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심해
D. PUFF

 

 

 

아는 심해

 

검푸른 대해보다 맑은 물가가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속 풍경에 얕은 줄 알고 발을 내디뎠다가는 순식간에 수몰된다는 이야기다. 지훈도 그런 물을 하나 알고 있었다. 깊은 바다를 반기지 않는 자신도 조금이라면 내려가 보고 싶을 정도로 색이 투명하고, 수면은 총명한 눈에 흐르는 이지를 똑같이 머금고 반짝였다. 어느 밤인가는 오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얼굴을 담갔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떼자마자 더 뜨거워진 낯으로 후아,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던, 그런 비밀을 아는 물. 아무도 모르는 서로의 공범.

 

어린 바다는 맑고 깨끗해 산호꽃이 만개한 바닥까지 빛이 들었다. 그 애는 손목만 담가도 손등에다 흰 살결을 부벼줄 듯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비추었다. 잘 들리지 않는 무슨 말인가를 혼자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면 목소리 대신 둥근 거품이 꼬르르 올라왔다. 물방울 한 송이는 표면에 맺히기까지 한참 걸렸고 오래 꺼지지 않았다. 사실 그 애는 숨이 다 넘어가도록 헤엄쳐 가야 닿을 저 깊은 속에서 내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문을 활짝 열었다고 방이 좁아지지는 않는다. 그 애는 종종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가볍고 둥근 언어를 숨처럼 쉴 줄 알게 되고 그렇게 튀어 올린 말들이 이젠 귓가로 곧장 날아드는 덕에 지훈은 그 사실을 종종 까먹고 지냈다. 미간만 조금 좁히면 저 아래 모랫바닥의 랍스터하고도 눈을 마주칠 맑디맑은 바닷속은 두렵고 낯선 심해라기보다 그의 해수항이었다.

그 가장자리에 딱 한 점 빛이 들지 않는 데가 있다. 바위 아래 고요하고 거대한 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그것의 머리가 잊을 만하면 목덜미를 바짝 긴장시켰다. 지훈은 살면서 그토록 깊은 곳에 잠겨본 적이 없었다. 안전바 없는 모험은 향후 인생 계획에도 없었으므로 그는 입구를 볼 때마다 눈을 감았다. 자칫 균형을 잃고 물속으로 떨어질까 봐, 아니, 어쩌면 못 이긴 척 저절로 미끄러지고 말까 봐, 솔직히 나는, 밑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느낌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러면 안 되니까…….

애꿎은 물 위만 한참 찰박거렸다. 내가 봐 버린 거겠지. 그냥.

 

보기보다 담대한 그도 어쩔 수 없이 가지고 태어난 공포를 소년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같이 따스한 연안에 머무르면 지훈은 이따금 실없는 말을 와리가리 함께 차고 놀았다. 코앞까지 파도를 밀고 가 보면 스스럼없이 발목을 적셨다. 언젠가 허리께도 젖어 줄 사람처럼. 관린은 그와 함께하는 뭍에서 따뜻한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와 매일 밤 호오, 하고 동그랗게 입술을 모았다. 여기까지 내려와도 편히 숨 쉬게, 내가 아주 커다란 방울을 부는 데 성공하면, 그러면 놀러 와 줄까? 어쩌면.

 

바퀴가 방지턱을 넘자 차체가 한 번 크게 덜컹거렸다.

 

카 시트를 따라 흔들린 관린은 눈 감은 지훈의 어깨에 모르는 체 얼굴을 묻고서 호오, 긴 숨을 불었다. 입술 댄 자리가 따끈하고 촉촉해질 때까지 코로 보송하고 달큼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이 회색 후드 주인한테서 늘 나는 거다. 섬유 유연제 향에 살 내음 섞인 냄새.

누군가 그에게 장난을 칠 때면 이쯤에서 딱콩, 하려는 손가락이나 찰싹, 하려는 손바닥이 날아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관린 앞으로는 그 대신 고개가 떨어졌다. 스르르 기울어진 지훈의 머리가 제 관자놀이 위로 비스듬히 겹치더니 무게를 고스란히 내맡겼다. 어깨높이가 잘 맞지 않아 관린은 바르게 앉기를 포기하고 몸을 옆으로 쭉 빼서 기댔다. 때때로 흐트러진 자세가 더 편안한 법이다.

 

차창 밖으로 노랗고 하얀 봄꽃이 다발로 흘러갔다. 날이 축축했다. 봄은 곧 장마에 이른다. 그즈음이 오면 끝 모르고 불어날 물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잠잠한 눈꺼풀 속에서 지훈은 혼탁하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상상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뒷좌석 말소리, 이어폰 바깥으로 새어 나온 음악 따위가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잠이 그를 끌어당긴다. 세상의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그는 관린의 머리통을 베고서 까무룩 잠겨들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그리고 다시 섰을 때,

 

발끝이 이윽고 그 애의 하얀 발등을 눌렀다. 그는 지금 심해 가운데 떠 있다. 잠든 사이 해일이 도로를 삼켰을까? 억수 같은 비가 내렸을까? 그러나 주위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보다도 평온했다. 눈가에 언뜻 빛이 일렁였다. 언제 여기까지 푹 빠졌는지 저는 몰랐다. 지훈은 언젠가처럼 또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당황했다. 그 순간 말간 낯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양 뺨을 ‘감쌌다’.

물그림자 대신 질량을 가진 희고 기다란 소년이 웃는다. 지훈은 물속에서 눈꺼풀 뜨기에 서툴던 자신도 잊고 큰 눈을 깜박거렸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소 띠고 다물려 있던 호선이 천천히 위아래로 열리더니, 그 애가

 

박,

지,

후우운

 

저를 향해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로 이름 제일 끄트머리에 유난히 긴 숨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