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Strawberries & Cigarettes

소설 속에 나오는 노래는 다른 곡이지만 막상 이 노래를 들으면서 썼어요.

부디 같이 무한반복 하면서 읽어주세요.

 

 

 

4월 애인
w. 2U

 

 

 

<1주일째>

 

 

 

“한 달만 나랑 사귀어줘요 형.”

 

파스텔 빛 하늘 아래 뽀얀 벚꽃잎이 날린다. 그리고 그 속에 서 있는 진지한 표정의 그 아이.

 

벚꽃잎이 날리다 그 애 얼굴에 살며시 내려 앉았다. 나는 꽃잎이 그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고 말 것 같아 손을 들어 살짝 털어냈다. 꽃이파리 하나가 그 애로부터 떨어져 내리며 허공에서 한참 동안이나 흩날렸다.

 

그렇게 한 철 벚꽃 같던 그 애,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던 깊은 눈빛, 너무 필사적이라서 조금 떨리던 목소리.

 

그건 이제부터 다가올 꿈같은 한 달의 시작이었다. 바야흐로 4월이었다.

 

 

 

내가 아는 관린이는 시답지 않은 장난을 거는 애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애에게 “나 오랜만에 만나서 만우절 장난해?” 하고 물어봤을 정도로, 그건 좀 황당한 소리였던 거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그 녀석이 얼마나 씁쓸하게 웃으며 “아니. 나 장난 아니야.” 라고 하는지, 난 그만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4월의 시작이었다. 그 애에게도 나에게도 그랬다. 가장 푸르게 빛나기 전 누구에게나 한 번씩 오는 조금 낭만적인 시절. 억세고 검푸른 나뭇잎이 피어나기 전 아직 조금은 여리고 모호할 시절. 바로 그 계절이었다.

 

 

 

“그럼 대뜸 한 달만 사귀자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형. 내 평생 소원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사귀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잖아. 내가 잘 해줄게.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평생’, ‘소원’, ‘죽은 사람’, ‘가진 모든 걸’ 같은 단어가 너무 생소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공기마저 파스텔톤인 것 같은 4월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난 그 애가 왜 그렇게까지 비장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그 비장함에 대해서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지나면 다시 얘기하자. 난 너 농담하는 것 같으니까.”

 

사실 오랜만에 만난 관린이 무척 반가웠는데도 나는 이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 애가 너무 진심인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이렇게 상대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낼 자신이 없을 때 농담을 한다. 그렇게 서로를 한걸음 봐주고, 가끔은 도망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서로를 향해 웃어 주곤 하는 거다.

 

‘그냥 지금이라도 얼른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해.’

 

“아니. 나중은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냥 미쳤다 생각하고 한 번만 들어줘. 무리한 부탁 같은 건 안할게. 그냥 나랑 시간 보내 주고 마음껏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만 있게 해주면 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야. 형한테 내 마음 다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거. 그 뿐이야. 더 없어.”

 

담담하려고 온 힘을 다하던 그 애의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잔 봄바람만 불어도 곧 떨어져 버릴 거면서 필사적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봄꽃의 간절함이 그 애와 닮았다.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간절한 눈빛이었다. 누군가에게 사귀자고 제안하는 건 이렇게까지 간절한 일일 수는 없다. 고백이라는 건 보통 설렘이나 부끄러움 같은 단어와 맞닿아 있어야 맞다. 왜냐면 그건 실패의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애의 눈빛은 너무나 필사적이라서 마치 내가 이걸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우리는 봄바람을 피해 카페로 들어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한 달만 사귀다가 헤어져 관린아.”

 

“할 수 있어 형. 그 이상 사귀자고 조르는 일은 없을거야. 그건 걱정 마. 내가 약속할게.”

 

어떻게, 그리고 왜, 저렇게나 장담을 하는 거지.

 

우리는 한참 동안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한동안 그렇게 조용히 시선이 엉켰다.

 

마주친 시선이 우리가 입으로 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우리 사이의 공기를 미지근하게 데워 놓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나는 결국 아무 토도 달지 못하고 그저 ‘알았다’고 대답했다. 마치 뭐에 홀린 듯이.

 

관린이 한 입도 대지 않은 커피잔을 두 손에 쥔 채로 그림처럼 웃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표정을 갈아입는 것만으로도 예기치 못한 떨림을 줄 수가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서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우리는 한참을 더 말이 없었다. 창 밖으로 벚꽃 잎이 하나 둘 흩날렸다. 아직 쌀쌀한 봄날의 시작이었다.

 

 

 

약간의 장난스러운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한 달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냥 한 번 내키는 대로 살아봐도 되는 그런 가벼운 기간이었다.

 

‘그래. 너 말대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렇게 마치 거짓말처럼, 영원히 잊지 못할 4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

 

 

 

관린은 두 살 터울인데도 내가 애기 취급을 하면서 무척 귀여워하던 동생이다. 어렸을 때에는 두 살 터울도 꽤나 큰 차이여서 내가 중학생 때 초등학생, 고등학생 때 중학생인 그 애를 보면 그렇게 어리고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귀여워 보이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관린은 유난히 나를 잘 따르며 이쁜 짓을 했다. 형, 형. 하면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을 보면 너무 귀여워서 어린 나이에도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하는 기분까지 들고는 했다. 동생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관린을 친동생처럼, 또는 그 이상으로 아꼈다.

 

그러니 사실 그 ‘소원’이라는 것을 들어 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만약 그 애가 눈물이라도 조금 글썽거렸더라면 나는 그 애에게 달려가 얼마든지 그러마 하고 안아 주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어쩐지 아침부터 눈이 일찍 떠져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바닥에 점묘화처럼 연분홍색 파편이 흩뿌려져 있었다.

 

생생하게 매달려 있는 벚꽃잎이 아니라 골목 바닥에 처연하게 흩어져 있는 벚꽃잎을 보며, 나는 우리 집 앞에도 벚꽃이 피었단 걸 알았다.

 

햇볕이 잘 들어 꽃이 일찍 피는 동네였다. 동네 골목길에 떨어진 벚꽃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벚꽃잎을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꽃이 진 순간에도 아름다우니 마지막까지 버려지지 않고 사랑 받는구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뗐다.

 

 

 

사람들이 4월 1일 마다 장난을 즐기는 건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 계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조금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나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지근한 봄바람이나 그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어딘가 모르게 한 마디 농담 같이 느껴졌다. 내 삶에 갑자기 불어온 그 아이의 제안까지도.

 

 

 

집에서 몇 걸음 나오자 어슴푸레한 새벽 골목길에 관린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사르르하고 간지럽던 가슴 속에 약간 따끔따끔한 것 같은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번졌다. 그 애가 꽃나무 아래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서정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 한다는 소리가.

 

“회사 가야 되는데 이런 걸 어떻게 들고 가..”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첫 날이라고 아침부터 이걸 사들고 기다렸을 관린의 정성을 생각하니 나도 참 무심한 놈이다 싶어서. 그게, 나도 ‘연애’가 워낙 오랜만이었던 거다.

 

벚꽃과 닮은 연한 분홍빛의 장미였다.

 

‘그런데 이걸 진짜 연애라고 볼 수가 있을까?’

 

이건 연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아름다운 장면만 이어지는 탐미로운 영화 속 주인공들이 펼치는 연기.

 

‘대체 관린이가 나에게 이런 이상한 관계를 맺자고 한 이유가 뭘까?’

 

나는 그게 못내 궁금하면서도 진지하게 물어보기가 사실 좀 무서웠다. 그 애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며 고백해도 곤란할 것 같았고 다른 이유를 대면서 흥미 위주의 말이었다고 해도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약간 상처 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왜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사귀기로 했다고 하루 만에 그 애에게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생겨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내가 그 날 아침에 너무 일찍 눈을 뜬 이유는 아마 그 어젯밤에 그 애에게서

 

[사귀기로 해줘서 고마워. 오늘부터 내 남자친구네. 잘자고 좋은 꿈 꿔. 내일 봐. 사랑해❤]

 

같은 문자가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참 동안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그래. 너도 잘자고.]

 

라고 보냈다.

 

누군가에게 ‘잘자라’고 인사하고 잠이 드는 일은 어딘가 날 착 가라앉게 해줬다. 나는 가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연애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독한 의식 너머의 세계로 혼자 떠나는 내게 잘 다녀오라고,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해주는 그 누군가의 존재. 그 존재가 필요해서 나는 매번 누군가와 ‘사귀자’고 약속 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관린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잘자고, 내일 보자고.

 

 

 

“내가 회사까지 들고 가줄게. 형 부끄러우니까.”

 

그 문자의 주인공이 내게 건넸던 꽃다발을 다시 받아 들더니 말했다. 그가 커다란 손에 꽃다발을 받아 들자 저 수줍은 분홍색 장미 꽃다발이 어울리는 건 나보다는 그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넌 학교 안가?”

 

“응 나 학교 안가.”

 

“왜 안가. 수업 없어?”

 

“응. 수업 없어. 나 형이랑 같이 지하철 타고 회사가는 거 꼭 해보고 싶었어. 잘됐다. 이거 회사 가자마자 책상 위에 꽂아놔?”

 

그럼 너도 얼른 회사원이 되면 되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문득 그 때가 되면 너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연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아쉽거나 질투가 난다거나 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건 왠지 모르게, 외로움이었다.

 

어차피 나는 그 애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형?이라고 하면 도저히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한달만 사귀어줘”까지 들어주고 마는 나인데, 뭐 별 수가 있겠는가.

 

그 애와 함께 걸어 내려가는 지하철 입구가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관문처럼 느껴졌다. 이토록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 있으면서도 그 애와 있으니 하나도 현실감이 없었다.

 

 

 

*

 

 

 

탐스러운 장미 꽃다발에서 나는 향기가 아침부터 은근히 기분을 설레게 했다. 그 장미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서 있는 잘생긴 소년 또한. 그건 재미도 없고 반전도 없지만 보고 있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어떤 잔잔한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안에 마음을 내려앉게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없어도 나는 이 장면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도 안가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 겨우 이 꽃다발 전해 주려고 일어난 건가.’

 

아침이 일러서 아직 해도 덜 떴는데 거의 첫 차나 다름 없는 지하철에는 벌써부터 사람이 붐볐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아침 햇살이 비쳐 하얗게 질린 꽃이파리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 얼굴들 사이로 싱싱한 분홍빛 장미꽃 한 다발이 소년과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관린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서 그 애를 어떻게 쳐다 보아야 할지,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야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 생각했다.

 

‘집에서 다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 드러누워 있어도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던 녀석이 “사귀자” 는 한 마디에 이렇게 의식이 되다니.’

 

결국 그 애의 그 말은 우리 둘 사이의 무언가를 바꿔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단순히 역할이 변한 것 뿐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공기도 변해버렸다.

 

 

어느 새 지하철 2호선 창 밖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한강 수면을 내리쬐고 있었다. 강물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4월의 아침이었다. 장미 향기와 분홍색 꽃다발, 따뜻한 아침 햇살, 반짝이는 강물,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관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른하고 좋기도 했고, 어쩐지 가슴 한 켠이 슬프기도 했다. 왜일까.

 

그 때였다.

 

관린이 핸드폰에 꽂혀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내 귀에 끼우더니 다른 한 쪽은 자기 귀에 가져갔다.

 

핸드폰 화면을 만지자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4월 햇살처럼 달콤하고 간지러운 사랑 노래였다. 어떨 땐 이렇게 유치하고 단순한 사랑 노래가 가장 마음 속에 간절하게 와닿는다. 아무리 수많은 변주가 이루어져도, 지금까지 살다 간 모든 음악가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각기 다른 사랑 노래를 만들어 불러도,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그 흔하고 유치한 사랑노래가 아직까지도 불리워지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y are grey. You never know dear, how much I love you.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way.

 

당신은 나의 햇살, 유일한 나의 햇살, 당신은 하늘이 회색빛일 때도 나를 행복하게 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를 거예요. 그러니 제발 나의 햇살을 앗아가지 말아줘요.

 

 

 

*

 

 

 

회사 앞에서 꽃다발을 전해 받고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침부터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출근한 것도 좀 쑥쓰러웠고 아까의 간질간질하고 설레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 지훈씨! 아침부터 웬 꽃다발을 안고 출근한 거야? 지훈씨가 들고 있으니까 완전 그림이다. 오늘 뭐 여자친구 만나? 어휴 낭만적이다. 좋겠네.”

 

난 그냥 멋쩍게 웃으며 “아니요. 그냥 어디서 좀 나서..” 하고는 아무 병이나 붙잡고 꽃병 행세를 시켰다.

 

‘그래. 보통 그렇겠지. 내가 꽃다발을 안고 출근하면 누구에게 주려고 들고 온거라 생각하는 게 보통이지, 사귄 첫 날 기념으로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난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의도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한 달 사귀어 보고 괜찮으면 계속 만나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

 

그러니까 이런 연애는 정말 특이한 형태의 연애였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잘 모른다는 점에서도.

 

‘그런데 사귀기로 한 이상 그런 이야기를 묻는 것 자체가 더욱 이상한 일이잖아. 보통 사귄다는 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니까. 그래서 애인인 건데.’

 

애인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자,

 

‘그래. 이관린이 내 애인이군.’

 

하며 낯선 명제가 피부에 와 닿았다.

 

‘어딘지 간지럽고 이상하다. 그 애기같던 우리 관린이가..’

 

 

 

관린이가 턱받이를 하고 아직 침을 질질 흘리며 걸어다닐 때부터 나는 그 애의 집에 가서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며 놀곤 했다.

 

그 애를 처음 만난건 그 애가 6살, 내가 8살 때였을 거다. 아직 그 애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그 때에는 그 두 살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란 거의 상종을 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차였던 거다.

 

그래서 그 애 형과 나는 졸졸 따라다니는 그 애를 따돌리곤 엉엉 울리기도 했고 또 가끔 기분이 좋으면 데리고 놀아주기도 했다.

 

우리가 같이 놀아줄 때면 그 애는 신이 나서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형, 형! 하고는 내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 애가 우리랑 놀지 못하는 게 속상해서 엉엉 우는 것도 좋았고, 내 옆에 꼭 붙어서 귀찮을 정도로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좋았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부터는 그 애를 귀여워 해주고 싶다는 일종의 보호본능 같은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끔 못하는 실력으로 그 애 숙제를 봐주기도 하고, 어떤 과목은 어떻다는 둥 어떤 선생은 어떻다는 둥 선배질을 하기도 하고, 진로니 하는 걸 상담해 올 때마다 훈수를 두기도 했다.

 

그 애는 내가 조금씩 나이들어 영악 해질 때에도 변함 없이 맑고 투명했다. 그 아이가 있는 곳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피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하얀 크레파스를 칠해놓은 부분에 수채물감이 묻지 않듯이, 그 애는 여러 색이 덧칠되어 가는 내 마음 한 켠에 쉴 곳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애를 보지 않으면 어딘가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관린이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더니 나보다 훌쩍 키가 커졌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형제보다도 더 각별하게 지냈던 우리는 그리고 나서는 사이가 좀 소원해졌다.

 

그 애는 더 이상 나를 졸졸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시시콜콜 상담을 해오지도 않았다. 마침 나는 고3이었고 입시에 바빴다. 그리고 그렇게 다 큰 관린에게 형 행세를 하는 것이 이제 어쩐지 좀 민망하기도 했다.

 

어색해졌다는 게 딱 맞았다. 그래도 나는 그 애 형인 수현이와도 워낙 친해서 그 집에 뻔찔 드나들며 수현이와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그 애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관린이와는 예전처럼 살갑거나 친밀하지는 않아도 언제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가까운 사이였다.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우리 집이 이사 가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대학에서 연애도 하고 곧 취직 준비도 했다.

 

그 애 형과는 가끔씩 만나 술이나 한 잔 하는 사이가 됐고 관린이 얼굴 보기는 더 힘들어졌다. 어쩌면 수현이와의 관계보다 더 각별한 게 관린과의 사이였음에도, ‘친구의 동생’이라고 처음에 선정 해놓은 위치 때문인지,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먹해진 우리 사이 때문인지, 그 애한테만 연락해서 따로 만나게 되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나는 2년차 직장인이고 관린인 대학생인 지금.

 

 

 

그 애는 순수하면서도 항상 생각이 좀 앞서 가는 애였다. 세월을 미리 엿보고 온 것처럼 그 애는 아직 겪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혼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애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이 세상의 온갖 시시한 것들 따위는 알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을 줬다.

 

중학생때쯤 이었을 거다.

 

“형. 우리도 언젠가는 멀어지겠지?”

 

“뭐야.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우리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 아주 많은 게 끼어 들거야. 중요한 것들도 있고 귀찮기만 한 것들도 있을텐데, 아무튼 그런 것들 때문에 한동안은 서로가 잘 보이지 않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관린이는 가끔 봉우리가 맺히기도 전에 낙화할 것을 예견하는 것같이 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애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내 머리로는 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내가 그 애 보다 보고 배운 게 많은데도, 나는 세상을 겉핥기 하고 있고 그 애는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 애와 가까이 있으면 심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애의 맑고 깊은 세상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 모든 얕은 지식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걸 지켜주고 싶어지곤 했다. 관린은 내게 항상 그런 존재였다.

 

 

 

[형. 점심은 맛있게 먹었어?

오늘 아침에 같이 출근하는거 너무 좋더라 앞으로 계속 같이 출근해도 돼?

나도 정장입고 수트케이스 들고 같이 가야지~]

 

‘그래서 지금 네 머릿속에는 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걸까’

 

[뭐야 그러지 마

너 정말 학교 안가?

왜 그래 휴학했어?

말해봐]

 

[응..

사실 나 휴학했어. 해야 되는 일이 있어서.. 너무 걱정하지마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어

우리..

아니야.

내가 처음에 말했지?

마음껏 잘해주고 싶어서 사귀자고 했다고.

내가 아침에 가방도 들어주고 자리도 맡아줄게.

모닝콜도 해주고 아침도 챙겨줄게!]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해. 연애 연습을 해보고 싶은거라면 너는 지금 너무 과했어. 처음부터 상대에게 그렇게 잘해주면 다들 그걸 곧 당연하게 여긴다고.’

 

나는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관린이에게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라는 둥, 너무 그러면 상대가 얕본다는 둥, 온갖 잔소리를 하고 싶어졌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계속 상대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없잖아. 그러니까 처음에는 네 마음보다 조금 덜 잘해주고 조금 덜 표현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상대가 마음이 식었다는 둥 하면서 서운해 하지 않는단 말야..

 

나는 그렇게 적어 그 애에게 보내려다가 곧 깨달았다.

 

‘아, 그런데 어차피 그런 날이 오지 않겠구나. 우리는 딱 한 달만 사귀기로 했으니까.’

 

 

 

*

 

 

 

관린이는 아침에만 같이 출근해주는 게 아니었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질 때쯤 회사 밖으로 나오면 그 애가 나를 기다리며 회사건물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가 회식이나 약속 있으면 어쩌려고 미리 묻지도 않고 와.”

 

“그래도 괜찮아. 그러면 그냥 잠깐 얼굴 본 걸로 만족하고 돌아가면 되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하고 싶어서 그래. 최대한 많이 보고 추억도 많이 만들고.”

 

그리곤 내 가방을 빼앗아 들고 씩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침에는 출근 지하철을 타고 저녁이 되면 함께 퇴근 지하철을 탔다.

 

 

 

어느 날은 관린이가 뜬금없이 5시쯤에 카톡을 보냈다.

 

[형. 오늘은 나랑 놀이공원에 안갈래?]

 

[아니 이렇게 양복을 입고 놀이공원엘 가자고? 시간도 늦고

갈거면 주말에 가자]

 

[오늘 가고 싶어

주말에 가고 싶으면 주말에 또 가고

일단 오늘은 가자

야간개장으로 잠깐이라도 가서

관람차랑 회전목마만 타자

응?]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조르는 거야. 나는 그렇게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거 싫어하는데.’

 

하지만 무료했던 일상에 딱 한 달 동안 무계획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날 것 같지도 않아서 나는 또 무엇에 홀린 듯이 그 애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튼 그 애가 뭘 해달라고 하면 그걸 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 너와 나의 2년의 차이가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건 어쩌면 어린아이일 때에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알고 싶어서 뜨거운 불덩어리처럼 데굴데굴 온 데를 굴러다니며 세상을 겪어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리 걸음을 걷기 시작한 나는 어쩌면 그때 이미 너보다 어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애가 나의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런 존재를 가까이 두게 된 것이 내 삶에 한껏 온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어느 새 완전히 겨울이 지나간 것같아 보였다. 그래도 4월은 얕보면 안되는 계절이었다. 방심한 우리를 조롱하듯이 갑자기 변심해서 찬바람이 불어올 수도 있었으니까.

 

 

 

*

 

 

 

시커먼 정장을 차려 입고 하루 종일 일을 해서 피곤에 찌든 나와 캐주얼하게 잘 차려입은 그 애가 평일날 밤에 단둘이 놀이공원에 와 있는 그 모습은 아마 누가 봐도 좀 우스웠을 거다.

 

거기다가 동물 모양 머리띠까지 하나씩 사서 머리에 쓰고 나니, 정말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 후에는 어쩐지 좀 유쾌해졌다.

 

 

 

관람차랑 회전 목마만 타자던 관린은 갑자기 바이킹을 타자고 졸랐다. 평일 밤이라 사람도 없고 한산했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바이킹에 반짝반짝 조명이 들어왔다.

 

내 손을 붙잡고 맨 뒷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 관린이의 얼굴에서 중학교 때와 똑같은 개구진 표정이 보였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슴 속에 선득한 바람 같은 것이 불어왔다.

 

바이킹이 천천히 뱃머리를 들어올리다 이내 천장을 찌를 듯 한껏 솟아올랐다.

붕- 붕- 바이킹이 시계추처럼 진자 운동을 반복하며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단순히 왔다 갔다 할 뿐인 그것에 몸을 싣고는, 우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즐겁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 행복하다! 이 단순하고 뻔한 인생!

 

 

놀이공원 직원도 더 줄 서 있는 사람이 없자 “한 번 더어~” 하면서 운행을 끝낼 줄을 몰랐다. 마치 이 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랜만에 타는 바이킹에 생각보다 신이 나서 손을 들어 올리고 소리를 지르며 관린과 마주보고 깔깔 거리며 웃었다.

 

옆자리에서 연신 만세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그 애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속에 뭉클한 게 치밀어 올랐다 꺼졌다 했다. 그 순간마다 중력이 약해지는 것인지, 배가 갑자기 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바이킹이 끝까지 올라갔다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면서 떨어질 때, 나는 그게 바이킹 때문인지 옆에 앉아 있는 관린이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어느 새 영원할 것 같던 순간이 거의 다 지나갔다.

 

바이킹이 천천히 움직이며 멈춰 설 준비를 했다. 숨이 다 꺼져가듯이, 천천히, 천천히…

 

 

 

바이킹을 타고 내려오자 스냅 사진이 찍혀 있었다.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서로를 마주보며 환히 웃는 찰나의 순간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영원히 멈춰 있었다.

 

“잘나왔다. 한 장 주세요.”

 

관린이는 내게 묻지도 않고 사진을 달라고 했다.

 

“내가 살게. 한 장 더 주세요.”

 

“아니야. 내가 살게. 내가 사주고 싶어. 오늘 여기까지 와준 데 대한 선물로.”

 

끝내 카드를 내미는 나에게 못이기겠다는 듯이 관린이 손을 거두고는 고요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뭐 이런거 가지고.”

 

“나 오늘 절대 못잊을 거야. 아마 죽을 때까지, 아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야.”

 

“넌 뭘 자꾸 그렇게 곧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굴어. 우리 약속한 기간 끝나면 다신 안볼거야?”

 

“응.. 다신 안볼거야 형.”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뭔가 체념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거였을 거다.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뭐라고?”

 

“이거, 형이 나한테 처음 주는 선물이네. 잘 간직할게. 고마워.”

 

 

‘얘가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한거지?’

 

 

“형, 근데..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

 

 

관린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서고는 아무것도 가린 것 없는 투명한 눈빛을 온전히 드러내며 말했다.

 

 

“나 형 사랑해. 정말로.”

 

 

관린이 그 말로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모든 놀이기구가 멈추고 반짝이던 불빛도 따라 멈췄다. 그렇게 그와 나만이 동화 속 같은 그 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멈춰 있는 스냅샷 속에서 그 애 만이 마법처럼 살아나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마법이 풀리는 주문을 외듯이 말했다.

 

 

“이제 가자.”

 

 

“야 잠깐 기다려봐! 다신 안본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 그래?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우리가 왜 다신 못봐야 되는건데?”

 

“그냥.. 형, 그건 그 때가 되면 다시 얘기하자. 지금은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오늘은 진짜 행복한 날이야. 행복한 기분으로 집에 가자. 형도 그래줘.”

 

 

그 애가 웃는 게 억지 같기도 하고 진심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제 그 애를 이렇게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기만 하는 것도 벅찼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어린 날의 그 애처럼 제발 나랑 같이 가자며 엉엉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렇게 혼자 앞서 가다간 그 애가 곧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아무래도 관람차는 나중에 타야 될 것 같아. 피곤하다. 형도 피곤하지?”

 

하며 먼저 걸어가는 그 애를, 기를 쓰고 쫓아갔다.

 

 

 

그 날의 관린이는 정말 무척 신이 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관린이에게 엄청나게 휘둘리고 있는 느낌이기는 했는데 따져보면 그 무엇도 그 애가 내게 일방적으로 요구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걸까. 사랑한다며. 근데 다신 안보겠다니?’

 

왠지 관린이가 얘기한 ‘그 때’가 되면 뭔가가 너무 늦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물게 찾아오는 직감같은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모른척 했다. 단지 그냥 귀찮고 두렵다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쳐왔으니, 이제 그 애를 이렇게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

 

 

 

그렇게 관린이와 사귀기로 한 지 닷새가 지나고 첫 주말이 왔다.

 

‘데이트를 하자고 하려나. 정말 또 놀이공원에 가자고 하려나. 그 때 관람차를 못타서 영 아쉬운 것 같았는데.. 그러면 이번엔 에버랜드로 가자고 할까.’

 

사람은 정말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5일 내내 관린과 만났더니 나는 자연스럽게 주말에도 그를 만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놀이공원만 다니기도 좀 그러니까 이왕이면 이번엔 다른 곳에 가자고 해볼까..’

 

사실은 나도 연애를 안한지 좀 오래 지나서 어디 교외에 나간다거나 맛있는걸 찾아서 먹는다거나 한 지가 꽤 오래된 상태였다.

 

‘그래. 이 기회에 관린이랑 잔뜩 놀아보자.’

 

관린이는 같이 놀기에 즐겁고 무척 좋은 상대 였다. 계약기간이 한 달인 게 아쉬울 정도로.

 

‘이 정도면 여자랑 연애할 필요 없이 그냥 관린이만 계속 만나면 어떨까.’

 

그 생각에 이르자 스스로 깜짝 놀라 머리를 휘휘 저었다.

 

‘관린인 지금 연애하자고 하고 있는 거라고. 친한 형이랑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는거 아니고. 진지하게 사귈 각오도 안됐으면서. 정말 나도 못됐다.’

 

관린인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편하게 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그게 우리가 상대를 위해 힘겹게 희생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리는 부딪치는 부분도 없이 그냥 대부분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다. 사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랬다. 주고 받는 대화도 막힘없이 즐거운데다 무엇보다도 함께 있을 때 조금 들뜨게 하는 묘한 케미가 있었다. 그래서 그 애 옆에 있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쳤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랬다.

 

‘연애가 이렇게 편하고 좋은 거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솔로로 지내지도 않았을텐데.’

 

나는 대학 때 몇 번이나 지지고 볶는 지긋지긋한 연애를 겪고 나서 연애를 쉬고 있는 중이었다. 2년차가 되며 조금 안정이 되었지만 신입사원 시절에는 상사 비위 맞추고 업무 익히느라 정신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렇게 묘하게 들떠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눈을 뜬 나는 아직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뭘 입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정장 입은 모습만 봤으니까 오늘은 좀 어려보이게 입어야겠다. 허, 참. 이러니까 진짜 연애하는 것 같잖아. 나 이러다가 3주 뒤에는 엉엉 우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관린에게 전화가 왔다.

 

“형. 일어났어?”

 

“응.. 아니..”

 

일부러 자다 일어난 척을 하고 있는데 관린이,

 

“아직 피곤해? 더 자고 싶어? 그러면 나 형 집에 가서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까? 나는 준비 다했는데.” 했다.

 

나는 머리까지 이미 다 만진 게 못내 민망해서

 

“아니.. 그냥 내가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그냥 대충 편하게 하고 나가면 되잖아.” 했다.

 

“그럼. 형은 어떻게 하든 항상 멋있어. 그럼 준비 거의 다 될 때쯤 카톡줘. 데리러 갈게.”

 

“응.. 알았어.”

 

 

전화를 끊은 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언제 이렇게 작업거는 멘트를 다 배운거야. 쪼끄만 게,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있다가 내가 실실 웃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겁도 없이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아, 인생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고.

 

 

그리곤 대략 한 30분 정도 텀을 두고 관린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이제 곧 거의 다 준비될 것 같아 이제 막 다 씻고 나왔어]

 

막 다 씻고 나오기는커녕 예전에 머리도 다 만지고 몇 번이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 이후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냈다.

 

‘아니 근데 이 옷이 맞나? 이렇게 고민한 날이면 항상 꼭 반응이 안좋았는데. 에휴 모르겠다. 그냥 내가 보기에 제일 좋은거 입으면 되겠지.’

 

그리고는 형광 핑크와 형광 하늘색이 섞인 현란한 티셔츠로 갈아 입고는, ‘됐다.’ 하고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 봤다.

 

‘어? 보낸지 1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1자가 안 없어졌네? 전화를 해봐야하나?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리자. 까짓거 나는 집에 있는데 데리러 오는 애가 늦을 수가 있지.’

 

그리고 나서 나는 한참을 설레는 마음에 관린이가 오길 기다렸다.

 

 

 

아,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게 귀찮지 않은 게 대체 얼마만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무언가로 스스로를 구슬려야 했다. 차가운 이불 밖으로 나가야 되는 구실을 쥐어주지 않으면 그 날 그 날 하루를 포기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예전엔 쌉싸름한 담배 한 개피였고 최근엔 쓰디쓴 세 샷 짜리 아메리카노였다.

 

그리고 요즘 그런 해로운 것들 없이도 나의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스러운 누군가의 존재였다. 나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그 순간에는 몰랐다.

 

그 날이 그렇게 긴 하루가 될 거란 것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2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나는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나서 ‘어디 언제 연락이 오나보자’ 했다가 시간이 지나자 이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오다가 뭐 잘못된 건 아닐까.’

 

 

 

그리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누군가 전화를 받는 순간 살짝 긴장이 풀렸다.

 

 

 

“여보세요. 관린아. 너 왜 안 와.”

 

“여보세요? …박지훈?”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하지만 기대치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누구세요? 어? 수현아? 오, 오랜만이다. 너 잘 지내지? 아 근데 지금 관린이 뭐하고 있어? 집에서 나갔어?”

 

“…꼭 만나러 가야 된다는 게 너였구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응?”

 

 

 

‘아니 설마 얘랑 나랑 연애하는 거 들킨 건가? 그래서 못 나온건가?’

 

 

 

“지훈아.. 지금 너 관린이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수현이가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 애는 관린이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생각의 경계가 단순하고 그래서 강한 애였다.

 

그래서 그의 슬픔도 그렇게 우직하고 정직했나보다.

 

 

 

“관린이가.. 관린이가 많이 아파 지훈아. 어떡하면 좋냐. 착한 우리 관린이가.. 많이 아프다. 지훈아.”

 

 

 

 

 

 

 

 

 

 

 

 

 

 

<2주일째>

 

 

 

“…그게 무슨 소리야? 관린이가 아프다니?”

 

“요새 매일 같이 무리 하더라고. 자기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관린이가 너무 기분이 좋아보여서 혹시 치료에 도움 될까하고 가만히 뒀는데, 오늘 역시나 발작이 와서 병원에 실려 갔어. 지훈아. 나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일이 착한 내 동생한테 일어난 걸까..”

 

 

나는 완전히 머리가 멈춰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마비 대신 사고마비가 온 것 같았다.

 

인생을 한 편의 영화라고 하면 가장 극적인 순간은 사랑하는 아이와 지하철을 타던 순간이나 바이킹을 타던 순간이 아니라 결국 이런 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뭐라는 거야. 야. 너 왜 관린이가..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하는 거야? 어?”

 

“지훈아….”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수현아.”

 

“..그래. 지훈이 네가 네 친동생처럼 관린이를 아꼈었잖아. 병원에 한 번 와주라. 네가 오면 관린이도 좋아할 거야. 응?”

 

 

꼭 선문답을 하는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멀쩡하게 날 회사에 데려다 주고 데려다 오고 했던 애라고. 나랑 어제 놀이동산에 가서 바이킹까지 탔다고. 지금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건가? 갑자기 소꿉친구의 남동생과 계약연애를 시작한 것부터가 이미 내 인생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일이었는데, 그 애가, 뭐라고?’

 

 

어제 사 온 스냅샷이 책상 머리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아, 어쩐지 요즘 내 인생이 너무 행복하다 했어..’

 

 

 

*

 

 

 

그리고 난 아무래도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수현이가 찍어준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내가 아침에 관린이에게 보낸 1자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

 

 

‘아니야. 내가 가면 둘이서 아마 날 두고 놀리겠지. 수현이는 옛날부터 장난이 많았어. 너무 오랫동안 소원했던 거 아니냐고 나를 탓하고는 관린이와 함께 깔깔대며 웃고 있을 거야.’

 

 

 

그리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우리가 이제 그런 장난을 치지 않을 만큼 컸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어느새 벚꽃이 완전히 만개해 있었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꽃보다 더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팔짱을 끼며 걸어 다녔다. 그저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행선지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만이 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 달리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관린아. 나 조금 더 행복해도 되는 거잖아. 이건 아니야.’

 

 

 

*

 

 

 

결국 내 눈으로 주사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는 관린이의 모습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얘가 아프다는 걸 모를 수가 있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눈앞이 어지러워서 그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마치 내 눈이 그 모습을 담아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린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어디가 불편하진 않을까, 뭐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 안색 하나하나를 살폈는데. 나는 얘가 이렇게 아픈데도..’

 

그런 현실적이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시 머릿속이 깜깜하고 아무 생각도 안들었다.

 

그리고 머리가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마다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왜 이렇게 무거운 중력을 이겨내고 계속 꼿꼿이 서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그 목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관린아.. 관린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안돼…”

 

 

내가 결국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관린의 손을 잡고 펑펑 울자 수현이 나를 달래려 안아주다가 결국 본인도 같이 울었다.

 

 

잠들어 있는 관린이의 얼굴이 너무 고요하고 편안해 보여서 나는 농담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이제 어른이라서 이 반전 다음에 곧바로 또다시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친형인 수현이 앞에서 내가 이렇게 우는 건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 병실 밖으로 나왔다.

 

 

“언제부터야?”

 

“안지 얼마 안됐어. 한 3주일 전에 갑자기 애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간 이후로 입원해 있다가 일주일 전에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라는 거야. 이미 어느 정도 진행 돼서 전이 가능성이 크다고, 사실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더라.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가망이 없대. 그런데 아직 나도 실감을 못하고 있었어. 그 이후로는 관린이가 이 정도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없었거든.”

 

 

‘일주일 전이라. 나랑 사귀기로 했을 때잖아. 그러니까, 그 때 관린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리고 곧장 나에게 와서.. 자기 소원이라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 주겠냐고..’

 

 

“내가 미안하다. 수현아.”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아니야. 나 갈게. 관린이 깨어나면 연락줘.”

 

“지훈아. 또 올거지? 관린이한테 너 다녀갔다고 할게.”

 

“수현아. 관린이한테 먼저 물어봐.”

 

“어? 뭘?”

 

“내가 오길 원하는지… 알았지? 일단 물어봐.”

 

나는 그 순간에도 상처받을 그 아이가 걱정됐다.

 

 

 

그리고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집에 와서 보니 병문안을 가기에는 지나치게 밝고 쾌활한 옷과 신발을 신고 있는 내가 거울에 비쳐 보였다.

 

모든 게 꼭 블랙 코미디 같았다. 이제 보니 너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현란한 색으로 차려입었던 거다.

 

그 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너는 뭐가 그렇게 인생이 유쾌하냐’고 물으면 크게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네 인생엔 이런 행복한 일 없지, 하고.

 

그리고 정말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줄 알았던 이 로맨스 영화엔 사실 반전이 있었던 거다.

 

인생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뒷통수를 친다. 준만큼 받아간다고 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약속한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어요. 그 애의 인생은 이제 막 4월 초순이란 말이에요.’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절대자를 원망하다가 다시 복종하는 기분이 되어 그저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내 행복을 다시 돌려달라고.

 

땅 밑까지 내려왔다가도 다시 천장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는 바이킹처럼, 어서 다시 내 행복을 돌려달라고.

 

 

책상 위에 붙어 있는 스냅샷 속의 관린이 토끼 머리띠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박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는 이 배가 갑자기 땅 밑으로 뚝 떨어질 것을 예견하고 있다는 듯이 바이킹의 꼭대기에서 한껏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절망적인 순간에도 옷을 갈아입고 씻고 하는 따위의 지질한 것들을 해내야 하는 걸까. 가끔 인생은 이렇게 커다란 운명의 흐름 속에서조차도 너무나 사소해서 역겨웠다.

 

 

그리곤 그냥 무심히 지금까지 관린이와 한 카톡을 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1자가 없어지며 새 메시지가 떴다. 잠시 정신이 어찔했다.

 

 

[형 미안해. 내가 몸살 기운이 좀 있었는지 형 메시지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서..]

 

 

‘수현이가 말 안했나보구나.. 관린이는 내게 병이 있는 걸 숨기고 싶은 거야. 아마도 이 계약연애 기간이 끝나기까지.’

 

 

[아, 그래? 사실은 나도 잠이 들었어.

우리 오늘은 피곤한데 푹 쉬고 다음에 만날까 그럼?]

 

[아.. 그럴래? 형 정말 미안해.. 화났어?]

 

[아니야 화 안났어]

 

[정말…? 미안해. 내가 얼른 나을게]

 

 

‘얼른 낫겠다고? 정말?’

 

 

휴대폰 화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고였다. 화면에 눈물 방울이 똑. 똑. 하고 떨어졌다.

 

 

[관린아]

 

[응]

 

[내가 너 언제나 많이 아끼는 거 알고 있지?]

 

[하하.. 갑자기 왜 이러실까. 그래도 기분 좋다]

 

[갑자기 아니야

너 안 만나고 있었을 때도 가끔 네가 생각났었어

우리 관린이는 뭐하고 있을까 이제 어른이 됐는데 힘든 일은 없을까하고 가끔씩 떠올랐었어

그래도 네가 이제 애기가 아니니까.. 그리고 예전처럼 형 노릇 하기에는 이제 우리 둘 다 어른이니까. 그래서..]

 

[다 알아. 형이 나 많이 아꼈던 거

그리고 어른이 돼서 바쁘고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

다 알아

그냥 이렇게 다시 만나줘서 고마워]

 

[그래 관린아. 어서 푹 쉬고..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라’고 쓰는데 거의 몸이 들썩 거릴 정도로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야 이 바보야. 그렇게 무리해서 매일같이 나를 만나러 오면 어떡해. 얼마나 오랫동안 날 좋아해왔던 거야. 그걸 이제야 말하면 어떡해. 난 아무것도 몰랐잖아. 이 바보야..’

 

 

[응 너무 걱정 하지마 형. 우리 아직 같이 할 일이 많잖아.]

 

 

 

*

 

 

 

금방 낫겠다던 관린이는 결국 주말 내내 나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관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마침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아이도 암에 걸릴 정도면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불행은 피해갈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아. 오늘은 나 데리러 오지마. 아직 몸도 안좋은 것 같은데. 이번 주말에 보자. 응?”

 

“형. 벌써 4분의 1이나 지났어. 시간이 없어. 나는 이렇게 하루하루 가는 게 너무 아쉬워.”

 

“시간 많아 관린아. 우리 한 달이 지나도..”

 

“아니야. 형.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갈게.”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말하는 결연한 그 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서 힘껏 부정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형…”

 

“이번 주말에 만나. 그렇게 네 멋대로 한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너무 멀었어. 만나고 싶어. 지금 너무 보고 싶어..”

 

“아니면 내가 퇴근하고 너 만나러 갈게. 네가 아픈게 싫어서 그래. 나 때문에 무리하는 것도 싫고. 제발 내 말 들어 관린아.”

 

“..알았어. 그러면 우리 오늘 밤에 만나?”

 

“그래. 내가 너네 동네로 갈게. 쉬고 있어.”

 

 

타들어가던 담배가 무참하게 발끝에서 짓이겨지기까지 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타오르던 담뱃불이 꺼지고 어느새 꽁초 끝이 새까맣고 굳어버렸다. 하지만 담배 한 개피가 그렇게 짧디 짧은 길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에 중독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입 안에 씁쓸한 맛만 찝찝하게 남았다.

 

그 날 아침에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이대로 일어나버리면 현실이 나를 다시 무겁게 덮쳐올 것만 같아서 나는 그저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불 속에 누워 나를 조금 망칠 기회를 주기로 약속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담뱃값이 얼마나 올랐었지. 그런 생각하며 난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주말 내내 울었더니 자고 일어나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회사에 가니 내 책상 한 켠에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관린이가 선물한 장미꽃잎 끝이 시들어가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 금방 시드는 거야. 그렇게 예뻤는데.. 너무 짧잖아. 조금만 더 예쁜 모습으로 있어줘. 제발…’

 

나는 화장실에 꽃병을 들고 가 물을 갈아주면서 또 한참을 울었다.

 

이미 꺾여 버린 가지 끝으로 얼마나 온 힘을 다해 수돗물을 빨아들였는지, 꽃병에 물이 반 정도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장미는 결국 영원히 처음의 그 아름다웠던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주말 내내 나는 관린이가 지금까지 했던 말과 행동을 곱씹었다.

 

“어쩌면 다음은 없을 지도 몰라.”

 

내일은 없을 것처럼 굴던 그 애의 행동, 한 달이 지나면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던 관린이의 말.

 

그래서 계약연애였던 거다. 한 달 동안 나와 사귀고 그 다음에는 조용히 내 인생에서 사라져주고 싶어서.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쓸데없이 남을 배려하는 애였다. 어쩌면 이건 그 애가 살면서 처음 부리는 “떼”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밀어붙이는 일도, 생전 무언가를 해달라고 떼를 부리는 일도 없는 애였다.

 

그런 애가 평생의 소원이라면서 나에게 계약연애를 제안했을 때, 왜 나는 그 애에게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 거라고 깨닫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하루종일 넋을 놓고 있자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대답을 생각하다가 나는 회사에서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그리고는 남은 휴가를 다 썼다.

 

14일. 그나마 지금까지 여름과 겨울 휴가를 위해 휴가를 하루도 쓰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 아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선택한 나와의 한 달의 시간을 위해 나는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 난 그 애가 곧 죽을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수 십 년간 더 살았다는 사람도 있잖아.’

 

적어도 그렇게 며칠 사이에 악화될 리가 없어 보였다. 난 의학에는 어차피 문외한이었지만 관린의 멀쩡한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거였다.

 

고등학생 때처럼 뽀얗고 생기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다 그냥 어른이 돼서 조금 수척해진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약간 핏기 없고 마른 모습 때문에 오히려 더 남자답고 잘생겨 보이기도 했다.

 

‘한 달 간만 보고 다신 보지 말자니. 그렇게는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관린아. 난 너 그렇게 못 보내.’

 

 

꽃이 다 져서 새파랗고 억센 잎이 돋아날 때까지, 그리고 그게 아름다운 색으로 마지막을 물들이고 힘없이 떨어질 때까지, 그 때까지는 안된다고.

 

 

 

*

 

 

 

“내가 가겠다니까 왜 왔어. 아직 몸도 안좋아 보이는데.”

 

칼퇴를 하고 나왔는데 해가 길어져서 아직 아슬아슬하게 푸른 하늘 밑으로 그림처럼 벤치에 앉아 있는 관린이 보였다.

 

‘아직 날도 추운데 왜 저렇게 얇게 입고 있는 거야.’

 

입술에 색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날 보고 빙긋 웃는 그 애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애는 그렇지 않아도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애였다.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형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오면 조금이라도 일찍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말에 못 만나서 너무 서운했거든. 화내지 마. 나 이제 괜찮아. 그냥 좀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된댔어.”

 

“누가.”

 

“의사선생님.”

 

 

나는 관린이가 들리지 않게 조그맣게 ‘개새끼..’하고 욕을 했다.

 

 

“그래… 얼른 어디 들어가자. 아직 밤엔 날이 쌀쌀하니까.”

 

“어디 갈까.”

 

“글쎄. 우리 집에 갈까.”

 

“와. 정말? 나 형 혼자 살고 나서 한 번도 못 가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가자!”

 

 

관린이 어린애처럼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다 큰 어른 남자끼리 누가 팔에 팔짱을 껴.”

 

 

내가 애써 웃으면서 말하자 관린이 그랬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못했어. 형한테 너무 애기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그런데 이제 해보고 싶네. 그 때 부리고 싶었던 어리광도 부리고. 나랑 안놀아준다고 떼도 쓰고.”

 

“나이를 거꾸로 먹나보다.”

 

“정말 그런가봐.”

 

 

나는 정말 관린이가 나이를 거꾸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볼살이 통통하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 나를 졸졸 따라다녔으면. 그러면 나는 그 옛날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줄 텐데.

 

 

“관린아.”

 

“응.”

 

“나 언제부터 좋아했니?”

 

 

관린이가 빙긋 웃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사실 잘 몰라.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좋아하고 있었어. 그래서 요즘에는 꼭 꿈꾸는 것 같아. 나 태어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

 

 

태어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관린의 말을 듣고는 나는 결국 관린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이 바보야..”

 

“형?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행복해할걸 왜 이제야 말했어.”

 

“그야 말하면 형한테 차일까봐 그랬지..”

 

“차였을지를 네가 어떻게 알아.”

 

“왜냐면 형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잖아.”

 

“관린아..”

 

“응 형. 자꾸 그렇게 은근하게 부르면 나 설레.”

 

“한 달 말고 더 오래 만나자. 응? 관린아.. 너 오래 만나자 나랑..”

 

 

내가 그렇게 말하며 목놓아 울자 관린이 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달랬다.

 

 

“형.. 형이 지금 내가 밀어붙이는데 휩쓸려서 그래. 나는 형을 이렇게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형은 어려서부터 내가 말하는 건 뭐든 들어줬잖아. 그러니까 딱 이만큼만. 이 정도로 만족해. 난 정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그게 아니야 관린아. 왜 그렇게 벌써 포기하고 있는 거야. 나를 좋아하면 더 악착같이 오래 살아. 어쩌면 내가 너보다 널 더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우리에게 상상도 못했던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적어도 나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 사귀는 거 아니더라도. 다신 못만나는 거 싫어. 싫어 관린아..”

 

 

관린이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훌쩍거렸다.

 

 

“아이고 우리 형이 이제 애기가 다 됐네. 그렇게 나랑 헤어지기가 싫어? 이렇게 울 정도로? 이거 나 좀 정말 착각하려고 하는데?”

 

 

훌쩍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 애가 하나도 얄미워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 싫다 이 녀석아. 아주 못됐어. 갑자기 나타나서 한 달만 사귀자고 하더니 대뜸 한 달이 지나면 못 만난다고 해? 내가 너 어렸을 때 그렇게 버릇없게 안 가르쳤는데.”

 

 

관린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엄지로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어느새 이렇게 손도 다 크고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멀쩡하게 다 컸는데. 이렇게 멋있어졌는데 네가 왜…’

 

 

 

어느새 그런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집 앞에 거의 다 와 있었다. 주택가에 가로등이 노란색 불빛을 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고양이가 울었다. 반지하 방에서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좁은 골목이었다. 골목 가득 저녁 짓는 냄새가 났다. 칸칸히 누군가의 삶이 고여 있을 집구석 어딘가에선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집을 바로 앞에 두고 굳이 그 제대로 길도 닦이지 않아 울퉁불퉁한 골목에 서서 첫키스를 했다.

 

울어서 끈적해진 입 안이 하나도 싫지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애절하게 서로의 혀를 감았다. 지독하게 생생하게도 삶의 맛이 났다. 내 등을 감싸 안은 팔이 나뭇가지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여전히 살아 있는 그 애를 온 몸으로 느꼈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 매서운 추위를 머금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래서 옷깃을 여미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데도 가끔은 머리카락이 죄다 헝클어질 정도로 찬바람이 온 몸을 흠뻑 적셨다.

 

4월은 그렇게 적당히 다정해서 잔인했다. 너무 추워서 온 몸을 감싸 안을 만큼 무자비하지도 않으면서 무방비한 상태로 있으면 금세 봄바람에 젖어 있는 우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꼭 붙들었다.

 

캄캄한 밤공기에 흰 바탕을 대면 의외로 옅은 분홍색일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유해한 공기를 잔뜩 들이 마시고는 온 몸이 노곤해져서 내 방구석으로 두 손을 꼭 붙잡고 들어갔다.

 

 

 

내 볼 것 없는 자취방에 들어온 관린이는 생각보다 집이 좋다며 조그만 소파에 제멋대로 벌러덩 누웠다.

 

‘너스레를 떠는 척은 하지만 사실은 좀 피곤했던 걸까?’

 

 

“누워 있어. 뭐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 참 너 저녁은 먹었니? 내가 뭐 먹을 거 해줄까?”

 

 

말 해놓고 보니 시장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관린이 아무거나 먹여도 되는 건가. 환자한테는 뭘 먹여야 되는 거지.’

 

지금까지 관린이와 있으면서 그다지 식사를 한 적이 없는 게 떠올랐다. 항상 자긴 배가 안 고프다면서 편의점에서 사온 것들만 뒤적거리던 관린의 모습이 떠올라 냉장고를 뒤지던 손이 멈칫했다.

 

 

“관린아”

 

“응 형”

 

“잠깐만 있어봐. 내가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올게.”

 

“형. 가지 말고 이리와.”

 

“그래도 너 뭐라도 먹어야지. 안그래도 요즘 많이 말랐는데..”

 

“얼른.”

 

 

내가 마지못해서 소파에 누워 있는 관린에게로 다가가자 관린이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나를 껴안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

 

 

그 애의 체온이 따뜻해서 안심이 됐다. 점점 이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나 내일도 형이랑 같이 출근할래.”

 

“관린아. 나 내일 회사 안 가.”

 

“어, 왜?”

 

“너랑 연애하고 싶어서.”

 

“뭐?”

 

“한달이잖아. 이제 벌써 3주도 채 안남았어. 그래서…”

 

“형. 그래도 되는 거야?”

 

“응. 그래도 되니까 했지.”

 

“형 혹시 지금 나 꼬시는 거야? 라면 먹고 갈래 그런 거야?”

 

“뭐야? 이 녀석이..”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관린이 배를 툭쳤다. 손에 닿는 느낌이 군살이 하나도 없는데 생각보다 힘을 많이 준 것 같아서 스스로도 조금 당황했다.

 

그대로 관린이가 배를 움켜잡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관린아! 관린아!! 괜찮아? 미안해…미안해… 아 어떡하지. 핸드폰,”

 

 

나는 당황해서 얼른 병원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휴대폰을 찾았다.

 

‘아, 어딨지..’

 

미안하고 걱정이 돼서 금세 눈물이 고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투 주머니에 있나하고 찾으러 가려는 순간, 관린이 손목을 잡고 나를 끌어 당겼다.

 

관린의 위로 엎어진 나는 곧 휙 하고 몸을 돌리는 관린의 힘에 못 이겨 그 애 밑에 누웠다.

 

 

“뭘 그렇게 놀라. 눈물까지 보이고.”

 

“야!!”

 

 

놀랐던 가슴이 안심하면서 눈물이 넘쳐 흘렀다.

 

 

“쉿.. 괜찮아. 장난이야. 내가 그렇게 좋아?”

 

“야. 이관…”

 

 

관린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뜨겁게 혀가 섞이고 온 몸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저 그 애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어느새 넓어진 어깨와 단단해진 몸. 더 이상 보호본능을 자극하던 그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 순간에는 관린이의 몸속에서 싸우고 있을 병마도, 언젠가 종료될 우리의 연애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린이의 눈빛과, 그의 뜨거운 입술과, 치밀어 오르는 사랑스러운 감정밖에는.

 

 

우리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현실과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그가 내 몸 속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바이킹이 뚝 떨어질 때처럼 온 몸이 깊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온 세상이 반짝거렸다. 그게 강제로 꾸며낸 것이든 진실이든, 온 세상이 꿈만 같이 반짝거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을까. 나는 결국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거였을까. 혹시 좀 더 일찍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우리는 더 마음껏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첫 관계를 마치고 내 옆에 누워 있는 관린의 품에 안겨서 그런 생각을 했다. 관린이의 탄탄한 가슴 안에 있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소중해서 그의 하얀 가슴팍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의 손이 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가 예쁘게 웃었다.

 

 

그 날 관린이와 함께 관람차를 탔더라면 분명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안겨 눈을 감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 세상을 내려다보며 관람차의 맨 꼭대기 위에 멈춰 있었다. 멀리서 우리만을 위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오늘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가능하면 지금까지의 이 일주일이 인생에서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고. 관람차가 동그란 벽시곗바늘 위를 돌고 또 돌듯이, 그렇게 천천히.

 

 

 

*

 

 

 

그 후로 꿈만 같은 일주일이 흘렀다.

 

관린이는 가끔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외출을 할 때 말고는 거의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의 반 정도는 우리 집에서 자다가, 어딘가에서 전화를 받은 날이면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될 것 같아, 하고는 했다. 나는 그게 가족들과 병원에 가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저 모른 척 해줬다.

 

언제까지 이렇게 모른 척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 짧은 행복을 지켜주기로 했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

 

 

 

그 날은 관린이와 만난 지 3주째가 시작되는 날, 그러니까 그와 약속한 계약연애 기간이 딱 반절이 남은 날이었다.

 

 

난 아침부터 단장을 하고 그 애 집 앞으로 갔다. 그 애가 첫 날 준비했던 것처럼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서. 파란색 장미였다. 어디선가 언뜻 듣기를, 파란색 장미의 꽃말은 기적이라고 했다.

 

그 애가 첫 날 선물했던 분홍색 장미는 휴가를 쓴 날 집에 가져와서 잘 말려서 보관해 놓았다. 그리고 다시 품 안에 안겨 있는 싱싱한 장미를 내려다 보니 그 애와 처음 사귀기로 했던 날이 떠올라 가슴이 설렜다.

 

‘고작 2주 사이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했구나. 너도, 나도. 우리가 알고 지낸지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야.’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그 애가 날 처음 회사에 데려다주던 때가 떠올라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어느덧 4월 중순이 돼서 아침 공기가 마냥 쌀쌀하진 않았다. 그날따라 미세먼지도 없고 날이 좋았다.

 

데이트코스도 내가 준비했다. 그 애가 평소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에 데리고 가려고 꽤 좋은 차도 렌트 해놨고 환자에게도 무리가 없도록 정성껏 도시락도 준비했다.

 

귀에서 그 때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제 들어보니 마냥 달콤하기만 한 사랑 노래는 아니었다. 그 때 지하철 창 밖에서 비쳐 들어오던 아침 햇살과 반짝이던 강물이 떠올라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때 났던 장미꽃 향기보다 지금 맡는 향기가 한층 더 진한 것 같았다.

 

 

 

the other night dear, as I lay sleeping. I dreamed I held you in my arms. Buy when I awoke, dear, I was mistaken and I hung my head and I cried..

 

 

 

나는 가사를 들으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 애가 나오면 파란색 장미를 가슴에 안겨줘야지. 새하얀 피부랑 잘 어울릴 거야.’

 

 

 

나는 아까부터 카톡에 없어지지 않는 1자에 대해서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 때 이어폰 너머로 희미하게 불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 사이에 들어가 있는 효과음 같던 것이 달콤한 목소리 사이를 잔인하게 뚫고 들어왔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 소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때까지 멀뚱히 서있었다.

 

 

 

 

사이렌 소리였다.

 

나는 결국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수현에게 업혀 나오는 관린에게로 달려갔다.

 

손에 들고 있던 파란색 장미 꽃다발이 길바닥에 떨어졌다.

 

이어폰에서는 계속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You told me once, dear, you really loved me and no one else could come between but now you’ve left me and love another. You have shattered all of my dreams…

 

 

 

 

 

 

 

 

 

 

 

 

 

 

 

 

 

 

<3주일째>

 

 

 

나는 정신을 잃은 관린의 곁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 아이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내게 주는 위안을 두 손안에 꼭 붙들고서 간절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현실 너머의 존재를 찾았다.

 

그 언젠가 내 세계를 조용히 멈춰버렸던 그 마법과도 같은 신비로운 힘이 다시 관린에게 생겨서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은 이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멈추기를. 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만이 오롯이 남기를.

 

 

내 옆에서 그 애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예쁜 우리 아들이, 동생이, 다시 일어나 뽀얀 보조개를 움푹 패며 웃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 복학도 하고 언젠가 학사모를 높이 던져 올리는 졸업사진을 남길 수만 있다면, 그 아이가 앞으로 누굴 사랑하고 누구와 일생 함께 한들 그건 당장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관린이는 언제 나와 만날 준비를 다했는지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연노랑색 셔츠를 차려 입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 챙겨온 푸른 장미 꽃다발을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노랗고 푸른 색깔의 대비가 현실감 없을 정도로 생동적이어서 홀로 힘겹게 싸우고 있을 그 아이의 상황이 더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푸른색 꽃다발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모았다. 네가 눈을 뜨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면서, 한바탕 거짓말 같은 꿈이었다며 다시 나를 꼭 안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관린은 모두의 염원과는 다르게 꽤 오래 입원을 해야 했다.

 

그 애는 의식이 돌아오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잦은 발작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신이 들 때마다 제발 나가달라고, 이런 모습을 보지 말아달라고 내게 애원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검음을 하고 병실에서 나가 복도에서 쓰러져 울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 버렸다는 미안함보다도 그 와중에도 나를 의식하는 그 애의 마음이 너무 무겁고 달콤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만약 내가 너의 마음을 좀 더 일찍 알아채고 받아주었다면, 그래서 너를 진작부터 더 행복하게 해주었다면 혹시 네가 아프지 않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덮어두고 그 아이의 짝사랑은 힘들고 아팠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저 나 자신을 비난하기 위해 찾아낸 한낱 핑계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때는

 

‘아니면 혹시 나 때문에 무리해서 지금 이렇게 갑자기 악화된 건 아닐까. 나와의 “연애” 때문에 어쩌면 너는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의 생명을 깎아먹은 건 아닐까. 내가 너의 그 소중한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관린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나 자신을 자책을 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그 애가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나 자신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실소를 터트려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나의 곁에 오래 남아 주길 바라는 건 단지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게 내 행복이기 때문이었다.

 

 

 

*

 

 

 

관린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관린이와 사이가 심상치 않은 나를 보고는 놀라서 좀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휴가까지 내고 관린을 전담해서 돌보아 주겠다는 내게 다들 연신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래 네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관린이를 살뜰히도 챙겨줬지.”

 

단지 아끼는 동생이라기엔 너무나 애절한 내 모습을 못 본 것도 아니면서도 관린의 어머니께선 그저 그렇게만 말하셨다. 일부러 모른척 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일종의 휴전같은 거였다.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함께 헤쳐 나가며 슬퍼도 하고 서운해도 하고 결국 다시 서로를 마주볼, 우리의 우습도록 빤하고 그래서 더 간절한 미래를 그렸다. 관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게 곧 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하고 또 너무나 아득하기도 했다.

 

 

 

나는 관린이 입원해있는 병실에서 거의 하루 종일을 보냈다. 낮동안 그의 옆에 있다가 밤이 되면 주변에서 대충 씻고 와서 또다시 병원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병원에서 밤을 새우길 사흘째, 관린의 몸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오랫동안 발작을 겪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어서 몸에 힘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법 정신도 맑고 기분도 좋아보였다. 고요한 방 한가운데 약간 끝이 갈라졌는데도 청아한 그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 지금이 몇 시야? 아니, 며칠이야?”

 

“이제 막 목요일 됐고 새벽 12시가 좀 지났어. 관린아. 어때? 몸은 좀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니?”

 

 

오랜만에 관린이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니 끔찍하던 현실의 하루에서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세상이 우리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던 병실이 순식간에 달콤한 밀회 장소처럼 느껴졌다.

 

 

“형.. 이제 다 알아버렸네. 한 달 동안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한 달 정도는 모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바보야. 네가 이렇게 아픈데 내가 알고 모르고가 그렇게 중요해? 아플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내가 끝까지 네가 아픈걸 모르고 있었으면 나중에 얼마나 스스로 자책할지는 생각해봤어?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거겠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알고 있었다. 그게 관린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처음 내게 이기적으로 군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더 이상 타박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고요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그 애를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해 바라보고 있는데도 좀 더 오래 그 애가 보고 싶어서 애가 탔다.

 

몸 안에 온 몸을 집어삼킬 정도로 끔찍한 병마를 키우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리고 뽀얀 살.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그리고 맑은 눈.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날씬하고 멋있는 팔다리.

 

그 아이는 동화 속에 살고 있는 존재 같아서, 마치 여기 현실에 잠시 내려앉아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너를 대체 왜 병이 괴롭히는 걸까.’

 

아마도 아무 더러움도 묻히지 않고 있기에는 네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순수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층 더 잔인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관린을 꼭 껴안았다.

 

 

“관린아. 나는 괜찮아. 나는 이제서라도 너랑 이렇게 돼서 좋아. 그리고 네가 아플 때 내가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진심이야.”

 

“내가 정말 바보야. 난 한 달 동안 형에게 내 마음을 쏟아 부어도 형이 날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 따위 사라져도 크게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그냥 좋았던 기억만 남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미안해.”

 

“그런 말 하지마. 너 지금 아프지 않았으면 나한테 한 대 맞았어. 난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 왜 기적이라는 걸 안 믿어. 네가 의지만 가지면 혹시 모르는 거잖아! 왜 그렇게 곧 죽을 사람처럼만 구는데, 왜!”

 

 

나는 나직하게 말하려다가 점점 감정이 복받쳐서 결국 악을 지르고야 말았다. 결국 관린이 천천히 눈물을 떨궜다.

 

 

“왜냐면 그 기대가 너무 힘드니까.. 형을 보면서 너무 살고 싶어지는 게,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걸 기대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그 아이는 그렇게 아프다고 떼를 쓸 줄도 몰랐다. 끔찍한 아픔을 홀로 겪는 자신을 비난하는 내게 조용히 눈물 짓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순한 아이.

 

 

“지금까지 살면서 큰 탈 없이 내내 행복했고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행복하니, 짧은 인생이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하려 했어. 그런데 요즘엔 형과 함께 내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혹시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내일 눈뜨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두려워하게 됐어.”

 

 

나는 끔찍한 고통조차도 갉아먹지 못하는 이 아이의 아득할 정도로 무결한 정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무결한 아이를 이 정도로 고통스럽게 할 거라면 신은 그 대신 인류를 구원해 주는 것 정도는 해주어야 옳았다.

 

나 같은 이기적인 미물은 이 아이가 놓여 있는 처지에서 겪는 감정이 무엇인지 채 다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제 그 애 만큼이나 나도 그 애가 어느 날 눈뜨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관린아. 내가 너무 이기적인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욕심 가지자. 우리 앞으로 어떻게 살지 얘기해 보자. 난 너랑 언젠가는 한 집에서 살고 싶어. 나 너만큼 사랑할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제발. 내 소원이야. 나도 네 소원 들어줬잖아. 응?”

 

“제발 그렇게 자꾸 날 점점 더 두렵게 하지 말아줘.”

 

그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채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들어줄 수 없는 그 아이의 부탁이었다.

 

나는 그 관린이의 손을 붙들고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아픔을 나눠가질 수 있길 빌었다. 자꾸만 우는 나를 그 아이가 품에 안고 달랬다. 사실 그 아이를 위로해주어야 할 것은 나인데도.

 

 

 

조금 진정되었을 때 관린이가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은 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거야? 우리가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 아주 최근인가? 우리가 첫키스 한 날?”

 

“글쎄. 이젠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어. 이어져 온 감정인건지, 갑자기 생겨난 감정인건지. 그런데 너는 나한테 항상 무슨 서정적인 사랑노래 같았어. 아주 순수하고 직설적이라서 유치할 만큼 아름다운 사랑노래.”

 

 

끝날 때쯤 너무 가슴이 아려서 하루 종일 다시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노래.

 

관린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형, 저 장미꽃 형이 사온거야? 벌써 좀 시들었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이제 우리가 얼마나 남았지?”

 

“뭘 아직도 그런걸 세고 있어. 이제 우리에게 그런 시간 약속이 다 무슨 의미가 있어. 대체 왜 그래..”

 

“형. 나 형이랑 여행 가고 싶다. 이제 우리 곧 마지막 주잖아.”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대답했다.

 

 

“너 몸 낫고 난 다음에 가.”

 

“형..”

 

“싫어.. 그렇게 하고 싶은 거 남겨 두지 않겠다는 듯이 하나하나 계획 세워서 하는 거 나 너무 괴로워 관린아.. 나랑 오래 있어. 나랑 오래 살자. 제발..”

 

 

나는 그 말을 하면서 결국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야 말았다.

 

관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따라 진짜 달이 밝다.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하염없이 형을 떠올리던 날들이 있었어. 그런데 나는 사실 그 때도 참 행복했어. 형은 내가 그 때 불행하고 힘들었다고만 생각해? 나는 그 때도 형을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어. 내 안에 소중한 걸 품고 사는 느낌이었거든.”

 

 

‘그러니 나도 그렇게 살면 된다고 말하지는 말아줘’

 

차마 꺼내지 못한 생각 사이로 그 아이의 청아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아.”

 

 

달빛을 받아서 시리도록 하얀 얼굴이 나를 보고 부서질 듯이 웃었다. 창밖에 시린 달빛을 받고 있는 푸른 장미가 마지막 생기를 내뿜듯이 기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관린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되듯이 가슴 설레는 선율이 그 아이의 생명이 담긴 날숨을 가득 담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공기 중에 실려 왔다. 어딘가에서 푸른장미 향기가 실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음율을 웅얼거리곤 한다.

 

 

그렇게 그 날 다시 파랑새가 내게로 날아와 살며시 내려앉았다.

 

나는 어서 작은 손으로 파랑새를 가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신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도록. 원래 살던 세상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다신 돌아가지 못하도록.

 

 

 

*

 

 

 

하필이면 주말이었다. 의사는 순순히 관린의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돌아올 수 있도록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약은 꼭 챙겨 먹고 위급시에는…”

 

나는 그런 의사가 오히려 미웠다.

 

사실 그는 내가 찾아낸 얼마 안되는 비난 대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려 신에게 빌듯 관린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해 놓고는 그 애가 깨어나고 나면 다시 그 아이를 건강하게 고쳐 놓지 못하는 그를 무한정 원망하곤 했다. 그래서 이제 그 의사는 마치 내게 종교같은 존재였다.

 

‘이제 치료는 포기했으니 마지막으로 환자 소원이나 들어줘라. 뭐 그런거야? 절대로 안된다고. 병원에 있어야 낫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해야지.’

 

나는 그런 말들이 마구 내뱉고 싶었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아야했다. 관린의 표정이 너무 행복하고 밝아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의사의 입에서 네 말이 맞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애를 무슨 표정으로 보아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어느 날 나는 아파하며 소리를 지르는 관린을 보고 의사의 멱살을 잡았었다. 저게 당신 자식이었어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손놓고 있을 거냐면서. 빨리 뭐라도 해보라면서.

 

제지하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그저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관린이 조금 안정돼서 자고 있을 무렵 나는 병실에서 나와 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물었다. 정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겠냐고. 내가 의사였으면 좋았겠다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한다고.

 

 

의사는 마치 초월적인 것을 꿰뚫어 보는 존재처럼 투명한 눈빛을 하고 내게 말했다.

 

 

“의사가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거예요. 그의 몸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깊게 생각하려 하지 마세요. 저라면 그저 그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거예요. 사실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해야 해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렇게 해요.”

 

 

 

*

 

 

 

“휠체어 안타도 되겠어?”

 

“아직 더 걷고 싶어.”

 

“아직이라니.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달릴 수 있게 돼야지.”

 

“맞아. 그래. 그래야지.”

 

 

그건 관린에게서 처음 듣는 삶에 대한 의지였다.

 

 

“형.”

 

 

관린이가 한낮의 밝은 햇살을 올려다보면서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형. 있잖아. 나 요즘 너무 살고 싶어.”

 

 

관린이는 혼자 많은 것을 겪어내고 내 곁에 돌아온 것 같았다. 예전보다 훨씬 깊어진 눈이 단순히 그가 말라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너무 살고 싶어졌어. 왜냐면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한 것 같아. 나한테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애인도 있는데. 그치?”

 

“..그래. 나, 너 ..”

 

 

나는 네가 없어지면, 이라고 하려다가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말이었다.

 

 

“형은 내가 죽으면 금방 누가 채갈 것 같거든.”

 

 

관린은 그렇게 장난처럼 말했다.

 

 

“관린아. 그런 말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지..”

 

“그래서 안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게 웃는 관린을 보며 콧끝이 찡해 왔다.

 

그래서 괜히 햇살이 너무 따가운 척 얼굴을 가렸다.

 

 

‘정말 햇살이 너무 따갑다. 마치 네 눈빛처럼. 네 사랑처럼.’

 

 

관린이 기분 좋은 듯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를 부르듯이 자그맣고 바람이 새는 소리로.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y are grey..

 

 

 

 

 

 

 

 

 

 

 

 

 

 

<4주일째>

 

 

 

반딧불이 보고 싶다는 관린의 말에 우리는 조용한 산골마을로 왔다. 벌써 4월 말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시골바람은 쌀쌀했다.

 

 

“관린아. 이제 그만 차로 돌어가자. 아무래도 요즘엔 반딧불이가 많이 없는가봐.”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보자.”

 

 

나는 이렇게 시내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는 게 못내 불안해서 반딧불이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가로등도 하나 없고 일부러 사람을 위해 닦은 길도 아닌 그런 제멋대로 난 시골길이었다. 우리는 휴대폰 플래시하나에 의지한 채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주변에 온갖 이름 모를 풀이 여린 살을 내밀며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손을 잡고 그 풀냄새가 가득한 캄캄한 밤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서울에선 보이지 않던 별들이 점점이 빛났다. 별빛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내려 앞을 봐. 그의 손을 잡고 지상 어딘가 아직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불빛을 찾아. 그 순간을 놓치지 마.’

 

 

그 순간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눈앞에 반짝하고 지나쳐가는 게 보였다.

 

 

관린이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묘하게 공기가 착 감겨 오는 것 같은 축축한 밤이었다.

 

 

“형. 방금 봤어?”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빛이 반딧불 불빛보다 더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깜빡깜빡, 그 아이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생명의 빛이 깜빡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을 어딘가에 담아내고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는 그림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 그림자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앞을 봐. 그의 손을 잡고 수풀 어딘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를 반짝이는 것을 찾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뒤돌아 보지마.’

 

 

우리가 처음 발견한 반딧불이 한마리는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조금 발걸음을 늦추면 우리 앞에서 옆으로 누운 8자를 그리며 천천히 날다가 우리가 다시 발걸음을 떼면 다시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 정처 없이 호젓한 시골길을 걸었다. 그렇게 반딧불이가 우리를 이끌 듯이 길이 끝나 둥그렇게 비어 있는 공터로 날아갔다.

 

 

그 곳에는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고무되어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수많은 반딧불이가 나무 주변을 밝히며 누군가를 찾아 날아다녔다. 어느새 우리를 인도하던 반딧불이도 수많은 불빛 사이로 숨어버렸다.

 

 

우리는 손을 잡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짧은 키스가 끝나자 다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서 빛나던 별도, 일렁이며 나를 따라오던 그림자도, 어딘가에서 나는 풀벌레 소리도, 푸른 잎이 난 커다란 벚꽃나무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반딧불이도 그 순간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관린이 다시 시간을 움직이듯이 말했다.

 

 

“형. 나는 다시 태어나면 반딧불이가 될래.”

 

“왜?”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 되면 형을 따라다니며 비춰줄게. 온 몸을 빛내면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내내 우리 앞을 맴돌며 밤길을 비춰주었기 때문이었다.

 

 

 

*

 

 

 

여행 내내 관린이는 신기할 정도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가끔 조금 말수가 적어지고 지치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여기저기를 천천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어느덧 마지막 날 밤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서로를 안은 후 여운에 취해 누워 있었다.

 

 

“형.”

 

“응.”

 

 

우리는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형 좋아한 거 정말로 몰랐어?”

 

나는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딱 그렇게 확신을 가져본 적은 물론 없는데..”

 

“없는데?”

 

관린이 장난스럽게 내 예민한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내가 ‘악 하지마’ 하면서 몸을 뒤흔들며 깔깔댔다.

 

“그런데.. 그냥 형 동생 사이치고는 좀 너무 애틋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형도?”

 

“아, 너 설마 날 좋아했다는 게 그 정도였던 거야?”

 

“무슨.. 형 진짜 아직도 내가 애기인줄 아네.”

 

“네가 애기인줄 알 리가 있냐. 방금 그렇게…”

 

“그렇네.”

 

 

관린이 파안대소를 할 때마다 그 아이의 조각이 반짝하고 조금씩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 거기에서 더 감정이 발전한 거지. 그런데 형도 그런 걸 느꼈다니. 다행이다. 나 혼자 착각한 게 아니었구나.”

 

“난 네 어디에 그렇게 신경이 쓰였을까?”

 

“글쎄. 내가 형한테 워낙 살갑게 잘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넌 그 때부터도 왠지 바라보면 마음 찡하게 하는 것이 있었어. 얘기 한 적 있잖아. 마치 가슴 아픈 사랑 노래를 듣듯이 왠지 좀 그랬어.”

 

“그랬구나…”

 

 

관린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가운을 걸쳐 입더니 창가로 가서 섰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러면 어쩌면 그것도 사랑이었을지도 몰라. 그치?”

 

“응. 맞아. 그렇게 강한 감정은 아마 사랑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려울지도 몰라. 사랑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가 지금과는 아마 조금 다른 비율로 섞여 있었나봐.”

 

“그래. 그러면 됐어.”

 

“응? 뭐가?”

 

“그럼 난 지금까지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에 형에게 사랑받고 있었네. 고마워.”

 

 

그러면서 웃는 관린이의 얼굴에 고등학교 때의, 아니 중학교 때의, 아니 초등학교 때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순간 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그 미소를 눈을 비비고 보았다. 어쩐지 겁이 덜컥 났지만 나를 보고 환히 웃는 그 애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어른거려 그 아이의 모습도 따라 어른거렸다. 그의 뒷모습이 꼭 동화 속의 삽화 같다고 생각했다. 수채화가 번져가는 것처럼 그의 주변이 파스텔톤으로 번지고 있었다.

 

 

 

*

 

 

 

그 날 아침은 관린과 사귄지 딱 한 달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깨어났을 때 밖에 소나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까지 쳐서 관린이가 깰까봐 걱정했는데 옆에서 새근새근 잘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하며 다시 잠이 들었었다.

 

 

어느새 그렇게 무섭게 퍼붓던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밖에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굴에 비치는 아침햇살에 얼핏 잠에서 깼다. 그리고 조금 더 잘까 하다가 문득 어젯밤에 본 그림자만 남아 있는 것 같은 관린의 모습이 생각나 벌떡 일어났다.

 

 

나는 꿈에서 내내 파랑새를 쫓아다녔다. 파랑새는 어느 벚꽃이 내리는 날 아침에 우리집 골목에 날아왔다가 다시 훌쩍 날아 모든 게 상상대로 이루어지는 동화의 세계로 나를 데려갔다.

 

그 곳에서 나는 파랑새를 따라 신나서 풀쩍풀쩍 뛰어다니다가 다시 인적 드문 시골길에 뚝 떨어졌다.

 

나는 그제서야 그 길에서 내 손을 잡고 걷던 관린이 내 곁에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찾다가 결국 영혼의 불빛이 가득 모여드는 신묘한 나무 앞에 다다랐다.

 

나는 영들이 반짝이며 전하려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려다 어느 순간 파랑새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애가 사라진 자리에는 하얀 시트만 아침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관린이 사라진 자리에 쪽지 한 장만 덜렁 남아 있었다.

 

 

 

[형. 나 형과 더 많은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졌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파랑새는 그렇게 우리 곁에 예견할 수 없는 순간에 날아와 잠시 쉬었다 가곤 한다.

그래서 파랑새가 내려앉은 그 순간 우리는 마음껏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파랑새가 언젠가 다시 훌쩍 날아가더라도 또 다시 날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

 

 

 

휴대폰을 들고 관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는데 고객님의 사정이 있어..하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그제서야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관린아…’

 

 

나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린이 어디 간거야. 지금 갑자기 여행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없어졌어. 수현아!”

 

“지훈아 미안해.. 너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는 게 관린이 부탁이어서. 알잖아. 난 그 애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수가…”

 

“빨리 말해. 어디 간거야? 뭐가 어떻게 된거야?”

 

“관린이 미국 가서 치료 받기로 했어. 우리 엄마가 곧 따라 가실거야. 이제 국내에서 쓸 수 있는 약은 다 썼어. 젊고 건강해서, 그래서 더 진행이 빠르다더라. 원래는 관린이가 절대로 싫다며 마다했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해보겠다고 하더라. 지훈아.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마도 그건 너 때문이었을 거야.”

 

 

수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껴 울었다. 연신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나는 전화기를 던지고 대충 옷을 주워 입고는 급히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시동을 걸고 악셀을 밟았다. 차도 몇 대 지나가지 않는 새벽이었다.

 

 

‘제발 더 빨리. 제발.’

 

 

“몇 시 비행기야.”

 

“아마 곧 출발할거야. 지훈아. 그 애 잡지 마.”

 

 

난 전화를 툭 끊고 더 세게 악셀을 밟기 시작했다.

 

 

놀라울만큼 빠른 시간 내에 공항에 도착한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뉴욕행 비행기를 눈으로 찾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곧 토해버릴 것 같은데 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머리를 움직이려 노력했다.

 

8시… 40분.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권, 여권이 없어!!

 

국내 여행을 오면서 여권을 가져올 리가 만무했다.

 

 

 

내가 출국 심사장 앞에서 초조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시야에 줄을 서고 있는 관린이 들어왔다.

 

 

“관린아!!!!”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공항 직원이 앞을 막았다.

 

 

“관린아!! 잠깐만 나와봐!! 관린아!!”

 

 

공항 직원에게 끌려 나와서 혼자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게 느껴졌다.

 

 

 

“형….일어나…”

 

“야! 너 진짜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내가 그의 마른 가슴팍을 치며 그를 원망하자 그가 누구보다 다정한 얼굴로 나를 안아주며 나를 달랬다.

 

 

“같이 갈래. 같이 가자 관린아..”

 

 

나는 그 애 팔을 붙잡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언제까지 나만 따라 다닐거야. 이제 곧.. 휴가도 끝나잖아.”

 

“그까짓 직장은 다시 구하면 돼. 너만 나으면.. 너만 건강해지면!”

 

 

관린이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 애는 안된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이렇게 조용히 나를 내려다 보며 웃기만 했다. 그럴 때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였다.

 

 

“꼭 돌아올게. 왜냐면 내가 너무 오래 안 돌아오면..”

 

 

나는 그 다음 말이 너무 끔찍해서

 

 

“…다른 놈이 채갈거니까…?”

 

 

울음을 삼키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5월을 맞는 첫 날에는 만우절도 없었는데 우리는 농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애를 보내주는 게 맞다는 걸 아는 나는 슬픈 어른이었다.

 

 

어느새 5월이 왔다. 어젯밤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에 간신히 그늘에 숨어 매달려 있던 벚꽃잎도 다 떨어지고 계절은 성실히도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농담에 관린이 웃어줬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꼭 돌아올게. 그 꼴 못보니까.

 

 

휴가가 끝나고 그와 약속한 한 달도 끝났다. 그는 약속한 한 달이 되자마자 내 곁을 떠났다.

 

마치 거짓말처럼.

 

 

 

 

 

 

 

 

 

 

 

 

 

 

<4월이 지난 후에>

 

 

 

꿈을 꾸면 항상 그 시간이 반복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애절하고 슬프고 또 사랑스럽고 행복했던 시절.

 

나는 그 한 달 간의 기간을 마치 10년이나, 100년이나 되는 듯이 시간을 되새기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 기간 동안의 하루하루를 지금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내게 그 애가 말했었다.

 

이 순간은 멈추지 않아도 다시 돌아온다고. 그리고 영원히 반복될 거라고.

 

나는 그 애의 말을 들으며 순간이 두렵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그 아이의 곁에 있는 동안의 매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했다.

 

그리고 지금 정말 거짓말처럼 그 순간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행복이 내 곁에 와 앉았던 순간, 그리고 그 아이를 떠나보내던 순간, 그리고 다시…

 

 

 

내가 전화를 걸 때마다 수현은 그저 항상 같은 말뿐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너에게 전하지 말아 달래. 그게 그 애의…”

 

“난?? 난 수현아? 난 어떻게 살라고.”

 

“지훈아. 미안해. 나한테는 너도 소중하지만…”

 

 

그래도 수현이에게 전화를 하고 나면 안심이 됐다. 관린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설마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지는 않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날도 또 안부를 핑계 삼아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새 해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4월의 첫 날이었다.

 

 

“수현아…잘 지내지? 있잖아, 매번 같은 질문이지만.. 관린이 미국에서 잘 있어?”

 

“지훈아…”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수현의 목소리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다음 말이 당연한 듯이 이어져야 하는데, 언제나 말하지만, 관린이가 전하길 원치 않았다고.

 

 

“수현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갈게.”

 

 

*

 

 

오랜만에 가는 관린이네 집 앞이다. 그 언젠가 그의 집 앞에서 푸른색 장미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은 마치 그 때처럼 날씨가 좋은 봄날이다.

 

그 때 내 눈에,

 

“아주머니!”

 

관린과 같이 미국에 갔다는 관린이네 아주머니가 보인다. 그 옛날 젊은 모습 그대로시다. 아주머니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훈이 왔니?”

 

하며 나를 반기신다. 마치 그 어린 날 교복을 입고 수현이를 만나러 온 나를 반기듯이.

 

나는 온 몸이 멍한 기분으로 관린이네 집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고등학교 때 같다. 아니 어쩌면 중학교 때 같기도, 아니 마치 그 애를 처음 만났던..

 

“관린아….”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느 새 품에 하얀색 장미 꽃다발이 가득 안긴다.

 

 

“안녕, 내 햇살.”

 

4월은 그렇게 또다시 거짓말처럼.

 

 

 

 

 

 

 

– 4월 애인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