”

“육지 구경이나 합시다.”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관림은 커다란 용으로 변해 제 빛깔을 뽐냈다. 그러더니 지훈의 목덜미를 살짝 물었다. 관림은 지훈을 입에 물고 바다를 뚫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날, 동해에 입가에 토끼를 문 용이 솟구쳐올랐다는 후일담이 전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