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지난 계절과의 시리즈 연재입니다.

지난 계절 보러가기 

 

 

화사한 그 얼굴로 웃으며
w. 라시솔

 

 

설레는 듯 부드러운 당신은

화사한 그 얼굴로 웃으며

 

 

 

린은 제 옆에 누운 훈을 보았다. 그는 잘 필요가 없다 말하면서 곧잘 잠들었다. 필요와 기호는 다른 문제라 종알대면서. 잠든 훈에게서는 단 향이 났다. 평소의 꽃과는 다른 향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 향은 기가 막히도록 린을 잠들게 했다. 잠결의 끝자락, 기억 깊은 곳에 박혀 좀처럼 나오지를 않는 그 향에 대해 골몰하던 나날들. 향의 기억은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이전에도 이 향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가까운 과거는 아니었다.

 

온 세상에 봄이 만연하여 누구도 겨울이라는 것을 모르던 시기, 그 중에서도 린이 아주 어렸던 때.

 

 

마을 뒤의 숲은 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이 만개한 그 숲을 검다 이르는 까닭은, 숲으로 들어선 이들은 필히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리따운 가장자리의 모습에 홀린 듯 들어선다면 그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입구에서 사체로 발견되곤 하였다. 왕이라 불리는 제사장은 그곳이 신의 소유라 말했다. 함부로 걸음한 인간에게 대노한 신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고도. 들어가면 죽는 숲이라 검은 숲. 신이 머무른다 하여 신의 숲.

 

 

머리가 굵은 어른들이야 숲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지만, 문제는 어린 애들이었다. 들어가면 죽는다 아무리 가르치며 길러 놔도 그맘때의 어린애들이란 다아 같아서 몇 해에 하나쯤은 꼭 숲 입구에서 시체로 발견되고는 했다.

 

 

 

크고 검은, 맑은 눈을 가진 어린 린은 겁이 많았다. 사려깊고 다정한 그 애는 마을의 자랑이었다. 양친 중 아버지가 없었기에 오히려 모두의 아들로 자랐다. 린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마을에 정신없이 뛰노는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볕 아래 쪼그려 앉아 놀이하는 저 애만큼은 숲에 걸음조차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틀렸다.

 

 

한가로이 마을의 구석을 탐험하던 린은 이내 숲에 닿았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은 너무나 아름답고 반짝이는 곳. 하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익히 그 무서움을 들어 알고 있었던 때문도 있거니와 당장 그 자신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숲의 가장자리에 핀 보랏빛 꽃이 눈에 닿았다. 제비일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묘한 눈가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얘, 너 거기 있으면 안 돼!”

“뭐라구?”

“거기 들어가면 죽어!”

 

 

분홍의 옷을 입은 그 애는 알록달록한 나무공을 든 채로 숲의 나무 뒤로 숨었다. 린은 답답스러워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쳐댔다. 숲에 들어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가르침과 저 애를 빼와야 한다는 생각이 뒤섞여 순간 머리가 다 멍했다. 그리고 이내 그 애의 손을 잡으러 도도도 달렸다. 통통한 손을 잡았다 생각한 순간, 소년은 두어 걸음 물러서 있었다. 린은 조금 부아가 치밀어 볼을 부풀렸다.

 

 

“우리 나가야 한단 말이야!”

“왜?”

“아, 정말!”

 

 

소년은 품 안의 공을 관린에게 던지며 꺄르르 웃었다. 너어! 가슴팎에 푹 안겨진 그 공을 꽉 안은 관린은 도망하는 소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곧, 숲이 닫혔다.

 

 

린의 어미는 매일을 울면서 숲의 입구에 섰다. 제 어린 아들의 시체라도 받아다 아끼고 아껴 좋은 곳에 묻어야 그의 도리를 다하였다 말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시 하루가 지나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곳에 망부석처럼 섰던 그녀는 결국 졸도해 쓰러졌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 깨어났다. 아들이 숲으로 들어간 후로부터 벌써 이레, 린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도록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사정을 들은 왕 곧 제사장은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곧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 자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앉아 우는 것이 아니라 신께 비는 것이라고. 린의 어미는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마을 입구를 지키는 솟대에 향했다. 흰 까마귀를 조각해 높은 기둥 위 하늘에 가깝도록 올린 곳, 신의 가호를 의미하는 그곳으로 달려가 빌었다.

 

 

계절과 날과 비와 구름과 낮밤을 주관하시는 높으신 분이여, 당신의 무궁한 영광과 의로움을 찬송하나이다. 참으로 제 어리석은 마음을 살피고 아끼실 것을 내가 믿나니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니이다. 부디 아들을 굽어 살피시고, 그 어린 것을 도우시고, 작은 걸음 하나와 하나를 지키사 진 곳을 밟지 않게 하소서. 오직 그 마음과 어림을 귀히 여기시어 벼랑 앞에서 붙드시고 독 앞에서 거두시며 죽음을 드리우지 마소서. 생명을 구하시어 돌아오게 하소서.

 

 

온 마음으로 빌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아이의 남은 생을 모두 신을 위해 살게 하리라 맹세했다. 벅찬 감정에 쏟아진 눈물이 온 소매를 다 적시고도 모자라 그녀의 주위 온통을 흘렀다. 긴 막대 위에 올라앉은 나무 까마귀 위로 바람이 휘몰았다.

 

 

 

-*-

 

 

 

숲 안의 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을 던지던 그 애는 온데간데없었다. 품 안의 알록달록한 나무 공을 꼭 안고 그대로 뒤를 돌아 걸었다. 숲 안으로 들어와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숲의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린은 입술을 꼭 물었다. 어머니가 걱정하실 텐데.

 

 

하여간 걸었다. 검은 숲의 밝은 안을 걸었다. 결이 억센 풀이 깔린 바닥을 사뿐히 밟으며 걸었다. 숲 안에서의 감각은 이상했다. 분명 들어온 방향의 정확한 반대로 걸었음에도 새로운 길이었다. 방향이 이상하고 거리가 이상했다. 한번 지나친 바위는 다시는 돌아볼 수 없었다. 어린 생각에도 확실히 그 공간은 기묘했다. 그럼에도 걷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걷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린은 그의 조그마하게 어린 발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게 되어서야 멈추었다. 보드랍고 도탑게 깔린 이끼 위로 작은 엉덩이를 들이밀어 주저앉았다.

 

 

“어쩐담. 도무지 나갈 수가 없으니.”

 

 

포동포동한 입술이 오물대며 난색을 표했다. 나무 신을 벗어 부어버린 발을 조물렀다. 저를 숲으로 불러들인 그 애는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했다. 남겨진 나무공은 여전히 알록달록했다. 에잇, 린은 조금 심통이 나 공을 던져버렸다. 공이 향한 풀숲으로부터 날갯짓 소리가 났다. 린은 재빨리 신을 신고 풀숲 안을 헤쳤다. 그리고 소리의 이유를 발견했다.

 

 

흰 까마귀가 린을 향해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넌 누구니?”

 

 

까마귀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파르르 날아올라 린이 앉았던 자리에 섰다. 린은 조심히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의 날개 끝자락을 만지려 했으나 까다로운 까마귀의 날개에 저지당했다. 큰 날개에 얻어맞아 붉게 부어버린 통통한 손등을 쓰담으며 생각했다. 만지는 걸 싫어하나 보다.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니 조금은 안심이었다. 아주 죽을 곳은 아닌가 싶어서.

 

 

“여기도 동물이 있기는 있구나.”

 

 

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흰 까마귀는 그의 흰 날개를 탁 소리가 나도록 한 번 허공을 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일개 동물이라 말한 것이 심기에 불편했던 모양이지, 린은 모처럼 발견한 동무가 날아가 버릴까 겁이 나 얌전히 까마귀의 눈치를 살폈다. 쪼그라든 린이 흡족했는지 까마귀는 날개를 곱게 접고 자리에 앉았다. 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귀는 잠시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덕에 옆에 앉은 린은 신을 벗고 쉬었다. 충분히 쉬어 말똥한 눈을 데구룩 굴릴 때쯤이 되어서는 까마귀가 날아올라 린의 기색을 살피는 듯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조금 날았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 린을 보았다.

 

 

“나?”

 

 

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았는지 어쨌는지. 까마귀는 대답 대신 흰 날개를 휘이 저었다. 린은 타박타박 걸어 까마귀의 뒤를 따랐다. 까마귀는 가끔은 날고 가끔은 총총 뛰며 린을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린은 다 말라버린 입술을 모아 입맛을 다셨다. 몇 걸음 앞서 날던 까마귀는 린을 돌아보더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내, 린의 눈 앞에 반짝이는 샘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것의 속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음은 명백하며 당장 그가 자리한 숲의 존재가 그를 증명하고 있건만, 린은 한 톨의 의심 없이 물을 달게 마셨다.

 

 

갈증이 가시자 허기가 찾아왔다. 까마귀는 그런 린을 귀신같이 알고 나무 열매를 물어왔다. 처음 보는 제 주먹만 한 과일을 깨물며 다시 걸었다. 그리고 숲 위로 밤의 베일이 덮였다.

 

 

인도자 까마귀는 작은 동굴을 찾아냈다. 어린 린이 쪼그리고 들어가 누울 만한 크기의 동굴이었다. 보드라운 이끼가 깔린 바닥은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모로 누운 린은 까마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린 손을 쳐냈던 낮과는 달리, 까마귀는 그의 꼬리깃 하나를 내주었다. 린은 그렇게 잠들었다. 달큰하고 달큰한 냄새와 함께.

 

 

깨어나 보니 눈 앞 까마귀가 심기 불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잠결에 와락 껴안아 버린 모양이었다. 린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났다. 린에게서 벗어나기 무섭게 까마귀는 부리로 날개를 정리했다. 그렇게까지 흐트러지진 않은 것 같은데… 린은 붕붕 떠버린 제 머리를 꾹꾹 눌렀다.

 

 

 

 

-*-

 

 

 

향이 짙었다. 머리가 다 어찔했다. 잠든 훈에게서는 깬 훈과는 다른 향이 맡아졌다. 보다 어리고, 포근하고, 다정한 향.

 

 

린은 시선의 끝으로 잠든 훈의 얼굴을 만졌다. 곱게 반듯한 이마와 그 밑 단정한 아미. 고운 것으로 따지면 세상 어떤 꽃잎과 겨루어도 능히 이겨낼 눈매와 지독한 벚꽃의 분홍을 담은 눈두덩이. 나비의 파르르 떨리는 날개보다도 여리고 어린 속눈썹의 그늘이 드리운 윗볼. 발갛기가 그 귀한 복숭아보다도 뽀얀 보송한 뺨, 우뚝하게 중심을 잡은 곧은 코와 그 아래의, 아아. 그 아래의 입술. 린의 심장을 쥐었다 펴는 그 모든 말들의 샘. 린을 조르는 훈의 달콤함이 시작되는 곳. 잠든 훈에게서의 달큰한 향을 머금은 숨이 색색 새어나는 곳. 린의 시선은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멈추었던 시선을 들어 훈의 눈을 향했을 때, 린은 웃는 눈과 마주해야만 했다.

 

 

“너는 운이 좋은 줄이나 알아야 할 것이야.”

“주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자는 중이었지. 네 눈길이 하도 뜨거워 깼다.”

 

 

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계절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하더니. 흰 이불에 휘감긴 분홍의 훈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잠든 그에게서 와는 다른, 깨어있는 그의 달큰한 풀꽃 향이 터졌다. 린은 가만히 누워 훈의 낯을 마주보다, 그의 턱에 엄지를 댔다. 훈은 고개를 기울여 웃으며 말했다.

 

 

“내 몸에 손을 대고도 살아남은 인간은 너 뿐이라는 걸 네가 알까?”

“이제 말씀해 주셨으니 알았지요.”

“내 너를 이렇게 아끼고 귀히 하건만,”

“넘치도록 알고 있습니다.“

 

 

말랑한 턱 위로 가볍게 놓았다 떨어진 손가락을 꾹 잡은 훈은 다시 웃었다. 그의 뒤로 만개한 꽃나무가 보였다. 침대 옆의 빈 화분에서 훈이 키워낸 꽃나무는 어느 새 많이 자라 그 키가 린의 장딴지와 비슷하고 두께가 린의 한 줌이 되었다. 절대 지지 않는 꽃, 신이 직접 키워낸 꽃이란 그런 것이었다. 분홍의 훈 뒤로 분홍의 꽃이란 절경이었다. 린은 제 팔을 베며 고쳐 누웠다. 그 모든 과정에서 단 한 순간도 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는 내 사랑이야. 이것도 알고 있니?”

 

 

린은 그제야 훈의 끈질긴 시선을 피해 눈을 옮겼다. 다만 아주 멀리는 두지 못하고 그 뒤의 꽃나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도 달린 꽃송이는 린의 눈이 닿자 파르르 떨었다.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던 꽃잎이 휘돌아 떨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 스스로 움직일 리 없는 꽃의 떨림이 이상타 생각했다.

 

 

“떨어졌습니다.”

“네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꽃나무가 아닐 터인데.”

“제 마음은,”

 

 

무어라 말하려 벙긋대는 린의 입술 위로 그의 동그란 손가락을 세로질러 두었다. 빙긋이 웃었다. 와락 제 입술에 와 닿은 온기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뜬 린은 이내 눈을 깜빡였다. 매번 어둠이 거두어지고 빛을 볼 때마다 훈의 향이 짙어졌다.

 

 

“나가자.”

“예?”

“분갈이를 해야겠다.”

 

 

화분 위에 피어난 작은 꽃나무의 밑동을 손가락으로 두어번 쳐 끊어낸 훈은 그 가지 비슷한 모양을 한 것을 손수 들고 방문을 나섰다. 안내해, 까딱이는 고갯짓과 함께. 린은 겉옷을 챙겨 입으며 훈의 뒤를 따랐다. 역시 잠옷 차림인 훈의 것도 하나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와 린을 따라 걸으며, 훈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심중에 무언가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생각한 이후에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마음을 피하는 이유는 내가 너와는 다른 존재인 탓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제 마음은 제 것이 아닙니다.”

“허면?“

“제 마음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제 맡은 바인 까닭이고, 괴로운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며, 또한 제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도록 길러졌던 까닭입니다.”

 

 

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이유를 묻는 것이라 생각한 린은 부드러운 땅 위를 밟아 걸으며 답했다. 신의 숲이라 불리는 검은 숲에 걸음한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유일무이한 이가 되었다고. 제가 숲에 들어간 동안 어머니의 기도로 신께 바쳐졌던 까닭에 제사장으로서 길러졌고 결국 왕이 되었노라고. 그러니 그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것일 리 없으며 곧 신의 것이라고. 훈은 다른 대답 없이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둘 사이에 바람이 불었다. 찬 겨울의 것보다는 조금 묵직해진, 따사로운 바람이었다.

 

 

 

손에 들었던 나무의 가지를 부드러운 땅 안으로 꾸욱 박아넣은 훈은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곧게 선 나무는 훈의 동그란 손끝으로 줄기를 쓰담아질 때마다 한 뼘씩 자라나 이내 반 아름의 두께와 린을 훌쩍 넘은 키를 가진 어른 나무가 되었다. 린은 그저 나무를 키워내는 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단정한 린의 얼굴에 엉겨붙은 의아함과 호기심, 그 모든 것을 그의 보드랍고 따스한 손 안으로 품으며 훈은 말했다. 린은 얼결에 훈을 향해 조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결국 그 뜻을 듣지 못했다. 다만 입술에 와 닿은 폭신한 그 향, 아주 어릴 적의 동굴에서 맡았던 그 향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

 

 

 

 

새벽의 이슬이 내려앉은 풀을 헤치고 걸었다. 까마귀는 린을 많이 돌아보며 걷다 결국엔 린의 왼쪽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앞서가지 않는 까마귀가 방향을 지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람이 말의 입에 물린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린의 어깨를 단단히 쥔 두 발에 주는 힘을 달리 하는 것. 린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고 곧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내도록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영물과 동자의 유대는 단단한 것이었다. 린은 까마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곧잘 알아들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 되어서는 뺨에 스치는 보드라운 깃털만으로도 발치를 살피는 경지에 이르렀다. 까마귀는 린을 이끌어 물을 마시게 하고, 과일을 따게 하고, 또 웃게 했다. 길 잃은 어린 것이 의지할 유일한 구석이 되는 존재는 그에게 큰 의미였다. 만 하루를 같이 보낸 그 까마귀를, 린은 깊게 사랑했다.

 

 

중천의 해를 똑바로 담아내는 샘에서는 까마귀도 물을 마셨다. 진작에 해갈하고 두꺼운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소매로 젖은 입가를 두드리던 린은 제 옆으로 앉은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깃털의 층을 쓰다듬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두터움에 틀림이 없으나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그렇게나 힘이 좋고 강한데도 그는 많은 무게를 가지지 않았다. 하늘을 날기 위함이리라. 까마귀는 제 깃털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을 물리치지 않고 그대로 받으며, 희고 작은 머리를 그 어린 아이의 다리에 기대었다.

 

 

눈을 떠서도 낮이었다. 다만 눈을 감기 이전보다는 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까마귀는 린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갸웃대더니 날아올랐다. 린은 고개를 들고 까마귀의 날갯짓을 구경했다. 그는 아주 높고 높게 날아올랐다. 저러다 하늘에까지 닿겠군, 이라 생각할 만큼이나 높게. 그의 흰 날개에 먹구름을 묻히고 돌아온 까마귀는 날개를 여러 번 털었다. 린은 제 품으로 날아드는 까마귀를 품어 꼭 안았다. 푹신하고 가벼운 날개에 보드라운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서서 그 깃 사이에 스민 구름의 냄새를 맡았다. 약하게 딸려온 꽃의 향도 맡았다. 까마귀는 얌전히 그 품 안에 안겨있다 몸을 바르작대 벗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도망치듯 날았다.

 

 

린은 영문도 모르고 달렸다. 까마귀의 흰 궤적을 따라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이 괴로웠다. 나무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도 아픈 줄을 몰랐다. 오로지 까마귀를 따라야 한다는 것만을 알았다. 얼굴에 범벅이 된 흙을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뛰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린은 숲의 바깥에 있었다.

 

 

숲에서 튀어나온 어리둥절한 얼굴의 흙투성이 어린애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그 어미였다. 아들을 본 그녀는 무너지도록 달려가 아들의 작은 몸을 모다 안아 여러 번 쓸었다. 놀란 눈의 린은 어미의 어깨로 내민 눈을 열심히 굴려 까마귀를 찾았다. 탁 트인 하늘과 익숙한 마을의 전경, 어디에도 까마귀는 없었다. 까마귀 비슷한 것이라고는 솟대 위의 나무 조각 뿐이었다. 린은 억울한 마음에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나 아꼈건만, 그렇게나 사랑했건만. 저를 떠난 까마귀가 야속하고 서러웠다. 그래서 울었다. 흙이 잔뜩 묻은 뺨을 따라 눈물 도랑이 생겼다. 어미는 린의 속도 모르고 그 아들을 쓸어안으며 위로했다. 숲에서의 경험이 무서웠지,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며. 동상이몽의 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솟대 위의 나무 까마귀, 그 머리에 흰 까마귀가 내려앉았다. 그는 어미에게 안겨 우는 린을 잠시 응시하다 이내 날개를 쳐 포르르 날아올랐다.

 

 

까마귀가 앉았던 곳에서 분홍 이파리를 가진 풀꽃이 피어났다. 작고 어린 린은 콧물을 훌쩍이며 그 팔랑이는 꽃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