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 만드는 방법
w. Sup

 

 

 

가끔은 인생에서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가 있다. 열여덟의 나는 한참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 금세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초등학생 때는 일주일마다 한 명씩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라져서 같은 반 여자애들의 대부분에게 고백했었던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만큼 거절당하는 일도 다반사였고 몇 번의 연속적인 까임 이후, 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사랑을 하고는 싶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이 번거롭고 무서워 진 것이다. 겨우 열여덟 주제에.

 

“어떡하지.”

 

나에게 2018년과 함께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옆 학교 여자애였다.

 

“왜, 또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이 친구는 항상 내 연애 상담을 해주는 라이관린.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렸지만 다니는 학원도 같고 동네도 가까워서 학교가 끝나면 항상 같이 학원가는 버스를 탄다. 라이관린은 한국 사람이 아니다. 대만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처음 만났던 작년의 관린이와 지금을 비교하면, 일단 지난 학기 사이에 키가 훌쩍 커버렸고 한국말도 많이 늘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랑 눈높이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올려다보아야 하다니!

 

“‘또’ 라니.”

“‘또’ 맞잖아.”

“이번엔 진짜야!”

 

나를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보는 관린이를 지나치며 하차를 위해 교통카드를 찍었다. 버스가 멈췄고 우리는 함께 내려서 학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월 초의 날씨는 변덕쟁이처럼 들쭉날쭉 이다. 지난 주 보다 포근해진 기온에 나는 롱패딩을 벗고, 교복 마이만 걸친 채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누군데?”

 

관린이의 물음에 나는 살짝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생각만 해도 광대가 뽈록 튀어나오고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사랑이었다.

 

“연진이.”

“…최연진?”

관린이가 되묻는 순간 나는 심장이 떨어질 뻔 했는데, 그 이름을 말하자마자 반대편 골목에서 당사자가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듣지 않았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채로 연진이의 눈치를 봤지만 그녀는 우리를 슥 보기만 하고 학원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이 상황에서 쓰는 말 알아. 양반 안 돼?”

“양반은 못 된다, 겠지.”

“아, 못 돼. 근데 양반이 뭐야, 지훈?”

“양반?”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관린이에게 “에헴” 하며 턱 밑에 수염을 쓰다듬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에헴?”

“그리고 수염.”

“산타클로스..인가.”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 따위를 사서 학원 수업에 들어갔다. 사실 연진이 것까지 함께 사오긴 했지만 결국 그녀 자리를 지나칠 때 나는 그 책상에 우유를 놔두지 못했다. 내 뒤의 라이관린이 쯧쯧 소리를 냈다. 됐어, 너 마셔. 나는 그 우유를 라이관린 책상으로 넘겼고 관린이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내 속 타는 줄도 모르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강의실로 선생님이 들어오시니, 저절로 내 시선이 앞쪽 자리에 앉은 연진이에게로 또르르 굴러갔다. 그녀는 항상 자세가 바르고, 꽉 묶은 포니테일이 단정했다. 고개를 돌릴 때 마다 머리 꼬랑지가 찰랑거리면 내 마음도 함께 찰랑거렸다.

 

“관린아, 어떡하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또 라이관린을 붙잡고 잉잉거리기 시작했다. 연진이 너무 대쪽 같은 애야. 빈틈이 없어.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관린이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뭐 찾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이런 거 있었어.”

 

그리고는 그의 전화기를 나에게 내밀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화면에는 알 수 없는 한자들이 떠있었고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랑 애’ 정도뿐이었다.

 

“사랑의 묘약.”

 

중국어를 읽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관린이가 글자를 읽어주었다.

 

“한 번의 투약.. 상대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뭐?”

“이거 봐봐.”

 

몇 가지의 재료들이 그림과 함께 쓰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꽃이었다.

 

“罌粟”

“이게 뭔데?”

“그, 한국말로 뭐지. 찾아볼게.”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우리의 버스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고,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진 라이관린을 버스 바깥까지 조심스럽게 이끌어 내리고 나서야 관린이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Poppy래.”

“그니까 그게 뭔데?”

“어.. 한국말로 양귀비.”

“양귀비.”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잠깐, 그거 마약 만드는 꽃 아니야? 재배하면 잡혀 들어가는 그 꽃이잖아.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고.

 

“야 그거 안 돼. 불법이야.”

“지훈,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갑자기 라이관린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한국어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푸라기는 불법 아니잖아. 나는 아직 미래가 창창한 청소년이었고, 이런 걸로 내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싫다고.

 

“안 돼, 관린아. 우리는 법을 지켜야지.”

“대만에서는 구할 수 있어.”

 

나는 조금씩 유혹에 흔들렸다.

 

“대만에서 어떻게 구해?”

“이 사람들이 씨랑.. 나머지 재료 판대.”

“씨가 필요한 거야?”

“아니, 꽃 피어야한대.”

“꽃은 어디서 구해.”

“씨 자라서.”

 

아, 됐어. 언제 꽃까지 키우고 앉아있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대만에 어느 세월에 가서 구해 와. 내 말에 관린이 대답했다.

“나 이번 춘절에 대만 다녀올 건데.”

 

춘절이라면, 우리나라의 설날과 같은 중국의 명절이었다.

 

“내일 모레잖아.”

“가져 올까?”

“…응.”

 

우리는 조심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안 들키게 조심할 수 있지?”

“노력할게.”

 

나는 뒷목을 긁으며 관린이를 올려다봤다. 씨익 웃는 라이관린.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먼저 도착하면, 나는 관린이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헤어지곤 한다. 겨울의 해는 짧아서 거리가 금방 어두워졌다. 가로등 아래 우리는 내일 보자며 안녕했고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근데 진짜 괜찮은 걸까.”

 

그렇게 시작된 검색으로 찾은 것은 수많은 뉴스 기사였다. 수사, 적발, 입건… 혹여나 관린이가 나 때문에 잡혀 들어가면 어쩌지. 나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상상은 꼬리를 물어 교도소에 갇힌 라이관린에게 면회 가는 모습에 이르렀을 때,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관린아 자?]

[이관린 : 아니]

[생각해봤는데]

[혹시 가지고 오다가 걸리면 내가 시켰다고 해]

[이관린 : ㅋㅋㅋ]

[같이 감옥가자]

[이관린 : 재밌겠다]

 

“재밌어? 난 심각한데?”

 

침대에 엎드려 발을 까딱까딱 하면서 관린이와 카톡을 한참 하다가 잠이 와서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넘어있었다. 관린이 좋겠다. 대만도 가고.

 

[올 때 펑리수]

 

그 카톡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이 들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사랑의 묘약 만드는 법

 

 

 

 

 

설날이 끝나고 우리는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어느새 2월도 막바지였다. 며칠 안 본 사이에 관린이는 키가 더 커서 돌아왔다. 펑리수와 양귀비 씨앗과 함께. 귀국 하자마자 연락하라고 했는데, 비행기 연착으로 예정 도착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어져서 답이 없는 동안 잡혀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라이관린에게 괜히 면박을 줬다.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펑리수를 먹으며 씨앗을 어디서 키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파트 화단은 안 돼.”

“집은?”

“그것도 부모님이 수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좋은 생각났어.”

 

관린이가 나를 데리고 옥상을 빠져나왔다. 곧장 향한 곳은 미술실이었다. 그 곳은 거의 관린이 아지트였는데, 그가 담당하는 청소구역이자 동아리방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기 나만 치워.”

 

그는 창가에 줄지어 서있는 화분들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두자. 그냥 화분처럼. 관린이의 아이디어에 우리는 화분을 사왔다. 씨를 심은 뒤 두 달 정도가 지나면 꽃이 핀다고 한다. 방과 후 학교 화단의 흙을 퍼서 화분에 씨와 함께 토닥토닥 잘 담아두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화분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우리는 그 숭고한 의식을 치루는 동안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잘 자라라!”

“잘 자라라!”

 

내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관린이에게 따라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따라하지 마, 라고 그는 나를 또 따라했다.

 

“매일매일 와서 확인할까?”

“그래.”

 

우리는 비밀을 지키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공범인거야. 형님이 연진이랑 잘 되면 거하게 한 턱 쏠게.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나와 관린이는 미술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관린이의 그림도 구경했다.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자, 조금 창피해 하던 모습이 귀여웠다.

 

“잘 그리는구만 뭘.”

 

내가 자기 그림을 칭찬하자 그의 귀 끝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정말 미술에 관해 문외한이었지만 관린이의 그림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따스함이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따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따봉 정도면 내 마음이 충분히 관린이에게 전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고마워.”

 

5교시를 시작하는 종이 울리기 전에 나와 관린이는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간질거리는 마음을 안고. 얼른 봄이 왔으면, 양귀비가 꽃을 피웠으면.

 

 

 

* * *

 

 

 

 

3월이 되었다. 짧은 겨울방학 덕에 한참 일찍부터 학교를 나서긴 했지만 달력의 숫자가 달라지는 것은 꽤나 큰 의미가 있었다. 꽃씨를 심은 지 일주일, 아직까지 흙은 잠잠했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양귀비 상태 체크를 위해 우리 둘은 각자의 반 친구들과 점심을 먹은 후 급식소 앞에서 만나 매점에 들러 아이스크림 따위를 입에 물고 미술실로 향한다. 화분을 한 번 보고, 관린이가 느릿느릿 미술실을 청소할 때 나는 그를 위한 노래를 선곡해서 틀어 준다. 가끔 흥에 겨워 따라 부른다거나 춤을 추면 라이관린은 청소를 하다 말고는 내 앞에 와서 구경했다.

 

“아, 찍지 마”

 

찍지 말라고는 했지만, 별로 안 싫은 게 티가 났는지 관린이는 핸드폰을 들고 연신 웃었다

 

“다음 주에는 싹 날 것 같지?”

“그러면 좋겠다.”

 

주말동안 쑥쑥 자라서, 다음 주 월요일에 와서 확인 했을 때 빼꼼 새싹이 돋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린이가 새싹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말이 지나고 나면 키가 훌쩍 자라있는 게.

 

“어!!”

 

그리하여 염원한대로 씨를 심은 지 2주가 되던 날, 우리는 양귀비 싹을 만날 수 있었다. 작게 올라온 초록빛의 새싹들을 기념하는 기쁨의 하이파이브 이후에, 여느 때와 같이 우리는 미술실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관린이의 빗자루를 빼앗아 들고는 기타를 치는 시늉을 했다.

 

“지훈, 잠깐만.”

 

갑작스럽게 스탑을 외친 관린이가 검은 색 연필을 들고 와 캔버스에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최고로 멋진 기타리스트처럼 그려주라, 관린아. 내가 부탁했고 당연하다던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에 너무 오버스러운 포즈를 취했던지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다리가 아파왔다.

 

“아직 멀었어?”

 

관린이는 대답 대신 캔버스를 뒤집어 나를 보여줬다.

 

“뭐야. 기타로 그려주라고 했잖아ㅡ”

 

그림 속의 나는 누가 봐도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최고로 멋진 기타리스트가 빗자루 들고 공연하니? 관린이에게 가볍게 면박을 주자 나를 보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관린이가 미술실을 나섰고, 나는 의자에 앉아 라이관린의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저런가. 좋겠다, 관린이는. 그림도 잘 그리고.

 

화분에 올라온 새싹은 푸르렀다. 나는 창가에 자리 잡아 턱을 괸 뒤 새싹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안녕, 아이들? 부디 무럭무럭 자라서 내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주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갖다 대어 살짝 만지니 복신한 촉감이 느껴졌다. 마침 돌아온 관린이에게 이리 와서 새싹들 좀 보라고 손짓했다. 관린이는 천천히 걸어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작은 녀석이 나중에 꽃을 피우게 되는 게 신기하지.”

“응… 마음이랑 비슷해.”

 

가끔 라이관린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깊은 수준의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 고개를 돌려 화분이 아닌 관린이를 보았다. 알 듯 말 듯 한 표정의 친구야. 너는 가끔 어떤 생각을 하니?

 

“시인이네, 이관린.”

 

단순히 달의 숫자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양귀비 말고도 많은 꽃이 피어나는 시기였다. 조금씩 통통해지는 잎을 관찰하던 우리는 문득 미술실 창문 건너편의 나무들에도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길쭉한 모양의 떡잎은 점점 동그란 모양으로 변해갔다. 하루는 청소 대신 미술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광합성을 했다. 3월의 셋 째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새 학기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고, 학원이 끝나면 집에 가서 쉬었다. 여전히 연진이에게 말도 못 붙이는 찐따같은 짝사랑이 진행 중이었지만. 아마도 5월 중에는 양귀비꽃이 피지 않을까?

 

[주말에 벚꽃 구경갈까?]

[이관린 : 벚꽃?]

[라고 연진이한테 보내야 하는데ㅠㅠㅠㅠㅠㅠ]

[이관린 : ㅋㅋㅋ]

 

용기가 없는 나는 쓸데없이 관린이한테나 벚꽃 이야기를 했다. 올 봄은 유독 벚꽃이 빨리 피었다. 아직 4월이 되기도 전인데, 등굣길의 벚나무들이 조금씩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양귀비 말고도 마약 성분이 있는 꽃들이 더 있는 것이 아닐까? 벚꽃 잎도 한번 조사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이상 증상은 이랬다. 첫 번째, 갑자기 걷다가 멈춰서 벚꽃 나무 사진을 찍는다. 두 번째, 벚꽃축제 날짜를 검색한다. 세 번째, 자꾸 입에서 벚꽃축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벚꽃축제 가고 싶어, 관린아.”

“언제인데?”

“하는 곳 마다 다르긴 한데..”

“오늘 물어봐.”

“…어?”

“연진이한테 오늘 물어봐.”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관린이를 곁에서 지켜보다가 불쑥 이야기하자, 내 질문이 귀찮은 건지 저런 대답이 돌아왔다. 짜식아,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고 있냐. 물어보는 게 어려우니까 이러는 거지. 조금 머쓱해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더위사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뭐 그리고 있는 거야?”

“화분.”

 

이젤 위의 캔버스 속에는 우리가 양귀비를 키우고 있는 화분이 그려져 있었다. 양귀비는 이제 꽤나 자라서 본잎이 5개가 넘었는데, 나와 관린이는 얘를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심어야하나 고민 중이었다. 집중하는 관린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눈썹이 눈에 띠었다. 슬며시 내려앉은 검은 속눈썹이 한 번을 끔뻑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연진이보다 더 긴 것 같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 멍 때리며 관린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스크림..”

“응?”

 

관린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내 교복 앞섶을 가리켰다. 시선을 내리자 흰 셔츠 위에 커피색의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더위사냥이 그 새 녹아서 교복 위로 떨어진 것이다. 아! 조금 늦게 반응하며 휴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관린이가 이젤 곁의 휴지를 들고 와서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녹은 아이스크림과 흘린 자국을 닦아주었다. 나는 엄마가 다 해주는 어린아이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관린이는 몇 번 문지르더니 안 지워진다며 나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물로 하자.”

 

내 손을 끌고 관린이가 화장실로 갔다. 나를 세면대 위에 앉히더니 양 손을 모아 물을 받아왔다. 물만으로 지워질까? 나는 약간 의심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라이관린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셔츠 위로 아예 물을 뿌려버렸다.

 

“아 차거!”

“어, 미안..”

 

덕분에 물벼락을 맞은 내가 작게 소리쳤고 관린이는 빠르게 사과했다. 셔츠가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관린이가 물비누를 잔뜩 펌핑해서 셔츠 위를 문지르기 시작하자 조용하던 화장실이 사부작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의 동그란 정수리가 가까웠다. 관린이가 나보다 키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보기 힘들어진 귀한 정수리였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훈 뭐해..?”

 

가만히 그의 머리통에 내 머리를 가져다 대자 무거움을 느꼈는지 라이관린은 빨래를 멈추고 물었다. 비싯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머리가 무거워서 잠시 놔두려고.”

 

관린이가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 저항 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길래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안무거운데..”

 

내가 머리를 다시 들자 그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나는 괜히 젖은 교복을 내려다보았다. 관린이가 열심히 지우긴 했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누런 자국이 남아있었다.

 

“잘 안됐어.”

“아냐, 이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관린아.”

 

나는 셔츠를 팡팡 두들겨 물기를 털었다. 분명 교복은 차가운데, 얼굴은 뜨거웠다. 세면대에서 내려오자 큰 거울에 귀까지 빨개진 내 모습이 비쳤다. 갑자기 왜 이러지, 미쳤나.

 

“열나?”

 

옷이 아닌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나를 보며 관린이가 물었다.

 

“..물 때문인가..”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수요일, 나와 관린이는 학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따로 벚꽃축제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매봉역 근처에 만개한 벚꽃나무들 덕분에 거리에서 봄을 완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학교 근처 양재 천에도 벚꽃축제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동안 너무 벚꽃타령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관린이 앞에서 더 이상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 날 미술실에서 귀찮다는 태도로 했던 대답이 조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학원으로 걷던 길, 둘 다 유독 말이 없던 하루였다. 갑자기 내 옆에 있던 관린이가 나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

 

내가 돌아보자 관린이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고, 그 곳에는 연진이가 그녀의 친구들과 서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마주침에 나는 적잖이 당황해서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그 무리가 우리를 발견했다.

 

“안녕.”

 

잠시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던 것은, 연진이가 나를 향해서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인사 하던 사이였던가? 절대 아닌데. 연진이는 아마 나라는 존재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만큼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지난날들이었다.

 

“아, 안녕.”

 

약간 더듬는 말투로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 분명 찐따 같았을 거야. 왜 말을 더듬었지. 소녀들은 어째선지 까르륵 웃었고 나는 최대한 빨리 그들의 앞을 지나치고 싶어졌다. 그 때 갑자기 관린이가 내 어깨 위로 손을 둘렀다. 그리고는 살짝 힘을 주어 내 왼쪽 어깨를 쥐었다가 놓았다.

 

“자신감 필요해.”

 

라이관린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깨에 다시 힘을 주고 앞을 보며 걸었다. 흘끗 본 연진이는 친구들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래, 쫄지 말자. 그리고 곧 묘약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중간고사 3주 전, 대치동 학원가는 북적인다. 강의실에 들어와 뒷자리에 앉아 창밖의 벚꽃을 보았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뻔하디 뻔한 선생님의 농담을 들으며 나는 연진이에게 주말에 벚꽃축제를 같이 보러가자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번호도 물어 볼 것이다.

 

“저기―”

 

그러나 내 계획은 실행조차 옮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수업 끝나고 연진이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혹시 핸드폰 번호 알 수 있을까?”

 

연진이가 번호를 물어봤다.

 

나 말고 라이관린한테.

 

“어―그게”

 

관린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려 나를 보았다. 나는 왜, 뭐. 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연진이는 아예 자신의 핸드폰을 관린이에게 들이밀며 번호를 입력해 달라고 했다. 그래, 저런 적극적인 모습이 멋져 보여서 좋아한 거긴 한데… 왜 하필 관린이야. 나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관린이는 결국 자신의 번호를 연진이게에 입력해주었고, 그녀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훌쩍 떠났다.

 

“좋겠네.”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억양이 튀어나왔다. 관린이는 난감한 눈치였다. 소심한 삐돌이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관린이에게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역대 급으로 말 없는 하루가 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던 골목, 정적을 깬 것은 관린이의 카톡 소리였다. 화면을 한 번 슥 보던 관린이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곧이어 익숙한 아파트 단지가 가까워진다. 나는 평소처럼 관린이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했다.

 

“시험 끝나고”

 

들어가는 내 책가방을 관린이가 턱 하고 붙잡았다. 졸지에 강제로 정지당한 내가 어? 하고 돌아보자 꿍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롯데월드 가자.”

 

롯데월드? 뜬금없는 상황에 나는 잠시 머리를 부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연진이랑.”

 

관린이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이름에 나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했는데, 누구랑? 누구? 비로소 그녀란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내 입과 동공이 한꺼번에 커지며 놀랄 수 있었다.

 

“연진이?”

“응. 아까 카톡..”

“..너한테 온 건데 왜 내가 가.”

 

마음 속 삐돌이가 남아 있어서인지 곱지 않은 반응이 튀어나가버렸고, 관린이는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너 데려와도 된대.”

 

[최연진 : 안녕 관린아 나 연진이야]

[최연진 : 중간 끝나고 롯데월드 갈래?]

[최연진 : 지훈이랑 같이 와도 돼]

 

지훈… 지훈이…

 

“연진이가 내 이름을 알아?”

 

대답 대신 관린이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순간 내 마음 속에 다시 분홍빛 꽃잎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참 단순한 놈이었다, 나는.

 

“근데 이렇게 갑자기?”

“그러게.”

 

뭐 어떠랴 싶었다. 중간고사는 4월 말이었고, 떠올리면 끔찍하긴 하지만.. 어쨌든 끝나면 연진이랑 무려 롯데월드에 갈 수 있단 말이지?

 

“간다고 해?”

“당연하지.”

 

나는 관린이 옆에 딱 붙어서 답장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훈이랑 갈게. 라고 쓰는 카톡이 전송된다.

 

[최연진 : 좋아ㅎㅎ 나도 친구랑 같이 갈게]

 

“예쓰!”

 

관린이의 등짝에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연신 날리며 행복해하자 그가 드디어 웃었다. 오늘 처음 보는 관린이의 웃음 같았다.

 

“고맙다, 친구야.”

 

내 말에 그가 이제 집에 가. 라고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진짜, 연진이랑 잘 되면 관린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완전 잘 대접 해 줘야겠다. 평생 형님으로 모셔야지.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 * *

 

 

 

 

그날 이후 우리는 연진이와 마주치면 인사를 했고, 가끔은 시답잖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잘 웃는 아이였다. 덕분에 내 기분은 나날이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나는 종종 이유 없이 관린이에게 간식을 사주었으며 미술실 청소도 도와주었다. 양귀비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지만, 그즈음 내 고민은 양귀비가 아니라 나의 성장이었다.

 

“관린아아..”

“왜.”

 

양귀비를 스케치하는 관린이의 옆에 앉아 나는 괜히 푸념을 했다.

 

“나 왜 키가 더 이상 안 크지.”

 

그런 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관린이가 말했다.

 

“지금 딱 좋은데.”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비참하다.”

 

관린이는 이후에도 꾸준히 자랐다. 그에 비해 내 키는 지지부진했다. 최근에 했던 신체검사에서도 라이관린은 백팔십이 넘은 수치를 보였건만, 나는…

 

“관린아, 어떻게 하면 키 클 수 있어?”

“..그냥 잤는데..”

 

내가 평소에 잠이 부족했나? 좋아, 앞으로 하루에 10시간씩 잘 거야.

 

“나 지금 좀 잘게. 이따 점심시간 끝나고 깨워 줘.”

 

순 억지였지만 나는 그렇게 미술실의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진짜 잘 생각은 아니었는데 식곤증 때문인지 순식간에 잠들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의 미술실은 조용했고, 아이들이 만들어 낸 바깥의 소음이 너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들리는 곳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꿀 같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은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때문이었다. 왜 안 깨웠어? 하고 관린이에게 물으며 허겁지겁 미술실을 뛰쳐나왔다.

 

“지훈이 키 크라고.”

“아이고, 배려 고맙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반으로 흩어졌다. 반으로 급하게 들어갔는데, 짝인 대휘가 날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왜 웃냐 물었고, 내 앞에 앉은 박우진과 배진영도 나를 보더니 얼굴에 뭐 묻히고 다니냐며 나에게 면박을 줬다. 대휘가 건넨 손거울 속 나의 양 볼에는 분홍빛 하트가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헐 이게 뭐야.”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박박 문지르자 다행히 하트는 지워졌지만 볼에 자국이 남아서 블러셔를 칠한 것 마냥 물들어 있었다. 라이관린..

 

[야 너가 했지]

 

선생님 몰래 서랍 밑에서 관린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관린이는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꺼 놓곤 했기에 아마 확인을 당장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관린이에게 답이 왔다.

 

[이관린 : 사진]

 

칠판에 판서를 하시는 선생님의 눈치를 슬쩍 보며 확인한 사진은, 볼에 하트가 그려져 있는 채로 곤히 자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아, 언제 사진까지 찍은 거지. 언제 한번 녀석의 폰을 뒤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엽사가 한두 장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너 미워’라고 오두방정 떠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는 핸드폰을 껐다.

 

 

 

 

 

“나는 어느 정도 키 차이가 났으면 좋겠어.”

 

하필 오늘의 이야기 주제도 이상형의 키였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연진이와 친구들은 나와 관린이가 있는 자리 근처로 와서 수다를 떨었다. 연진이가 말하길, 어느 정도 키 차이가 났으면 좋겠다고. 연진이는 여자 중에서는 꽤나 큰 편이었다. 거의 나랑 비슷했으니까.. 백칠십 정도 되지 않을까. 티는 못 냈지만 나는 조금 좌절했다.

 

“관린이는?”

 

연진이가 관린이에게 물었다.

 

“나는 아담한 사람 좋아.”

“아담하면.. 어느 정도?”

 

나는 관린이가 아담하다는 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관린이 주변의 작은 여자애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백칠십 정도..?”

“그게 아담한 거야?”

 

아이들이 모두 웃었고 특히 연진이가 좋아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강의를 들었다. 중간고사가 훌쩍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우리 집은 꽤 내 성적에 민감한 편이었다. 괜히 강남 8학군으로 이사를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공부에 흥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중학교 때 엄마한테 이 얘기를 했다가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의대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험 스트레스를 아예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관린아, 공부 많이 했어?”

“아니.”

 

라이관린은 사기캐릭터다. 대만에서 전학 와서 중국어도 잘 했지만 어릴 때 미국에서도 자랐다고 한다. 그 말은 영어도 잘한다는 거. 수학도 잘 하고, 과학도. 그가 조금 어려워하는 것은 한국어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벚꽃 벌써 지네. 축제도 못 갔는데.”

 

벚꽃이 슬슬 지고 있었다. 나무에 달린 꽃잎보다 바닥을 뒹구는 꽃잎이 훨씬 더 많아졌다. 올 봄의 벚꽃은 유독 빨리 피고 후다닥 진 느낌이었다. 주말에 비가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거리의 벚나무에서는 꽃잎 대신 연두색 잎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훈, 지금 집 가야돼?”

 

거리는 어두웠지만 굳이 지금 집에 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왜? 나는 아니, 시간 있어. 라고 대답했다. 관린이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양재천 갈래?”

 

집에서 양재천까지는 금방이다. 하천 양 옆으로 벚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는 예쁜 곳이긴 했지만, 집근처라서 오히려 가야겠다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우리는 즉흥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밤 운동을 나온 사람 몇 명을 빼고는 조용한 양재천을 둘이서 걸었다. 다 졌다고 생각한 벚나무들 가운데 홀로 뒤늦게 만개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 뭔가 울컥했어.”

“왜?”

“그냥, 얘 덕분에 봄이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라. 다 져버린 줄 알았단 말이야.”

“大器晚成”

“…뭐?”

“대기만성! 꼭 남들이랑 똑같은 시기에 꽃 피우지 않아도 되니까.”

 

라이관린은 꼭 이럴 때 한국말을 잘 하더라.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지훈도 벌써 걱정할 필요 없어. 키 나중에 클 거야.”

 

묘하게 포인트가 어긋났지만, 어쨌든 관린이의 위로에 나는 조금 마음이 나아졌다. 관린이에게 고맙다! 라고 소리치고는 사진 찍어 줄테니 벚나무 밑에 서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사진을 찍어주며 우리만의 작은 벚꽃축제를 마쳤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벗자 가방 겉주머니 위에 조금 묻어있는 두 장의 벚꽃 잎이 예뻐 버리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 * *

 

 

 

 

어느덧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우리는 이제 미술실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양귀비는 그동안 많이 커서, 잎 가장자리에 톱니 자국이 났고 키는 거의 내 손바닥만큼 자랐다. 조금 있으면 꽃대가 올라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중이다. 관린이는 나에게 국어를 물어봤고, 나는 관린이에게 영어를 물어보았다. 관린이한테 부담 되면 중간고사 기간에는 미술실에 오지 말자고 했지만, 관린이는 괜찮다고 했다. 자기는 점심시간에 여기 있는 게 좋다고.

 

“우리 28일에 롯데월드 가는 거지?”

“응, 토요일.”

“그 전에 꽃이 필까?”

“그러게..”

 

그 전에 꽃이 피어서 놀이공원에서 사용하면 딱인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관린이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문득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는 관린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술실 커튼 사이로 햇볕이 직진해서 관린이의 눈가를 비추었다. 갑자기 관린이를 불러보고 싶었다.

 

“관린아.”

“응?”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왜 불렀지? 이유가 생각이 안 났다.

 

“아니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관린이를 보다가 나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5교시가 내가 싫어하는 과목이라서.

 

 

 

 

 

시험 전 주에는 학원이 쉬었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간 연진이를 볼 수 없었다. 영어와 수학 시험 전 날에만 잠깐 학원을 들러 선생님께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연진이네 학교와 시험 날짜가 조금 달라서,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나지는 못했다.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자 눈 밑이 퀭해졌다. 이런 상태로는 안 마주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시험은 장장 4일간 계속됐고 하루가 끝나면 바로 다음날 시험을 준비하느라 나와 관린이는 중간고사를 보는 기간 동안에는 미술실에도 가지 못했다. 목요일 시험이 끝나고 우리는 복도에서 마주쳤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미술실에 들어갔다.

 

“어!!! 관린아!!”

 

미술실 뒷문을 닫는 중인 관린이에게 나는 소리쳤다. 드디어 양귀비의 꽃이 피어있었기 때문이다.

 

“꽃 피었다!”

 

내 목소리에 허둥지둥 꽃 앞으로 달려온 관린이는 고개를 쑥 내밀어 꽃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는 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드디어.”

 

우리는 약간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잠깐만, 지훈. 나 꽃 한번만 먼저 그릴게..”

 

관린이가 그동안 계속 그려오던 캔버스를 꺼내 이젤 위에 놓았다. 화분과 잎이 그려진 그림은 이제 양귀비꽃만 그려 넣으면 완성이었다. 나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곁에서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리 급할 것은 없었지만 관린이는 땀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꽃을 그렸다. 완성되고 나자, 이제 됐다며 어디서 비닐봉지를 찾아왔다.

 

“꽃잎 여기에 넣어서 가져가자.”

“어디서 만들게?”

“우리 집.”

 

그래서 우리는 꽃잎이 담긴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관린이의 집으로 향했다. 관린이는 우리 옆 단지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동안 한 번도 집에 놀러 가 본 적은 없었다. 시험이 빨리 끝나서 아직 해도 지기 전이었다. 지나가는 마트에서 먹을거리까지 야무지게 사서 아무도 없는 관린이의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하얗고 깔끔한 집안이 마치 라이관린 같았다. 관린이의 방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침대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관린이가 부엌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허락을 맡고 그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다 됐어?”

 

내가 관린이의 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그를 불렀을 때, 관린이는 무언가를 빻고 있었다.

 

“같이 하자.”

“이리와.”

 

부엌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재료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나는 관린이처럼 손에 위생장갑을 꼈다. 꽃잎을 열심히 빻고 있던 관린이가 나에게 물을 끓이라는 간단한 미션을 주었다. 커피포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아니, 오래 끓여야 돼서. 냄비에.”

 

관린이가 친절하게도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주었고 나는 커피포트에 있던 물을 냄비에 옮겨 담아 가스렌지를 켰다.

 

“이건 뭐야?”

“설탕.”

“설탕이 들어가는 구나.”

 

그 외 재료들을 보니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제와 의문이 조금 들었지만, 나에게는 잡을 수 있는 게 지푸라기뿐이었다고. 이것저것 재료들을 모두 준비한 관린이가 끓는 냄비에 모두 때려 넣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끓여야 해?”

“걸쭉해 질 때까지.”

“흐음.”

 

우리는 틈틈이 냄비를 확인하며 같이 플레이스테이션을 했다. 생각보다 약 만드는 것이 오래 걸려서 곧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부모님 안 오셔?”

“7시에는 올 텐데..”

“그 전까지 저거 끝내야 되는데.”

 

들키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시간 내에 묘약은 완성되었다. 약간 시큼달달한 향이 나는 붉고 걸쭉한 액체였다.

 

“이제 어떡하지?”

“롯데월드에서.. 연진이 음료수에..”

 

물론 그런 방법 말고는 그녀에게 이 약을 먹일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음흉해 보이긴 했다. 불쌍한 연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음료수를 마실 텐데.

 

“좀 미안하네.”

“주의사항 있어. 먹고 처음 본 사람한테 사랑에 빠지는 거야.”

“뭐?”

 

뒤늦게 통보받은 주의사항 때문에 나는 많이 당황했다.

 

“그럼 만약에 연진이가 다른 사람 보면.. 지금까지 말짱 헛짓 한 거잖아?”

“먹으면 지훈 바로 연진이 불러.”

 

진지한 라이관린의 눈빛에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맘을 고쳐먹었다. 그래,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야. 나는 라이관린 앞에서 오른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이야. 나 좀 진짜 잘 도와주라, 관린아.”

“알았어.”

 

우리는 손을 꽉 붙잡고 악수했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관린아!”

 

나는 청자켓을 입고 관린이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관린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관린이도 오늘 청자켓을 입고 나온 것이다. 의도치 않은 커플룩에 우리는 웃었고 출발 전 묘약의 상태를 확인했다. 약속 장소는 잠실역이었다. 관린이는 계속 연진이와 카톡을 주고받았는데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관린이 옆에 붙어서 그 카톡을 보는 것뿐이었거든. 잠실역에 도착하고 연진이와 연진이 친구를 만났다. 놀이공원에 가는 건데도 연진이는 꽤 짧은 치마를 입고 왔다.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는 어떻게 타려고 입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예쁘니 장땡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연진 이즈 뭔들임. 간만에 만난 우리는 약간의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동물 귀 머리띠를 사서 어트랙션을 기다리는 동안 셀카를 많이 찍었다. 후룸라이드에서 찍힌 사진이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한 참 있었다는 것 말고는 별 일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어떻게 할래?”

 

연진이 친구의 물음에 우리는 적당한 곳을 찾아보았다. 햄버거 먹을까? 내가 말했고 우리는 단체로 햄버거를 사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연진이와 연진이 친구가 잠깐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관린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으으, 미안해 연진아!”

 

나는 연진이의 콜라 뚜껑을 열고 묘약을 부었다. 콜라가 조금 붉은 빛이 되었지만, 뚜껑을 도로 덮으니 감쪽같았다. 우리는 잘 섞이도록 빨대를 휘젓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음료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긴장해서 손에 땀이 자꾸 났다. 저 멀리서 연진이가 돌아오고 있었다.

 

“어..?”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부터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나, 관린이, 연진이 친구, 연진이 순서대로 둘러 앉아 있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연진이가 관린이 옆자리에 가서 앉은 것이다. 나와 관린이는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아, 망했다. 연진이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료수를 쥐고는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대는데,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녀의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라이관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뭐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관린이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더 당황한 것은 연진이와 연진이의 친구였을 것이다.

 

“..사이다.. 먹고 싶어서.”

“아..”

 

연진이 친구의 손이 허공에 조금 떠 있다가, 내가 가져다 준 관린이의 음료를 다시 잡았다.

 

“관린이가 사이다가 먹고 싶었나보다.”

“미안해.”

 

관린이의 사과에 친구는 괜찮다며 웃었다. 다행히 연진이도 같이 웃어주었다.

 

“내가 콜라 먹지 뭐.”

“…이게 사이단데?”

 

자신의 음료 뚜껑을 열어 본 연진이가 의아해했지만, 내가 에이, 대충 마시자! 라고 소리친 덕분에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니, 일단락 된 줄 알았다.

 

“지훈, 나 어떡해.”

 

연진이와 연진이 친구가 햄버거 껍질을 버리러 간 사이 관린이 나에게 속삭였다.

 

“응?”

“아까 콜라 먹어버렸어.”

 

뭐어?

 

“마시는 척 한 게 아니라 진짜 마셨어?”

“응..”

“언제?”

“윤영이 음료수 뺏자마자.”

“…그래서 네가 누굴 봤는데…?”

 

라이관린은 손가락으로 친히 나를 가리켰다.

 

“야.”

 

…우리 어떡해?

 

 

 

 

나머지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간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동물 머리띠를 쓰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고 선릉역에서 연진이와 친구는 내렸다. 나는 괜히 관린이를 보는 것이 민망했다. 그래서 지금 관린이는 나한테 사랑에 빠진 상태인걸까?

 

“좀 어때?”

 

내가 물었고 관린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렇지 않게 함께 쳐다보았을 텐데, 나는 결국 먼저 눈을 돌리고 말았다. 뭔가 부끄러워.

 

“아무렇지 않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니,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묘약인데. 관린이는 내가 난감할까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린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혹시 해독제 같은 거는 없었어?”

 

관린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사라진대.”

“자연스럽게, 언제?”

“3개월?”

“3개월…”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치 앵무새처럼 관린이의 대답을 따라 하기만 했다. 원래는 역삼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려 했는데, 말하다보니 내릴 타이밍을 놓쳐 우리는 강남역에 내리게 되었다.

 

“카페나 갈까, 관린아?”

 

아까부터 죄다 뒤죽박죽인 것이, 정리의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나는 관린이를 끌고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고서야 우리가 아직 머리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관린이의 머리띠를 빼주다가, 얼굴이 조금 가깝다는 생각이 들자 급 창피해졌다. 나를 좋아하게 된 건 관린인데, 왜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지. 내 머리띠까지 황급히 빼고 나서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억만년 같았다.

 

“그런 거 있어?”

“어떤?”

“그.. 나를 보면.. 심장이 뛴다거나..”

“음..”

 

관린이는 가만히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더니 잠자코 있었다.

 

“응, 빨리 뛰는 것 같아.”

“그렇구나. 또, 뭐, 음..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나 얼굴 빨개?”

 

사실 관린이의 얼굴은 멀쩡했다. 얼굴에 열이 나는 것은 나였다.

 

“아니.”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볼에 갖다 대었다.

 

“걱정하지 마, 지훈. 너 불편하지 않도록 할게.”

“……”

 

그런 게 어딨어. 왠지 괜히 서운했다. 커피를 마저 마시고 우리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생각해보니, 얘기하는 내내 연진이의 이응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관린이와 함께 버스 옆자리에 앉았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깜깜해진 창문에는 버스 안 모습이 비쳐보였다. 관린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됐나봐. 나는 일부러 계속 바깥을 보는 척 하며 관린이를 보았다. 관린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액정 위에는 연진이의 카톡이 떠 있었다.

 

[최연진 : 집에 잘 들어갔어?]

 

관린이는 내 눈치를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뭐뭐라고 보내!” 하고 말했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는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고, 나와 관린이는 월요일에 보자고 인사하며 각자의 집으로 갔다. 항상 이맘쯤 헤어졌던 것 같은데, 5월의 밤은 겨울보다 훨씬 늦게 찾아왔기에 거리는 아직 환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집으로 돌아와 교복을 벗고 씻었다. 나는 꽤 지친 상태여서 바로 침대에 누우려는데, 머리맡에 지난번에 갖다 놓은 벚꽃 잎 두 장이 보였다. 관린이가 떠올랐다.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관린아 자?]

[이관린 : 아니]

[생각해봤는데]

[어차피 우리 공범이잖아]

[내 잘못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나 안 불편해]

[평소처럼 대해줘]

 

속사포처럼 쏟아 낸 솔직한 내 마음이었지만, 관린이는 전부 읽고도 한참 답장이 없었다.

 

[이관린 : 연진이는?]

 

나는 관린이가 정말 착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또 자기보다 내 생각을 먼저 해주고, 항상 선뜻 도와주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연진이와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다. 아니, 애초에 우리 둘 사이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걸.

 

[연진이는 이제 별로 안중요해]

[지금 중요한건 너랑 나야]

[이관린 : 알겠어]

 

관린이에게 답이 오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연진이는 잃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관린이만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멀어질 생각을 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마음이 막 미어졌으니까.

 

[관린아]

[이관린 : 응?]

[나 보고 싶어?]

 

아니, 내가 뭐라고 보낸 거지?

 

나는 정말이지, 내가 보낸 카톡이 믿기지 않았다. 답이 오기 전부터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고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었다.

 

[이관린 : 보고 싶어]

 

까만 액정 위에 뜬 노란 창 하나에 내 마음이 출렁였다. 열여덟의 봄이었다.

 

 

* * *

 

 

 

 

이제 양귀비를 키우지 않으니 우리가 미술실에 모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처럼 점심을 먹고 미술실에서 만났다. 관린이가 왔을까, 하고 반신반의 하며 도착한 미술실에는 이미 그림 그리는 관린이가 있었다.

 

“관린아, 안녕.”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는데, 평소와는 다른 후광이 느껴져서 나는 눈을 비볐다.

 

“안녕 지훈.”

“뭐 그리고 있어?”

 

들여다 본 캔버스 안에는 아직 스케치 선만 이리저리 그어져 있었다.

 

“그냥.”

 

나는 짜잔하고 집에서 가져온 마카롱을 꺼냈다. 그 날 우리는 미술실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 들으며 마카롱을 까먹었다. 오랜만에 간 학원에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연진이는 내 후룸라이드 사진 이야기를 꺼내며 깔깔 웃었고 나는 관린이가 그 사진을 기억할까봐 기분이 언짢아졌다. 정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분명 내가 바라던 바였는데, 나는 무엇에 자꾸 조바심이 나고 있는 걸까?

 

“관린아, 혹시 이따가 시간 돼?”

 

쉬는시간, 학원 복도에서 연진이가 관린이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것을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들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다음 수업 내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집중하기 어려웠다. 고백하려고? 아니면 또 다른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그래봤자, 관린이는 날 좋아해.’

 

그런데 그게 아니면 어쩌지? 연진이도 좋아하고 있다거나, 약을 마시는 순간에 처음 본 게 사실 연진이라거나.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다리까지 떨었다. 수업이 끝이 났고 나는 모르는 척 관린이에게 같이 집에 가자고 했다.

 

“미안, 오늘은 먼저 가.”

 

그 대답을 들었을 당시에는 좀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와, 라이관린. 그렇지만 나는 알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대신, 엄청 느리게 집에 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내려갔고 로비에서도 화장실에 갔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관린이와 연진이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학원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며 계속 학원 앞을 감시했다. 그때, 둘이 함께 학원을 나왔다. 나는 계산도 하지 않고 조심히 편의점을 빠져나와 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버스정류장 근처 골목이었다. 낮에 닫는 가게 옆이라 조용한 곳. 나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관린아, 나 너 좋아해.”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충격이 왔다. 그래, 역시 라이관린. 사기캐릭터.

 

“우리 아직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너만 괜찮으면 좀 더 알아가고 싶어.”

 

연진이 다운 똑 부러지는 고백이었다. 사실 여자애가 고백하는 장면도 흔치 않은데, 저렇게까지 얘기하다니.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관린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응.”

 

나는 좀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기울였다.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

“…양반.”

 

양반?

 

그 순간 나는 몸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휘청거렸고, 결국 으악 소리를 내며 골목에서 요란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뒤돌아 있던 연진이까지 내 쪽을 보게 됐다.

 

“양반 못되는 사람.”

 

그렇게 말한 관린이는 웃고 있었고, 연진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둘을 향해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 미안,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 박지훈 좋아해.”

 

결국 그의 입을 통해 듣고 나서야, 나는 완전한 안심이 되었다. 의외로 연진이는 쿨하게 받아들였고, 취향의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빠르게 포기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관린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비밀로 해 줄게. 연진이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집으로 갔다.

 

“우리도 집에 갈까?”

 

관린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민망하긴 했지만, 따라붙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아, 나 좋아해?”

“응.”

“나를 보면 행복해져?”

“그럼.”

“그렇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일부러 관린이에게 물어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아직은 조금 신중해야겠다고. 과거의 박지훈과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신중함’일 텐데. 유난히 꼼꼼하게 라이관린에 대한 감정을 점검하고 또 확인하는 이유는 뭘까? 인정하기 싫어서 일까. 혹은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다음 날, 나는 점심을 빨리 먹고 바로 미술실로 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니 텅 빈 미술실이 보였다. 항상 관린이가 먼저 와 있거나, 함께 도착해서 비밀번호를 눌러주었는데. 이제는 화분만 덩그러니 남은 창가의 양귀비 앞으로 갔다.

 

“오잉.”

 

흙만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한 화분에 못 보던 작은 새싹이 자라나 있었다. 뭐지, 관린이 오면 알려줘야겠다. 미술실을 둘러보던 나는 관린이가 항상 앉던 이젤 앞의 의자에 앉아보았다. 캔버스가 시야에 가득 들어오고, 왼쪽에는 화분이 오른쪽에는 내가 곧잘 앉는 등이 높은 의자가 보였다. 처음 양귀비를 심었던 두 달 전까지 하루하루를 거슬러 추억하니 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시계는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이관린은 왜 안 올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연락도 딱히 없었는데.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언제부터 모든 것이 당연해진거지? 내 곁에 네가 당연했고, 이 공간이 당연했고, 우리의 오후가 당연했고.

 

나와 관린이는 5교시 종이 치기 5분 전에 미술실을 나서곤 했다. 그래, 5분만 더 있다가 나가자. 관린이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 물론 조금 서운하긴 할 테지만, 이정도 기다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훈..”

 

3분이 흘렀다. 관린이가 오지 않던 3분이 3일 같다고 느꼈다. 미술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고 이마에 땀이 맺힌 관린이가 나를 불렀다. 나는 웃으며 왔어? 라고 그를 반겼다.

 

“갑자기 선생님이 불러서. 미안”

“아니야. 네가 올 줄 알았어.”

 

관린이는 들어와서 숨을 골랐다. 급하게 뛰어왔구나. 나는 문득 생각나 양귀비 화분을 들고 관린이 앞으로 갔다.

 

“관린아 이거 봐. 뭐가 났어.”

“아…”

“이게 뭘까? 양귀비 싹이랑 모양이 다른 것 같은데.”

 

양귀비 싹은 약간 삐쭉한 모양이었는데, 이름 모를 이 싹은 몽글몽글한 형태였다.

 

“글쎄..”

 

우리는 한번 두고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렸고, 5교시를 위해 다시 미술실 문을 잠갔다. 사실 너 안 오는 줄 알았어. 복도를 걷던 내가 말하자 관린이가 다음번에는 늦으면 카톡을 남기겠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 * *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줄 알던 시절이었다. 분명 우리가 만든 사랑의 묘약은 효과가 있었고 관린이는 날 좋아했지만 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양귀비 대신 이름 모를 싹을 보러 우리는 매일 미술실에 모였고 전처럼 청소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낮잠을 자고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중간고사가 끝난 5월, 체육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름 큰 행사인지라 우리는 반마다 반티를 맞추고 응원문구를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40명의 의견을 한데 모으는 것도 어려운데, 수천만의 인구가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우리는 대체공휴일까지 반납하고 학교에 나왔다. 반대표 축구팀에 들어있는 나도 연습게임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씻었다.

 

[이관린 : 나 아파트 앞이야]

 

관린이는 관린이네 반대표 농구팀이었다. 게다가 무려 주장. 걔네 반 팀이 워낙 드림팀이라 다들 농구 우승은 관린이네 반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이 학교에 갔고 각자 반에서 연습게임을 시작했다. 한바탕 경기를 치루고 나서 쉬는 시간, 관린이를 보러 농구코트 근처로 갔다. 게임이 한창이었고 나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 관린이 팀을 응원했다. 말도 안 되게 잘 하는 관린이가 게임을 거의 캐리하고 있었고 바스켓으로 쑥쑥 들어가는 공을 다들 신기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짜식, 멋있네. 공 말고 뛰어다니는 관린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갑자기 공이 튕겼는지 경기장 밖으로 벗어나 관중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 쪽으로. 나는 멍청하게도 피할 생각을 못한 채 눈만 감았다. 분명 부딪히는 소리는 났는데 예상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슬쩍 눈을 떴을 때는 공이 아니라 라이관린 뒷통수가 보였다.

 

“관린아”

 

반 아이들이 모두 관린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관린이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채 뒤 돌아 나를 보았다.

 

“괜찮아 지훈?”

“난 괜찮은데, 네가..”

 

농구공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라이관린은 내가 맞지 않도록 몸을 날려 오른 손으로 무거운 농구공을 쳐냈고, 덕분에 지금 오른쪽 손목이 퉁퉁 부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떡해? 병원 가야지. 급한 대로 손목에 파스를 뿌린 후,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관린이는 나와 택시를 타고 근처 응급실로 갔다.

 

“내일 경기 못 뛰겠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하필 오른 손이 다쳐서. 관린이는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아마 꽤 상심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농구를 좋아하는 관린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응급실은 난생 처음이었다. 관린이는 손목에 빨간 띠를 차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바깥에서 그를 기다렸다. 물론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많이 되었다. 바보같이 그걸 못 피해가지고, 아니 애초에 왜 관린이를 보러 농구 코트에 가가지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책 말고는 없었다. 한참 뒤에 관린이는 손과 손목에 붕대 같은 것을 칭칭 두르고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

“인대? 다쳤대.”

 

다행이도, 관린이의 뼈는 무사했다. 대신 2주 정도 반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당장 내일 있을 체육대회 참가도 어려워졌다. 농구 에이스 관린이의 활약을 모두 기대했을 텐데, 아마 나는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다. 하필 다친 게 오른손이라 수업 필기나 그림 그리는 일도 불편해 질 테지.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네 잘못 없어. 관린이의 따뜻한 목소리에 갑자기 울컥했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나는 울보처럼 눈물을 흘렸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관린이가 안 다쳤을 텐데.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반 친구들에게 경과를 알렸다. 나는 나머지 연습게임을 마저 뛰었으나 내내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자꾸 패스를 놓쳐서 친구들에게 한 소리씩 들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반에서 반장이 쏜 피자를 몇 조각 먹다가 관린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따 미술실 올래?]

 

관린이의 확인이 늦어 나는 바로 미술실로 갔다. 아마 카톡을 보자마자 이곳으로 올 것이다. 미술실로 뛰어가는 내내 약간 벅차올랐다. 전혀 급한 건 아니었는데, 왠지 뛰어 가고 싶었다. 비밀번호도 후딱 눌러버렸다. 문이 쾅 소리가 나게 닫혀서 조금 쫄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거울을 보며 교복을 정돈했다.

 

관린이를 생각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지만, 광대가 뽈록 튀어나오고 참을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건 분명히……

 

 

그 애를 보면 얼굴이 빨개져? 응.

그 애를 보면 심장이 뛰어? 응.

그 애를 보면 행복해져? 응.

그 애가 아프면 슬퍼? 응.

그 애가 보고 싶어? 응.

 

그 애를 사랑해?

…틀림없이.

 

 

“나 찾았어?”

 

양반은 못 되는 라이관린의 등장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에게 똑똑히 들리도록 말했다.

 

“고백할 게 있어.”

 

관린이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린걸.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또?”

“아니, 또 아니고 처음으로.”

 

반박하려는 관린이가 입을 못 열도록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냥 좋아하는 거 말고.”

“그럼 뭔데?”

“사랑하는 거.”

“…누군데?”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관린이를 가리켰다. 놀이공원의 그 날처럼.

 

“지훈…혹시 그 약 먹었어?”

“아니.”

 

관린이가 양 손을 얼굴 위로 포개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관린아, 너 울어?”

 

나 때문에?

 

“…응.”

 

 

 

* * *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누가 그랬었더라? 여전히 열여덟인 나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내가 라이관린을 사랑한 것은 꽃이 싹트고 자라고 피어나던 모든 순간들이었다고. 그 기다림이었다고.

 

5월의 날씨는 여러 번의 봄비가 내렸다 그치면서 이제는 이십 도를 훌쩍 넘기곤 했다. 아직 하복을 꺼내 입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긴팔 셔츠를 돌돌 말아 올려 입고 다녔다. 나와 관린이는 여전히 점심을 먹고 나서 미술실에 모였다. 사실 그날 이후 우리 관계에서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관린이는 반깁스를 하고 다녔고,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나는 좀 더 옆에서 도와줬다. 예를 들면 미술실 청소 같은 거. 체육대회 때는 관린이 옆에서 우리반이 아닌 관린이네 반을 열심히 응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스파이 소리를 들었지만. 다행인 것은 관린이 없이도 관린이네 반이 농구 우승을 차지했다는 거다. 아니었다면 나는 관린이 친구들에게 꽤나 오랫동안 미움을 샀을 것이다.

 

“관린아, 나 보면 어때?”

“너무 좋아.”

 

나는 꾸준히 관린이의 감정을 확인하곤 했는데, 묘약의 효과가 3개월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3개월이 지나서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 걱정 때문에 밤을 지새우던 날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 했을 때, 관린이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물어 볼 생각이다. 사실, 라이관린의 입으로 간지러운 대답을 듣는 게 꽤나 즐거웠다.

 

“다녀왔습니다.”

 

삐리릭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나는 신발을 벗으며 인사했다. 부모님이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계셨다.

 

“지훈이 왔나, 수고했다 우리 아들.”

 

방에 가방을 두고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 아빠의 골프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뉴스 소리가 들렸다.

 

-….같은 수법으로 국내에서 약 삼억 여원을 챙겼습니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양귀비 많이들 키운 갑네.”

 

-앞서 이들은 대만에서 구속명령이 내려졌지만 도주하여 국내를 비롯한 동아시아 곳곳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거래를 알선했습니다.

 

“딱 봐도 개양귀비구만, 저걸 속나.”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물 컵 밖으로 물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물통을 식탁에 내려놓고 TV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개양귀비 씨앗을 양귀비로 둔갑시켜 판매했고…

 

“와, 뭔 일 있나.”

 

사과를 깎으시던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젓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개양귀비? 그게 뭐야? 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네이버에 검색을 했다. ‘우미인초 · 애기아편꽃이라고도 한다. 높이 30∼80cm이다. 전체에 털이 나고 줄기는 곧게 선다. 잎은 어긋나고 깃꼴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줄 모양 바소꼴로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결정적으로 글과 함께 나온 사진이, 우리가 열심히 키운 그 양귀비랑 똑같았다. 바로 관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린아, 너 그 사랑의 묘약 파는 사이트 지금 들어가 봐. 응, 지금.”

 

관린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개양귀비 사진을 한 스무 장 정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사이트가 없어졌다고? 안 들어가져? 와…”

 

…우리 사기 당한 거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응, 집에 잘 왔어.”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키운 것이 개양귀비였다니. 두 달 동안 완전 헛수고 했잖아. 왜 진작 안 찾아봤던 거지… 라이관린 바보. 아니 그럼 사랑의 묘약은? 관린이가 그걸 마시고 나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란 말이야?

 

[관린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이관린 : 뭐?]

 

나는 ‘언제부터 나 좋아했냐’는 카톡을 쳤다가 다시 지웠다. 사실, 그건 정말 쓸모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 수 있게 된 지난날의 관린이의 행동들,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감정들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보고 싶어?]

결국 물어 본 것은 뻔한 질문. 나는 이제 이런 걸로 몸을 꼬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을 답이 없자, 갑자기 라이관린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하다 잠들었나?

 

[이관린 : 밖에 봐봐]

 

관린이의 답을 기다리다 자울자울 해질 즈음 카톡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밖에를 보라니? 나는 머뭇거리며 내 방 테라스로 나갔다. 맨발로 디딘 타일의 감촉이 차가웠다.

 

“박지훈!”

 

주차장 화단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외쳤다. 놀라서 창가에 바짝 붙어 고개를 내미니 체육복 차림의 관린이가 팔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급하게 그의 번호를 눌렀다.

 

“뭐야 왜 왔어?”

 

부모님이 계셔서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곤소곤 물었다.

 

-보고싶어서.

 

관린이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틀림없는, 사랑이었다.

 

 

 

 

 

 

<사랑의 묘약 만드는 방법 : 개양귀비를 함께 키우시오. 꽃이 필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