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라이관린의 상관관계
w. 올리

 

 

 

 

그 애는 비였다.

 

 

걔가 왜 비냐면 진짜 말 그대로 이름 뜻이 장마였기 때문이다. 또 걔는 하필 비가 주구장창 오는 여름을 좋아했다. 내가 걔를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었다. 자꾸 비, 비 거리니까 내가 무슨 가수 비, 그러니까 정지훈의 엄청난 팬 같은데 그건 아니고 그냥 걔가 좀 많이 비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다.

 

 

창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고 그 빗소리가 자장가 소리처럼 들려 수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졸음이 몰려오려고 할 때쯤 누가 뒷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인기척을 크게 내며 들어온 게 아니었음에도 나는 필연적으로 뒷문을 쳐다봤고 교수님이 그 애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그 애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걔의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했던 것 같다.

아, 이런 게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거구나.

 

 

 

*

관린은 LA에서 태어났다. 관린이 태어나자 마자 LA에는 비가 내렸다. 겨울을 제외하고 비가 거의 오지 않는 LA임에도 관린이 울거나 슬플 때는 비가 내렸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던 LA에 날마다 비가 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관린의 슬픔과 비가 오는 것의 상관관계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관린이 슬프니 비가 오는 것이고 관린과 관린의 부모님은 그냥 그 사실을 받아들여 대만으로 이사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만에서는 꼭 관린의 슬픔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비가 자주 내렸고 처음엔 자기 자신을 원망하던 관린도 해가 반복될 수록 슬픔을 참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자란 관린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선생님에게 예쁨 받는 아이였으나 자신의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았고, 교우관계도 원만했으나 적당히 라는 것을 알았다. 관린의 한국 행이 결정 되었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친구들의 많은 배웅 속에서도 관린은 울거나, 그렇다고 크게 웃지도 않았다. 그냥 적당히, 미소를 보이며 한국 가서도 연락하겠다는 심심한 말들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고 한국에 와서는 뭐 그냥 저냥 친구들과 지내고 고딩인 만큼 열심히 공부 해서 꽤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갔다. 딱히 OT에 참여하진 않았다. 일부러는 아니고 마침 OT날 다른 스케줄이 있었는데 괜히 참여했다가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OT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린을 안다고 할 만한 사람은 강의실에 아무도 없었다.

 

관린은 뒷문을 열고 강의실에 들어가 대충 사람이 많이 앉아 있지 않은 뒷자리를 골라 앉았다.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사람은 교수님이 관린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관린은 자리에 앉고 나서 아까 자신을 빤히 쳐다봤던 사람을 쳐다봤다.

 

그리고 관린의 옆에 앉았던 사람, 그 애는 박지훈이었다.

 

 

관린과 지훈이 듣고 있는 수업은 언어와 의사소통, 교양과목 이었다. 이 교양과목의 교수님께서는 첫날부터 풀강을 하셨으며 둘이 한 조가 되어 격주에 한번씩 만나 번갈아 가며 수업한 내용 + @를 가르쳐주고 가르쳐 준 내용을 정리하여 내는 것이 과제이고, 이 활동을 통한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을 중간고사와 대체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 팀플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절.지.팀.’ 즉,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지옥에서 온 언어와 의사소통 교양 팀플이었다. 지훈은 이 교양을 기피하는 선배들에게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바였다. 교수님께서는 앉은 위치대로 조를 불러나가셨고 따라서 맨 뒤에서 나란히 앉은 관린과 지훈은 한 조가 되었다. 관린과 지훈은 수업에 잘 참여하는 편이었으나 절대 혼자 제출할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무임승차 고민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둘은 어색한 인사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라이관린 이고 신방과 18학번이에요.”

“아 나는 박지훈, 2학년 이고 경영학과야.”

 

둘은 대화를 나누며 다시금 서로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 일단 우리가 이번 주나 다음주에 한번 만나야 하는데 어느 요일에 시간 돼?”

“저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선배님 편하신 날 하세요.”

“나는 평일 말구 주말이 편할 것 같은데 괜찮아?”

“네, 저희 그럼 그냥 이번 주 토요일에 봬요.”

“응응 그럼 네가 먼저 가르쳐 주는 거? 그 역할 할래?”

“네 좋아요.”

 

지훈은 수강신청을 완벽히 망한 덕에 친한 동기들이 하나도 없는 대신 뭣 같은 팀플이 즐비해 있는, 이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입실할 때까지만 해도 수강 변경을 꼭 할 것이라며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뭐 나름 순조롭게 계획을 세우고 나서 지훈은 이전의 생각은 깔끔히 접은 채 플래너에 관린과의 만남 약속을 적었다.

[2018.03.17 .토

언어와 의사소통 교양 – 18 *라이관린* 만나 절.지.팀.]

라이관린 이름에 깜찍한 별표를 달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우는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양 시작 전까지만 해도 혼자 꿀 빠는 교양이라고 소문난 교양에 수강신청에 성공한 진우를 보며 이 나쁜 놈, 배신자, 친구도 아닌 강진우, 아는 척도 하지 마라 등등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사람이 강의가 끝나고 나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진우는 의대생으로써 진지하게 지훈이 DID, 즉 다중인격인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훈아 너 괜찮은 거지?”

“응?”

“아냐, 밥 맛있게 먹자구.”

“야 근데 너 첫눈에 반해 본적 있냐?”

 

풉, 켁켁. 진우는 난데없는 지훈의 물음에 먹던 사래가 걸려 먹던 밥을 뱉을 뻔 했다. 그래도 진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훈의 물음에 답했다.

 

“왜,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응. 그런 듯.”

 

진우는 지훈과는 같은 동네 출신의 소꿉친구 사이였는데 잘생기고 키도 크고 심지어 엘리트였다. 그것도 초, 초 엘리트. 중학교 때까지 나란히 전교에서 놀다가 진우는 고등학교 때 자퇴했다. 자신의 꿈을 찾는 다나 뭐라나. 그것도 잠시, 진우는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지훈과 같은 대학교에 들어가겠다며 수능을 지훈과 함께 보고는 나란히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아무튼 그래서 지훈의 바운더리 안에서의 가장 똑똑한 사람은 강진우였다. 그래서 난데없이 이 질문을 던진 거고.

 

“쓰읍, 일단 말이야 지훈아. 모든 사람들은 예쁜 거에 환장을 해. 오죽하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있겠어. 그러니까 시각, 시각을 공격하라는 거지.”

“시각?”

“자 봐봐. 아니 근데 네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누군데?”

“나랑 같이 교양 듣는 1학년 키 큰 후배. 이번에 팀플 같이해.”

“암튼 내 말은 너의 그 구린 패션감각을 좀 고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난 정말 너를 볼 때마다 그 우주가 담긴 너의 눈이 정말로 안타깝다….”

“욕을 할거면 욕을 하고 칭찬을 할거면 칭찬만 해라.

“ㅋㅋㅋ 그리고 두 번째, 환한 미소. 너 무표정 좀 무섭단 말야. 환하게, 어디 놀이공원 알바하는 사람처럼. 오케이?”

“일단 오케이. 세 번째는?”

“세 번째가 젤 중요하지. 마지막은, 너와 그 후배 사이의 간격을 좁게 유지하는 것. 닿을락 말락, 닿을락 말락.”

“야, 근데 두 번 본 선배가 갑자기 자기한테 막 가까이 와. 그러면 무섭지 않을까?”

“아하이~ 그니까 자연스럽게, 어? 슬금슬금 간격을 좁히는 거지~.”

 

진우는 나름. 나름, 꽤 괜찮은 조언을 해줬다. 그래서 나중에 밥 사기로 약속도 했고, 둘만 알아들을 수 있게 ‘병아리’라는 호칭을 정하기도 했다.

 

 

“야, 진심 이게 괜찮은 스타일링 이라고 생각해?”

“그 너의 해괴망측한 반은 맨투맨, 반은 셔츠인 옷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거든?”

“너 나가.”

“아 미안 지훈아….”

 

관린과 만나기로 약속한 토요일, 진우가 죽어도 스타일링은 자신이 해줘야 한다며 지훈을 끈질기게 설득한 덕분에 둘은 지금 지훈의 자취방이었다. 둘은 서로의 패션센스를 지적하며 실랑이를 하다 결국 무난한 검은색 프린팅 티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기로 결정했다.

 

“야 근데 이 정도로 옷 골라줄 거였으면 나 혼자 했지….”

“나는 네가 또 빨간색 고추장 가ㄷ”

“진우야, 너 싸움 잘해?”

“아 아니..”

 

지훈이 진우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진우가 해줬던 조언 중 첫 번째인 환한 미소, 미소를 기억하며 관린과 만나기로 약속한 학교 주변 카페로 가니 관린이 지훈의 내내 고민한 스타일링이 무색하게 파란색 추리닝 바지에 검은색 프린팅 티, 검정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먼저 와 있었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다행이다. 마실 건 시켰어?”

“어 선배님 뭐 좋아하시는 지 몰라서 아직이요.”

“나는 아.아! 너는?”

“저두요. 제가 가서 시키고 올게요.”

 

지훈은 음료를 가지러 간 관린을 기다리는 동안 진우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카페 도착함.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

 

“여기요, 선배님.”

“고마워.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해 볼까?”

“네 일단 제가 준비해온 거는….”

 

지훈의 귀에는 사실 관린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애써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진우의 조언을 되새겼다.

환한 미소, 가까운 간격, 환한 미소, 가까운 간격, 환한 미소….

 

“근데 선배님 생각은 어떠세요?”

“어?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넵. 그럼 계속 할게요.”

“응.”

 

‘아 근데 무슨 수로 간격을 좁히냐고. 아아악, 내가 뭘 해봤어야 알지….’

그렇게 속으로 머리를 990529번 쥐어 뜯은 지훈의 눈에 보인 것은 관린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오리털이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 파카를 입고 다니던 사람들을 꽤 봤는데 그 때문인가? 생각 하던 지훈은 머리카락에 붙은 오리털을 때어주는 것을 핑계로 삼아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슬금슬금… 자연스럽게, 오리털을 핑계로…. 슬금슬금…’

그러나 지훈의 손이 관린의 머리카락에 거의 다가갔을 쯤 관린이 지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악!”

 

관린이 고개를 돌리는 상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훈은 관린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관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 봤다.

 

“어, 그게 너 머리카락에 오리털이… 오리털이 붙어있어서. 때주려고….”

“아 이거… 때문에 소리 지르신 거….”

“…미안. 계속해….”

 

관린은 지훈이 잡고 있는 오리털과 지훈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고서는 하고 있던 설명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민망하게 이게 뭐야…. 원래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제 얘 얼굴 어떻게 보려고… 돌았나 봐 박지훈….’

지훈이 온갖 원망을 자신에게 하며 또 멍을 때리고 있었을 때 관린이 다시 한번 불렀다.

 

“선배님 근데 괜찮으세요? 아까부터 안색이…. 열 나시는 거 아니에요?”

“어… 아냐 괜ㅊ”

 

관린은 지훈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지훈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안 나시는 거 같은데. 아니면 다른 날 다시 만날까요?”

“아니 진짜로 괜찮아…”

 

‘아 이렇게… 라이관린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거였구나….’

지훈은 결국 관린이 준비해온 내용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진우의 조언을 어떻게 실행할까 하는 생각에, 나중에는 자신의 실수가 민망해서, 끝에는 관린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면 다음 강의 시간에 봬요.”

“응, 잘 가.”

 

지훈은 관린과 헤어지고 곧장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뵹아리랑 수업은 잘 끝냈어?”

“야 나 큰일났다….”

“왜? 걔가 너 패션 구리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진짜 걔 좋아하는 거 같애….”

“어… 응…. 근데 내가 알려준 건 다했어?”

“아니….”

 

지훈은 진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진우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야 근데 강진우.”

“엉, 또 내 조언이 필요할 것 같어?”

“너 연애 몇 번 해봤냐?”

“나? … 모쏠인데?”

“….”

 

둘은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가 모쏠한테 조언을 들은 모쏠인 내가 바보지! 하는 지훈의 외침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 후로 열 번이 넘는 수업과 열 번에 육박하는 팀플 활동을 통해 지훈과 관린은 나름. 나름, 친해졌다. 물론 지훈의 노력이 이 관계의 8할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관린은 지훈을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지만 여전히 존댓말을 사용했고 지훈은 아직도 관린을 좋아하는 중이었다. 누가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으면 존경이고, 이유가 없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했었다. 지훈이 관린을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강의실로 들어오는 관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관린의 얼굴과 그 특유의 분위기에 반한 것이고 지훈은 그냥 그 사실을 받아들여 관린을 쭉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관린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관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부모님밖에 없었다. 관린의 20년 인생사에서 비밀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관린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슬픔을 잘 참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훈은 눈치가 빠른 타입이었기에 관린의 그런 성향을 눈치챘을 것이다. 친절하지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예쁨 받을 짓을 잘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노력하지도 않는, 그런 관린의 성향을 말이다.

 

“으으, 드디어 이 수업도 끝이네!”

“수고하셨어요, 형.”

“관린아 내일 너 공강이지?”

“네, 공강이에요.”

“그럼 어… 나랑 저녁 겸 술 같이 안 먹을래?”

“좋아요.”

 

관린은 쉽게 지훈의 제안을 승낙했다. 관린의 말에 지훈은 관린에게 먹고 싶은 메뉴가 있냐고 물은 뒤 대답이 없자, 그럼 삼겹살이지!를 외치며 앞장서 걸어갔다. 사실 지훈은 관린과 뭐라도 하나 더 같이 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었으며 거절하지 않을 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사는 거니까 얼른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역시 삼겹살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 거 같애.”

“맛있게 드세요 형.”

 

둘은 분위기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조금은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아갔다. 그리고 지훈은 알코올의 힘을 약간은 빌려 전부터 궁금 했던걸 물어보기로 했다.

 

“관린아, 근데 너는 왜 애인 안 만들어? 고백 같은 거 많이 받지 않았어?”

“애인이요? 그냥 소개팅 이런 거두 귀찮구 저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첫눈에 반하는 거.”

“아, 그렇구나…. 그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음… 네, 있어요.”

 

지훈은 관린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 마음과 자신이었으면 하는 기대를 술과 함께 삼켰다. 관린이 지훈과의 저녁 겸 술 약속을 승낙하기 전 간과 한 것은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 박지훈은 주량이 맥주 두 캔과 이슬 톡톡 한 캔 이라는 것.

둘째, 박지훈은 주사가 애교 부리기 라는 것.

 

“야 이관닌… 너 왜케 잘섕겨가주구 사람을 이르케 힘둘게 하눈고야아….”

“형도 잘생겼어요.”

“그른 말이 아니잖어어! 어? 너 말야, 사라믈 이케 잘 챙겨주는 척 하면서, 표현두 안하구, 내가 그르케 너를 찾아 다니는데, 받아주지도 않구 말이야!”

“그럼 형, 제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너 비밀 아니기만 해바라… 호온난다아!”

“그 제가 슬프면, 슬프면 있잖아요…. 제가 있는 곳에 비가 와요.”

“….”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되게 무서웠어요. 제가 울기만 하면 밖에서 막 천둥번개가 치니까, 부모님도 제가 울면 다그치시니까. 그래서 제 감정을 잘 안 드러내게 됐어요. 친절하되, 감정 없이. 예쁨 받되, 적당히. “

 

셋째, 박지훈은 주량을 넘겨 마셔도 한번도 필름이 끊겨 본적 없다는 것.

 

 

그래서 박지훈은 어제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부렸던 주사, 관린이 털어놓은 비밀, 전부. 지훈은 전부터 관린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라이관린도 날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강의나 팀플이 없는 날에는 문득 생각나고, 이런저런 핑계로 연락도 해보고, 원래 후드티와 추리닝을 주로 입던 지훈이 관린이는 날 어떻게 볼까 엄청 신경 쓰며 꾸미던 것도 관린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전부. 그래서 지훈은 관린이 술김에 라도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와도 된다 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시에 관린은 정말 자신의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혹시 이미 들켜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훈은 이런 감정에 처음이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고 서툴렀다.

 

 

 

*

“관린ㅇ….”

“관린아!”

“어, 민혁아.”

“어디 가는 중 이었어? 밥은 먹었고?”

“밥 아직 안 먹어서 그냥 학식 먹으러 가는 중.”

“그럼 나랑 같이 먹자. 나도 아직 안 먹었어.”

“그래.”

 

나는 사실 같이 밥 먹으면서 관린에게 물어볼 말들을 벌써 생각해놨었다. 그리고 막연히 나와 함께 밥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이관린은 누구에게나 적당히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관린이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이유는 내가 술 취한 상태이고 어차피 내일이 되면 기억을 하지 못할 거라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심정으로 털어놓은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게 나는 며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 동안에 혼자 합리화도 해보고, 헛된 기대도 해보고, 하지만 또 역시나 원점으로 돌아와 상처받고…. 누가 짝사랑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포기하고 싶어도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서 미련을 못 버릴 때라고 했었다. 지금 내가 딱 그런 상태다. 포기해야 되는데, 포기하고 싶은데, 자꾸만 라이관린이 생각나 그럴 수가 없었다. 또 누가 그래도 짝사랑을 끝내는 방법은 포기하거나, 고백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편의점에 가 맥주를 두 캔 사 들고 편의점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냥 포기를 선택했다. 포기한다고 해서 당장 마음이 접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냥 좀 피하고, 무시하고, 그러다 보면 뭐든 선택이 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연락도 항상 내가 했으니 뭘 피하고, 무시하고 할 것도 없었다.

 

「형, 뭐하세요?」

 

라이관린 이었다.

아, 타이밍 참, 지금 막 짝사랑 접으려는 큰 결심했는데 그 짝사랑의 대상이 안 도와주네….

 

「지금 집에 계세요?」

 

전에 학교 주변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아서 내 집에서 팀플을 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술 먹었을 때도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점점 우중충해지기 시작했다.

 

널 만나고 매일 새로워져,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려서~♩♪

 

문자를 보지 않으니 전화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곡인 크러쉬의 ‘HUG ME’가 편의점 앞에 울려 퍼졌다. 반팔에 긴 바지를 입고 나왔더니 더운 감이 없잖아 있어 집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하늘이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새까맸다.

 

심장이 뜨거워 너무 뜨거워서, 괜히 널 바라보면 낯뜨거워져~♩♪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갑자기 라이관린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쏟아져 내렸다. 나는 우산이 없어서 그냥 비를 맞으며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라이관린이 있었다.

 

“왜 문자도 안보고 전화도 안 받아요?”

“….”

“저랑 술 먹은 다음날 같이 점심 먹으려고 강의실 근처까지 왔었다면서요.”

“….”

“형 필름도 잘 안 끊긴다면서요? 근데 왜 아무 말 안 했어요. 이런 얘기를 왜 진우 선배한테 들어야 해요, 제가?”

“일단 비 맞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하자.”

“이 비가 무슨 비인지 알아요? 지금이 아무리 여름이어도 장마기간은 아니에요. 제가 여태까지 꾹꾹 참으며 살았는데, 그랬는데… 형 때문에 슬퍼서, 내가 지금 슬퍼서 내리는 비에요.”

“왜 슬픈데, 네가 나 때문에 왜 슬픈데.”

“내가 형을 좋아하니까. 이제서야 좀 표현해볼 용기가 생겼는데, 처음으로 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이 형인데! 형이… 나를 피하려고 하니까.”

 

비가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라이관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