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대라는 봄에 누워
w. 열매달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아니요, 그러면 안 되는데요? 뚜우우 역 내 차임벨이 울린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카드지갑을 개찰구 단말기에 눌러찍었다. 계단을 두 개씩 밟아 뛰어 내려갔으나 스크린도어는 이미 닫히는 중이었다. 열차 속 사람들이 유감스런 눈길로 혼자 남은 관린을 바라본다.

전철은 떠났다. 관린보다 고작 몇 분 정도 부지런한 이들만을 싣고 홀홀홀 가버렸다. 망했네. 디스플레이로 다음 열차 위치를 보니 오려면 한참 멀었다. 환승 시간까지 재빨리 계산하니 오천오백프로 지각 확정.

착실 새내기 관린의 아자아자 과탑 파이팅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지각이라니. 어쩐지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느낌이 쎄했다. 정말이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억울해서 눈물이 줄줄 날 것 같다. 아니야, 그래도 포기하긴 이르다. 첫 수업 건물이 어디더라. 의자에 앉아 오늘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전 9시 – 오후 12시 예술대학 본관 201 <말과 글의 이해>

오후 1시 – 오후 2시 30분 사회과학대학 본관 A303 <설득 커뮤니케이션>

오후 3시 – 오후 5시 사회과학대학 본관 A305 <대중문화론>

오후 5시 – 6시 30분 학술관 503 <현대사회와 미디어>

 

관린아, 니가 헤르미온느야?

친누나가 시간표를 보고 뱉은 첫마디였다. 다른 건 몰라도 월요일 9시 수업은 결코 본인 의지가 아니긴 했다. <말과 글의 이해>는 같은 단과대 애들이랑 듣는 1학년 기초필수 과목이었는데, 수강신청 당일 말도 안 되게 정원이 빨리 차버렸다. 하는 수 없이 빈 자리가 많은 예대의 같은 강의를 신청했다. 그게 하필 그때 시작인 걸 어쩌겠는가.

내가 모! 잘못한 것도 없어여!

관린은 코를 훌쩍이며 자판기에서 오렌지 봉봉을 뽑아 마셨다.

허벅지에서 진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요란한 경보음이 귀를 때린다. 긴급 재난문자다. 금일 미세먼지 경보 발령, 실외활동 자제 바랍니다. 관린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코를 흥 세게 풀고는 빈 캔과 함께 휴지통으로 던졌다. 지각인 마당에 공기까지 난리야.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경영학과로 전과 못 하면, 자취는 꿈도 꾸지 말라던 엄빠의 말을 떠올리니 골이 다 아프다.

다음부터는 30분 일찍 일어나야겠다. 경기 to 서울 통학러에게 남은 희망은 슬프게도 그것뿐이다.

 

나 그대라는 봄에 누워

 

1.

정문에서부터 예술대학까지 치타처럼 질주했다. 숨도 한번 안 쉬고 달렸더니 흉곽이 쪼그라들 것같이 아팠다. 9시를 조금 넘어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천만다행으로 교수가 안 보였다. 헉헉대며 빈 자리에 쓰러져 앉았다.

같은 단과대라 자기들끼리는 대충 아는 사인지 복작복작 시끄러웠다. 호흡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그 소란스러움이 못 견디게 뻘쭘했다. 새우깡 봉지에 잘못 끼어들어 간 감자깡이 된 기분이다. 교수님 언제 오시지. 괜스레 휴대폰을 켰는데, 마침 와 있는 카톡이 맥도날드 플러스 친구가 보낸 체리블라썸콘 광고 알림뿐인 거야. 이거라도 열심히 읽어야겠다. 그치만 아이스크림이 벚꽃 맛이라니. 왜 이런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맛을 만드는 걸까.

광고 문구를 한 열 번째 반복해서 읽었을 때, 앞문이 열렸다. 드디어 교수님!

폰을 집어넣고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엥. 되게 젊은 교수다, 싶었는데 그냥 학생이었다. 가슴에 학교 로고가 박힌 롱패딩을 입고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온다.

예대 사람들은 지각을 해도 간지나게 하네. 관린은 조금 감탄했다. 교수고 뭐고 앞문으로 저렇게 당당하게 등판. 뒷문으로 꾸깃꾸깃 들어온 나랑 너무 비교되잖아. 느껴지는 기운도 예사롭지가 않다. 미세먼지 차단 마스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검정색이다. 신발도 가방도 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산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는다는 해리포터 속 디멘터가 생각났다. 저 사람은 심지어 눈 밑도 까맣다. 유일하게 색이라고는… 운동화에 나이키 로고뿐이다. 눈부신 형광 초록. 밤에 걸어다니면 저 로고만 보이겠네. 관린은 가까워지는 브이자를 영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영혼이 빨린걸까.) 그런데 이 시간에 온 걸 보니 혹시 이 사람도 경기 통학러 아니야? 어쩐지 좀 측은해지려는데,

“출석 불렀어?”

오힝. 관린은 고개를 들었다. 디멘터님이 왜 제 옆자리에?

“아니… 아니요.”

나 왜 말 더듬어, 울고 싶게.

남자는 마스크를 벗더니 귀에서 에어팟을 뾱, 뾱, 꺼내어 케이스에 끼워 넣는다. 실제로 처음 본다. 관린은 필통 옆에 놓인 제 오렌지색 이어폰과 남자의 에어팟을 티 안나게 번갈아 봤다. 오렌지… 사실 이어폰이 아니라 테이프 젤리였던 것처럼 입속으로 밀어 넣고 싶어진다. 등장만으로 사람 기를 다 죽이는 무서운 예대 인간들. 교수님. 얼른 와 주세요. 왜 지각한 저보다도 늦게 오세요.

 

2.

드디어 부른다. 출석.

“박지훈.”

“네.”

옆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가 내린다.

“어? 지훈이 형 이거 재수강해요?”

김병지 머리를 한 앞의 애가 뒤를 돌더니 옆자리 남자에게 반갑게 말을 붙인다. 형? 재수강? 관린은 남자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지훈이라는 남자는 턱을 괸 채 설렁설렁 ‘뭐 그렇게 됐어’ 한다. 선배였다니. 더 무서워.

“라이관린.”

“아, 네!”

잠깐 넋이 빠져있던 관린이 급하게 손을 들었다.

“..신방과네?”

교수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묻는다. 모두의 시선이 관린에게로 쏠린다. 등 뒤에서 땀이 삐죽삐죽 흘렀다.

 

3.

대학생이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강의 시간 잠깐 밖을 나갈 때 굳이 손을 들어 ‘교수님 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따위의 발언을 안 해도 된다는 거다. 그렇긴 한데, 옆자리 남자는 좀 심하다. 뭐 잘못 먹었나? 1시간 동안 벌써 세번을 넘게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너무너무 정신 산만해. 관린은 지훈의 빈자리를 노려봤다.

“와, 첫 수업부터 시간 다 채울 건가 봐.”

“진심 개에바. 앞으로 월요일 죽음이다, 진짜.”

학생들은 교수의 자비 없는 강의 진행에 학을 뗐다.

총 3시간 수업이라 중간에 잠깐 쉬는 타임을 줘서 그나마 숨이 트였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지! 관린은 꺄하학 웃으며 1층 편의점으로 내려가 샌드위치랑 커피를 샀다.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로비 구석에 구겨져 늦은 아침을 먹었다.

매주 월요일은 이렇게 지옥이겠지. 막막하긴 한데, 그래도 수업이 재밌으니 다행이다. 지각도 면했고! 히히. 무릎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며 무심코 창밖을 봤는데, 흡연 구역에 금방 수업을 같이 들었던 롱패딩 무리가 서있다. 새까만 것들끼리 저렇게 모여있으니까 꼭 까마귀떼 같다. 저기 저 남자가 아까 그 정신 산만한 박지훈이군.

남자의 통통한 입술 사이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역시 보통 인간 아니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하든 말든 바깥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용감무쌍함이라니. 폐가 뭐 서른 아홉 개쯤 달렸나 보지? 잿빛 하늘 아래 아련하게 연기를 내뿜는 까마귀 박지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싹한 기분까지 든다.

무서워.

관린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강의실로 올라왔다. 오후 전공 수업 프린터물을 꺼내서 훑어보고 있는데 옆에서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담배 냄새. 아까보다 더 퀭한 눈으로 옆자리에 앉는 박지훈. 폰을 보면서 다리를 쉴 새 없이 달달 떤다.

무서워, 무서워.

관린은 프린터물을 덮고 교수님이 한시라도 빨리 들어오길 기도했다.

“아!”

그때 갑자기 박지훈이 책상에 엎드린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쿨럭쿨럭. 뭐지? 어디 아픈가? 어쩌면 호흡곤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길래 오늘 같은 날은 담배 좀 작작 좀 피지.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하도 끙끙거리길래 곁눈질로 슬쩍 봤다. 엎드린 박지훈의 폰에서는, 털이 토실하게 찐 웰시코기가 뽀짝뽀짝 걷다가 바닥에 뾱 엎어지는 움짤이 무한재생되고 있다.

음.

“아, 심장 아파.”

박지훈은 그게 너무너무 귀여워서 괴로워하고 있는 거였다.

…이상한 놈.

 

4.

[과대 : 과팅할 사람? 선착 3명 ㅇㅇ] 오후 2:40

[동기 A : 헐 저요] 오후 2:40

[동기 B : 헐 나나나] 오후 2:40

[동기 C : 나 ㅇㅇ] 오후 2:41

도서관을 헤매며 책을 빌리는 사이, 동기 단톡방에 과팅 제안이 올라왔다. 참고 도서를 빌려 늦지 않게 수업 장소로 이동하느라, 관린은 한참 뒤에야 단톡방 내용을 확인했다.

[우와 나두] 오후 3:43

별 생각 없이 한 18번째로 답을 보낸 것 같은데,

[과대 : ㅇㅋ ] 오후 3:45

[과대 : A랑 B랑 라이관린 셋 ] 오후 3:45

[과대 : 끝] 오후 3:45

명단에 올랐다. 하이패스 미친, 라이관린은 뭔데! 라고 딴지를 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관린인데. 동기들은 단체로 합죽이가 됐다.

미팅 장소는 학교 앞 민속주점 아리랑이었고 상대방 셋은 예술대학 회화과였다. 만나자마자 술 게임을 했는데 같은 과 동기들이 막걸리 몇 병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예상보다 자리가 일찍 파했다. 대충 택시를 태워 보낸 후, 관린은 가까이 앉았던 숏단발 여자애와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갔다. 우연히 가는 방향이 비슷해 전철도 같이 탔다.

여자애는 자신의 원래 꿈이 아나운서였다고 하며 관린에게 부럽다는 얘기를 연거푸했다.

“나도 그냥 확 신방과로 전과할까 봐.”

“난 경영학과로 전과하고 싶은데.”

“아, 진짜? 왜?”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부모님이 그러래. 몰라, 나도.”

회화과 애랑은 동기들보다 말이 잘 통해서 좋았다. 그녀는 중간에서 먼저 내렸고, 관린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내릴 역을 지나칠 뻔했다.

 

5.

동기 중 누가 그랬다. 베토벤이 작곡의 신이고 백종원이 장사의 신이면 라이관린은 얼굴의 신이라고.

다음날, 수업 시작 30분 전부터 강의실에 먼저 와 전공 책을 씹어먹을 기세로 파고 있는 라이관린을 보며 신방과 동기들은 ‘저 얼굴로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뭐해? 점심 같이 먹을래?] 오후 12:05

동기들이랑 학생식당이나 갈까 했는데 어제 숏단발 애한테 카톡이 와있었다. 학교 앞 작은 식당에서 같이 나폴리탄 파스타를 먹었다. 둘 다 공강 시간이 애매하게 길어서 같이 카페에 가 있기로 했다. 진동벨이 울리고 그녀가 커피를 받으러 간 동안, 관린은 카페에 비치된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올 봄에 출간된 2018 학교 잡지를 발견했다.

“와.”

표지 모델이 엄청나다. 우리 캠퍼스 학생 맞나? 연예인인 줄 알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하얀 셔츠를 입고 눈을 감은 얼굴이 신선한 우유처럼 깨끗하고 고왔다. 여자애가 자기를 부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우유 샴푸 CF라고 해도 믿겠네. 관린은 아이스 라떼를 빨대로 쪽쪽 빨아올리며 교지를 펼쳤다. 눈길이 자연스럽게 첫 장 귀퉁이로 향한다. 당연히 연영과겠거니 했는데,

회화과 17 박지훈.

어?

박지훈?

관린은 입이 떡 벌어졌다. 다시 다시 표지. 띠용. 뒤로 넘겨서 이름. 두 번 봐도 세 번 봐도 회화과 박지훈이 맞다. 말도 안 돼. 맞은 편에서 폰을 보고 있던 여자애가 응? 하더니 엄청 웃는다.

“잘생겼지?”

“어? 어어.”

“나도 실제로는 본 적 없는데, 과에서 유명한 오빠래.”

여자애의 입에서 나오는 회화과 유명인사 박지훈 이야기가 귀에 박혔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들리지 않았다. 이 형이 그 형이라니. 그 어둠의 정령 같은 사람이. 관린은 여자애 몰래 교지 한 부를 백팩에 챙겨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에 앉아 사진을 포함해 총 4면을 차지한 지훈의 인터뷰를 꼼꼼하게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문득 앞을 봤는데 맞은 편에서 똑같은 교지를 읽고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뻘쭘해져서 헛기침을 하며 동시에 교지를 접어 넣었다.

 

6.

“박지훈.”

주변을 둘러봤다.

“박지훈?”

안 왔나.

관린은 목을 쭉 빼고 강의실 안을 살폈다. 롱패딩은 수십 명인데 그 퀭한 눈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교수님의 ‘이 자식이 정신 못 차리고’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네에에에~”

하며 박지훈이 뿅 등장했다. 그래도 이번엔 뒷문으루 왔네. 입고 있던 롱패딩을 허물처럼 꿀렁꿀렁 벗어 의자에 걸어두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저 사람이 그 표지 모델이라는 게 새빨간 거짓말 같이 느껴지는 거다.

그래. 정말 말도 안 돼.

관린은 수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중간중간 눈길이 박지훈이 앉은 곳 쪽으로 흘끗 쏠렸다. 책상을 주먹으로 팡팡 내려치며 세상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니. 저 인간 또 귀여운 아기동물 짤 보나 봐.

 

7.

 

“안녕하세요.”

왜 하필.

관린은 신을 원망했다. 조소과 1명, 실음과 1명, 회화과 1명, 신방과 1명이 팀 프로젝트 같은 조가 됐다. 물론 회화과는 박지훈이고 신방과는 라이관린이다.

“안녕.”

박지훈이 나머지 애들한테 바로 말을 까는 걸 보고 관린은 헉,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너무 무서운.

“안녕하세요.”

근데 왜 나한텐 깍듯하게, 굳이 -요를 붙여서 인사를 하지. 박지훈이 라이관린을 본다. 웃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신방과 맞죠, 조장님?”

“네?”

관린은 잠깐 얼이 빠져있다가,

“무, 무슨 소리세요. 제가 왜 조장…”

하며 나머지 애들에게 황급히 구원의 눈길을 보내는데, 아니 왜 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데!

“조장님 번호부터 찍어주세요.”

박지훈이 웃으며 폰을 내민다. 와, 진짜 악마 같다. 관린은 마지못해 건네받았다. 번호를 누르는데 얄미운 박지훈은 ‘조장님 왜 손을 떨어용?’ 하며 또 생글거리는 거다. 미워, 미워. 교수님도 밉고 나머지 조원들도 밉고… 아니, 일단 저 박지훈이 젤 문제다. 집에 가고 싶어.

 

8.

 

“야, 조장. 따라나와봐.”

쉬는 타임에 박지훈이 관린을 불렀다. 그리곤 편의점에 데려가 다짜고짜 ‘골라’ 한다. 억지로 조장 완장 달아줄 땐 언제고, 고작 이런 거로 퉁치기 있음? 관린은 커피빈 RTD 카페라떼를 골랐다. 박지훈이 쓰읍 하더니 빼앗아 다시 내려놓는다.  이건 투플원 아니잖아. 나랑 이거 같이 먹어, 하더니 스누피가 그려진 딸기우유 세 개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간다.

아, 미친아 니가 고르라매…

속으론 백번 천번도 더 외쳤지만, 밖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실은 내색하지 못한다.)

바깥으로 나가더니 박지훈은 바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상하고 무서워. 관린은 추위에 떨며 지훈이 사준 딸기우유를 마셨다. 3월 찬 바람에 머리가 깃발처럼 펄럭거리는데도 꿋꿋하게 흡연 중인 회화과 디멘터 박지훈. 관린은 빠른 속도로 딸기 우유를 빨아먹었다.

“뭘 그렇게 빨리 마시냐. 넌 담배 안 피워?”

“네? 네…”

“그래. 안 피는게 좋지. 몸에 안 좋아. 피지마.”

관린은 띠용스런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뭐여.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분위기. 할 말이 없어도 넘 없다. 한참 고민하다 겨우 생각해낸 말이라는 게,

“형 회화과면 그림 잘 그리시겠네요.”

였다. 어느새 담배를 눌러끄고, 우유에 빨대를 꽂는 중이던 지훈이 띠꺼운 표정을 짓는다.

“그럼 넌 신방과라서 신문기사 잘 써?”

“네?”

“방송 잘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입술이 파사삭 마른다.

“그치? 전공이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거든. 근데 난 잘 그려.”

“?”

“딱 한번 본 것도 이렇게 샥샥샥. 아, 다음에 너도 한 장 그려줄까?”

어느새 인상을 풀고 힛힛 웃으며 허공에 붓질을 해대는 박지훈을 보고있자니, 사회생활은 그냥 존나 개같은 거라던 선배들의 말이 이해가 갈것도 같은 관린이었다.

 

8.

 

첫 조모임이 있는 토요일.

만만해 보이면 안 돼. 카리스마 있는 조장처럼 보일 거야. 관린은 등에 호랑이, 용, 목련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진 파랑색 스카잔을 꺼내 걸쳤다. 좀 추워두 어쩔 수 없다. 히트텍 두개 껴입었으니까 괜찮겠지. 거울 앞을 한참 서성이다 집을 나섰다.

근데, 라이관린 당신이야말로 예대를 너무 만만하게 본 건 아닌지.

몇 시간을 걸쳐 주말에 힘들게 학교까지 왔더니, 약속 장소였던 예대 중앙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 다 어디 간거야. 전화도 안 받고. 그러고 보니 관린이 보낸 단톡 공지에 3이 없어지지도 않았다. 점심도 못 먹고 날아왔는데 이 인간들이. 부들부들 떨며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조금 늦는 거겠지. 일단 자료라도 찾고 있어야겠다.

억지로 돌려보는 행복회로.

“하이.”

그러다 한 2시간 쯤 지났을 무렵, 후드를 뒤집어 쓴 박지훈이 나타났다. 구멍 뚫린 노란색 크록스를 질질 끌며 앞머리는 잔뜩 뻗쳐가지구.

“조장님, 일찍 왔네?”

라니. 저희 1시 모임이었거든여.

“관린 화나쏘? 미안미안, 어제 미술학원 알바가 늦게 끝나가지구. ”

대답하기도 짜증 난다. 알고 보니 박지훈은 경기 통학러가 아니라 학교 앞에서 자취중인 성골 중 성골이었다. 그걸 들으니 더 기가 막히고 빡치는 거다. 박지훈 가만 안도… 관린이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박지훈이 콧소리를 내며 팔에 매달려온다.

“아 관리이이인~ 내가 대신 점심 살게. 밥 안 먹었지? 나가자, 나가자.”

“됐어요.”

라곤 했지만 사실 배가 고프긴 하다. 결국 박지훈이랑 나가서 왕돈까스를 먹었다. 치즈돈까스를 고르려니까 기침을 엄청 해대며 눈치를 주길래 아 그냥 제 돈 내고 먹을게요! 하고 싶었다. 박지훈 진짜 짜증나.

 

9.

 

대체 저 얼굴로 왜 저렇게 열심히?

중앙도서관에 박혀 온 힘으로 과제 중인 관린을 발견한 동기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왠지 오늘 다 못 끝낼 것 같은데. 관린은 기지개를 켜며 친한 과 선배한테 오늘 선배 방에서 재워주시면 안 되나여? 하고 카톡을 보냈다. 룸메가 웬일로 집에 들어와서 그러기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이 바로 날아왔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박지훈한테 전화가 왔다. (저장된 이름:앙마) 또 간식 셔틀 시키려고 부른 것 같은데.

[학교지? 저녁 같이 먹을래?]

“저 지금 집에 갈건데요.”

[서브웨이 사서 예대루 와. 나는 맨날 먹던 거에 에그 마요 추가해줘! 음료는 편의점에서 딸기 우유!]

뚝.

예상 적중. 아오! 짜증나! 라고 1초 정도 생각했다가,

서브웨이 맛있겠당 나는 모 먹지 하며 가방을 챙겨서 도서관을 나온 신문방송학과 18학번 라이관린(20)씨. 지시받은 샌드위치에 딸기 우유까지 장전해서 쫄래쫄래 예대 앞까지 갔다. 여긴 이 시간에도 불이 다 켜져 있네. 신기하게 바라보며 작업실 문을 열었다. 헉,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어? 관린이 왔네.”

앉아있던 박지훈이 손을 흔들며 뛰어나온다. 알록달록하게 물든 갈색 앞치마. 특유의 텁텁한 유화 물감 냄새가 확 풍긴다. 멀뚱하게 서 있는 관린을 두고, 지훈은 뒤를 돌아 나 울 강아지랑 저녁 먹구 올게~ 하며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아, 형! 누가 강아지에요. 그런 거 좀 하지 마요!”

지훈이 히히 웃으며 관린이 든 비닐봉지를 빼앗아 든다. 빈 강의실에 들어가 둘이서 우걱우걱 샌드위치를 먹었다.

“저 빨리 먹고 가야 돼요.”

“학교에서 밤 안 새?”

“과 선배가 오늘 룸메 있어서 못 재워준대요.”

할라피뇨 빼달라 그랬는데 넣었나 보네. 입안이 알싸하다. 우유를 쪽쪽 들이키구 있는데,

“그럼 오늘 우리 집에서 잘래?”

어…

“그래두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박지훈. 지금 보니 입은 청바지에도 노랑 초록 물감이 튀어 엉망이다.

“대신 다음 말글 수업 과제 니가 좀 해줘.”

“네? 그거 자기소개 하기 잖아요. 형 소개 글을 내가 어떻게 대신 써요!”

“하기 싫으면 막차 타고 집 가던가.”

저 야무지게 올라간 입꼬리. 하여튼 박지훈 진짜 얄밉다.

관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눈 붙일 장소가 생겼으니 다시 버닝이다. 관린은 도서관으로 돌아가 과제를 마저 했고, 지훈도 작업실로 들어갔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얼추 작업이 마무리됐다고 지훈에게 카톡이 왔다. 중간에서 만나 서로의 초췌한 몰골을 비웃으며 정문까지 걸었다. 학교 호수 주변을 지나는데 막 피기 시작한 풀꽃 냄새와 박지훈한테서 나는 씁쓸한 물감 냄새가 섞여 독특한 냄새가 났다.

“벚꽃 피려나 보네.”

지훈이 나무를 올려다본다.

“그러게요.”

“벚꽃 재수 없어. 그치 않냐.”

“나는 좋던데.”

관린의 말에 박지훈이 키득키득 웃는다.

“지두 여친 없으면서 벚꽃이 좋긴 무슨. 아, 집에 마실 거 없는데 맥주 사서 들어갈래?”

 

10.

 

자취방에서 500ml 호가든 한 캔을 나눠 마셨다.

고작 맥주 몇 모금에 발갛게 상기된 지훈의 얼굴. 잘 익은 열매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박지훈은 바로 곯아떨어졌지만 관린은 그날 한숨도 못 잤다. 옆에서 지훈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이 가려웠다. 해가 뜨는 걸 보고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하얀색 천장. 시계를 보니 8시다. 순간 놀랐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안심한다. 나 어제 박지훈 집에서 잤구나. 학교 앞에 살면 이 시간에 일어나도 지각이 아니라니. 진짜 꿀 빨고 사네 박지훈.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내 마시는데 생각보다 집이 깔끔해서 좀 놀랐다. 매일 다 죽어가는 몰골이면서 창가에 쪼르르 귀여운 화분도 있고. 처음엔 집에서 알로에를 키우는 줄 알았다. 스투키인가?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있는데 아직 꿈나라인 박지훈이 흠냐흠냐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다. 흰 박스티를 입고 이불 속에 파묻혀있는 박지훈. 교지 표지 속 해사하던 박지훈과 눈앞의 박지훈이 겹쳐진다. 햇살이 다소곳하게 박지훈의 콧등위로 내려앉는다. 몸이며 마음이 마구마구 가렵다.

관린은 손을 뻗어 지훈의 도톰한 입술 가운데를 엄지로 살살 눌렀다. 손가락에 앵두무늬가 묻어나올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제 입술로 가져가 천천히 눌러 찍었다.

“미쳤어.”

그런 게 분명하다. 관린은 더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곤 외투를 챙겨 나왔다.

 

11.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캠퍼스가 한창 벚꽃으로 분홍분홍할 무렵이 시험인 건 도대체 어떤 나쁜 인간의 계략일까.

 

12.

 

지훈과 관린은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며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아, 벚꽃 짜증 나게 예쁘다.”

“좀 구경하다 갈래요?”

커피를 사서 벚꽃이 제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본관 앞으로 갔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학생들로 복잡하다. 둘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또 동시에 한숨을 뱉었다. 학교 스피커에서는 벚꽃 엔딩이 흘러나오고 학생들은 즐겁고.

두 손을 뒤로 짚고 앉아 있던 지훈이 가방에서 종이랑 연필을 꺼낸다.

“뭐 그려요?”

“꽃.”

“우와.”

“너도 그려줄까?”

기분 좋은 연필소리가 난다. 평소와는 달리 되게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며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심장이 쿵쾅거려 혼났다. 그걸 보며 까르르 웃는 박지훈과 흩날리는 벚꽃. 그게 더 그림같아서 자꾸만.

“자, 다 그렸어.”

근데 좋았던 분위기 와장창. 한참 있다 스케치북을 보여주는데, 뒷통수가 얼얼했다. 내가 어딜 봐서 이렇게 생겼어요, 형…

작화붕괴도 이런 작화 붕괴가 없다. 대혼돈에 빠진 관린에게 눈치 없는 지훈은 지난 습작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아아, 그러고보니 비실기 전형으로 들어왔다던 지훈의 교지 인터뷰가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그 오빠 엄청 노력형이거든’ 하던 숏컷 여자애의 말도 머리를 스친다. 노력한 게 이 정도면 예전엔 대체 얼마나 더 못 그렸다는 거지. 뭐라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지훈이 그린 그림을 부욱 찢어 관린에게 내민다.

“선물이다!”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고마우면 담에 밥 사든가.”

“네… 고마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특히 눈보다 큰 콧구멍이 기괴하군’ 생각했다. 내 이목구비가 박지훈 눈에는 이렇게 보이나 싶어 좀 시무룩하기도 하다. 어딘가에 꽂아두려고 전공 책을 펼쳤다. 때마침 그림 위로 벚꽃 잎이 떨어진다. 고개를 드니 바로 위에 있는 벚나무에서 꽃비가 떨어져 날린다.

미세먼지 없이 모처럼 해맑은 하늘. 햇살에 간지러운 이마. 적당한 온도의 봄바람이 아른거리고, 손에는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 옆에는 진지한 얼굴로 사각사각 못생긴 그림을 그리는 박지훈.

“왜 웃어?”

지훈이 관린을 본다. 겨우 참았던 웃음이 꽃망울처럼 터졌다.

형, 내가 왜 웃냐면요.

 

 

epilogue.

 

W 대학교 교지

2018.09 가을호 / 표지 모델 인터뷰 / 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18학번 라이관린

# 동화책을 찢고 나온 게 분명하다. 눈망울에 오조 오억 편의 동화가 담겨있는 가을 장마 같은 남자, 신방과 라이관린 학우를 만나봤다.

 

Q. 모델 같다. 체구도 패션도 남다른데.

A. 옷 입는 거 좋아해요! 아침마다 뭐 입을지 고민하는 것도 즐겁고.

Q. 오늘 패션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A. 음. 다크… 블랙? 아, 모르겠어요. 어려운데. 이런 것도 말해도 돼요? 지금 입은 레이더 재킷은 선물 받은 거에요. 잘 어울리죠.

Q. 혹시 애인한테? 캠퍼스에서 꽤 유명한 CC라고 들었다.

A. 맞아요. 얼마 전에 우리 100일이어서! 아, 우리 유명한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루종일 붙어 다녀서 꼴사납다고 유명해진 건가 (웃음)

Q. (….) 이왕 시작한 거 자랑 하나만 더 해 달라.

A. 어… 제 애인요? 너무 많은데. 아, 미안해요. 하나만 골라야 되는 거죠. 그러면 그림요! 그림 되게 잘 그려요 (웃음) 한번 보실래요?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