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niable
w. 유리스틴

 

 

5월에 들어서니 날씨가 제법 더워졌다. 따가운 한낮의 햇살에 셔츠가 땀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 관린이 곧장 유리문을 밀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길을 찾는 건 어려운 과제였다. 다행히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쏟아졌다. 그제서야 불쾌했던 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카페 입구에 선 채로 관린은 잠시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안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관린아! 이 쪽이야. 여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관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관린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팔에 걸치고는, 저를 향해 손짓해보이는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토요일 낮시간이라 그런지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발디딜 틈없이 차 있었다. 비좁은 매장 안을 지나 겨우 다가간 테이블 위에는 얼음이 살짝 녹은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형.”

 

“빨리 왔네. 얼른 앉아.”

 

 

 

세상에 하나뿐인 저의 형, 린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관린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덥지, 하며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관린 쪽으로 밀어주었다. 뭐 마실래? 하고 묻는 말에 나도 아메리카노. 대충 대답한 관린이 팔에 걸쳤던 자켓을 내려놓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컵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밖이 어찌나 더웠는지 아직도 뒷목이 축축한 느낌이 났다. 그런데 테이블에 나머지 아메리카노 한 잔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관린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린즈에게 물었다.

 

 

 

“근데 왜 혼자야? 같이 온 거 아니었어?”

 

“아, 잠깐 화장실 갔어. 금방 올거야.”

 

“아..”

 

 

 

그럼 니꺼 주문하고 올게, 잠깐 있어. 관린이 그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가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마침 저기 오네.”

 

 

 

린즈가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뒷쪽을 가리켰다. 린즈가 가리킨 곳을 향해 관린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관린아, 인사해. 이쪽이 이제부터 네 형수님 될 사람.”

 

“안녕하세요.”

 

 

 

엷은 갈색머리에 작은 체구를 가진 누군가가 다가와 제게 고개 숙여 인사해보였다. 린즈가 제게 형수님이라고 소개한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관린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 관린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하지만 절대 이곳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하얀 피부, 커다란 눈동자. 오똑한 코와 색이 짙은 입술…

 

 

 

“박지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심에 쐐기를 박는-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박지훈..? 이게.. 정말이라고..? 네가?

 

 

 

분명 그 이름을 제 귀로 듣고 나서도 관린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뭔가가 잘못된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눈앞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형이, 형이 뭔가 잘못 안 걸거야. 아니면 내가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거거나.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과 의심들이 오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가설도 떠오르지 않았다. 관린은 혼란과 당황스러움 속에 지훈의 얼굴과 형의 얼굴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린즈가 왜그러느냐는 듯한 얼굴로 관린에게 물었다.

 

 

 

“관린아, 넌 왜 그러고 서 있어? 형수님한테 인사해야지.”

 

“……”

 

 

 

말도.. 안돼.

 

이게 지금.. 도대체 어떻게.

 

…정말 내 형수님이라고? 박지훈이?

 

 

 

 

 

관린은 이미 머리가 굳어버려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지훈이 태연하게 제 앞으로 손을 내밀며 꺼낸 말에.

 

관린은 완전히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잘 부탁드려요, 도련님.”

 

 

 

 

Undeniable

 

1

 

 

 

-그래, 그래서 관린이랑 당분간 같이 살게 될거야. 둘이 앞으로 계속 얼굴 볼 사이니까 빨리 친해져둬. 그래야 나도 편하지.

 

 

 

관린은 여전히 뭔가 잘못된 거라고,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든 상황이 관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훈을 소개받기 전부터 이미 관린은 린즈의 집에 당분간 들어가 살기로 얘기를 다 끝낸 후였다. 이제 와 갑자기 그러지 않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지훈을 소개받고 난 직후에 그런 얘기를 꺼낸다면 린즈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 뻔했다. 다른 변명이라도 둘러대 보려 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관린은 그야말로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 지훈과 얼굴을 맞대고, 그것도 형과 셋이서- 같이 살아야 한다니. 그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박지훈.

 

 

 

“도련님, 와서 식사하시고 하세요.”

 

 

 

결국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다가온 관린의 이삿날. 몇 안되는 이삿짐을 나르다 말고, 지훈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관린은 들고 있던 잡동사니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 앞에 지훈이 제 쪽을 보며 서 있었다. 관린은 방문 앞으로 다가가 빠르게 문밖을 한번 살폈다. 형은 베란다에서 화분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린즈가 이쪽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관린이 곧바로 지훈을 향해 말했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형수님.”

 

 

 

그리고 지훈의 손목을 거세게 틀어잡고는 무작정 방안으로 그를 끌고 들어왔다.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지훈을 보니 지훈은 붙잡힌 손목이 아픈지 다른 손으로 제 손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인상을 찌푸린 얼굴을 보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관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형에게 처음 지훈을 소개받은 그 날 이후로 자신은 며칠째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관린은 이미 제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냉랭한 눈빛으로 지훈을 노려보던 관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날 이후 줄곧 가슴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가까스로 한자, 한자 짓씹듯 뱉어내는 입술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박지훈,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건데..?”

 

“뭐가요? 도련님.”

 

“너…!!”

 

 

 

하지만 지훈은 그런 제 마음을 알아차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 했다. 관린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려다 다시 이를 악물어내며 참았다. 당장이라도 윽박을 지를 듯한 제 태도에도 지훈은 여전히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게 다 뭐하는 건지 당장 설명해. 안그러면 나도 형한테 다 사실대로 말해버릴 테니까. 너 나 때문에 이러는거야? 나 때문에 형한테 일부러 접근했어?”

 

 

 

관린이 매섭게 지훈을 추궁했다. 그럼에도 지훈의 말끔한 낯빛에는 흔들리는 기색 하나 없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사실대로 대답해. 형이랑 당장 파혼하고 싶지 않으면.”

 

“라이관린,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관린의 협박에 가까운 발언에 드디어 지훈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하고 부르던 가소로운 말투와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똑같이 저를 쏘아보는 매서운 눈빛 앞에 관린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형 그 정도 아니야. 나한테 형이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런 거 아니니까 멋대로 착각하지마.”

 

“…..뭐?”

 

“나 린즈형 사랑해. 형이랑 상관없이 린즈형 만났고,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하는거야. 그러니까 괜히 어줍잖은 착각 때문에 사람 우습게 만들지 말라고.”

 

“하….”

 

 

 

사랑한다고? 형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당돌하기 그지없는 지훈의 말에 관린은 기가 찼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고 그의 멱살이라도 잡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말이라면? 지훈의 말대로 정말 그가 형을 사랑하게 된 거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형인 게 단순한 우연이라면. 자신은 그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는 착각에 빠져있는 게 되는 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 닿자 관린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훈이 끝까지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면 제가 달리 추궁해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 상태에 있었다.

 

 

 

“박지훈.. 너-.”

 

 

 

그러다 관린이 먼저 뭔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지훈아! 밥 다 됐어?”

 

 

 

문 밖에서 지훈을 부르는 린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형! 다 됐어요. 지금 나가요.”

 

 

 

그러자 지훈이 곧장 대답했고, 관린의 앞에서 비키며 그대로 방문을 나서려 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전, 지훈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뒤돌아 관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봐요, 도련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고.

 

방안에 혼자 남겨진 관린은 씁쓸한 한숨과 함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길 수 밖에 없었다.

 

 

 

하.. 박지훈,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고 이러는 거야.

 

 

 

 

 

 

관린은 지훈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이는 관린이 두 살 더 많았지만, 외국에서 살다온 관린이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학년은 지훈보다 하나가 위였다. 지훈과 알게 된 건 지훈이 1학년이던 해, 가을에 열린 학교 축제에서 제 동아리 공연을 보러 오면서부터였다. 그 후로도 몇 번 공연장과 이후의 술자리에서 지훈을 마주치면서 얼굴을 익히고 이따금 말도 나누게 되었다. 어찌어찌 그러다 2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지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저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형, 형, 관린이 형. 하면서. 박지훈이 자신의 어디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관린은 그 때 박지훈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박지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거였다.

 

 

 

관린은 한마디로, 자신을 귀찮게 쫓아다니는 박지훈이 그냥 철없는 애새끼 같았다. 그리고 그 때의 관린은 애새끼라면 딱 질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관린은 제가 철이 일찍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관린은 저보다 어린 녀석들이 싫었다. 세상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는 그런 부류의 어린애라면 더더욱.

 

 

 

-형, 형. 관린 형. 저 형 주려고 초콜렛 만들었는데 주러 가도 돼요?

 

-형, 오늘 연습 끝나고 뭐해요. 저랑 술 마실래요?

 

-저 형 진짜 너무 좋아요.

 

 

 

박지훈은 딱 제가 싫어하는 부류의,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였다. 아무리 제가 무심하게 대하고 딱딱하게 굴어도 박지훈은 지칠 줄 몰랐다. 제가 뭔가 거절의 말을 하면 잠깐 시무룩해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새 다시 엉겨붙어오곤 했다. 그런 박지훈이 피곤했다. 제가 마음 내키는대로 아무렇게나 굴어도 나가 떨어지지 않는 박지훈이. 그가 저를 단순한 형이나 선배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늘 장난처럼 내뱉는 좋아한다는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런 어린애와 연애 장난 같은 걸 한다는 건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관린이 먼저 대학을 들어간 이후에도 지훈은 여전히 지치지 않고 저를 찾아왔다. 전날 술을 마시고 뻗어 있을 때도, 친구와 밴드 연습 중일 때도, 그게 언제든 학교가 끝나면 어김없이 저를 보러 집에 들렀다. 서로 몸담고 있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까지는 귀찮아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그런대로 받아줘왔지만, 관린은 이제 대학생이었다. 그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훈이 상대적으로 전보다 훨씬 더 어린애로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고, 저와 같은 학교에 들어오겠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지훈은 진짜로 저와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지훈은 제 나름대로 대학생이 되면 관린에게 좀 더 떳떳하게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입학통지서를 들고 관린의 앞에서 그렇게 기뻐했던 걸 보면. 하지만 지훈의 바람과는 달리 관린은 점점 더 제게서 멀어져 갔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던 1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형.. 나, 형 좋아해요. 진심이예요. 내 마음 한번만 믿어줘요.

 

 

 

지훈이 고백을 하게 된 건 관린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었다. 관린이 늘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기를 귀찮게 하는 철없는 동생 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이제서야 겨우 동등한 위치에서 관린에게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됐는데..

 

 

 

이대로 그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확실하게 제 마음을 말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3년만에 어렵게 꺼내어 놓은 지훈의 고백은 비참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비참한 결말로 끝이 났다.

 

 

 

-난 너같은 어린애 안 좋아해. 연애놀음 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나한테 원하는 게 그거라면 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데 가서 알아봐.

 

 

 

어차피 안될 거라면 확실하게 상처를 주고 끊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관린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그 애의 얼굴.

 

눈물이 지던 하얀 두 볼. 관린은 어쩐지 지훈의 그 얼굴만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지훈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관린은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학교를 다니고 일을 배우며 보낸 시간이 6년. 자그마치 6년 만에 관린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나뿐인 제 형이 결혼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마침 한국 지사에도 겸사겸사 볼일이 있어 관린은 세 달 간만 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세 달을 다 보내고 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형수님 될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안 궁금해? 들어오면 바로 소개시켜줄게.

 

 

 

그렇게 들떠 있는 형의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저와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늘 다정하고, 총명하고, 매사에 모범생이었던 형. 나이 터울이 그렇게 큰 건 아니었지만 관린은 린즈를 늘 저보다 한참 더 어른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 형이 결혼을 한다니.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관린은 당연히 궁금하다고 말했다. 좋은 집안, 좋은 학벌, 수려한 외모와 흠잡을 데 없는 성격. 제 형은 그야말로 모두가 탐내는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그런 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누구일지 관린은 정말로 궁금해졌다.

 

 

 

하지만 린즈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제 집에 들어와 지내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는 관린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이미 둘이 같이 산 지가 꽤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사실상 신혼인 거나 다름없는데, 아무리 잠깐이라 하더라도 시동생이 신혼집에 들어와 사는 걸 반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였다. 처음에 관린은 마다했다. 형수님이 아무래도 불편해할 것 같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럼에도 린즈는 네 형수도 흔쾌히 허락한 일이고,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니 걱정 말라며 끝까지 관린을 설득했다. 겨우 세 달인데 집을 따로 구하는 게 일이 더 복잡하기도 할 거고. 그리고, 린즈는 무엇보다도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너와 한 집에서 지내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스무살 초반에 관린이 미국으로 떠나오면서 형과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낸 세월이 꽤 길었던 건 사실이었다. 저도 미국에서 형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항상 아쉽고 애틋했었다. 관린은 린즈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관린도 끝까지 안된다고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형과, 형수의 아파트에서 세 달 간 머물기로.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결정을 어떻게든 물렀어야 했다는 후회가 막심하게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사람의 기묘하고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되었다.

 

 

 

 

 

 

쏴아아- 욕실에서 샤워기의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관린은 소파에 앉은 채, 노트북으로 업무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형은 회사일 때문에 바빠서 항상 퇴근이 늦는 편이었다. 주말 출근을 하는 날도 잦았다. 반면 지훈은 번역 관련 프리랜서로 주로 집에서 일하는 듯 했다. 관린 역시 규칙적으로 출근을 하는 것은 아니라서, 공교롭게도 관린과 지훈 둘만이 집에 남게 되는 경우가 꽤 자주 있었다.

 

 

 

그 때, 탁, 욕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나왔다. 그러자 관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욕실 쪽으로 향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훈은 맨몸에 수건 한장만 두른 채였다. 욕실에서는 소파 쪽이 보이지 않아서 관린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지훈은 모르는 듯 했다.

 

 

 

관린은 지훈이 수건으로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는 모습을 잠시 관음하듯 지켜보았다. 처음엔 그냥 그가 거기 있기에 본 것 뿐이었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관린은 갈수록 기분이 점점 미묘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지훈과의 재회 후, 가장 분명한 한가지는 지훈이 더 이상 제가 알던 예전의 그 박지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게 형, 형 하며 좋아한다고 멋모르고 쫓아다니던- 그 앳된 얼굴의 박지훈이 아니었다. 길게 뻗은 다리, 잘록한 허리와 보기 좋게 솟은 엉덩이. 희고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와 유려하게 떨어지는 허리 아래의 곡선. 그리고 그가 몸을 숙일 때마다 아직 젖은 머리칼에서 등허리로, 다시 길고 곧은 다리로 뚝, 뚝 떨어져내리는 물기.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보이는 모습이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관린은 제가 지훈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전에는 한번도 지훈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지훈은 마지막까지 그야말로 어린애였다. 맡아 보면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하얗고 보송한 그런 느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겉모습에서부터 흐르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런 표현이 조금 원색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남자를 알아버린 후의 모습 같은..

 

그 전이 때묻지 않은 백지였다면, 지금은 누군가의 손을 탄 듯한.

 

어딘가 농염해보이고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박지훈을 그렇게 만든 게 아마도 자신의 형일 거라고 생각하니 관린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관린이 그런 생각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을 때였다. 제게 와 꽂히던 관린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훈이 홱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그제서야 아차, 정신이 돌아온 관린이 다시 예의 냉랭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는 말없이 지훈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자 지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관린을 향해 되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지훈의 그 무덤덤한 표정을 보자 관린은 제가 지훈의 벗은 몸을 보고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문득 민망해졌다. 관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며 재빨리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린즈 형은 오늘 늦는대.”

 

 

 

냉장고 앞으로 가, 안에서 물병을 꺼내 마시며 지훈이 그렇게 말했다.

 

둘만 있을 때의 박지훈은 형과 있을 때와는 완전히 딴사람이었다. 늘 끝이 짧은 말투는 무심하고 톡톡 쏘는 듯 했고 저를 나긋하게 도련님, 이라고 부르는 법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수건 한장만을 두른 지훈의 머리칼에서는 쉴새없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과 열기로 달아오른 두 뺨, 전보다 묘하게 색이 더 진해진 듯한 입술, 물을 한모금 삼킬 때마다 울렁이는 매끈한 목울대. 그 모든 장면이 관린에겐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지훈. 도대체 지난 6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야 그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백팔십도 바뀔 수 있나 싶어서.”

 

 

 

관린의 말에 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알고 싶어?”

 

“…..”

 

 

 

제가 물어놓고도 관린은 막상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싶기도 했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한 기분이었다.

 

 

 

“그런 걸 묻는 거 보니 지금 나 보면서 다른 생각이라도 했나보네. 옛날이라면 꿈도 안꿨을 그런 거.”

 

“….뭐?”

 

“아니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야.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건 날 보는 형 시선이 달라져서겠지.”

 

 

 

이번에도 관린은 말문이 막혔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예전의 저였다면 박지훈이 아무리 어른인 척 그럴 듯하게 꾸미고 제 앞에 나타났다 해도 분명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였다.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린애는 더더욱 질색이었으니까.

 

 

 

“어쨌든 뭐, 고맙다고 해야겠네. 내가 달라졌다면 그건 전적으로 형 덕분이니까.”

 

“…..”

 

“그리고 부탁인데, 앞으로는 남이 샤워하고 나오면 그렇게 몰래 훔쳐보지 말아줄래. 아무리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형수랑 시동생끼리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뒤돌아서 제 방으로 쏙하니 들어가버렸다. 관린이 뭐라 대꾸할 새도 없었다. 그 자리에 완전히 벙찐 채 굳어버린 관린은, 그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욕짓거리를 씹으며 생각했다.

 

 

 

‘씨발, 먼저 다 벗고 나와서 보란 듯이 사람 홀린 게 누군데. 박지훈…’

 

 

 

 

 

 

 

이건 정말 재앙이야.

 

 

 

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심으로.

 

 

 

2

 

 

 

그 날 이후로 관린은 계속 지훈이 신경 쓰였다. 그가 집안에서 뭘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시시때때로 눈길이 갔다. 그리고 자꾸만 사람을 홀리는 그 묘한 얼굴과 언뜻언뜻 비치는 매혹적인 몸매를 훔쳐보듯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봐도 그건 제 의지와는 도통 상관이 없는 일인 듯 했다. 정신 차려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이 움직이고 신경이 그쪽으로 곤두서 있었다.

 

 

 

도대체 박지훈이 제게 무슨 장난질을 쳤길래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박지훈은 그냥 원래 하던대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형과 같이 여가 시간을 보내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가 박지훈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토록 신경쓰이는 것일까. 밤에 자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며칠 전 몰래 훔쳐보았던 지훈의 매끈하고 새하얀 다리가 떠올랐다. 그 강렬한 잔상은 평소의 단정한 지훈을 볼 때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관린을 괴롭혔다. 이건 정말로, 관린에겐 감당 못할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와 한집에 같이 살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이런 재앙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모처럼 형이 집에 일찍 돌아온 날, 세 사람은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지훈은 요리 솜씨가 꽤나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형은 집에서 끼니를 챙기는 날이면 꼭 빼놓지 않고 지훈이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관린이 집에 있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관린도 같이 밥을 먹게 되었고. 6년 전엔 지훈과 한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그가 차려주는 음식들을 먹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다시 생각해도 기구한 운명에 관린은 밥을 먹고 있어도 모래를 삼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참 밥을 먹다 문득, 린즈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맞다. 지훈아,”

 

“네?”

 

“친구들 중에 괜찮은 사람 없어? 우리 관린이도 좀 소개시켜주고 그래.”

 

 

 

난데없이 튀어나온 린즈의 말에 관린은 안그래도 껄끄럽던 밥알이 순간 목구멍에 턱하고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목안이 답답해져 관린은 얼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형.. 물컵을 내려놓으며 관린이 만류하는 눈빛으로 린즈를 바라보자 린즈는 왜그러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왜, 형수가 주변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줄 수도 있고 그런거지. 뭐 어때서. 관린이 너 지금도 애인 없잖아.”

 

“형, 됐어. 그만해.”

 

“지훈아. 한번 생각해봐. 주변에 진짜 없어?”

 

“글쎄요.. 관린 도련님한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잘 모르겠어요.”

 

 

 

지훈은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관린은 정말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더 듣고 있었다간 지금껏 먹은게 모조리 속에 얹혀 버릴 것만 같았다. 관린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계속해서 이 화제에 대해 얘기를 이어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왜, 지훈이 너 대학 동기들 중에 솔로인 친구들 많다고 하지 않았어? 얘가 생긴 건 이래 보여도, 그런 쪽으론 영 쑥맥이거든. 관린이 얘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도 아무도 안 만났어. 너 미국 가서도 애인 한번도 안 사겼지? 내가 알기론 그런데.”

 

“형, 그만하라니까.”

 

“정말이예요 도련님?”

 

“……”

 

 

 

정말이냐고 물을 때 저를 보는 지훈의 눈빛은 좀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아마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형과 있을 때 쓰는 또다른 박지훈의 가면이 아닌, 진짜 박지훈의 진심이 담긴 듯한.

 

형을 사이에 두고 허공에서 그 눈빛과 마주하자 관린의 마음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렇다니까. 지훈이 니가 주변에 어필 좀 잘 해줘봐. 나 가면 얘도 곧 결혼해야 될텐데. 여태껏 애인 하나 못 만들고 뭐했는지 모르겠어. 솔직히 관린이가 남들이랑 비교해서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 좋지, 학벌 좋지, 능력 좋지, 젠틀하지. 안그래? 지훈아, 니가 보기에도 그렇지?”

 

 

 

지훈은 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관린은 그 눈빛에서 계속되는 동요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근데 그래서 더 아무나 소개시켜주기가 어렵죠. 아무래도 부담되잖아요.”

 

“그럴 거 없어. 그거랑 좋은 사람 만나는 거랑은 별개지. 자기가 보는 눈이 있으면 좋은 사람 알아보는 거고. 부담갖지 말고 소개시켜줘봐. 관린이 너도 됐다고만 하지 말고 생각해보고. 형이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

 

 

 

찾아볼게요. 웃으며 말한 지훈의 시선이 관린에게로 슬쩍 머물렀다가 다시 거두어졌다. 이내 다른 얘기로 화제가 넘어간 후에도 관린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러면서도 줄곧 지훈의 얼굴을 살폈다. 닿을 듯 말 듯한 찰나에 아슬아슬 시선이 마주쳤다가 미묘한 틈새를 두고 다시 엇갈리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제대로 밥을 먹고 있긴 한 건지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관린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불편하기 그지없던 식사가 끝나고, 관린이 베란다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지훈이 말을 걸었다. 형은 안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린즈형이 한 말, 진짜야?”

 

“무슨 말.”

 

 

 

관린은 지훈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안 만났다는 말.”

 

“진짜든 아니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박지훈.”

 

 

 

관린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말했다. 옆을 돌아보자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지훈의 얼굴이 보였다.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왜 안만났는데?”

 

“그게 대체 왜 궁금한데?”

 

 

 

관린은 한껏 찌푸려진 미간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로 지훈을 빤히 응시했다. 그런 저와 달리, 지훈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냥.”

 

“…뭐?”

 

“궁금하잖아. 어린애랑 연애하는 취미 없다던 그 잘난 라이관린이. 왜 여태 아무랑도 연애 한번 못해봤는지.”

 

“박지훈.”

 

“형이 모르는거야? 아니면 진짜야?”

 

 

 

관린은 새로 꺼낸 담배 필터를 입에 물며 좁혀진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짚었다. 지훈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형의 말은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아니었다.

 

박지훈이 그렇게 제 앞에서 사라진 후로, 관린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몇번 누군가와 연애란 걸 해보려 시도를 하긴 했었지만 번번이 잘 되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즐기며 가볍게 만난 케이스는 몇번 있어도 그 이상으로 관계가 진전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뜻이 없어서 연애를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제대로 누군가를 만날 마땅한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별로 그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곱씹어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제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의외라서.”

 

“뭐가.”

 

“그렇게 날 차버리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 만날까 했는데.”

 

“너-”

 

 

 

듣고 있던 관린이 더 참지 못하고 지훈의 멱살을 휙 잡아 제 아랫쪽으로 내리눌렀다. 난간에 뒷머리가 짓눌린 자세가 되고도 지훈은 크게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관린의 눈에는 보였다. 태연함을 가장한 낯빛 아래 감춘 지훈의 진짜 속내를.

 

 

 

“그러지 말고 니가 한번 말해보지 그래.”

 

“….뭘?”

 

“너야말로 그 이후로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남자들 들쑤시면서 홀리고 다녔어? 그 중에 하나 우리 형이 걸린거야? 재수없게 너한테?”

 

“말조심해, 라이관린.”

 

“아니면 왜 말을 못해? 아, 그러면 형 말대로 나한테 진짜 누구 하나 소개시켜보던지. 내가 보란 듯이 만나줄게. 결혼, 그 까짓거. 너도 우리 형이랑 하는데 나라고 못할 거 뭐 있어?”

 

 

 

허공에서 둘의 눈빛이 맹렬하게 부딪히며 불꽃이 일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먼저 상대에게서 시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밤바람만큼이나 시린 한기가 피부 밑으로 스며 들었다. 관린은 순간 발칙한 말을 뱉어내는 저 붉은 입술을 확 덮쳐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참 그렇게 서로를 잡아 먹을 듯 노려보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거의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달아올랐을 때, 방 안에서 지훈을 부르는 린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거실에 있어?”

 

 

 

그제서야 억세게 지훈의 옷깃을 틀어쥐고 있던 관린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네, 형. 저 여기 있어요.”

 

 

 

지훈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풀려난 제 손을 탁, 쳐내고 등을 돌려 거실로 들어가는 지훈의 뒷모습을 언제나처럼 관린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억울했다. 형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라고,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한 집에서 잘 지내보자고 했던 건 박지훈이었다.

 

 

 

근데 왜.

 

정작 날 이렇게 도발하는 건 너잖아.

 

왜. 대체 뭐 때문에?

 

박지훈의 마음을 열어서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만 있으면.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밤 늦은 시각, 관린은 어느 호텔 바에 앉아서 혼자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관린은 줄곧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박지훈이 웃으면서 형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꼴을 보는 것도 싫었고. 그런 박지훈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제 자신은 더 싫었다. 관린은 며칠째 일 핑계를 대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해가 뜰 무렵에야 겨우 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짓도 혼자 며칠을 하다 보니 질려서 오늘은 대학교 동기놈들 몇을 불러낸 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 입구에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관린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며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야, 이게 누구야. 라이관린 아니야.”

 

“이게 얼마만이야? 미국 가서 잘 지냈냐? 얼굴이 아주 훤해졌다.”

 

 

 

관린은 그저 피식 웃으며 친구들을 맞아주었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마치 어제 보고 다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위스키를 앞에 놓고 시덥잖은 농담 몇마디를 주고 받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형의 결혼 얘기로 흘러갔다.

 

 

 

“맞다, 너희 형 결혼한다며. 너 요즘 그 집 들어가 지낸다면서.”

 

“….그런 것도 다 소문이 났어?”

 

“야. 너희 형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어야지. 너 학교 다닐때부터 우리 과에 너네 형 모르는 사람 없었어.”

 

 

 

관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 말에 수긍했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형은 어딜가나 유명인이었다. 예전부터.

 

 

 

“그래서, 어때? 형수님은. 예쁘냐?”

 

“그냥, 뭐.”

 

 

 

지훈의 얼굴을 떠올리니 입안이 썼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잔을 손에 쥐고 몇번 굴리다 다시 위스키를 목 뒤로 넘겼다. 그런 관린의 속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계속해서 제멋대로 지훈의 얘기를 떠들어댔다. 관린의 형수님 될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가 그들에겐 초미의 관심사인 듯 했다.

 

 

 

“나 회사 선배가 너네 형이랑 대학교 동창이어서 지나가는 말로 들었는데. 너네 형이 지금 형수님 되실 분이랑 연애할 때 그렇게 지극정성이었대. 과에 아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데.”

 

“형이?”

 

“그렇다니까. 너한텐 전혀 얘기 안했어? 그래서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가보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대.”

 

 

 

관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형과 종종 연락을 하긴 했지만 애인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한 얘기는 제게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지훈의 얼굴도 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본 거였고. 형이 지훈에게 그렇게 공을 들여 만났다는 사실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적어도 관린이 아는 린즈와는.. 전혀 달랐다. 꼭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청난 미인이야? 막 몸매도 끝내주고?”

 

“야, 야. 적당히 해라.”

 

“왜 뭐, 어때서. 우리끼린데. 형님이 막 껌벅 죽고 그럴 정도야? 넌 봤으니까 알거 아냐.”

 

 

 

그 중 한놈이 취기가 올랐는지 도를 넘은 소리를 지껄여댔다. 관린은 생판 모르는 녀석이 지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에 기분이 확 나빠져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불쾌한 듯인상을 구긴 관린이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린아, 벌써 가려고?

 

저 녀석 하는 말 신경쓰지마. 취해서 저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러지 말고 한잔 더 하고 가.

 

 

 

만류하는 친구들의 말에도 관린은 기어코 일어나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어차피 시간 때우기용이었을 뿐, 애초에 그다지 길게 앉아 있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니 잊고 있던 취기가 훅하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뜨겁고 몸에서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집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1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또..

 

거실에 앉아 책이나 티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지훈과 형의 모습이 흔들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훤히 어른거렸다.

 

 

 

도련님, 오셨어요. 식사는요?

 

 

 

분명 저를 보며 그렇게 물을 지훈의 깍듯한 얼굴, 그리고 목소리.

 

관린은 그 모든 게 짜증스럽고 싫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어디 길바닥에서 고꾸라져 하룻밤을 지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결국 관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집이었다. 왜인지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었다. 머리로는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돌아오고야 말았다. 지훈과 형이 있는, 이 집으로. 이제는 눈에 익어버린 아파트 문앞에서 관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날이 추워 밖에 계속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거실에 깔린 캄캄한 어둠만이 관린을 반겼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관린이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제 방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하.. 하아.. 린즈형… 좀 더.. 하.. 읏”

 

 

 

안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듯 멈춰선 관린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관린은 제 귀를 믿고 싶지 않았다. 격렬하게 뒤섞이는 신음소리와 지훈의 것임이 틀림없는 가느다란 교성.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적나라한 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들자 관린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집에 들어오기로 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셋이 한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게 꺼려졌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설마 지금일 줄은..

 

 

 

머리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면 된다고.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할테니, 그냥 모른 척 지나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몸은 이미 이성이 시키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안된다고, 멈추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관린은 어느새 안방 문앞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지금 이 순간, 이성적인 판단보다 극렬한 호기심과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충동에 더 강하게 이끌리고 있는 듯 했다.

 

 

 

그러지 않고는 지금 제가 하려는 이 행동을 절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마침 공교롭게도 안방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거실에서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던 건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 집안에 짙게 깔린 어둠이 관린의 모습을 드러나지 않게 숨겨 주었다.

 

 

 

“아.. 흣.. 린즈 형.. 아파요.. 좀만 천천..히.. 흣!”

 

 

 

지훈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색스런 신음소리를 흘려내고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다가서자 곧장 눈 속에 들어온 침대 위의 광경은 관린을 한순간 숨이 멎게 만들었다. 꿈에서만 그리던 지훈의 하얀 반라.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매끈하고 가느다란 허리가 제 형, 린즈의 몸 위에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껏 뒤로 젖혀진 목울대와 그 아래로 곧게 뻗어내려온 어깨선, 춤을 추듯 움직이는 날개뼈. 황홀한 신음성과 함께 아래위로 들썩이는 지훈의 몸은, 아찔할 정도로 위험하고 매혹적이었다. 한번 본다면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머릿속으로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요염하고 아름다운 그 자태에, 관린은 완전히 넋을 빼앗겨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맑고 또렷했다. 마치 눈 속에 그 장면이 각인된 것처럼 박혀 들어와, 침대 위의 그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토록 배덕한 짓을 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형과 곧 제 형수님이 될 지훈의 정사를 문틈으로 훔쳐 보다니… 분명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있고, 들어서는 안될 것을 듣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 안에선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문득 관린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정사는 어느새 최고조를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다. 더욱 높아지는 지훈의 신음과 달아오른 몸짓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때, 두 사람의 몸이 휙하고 뒤바뀌면서 지훈이 아래에 누운 자세가 되었다. 관린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더 이상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간 둘 중 누군가에게 들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린은 황급히 발소리를 죽여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 안에 몸을 파묻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눕자 어둠 속에 남은 희미한 잔상이 눈앞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관린을 지배한 가장 강한 감정은 죄책감도, 수치심도, 후회도 아닌.

 

박지훈을 안고 싶다…

 

박지훈을 갖고 싶고 제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관린은 그 밤 한 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관린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훈을 향한 그 욕망이, 자신이 가진 도덕성과, 양심과, 그 어떤 고결한 덕목보다도 더 크고 강렬하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또다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며칠이 흘러갔다. 사업 미팅 때문에 밖에 나와 있던 관린은 집에 들어가기 직전 린즈에게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형?”

 

-어. 관린아.

 

“무슨 일이야?”

 

-아, 다른 게 아니고. 형수가 좀 아픈 것 같은데. 내가 오늘 철야 작업 때문에 집에 못들어갈 거 같거든. 너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있으면 가서 좀 봐달라고 하려고.

 

“아프다니, 어디가?”

 

-감기 몸살인가봐. 열도 나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나 본데.. 감기 자주 앓는 체질이 아니라 좀 걱정되긴 하네. 근데 내가 당장 가볼 수가 없어서. 들어가는 길에 약이랑 죽 좀 사가지고 가 줄 수 있어?

 

“아.. 그래? 알았어. 나 지금 들어가니까 약이랑 사가지고 갈게. 응, 그래. 걱정하지마. 들어가서 연락할게. 응.”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린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관린은 전화를 끊었다.

 

 

 

지훈이 아프다고?

 

왜 하필 형이 못 들어오는 때에…

 

관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런 때 혼자 집에 들어가 아픈 지훈을 살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엔 더더욱…

 

 

 

하지만 형의 부탁인데 별다른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관린은 가는 길에 감기약과 죽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이 온통 고요했다. 곧장 거실을 지나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위에 지훈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지훈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굳이 이마를 짚어보지 않아도 열이 펄펄 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몸 전체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얼굴과 목덜미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낯빛도 창백했다.

 

 

 

정말 많이 아픈가보네..

 

 

 

나한테 그렇게 모진 말을 쏘아댈 땐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더니. 이렇게 아프기도 하나보지.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맡에 앉아 잠든 지훈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형.. 린즈.. 형?”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지훈이 잠결에 린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본능적으로 손을 더듬더듬 뻗어 잡아달라는 듯 관린의 손 위를 만지작거렸다. 관린은 그 순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6년 전엔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쫓아다니며 매달리더니. 이젠 이렇게 아프고 나약할 때 내가 아니라 형을 찾는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형.. 린즈 형.

 

6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제가 아닌 형의 이름을 찾는 지훈의 모습을 보면서 관린은 많은 것이 변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씁쓸함을 애써 삼키며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를 욕망하는-,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한없이 자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