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사랑, 끝
w. 세월

 

 

1

감기에 걸렸다. 떡볶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라며 방과후에 먹으러 오라는 친구를 보러가다가 찬바람을 잔뜩 쐰 탓이었다. 그 친구랑은 무슨 사이냐고? 이름은 라이관린이고, 올해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됐는데, 1학년 2학년 때 서로 얼굴이랑 이름만 알고 아무런 연줄이 없어서 겁나 어색한 사이였다. 어사. 그렇다. 말 그대로 어사였다.

그 날 고삼이 무슨 시간 낭비냐며 엄마랑 싸우고 간 탓에 기분도 울적하고 별로였다. 녀석이 6시부터 아르바이트였기에 나는 5시에 마친 학교를 나와 30분 정도를 방황하고 있었는데 내 징징거림을 다 들은 라이관린에게 전화가 왔다. 그렇게 전화를 하며 우리는 중간지점에서 만나 아르바이트 가게 근처에 있는 쉼터에서 살짝 어색한 분위기로 앉아서 6시까지 시간을 떼웠다.

이렇게나 어색한데 왜 라이관린은 내게 오라고 부르고 나는 갔냐고? 그게 참… 대답하기가 애매한 부분인데. 그렇게까지 어색한 그런 사이는 아니었고 같은 반 친구 정도로 친해진지 한 3일 정도 됐었다. 그나마 말 좀 트고 친해진 바로 다음날이 녀석의 생일이었는데, 나는 왠지 살면서 처음으로 친해진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사서 상자에 가득 채워 담아줬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걔 친구들이 “야 이 정도로 챙겨주는 거 보면 빼박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라며 다들 입 모아 말했었다고 하더라. 물론 나중의 이야기다.

후에 그 얘기를 듣던 중에도 나는 기침을 해댔다. 감기가 세게 들어선 탓이었다.

 

2

나는 계산대에 서서 라이관린을 올려다봤다. 보통의 계산대보다 높았던 탓에 고개를 한참을 들어 올려봐야 했다. 나는 엄마와 싸운 탓에 아직도 기분이 울적했다. 그 와중에 검정 유니폼을 입고 같은 색인 모자를 쓴 녀석은 평소와 사뭇 달라보였다. 교복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봐서 그런가보다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슴 한켠이 간질거렸던 것 같다. 땅에 심어졌던 씨앗이 싹을 틔워내려고 하듯이. 톡톡. 간질간질.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내게 라이관린은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뭐 먹을래?”

“모르겠어…”

“말을 해줘야 주문을 받지.”

“추천해줘…”

라이관린은 살짝 웃음이 터지며 위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얼굴이 약간 연상 같이 느껴졌다. 그냥 순간 그랬다고.

“나 치즈 떡볶이랑…… 스팸마요 컵밥…”

“쿨피스 무슨 맛이 좋아?”

“어?”

“쿨피스.”

“나한테 왜 줘?”

“내 맘이야.”

복숭아… 작게 중얼거리자 녀석은 못 들은 듯 어? 하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내가 힘없이 주문하던 걸 모두 보고계시던 다른 여자 아르바이트 분이 복숭아래 복숭아!! 하고 외치며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주문을 하고 카운터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라이관린을 쳐다보며 기다렸던 것 같다. 유니폼이 잘 어울렸다. 동그랗고 테가 얇은 안경을 쓴 채 기름에 튀김을 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근데 난 튀김 안 시켰는데. 다른 테이블 건가보다.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라이관린이 받아가라며 커다란 봉지를 내밀었다. 고마워… 힘 없이 말하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그때 걔는 보고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근데 뭔가 보고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된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면서 봉투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길래 들여다보니 튀김이랑 쿨피스랑 이것저것들이 더 들어있었다. 쿨피스도 심지어 작은 게 아니라 큰 거더라. 나는 집에 와서 떡볶이 양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완전 1인분 양이 아닌데.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남기고 말았다. 먹는 내내 라이관린과 메신저로 얘기했는데, 아르바이트 중인데 답장이 꼬박꼬박 와서 신기했다.

 

3

기침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다시 들렀더니 기관지염이라고 했다. 살면서 처음 걸려보는 병명이어서 다시 물었던 것 같다. 네? 뭐라구요? 기관지염이라구요. 여기 엑스레이 사진에 하얀 선들 보이시죠? 감기가 아니었다.

“왜 걸린 거에요 갑자기?”

“학교 근처에 공사를 하고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요즘 미세먼지가 너무 많아서인 걸 수도 있고… 원인은 다양해요.”

폐가 간질거렸다. 그래서 자꾸 기침이 나왔다.

엄마는 그 친구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찬바람 쐬며 거기까지 갔다오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친구된 지 일주일도 안 된 걔가 뭐라고 내가 억지를 써가며 거기를 가려고 했을까.

 

4

처음 라이관린이 나를 집에 데려다주던 날이었다. 그 날은 정말 친구 대 친구로 데려다 줬었다. 난 우리 집 위치를 알리는 게 뭔가 그래서 버스 정류장까지 걔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두 번째는 내가 엄마와 심하게 싸워서 휴대폰까지 뺏기고 대박 우울한 날이었다. 평소에 내가 코인노래방에 가고싶다고 계속 그랬었는데 그날 라이관린이 학교 끝나고 나를 데려갔다. 난 라이관린이 좋다고 하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기도 했던 노래를 불렀고 걔는 내가 평소 좋아하던 노래를 불렀다. 내가 노래를 하는 내내 걔는 자꾸 문을 열려고 했다. 친구들하고 오면 하는 장난이랜다. 밖에 노래 소리가 새어 나가라고. 덕분에 나는 문 쪽을 계속 바라보고있어야 했다. 그래서 문 쪽에 앉아있던 라이관린도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노래하는 내내 기관지염으로 인해 기침을 참아야 했다. 그렇게나 아픈데 나는 코노에 왜 따라갔을까.

노래방에서 놀고 나오니 집에 가서 엄마를 마주할 생각에 다시 울적해진 나를 라이관린은 위에서 느리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정류장에 1부터 5까지가 있다고 치면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3에 있었고, 우리집은 1, 걔네집은 5였다. 정 반대 방향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우리가 온 코인노래방은 2에 위치했다.

“어디 가?”

“너 데려다주러.”

“뭐하러?”

“너가 너무 우울해해서.”

“뭐라는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파하 웃었다. 순간 목구멍이 간지러워 다시 기침을 했다. 걔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갔다.

 

5

학교에서 장난식으로 내일 생일선물을 달라던 라이관린에게 줄 선물을 사던 날 나는 걔한테 니 선물 진짜 샀다고 연락을 했고, 그 뒤로 우리는 매일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기간이었기에 부담이 컸던 나는 걔랑 전화를 하면서 걔가 너는 잘 하고 있다며 위로하는 걸 듣고 순간 울컥해서 엉엉 울었다. 코가 막혀서 발음이 잘 안 되는 내 말들을 듣고도 걔는 비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코 풀 시간에 1초라도 더 통화하고 싶어서 그냥 코가 막힌 채로 발음이 잘 안 되면 힘을 줘가며 말했다.

“야 라이… 라이… 관!!! 린!!! 아니 코가 마켜서 안대자나!!!”

“코 풀고 와 지훈아…”

“아니히… 으헝엉… 씨발… 공부는 왜 해야 해?”

“그러게.”

“대답 똑… 똑, 똑!!!바로 안허냐? 아 쒸 또 발음 안되네”

그 날 라이관린과 밤 늦게까지 통화를 하느라 통화요금을 다 쓴 탓에 그 달 내내 몇 번 불편함을 겪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콜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전화가 안 돼서 결국 못 불렀다던가. 그 뒤로 나는 걔한테 전화를 걸어달라고 종종 문자를 보냈던 것 같다.

 

6

세 번째로 라이관린이 데려다주던 날이었다. 하교하기 전에 반 친구들은 나한테 대놓고 물어봤었다. 너 라이관린이랑 사귀냐고.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썸이냐고 했다. 나는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짝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것도 아니라고 담담한 척 대답했다. 나는 라이관린이 나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내가 걔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

사실 전자는 정말 몰랐고, 후자는 외면하고 싶어했다. 나는 걔한테 설렐때마다 나한테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사랑에 빠지면 어떡하지?’

어쩌긴 뭘 어째. 친구사이에 나혼자 일방적인 감정이 생겨버리면 그건 좆되는 지름길이었다. 라이관린이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 그걸로 우리의 친구관계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걔가 나한테 가볍게 귀엽다고 하거나, 좋다고 할 때마다 똑같이 받아쳤다. 나도 너 좋아하는데? 좋아해 관린아~ 그런 식으로. 원래 가벼운 사람인 척 하는 거 생각보다 안 어렵더라. 하긴, 사람이 마음 먹으면 못할 게 없다고 그랬다.

 

7

근데 나는 못 참고 친구한테 상담을 했다. 내가 얘한테 자꾸 흔들리는데, 안 흔들리려고 노력 정말 많이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흔들린다고. 어떡하냐고 했다.

“좋아하는거네.”

“아니, 그냥 호감이라니까? 근데 그거도 아닐지도 몰라.”

“야, 너네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다 티나…”

“근데 라이관린 그새끼는 원래 다 그러잖아. 다 귀엽다고 하고, 잘 웃어주고 원래 다 친하잖아.”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너한테는 뭔가 좀 다르다니까?”

“모르겠어. 상처받는 게 무서워.”

“그럼 그냥 말해. 너가 자꾸 그러면 내가 오해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걔도 너 좋아하면 사실대로 말 하겠지.”

나는 그렇게 점심시간에 복도에서 친구에게 말하면서 내 마음을 결국 확인당했다. 입 밖으로 꺼내면 진짜가 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다. 이제 라이관린 얼굴을 어떻게 보지 싶은 찰나에 걔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는 점점 작아지는 라이관린네 집이 보였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내내 라이관린은 내 팔을 잡고 허공에 휙휙 흔들며 놀았다. 나는 내심 손을 잡아주길 바랬는데 역시 혼자 짝사랑하는 사람은 힘들었다. 존나 짜증나. 그냥 친구한테 말하지 말걸. 나만 힘들니까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지훈아, 너 팔 장난감 같다.”

라이관린이 내 팔을 흔들며 하는 말이었다.

“내가 장난감이야? 하하, 너 나 가지고 놀아?”

“어? 아니, 그런 거 아닌데…”

“…알아 나도. 농담한 거야.”

내가 장난스레 웃으며 가시박힌 말을 하자 라이관린은 살짝 당황하더니 아니라며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내려 내 손목을 잡았다. 걔의 아무생각 없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저 행동 하나에도 설레는 내 심장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안 흔들리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스스로 입 밖으로 내고 나니 그간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8

“잘 가.”

“안 가면 안 돼?”

이건 또 뭔 소리람. 우리 집 다 왔는데 내가 안 가면 어딜 가니. 나는 통로 계단을 올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라이관린의 옆으로 내려왔다.

“내가 너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가자.”

그리고 나름 용기를 내서 걔의 손목과 손의 중간지점을 잡고 걸었다. 손, 잡으면 오버겠지. 아쉬웠다. 근데도 나는 설레고 간질거려서 좋았다. 오늘 이 순간은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조금 욕심을 부리기로 한 거였다. 평소 부리지 못했던 욕심의 결과는 달콤했다. 나는 얼마못가 손에서 힘을 뺄 때까지도 라이관린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차마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꾸 기침을 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위를 쳐다보지 못한 게 아닐까.

잠시 후 나는 다시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녀석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우리집 앞까지 라이관린과 똑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날 걔는 처음으로 통로 안까지 따라들어와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나를 쳐다보다가 갔다. 나는 사실 조금 기대했었는데. 이래서 짝사랑은 하기가 싫었다.

 

9

나는 메세지로 라이관린한테 고백을 받았다. 집에 데려다줄 때 고백하려다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확신이 안 서서 못하고 그냥 엘베 태워서 보냈댄다. 내 감정을 부인하려고 헷갈리게 행동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자 좀 미안해지면서도 기뻤다. 내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결국 운명인가봐. 뭐 이런 생각.

자꾸 입술 사이로 헤실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오는데, 간지러웠다. 봄이라서 꽃가루가 날려서 그런건가 싶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꽃이 핀 것 같았다. 주위를 돌아볼 새가 없었구나. 깨닫고 나니 사방이 꽃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인 만큼 벚꽃이 만개했다.

 

10

살면서 처음으로 애인한테 꽃다발을 받았다. 길가에 핀 잡초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학원이 끝나고 잠깐 얼굴보러 온다던 라이관린이 자꾸 늦어지자 나는 심통이 나려 했었다. 비도 오고 평소보다 추운 기온에 덜덜 떨며 우산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툭 치던 것이었다. 예민하게 뒤돌아보니 존나 멋있는 남자친구가 안개꽃을 내미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어…”

“미안해. 이거 사오느라 늦었어.”

“…어…”

“지훈아?”

“……나 이렇게 행복해도 돼?”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마치고는 환히 웃는 나를 보던 라이관린의 표정은 정말 달콤했던 것 같다. 행복할때마다 불안해하는 나에게 라이관린은 항상 ‘너는 행복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라며 다독여주었다. 나는 꽃다발을 품에 소중히 안고 우리집 문 앞까지 라이관린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들어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내 입술에 몰캉한 뭔가가 닿았다. 들어가라면서 이러면 내가 어떻게 들어가니. 존나 모순이었다.

한 번의 뽀뽀를 마치고 떨어져버린 라이관린의 팔목을 잡고 아래로 당기자 고개가 딸려 내려왔다. 나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다시 가져다댔다. 기뻐하던 라이관린은 맞닿은 입술이 살짝 벌려지자 금세 놀라며 굳어버렸다. 언젠가 들은 바로는 키스가 처음이라고 그랬었다. 내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고 입술에 힘을 줘서 걔의 입술을 벌리려고 하자 놀랐는지 살짝 내빼는 기색이 보여서 더 달라붙었다. 그러자 걔도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벌리고 혀를 먼저 들이밀어왔다. 좋았다. 침으로 젖어서 따뜻한 혀끼리 끈적하게 말려드는데 싫을리가. 라이관린은 내가 혀를 더 깊숙이 넣고 움직이려하자 읍, 읍. 하면서 약간 야한 소리를 냈다. 저도 모르게 난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듣고 더 흥분한 내가 걔 입술을 살짝 깨물자 손이 내 허리로 와서 끌어안겨졌다. 내 왼쪽 손에 들린 꽃다발이 우리 둘의 움직임에 의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통로에 울렸다.

“너 왜… 입술 벌려… 하…”

“싫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놀랐자나…”

쟤는 정말 저렇게 말했다. 놀랐자나. 라고. 더 정확히는 놀라짜나 에 가까웠다. 섹시한 와중에 귀엽기까지 했다. 아, 얘를 진짜 어떡하지. 애인이 귀여워서 어쩔줄을 모르겠는 내게 그 귀여운 애인이 한마디 했다.

“갈 거야?”

“들어가라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학원이 끝났을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엄마에게는 문자로 오늘 진도가 많이 남아서 좀 늦게 끝날 것 같다고 보냈다. 그것도 집 문 바로 앞에서. 뭐 어때. 원래 바로 집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이렇게 좀 바람도 쐬주고 해야 집중이 더 잘 되는 법이었다.

나는 그대로 라이관린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와 층과 층 사이에 있는 통로 공간에 왔다. 그리고 우산과 꽃다발을 조용히 계단에 내려두고 그대로 입술을 맞부딪혔다. 손에 들린 게 사라지니 더 편해서 키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날 집에는 평소보다 30분 정도를 더 늦게 들어갔던 것 같다.

 

11

나는 너무 자주 아팠다. 원래 이렇게까지 감기에 자주 걸리거나 약이 안 듣지는 않았었는데, 고1때 독감에 한 번 심하게 걸리고나니 그때 먹은 약이 너무 독해서 그 뒤로는 아무런 약도 듣질 않고 면역력도 많이 약해진 듯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년차인 지금도 감기를 달고 살고있다. 작년 11월부터 5월인 지금까지도 떨어지지를 않는다. 마스크를 벗고 학교에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제 곧 여름인데 답답해 죽지 않을까. 벌써부터 인중과 코에 맺힐 땀이 눈에 선했다.

 

12

나는 걔랑 깊게 걸어갔다.

 

13

모든 날이 다 좋았었다. 친구로 한 달이 조금 안 되게 지내고 연인으로 4주를 보냈다. 비슷한 기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거는 지금 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라이관린은 갑자기 무척 힘들어했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고3이 받아서는 안 될 성적을 받아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나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당분간 이렇게 우울할 것 같다고 24일이 될 즈음에 그랬었다. 나는 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당분간이 이런 당분간이 될 줄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라이관린은 연애 극 초반보다 나를 덜 좋아하고 덜 신경쓰고, 연락의 빈도가 적어졌다. 그게 눈에 다 보일 정도였다. 걔는 그래서 아마 더 미안해 했을 거였다. 나는 가 미안함이 싫었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면 어차피 관계가 지속이 될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나는 악착같이 아니라고 믿고 붙들고만 있으려 했다.

 

14

근데 소용이 없었다. 28일이 되는 날, 4주를 정확히 꽉 채운 날 밤, 내가 서운하다는 듯 이야기를 조심스레 시작하자 라이관린에게 전화가 왔다. 걔는 뭔가 터져나오듯이, 나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려는 듯이 얘기했던 것 같다. 내가 이래이랬잖아, 그래서 너한테 이랬었고. 나는 응, 응. 만 반복하다가 중간 즈음에 물었었다.

“그럼… 넌 힘들어서 나랑 헤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

이때까진 나도 정말 불안해서 물어본 거였다.

“…관린아?”

“…사실 너한테 내가 너무 못 해줘서,”

“그런 말 말고. 그런 말 말고, 관린아.”

“있었어…”

덜걱.

심장이 기울었다.

과거형을 띠는 저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몰랐다. 그리고 저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힘들어하는 걔를 애써 외면하려고 눈을 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괜찮아.”

“내가… 내가 안 괜찮, 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어서. 걔는 원래 거의 우는 애가 아니니까, 우는 모습 한 번도 보여준 적…

생각해보니까 맨 처음에 시험을 망쳐서 우울하다고 할 때… 고개를 떨구고 말했던 그 때, 걔는 눈에 눈물이 고여있던 것 같다. 너가 나보다 키가 큰데, 숨기려면 고개를 들어야지 관린아. 애초에 그냥 다 숨겼어야지. 그랬어야지.

걔는 전화기를 붙들고 그냥 그렇게 계속 울었다.

“미안해…”

“……”

“미안해 지훈아…”

 

15

“못해줘도 괜찮아.”

“아니…”

“난 괜찮아.”

“아니, 으… 내가, 내가 안 괜찮아…”

“어, 그래. 근데 나는 괜찮아.”

잔인해지기로 했다. 수화기 너머로 아마 이제 몇 분 후면 헤어질 것 같은 남자친구가 통곡을 하고 흐느끼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연애할 때 관린이가 그랬었는데. 내가 울면 자기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 그때 나는 물었었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어떤 기분이냐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내가 울면 너가 무너지는 걸 느끼지 않을까?”

과거 네 말이 의문형이었던 이유는 아마도 너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까? 지금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없던 확신만큼이나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관린아.”

“…어…”

“미안해.”

“…하… 으윽… 너가 왜 미안해… 흐윽… 내가… 내가 나쁜 놈인데… 너가 왜… 지훈아…”

“헤어져야 너가 안 힘든데, 나는 그것조차도 쉽게 못 해주잖아.”

“…아니, …”

“그래서 미안해.”

그대로 걔는 한참을 울었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울었다. 나는 살면서 남자가 그렇게 우는 것을 처음봤다. 성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 말 뜻 그대로 그랬다. 걔가 울면서 뱉어내는 무거운 숨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매웠다.

울지 마. 울지 마, 관린아. 왜 울어.

그렇게 말하는 내 말을 들으면서 울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중에 후회할 거였다. 나는 감정정리를 잘 한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서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이라서 상관 없었는데, 라이관린은 후회할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나는 확실하게 걔한테 나를 새기기 위해서 상처를 주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있는 죄책감에 추를 몇 개씩이나 더 매달았다.

“나 나쁜사람이야.”

“하… 박지훈 너가 왜 나쁜 사람이야. 내가 나쁜 사람인데.”

“왜냐면 나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거든. 너가 울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방금까지는 너 붙잡았잖아. 근데 이제는 그냥 나도 편하게 헤어지고 싶어.”

반은 진실.

“그리고 관린아, 나 이런 걸로 안 울어. 너 앞에서 운 거랑 맘 여려보인 것도 전부 다 연기야. 나 연기 잘 해. 이기적이고.”

반은 거짓.

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하지마… 너 그러고 이따 혼자 울 거잖아… 왜 그래…?”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야말로 왜그래 나한테.”

“미안해……”

“왜그래.”

“미안해 지훈아…”

“미안하다고는 왜 해? 그렇게 말하면 니 죄책감이 좀 덜어져? 그러면 좀 편해?”

 

16

우리는 계속해서 반대로 달렸다. 내가 그 날 걔한테 서운하다고 메세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의심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될 리 없었다. 웹툰에서 봤는데, 사랑에 이유를 찾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다. 걔나 나나 이유를 찾으려하고 서로 상대방이 헤어지자 할까 의심하며 두려워했다.

우리는 둘다 전 연애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라이관린은 전 여자친구가 갑자기 어느날 헤어지자고 통보해서 사람이 어떻게 감정이 한순간에 변하냐고, 정말 상처받은 사건이었다고 나에게 언젠가 얘기했었다. 아마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된 3월이었을테다. 나는 라이관린에게 마지막으로 꽂는다고 생각하고 비수를 들었다. 더 갈 곳이 없어보였다.

“관린아, 내가 진짜… 나도 너한테 상처주기 싫었는데,”

“…응.”

“너가 전여친이랑 헤어졌을 때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냐고, 진짜 상처받았다고 했었던 거 기억나?”

“……응.”

“너 지금 똑같이 하네?”

내가 중간중간 걔가 이런 대목에서 울었다며 자꾸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생각나는 타이밍에 모두 말하는 거다. 얘는 여기서도 어김없이 크게 흔들리며 울었다.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이제 걔 마음이 이해가 좀 가겠다. 그치.”

“…응… 이해 가…”

“…하… 하하, 이해가 가? 그럼 나는? 나는 이해가 좀 가?”

“미안해… 이해하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어떻게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어긋남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 중에 가장 사랑했고, 빨랐으며 몸도 마음도 깊게 섞였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빨리 이별하나 봐.

 

17

나는 헤어지고나서 통화를 끊기가 싫어서 조금만 더 통화하자고 그랬다. 걔는 동의했다.

“우리 생각보다 쉽게 끝났네.”

“미안해.”

“아, 라이관린. 미안하다고 하지마. 짜증나니까.”

“…알았어.”

헤어지고나니까 말이 차라리 편히 나갔다. 그래, 이게 우리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게 맞는거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울어진 심장같은 건 신경도 안 쓰였다. 이게 방금 기울어졌었나?

“지훈아, 힘들어하지 마…”

“야.”

“어?”

“니가 뭔데 나더러 힘들어하라 마라야. 이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명령하지마라.”

“알겠어.”

“…”

“…”

“관린아.”

“응?”

“후회할 것 같아?”

“나?”

“어.”

“…그렇지 않을까?”

“그럼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응.”

“내가 후회할까?”

“…너가?”

“응. 나.”

“……”

“왜 대답이 없어.”

바로 불과 어제의 일인데 걔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안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기울어져서, 맞게 잘 끼워져있던 심장이 덜걱, 기울어져서 어디에 끼었나봐. 그래서 이렇게 답답한 건가봐. 누가 좀 맞춰주면 안 될까?

라이관린은 나에게 뭐라고 했었을까. 입버릇처럼 잘 모르겠다고 했을까? 아니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모르겠다는 말을 나름 그럴싸하게 했을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현실성 있는 것 같네.

“있잖아.”

“응.”

“만약에,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인데.”

“응.”

“만약에 시간이 흘러서, 너가 나중에 괜찮아지고…”

“…”

“그래서 나를 후회하고 그리워한다면…”

“…응.”

“그럼 그때 내 마음이 어떻든간에, 나한테 한 번만 다시 와보면 안 돼? 그러겠다고 약속해주면 안 돼?”

“……알았어…”

“나한테 미안한 마음 있을거지만, 얼굴에 철판 한 번만 딱 깔고. 그러고 와주기로 약속해주라…”

“그럴게… 그럴게.”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끝이 났다.

 

18

나는 이제 기관지염이 거의 다 나아서 기침을 하지 않는다. 간질거림도 사라졌고, 비록 마스크는 계속 쓰고다니지만 도로 걸렸던 감기도 헤어진 날을 기점으로 거의 다 나았다. 그치만 언제 다시 아플지 모른다. 일주일마다 병원을 다니는데 5일은 멀쩡하다가 가기 전 날에 꼭 아픈 탓이었다. 이번에 나는 병원을 끊을 수 있을까?

꽃이 졌으니까 꽃가루가 사라져 괜찮을 것 같이 느껴진다.

지금도 고개만 살짝 돌리면 그날 받은 꽃다발이 잘 말려진채로 내 방에 걸려있다. 꽃다발은 버려본 적이 없는데, 어떡하지. 아마 별 신경 안쓰고 당분간 내버려둘 것 같다고 예상해본다.

친구는 나에게 그랬다. 너희 서로 정말 많이 좋아했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걔가 지하에서 빠져나오면 후회할 거라고. 그래서 다시 사귈지도 모른다고. 근데 그건 그때가서 볼 얘기였다. 나는 이번에도 변한 거 하나 없이 또 감정을 숨기고 살아갈 게 뻔했다.

그래도, 사랑을 못 느꼈던 343일 간의 전 연애보다는,

비록 28일이었지만 가치있는 사랑을 알았다.

 

19

한때 나눴었던 대화처럼

“헤어질 때 고맙다는 말은 왜 하는거야?”

“아, 맞아맞아. 진짜 이해 안가.”

“야, 너 저번에 걔랑 헤어질 때 걔가 고맙다고 했냐?”

“어. 너도 전에 그자식이랑 헤어질 때 걔가 그랬어?”

“엉. 걔도 고마웠다고 그러더라. 아니 고마우면 대체 왜 헤어져? 그냥 사귀지.”

“내 말이. 그냥 자기 맘 편하려고 하는 소리 아닌가.”

“그렇지. 자기 죄책감 덜려고 그러는거지.”

우리는 서로 끝까지 고마웠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