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JEJU TO
w. 릴케

 

 

제주의 밤은 물결처럼 고요했다. 잔잔히 넘실거리는 바다, 수면 위를 유영하는 구름들. 달은 가려졌는지 희끄무레한 빛무리로 겨우 존재를 알릴 따름이었다.

창문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자 날숨마다 유리에 뿌연 김이 서렸다. 지훈은 문질러 닦기 위해 팔을 뻗었다가, 차가운 감촉에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걸음을 덩달아 물렸음에도 한번 든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가디건에 팔을 꿰어 걸친 지훈이 난방 조절계의 온도를 높였다. 방이 덥혀지려면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동안엔 잠시 이불 속에 들어가 있을까. 지훈은 침대로 눈길을 주었으나, 간이 테이블에 펼쳐 둔, 화면 보호기가 둥둥 떠다니는 노트북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추위는 아니었으므로 지훈은 하던 작업을 먼저 끝마치기로 결정했다. 키보드를 연타해 잠금 화면을 띄운 지훈이 패스워드를 막 입력하려던 참이었다.

“음… 마실 것부터 좀 가져오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지훈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탓인지 목이 탔다. 입도 심심한데 먹을 만한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부엌까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 층에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지훈은 멈칫했다. 카운터를 겸하는 거실에서는 성훈 형이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었다.

지훈은 저를 등진 채 성훈과 마주보고 선 남자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어 새로 도착한 손님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핏 눈에 들어온 성훈의 얼굴은 묘하게도 곤란한 듯 진땀을 빼는 표정이었다. 의아해진 지훈이 냉장고로 직행하려다 말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손님이신데… 예약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아.”
“예약에요?”

남자가 지훈을 돌아보았다. 앳된 듯하면서도 섣불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지훈이 재빨리 시선을 성훈에게로 돌렸다. 눈꼬리를 늘어뜨린 성훈이 남자를 대신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자는 성훈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이틀간 머무르려고 예약을 했는데, 알고 보니 예약 과정에서 달을 잘못 선택해 엉뚱한 날짜에 예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아… 남는 방은요?”

성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큰일이네. 지훈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멀뚱히 서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근처에 다른 게스트하우스 없을까요?”

성훈은 이 일대는 일반 가정집이 대부분이며, 다른 게스트하우스까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서 막차가 끊겼으리라는 설명을 건네었다. 남자는 입술을 꾹 눌러닫은 채 옷깃을 매만졌다. 겉옷이며 캐리어 여기저기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보니 오는 길에 비라도 맞은 모양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던 성훈은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나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연락을 취해 방이 남았다고 하면 성훈의 자가용으로 데려다 주는 것. 다른 하나는 일단 오늘 밤에는 거실에서 묵고 다음날 마저 생각하는 것. 어느 쪽도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남자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기엔 이미 피로하고 지쳐 보였고, 거실은 새벽에도 다른 손님들이 오고갈 수 있는 공간이라 잠을 자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지훈은 핏기가 가셔 창백한 남자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두툼한 입술 역시 반쯤 퍼렇게 질려 있었다. 고민 끝에 지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일단 오늘은, 제 방 같이 쓰시겠어요?”
“응?”

남자보다도 성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 방이 원래 2인실인데 혼자 쓰고 있어서요. 더블 베드이긴 해도, 거실보다는 나으실 것 같은데.”
“…….”

대답 대신 지긋이 미간을 좁힌 남자가, 지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지훈 역시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남자가 지훈의 방 한켠에 짐을 풀고 씻으러 들어간 동안, 지훈은 다시금 부엌으로 내려왔다. 오렌지 주스와 핫초코를 제각각 컵에 담아 들고 올라가려는데 성훈이 지훈을 불러세웠다. ‘괜찮겠어?’ 입모양으로 묻는 성훈의 말에 지훈이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책상 앞에 앉은 지훈은 기껏 켜 놓았던 노트북으로 카드놀이나 하며 밍기적거렸다. 샤워를 마친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칼에 맺힌 물기를 털며 나올 때까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에게 핫초코를 건네 주었다. 미적지근하게 식어 ‘핫’초코라고 부르기 애매해진 것이었으나 남자는 나지막히 감사의 말을 읊조리며 컵을 받아들었다.

전등 스위치를 끈 탓에 남은 것은 작은 탁상용 스탠드가 발하는 은은한 불빛뿐이었다. 미리 난방을 켜 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근한 공기가 적막을 감추어 주고 있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보는 듯싶더니 금세 잠에 빠졌고, 지훈 또한 뒤이어 침대에 누웠다.

생판 모르는 상대와 한 침대를 쓰는 일은 생각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남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탓에 옆을 보지 않으면 누가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일찍 잠에 들어, 대화라고 일컬을 만한 무언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먼저 일어난 것은 남자 쪽이었다.

“……지금 몇 시예요?”

지훈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져 있었다. 남자는 패딩을 걸치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일곱 시… 조금 넘었어요.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남자의 대답에 지훈은 기지개를 켜듯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가, 이내 고개를 빼끔 내밀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좇는다.

“바다 보고 왔어요.”

지훈을 돌아본 남자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지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어요?

“춥고… 바람이 엄청 불어요.”
“음.”
“그리고 신기하게 생긴 돌이 많아요.”
“현무암이요?”
“아, 현무암.”

지훈을 따라 읊조린 남자가, 밀물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좋았어요, 다.”

조식 시간은 여덟 시부터였지만, 일곱 시 반이 되자 지훈은 남자와 함께 부엌으로 내려갔다. 성훈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 몫의 아침을 접시에 담아 내어주었다. 달걀 프라이는 특별히 두 개씩. 남자가 몇 번째인지 모를 감사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성훈과 지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대만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어… 김포에서 비행기 탔어요. 학교가 서울에 있어요.”
“아, 교환학생?”
“아니요, 계속 서울에서 다녀요.”

지훈의 물음에 남자가 젓가락을 바로 쥐며 대답했다. 다른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던 성훈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여행객 분들께는 잘 안 알려진 덴데.”

주변에 다른 게스트하우스가 없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성훈네는 일반적인 관광 코스와는 동떨어진 데 자리잡고 있었다. 현지인이나, 제주를 웬만큼 다녀 본 사람들이나 알 법한 동네를 외국인인 남자가 부러 먼 곳에서 찾아왔다는 게 신기해 지훈 또한 귀를 기울이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비엔나 소시지를 입에 문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행 좋아해서, 사진 많이 찾아 봤어요.”

인터넷 어플을 열더니 무언가를 검색해 클릭한다. 이윽고 남자가 보여준 화면에, 성훈과 지훈이 눈길을 교환했다. 두 사람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사진들이 남자의 휴대폰 속에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성훈이 알 만하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여기 왔어요.”

남자가 담담히 말을 마치자, 지훈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제가 찍은 거예요.”

***

사진은 대학 시절 꾸준히 했던 지훈의 취미 활동이었다. 거창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찍느라 바빠 정작 결과물을 다시 꺼내어 보는 일은 드물었었다. 폴더에 먼지처럼 쌓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수천 장을 넘어가도록.

문득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 지훈은 업무에 치여 출사를 다니기는 커녕 카메라를 들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졌던 상태였지만 하드 깊숙히 묻혀 있던 사진들은 새로운 감회를 주었다. 지훈은 언제라도 그 사진들을 쉽게 다시 찾아볼 수 있게끔 블로그를 만들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에도 그 일은 온전히 지훈의 일과로 남았다.

사실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훈은 제 사진들을 누가 찾아와서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지훈이 아니어도 무수히 많았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소회나 감상을 기록 삼아 한두 줄씩 덧붙이고는 했는데 이상하게도 방문자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어떤 글들은 특히 인기가 좋아 심심찮게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곳 성훈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며 찍은 것들도 그 중 하나였다. 그걸 보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성훈이 귀띔해 주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와, 정말요?”

지훈의 말에 남자가 반색하며 묻더니, 눈을 반짝거리며 “팬이에요, 사진 다 좋아해요.” 하고 감탄했다. 원래는 딱히 먼저 나서서 말하는 편이 아니었던 지훈은,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젠 잘 안 찍는다는 말은 속으로만 묻어둔 채.

대신 지훈은 화제를 돌려 남자에게 여행 계획을 물었다. 어젯밤 막 제주에 도착했다는 남자는 내일까지 이곳 서쪽에서 머무른 다음 동쪽으로 건너갈 예정이라고 했다. 남자가 가고 싶다고 언급하는 관광지는 대부분 지훈 또한 다녀왔던 곳들이었다.

지훈은 어디는 눈이 내리면 절경인데 지금 가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거나, 어느 올레길이 무척 아름다우니 여유가 되면 가봤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말을 주워섬기다가, 제 블로그까지 찾아와서 볼 정도면 이미 남자도 이 정도는 다 알고 있겠구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며 자책하려는데,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뒷이야기를 채근해서 지훈은 얼떨결에 팁이라기에도 뭐한 여행 경험담 몇 가지를 더 풀었다. 그럼 오늘은 그쪽으로 다녀올까요? 남자의 물음에 성훈이 거들었다. 날이 좋아서 어딜 가도 평타는 칠 거예요.

남자는 휴대폰에 무언가를 적어넣더니, 지훈에게 어디를 다닐 계획인지 물어왔다. 지훈은 여행하기 위해 와 있는 게 아니어서 숙소에서 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조용해진 틈에 성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어디서 묵을지 정했어요?”
“음, 아직이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저녁에 일찍 들어오세요?”
“해 지기 전엔 올 것 같아요.”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 먹어요. 식사 마치고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성훈의 제안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조용히 젓가락을 입에 물며 성훈과 남자를 번갈아봤다.

***

남자는 정말로 일몰 직전에 돌아왔다. 그 무렵 지훈은 밖에 나와 있었다. 돌담 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해변이었다.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오렌지빛 석양이 부서져내리는 것을 구경하는데 아까 남자가 신기하게 생긴 돌이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한참을 하염없이 그러고 있다가, 곧 저녁 시간인 게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은 뒤를 돌다가 불쑥 보인 인영에 놀랐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남자가 서 있었다. 신중한 얼굴로 검푸른 바위 위를 건너온 남자가 지훈과 마주보고 섰다. 오른쪽 어깨에 비스듬히 백팩을 멘 모습이었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들어갈까요?”

남자가 지훈을 향해 한쪽 팔을 뻗어왔다. 남자의 옷소매를 조심스레 잡은 지훈이 발을 옮겼다.

저녁은 지훈과 성훈, 남자 외에도 다른 방에 묵고 있던 손님 둘과 다섯이서 먹었다. 그날 다녀온 관광지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는데, 관린은 아침에 지훈이 추천해 준 장소를 골라 다녀왔다며 인증샷을 보여주었다. 지훈은 또다시 멋쩍어졌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두 손님이 먼저 방으로 올라가고 셋만 남게 되자, 성훈이 남자에게 새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지훈은 남자가 하룻밤 더 제 방에서 지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순전히 제 입장이었으므로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짐을 정리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가서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삐뚤빼뚤 적힌 손글씨를 건네자 남자가 지훈을 올려다봤다.

“제 번호.”

지훈이 별거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여행하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

남자가 제주를 떠나는 날까지도, 지훈에게는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부러 휴대폰의 무음 모드를 풀어 보기도 했지만 공연한 수고였다.

어쩐지 이유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그때의 일 역시 다른 기억에 묻혀 잊혀져갔다.

시간이 흘러, 지훈은 제주살이를 마치고 부산으로 올라왔다. 성훈은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지만 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새 직장을 구해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다.

지훈은 개인 작업을 이어가면서 채용 공고를 알아보는 일을 병행하느라 자연히 블로그에는 소홀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3월의 어느 날, 지훈은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새로 달린 댓글 중 눈에 띄는 내용을 발견했다.

[감사했습니다. 저번 달에요. 사진 항상 잘 보고 있어요.]

저번 달이라는 말에, 묻어 두었던 제주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밀려왔다. 지훈은 답을 남겼다. 여행은 잘 마무리하셨어요? 그리고 고민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지금은 개강해서 바쁘시겠어요.

[덕분에요. 개강은 맞지만 교환학생이라 널널해요. 계속 제주에 계세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저도 올라왔어요, 여전히 느긋하게 쉬고 있고요. ㅋㅋ]

별 생각 없이 적은 답글이었는데, 뜻밖에도 남자는 기뻐하더니 전에 도와준 답례를 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답례까지야. 자신은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의례적인 말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지훈은 당황해 주저하다가, 조금 뒤에야 머뭇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

어쩌다 보니 지훈은 정말로 남자와 약속을 잡게 되었다. 주말 저녁, 장소는 남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번화가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지훈은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사진전을 둘러볼 겸 차를 몰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예술의 전당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는데도 시간이 남아, 예정보다 이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전날 휴대폰 번호를 받았지만 연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오시라는 지훈의 말에 남자가 곧바로 답장해왔다. 금방 갈게요, 지금 근처 서점이에요.

지훈은 오는 길에 보았던 서점을 생각해내고 천천히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사람들 사이로 남자가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지훈이 멈춰섰다. 슬랙스에 스트라이프 셔츠. 후드에 패딩을 겹쳐 입었던 제주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테가 얇은 안경 때문인지 날카로운 인상이 더해졌다. 무표정하던 남자가 지훈을 알아본 듯 환하게 웃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남자는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고, 지훈은 깔끔한 음식이면 좋겠다고 바운더리를 정했다. 그럼 초밥 괜찮아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앞장섰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주택을 개조한 듯한 일식집이 나왔다.

“마실 것은요?”

메뉴를 대강 결정하자 남자가 물었다. 저녁에는 다이닝 바를 겸한다는 말마따나 맥주나 사케 같은 것을 마시는 사람들이 적잖게 보였다. 지훈은 뺨을 긁적였다.

“저 운전하고 와서요.”
“아, 아쉽네요.”

주문을 마친 둘은, 그제서야 통성명을 했다. 그때까지도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던 것이었다. 라이관린. 지훈이 상대의 이름을 되뇌었다. 관린 또한 지훈의 이름을 나지막히 따라 읊었다.

“부산에서요?”

둘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부산에서 왔다는 지훈의 말에 관린이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치켜떴다. 여기서 엄청 멀지 않아요?

“그래서 온 김에 전시회 들렀어요, 낮에는.”
“어떤 전시회요?”
“그, 한가람에서 하는 건데.”

지훈이 사진전 제목을 말하자 관린이 손뼉을 맞부딪쳤다. 그거 저도 보고 싶었는데, 어떠셨어요? 음, 좋았어요. 보려면 서둘러야 할 걸요, 기간 얼마 안 남았던데. 정말요? 언제까지예요? 아마 다다음 주? 근데 주말이라 사람 너무 많았어요. 학생이니까 시간 되면 평일에 다녀와요. 그래야겠다, 저 수요일 공강이거든요. 수요일에? 와, 시간표 되게 잘 짰네요, 수요일 공강이 진짜 꿀인데. 지훈의 입에서 나온 꿀이라는 표현에 관린이 키득거렸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추억으로만 묻어두는 게 좋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관린과의 재회는 나쁘지 않았다. 실은 아까 전부터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린이나 지훈이나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이따금 찾아드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좋았다. 좀 잘 맞나 봐. 고작 두 번의 만남으로 속단하기엔 이르다 싶으면서도. 지훈은 저도 모르게 여지껏 삼켜 두었던 이야기까지 입에 올리게 되었다. 이젠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는 것, 대신 출판 제의를 받아서 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해 넘겼다는 것. 제주에서도 쉬면서 틈틈이 작업했다는 지훈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듣던 관린이 관심을 표했다.

“책이요? 언제 나와요?”
“5월 초, 늦어도 여름 전엔 나올 거예요.”
“나오면 꼭 살게요.”

빈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열의에 불타는 듯한 관린의 어투에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제가 드릴게요.”
“그럼 저희 그때 또 봐요?”

그땐 제가 부산 갈게요. 관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훈은 그러자고 대답했고, 그건 어른들끼리 으레 건네는 ‘언제 한번 보자’ 정도의 가벼운 대답이었으나 마음 한켠으로는 관린이 제멋대로 곡해하더라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책 같은 건 택배로도 보낼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을 제쳐둔 것 역시 같은 까닭에서였다.

***

지훈과 관린은 열 시가 되기도 전에 가게에서 나왔다. 부산까지는 차로 아무리 짧게 잡아도 네 시간이 넘게 걸릴 터였다. 관린은 제 방에서 자고 가도 괜찮다고 권유했지만 지훈은 다음에 또 보자는 말로 에둘러 사양했다. 그래 놓고는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내내, 관린이 지나가듯 즐겨 듣는다고 언급했던 해외 팝을 틀어 주구장창 들었다. 하나같이 꽤 괜찮아서 취향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지훈은 관린과 드문드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관린은 전시회에 다녀왔다며 인상 깊었던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지훈은 관린이 좋아하는 다른 노래들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화는 점점 사소해졌다. 점심은 뭘 먹었는지, 무슨 수업을 듣는지와 같은 것들.

그러던 두 사람은 의외로 일찍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됐다. 지훈이 서울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삼아 내 본 서류가 덜컥 붙어 갑작스럽긴 했지만, 연봉이나 다른 조건들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도 잘만 되면 예전 경력을 살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날짜가 잡히니 관린 생각이 났다. 지훈은 머뭇거리다 메시지를 보냈다. 관린은 무척 반가워하며 저녁 시간을 비워놓겠다고 이야기했다.

찾아오겠다는 관린을 만류해 전과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불금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관린은 이번에도 지훈을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다가왔다. 시선이 머리께에 닿아 조금 민망해졌다. 면접을 본답시고 모처럼 왁스로 앞머리를 넘겼던 게 떠올라서였다.

이번엔 지훈이 앞장섰다. 일전에 유난히 대기줄이 길던 가게를 눈여겨봐 뒀다 예약한 것이었다. 전에 와 본 적이 있다는 관린 덕에 메뉴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오늘도 서점 들러서 왔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찍었어요. 서점 좋아하나 봐요.”
“음, 자주 가요. 한국어 책 아직 조금 어렵지만.”

맞다, 외국인이었지. 손으로 턱을 괸 지훈이 물끄러미 관린을 응시했다.

“졸업하면 대만으로 돌아가요?”
“고민하고 있는데, 계속 여기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요?”

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조만간 제가 서울로 이사오게 될 확률을 가늠해 보았다. 면접 분위기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선선하고 산뜻한 사월 초의 공기.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무언가. 지훈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심결에 손을 뻗어 쥐었다가 펴자 바스라질 듯 여린 꽃잎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관린이 물어왔고, 지훈은 대답 대신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가까이에 보이는 풍경은 옷가게, 코스메틱 숍, 카페의 반복. 관린은 잠자코 지훈의 속도에 맞추어 주었다. 조금 뒤 지훈이 입을 열었다.

“재워 주겠다는 약속 아직 유효해요?”
“……물론이죠.”
“그럼 가요, 저번에 갔던 거기.”

***

간단한 안주와 함께 사케를 주문했다. 마셔 보고 싶었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지훈의 앞으로 관린이 물컵과 수저를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지훈이 빼먹지 않고 인사했다.

“주량 세요?”
“네. 잘 안 취해요.”
“부럽다. 사실 저는 술이 좀 약해서.”

많이는 못 마셔요. 프레즐을 집어먹으며 지훈이 이실직고했다.

“얼마나 약한데요?”
“맥주 한 잔?”
“……사케 괜찮겠어요?”
“뭐, 여차하면 관린 씨 있으니까.”

장난스런 지훈의 대답에 관린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아, 자꾸 연하인 거 잊어버리게 되네. 팔짱을 끼며 지훈이 생각했다.

잔과 함께 나온 사케는 차가웠다. 데워 먹는 게 정석인 줄 알았다는 지훈의 말에 관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종류마다 다른가 봐요. 꺾어 마시느라 좀처럼 줄지 않는 지훈의 것과는 달리 관린의 잔은 금세 비워졌다. 그런데도 관린의 안색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어, 지훈이 신기하다는 듯 관린에게로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잘 안 취하면, 주사 같은 것도 없어요?”
“없지만 대신 많이 마시면 졸려요.”
“저는 있는데.”
“어떤 주사예요?”

관린이 물었지만 지훈은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안 알려 줄 거예요. 당연히 관린은 더 궁금해했다.

“알려 줘요, 왜 안 알려 주지.”
“비밀이라서요.”
“그럼 왜 말 꺼냈어요.”
“비밀이고 싶은데 금방 들킬 것 같아서요.”
“그냥 지금 들키면 안 돼요?”
“안 돼요.”
“왜 안 돼요.”

어린애 장난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술보다 분위기에 먼저 취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서로를 보며 떠들고 웃고 장난치는 와중에 누군가 관린의 옆으로 다가왔다. 긴 머리가 세련되게 물결치는 여자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훈이 먼저 알아보고는 의아한 시선을 향했다.

“저기, 저쪽 테이블에서 왔는데요.”

여자가 대각선으로 동떨어진 자리를 가리키며 운을 떼었다. 지훈은 순간 제 목소리가 저기까지 들릴 만큼 컸던가 되짚어 보았지만, 여자는 전혀 다른 얘길 꺼내왔다. 합석 요청. 지훈이 관린과 눈을 마주쳤다. 관린은 여자 쪽은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고개부터 저었다. 지훈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긴 했지만.

지훈은 정중히 거절했다. 돌아서려던 여자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번호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여자친구가 있어서요.”
“그럼 이쪽 분은……”
“저도 있어요, 애인.”

여자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자기 테이블에 돌아가 앉을 때까지 말이 없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진짜 있으세요?”
“거짓말이죠?”
“…….”
“…….”
“…….”
“그냥 둘러댄 말이었어요.”
“아, 다행이다.”

지훈의 해명에 관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훈이 고개를 기울여 비스듬한 시선으로 관린을 보았다.

“뭐가 다행이에요?”
“네?”

관린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지훈은 다시금 관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넘칠 기세라며 관린이 울상을 지었다.

“너무 많은데요.”
“잘 안 취한다면서요?”
“맞아요, 엄살이었어요.”

관린이 덩달아 지훈의 잔을 채워 주며 답했다. 이거 다 마시면 저 취해요. 지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관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래서, 뭐가 다행인데요.”
“네?”
“빨리. 아까 대답 안 해 줬잖아.”

얼마나 지났을까. 두세 모금을 더 홀짝였을 뿐인데 지훈은 기분이 붕붕 뜨는 것을 느꼈다. 딴에는 천천히 마신다고 마신 건데도.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관린이 지훈을 향해 불쑥 상체를 숙였다.

“지금 은근슬쩍 말 놓는 거예요?”
“안 돼?”
“혹시 이거 술버릇?”
“아직 안 취했거드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관린이 물었다. 지훈은 늘어지는 말끝을 붙잡으려 노력하며 불만스레 대꾸했다. 관린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겠죠. 원래 취한 사람은 취했다고 말 안 하잖아요.”

서늘한 손이 지훈의 상기된 뺨을 짚어왔다. 지훈은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였다. 시선이 서로에게 아주 오래 머물렀다. 별안간 관린이 지훈의 잔을 가져갔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응?”
“일단 물부터 마셔요.”
“응…… 근데 나 더 마실 수 있어.”

지훈은 우물거리면서도 관린에게서 건네받은 물컵을 순순히 입에 가져다댔다. 목을 축인 지훈이 잔을 돌려달라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언제 톤이 높아졌었냐는 듯 소곤거리는 어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런 것도 타고나는 걸까.

***

금방 취한 술은 금방 깬다. 만고불변의 법칙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훈은 예외 없이 그래왔다. 지훈과 관린은 자정이 되기 전 가게를 나섰고, 그때 지훈은 이미 멀쩡해져 있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지 속으로는 여지껏 제 가 부린 추태를 곱씹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관린의 집까지는 걸어가기에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덕분에 밤벚꽃만은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지훈은 간만에 카메라 앱을 열어 풍경 사진을 찍었다. 블로그에 올려야지. 지훈의 말에 관린이 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관린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둘은 일단 번갈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당연히 지훈은 관린의 것을 빌려 입었다. 관린이 침대를 내어주겠다고 했지만 지훈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소파에서 밍기적거렸다. 관린이 티브이를 틀어 오씨엔에 채널을 맞췄다. 보기 위함이라기보단 배경음악 대신이었다.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간 관린은 조금 뒤 캔맥주에 이것저것을 곁들어 내왔다. 관린의 집에 있는 것치고는 도수가 많이 낮다 싶었지만 지훈은 잠자코 캔뚜껑을 톡톡 두드려 땄다. 짠. 가볍게 부딪히고 입가로 가져오자 복숭아 향기가 끼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주에서의 일로 화제가 수렴됐다. 지훈은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속닥거렸다. 처음 봤을 때 놀랐어요, 너무 잘생겨서.

“그날 관린 씨 먼저 잠들었잖아요.”
“네.”
“…….”
“……?”
“…아니에요.”

사실 잠든 모습 저도 모르게 넋놓고 봤다고 말하려다가, 소름 돋아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지훈이 마른 안주만 와작와작 씹어댔다. 관린은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저도 뭐 하나 이야기해도 돼요?”
“그럼요.”
“자고 일어났을 때, 눈앞에 지훈 씨 얼굴 있어서 놀랐어요.”
“…….”
“저희 되게 딱 붙어서 잤어요.”

그래서 일찍 깼어요. 관린의 평이한 어조에 지훈이 농담인가 싶어 물었다. 정말요? 맥주를 마시면서도 시선은 지훈에게로 향해 있던 관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안해요. 전혀 몰랐어요.”
“괜찮아요. 덕분에 감기 안 걸린 것 같아요.”
“…….”
“여행 같이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여행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셔서 못 여쭤봤지만요. 관린의 말에 지훈은 검지로 턱을 짚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 안 했는데. 이렇게 봐서 너무 좋아요.”

관린의 직설적인 표현에 지훈은 괜히 얼굴에 열을 올리며 어색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거나 관린은 포크로 딸기를 찍어 지훈에게로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열어 받아먹은 지훈이 조용해진 사이, 두런두런 들리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말소리도 고요해졌다. 끝났나 싶어 화면을 돌아보자 뚫어지게 서로를 보던 남녀가 끌어안고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 영화였던 것 같은데…….

멍하니 영화를 보던 지훈이 불쑥 물었다.

“……여름엔 같이 갈래요?”

관린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어디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