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면 우리는
w. 럼

 

 

 

비가 내리는 건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푹푹 찌는 더위가 계속 되었는데, 말도 안 되게 해가 모습을 감추고 굵은 빗방울만 하늘에서 떨어졌다. 기온이 높지 않은데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으니 자꾸 으슬으슬 추웠다. 그래도 그 더위가 계속되는 것보다야 낫다고, 반팔 아래 차가워진 팔뚝을 자꾸만 문지르며 생각했다. 비가 오는 게 여전히 반갑기도 했고.

 

제출 기한이 며칠 남은 과제를 끝내가는 중이라 마음이 여유로웠다. 비 오는 날 열람실에 가는 건 최악이었는데, 다행히 본관 폐관 시간 전까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책을 뒤집어쓰고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지훈은 관린을 떠올렸다. 관린의 번호는 아직 지우지 않았다. 최종파일을 저장하고 가방을 챙겼다. 머릿속에선 관린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날도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도서관을 나갈 때까지 망설이다가 문자를 남기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학교야?」

「우산 있어?」

 

지훈은 후문 근처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실 동안만 답장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관린을 처음 마주친 날도 딱 이 정도로 비가 왔다. 4월의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학교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조금 흐린 정도였는데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마침 골목 입구의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어서 지훈은 바로 우산을 샀다. 돈은 아까웠지만 도저히 맞고 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방 안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도 많았다.

 

편의점에서부터 자취방까지는 꽤 걸어야했다. 가방이 젖지 않도록 지키며 느리게 걸었다. 옆으로 키가 큰 남자가 가방을 안고 뛰어갔다. 비를 꽤 맞았는지 이미 옷에 비의 흔적이 많이 남았다. 이쪽으로 가는 걸 보면 어차피 비슷한 골목에서 자취를 하는 게 분명하다. 저기요, 목소리를 크게 내어 지훈은 그를 불러 세웠다. 빠르게 뛰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돌아보던 순간을 지훈은 생생히 기억한다.

 

“우산 같이 쓰죠?”

 

우산을 조금 내미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사양 않고 지훈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지훈보다 꽤 컸다. 지훈 옆에 서서 비에 젖은 앞머리를 정리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웃었다. 어디선가 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서 지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관린이었다.

 

관린의 자취방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었다. 지훈은 두 번째 꺾어 들어가기 직전의 건물에 살지만 관린을 데려다주기로 했다. 가는 동안 짧은 대화를 나눴다. 관린은 지훈보다 두 학번 아래이며 신문방송학과라고 했다. 잘하면 언론정보관에서 자주 마주치겠다고 지훈은 대꾸했다. 지훈은 관린의 건물 현관 앞까지 같이 갔다. 우산을 접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가려는데 관린이 붙잡았다.

 

“감사해요. 잠깐 들어오실래요? 비 그칠 때까지 잠깐 있다 가세요.”

 

그 말에 지훈은 하마터면 우산을 접을 뻔했다.

 

“남은 과제가 있어서. 그리고 너 샤워부터 해야 될 것 같은데.”

“아…… 그럼 번호라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꼭 보답하고 싶어서.”

 

순순히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관린이 번호를 묻는 것이 순간 설렜다. 이래도 되나 싶어서 지훈은 서둘러 돌아섰다.

 

지훈은 자신의 자취방에 도착해 샤워부터 했다. 머리를 헹구다가도 좀 전에 젖은 머리칼을 넘기며 웃는 관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관린에게 고맙다는 메시지와 커피 기프티콘이 도착해 있었다. 별 보답은 아니지만 기분은 좋다고 생각할 때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시간 될 때 밥 한 번 사고 싶어요.」

 

당장 가능한 시간을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조금 뜸을 들이고 싶어서 지훈은 그 문자를 붙잡고 침대에서 굴렀다. 아까도 홀랑 쫓아서 관린의 방까지 들어갈 뻔했는데. 물론 과제가 남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랬으면 지금쯤 샤워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려나. 그 다음엔? 자꾸 상상이 깊어졌다. 몹쓸 생각을 떨쳐내려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어서 답장을 해야 했지만 예의상으로라도 그럴 필요까지 없다곤 하기 싫었다.

 

결국 문자를 씹은 꼴이 된 채로 날이 지났다. 날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기온이 떨어졌다. 아침 공기는 꽤나 쌀쌀했다. 그냥 나설까 하다가 어제 비가 왔던 생각에 날씨를 확인하고 우산을 챙겼다. 비는 오전부터 내렸다. 수업에 집중이 안 돼서 지훈은 창 밖에 비가 내리는 것만 구경했다. 마침 이 수업만 끝나면 점심을 먹을 차례였다. 지훈은 몰래 관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우산 가지고 왔어?」

 

답장이 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요 저 우산 없어요.」

 

문자를 주고받다보니 둘은 마침 점심시간도 얼추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린이 밥을 사기로 해서 지훈은 수업이 끝난 후 언론정보관 라운지에서 기다렸다. 곧 관린이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관린은 지훈도 자주 가는 집에서 라멘을 샀다. 음식은 좋지만 일렬로 앉는 식당이라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식사를 빨리 끝내서 시간이 남았기에 바로 옆의 카페에 갔다. 관린이 커피까지 사려고 해서 지훈이 극구 말렸다.

 

“감기는 안 걸렸나 보네.”

“네. 어제 씌워주신 덕분에.”

“앞으로 또 우산 안 가져오면 연락해.”

“그럴게요.”

 

관린이 대답하자마자 테이블에 올려둔 지훈의 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고는 지훈은 서둘러 폰을 뒤집어두었다. 그러고도 전화가 두 번 더 왔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받을 때까지 걸려올 것 같아 지훈은 폰을 집어 들었다.

 

“그냥 전화 받아요.”

 

지훈은 수신 거절을 택했다. 수업 중입니다, 하는 자동 응답 메시지를 보냈다.

 

“급한 전화 아닐 거니까 괜찮아.”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관린에게 알릴 이유는 없었다. 지금 뭐하냐는 살벌한 답장이 돌아왔지만 지훈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둘은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얼굴을 볼 건수는 없어서 서로 불러내지는 않았지만 거의 서로의 연락을 기다리는 느낌이 돼버렸다. 매일 같이 그러다보니 지훈이 갑자기 하루 종일 답장을 한 게 관린으로서는 의아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어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수업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가까워져서 관린은 저녁을 먹고서도 도서관에 남아 있었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폰을 확인하며 지훈의 답장을 기다렸다.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열시를 넘기지 못하고 가방을 싸서 나왔다. 낮부터 비가 내리더니 밤에는 빗줄기가 꽤나 거셌다. 오늘은 우산을 챙겼냐는 문자도 오지 않았다. 관린은 집으로 걷는 내내 지훈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고민했다. 지훈이 처음 우산을 씌워줬던 곳을 지나면서는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신호음을 들으며 걷다가 골목 끝에서 지훈을 발견했다. 관린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을 멀뚱히 보기만 하며 비를 맞고 있었다. 관린은 얼른 지훈에게로 달려가서 우산을 씌워주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사라지자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었다. 빗속에 얼마나 서 있던 건지 입술이 파랬다. 관린은 마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지훈의 얼굴을 감싸고 파란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그대로 우산 속에서 지훈에게 입을 맞추는 상상을 했다. 넋이 나간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인상을 쓰고 진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지훈은 말없이 관린을 따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길 싫어하는 것 같아서 관린은 자신의 자취방에 지훈을 들였다. 관린이 먼저 들어가서 현관에 수건을 깔아주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해요.”

“고마워.”

“옷은 문 앞에다 벗어두면 제가 정리할게요.”

“응.”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지훈이 옷을 벗을 동안 관린은 아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 시선이 갈 것 같았다. 욕실 문을 닫는 소리가 나고서야 다시 몸을 돌렸다. 관린은 지훈이 벗어둔 옷을 건조대에 잘 걸어두었다. 욕실 안에서는 샤워기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물을 맞으며 서 있는 것 같았다. 관린은 지훈이 나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욕실에서 나왔을 땐 지훈의 입술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차갑게 식었던 몸도 온기를 되찾았다. 몸을 수건으로 둘러싸고 나온 지훈을 봤을 때 관린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관린 쪽을 힐끔 보고 문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옷을 입었다. 어깨는 딱 맞았지만 소매는 좀 남았다. 조심스레 좁은 침대로 올라가 관린의 옆에 앉았다. 또 한참 침묵이었다. 멍하니 허공만 보며 생각에 잠긴 지훈이 처절해보이기까지 해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빤히 지훈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지훈이 고개를 돌려 관린을 보았다. 마주친 눈이 또 울 것만 같아서 관린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지훈이 기대앉은 벽을 잡고 상상처럼 입을 맞췄다. 이러다 뺨을 한 대 맞아도 좋았다.

 

다행히 지훈이 관린을 때리는 일은 없었다. 지훈은 가만히 관린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눈을 감자 볼을 타고 뜨겁게 눈물이 흘렀다. 관린은 팔을 접으며 지훈을 좀 더 밀어붙였다. 지훈이 부드럽게 관린의 윗입술을 머금으면서 둘은 좀 더 본격적으로 임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몸이 기울었다. 관린이 지훈을 눕혔을 때 지훈은 팔을 뻗어 관린의 목을 안았다. 둘의 다리가 서로 얽힌 야릇한 자세가 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훈은 관린의 혀가 자신을 더 부드럽게 옭아매기를 원했지만 떨어지는 입술을 붙잡진 않았다.

 

“자고 갈래요?”

“응. 딱 잠만 잘래.”

“그래요 그럼.”

 

관린은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소매로 반쯤 덮인 손으로 지훈이 관린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안아줄 수 있어?”

 

정말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린은 대꾸하지 않고 얌전히 지훈 옆에 누워 팔을 벌렸다. 지훈이 조금 다가가자 관린의 품에 지훈이 안겼다. 지훈은 이마를 관린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관린의 손은 차마 지훈의 등을 감싸지 못하고 허공에서 갈 곳을 잃었다. 완전히 경직된 상태였다.

 

“미안해.”

 

지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자 관린이 조심스럽게 지훈의 뒤통수를 감쌌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살며시 쓰다듬었다. 가볍게 샴푸 냄새가 풍겼다. 지훈은 그 손길이 편안해서 눈을 감았다. 너무 곤히 잠든 바람에 관린은 한참동안 지훈이 벤 팔을 빼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관린은 눈을 뜨기 전에 옅은 빗소리를 먼저 들었다. 먼저 깨어있던 지훈은 낌새만으로도 관린이 깬 걸 눈치 챘는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침 여덟시야.”

“비가 안 그쳤나 봐요.”

“응. 밤새 계속 내리더라. 요즘 비가 많이 오네.”

“밤에 깼었어요?”

“자주.”

 

가지런히 포갠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지훈이 관린을 보며 말했다. 방 안에 빛이 거의 없었지만 지훈의 얼굴선이 선명히 보였다. 한참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았다.

 

“형 근데 큰일났다.”

“왜?”

“비 오는 날 세 번 마주치면 운명이래요.”

“뭐야. 누가 그래?”

“제가요.”

 

내내 낯빛이 어둡던 지훈이 그 말에 작게 웃었다. 다행이었다.

 

“완전 개수작이네.”

“안 통했어요?”

“조금 더 하면 통할지도?”

 

팔로 침대를 짚고 지훈이 일어나려고 했다. 관린이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눕혔다.

 

“집에 가려고요?”

“안 가면?”

“아침 먹고 가도 되는데.”

“사양 안 할게.”

“근데 저 아침 좀 늦게 먹는 편이어서.”

“그럼 더 좋고. 나 지금 좀 들어가기 힘들거든.”

 

관린은 왜냐고 묻고 싶었다. 어제 지훈이 비를 맞고 서 있던 이유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말이 쉽게 나오진 않았다.

 

“나 어제 헤어졌거든.”

“아…….”

“아침 늦게 먹을 거면 나 좀 더 자도 돼?”

“더 자요. 또 안아줄까요?”

“응.”

 

지훈이 다시 잠들 때까지 품을 내어주고 관린은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중간고사 기간이 코앞이다 보니 사실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급해지다가도 지훈의 잠든 얼굴을 보면 덩달아 차분해졌다.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며칠 밤은 새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지훈은 관린을 불러냈다. 그 날도 공교롭게 비가 왔다. 아주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여서 우산이 없어도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관린은 여섯시에 시험이 끝나는 지훈의 우산을 빌려 썼다. 우산 때문에 맺어진 지독한 인연이라고 지훈은 농담을 했다.

 

같은 날 시험이 끝난 둘은 술을 마시러 갔다. 엄연히 말하자면 관린은 대체 과제가 하나 남은 상태이긴 했다.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지훈이 산다는 술을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딱히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관린은 그게 그 날 신세진 것에 대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의 일은 둘 다 그 이후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훈은 모듬전과 꿀 동동주를 시켰다. 작정하고 달리고 싶은 것 같기에 관린은 자제를 했다. 술 대신 냉국을 자꾸 마셨다. 지훈은 쉽게 얼굴을 빨개지는 편인 것 같았다. 조금 술기운이 올라오자 관린이 묻지 않아도 지훈이 먼저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훈은 전 애인은 ‘선배’라고 칭했다. 취기 때문인지 말이 좀 격해지기도 했다. 선배 그 새끼는 날 존나 애새끼로 봤어. 관린은 지훈의 전 애인 욕을 들으면서도 내심 질투가 났다. 그 인간은 뭔데 지훈의 머릿속에 이토록 진한 기억을 남긴 걸까, 어떤 형태로든.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헤어졌을까. 관린은 턱을 괴고 몸을 한껏 앞으로 기울인 채로 지훈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살벌하게 욕을 하다가도 술이 달다며 배시시 웃는 게 좋았다. 지훈이 많이 취했을 때 관린은 은근하게 물었다.

 

“형. 그 선배는 여자에요, 아니면 남자에요?”

 

지훈은 그저 관린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중간고사보다는 사실 그 이후가 훨씬 바쁜 기간이었다. 5월 내내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과제에 시달렸다. 잠시 숨 돌릴 틈조차 없을 정도였기에 서로 연락이 뜸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은 지훈이 관린의 연락에 답장을 잘 하지 않는 게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예민한 시기에 주고받는 잦은 연락은 오해를 일으키기가 쉽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당시엔 이별의 충격에 시달리는 것 같더니 제 일에 몰입하고는 남은 흔적을 정리하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빠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 남은 발표 과제까지 해치우고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차근차근 하나씩 정리해나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정리할 것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지훈은 제게 남아 있던 전 애인의 흔적을 싹 지워버리기로 했다. 연락처도 사진도 싹 정리했다. 종종 붙어서 시간을 보냈던 자취방에서도 그의 흔적을 싹 지워버리고 싶었다. 붙잡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별은 꽤 충격이 컸다. 그간 쌓인 게 많아 그에 대한 욕을 많이 하긴 했지만 사실 헤어짐의 이유는 지훈에게 있었다. 더 정확히는 관린에게 있었고. 사이가 틀어진 것은 지훈이 관린과 함께 카페에 있었던 날, 전화를 무시한 것이 계기였다. 선배가 지훈의 시간표 쯤 모를 리가 없었는데 수업 중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댄 게 화를 불렀다. 어떻게 잘 넘어가나 싶더니 이미 그때부터 선배에게서 마음이 뜬 건지, 마음이 관린에게로 기운 건지 자꾸만 그의 앞에서도 관린과 연락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게 걸려서 대판 싸웠다. 말다툼을 하면서 그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잔뜩 해버렸다.

 

날씨가 별로 안 좋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어서 지훈은 이불을 가지고 코인 빨래방에 갔다. 부피가 많이 큰 편도 무거운 편도 아니었지만 우산을 쓰고 들고 가려니 조금 힘이 들긴 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 지훈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피곤해서 벽에 기대 있었는데 자꾸만 졸게 됐다. 최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었다.

 

꽤 오래 잠을 잔 것 같았다. 지훈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관린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린을 보았다.

 

“지금 비가 꽤 와서. 잠깐 피하려고 들어왔는데 형 있어서. 이거 제가 건조까지 돌려놨어요.”

 

관린은 세탁기를 가리키고는 뿌듯해했다. 곧 건조가 끝났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러니까 지훈은 세탁에 건조까지 할 동안 잠을 잤고, 그 앞을 관린이 지켰다는 얘기였다.

 

“우산 네가 들면 되겠다.”

 

지훈은 이불을 한 아름 안아들었고, 관린은 지훈의 집까지 우산을 들어줬다. 자연스럽게 지훈은 관린을 집 안으로 들였다. 건조할 때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느낌이 좋아서 내려놓기 전에 이불을 안은 채로 관린의 품에 안겼다.

 

“따뜻하지?”

 

관린은 가만히 마주 안아주는가 싶더니 이불을 침대로 던져버리고는 그 위로 지훈도 던지듯 넘어뜨렸다. 푹신한 이불 사이에 지훈이 폭 감겼다.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관린은 지훈의 위로 올라탔다. 지훈은 관린을 올려다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관린은 미소 짓는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갰다. 지훈은 살며시 입술을 벌려주고는 다리를 교차시켜 관린을 꽉 붙들었다.

 

방금 깨끗하게 빨아온 이불을 다시 더럽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지훈은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서는 곤히 자는 관린에게 물었다. 고백은 언제할 거야?

 

 

 

 

관린은 그 이후로 지훈을 피했다. 비가 오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마음속으로는 핑계를 댔다. 해가 쨍쨍한 날 연락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관린은 지훈을 찾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같이 자기까지 한 사이가 됐는데 갑자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관린은 아직 지훈의 마음을 모르겠다.

 

그러다 한 번은 지훈을 언론정보관 라운지에서 마주쳤다.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관린에게 인사했다. 연락이 없다는 얘기를 바쁜가 보네, 하는 말로 대신하는 지훈이 부러웠다. 연란을 피하고 있던 게 자신이 아니라 지훈이었다면 관린은 꽤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훈은 태연하게 관린을 대했다. 요즘 바빠요,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억지로 하고 지훈을 그대로 지나갔다.

 

관린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연락하지 않는 순간들도 자신만 지훈에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억울했다. 다른 것들로 머리를 채우며 지훈을 조금만 밀어내고 싶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어도 지훈을 찾지 않았다. 우산이 있는 동기에게 골목까지만 같이 가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지훈을 마주쳤고. 결국 지훈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뭐하자는 거야?」

 

누가 봐도 지훈이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린이 답장을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고작이었다.

 

「제가 뭘요.」

 

지훈은 그 문자에 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둘은 한참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관린은 후회했지만 그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다.

 

 

 

 

「학교야?」

「우산 있어?」

 

그 문자가 왔을 때 관린은 사실 가방에 우산이 있었다. 더 이상 우산을 핑계로도 지훈을 불러낼 수 없으니 잘 챙겨 다녔다. 그래도 지금은 없어야만 했다. 관린은 들떠서 계단을 같이 내려오던 동기를 붙잡고 물었다.

 

“야, 너 우산 없다고 했지?”

“어.”

“이거 가져가.”

“너는?”

 

관린은 대답할 새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가면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뻔뻔하게 거짓말도 했다.

 

“형. 저 우산 없어요.”

“그럼 후문 앞까지만 뛰어올래?”

“네. 금방 갈게요.”

 

언론정보관에서부터 후문까지는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관린은 정말 죽어라 뛰었다. 후문 바로 앞에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에는 우산을 든 지훈이 있었다. 관린은 그 우산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훈은 자연스럽게 관린에게 우산을 넘겨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골목에 들어서며 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린 너무 비 오는 날만 만나는 거 같아.”

“전 좋은데.”

 

형이랑 우산 같이 쓸 수도 있고. 관린은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전 비오는 날 좋아해요.”

“좋아해?”

“좋아해요.”

 

발걸음이 멈췄다. 지훈은 관린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비 안 오는 날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비 안 오는 날도 좋아해요.”

 

관린은 아예 지훈을 보고 섰다. 약간 서로 안고 있는 자세가 됐다. 관린은 들고 있던 우산을 조금 낮췄다. 주변이 가려지고, 눈에는 오로지 지훈만 담겼다. 둘은 상상처럼 다정하게 우산 속에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