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w. 마들렌

 

 

* ‘판윙 온리전: 오월에 내린 장마(THE RAINY SEASON OF MAY)’를 준비해주신 운영진분들과 참가 부스러님들, 그리고 귀중한 시간 내어 온리전에 걸음 해 주실 우리 모든 소비러님들께 이글을 바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된 점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금 전하며, 이미 흥한 것 같은 온리전이 제대로 흥하길 기원합니다. 판윙 포에버!

 

 

 

 

 

 

 

 

 

 

“Jihoon! Jihoon! Où est-il?” 지훈! 지훈! 그 어디 갔니?

“Il ne sert à rien de le trouver.” 찾아봤자 소용없어.

“Allons donc. Est-il allé là encore?” 설마. 또 거기 갔어?

“Il est comme un étudiant en littérature anglaise. Si vous voulez le rencontrer, vous devez aller là-bas. Shakespeare…….” 내 생각에 그는 거의 영문학과나 다름없어. 그를 만나고 싶거든 그리로 가봐. 세익스피어의…….

“D’accord, d’accord. C’est assez.” 오케이, 오케이. 그 정도면 됐어.

푸른 눈의 남자에게 금발의 곱슬머리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정작 대화 속 주인공은 그곳에 없었다. 대화를 나눈 이들의 사이로 따스한 봄바람이 휙 불었다.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었다.

 

 

 

 

 

 

 

 

 

 

꽃비 ; 오월의 장마

당신 곁에 꽃으로 오겠습니다.

 

 

 

 

 

 

 

 

 

1

 

 

 

“흐응응 흠-”

푸른 눈과 녹색 눈, 금발과 빨간 머리들 사이로 고동색 눈동자, 다갈색머리통이 비죽이 드러났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는 2층으로 이동했다. 들어선 순간부터 절로 흘러나온 콧노래가 멈출 줄을 몰랐다. 1층에만 벌써 두 시간을 있었다. Shakespeare and Company. 좁디 좁은 헌책방은 평소에는 한산한 편인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붐볐다. 남자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근처 기로스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남자의 일과는 그러했다.

 

지훈은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와 있었다. 9월에 왔으니 온지는 벌써 6개월이 넘었다. 파리의 가을과 겨울을 나고 이제 봄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혹자는 낭만의 도시라고 했고 혹자는 자유의 도시라 했다. 지훈은 매일매일 그 모든 것을 몸소 느끼고, 누리고 있었다. 파리의 가을학기는 낭만적이고 자유로왔다. 동서양이 문화적으로 크게 다른 것과 달리 미의 기준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국에서 잘생긴 얼굴은 프랑스에서도 통했다. 교환학생을 오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에라스뮈스에서 알려졌다. 이목구비가 서양인처럼 또렷하면서도 그 눈매가 정말 특이한 남자. 마치 수많은 별이 박힌 것 같아 우주가 담긴 듯한 눈은 쳐다보고 있으면 5초도 안되어 반한다며 교환학생들 사이에서 ‘Just 5 seconds’ 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결국 잘생긴 남자에 대한 소문은 학교 전체에 퍼질 지경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수없이 잘생겼다는 말을 듣던 그였기에 그런 일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내심 올 것이 왔군 싶었다. 그러나 그 덕에 연극부에서 스카우트제의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다.

“나 불어 그 정도로 잘은 못해서.”

“괜찮아.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돼.”

교환학생의 경우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수강했기 때문에 불어는 간단한 일상용어만 알았다.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불어를 못해도 상관없다는 투의 대답에, 한국보다 외모지상주의가 심하네.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연극부 부장 여학생이 지훈에게 반해서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이미 지훈이 연극부에 들어가고 나서 공연을 한 번 해낸 시점이었다. 그로인해 지훈은 에라스뮈스에서 뿐만 아니라 학내에서 유명해졌다. 잘생기고 이국적인 사람을 홀리는 소년. 청년의 나이인데도 친구들은 종종 그를 소년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파리의 학부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소년’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지훈은 클럽활동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연애를 하지 않고도 말이 매우 빨리 늘었다. 그러니 여러모로 학교생활이 편해졌다. 학교 행정실에 가도 영어를 못하는 직원으로 인해 곤혹스러울 필요가 없었다. 불어 수업을 청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사실 프랑스어를 못하더라도 매일이 낭만이긴 했다. 그러나 불어를 잘하게 되자 지훈에게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그가 이 서점에 빠지게 된 것은 지난겨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나자 금세 연말이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다. 떠들썩한 파티들이 끝나고 나니 왠지 마음이 공허해진 탓이었다. 유래 없이 많은 눈이 오는 파리의 거리를 지훈은 하릴 없이 걸었다. 기숙사에서 나와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나 센강을 따라 걸어 루브르까지 갔다. 강바람이 차게 느껴졌지만 빨리 걸어서 인지 그 열기로 몸이 덥혀져 추위를 잊을만했다. 에펠탑까지 걸을 까 잠시 생각했지만 걷기엔 역시 멀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고민 끝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지훈은 곧 후회했다. 루브르에 들러 잠시 몸이라도 녹일걸. 생각보다 찬 바람 덕에 덥혀진 몸이 금세 식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추위와 맞서 싸우며 걷다보니 기숙사에 거의 다 와갈 때쯤 눈에 들어왔다. Shakespeare and Company. 가이드 북에서 보았던 곳. 처음 교환학생을 왔을 때 호기심에 가보았지만 불어로 된 서적을 보고는 그 뒤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추워서 였기도 했고, 이제는 불어를 어느 정도 알아서 이기도 했다. 발을 들인 이유는.

그렇게 들어선 그곳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지훈이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불어로 된 책을 읽었던 것은 어쩌면 우연이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영미문학을 주로 파는, 그러니까 주로 영어로 된 책을 파는 곳이었다. 지훈은 자신이 맨 처음 발견했던 책이 아직도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그 책은 그가 기억하는 위치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어린왕자』였다. 어떤 페이지는 뜯겨나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낡은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그 종이의 질감이 사랑스러워 바로 그 책을 사고야 말았다. 그 뒤로 지훈은 매일 같이 헌 책방으로 갔다. 한 나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기어이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내는 날이면 그는 기분이 좋아서 곧장 기숙사로 가 그 책을 붙잡고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센강 가를 거닐며 초록 노점에서 파는 예쁜 그림과 사진들을 늦도록 구경하다가 야경까지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돌아오곤 했다.

“흐으응-”

저 자신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줄 모른 채 지훈은 이제 2층 탐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또 신기한 것이 없으려나. 두리번거리며 책을 조심스레 뒤적거리던 지훈에게 매우 두터운 앨범처럼 생긴 조금은 커다란 책이 보였다. 지훈은 책을 꺼내들고는 책장 앞에 붙은 자줏빛 쿠션이 깔린 오래된 나무의자에 앉았다. 그 동작이 사뭇 익숙해보였다. 책을 살며시 들고는 한 번 후 하고 먼지를 불어내자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하얀 햇살에 책 표면의 먼지가 흩날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갈색인 것도 같고 짙은 와인 색인 것도 같은 책표지는 금박으로 테두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이름 모를 꽃이 역시 금박으로 박혀있고, 그 위에는 제목인 듯 영어가 쓰여 있었다. 「The True Love」

‘이게 뭐야. 진실한 사랑? 정말 옛날 앨범같이 생겼네.’

뒤에 사진이라도 나오려나 생각하며 지훈은 책장을 열어보았다.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For you who love flowers.’ 꽃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지훈은 설마 하고 그 다음 장으로 책을 넘겼다. 그리고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식물, 그리고 그 옆으로 빼곡히 적혀있는 설명들. 그것은 가드닝 북이었다. 지훈은 오랜만에 기쁨의 미소를 얼굴에 가득 걸고는 약간 무거운 책을 품에 안아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네. 네 여긴 괜찮아요. 할 만합니다. 네 걱정마세요. 그럼.”

탁자 위 고풍스러운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는 남자의 손가락이 희고도 길었다. 전화를 끊고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내뱉은 그것에 저가 놀라고 만다.

영국으로 온지 벌써 일 년. 잉글랜드 셰필드에 위치한 국립 종합대학교. 이곳에 관린은 가드닝을 배우기 위해 왔다. 말하자면 유학이었다. 세계적인 가드너가 되기 위해 오는 곳이라지만 관린은 딱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운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관린의 집안은 대대로 아들을 꺼려했다. 뱃속에 아이를 잉태한 여자들은 모두 딸을 낳기를 소망했다. 아들인 경우 미리 낙태 시술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남자는 드물었다. 아이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는 남자가 드물고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로 드물기 때문이었다.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아들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아도 아들은 태어났다. 가문의 멸족은 허락된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린은 그런 와중에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운명에 맞서려 원예학과를 지원했다.

저주였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떠한 계기에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저주였다. 언젠가 먼 옛날부터 라이 가문에 걸린 저주. 그것은 사랑을 금하는 것이었다. 라이가(家)의 남자는 첫사랑과 정을 통하면 나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디서 어떤 나무가 되는지, 어떻게 그 저주를 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라이가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자신이 나무가 되고 심지어는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 조차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잊혀지는. 그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피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후손을 잇기 어려워졌다. 아이가 생기더라도 아비가 없어졌다. 아비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더욱 슬픈 일이 되었다. 사랑 없이 낳은 아이라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아비 없는 아들을 낳은 여자들은 그 나름대로 불행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가 누군가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감정이며 세상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떤 때는 자신이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 어쩌면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괴로운 일은 라이가의 남자에 국한된 일이었다. 라이가의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아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로지 라이가의 남자만이 사랑에 빠지면 나무가 되었고, 오로지 라이가의 남자를 사랑한 여자만이 후일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짊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린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관린의 어머니는 어디선가 나무가 되었을 자신의 남편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분했다.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런 가문에서 남자로 태어나다니. 그래도 관린은 어머니가 남편을 그리며 그러하듯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관린이 태어난 것도 결국은 멸족을 허락하지 않는 운명의 일부겠지만, 관린은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항상 하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너희 아버지는 그 날 밤 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꼭 관린(冠霖)이라고 이름을 지어 달라 하셨어. 사랑을 흠뻑 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기에 나에게 너를 마지막 선물로 남기신거야. 네 미래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마 그 사람이 내게 준 선물을 내 손으로 없앨 수는 없었단다.”

관린은 자신이 이런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은 원망스러웠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가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가문의 몇 안 되는 제 또래 남자아이들은 저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를 원망하며 엉망진창으로 삶을 살아갔다. 그런 아들을 보고 눈물 짓는 어머니들. 관린은 생각했다. 이 원망스러운 운명을 바꾸어야겠다고. 그 동안 바보같이 손도 못쓰고 당해버린 조상의 조상들까지 대신하여 내가 그것을 해보이겠다고.

단서가 너무 적었다. 나무가 된다는 것. 그것도 누군가의 입에서 구전되고 구전된 것이었다. 실제로 라이가문 남자가 정말 나무가 되는지 목격한 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보아도 그런 이야길 들었다고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손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날로 관린은 가문의 본가에 눌러앉았다. 이쪽에 있는 하이스쿨을 다니고 싶다는 것이 핑계였고 사실 그래야 했기도 했다. 시기가 적절했다. 가문에서는 아들로 태어난 자들 중 가장 멀쩡한 관린에게 관심이 많았고, 가문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관린의 교육에도 열을 올렸다. 본가에 들어와 살며 인근 사립학교를 다니길 가문에서 원했다.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운명을 바꾸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본가에 들어와서 관린이 한 것은 집안의 창고나 서재를 뒤지는 일이었다. 이렇게 까지 단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분명 무언가 하나쯤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을 넘게 찾아보아도 그런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포기하고 있을 쯤,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저주를 건 사람이 영국인이었다고. 저주가 언제부터 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관린은 잘 몰랐다. 본가에도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 영국인이라면 영국에 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영국에서 뭘 배우면 좋지. 처음에는 그런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가문의 수장(首長)인 숙부의 심부름이었다. 자신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있는 수첩을 가져오라는 별거 아닌 심부름. 관린은 숙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얽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숙부는 현 세대 라이가(家)에서 자식이 있는 대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엉망인 사촌들. 숙부의 자식은 엉망인 사촌들 가운데서도 가장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였다. 그 때문에 제 자식이 있는데도 숙부는 저를 마음대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가문에서 가장 유력한 자를 아래 두는 것이 가문의 권력을 차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숙부는 저주를 푸는 것보다는 가문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흔드는 데 제일 관심이 있는 자였다. 때문에 관린으로서는 일단 숙부에게 휘둘리기가 싫었다. 게다가 숙부의 자식인 라이진은 꼴에 자존심이 무척 센 녀석이어서 자신이 저주를 풀어보겠다고 나서면 얼마나 방해를 해대려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숙부가 저가 아닌 관린을 아끼는 것에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이유들로 관린은 최대한 숙부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학교 행사로 일찍 집에 도착한 날 숙부와 맞닥뜨린 것이다.

어두운 갈색의 고풍스러운 나무문. 본가의 방문들이 다 이러했지만 숙부가 쓰는 개인서재의 방문은 좀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금빛의 문고리를 잡고 돌려 방문을 살짝 열었다. 순간 관린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뒤져보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저주를 푸는데 관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혹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왜? 저주를 풀어야 하는데 그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지 않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어지러워진 머리를 한 번 저어보이고 관린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꽤 넓었다. 약간은 푹신하고 붉은 문양이 새겨진 카펫타일이 깔린 바닥과 앤티크한 탁자와 의자들. 책장들마저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서랍을 열다 말고 관린은 잠시 멈칫했다. 맨 아래의 서랍장에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아 네. 숙부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셔서.”

“그러셨군요.”

숙부의 개인비서가 들어오는 바람에 마지막 서랍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가(家)는 먼 옛날부터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 재력가였다. 더 이상 무역업을 하지는 않지만 재산 유지에 신경을 쓰는 만큼 보안이 철저했다. 특히 가문을 이끌어가는 숙부가 사용하는 서재는 더 그랬다. 결국 관린은 집을 떠나오는 때 까지 그 서랍을 확인하는 것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은 본가로 오면서 자기 집에서 데려온 사람인 왕칭에게 마지막 서랍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충성스러운 그는 결국 그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정말 별거 아닌 종이 쪽지였다. 서랍을 뒤지다가 발견한 아주 낡은 일기장을 보다가 그 째로 가지고 나오는 것에 실패하여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얼른 찢어왔다고. 거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글귀라곤, 「그 자를 만나야 겠다. 에드워드 K. 윌튼.」 이게 다였다. 그 날 이후 그 방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관린이 알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그 이름이 다였다.

하지만 별 것이 아닌 것인지 몰랐다. 영국 사람이 건 저주라는 소문. 그리고 발견한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 관린의 영국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둘 사이에 영국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관련성이 없었고, 그 일기의 전체를 읽지 못한 이상 그것은 그저 숙부가 옛날에 써놓은 것일 지도 몰랐지만, 왠지 영국에 가면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문에 뭐라고 하고 가지. 무슨 공부를 하지. 관린은 가문에 자신이 저주를 풀기 위해 영국으로 가는 것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둘러댈 무언가가 필요했다. 학업에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지런 했다. 시끄러운 머릿속 잡념을 없애기에는 공부만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곧 나무가 될지도 모르는 인생인데 그다지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만일 정말 나무가 되는 거라면 적어도 나무마다의 특성은 알아야 하지 않을 까. 단순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말하면 그저 저주 내린 나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싶기도 했다. 영국에서 나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학과. 어쩌면 나무가 아닐 수도 있으니 나무, 식물, 꽃. 비슷한 모든 것의 생태를 알려면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래서 택하게 된 것이 바로 원예학과였다.

숙부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나무가 될 거라면 나무에 대해 배우고 싶네요. 처음엔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은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포기로 가장한 유학길에 올랐다. 관린은 겉으로는 친구들과의 파티도 가고 명품 옷과 시계, 구두들로 자신을 치장하고 다니는 척 행세하면서 그 돈을 빼돌려 조사를 했다. 그러나 쉽진 않았다. 왕칭에게 홍콩과 영국을 오가게 시키며 그 이상 소문이 없는지 알아보았다. 한편으로는 에드워드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정말 흔다히 흔한 이름이었고 저주에 대한 소문은 더 이상 돌지 않았다. 답답했다.

가문에서는 2주에 한 번 꼬박 전화를 해 관린이 잘 지내는 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왔다. 모든 것이 가문의 멸족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관린은 치가 떨렸다. 그러나 치가 떨리기 이전에 한숨이 먼저 나온 것은 온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영국의 봄바람이 살랑 불어들었다.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훈은 한 장 한 장 책을 조심스레 넘겼다.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누런 책장은 꽤 두꺼워 양피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맨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나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였다. 나무에 나는 꽃 향이 좋아서 그래서 좋아하는 나무였다. 나무가 가장 좋아하는 기후와 토양, 묘목을 언제 심는 것이 좋은지, 정원에 어느 편에 두는 것이 아름다운지, 가지치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등 상세한 내용들이 섬세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나무에 꽃이 언제 피는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쓰여 있었다. 심지어 꽃에는 색칠까지 되어 있었다. 와 진짜 정성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훈은 그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지훈이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꽃나무가 있었다. 와 신기하다. 어쩜 순서대로 있지? 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그마한 손을 들어 꽃그림 위에 대어 보았다. 핑크빛으로 칠해진 꽃 위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슬어보았다. 그저 그림일 뿐인데 마치 진짜 꽃잎을 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바깥에도 온 봄이 책안에도 왔구나.

지훈은 도시공학과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지훈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역은 도시의 조경이었다. 지훈이 꿈꾸는 도시는 SF 영화에 나오는 휘황찬란한 미래도시도, 높다란 건물이 가득한 뉴욕이나 상하이 같은 도시도 아니었다. 지훈은 숲이 있는 도시를 꿈꾸었다. 나무와 꽃이 가득하고 새소리가 자연스러운 그런 숲이 있는 도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지훈이 지금까지 유년시절을 보내고 살아온 집은 꽃나무와 과일나무가 꽤 여러 그루 심겨있고 새소리가 늘 상 나는 전원주택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봄이면 새로 돋아나는 연둣빛 잎사귀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스미는 햇빛을 보며 웃음 짓는 것도, 가을이면 과일나무에서 과실을 따다 먹는 것도, 겨울이면 눈이 쌓인 가지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을 맞는 것도. 그 모든 게 당연했기 때문에 지훈은 도시에 숲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조경학과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지훈이 부러 도시공학과를 선택한 까닭은 실제로 도심 속 조경을 가능케 하려면 조경사보다는 직접 도시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도시공학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도시계획 단계에서 조경이 빠지면 아무리 조경사가 된다 한들 소용이 없다. 지훈은 도시공학자가 되어 자신이 설계하고 계획하는 도시 만큼은 조경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되게 할 거라고 다짐했다. 가드닝은 조금 다른 영역이기는 했지만 조경에 관심 있는 지훈이 알아두면 좋을 분야였다.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지훈이 여느 때 보다 더욱 뛸 듯이 기뻤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나무와 꽃들만이 가득해서 지훈은 그게 참 신기하던 차였다.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냥, 꼭 이 책이 자신을 위한 책인 냥 싶어 이상하면서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문득 지훈은 이 책을 만든 사람이 궁금해졌다. 속지가 전부 직접 쓴 글인 걸로 미루어 보아 출판사에서 획일적으로 찍어낸 책은 아닌 것 같았다. 내지가 약간 빛이 바랜 것이 오랜 시간 전에 만들어진 책인 것 같았다. 지훈은 얼른 책등을 살펴보았다. 에이. 책등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지은이가 분명 적혀 있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저 책을 다 읽기도 전에-너무 두꺼워서 다 보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맨 마지막장을 열어보았다. 응? 봉투가 붙어있었다. 씰링왁스로 봉해져있는 낡은 봉투. 씰링왁스 위에 찍힌 인장은 알파벳 ‘E’였다.

‘뭐지? 안에 뭐가 들어있나?’

아무래도 종이에 붙어있어서 편지봉투를 뜯어내지 않고서야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열어봐도 되는 거겠지?’

지훈은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내가 샀으니 내거지 싶은 마음이 우세했다. 봉해진 부분을 뜯어내려 손을 가져다 대자, 봉해진 줄 알았던 부분에 슬쩍 틈이 생겼다.

‘뭐야. 원래 열려있던 건가?’

조심스레 봉투의 윗면을 들어 열어보았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접이식으로 되어있는 봉투여서 벌리기가 쉬웠다. 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넣어 봉투 속 그것을 꺼내들었다. 꽃이었다. 말린 꽃. 아주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꽃이 있었다. 이게 이렇게 오래 보관이 가능한 건가? 아무리 말렸다고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든 말린꽃을 보고 있을 때였다.

“헐!”

지훈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말라있었다. 분명 그랬다. 꺼내어 들었을 때만 해도 말린꽃이었다. 이상하게 점점 생기가 도는 것 같은데,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바랬던 색이 돌아왔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말라서 곧 바스라질것만 같았던 빳빳했던 이파리가 초록으로 파릇해지더니 축 늘어졌고 꽃잎하나하나가 오통통하게 제 모습을 찾았다. 그러더니 향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거짓말같이 말랐던 꽃이 가지에서 막 딴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 손이 닿더니 되살아났어!

“오마이 갓!”

지훈은 조용히 내뱉었다. 아 이걸 어쩌지. 그래 물. 물을 주자. 꽃을 든 채 지훈은 부엌으로 갔다. 왠지 손에서 놓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계속 한 손에 꽃가지를 든 채 나머지 한 손으로 얼른 아무 기다란 컵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꽃가지를 꽂았다.

“휴.”

절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아기 고양이라도 구한 것 마냥 지훈은 마음이 괜스레 뿌듯했다. 책상위에 놓고 요리조리 봐도 꽃은 정말로 막 따온 성 싶어 신기했다. 향이 엄청 좋은데. 이거 이름이 뭐였더라. 새하얀 꽃송이가 탐스럽게 열려있는 매혹적인 향의 꽃. 지훈은 꼭 꿈을 꾸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꽃에 정신이 팔려 이 책을 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지훈은 다시 침대로 가 내려놓았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정말로 맨 마지막 부분. 거기에 날짜와 함께 쓰여 있었다.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힌 이름. Edward K. Wilton. 에드워드 K. 윌튼. 에드워드?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책을 만들었을까? 엎드려 있던 몸을 바로 하고 벌러덩 누운 채 지훈은 두 손에 힘을 주어 책을 들어올렸다. 으. 무거워. 안되겠다. 하마터면 책을 떨어트릴 뻔 했다. 다시금 책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엎드렸다. 처음 책을 봤을 때만 해도 그저 가드너였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 그냥 가드너였을까? 근데 저 꽃은 뭐야. 내 손이 닿자마자 살아나 버린 저 꽃은 뭐냐고! 지훈은 이 사람이 더욱 궁금해졌다. 구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윌튼. 일단 책이 쓰여진 시기가……. 마지막장에 분명 1843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때는 살았단 거지.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영어로 에드워드 윌튼과 함께 숫자를 적어 넣어 보았다.

“잉?”

에드워드 윌튼의 가계도들이 나왔지만, 해당 연도에 에드워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 연도에는 에드워드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 새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내일 오전 수업인데!”

지훈은 노트북을 그대로 켜놓은 채 침대위로 쓰러졌다. 노트북 옆에 꽂혀있는 꽃가지에서 꽃잎하나가 별안간 책상 위로 떨어졌다.

 

 

 

 

“Last class, I gave full details of foliage. Do you remember? So, today…….” 지난 시간에는 관엽식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렸습니다. 기억나세요? 오늘은…….

“Hey, Edward.” , 에드워드!

“…….”

“Hey, hey!” , !

자꾸만 말을 거는 벤에게 관린은 검지를 들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고는 다시 수업에 열중했다.

“Finally, flowering plants.” 드디어 꽃나무에 대해 배울 거에요.

관린은 대학노트에 칠판에 빼곡히 적혀가는 필기를 받아 적느라 바빴다. 꽃나무. 나무가 된다. 사랑을 하면 나무가 되고 만다. 어떤 나무일까. 관엽식물일까 아니면 꽃나무일까. 그도 아니면 관엽식물이라지만 꽃이 피는 종이려나. 나도 나무가 되려나? 그러려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데.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까? 이 내가? 비교적 다른 사촌들보다 빨리 제 운명을 받아들였던 관린은 좀처럼 남에게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딱히 저주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태생이 그러했다. 친구도 딱히 많이 사귀는 타입이 못되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못 되었다. 그 외모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딜 가나 존재감이 있었고 사람이 따랐지만 정작 관린 자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도, 즐기지도 못했다. 그저 혼자가 편한 삶. 어쩌면 다행인지 몰랐다. 조금은 웃기는 말이지만 관린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고 부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예쁘다하는 여자를 봐도 끌리거나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눴던 사랑은 그 진실함 자체로 존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관린은 사랑을 하기 위해 저주를 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주 그 자체에 대한 분노가 존재했을 뿐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꽃나무와 관련하여 그다지 유명하진 않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드너가 있어요.”

“야 이것 좀 보라고.”

“조용히 하랬잖아 벤.”

“1800년대 홍콩에 가드닝 문화를 들인 사람이죠.”

“아 글쎄 이거 좀 보라니까.”

“바로 에드워드 K. 윌튼입니다.”

교수는 칠판에 판서를 마치고는 돌아섰다. 칠판에 커다랗게 ‘Edward K. Wilton’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백묵으로 쓰인 새하얀 이름. 곧 그 이름이 뿌얘지더니 교수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에드워드…… 라고? 관린은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렇게 찾던 에드워드가 강의에 등장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예상해 보지 못한 전개였다. 놀란 나머지 조금 멍해져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쿡쿡 팔을 찔러왔다. 벤이 공책을 내밀었다.

“그거 봐 이거 보라고 했잖아.”

깔끔하게 필기가 된 공책에서 벤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드워드 K 윌튼.

“에드. 너랑 이름 똑같지?”

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강의가 끝나고 관린이 묻자 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 클라우디 알지? 전체수석 했던!”

이곳 가드닝 스쿨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전설의 전체수석. 그녀가 졸업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웬만한 교수보다 더 유명할 정도였으니 알만 했다. 처음 관린이 이곳에 입학했을 때도 교수이름보다 그 이름을 먼저 들었었다. 관린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벤이 말을 이었다.

“아까 플라워 교수 말야. 이 교수 수업 A 안 나오는 거 알지? 유일무이하게 A0 받은 클라우디의 필기노트가 바로 요거다 이 말씀이야.”

“그걸 어떻게?”

“다 수가 있지. 아까 넘겨보다가 네 이름이랑 같기에 신기해서 부른 거야.”

에드워드는 관린의 영어 이름이기도 했다.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문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어 이름 중 자신의 이름은 에드워드 였다.

“그래봤자 흔해빠진 이름인걸 뭐.”

사실이었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이름으로도 성으로도 영국에서 정말 흔하디 흔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사에 진척이 없기도 하고. 너무 많단 말이야.

“그렇긴 하지.”

벤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야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냐. 이 노트가 나에게 있다는 거지. 빌려줄까 에드?”

“그걸 왜?”

“현재 스코어 A+ 에드워드 라이. 과연 이대로 클라우디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너 이거 있으면 A0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관린은 물끄러미 노트를 보았다. 지금까지 관린의 성적은 올 A+였다. 학우들 사이에서 클라우디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고맙지만 사양할게 벤. 먼저 가.”

“어?”

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걸 보고 한 번 웃어준 뒤 관린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질문이 있다고요.”

“네.”

질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은 면담 신청을 했다. 다행이 교수는 수업 이후 줄곧 연구실에 있었다.

“에드워드 라이 학생. 늘 열심히 따라 와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뭐죠?”

“에드워드 K. 윌튼에 대한 것입니다.”

“오!”

플라워 교수의 눈이 순식간에 빛을 띠었다. 온 얼굴에 반가움의 미소가 잔뜩 걸렸다.

“에드워드 윌튼. 그의 무엇이 궁금한가요?”

“그는 가드너였나요?”

“오호……. 질문이 재미있군요.”

여전히 얼굴 가득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플라워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책장으로 다가갔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햇빛에 교수의 금발머리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태 그걸 물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클라우디 마저도요.”

교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책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익숙한 이름에 관린은 순간적으로 놀란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놀랄 수도 있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클라우디는 이 학교 모든 교수도 총애하던 학생이었어요. 나 또한 그랬죠.”

교수는 낡은 책 두 권을 들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권을 관린에게 내밀었다.

『Gardening of Hongkong』 책 제목은 그러했다.

“홍콩의 가드닝에 대한 책입니다. 거의 첫머리에 그에 대해 쓰여 있죠.”

관린은 두터운 책장을 열어 목차부터 살폈다. 가드너들의 이름이 있었다. 에드워드 K. 윌튼… 에드워드… 윌…튼. 이상했다. 목차에는 에드워드 윌튼의 이름이 아예 없었다.

“목차에는 없습니다. 첫 장을 펴보세요.”

“첫 장이라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교수를 한 번 쳐다보고 난 뒤 관린은 페이지를 넘겼다. 말머리를 지나 첫 장이 나왔다. 홍콩의 가드닝은 약 1800년대 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서양식 가드닝을 말한다. 1841년 홍콩이 영국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당시 영국에서 가드닝에 관심이 많았던 관료 한 명이 홍콩에 오게 된다. 그가 바로 홍콩에 영국식 가드닝을 처음으로 전파한 에드워드 K.윌튼이다. 윌튼은 1841…….

정말 있었다. 홍콩에 가드닝 문화를 전파한 사람. 그런데 가드너라는 말이 없다. 낡은 종이냄새가 나는 책은 윌튼을 그저 ‘가드닝에 관심이 많았던 관료’ 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뒤이어지는 문장을 읽어보았다.

윌튼은 1841년 여왕의 명을 받아 홍콩에 왔다. 그가 가드닝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홍콩에 오기 전 여왕에게 가드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홍콩에 오자마자 자신의 정원을 살피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 덕에 영국의 가드닝이 홍콩에 전파될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장을 더 읽어 보아도 더 이상 에드워드 K 윌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가드너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이 책에 윌튼에 대한 내용은 그게 전부입니다.”

“네?”

“이것도 읽어보겠어요?”

의아해 하는 관린에게 교수는 다른 책을 내밀었다. 아까의 책보다 좀 더 낡은 책이었다. 포스트잇이 붙여진 부분을 보면 돼요. 교수의 말에 바로 그 장을 펴보았다.

에드워드 K. 윌튼은 당대 여왕이 가장 믿었던 자로, 관료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여러 중요한 일에 있어 활약했다. 그가 홍콩으로 가게 된 것 역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여왕이 믿고 맡겼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여왕이 그를 믿는 이유에는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제기 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어떤 것 같나요? 답을 찾아냈나요?”

아직 그 부분을 채 읽기도 전에 플라워교수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관린은 자꾸만 눈길이 가는 그 책으로부터 간신이 눈을 뗀 후 교수를 보고는 답했다.

“가드닝을 즐겼던 걸로 봐선 가드너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본업이 가드너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교수의 초록빛 눈이 반짝거렸다.

“한 쪽에선 관료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아니라고 하고 있죠.”

“그렇지만 본직이 가드너도 아니니까요.”

“맞아요. 그는 가드너가 아니었어요. 가드닝을 사랑했지만 본업은 따로 있었죠.”

교수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1층에 연구실을 둔 교수는 자신의 창밖의 화단을 직접 관리하곤 했다. 화단을 가득매운 탐스럽게 핀 노오란 수선화를 바라보며 교수가 말했다.

“클라우디가 A+를 받지 못한 이유를 알겠나요?”

갑자기 클라우디 얘기라니. 관린은 여전히 화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교수를 한 번 보고는 얼른 책의 뒷부분을 읽었다.

“클라우디는 답안지에 그의 본업이 가드너라고 썼죠. 아마 내가 수업시간에 단순히 가드너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그렇게 썼겠죠. 그 이상 찾아보거나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전문 가드너가 아니어도 가드닝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요.”

“네.”

관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책을 계속 읽어 내렸다. 관린의 동공이 점점 더 커졌다.

“흥미롭지 않나요?”

갑자기 제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관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교수는 다시 자리에 와 앉아 관린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행이 여전히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로.

“마법이라니 말입니다. 그가 자연의 순리를 기다려 꽃을 피워냈을지, 아니면 마법으로 꽃을 피워냈을지 궁금해 하던 시절이 있었죠. 만일 내가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도요.”

말을 마친 교수님의 초록빛 눈이 순간 번쩍하고 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이 느껴져 관린은 화들짝 놀랐다.

교수실을 나오며 관린은 생각했다. 책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 바로 마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분으로 관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면 자신이 찾아 헤매던 저주를 내린 그 자가 윌튼인지 몰랐다. 관린의 온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어디로 가시는 건데요?”

희뿌연 안개가 가득 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 앞에 걸어가는 남자의 옷자락만이 살짝 살짝 보일 뿐이었다. 청록색의 옷자락.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으로 지훈은 헉헉 대고 뛰며 따라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뛰고 있음에도 그 자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순 안개가 걷힘과 동시에 남자도 사라졌다. 지훈의 눈앞에는 초록색 지붕을 한 집이 있었다. 2층? 다락까지 하면 3층은 되어보였다. 그러나 매우 크다고 보기도 어려운 규모의 집. 오히려 그 규모에 비하면 아담한 느낌이 들었다. 파란색 문 앞을 서성이고 있을 때 청록색 옷자락이 집 뒤편으로 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앗! 지훈은 그 옷자락을 따라 집 뒤편으로 향했다.

“어?”

지훈은 놀라서 입 밖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작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은 바로 그 꽃이었다. 그 꽃? 무슨 꽃이지? 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청록색의 체스터필드 코트의 남자. 하얀 꽃이 잔뜩 피어있는 그 나무 곁에 뒤를 보인 채 그가 서 있었다. 금발의 머리칼이 봄바람에 나부꼈다. 저기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래. 왜 안 움직여. 안간힘을 쓰는데 그가 느릿하게 돌아서려 했다. 천천히 구둣발이 먼저 자신을 했고, 돌아서는 다리가, 팔이, 그리고 그 얼굴은.

아! 맞아 그 꽃이야!

생각들이 머릿속에 꼭 파도가 치듯 들이쳤다. Shakespeare and Company에서 발견한 낡고 두터운 가드닝 책을 발견하던 모습, 직접 그리고 쓴 꽃나무 그림과 글에 감탄했던 순간, 맨 뒤에 붙어있던 종이봉투, 거기 있던 말린 꽃, 제 손에서 그것이 다시 생명을 얻었고 급하게 물을 떠오던 제 모습들……. 그런 것들이 와다닥 장면들을 이루며 쏟아졌다. 그래 그 꽃이었어! 그 순간 완전히 돌아선 남자의 얼굴 앞에 환한 빛이 쳐들었다. 어? 잠깐만요! 잠깐만요!

“헉. 헉.”

꿈이었다. 꿈이란 것을 자각해서 깬 걸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니 그전에 뭐 이런 꿈이 있어. 설마 지금까지 모든 일이 꿈은 아닐까. 그렇다기엔. 지훈은 정면에 위치한 책상을 보았다. 책상 위에는 꿈에 나왔던 그 하얀 꽃가지가 물에 꽂힌 채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생명력을 자랑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자각한 꽃향기에 꿈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다. 근데 정말 아니라니. 책상위에 활짝 펼쳐진 채 놓여진 두꺼운 가드닝 책이 모든 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지훈은 계속 생각했다. 꿈속의 그곳.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래서 낯설었다. 하지만 왜 계속 생각이 나는 걸까. 그리고 그곳에 서 있던 꽃나무. 그건 분명 자신이 컵에 꽂아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무얼까. 이건. 다음 날도 지훈은 같은 꿈을 꾸었고, 여전히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깨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은 안개가 좀 더 일찍 걷혀서 길의 정경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7일간 계속 같은 꿈을 꾸었다. 조금씩 조금씩 안개가 더 걷혀 이제는 그 집으로 가는 길을 모두 외울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이 어딘지 찾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딜까. 그리고 7일 째가 되는 날 아침 지훈은 다른 때보다 더 헉헉 거리며 일어났다. 보았다. 그 얼굴. 그 눈을. 외국인 이었다 분명히. 그리고 지훈은 깜짝 놀랐다. 날로 더욱 파릇해지는 것만 같았던 꽃이 사라져있었다. 그 자리엔 없어진 꽃을 대신하듯 콩깍지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시든 것도 아니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다니. 물이 담긴 컵이 그대로인걸로 봐선 확실히 꽃이 있었던 게 맞았다. 소매가 조금 긴 잠옷을 살짝 걷으며 지훈은 콩깍지를 집어 들었다. 길쭉한 그것은 울룩불룩해서 안에 콩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콩깍지를 벗겨냈다. 콩에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H…A…M…P……. 콩은 모두 여덟 개 였다. 그리고 그 위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HAMPSTEAD. 햄스테드. 지훈은 체크무늬 잠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곧장 구글링을 했다. 수업이고 뭐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햄스테드를 검색해봤다. 미국과 영국에 있다. 먼저 미국의 햄스테드를 찾아봤다. 구글 지도를 통해 그 근처를 아무리 뒤져도 꿈에서 본 그런 길은 없었다. 아 여긴 아니야. 그 사이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지훈은 부동의 자세로 마우스만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도 여러 통 왔지만 웅웅 울려대는 진동에 단 한 번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국은 아닌 것 같았다. 영국을 찾아봤다. 영국의 햄스테드. 이미지 사진들을 보다가 발견했다.

‘여기야! 여기라구!’

분명했다. 지훈은 너무 기뻐 내적 환호를 내질렀다. 꿈에서 남자를 따라갔던 안개가 걷힌 길이 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그 집이 나와! 지훈은 신이 나서는 모니터를 다시 보았다. ‘Acacia Road’ 길 이름이 아카시아 길이었다. 아카시아 길이라고? 그래서 정원에? 그제야 지훈은 시장함을 느꼈다. 탁상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헐. 5시? 수업 다 끝났겠네.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훈의 온 얼굴은 웃고 있었다. 지훈은 얼른 부엌에서 빵 한 조각을 들고 와서는 입에 문 채 캘린더를 체크했다.

 

 

 

 

 

“네 괜찮습니다. 네.”

관린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숙부의 전화였다. 관린이 유학을 오고 나자 꼭 제가 아버지라도 된 양 가끔은 직접 전화를 했다. 관린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돈이 필요했기에 대강 대꾸해주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가 끼어 시야가 멀리까지 확보되지 않았다. 맞게 가고 있는 거겠지.

그 날 이후로 관린은 왕칭을 시켜 에드워드 K. 윌튼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기장 속 윌튼이 정말 저주를 내린 사람이었던 걸까. 확신은 없지만 정황이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라이가(家)에 몹쓸 저주를 내린 사람. 1841년, 여왕의 총애를 입고 홍콩으로 건너가 영국식 가드닝을 소개했다고 했다. 그 정도 정보만 있어도 윌튼에 대해 압축하기는 훨씬 쉬웠다. 곧 정보가 왔다. 아마 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곳이 그가 홍콩으로 가기 전에 머물렀던 곳인 것 같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관리하고는 있지만 현재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햄스테드. 런던 인근의 부유층이 사는 동네. 관린이 런던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면 살았을 지 모를 곳이었다. 지금의 학교와는 꽤 떨어져 있는 곳. 관린은 주말에 시간을 내어 햄스테드로 왔다. 그리고 ‘아카시아 길(Acacia Raod)’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라고 불릴 만했다. 안개가 이렇게 끼지 않았다면 그 정경이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하고 아름다웠을 것이었다. 이곳에 살았단 말이지.

관린이 이곳까지 직접 온 이유는 그가 살았던 집에 무언가 남아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그는 무슨 일에선지 홍콩에 살고 오래 지나지 않아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때문에 홍콩에서는 그가 살았던 곳이 어딘지 조차 알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죽을 때 까지 영국에 살았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영국에 남아있을 거였다. 제발 저주를 푸는 방법이 어디엔가 남아있길,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한 힌트라도 발견할 수 있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관린은 그렇게 아카시아 길을 지나 그의 집에 도착했다. 안개 속에 드러난 낡고 아담한 저택은 여러 해―아마도 길게는 백년이 넘게―사람이 살지 않았던 티가 나서 을씨년스럽기 까지 했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파란 나무문이 끼익하고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래도록 기름칠을 하지 않아 나는 소리가 스산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조심스레 들어가 불을 켰다. 후손들이 관리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전등불은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조금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로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만 같은 카페트가 깔려있었다. 부러 카페트위를 피해 관린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층까지 합하면 방은 총 6개. 다락까지 합치면 7개의 공간이 있었다. 관린은 왕칭을 통해 오늘 이곳을 빌렸다. 여기 머물면서 어떠한 단서든 꼭 찾아낼 거라고 다짐하니 오히려 괜스레 두려웠던 마음이 의연해졌다.

밖에서 사온 스콘으로 배를 어느 정도 채우고는 관린은 가장 먼저 서재로 보이는 곳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책도 많고 널부러져 있는 거친 종이나 양피지처럼 생긴 것들이 많아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그만큼 가장 유력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 헤매다 보니 벌써 창밖에는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관린은 왕칭을 불렀다. 서재를 뒤지는데 만 해도 하루가 넘게 걸리는 중이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에 전화를 했다. 런던 근교에서 다음 작업을 기다리던 왕칭이 얼른 합류했다. 둘이 찾으니까 한결 나았다. 그러나 그렇게 찾았는데도 저주에 관련된 것은커녕 마법에 관한 것조차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이 집이 에드워드 K. 윌튼의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료가 없어서 관린은 조금 허탈해지고 있었다. 이토록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3일째 되는 날 서재를 뒤지던 관린이 지쳐 침실을 찾아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정말 이곳이 윌튼이 살던 집 맞나요?”

“네 맞습니다.”

“동명이인이거나 그렇지는 않겠죠?”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4일 째 되는 날 집안 구석구석 모두 찾고 나서 두 번째로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마법에 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관린은 1층을 걷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발로 바닥을 굴러보았다. 쿵쿵 소리가 나는 것이 당연했지만 관린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다시금 발을 굴렀다.

“이곳에 지하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락을 찾아보던 왕칭이 관린의 부름에 1층으로 내려가자 관린이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지하실이요?”

“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입구가 없습니다. 부러 막아놓은 성 싶은데 바닥을 뜯고 다시 고쳐놓기까지 그 비용과 시간이 얼마나 들까요?”

“이 집 바닥을요?”

왕칭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곧 관린에게 일단 우리가 이 집을 빌린 시간 내에는 수행하기 어렵고 너무 오래된 집이라 바닥 공사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해서 가문에 사실을 밝히지 않고는 지원받기 어려운 금액이라고 말했다.

“그 정도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이 곳에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윌튼의 경고가 있었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집을 절대로 개조하거나 팔지 말라는 유언이 있었다고요. 언제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 모양인데 저로서는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만일 유언을 어겼다간 가문 전체가 망하게 할 거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남겼답니다. 이 집을 빌릴 때도 후손이라는 자가 부디 조심히 다루어 달라고 몇 번을 당부하던지…….”

그렇군. 관린은 확신 했다. 지금 와 있는 집은 에드워드의 집이 맞았고, 그는 자신의 가문에 저주를 내린 에드워드가 맞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이 집에 무언가를 숨겨두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를 해댔을 리 없었다. 지하실이다. 확실했다.

왕칭을 돌려보내고 5일째 되던 날 관린은 혼자 집에 남았다. 아무래도 왕칭은 홍콩으로 돌아가 다른 정보를 찾아내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집안은 다 뒤져보았고 지하실이 특별한 곳이란 걸 알았으니 나눠서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무슨 수를 써서 지하실을 개방할 수 있을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을 찾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3층 다락의 해가 잘 드는 곳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관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정원 가운데에 아직 꽃이 피지 못한 나무. 얼핏 보았을 땐 그랬다. 꽃이 피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옆에 하얀 옷의 남자가 있었다. 꿈인가? 짙은 갈색머리칼에 까만 눈동자.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 그러나 서양인은 전혀 아니었다. 분명 여긴 영국인데. 동양인인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나무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흰 옷이라니. 천사… 같은 그런 건가. 왠지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관린은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자신은 윌튼이 살던 집 다락에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다시 창밖을 통해 정원을 내다보았다. 흰 셔츠의 남자는 태연하게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정원에 가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거지?

관린은 서둘러 다락을 내려와 1층 거실로 나왔다. 거기에는 밖으로 향하는 문 반대편에 정원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얼른 문을 열었다. 긴 세월동안 관리되지 않은 정원. 엉망진창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자라는 가운데 간간히 핀 철쭉과 펜넬, 핑크색 튤립이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분명 이 옆에 있었는데. 나무 옆을 거닐고 있었는데. 관린은 문을 나서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흰옷의 천사 같은 형상을 한 남자가 분명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정원은 고요했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이렇게 꽃을 피웠던가?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아카시아 나무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얀 꽃과 흰 옷의 남자.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설마 정말 천사였던 건가. 관린은 왠지 정신이 다시 몽롱해지는 것만 같다고 느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무 주변을 빙빙 돌았다.

어?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발을 굴러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정원이었음이 분명하나, 땅만큼은 아주 비옥하고 좋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걸으면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드럽고 푹신한 그런 땅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여기만큼은 딱딱했다. 설마. 관린은 손으로 흙을 마구 파헤쳤다. 얼마나 판 걸까. 딱딱한 나무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관린은 한 숨 돌리지도 않고 바로 힘을 주어 문을 위로 당겼다. 끼이익 하고 오래된 숨을 토해내며 두꺼운 문이 열렸다. 어두운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의 모습에 관린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이마의 땀 한 방울이 계단 아래로 툭 떨어졌다.

 

 

 

 

“으아암~”

하품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아침 7시 30분. 여행을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이스터 베케이션(Easter Vacation). 지훈은 그 기간에 런던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것은 모두 에드워드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꼭 자기보고 와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꿈을 꿀 리가 없고, 꽃이 사라지고 나온 콩알에 그런 글씨가 새겨져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마법 같고 비현실적이었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맞았다.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꿈속에서의 그 길. 거기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날짜를 선택하니 그 이후 계획을 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동수단으로 TGV를 고민하다 결국 훨씬 싼 Megabus를 택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Bercy역은 지훈의 기숙사로부터 많이 멀지 않아 걸어가기에도 충분했다. 그렇게 짐을 꾸려 역 인근 정류장에 도착한 지훈은 밤 10시가 넘어 버스에 올라 잠을 청했다.

버스에서 내린 지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피카딜리 서커스 거리까지 걸어갔다. 이스터 베케이션은 은근히 길었다. 꿈에 나온 그 집이 일차적 목표였지만 이왕 이렇게 온 거 그간 하지 못한 영국 여행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지훈은 뮤지컬도 보고 딤섬도 맛보고 유명한 미술관도 다니며 런던을 즐겼다. 어느 날은 런던아이를 타고는 템즈강의 야경을 하늘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런던은 파리와는 달랐다. 지훈이 오고 며칠 동안 흐리고 비오는 날이 반, 맑은 날이 반이었다. 맑은 날이 많은 파리에 비하면 조금 울적한 곳이었다. 지훈은 빨간 불인데도 당연한 듯 신호를 건너는 사람들에 한 번 놀라고,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에 또 한 번 놀랐다. 길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길을 알려주고 가곤 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빨간 색 이층버스가 돌아다니는 도로도, 빨간 공중전화 박스가 곳곳이 보이는 거리들도, 근위병들이 서 있는 왕궁도 모두 흥미롭고 재밌었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도 템즈강변을 거닐 때면 청록색 체스터필드 코드의 남자가 떠올랐다.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며 지훈은 마지막 날 가보기로 했던 일정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와 안개 좀 봐.”

아침 일찍 도착한 햄스테드 인근 아카시아 길은 안개가 자욱해서 꼭 꿈에 나왔던 것과 같았다. 그 바람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입 밖으로 툭 꺼내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나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꿈에서 걸었던 그 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공기 중 물방울이 얼굴에 느껴진다는 정도였다. 한참을 걸으니 곧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영국의 날씨는 이제 해를 내렸다. 더워지려나. 손 부채질을 하던 지훈의 앞에 그 저택이 나타났다. 초록지붕의 다락까지 3층인 집. 파란색 문이 인상적인 집. 와.

절로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고는 지훈은 한참을 집을 쳐다보았다. 안에 누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지훈은 집안이 아닌 집 뒤편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 꿈속에 보던 그 정원이었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잘 정돈된 꿈속의 정원과 달리 눈앞의 정원은 아무 풀이나 마구 자라고 있었고 그 사이로 그나마 꽃들이 좀 있었다. 어쩌면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그 모습에도 지훈이 조금 다르다고 느낀 것은 나무 덕분이었다. 정원의 맨 뒤 한가운데에 자리한 나무.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그 이파리를 보건데 분명 자신이 아는 그 꽃의 나무였다.

“와……. 신기해.”

지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정원을 걸었다. 꿈과 달리 폭신폭신 한 땅이 그대로 발바닥에 느껴졌다. 밝게 비쳐드는 햇살에 기분이 좋아진 지훈은 통통 뛰듯 걸어서 나무 옆으로 갔다. 항상 그 남자가 서있던 곳이 여기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이 나무에 손을 대었을 때였다.

“헐.”

지훈의 손이 닿자마자 일순 나무가 하얗게 빛났다. 꼭 지훈의 손에서 밝은 빛이라도 뿜어낸 듯 그랬다. 분명 손이 닿기 전엔 아무런 꽃이 피어있지 않고 이파리만 가득했는데. 나무가 한 번 반짝하고 빛나더니 꽃이 하나둘 마치 팝콘이 튀겨지듯이 퐁퐁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요한 정원. 새소리 하나 없는 곳에 하얗고 향기로운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와-”

그 아름다운 광경에 지훈은 고개를 든 채 탄성을 내질렀다. 테이프를 빨리 감기라도 한 듯 눈앞에서 꽃들이 빠른 속도로 피어나고 있었다. 가지만 있던 하늘이 새하얗고 탐스러운 꽃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여기저기서 퐁퐁 피어나더니 이내 모든 꽃이 핀 것 같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없던 매혹적인 향기가 온 정원에 진동했다.

“청록색 코트 아저씨. 아저씨가 저한테 주신 선물인가요?”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저 자신이 꼭 뭐에라도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아저씨는 마법사였던 걸까? 어떻게 백년이 넘게 지난 꽃이 살아나고 나무에 손을 대니 꽃이 막 피어나지? 그렇다고 저가 마법사인 건 아니었다. 무서울 수도 있었는데 지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영국에 흔치 않은 해가 드는 좋은 날씨와 하얗고 몽글몽글한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지훈은 제가 꼭 하늘나라에 있는 것만 같았다. 폭신한 땅은 구름을 밟는 것과 같았고, 아름다운 꽃나무는 천국의 풍광이 이러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향. 향도. 천사가 된 것만 같다. 지훈은 활짝 웃으며 나무에 여전히 손을 덴 채로 빙글빙글 나무 주변을 돌았다. 손을 떼어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손을 떼어도 꽃들은 여전히 제 모습을 자랑하며 향기를 뿜어내서 지훈은 그 향에 취해서는 정원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으 배고파.”

나무 옆에 앉아 그늘 아래 쉬고 있는데 곧 배꼽시계가 울렸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시계가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작은 정원에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아저씨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항상 이 정원에서 자신을 기다렸다. 무어가 되었든 아저씨도 내가 왔다간 걸 알겠지 뭐.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냥 나가기가 아쉬워 아카시아 나무 주변을 몇 번이고 돌았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먹기 위해 정원을 나섰다.

시간은 훌쩍 갔다. 봄이 언제 왔냐는 듯 파리에도 여름이 왔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간 연극공연이 한 번 더 있었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 지훈이 맡은 역할은 비중이 꽤 큰 마법사 역할이었다. 덕분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바쁜 나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지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기말시험까지 모두 치른 상태였다.

“아 꼭 가야 해요? 조금만 돌아보고 가려고 했는데. 알겠습니다. 네.”

여름에 터키를 여행한 뒤 돌아가려고 했는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이제 대학생들 방학시즌이니 바빠진다는, 일손이 부족하니 방학동안 집에 와있으라는 전언이었다. 아 정말 돌아가야 하는 구나. 파리의 야경을 볼 날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지훈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Shakespeare and Company. 왠지 이곳만큼은 시간이 더 흘러도 지금과 같은 모습일 것만 같았다. 지훈은 가드닝 책을 사온 뒤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았었다. 연극일로도 바빴고 그 때 사온 가드닝 책만 탐독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꿈만 같았네.’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이 서점에 왔던 날 가드닝 책을 찾아낸 책장 앞에 섰다. 두꺼운 가드닝 북이 있던 자리를 다른 책이 차지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도 아니건만 갑자기 파리에서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처음 도착해서 봤던 센 강과 노트르담, 얼결에 들어간 연극부, 자주 왔던 이곳 서점, 그리고. 여기서 발견한 가드닝 책과 내 손에서 살아난 꽃가지. 매혹적인 향을 풍기던 아카시아 꽃. 7일 간 꿨던 꿈과 그 꿈만 믿고 떠났던 런던 여행까지. 자신의 손이 닿자마자 온 나무 가지에 꽃을 피워내던 정경이 떠올라 지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꿈만 같았어.’

기숙사로 돌아와 지훈은 제 몸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캐리어에 마저 짐을 쌌다. 이미 가장 안쪽에 자리한 가드닝 책이 곧 옷가지로 뒤덮였다.

 

 

 

 

“다른 학교로 간다구요?”

플라워 교수가 관린에게 차를 한 잔 내밀며 물었다. 관린은 네, 하고 대답했다.

“기말 시험 보느라 고생했습니다. 1년 만에 헤어지게 되다니 아쉽군요.”

“다시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요.”

짧게 대답하고는 교수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관린은 플라워 교수의 뒤편 창 너머로 초록빛 담쟁이넝쿨이 눈부시게 자란 것을 발견했다.

 

그 날 관린은 지하실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저주를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지하실은 오래 비워둔 것 치고는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마법도구로 보이는 것들로 가득해서 그 자체로 흥미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관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중치 않았다.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관린은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꼼꼼히 지하실을 살폈다. 알 수 없는 마법서들이 가득한 책장 맨 끝에 아주 작은 수첩 같은 것이 있었다.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적혀있는 걸 보니 마법주문인 것만 같았다. 관린은 후루룩 수첩을 넘기다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중국어에 멈칫했다.

모든 해답은 그가 만든 것에 있다.

왜 중국어일까. 관린은 그 수첩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과 공책들을 살폈다. 아무리 꼼꼼히 보아도 오로지 그 글귀만 중국어였다. 다른 것은 모두 영어나 라틴어 또는 마법주문으로 보이는 언어들이었다. 왜 이것만……. ‘그’가 누굴까. ‘그’라니. 자꾸 어떤 생각이 관린을 괴롭히는데 정작 그게 어떤 생각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왤까. 무얼까 날 괴롭히는 이 생각은. 무언가 언뜻언뜻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아서 관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거다!

어디서 본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글씨. 그건 바로 왕칭이 가져온 그 종이에 쓰인 그것이었다. 급한 대로 찢어온 그 일기장 일부에 있던 글씨. 에드워드를 만나러 가야겠다던 그 글씨. 분명했다. 그 글씨체였다. 그렇다면 이건……. 이건 분명! 이 글씨를 쓴 자는 에드워드가 아니다. 어쩌면 이 수첩에 이런 글씨가 쓰여 진 사실조차 모른 채로 죽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칭하는 그는 에드워드일지 모른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분명 에드워드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으니까. 그가 만든 것. 그가 만든 것에 있다……. 뭘 만든 거지? 왜 특정하지 않고 이렇게 써놓은 거지?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음식과 같이 긴 세월을 버티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였다. 그렇다면. 관린은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실에는 그가 만든 걸로 보이는 연필꽂이라던가 선반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있었다. 얼른 일어나 선반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꼼꼼히 살펴보아도 표시랄까 그런 것이 없었다. 게다가 수공예품이라 해도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그가 만든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뭐야 도대체 무엇을 만들었단 거야.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있게 표시를 한 것. 그런 것은 뭐가 있을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여기에 더 있는 다해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가야 겠다 결심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다 관린은 문득 반대편으로 가면 집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안 쪽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조심스레 걷었더니 문이 나왔다. 그것을 열고나니 탁상이 가운데에 있었고 그 위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먼지가 슬은 탁상. 그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홈이 파져 있었다. 네모난 홈.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다. 뭐가 있었던 것일까. 한참을 쳐다보다 관린은 일단 뒤에 펼쳐진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집안에서는 통로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런 고민도 잠시.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래. 올라가보자. 생각보다 계단은 꽤 길고 높았고 끝도 없이 이어졌다. 뭐야 도대체 이건. 1층으로 올라가는데 왜 이렇게 한참을 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지? 불안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관린에게 드디어 통로처럼 보이는 정사각형 모양의 나무문이 나왔다.

“으으윽!”

힘껏 밀어 올려 나온 그곳은 1층이 아니었다. 여긴……. 그곳은 다락방이었다.

‘다락에 통로가 있다니 이래서 못 찾은 거였어.’

허탈한 마음에 관린은 밖으로 문과 지하실 계단 사이에 걸터앉아 웃어댔다. 그게 다였다. 그 집에서 얻어낸 것이라곤.

그 길로 관린은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홍콩으로 갔던 왕칭에게 연락이 왔다. 수소문 해본 결과 저주를 풀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책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책! 바로 그것이었다. 그저 도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관린은 생각했다. 그가 만든 것. 후세에도 계속 전해질 수 있고, 누가 썼는지도 적혀있으니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다. 게다가 저주를 풀 수 있는 내용을 글로 써서 남길 수 있다. 책이었구나. 책이었어. 왜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그래서 그 책이 어디에 있답니까? 관린의 물음에 그것까진 알아내지 못했다고 왕칭이 말했다.

정말로 그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에드워드의 집에 있어야 했다. 에드워드의 모든 물건은 그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 관린은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밀스러운 지하실, 커튼 뒤에 있던 집안으로 이어지는 통로, 그리고 그 통로에 있던 탁상 위 네모난 홈. 바로 그 자리였다. 그 책이 있던 곳이 바로. 확실했다. 그런데 없었다. 그렇다면. 관린은 왕칭에게 물어 에드워드의 후손이라는 자를 직접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에드워드씨의 물건을 내다 판 적이 있습니까?”

관린의 물음에 후손이라는 여자는 난처해하며 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 집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과자를 사먹으려고 책을 판 적이 있다고 했다.

“책이요?”

“네. 어렸을 때고 또 그 책만 따로 놓여있으니까 그게 가장 비싸고 좋아보였나 봐요. 그리고 크고 무거운 편이었다던데……. 사실 저는 잘 모르죠. 아버지가 워낙 어렸었기도 했으니까 별로 안 그런 책이라도 크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구요. 아무튼 겨우 들고 가서 팔았는데 생각보다 값을 안 쳐줘서 그 당시에 되게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고 그러셨어요. 판 건 그게 다에요.”

바로 그거였다. 관린은 어떤 책인지 물었지만 여자는 알지 못했다. 이후 여자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꽤 두꺼운 앨범처럼 생겼는데 그 안은 열어보지 않아 내용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제목이 아마도 ‘The True Love’ 인 것 같다고도 했다. 여기부터 그 책을 추적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왕칭이 다시 영국으로 왔다. 책을 판 날짜와 대강의 시간을 알아낸 끝에 책은 처음에 벼룩시장 같은 동네 장터에서 팔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그것은 런던의 중고 서점 몇 곳을 거쳐 웨일즈 헌 책방 마을인 Hay On Wye의 한 중고서점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관린은 주말에 왕칭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예전에 많았다던 헌 책 방은 헌 책방 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제 세 곳 뿐이었다. 그 중 그 책이 있다는 곳은 옛날 영화관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헌 책방. 헌 책방은 비록 세군데 뿐이었지만 이곳의 규모만 해도 매우 커서 관린은 이 서점 하나로도 헌 책방 마을이라고 할 만 하군. 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커다란 중고서점은 층마다 매우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책의 주제별로 섹션이 나뉘어 있었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 절로 조심스럽게 걷게 되는 마룻바닥을 디뎌가며 관린은 고민했다.

‘제목이 ‹The True Love›라는데 내용은 알 수 없다……. 과연 내용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연애소설 장르를 택했다. 그러나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런 제목의 책을 찾는다며 점원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직원과 마주하고 있는데 왕칭이 다가와 말했다.

“여기에 있답니다.”

왕칭이 내민 쪽지를 보았다.

“Shakespeare and Company?”

“파리에 있는 중고서적과 고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입니다.”

관린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이름으로도 꽤 유명한 서점이었다. 주로 영미권 책을 취급한다고 했다.

“어쩌다 이 책이 프랑스까지 간 거죠?”

“이 Shakespeare 서점 주인이 여기에 와서 책을 대량 사가면서 우리가 찾는 그것도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 곳 주인과 방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파리라니. 그런 줄도 모르고.”

웃음이 나왔다. 파리 중고 서점에 있는 줄도 모르고 영국으로 유학을 오고 런던 인근에 있는 에드워드의 집까지 뒤졌다. 벌써 6월이었다.

“제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갑니다.”

관린은 그렇게 파리로 갔다. 두 시간 가량 걸린대서 그렇게만 생각하고는 킹스크로스역으로 가 아침에 있는 유로스타를 탔다. 아침 시간인데도 역에는 사람이 많았고 유로스타에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관린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이 되어있었다. 파리와 런던 간 시차가 있어 3시간이 넘게 걸린 탓이었다. 관린은 파리가 처음이었다. 애초에 프랑스 자체가 처음이었다. 파리는 영국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사람들의 표정도 좀 더 유해 보였다. 기왕 온 김에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일단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센강을 바라볼 수 있는 노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는 점심으로 오믈렛을 먹었다. 역시 먼저 책을 찾으러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관린은 Shakespeare and Company로 향했다. 서점이 식당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어서 관린은 센강을 따라 걸었다. 초록색 리어카 같은 것에 차려진 노점들에서 그림이나 사진 따위를 팔고 있었다. 종종 관린의 눈길을 끄는 멋진 것들도 있었지만 당장은 그 책이 우선이었다.

어?

금발과 옅은 갈색의 머리칼 사이로 고동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나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구지? 관린은 우뚝 멈춰 섰다가 서둘러 남자가 나온 쪽으로 뛰는 듯 걸어갔다. Shakespeare and Company. 짙은 녹색 차양과 노란 간판.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남자가 나왔다. 누구지?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관린은 서점을 지나쳐 서둘러 남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뛰었다. 뭘 입고 있었지?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저 앞에 갈색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저 사람, 저 사람인가!

“Désolé, Je suis désolé.”

관린은 남자의 어깨를 확 잡아채 돌렸다. 아. 얼굴을 보자마자 관린은 헉헉 거리는 숨을 겨우 참으며 기차 안에서 몇 마디 익힌 프랑스어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어깨를 털어내고는 가던 길을 갔다.

왜지. 누군지도 모르는데 따라갔어. 왜일까. 그렇게 길 한복판에 멈춰서 관린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그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누구였을까.

아.

떠올랐다. 그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지 몰랐다. 그 이였다. 에드워드 집 정원, 하얗게 꽃 피운 아카시아 나무 옆의 남자. 흰 옷을 입고 있었던 동양인. 어쩌면…….

“어쩌면 천사 인지 몰라.”

저도 모르게 관린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어있지 않은 꽃나무에 꽃을 피워내고 홀연히 사라졌다. 게다가 그 덕에 지하실 입구를 찾았다. 지금도 관린이 책을 찾으러 온 곳에서 남자가 나왔다. 정말 어쩌면 사람이 아닌 천사인지 몰랐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발견할지 몰라.’

기대감이 생겼다. 여기가 최종 종착지라면 드디어 가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책을 찾아낼 거였고, 그렇다면.

‘저주를 풀 수 있어!’

관린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사라졌다.

“Non?” 없다고요?

“Non. déjà vendu.” . 이미 팔렸어요.

“Quand?” 언제요?

팔리다니. 관린은 망연자실했다. 눈앞에서 또 놓쳤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또 다시 출발선에 서야 했다. 점원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주인까지 불렀다. 장부를 살펴봐달라고 했다. 몇 달 전에 팔렸다고 했다.

“누구한테 팔렸는데요?”

혹시나 하고 물었다. 유로(Euro)를 내고 사간 바람에 내역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아. 관린이 커다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여자 점원이 오더니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English ok?” 영어 괜찮나요?

“Yes, It will be better.” , 그편이 더 나아요.

여자가 서툰 영어로 관린에게 말을 걸었다. 관린이 영국식 발음으로 대답하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듬더듬 단어를 골라가며 말했다. 그 말에 관린은 그나마 희망을 가졌다. 자신이 계산해줬고, 워낙 잘생기고 어린데다 매일 같이 서점에 왔던 남자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이 근처에 사는 것 같고 그리고.

“He is Asian.” 그는 동양인이에요.

동양인. 동양인이라고 했다. 동양인의 어리고 잘생긴 남자. 그래도 이 정도면 찾을 수 있을 거다. 서점을 나와 인근 카페에서 카페오레를 한 잔 시키고는 왕칭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점에 책이 없다는 말부터 그 책을 사간 남자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다 말해주고 나니 한결 마음이 후련해졌다. 왕칭이 어떻게든 추적해 줄 것이다. 그제서야 오후의 노을 지는 센 강의 풍경이 들어왔다. 여유롭게 강위를 흘러가는 바토 무슈와 그 위에서 즐겁게 손을 흔들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문득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왕칭과 통화하는 사이 다 식어버린 카페오레를 입에 대지도 않은 채 관린은 계산을 마치고는 카페를 나왔다. 초여름의 따뜻한 강바람이 관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렇게 영국으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왕칭에게 연락이 왔다. 가문의 어떤 남자가 사랑에 빠져 결혼했음에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돈다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는데요 그 사람?”

“한국 여자와 결혼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있답니다.”

“한국? 한국의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답니까?”

들뜬 마음에 절로 높아진 관린의 목소리에 왕칭이 답했다.

“제주도입니다.”

“시험 결과는 이미 확인했겠죠?”

초록 잎들이 푸르른 담쟁이를 넝쿨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축하해요. 클라우디를 넘어섰네요.”

플라워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관린은 억지로 웃어보였지만 그게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교수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번 기말에 플라워 교수 수업에서 관린은 A+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시험문제는 무난했다. 단 하나, 에드워드 K. 윌튼에 대한 문제 빼고는. 문제는 또 묻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가드너인가? 라고. 그 문제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었다. 일전에 플라워 교수가 말해줬기에 알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건 제 학점이었다. 관린은 괜히 교수가 답을 알려준 것만 같아 양심이 찔렸다. 그래서 가드너가 맞다고 썼다. 그런데 A+를 받은 것이다.

“채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관린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 말에 교수는 재밌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왜죠?”

“저는 분명 에드워드를 가드너라고 적었습니다. 일전에 교수님은 가드너가 아니라는 것이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제 학점이 좋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관린의 그 말에 플라워 교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즐거워서 그런 것 같았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교수가 답했다.

“내가 믿어왔던 답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네?”

“본업과 관계없이 그는 가드너였죠. 그것도 아주 훌륭한. 나야말로 본업이 가드너가 아니고서야 가드너로 인정할 수 없다는 꽉 막힌 생각을 해왔던 거죠. 관린 학생에게 책을 보여준 그 날 나는 깨달았답니다.”

“그럼?”

“네. 그는 가드너가 맞습니다. 아무튼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관린 학생. 부디 그곳에서도 잘 해내길 바라겠어요. 한국은 공부하기 좋은 산이 많은 곳이지요.”

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관린은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저주를 이겨낸 자가 있다는 한국의 제주도로.

 

 

 

 

 

 

 

 

 

2

 

 

 

“네, 네. 내일 12시 도착이요. 네 알겠습니다. 모시러 갈게요. 네.”

“지훈아 내일 오시는 분들 연락했니?”

“방금 안 그래도 통화했어요. 내일 12시 픽업이요!”

“어, 네가 모시고 와.”

“네!”

6월 말. 제주도의 여름은 일찍 시작되었다. 원래 6월은 제주의 우기라고 할만 했다. 이르게 찾아오는 태풍 때문에 특히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는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이어서 따지자면 비수기였다. 그러나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비수기를 노리고 오는 대학생 손님들로 비수기라고 보기 어렵게 바쁜 때이기도 했다. 그 덕에 이미 펜션은 남은 방이 없을 정도였다.

까만 지붕에 새하얀 외관이 인상적인 전원주택. 지훈의 집은 펜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훈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작한 펜션 운영이 벌써 10년을 넘었다. 당시에는 펜션이라는 게 흔하던 때가 아니어서 지훈의 집은 한 때 유명 명소가 되기도 했다.

“저희 오늘은 어디가면 좋을지 추천 좀 해주세요.”

“흠 오늘은…….”

지훈은 말을 끌며 창밖을 보았다. 오늘도 역시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오후부터 잦아든다고 했으니까…….

“일단 오전에는 실내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지훈은 몇 군데를 소개하고는 점심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은 성게라면 집까지 일러주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비가 좀 멎는다고 하니 수목원에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6월은 수국 철이거든요. 그곳도 수국이 한창 피어 지금가면 엄청 예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 손님 두 분이 펜션을 나섰다.

“아! 운전 조심하세요!”

지훈의 곰살스런 외침에 여대생 둘 모두 집 밖으로 나서다말고 멈춰 서서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네, 하고는 다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지훈도 빙그레 웃어보였다.

 

“네?”

오후에 지훈은 퇴실한 방을 정리하다 말고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오전의 그 여자 손님들이었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수목원에 다 와서는 차사고가 났다고 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나무에 박았다고. 다행이 다친 곳은 없고, 일단 보험사를 불러서 처리는 했는데 펜션으로 어떻게 돌아와야 할지 모르겠다는 전화였다.

“어……. 그러시면…….”

지훈은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어차피 오늘은 픽업 갈 일도 없었고, 두어 시간 뒤엔 어두워질 거였다.

“제가 모시러 갈게요.”

 

 

 

 

 

“네. 네. 방금 도착했어요. 네 걱정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관린은 캐리어를 끌고는 공항 자동문 밖으로 나왔다. 선글라스를 끼고 온 것이 무색하게 비가 요란하게 퍼붓고 있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관린의 앞에 와 섰다. 곧 기사가 내리더니 차문을 열어주었다. 관린은 캐리어를 놔둔 채 차에 올라탔다.

저주에서 벗어난 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관린은 제주도로 왔다. 그를 만나기까지, 저주를 풀기 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한국의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가문에 말하고는 일단 제주도 호텔을 잡았다. 갑자기 한국이라니? 숙부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실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관린은 한국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여름 동안 저주를 풀어냈다는 남자를 만나고 나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당장은 학업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또, 실제로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기도 했다. 혹시라도 예상보다 한국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면 한국에 있는 대학에 교환학생이든 뭐로든 진학하는 편이 눈속임에 좋았다. 준비할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일단은 추이를 살피기로 했다. 한국이라니. 다행히 한국은 예로부터 무역업을 하며 연을 맺었던 곳이어서 가문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익혀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지.

관린은 홍콩에 계실 어머니를 떠올렸다. 가문이 사업에서 손을 뗀 건 오래된 일이었지만, 인맥이라던가 하는 것들로 종종 가문의 사람들이 일을 도와야 할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렇게 만났다고 했다. 한국의 상사(商社)에 이제 막 취직한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어머니.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아버지. 첫 미팅에서 어머니가 크게 실수한 것을 아버지가 도와주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날들을 이야기할 때면 소녀가 된 듯 수줍게 웃었다. 관린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더 이상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선 안 돼.’

소녀 같은 어머니를 보며 관린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어쩌면 고지가 머지않았다. 호텔 응접실 커튼을 젖히니 커다란 창문이 프레임인 양 제주의 푸른 바다가 가득 담겨 넘실거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곳. 이곳에 가문의 저주에서 풀려난 자가 있다. 관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수목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투명 비닐우산을 들고 내렸다. 매표소로 가는데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새하얀 외제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서는 게 보였다. 와. 완전 부잔가 보다. 오전에 내리던 비에 비하면 거의 내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우산을 썼다. 우산 없이 서있어도 아마 느끼지 못했을 보슬비가 분무기로 뿌리듯 잘은 물방울들을 우산위에 수놓았다. 카멜리아힐. 본래 수목원 이름대로 동백꽃으로 유명한 곳이라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가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시기라고들 했다. 하지만 지훈은 이맘 때 쯤의 이곳을 가장 좋아했다. 왠지 새빨간 동백보다는―흰 동백도 있긴 하지만―어쩐지 연보라색 수국이 더 좋았다. 수국 축제가 시작되는 4월부터 5월보다 이때를 더 좋아하는 건, 빗방울이 맺혔다 떨어지는 수국을 보는 것이 왜인지 청초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한 탓이다. 올해는 프랑스에서 귀국 후 제주로 오자마자 펜션일이 바빠 한 번도 이곳에 오질 못했었다. 단순히 그 여대생들을 데리러 가는 것보다는 물을 머금은 수국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 건지도 모르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손님들 보고 안에서 수국을 보고 있으라고 했다. 곧 가겠다고. 조금이나마 혼자 수국을 즐길 시간을 만들려면 서둘러 들어 가야했다. 그 마음에 지훈은 얼른 표를 사고는 해가 없어 어둡게 그늘이 깔린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그 곳의 운영진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겨우 짐을 풀고 룸서비스를 시켜 식사를 때우고 있는데 왕칭에게 전화가 왔다. 가문의 남자가 제주도 어느 곳에서 수목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차는 미리 대기시켜놓았습니다. 제가 직접 운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관린은 전화를 끊었다. 티슈로 입을 대충 닦고는 문을 나섰다. 호텔 로비 밖에 바로 대기시켜놓은 새하얀 마세라티 그란카브리오에 올라탔다. 비가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굳이 컨버터블로 주문하지 말 걸. 차라리 벤츠가 나았을 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출발했다. 특유의 배기음 덕에 관린은 다시금 마세라티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는 작은 것 같으면서도 넓었다. 수목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께 였고, 비가 거의 그쳐있었다. 분무기로 뿌려대는 듯한 비에 관린은 기다란 장우산을 꺼내들었다가 포기하고는 도로 차에 집어넣었다.

“여기 운영진을 뵙고 싶어서요.”

“운영진이요?”

매표소의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 그렇네. 미리 약속이라도 잡게 왕칭에게 부탁하고 왔어야 했는데 마음이 더 급했다. 그렇게 관린이 직원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옆으로 언뜻 무언가가 지나갔다. 뭐지. 잠시만요. 직원에게 말하고는 관린은 서둘러 들어가는 입구로 갔다. 뒤에서 저기요,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중요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흰 셔츠의 남자. 어쩌면 천사일지도 모르는 그. 분명 그였다. 직접 본 일은 없지만 관린은 왠지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에 흰색 셔츠. 남자는 서둘러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가야 해!’

관린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항상 저 사람이, 아니 천사일지도 모르는 저 존재가 나타나고 나면 일에 진척이 있었다. 이것은 신의 계시인지 몰랐다. 어서 뒤따라야 했다.

“안됩니다. 표를 보여주세요.”

“입장권을 구매하고 들어가세요.”

정신없이 따라 들어가려는 데 입구에서 사람들이 관린의 양 팔을 붙잡고 저지했다.

“돈 낼게요, 얼마든지 낼테니 잠깐만요, 잠깐만요.”

“안 돼요. 이러시면 경찰 부릅니다.”

실랑이를 하는 사이 눈앞의 천사는 어두운 숲길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비가 내려 질척해진 땅을 지나고 곧이어 드문드문 수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곧 수국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길이 나왔다. 양 옆에 빼곡히 들어차 물을 머금은 하늘빛, 연보라빛, 분홍빛의 수국들.

“와.”

절로 탄성이 나왔다. 아무래도 비가 오는 날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훈이 이즈음의 이곳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수국을 저 혼자 감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지훈은 우산을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수국의 꽃잎을 툭 건드렸다.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빗방울의 느낌. 곧 또로록 하고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 아름답다. 꼭 유리구슬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지훈은 천천히 걸었다. 이곳을 넘어 아주 낮은 돌담이 나오는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온통 수국 천지인 곳이 나온다. 하지만 지훈은 수국이 워낙 빽빽하게 피어 조금은 어두우면서도 또한 수국 꽃으로 환하게 느껴지는 이 길을 가장 좋아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이곳을 걷고 있노라면 이 길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새 뻗은 채로 거둬들이지 않은 지훈의 작은 손이 물방울을 머금은 수국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은 어느새 빗물이 잔뜩 묻어 축축해졌다. 어렸을 적, 노란 장화를 신고 이 길을 걸었었다. 살며시 감은 눈을 하고 지훈은 물기로 가득한 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분사한 것과 같은 잘은 빗방울들이 속눈썹에 맺혔다. 곧 수국길이 끝나고 얕은 돌담길이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느릿느릿 걷던 지훈이 갑자기 휙 뒤돌았다.

‘누구지?’

꼭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지훈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순간 바지에서 부르르 진동이 울렸다. 얼른 꺼내어 보니 그 여대생 일행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디쯤 오셨는지 묻는 여대생에게 지훈은 걸음을 재촉하며 거의 다 왔다고 말하고는 얼른 수국밭으로 향했다. 곧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운전이 어려워질지 몰랐다.

 

 

 

 

서둘러 입장권을 구매하고는 관린은 숲으로 발을 들였다. 이런저런 포토존으로 보이는 곳들을 지나니 양 옆으로 수국이 가득한 길이 나왔다. 아. 그러네. 수국이 필 때구나. 학교에서 배운 수국에 대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 정보들 중 관린이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변색(變色)이었다. 처음에는 연한 자줏빛을 띠다가 곧 하늘색으로 변하고 다시 연한 홍색이 되는 꽃. 색이 변하는 꽃이 세상에 이것뿐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특이한 꽃이었다. 관린은 그게 꼭 별 같다고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며 제 몸을 태울 대로 태워 뜨거워졌다 점점 식으며 색이 변하는 별처럼 수국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색이 변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변해가는 건지도 모르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어 관린은 마음이 이상했다.

아. 난 천사를 쫓아 온 건데.

수국에 빼앗긴 마음을 추스르고는 관린은 거의 뛰다시피 그 길을 지나갔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보고 멈추어 섰다. 수국 담장 틈 새로 천사가 보였다. 흰 옷의 천사.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분명했다. 투명 우산을 들고 홀로 서 있는 그 모습이 물방울이 가득 끼인 불투명한 공간을 넘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몽환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야트막한 돌담길에 듬성듬성 제 존재를 드러내는 청순한 수국. 그리고 그 가운데 선 그. 관린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날개가 없어. 그런데……. 그는 정말 천사 같았다. 남자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저기요!”

관린이 힘껏 소리 지르자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다갈색의 생머리가 물에 젖었을 텐데도, 짧은데도 찰랑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검은 눈동자, 오똑한 코, 붉은 입술. 그 이였다. 에드워드 집 정원에서 제게 지하실 문을 알려주었던, Shakespeare and Company근처에서 보았던 그 천사. 저주를 풀 단서를 가져다주었던 그 천사. 그 동안의 만남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이 마주한 그는 아름다웠다. 관린이 넋을 놓고 남자를 보고 있는 동안 남자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안 돼.

“저기요!”

다시금 힘껏 외쳤는데 뒤에서 누가 급히 뛰어오더니 관린에게 말했다.

“헉…. 헉…. 운영진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어휴. 무슨 놈의 걸음이 이렇게 빠르세요. 절 따라오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어느 새 수국 담장 틈새로 보이던 천사는 사라져있었다. 관린은 네 하고 대답하며 매표소 직원을 따라갔다.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관린은 당황했다. 운영진이라는 사람은 여자였다.

“아. 네.”

“이야기 들었습니다. 왕칭이라는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네. 그러시다면 라이가(家)를 아시겠죠.”

“네 알죠.”

“저주를 깬 사람이 있다고 듣고 왔습니다. 혹시 남편 분께서……?”

관린의 말에 여자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어, 죄송하지만 제 남편은 한국 사람입니다.”

“네?”

여자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과 자신의 남편이 이곳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자신은 라이가의 사람과는 결혼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건너 아는 대학교 선배가 라이(賴)라는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수목원이라는 것은 잘못 도는 소문인 것 같아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수목원 까지는 아니고 무언가를 키운다고 들었어요. 꽃인 것 같았는데 정확히는 저도 잘.”

허망한 얼굴을 해 보이는 관린에게 여자는 그렇게도 말했다.

“제주도는 좁으니까요. 작정하고 찾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날 호텔로 돌아오며 관린은 왠지 느낌상 한국에 오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왕칭에게 한국의 이름 있는 대학 중 편입이나 신입학이 가능한 곳과 그 입학요건을 찾아달라고 했다. 한국의 대학은 영국과 홍콩과는 달리 새 학기의 시작이 3월이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관린은 영국에서의 학점도 매우 좋았고, 3개 국어가 가능했다. 처음으로 가문에 감사함을 느끼며 관린은 시험에 대비했다. 한 편으로는 라이가의 남자와 그와 결혼한 여자를 찾는 데에 힘썼다. 그렇게 7월이 왔다.

 

“이번엔 진짜일 거라고 기대해보겠습니다.”

그러고 관린은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꼭 그림 속에나 나오는 풍경 같았다. 해바라기 밭이라고 했다. 라이가의 남자.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자. 둘이 운영하는 것은 수목원이 아닌 해바라기 밭이라고. 해바라기라니. 관린은 해를 따라 움직이는 그 꽃을 떠올렸다. 어떤 교수님이 해바라기를 키우기를 실습과제로 내주셨던 기억이나 관린은 웃음이 났다. 유럽에서는 관상용보다 채종용을 많이 심었다. 관린의 해바라기 역시 채종용이었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는 하나 그 이름대로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랐다. 흐린 날이 많은 영국에서 키우기에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직사광선을 쐬어주는 것이 좋아 볕이 드는 날이면 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갔었다. 꽃을 위해 하는 일광욕이라니.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옛날 중국에서는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인다고 오해 했다고 한다. 해를 따라 움직인다, 라……. 오로지 한사람만 바라보는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해바라기를 떠올릴 때면 관린은 꼭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한 것도 결국 오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까지 한 사람만 그리는 사랑도 결국은 불가능 한 건지 모른다. 그래서 변심하기 전에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나무가 되어버리는 걸까. 생각이 생각을 이끌고 왔다. 그러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들었어요, 약속하고 오셨다구요.”

“네.”

입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니 앳된 소년이 그렇게 말했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관린의 그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눈만큼은 관린과 꼭 닮아있는 소년.

“저……. 실은 할머니께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는데, 해바라기라도 보고 계시겠어요?”

쭈삣거리며 말하는 소년이 귀여워 보여 관린은 네 그럴게요, 하고는 해바라기 밭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도 해바라기 밭은 규모가 어마무시 했다. 진노랑의 커다란 꽃들이 가득 들어차있는 해바라기 밭. 관린은 문득 영국 유학 전에 갔던 스페인의 해바라기 밭을 떠올렸다. 해를 닮은 위풍당당한 모습의 꽃. 그 특유의 밝음이 전염되는 듯한 기분. 관린은 잘 웃는 사람이 못 되었다. 무표정이 당연한 사람. 우스워서 재밌어서 보다는 허탈해서, 어이가 없어서, 예의상으로 웃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자꾸 미소가 걸렸다. 2m는 족히 되는 해바라기 밭과 그 위로 새파란 하늘과 둥둥 떠 있는 뭉게구름이 너무 밝아서, 그래서 제가 여기 왜 와있는지 짜증나는 저주 같은 것은 잊혀지고 자꾸만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온다고 해서 잠시 문을 닫았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지, 농장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관린은 고요함 속에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우뚝 서버렸다. 헛것인걸까.

분명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런데. 빼곡이 제 키를 자랑하듯 자라난 해바라기 줄기들 틈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또렷한 이목구비. 천사였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그가, 오늘은 우산을 쓰지 않은 채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저 멀리에.

‘어디지?’

틈새로 보이는 걸로 봐선 길이 꺾어지는 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어딘지 어떻게 가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심겨진 해바라기를 다 꺾어가며 가로질러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관린은 제 눈앞에 있는 해바라기와 해바라기 줄기의 틈을 더 벌려보았다. 그래봤자 그 너머에 심은 해바라기 줄기들로 가려 벌리나 마나 천사의 얼굴은 똑같이 잘 안 보였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건가. 올려다보는 옆모습의 그 기다란 속눈썹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웠다. 흰색 반팔 셔츠로 인해 드러난 분홍빛 팔을 들어 손 그늘을 만들어 본다. 그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어.

관린은 훔쳐보기를 그만두고 제 앞에 놓인 길로 걸었다. 저 쪽으로 가야해.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방향감각에 의지하며 뛰었다. 한 번 꺾고 나서 나온 길로 또 다시 직진, 그 다음 또 꺾어서 다시 직진. 미로처럼 구불구불 길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가로지를 수는 없다. 남자는 점차 선명하게 보였다. 둘 사이의 해바라기 수가 적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가 여전히 그 곳에 서있는 것을 확인하며 관린은 뛰고 또 뛰었다.

어.

아직 길에 도달하기 전이었다. 이쯤에선 틈새로 보여야하는데 남자가 없다. 천사가 또 사라져버렸다. 관린은 땀을 닦으며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 계속 가니 출구가 나왔다. 아. 이럴 수가. 오랜만에 뛰어 숨이 차 관린은 고개 숙여 제 무릎을 짚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허탈한 마음이 한데 뒤엉켜 고개를 들고 싶지가 않았다.

문득 그늘이 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노란 해바라기와 대조적으로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있는 할머니였다.

“라이관린씨?”

“네.”

“나입니다. 라이가의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자가.”

인자한 미소에 관린도 찡그렸던 표정을 풀었다.

 

 

 

 

“해바라기 밭이요?”

“그래 어서 다녀와.”

“오늘 같이 날도 좋은 날…….”

지훈은 구시렁대며 목장갑과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것처럼 생긴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겨서는 집을 나섰다.

“와 진짜 날씨 좋다!”

트럭 뒤에 실은 삽들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에 아랑곳 않고 지훈은 트럭 창을 열어 팔을 꺼내 쫙 펼쳤다. 어느 새 더운 바람이 가시고 시원한 바람이 지훈의 팔을 감쌌다. 계속 비가 오던 날이 지나고 드디어 해가 났다. 반짝거리며 들이친 햇살에 눈이 절로 떠진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훈은 행복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평일이고 그간 비가 계속 와서 그런지 오늘은 손님도 없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은 해수욕장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러신 거다. 해바라기 밭에 가서 해바라기를 심고 오라고. 인근에 위치한 해바라기 밭. 꽤 예전부터 있던 그 곳은 지훈이 어머니의 친구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대가족이 함께 살며 운영하는 모양이었는데 지훈도 종종 가서 잘 아는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시켰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부터는 얼추 자란 해바라기를 옮겨 심는 일을 가끔 시켰다. 계속 내린 비로 무너져 버린 해바라기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녀석을 옮겨 심는 일은 이제 익숙했다. 그렇지만.

‘아 그래도 오늘은 놀고 싶었다구!’

부모님 등쌀에 한국으로 일찍 귀국한 것을 후회하며 지훈은 곧 해바라기 농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아 오늘 쉬는 날이랬지. 그래서 이거 시키는 거구만.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모자를 쓰고 목장갑을 끼고 트럭 뒤에서 삽을 꺼내 들고는 해바라기 밭으로 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언제 귀국 했어?”

“얼마 안됐어요. 오자마자 맨날 일만 해요.”

볼 멘 소리를 하는 지훈을 보고 할머니는 웃으시며 출구 쪽에 있던 아이들이 많이 쓰러졌다고 거기에 가져다 심으면 된다고 하며 해바라기가 심겨있는 화분들을 가리켰다.

한창 정신없이 옮겨심기를 했더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같이 작업하던 이 집 손자 녀석은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며 가버려 해바라기 사이에 지훈 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아 끝났다!”

마지막 해바라기를 옮겨 심고는 지훈은 만세를 불렀다. 아오 씬나! 송골송골 맺힌 땀을 목에 건 수건으로 닦아내고 지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 날씨 한 번 끝내주네. 한참 그렇게 보다가 지훈은 다시 해바라기 밭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웠다. 이럴 줄 알았다. 오랜만에 겨우 쉬는 날인데 이렇게 봉사를 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서 이 광경을 기대했다. 지훈이 어렸을 땐 이것보다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농장이 커질수록 관광객들이 늘어 이제 평상시에는 늘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고. 어쩌다 들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옮겨심기 작업을 하느라 문을 닫은 날에나 사람이 아닌 해바라기만이 가득했다. 몇 시간의 노동,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바꾼 값진 광경이었다. 오로지 파란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노란 해바라기만이 가득한 풍광, 시간.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거야.’

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다. 일순 산들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었다. 해바라기들도 장단을 맞춰 흔들대며 춤을 추었다. 곧 주변이 노랑으로 넘실거렸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일본 영화였지 아마.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과 사랑하면 죽을 거란 운명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 남자를 사랑하기로 결심하고는 남자를 향해 달려간다. 노오란 해바라기 밭에서 둘은 만나 키스를 나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 그런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지훈은 개방된 학교 DVD실에서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여자 주인공이 너무 멋있어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다니 너무 아름답고 부러워서. 그 뒤로 해바라기를 볼 때면 항상 영화의 말미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주인공은 죽음을 택했지만, 그 장면이 밝은 노랑으로 가득 한 건 결코 주인공의 선택이 슬픈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훈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훈은 눈을 떴다. 어머니의 친구 분이 웃으며 보고 계셨다.

“어, 안녕하세요.”

“다 끝냈구나? 배고프지. 점심 먹자. 아줌마가 다 해놨어.”

“와 좋아요.”

아주머니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웃어보이고는 뒤돌아 출구로 나갔다. 지훈도 얼른 그 뒤를 따라나섰다.

 

“연리지 관광이요?”

“응. 내일 가족 팀 있잖아. 네가 맡아봐.”

“내일은 해수욕 가려고 했는데.”

“해수욕은 모레 가면 되잖아.”

아버지의 말씀에 지훈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모레 갈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매일 이런 식으로 해수욕이 미뤄졌다. 정말 방학 내내 노예처럼 일했다. 지훈이 힘들어 죽겠다고 한 학기 휴학하겠다고 하자 외려 가족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네가 있으면 펜션 영업이 잘되거든. 엄마! 아이고 왜. 귀 따가워 죽겠네. 그게 끝이었다. 지훈은 곧 휴학한 것을 후회했다. 제주의 9월은 해수욕을 하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매일 해수욕하려고 했는데. 해수욕은커녕 바다근처에 간 것조차 단 한 번. 그것도 결혼을 앞둔 커플의 결혼식에 쓰일 스냅사진 찍는 것을 도와주러 간 것이었다. 9월도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해수욕은 물 건너가는 거였다.

“아 형은요! 아 왜 만날 나만 시키냐고요!”

“네 형은 내일 데이트래.”

“아오 씨!”

여자 친구 없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지훈은 씨잉 하는 소릴 내고는 밥알을 셌다. 곧 어머니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안 먹을 거면 치운다?

희한하게 지훈은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왤까. 저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여자들이 참 많았는데 딱 거기 까지였다. 한 번도 고백 받은 적이 없었다. 용기 있는 여자가 미인을 차지하리! 용기를 내라고! 지훈은 속으로는 그렇게 외치며 기다렸지만 그렇다고 저가 나서서 고백 한 적도 없었다. 별로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꽃이나 구경하는 게 좋았다. 지훈과 전혀 다르게 생긴 제 형은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여자 친구가 끊이질 않았다. 개방적인 부모님은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일정을 거의 우선으로 쳐줬기 때문에 형은 펜션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 얄미워 죽겠어. 한껏 형을 노려보고는 지훈은 입 안 가득 밥을 집어넣었다. 부러우면 너도 여자 친구 사귀어. 어머니의 말씀에 지훈은 눈을 한 번 흘겼다. 어차피 네 형은 있어봤자 매출 오르지도 않어. 아버지의 말씀에 형의 표정과 지훈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뭐 어쨌든 내 얼굴 덕에 매출이 오른다니까.

 

“탐방로가 모두 화산송이로 되어있어요. 맨발로 걸으셔도 좋아요.”

지훈의 설명에 우리 진영이 착하지? 하며 여자가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의 신발을 벗겼다. 남자는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 채 제 신발을 벗어들었다. 지훈은 가족 여행을 온 손님들을 데리고 비자림에 도착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어요? 가족은 긴 탐방로를 택했다. 지훈은 저도 맨발인 채로 걸으며 설명을 간간히 덧붙였다.

“이곳은 수령이 500년에서 800년에 이르는 비자나무가 2800여그루가 넘게 있는 비자나무 군락지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비자림이죠. 세계 최대 규모라서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된 곳이에요. 지금 나는 향도 비자나무 향이에요.”

살짝 젖은 화산송이 흙이 촉촉하게 발에 와 닿아서 기분이 좋아진 지훈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나무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이건 단풍나무인데요, 아직은 초록이지만 곧 물들어갈 거예요. 이게 바로 비자나무에요. 크기로 봐선 족히 몇 백 년은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거예요. 좀 더 가면 거의 천년이나 된 비자나무도 나와요. 꼭 포켓몬스터 발챙이를 닮은 남자아이가 성큼 다가가 나무를 덥석 안았다. 그 짧은 팔로 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 이거 되게 커. 별거 아닌 말인데도 웃음이 터졌다. 생각보다 기분 좋은데? 맑은 공기가 주는 상쾌함 덕분인지 부드러운 화산송이 덕인지 계속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수령이 몇 백 년은 되는 비자나무들의 군락지로…….”

물 냄새가 짙게 배여든 향긋하고 시원한 숲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관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느 숲보다 좀 더 신선한 기분이 드는 향. 몸속의 모든 것이 정화되는 듯한 상쾌함에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관린은 사람들의 무리에서 가장 뒤에 서 있었다. 결국 여기 까지 왔군.

그 날 관린이 해바라기 밭에서 만난 할머니는 라이가의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자가 맞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관린의 눈이 희망의 노란 빛으로 넘실거렸다. 천사를 보고나서 또 단서를 찾아냈어. 그 이는 천사인 것이 분명해. 그런 생각도 마음 한 구석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 눈이 빛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제 남편은 죽었습니다. 딸아이를 남기고요.”

죽었다니. 분명 저주를 깨고 살아남았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만일 제 남편이 저주를 깨트렸다면 당신 역시 그 저주에서 벗어났을 겁니다. 당신도 그래서 저주를 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가문의 모두를 위해 저주를 깨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건지, 아니면 가문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것인지에 대해서요.”

“아마 후자일 것입니다. 가문의 남자가 모두 그리된걸 보면요.”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관린은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주를 깨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랬다면 왜 그런 소문이 돈 것인가.

“하지만 소문이 있습니다. 저주를 푼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요.”

관린의 말에 백발이 성성한 여자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마 제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났겠죠. 얼마간은 제가 남편이 홍콩에 일하러 갔다고 말하고 다녔거든요.”

관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정말로 허탕이란 말인가.

“남편이 첫날밤 제게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땐 술이 약한 양반이니 와인 몇 잔에 취한건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첫날밤을 치르지 못했어요. 남편이 나무이야기만 하다 술기운에 잠들어버렸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 건지 모르죠.”

그 뒤로 남편은 홍콩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종종했다고 했다. 그래서 뒤늦은 첫날밤을 지내고 남편이 사라졌을 때도 처음엔 홍콩으로 가버린 건가 생각했다고 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거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름진 얼굴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건 후회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움의 눈물이었을까. 관린은 맨 발로 화산송이 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중에 정말로 나무가 되어버린 건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할머니는 비자림에 갔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연리지에 말을 걸면 꼭 남편이랑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후련해지곤 했다고. 그래서 여태 살아왔다고.

“연리목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어쩌면 후손이니 정말로 말이 통할지도 모르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치부해왔다. 연리지라니. 원래부터 있던 나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면 사실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사랑을 하면 나무가 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그렇지만 지금까지 가문의 남자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어이없는 소리라고 따지고 할 새가 없었다. 일단은 가보자. 결국 9월의 어느 날 관린은 비자림에 들어섰다. 일단은 비자림에 대해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탐방신청을 했다. 그리고 관린은 후회하는 중이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탐방객들 때문에 나무를 살펴보고 교감하고 할 새가 없었다.

비자림. 강의에서 배운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 교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소위 말해 한국의 제주도에 꽂힌 사람이었는데, 사실 가드닝 보단 오히려 식물학이라던가 삼림을 관리하는 쪽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인 비자나무가 가득한 곳. 얼마나 멋진 곳인지 여러분들은 모를 거라고 꿈꾸듯 말했었다. 아 그런 걸로 봐선 제주도를 여행했나보군. 관린은 제가 지금 그 곳에 와 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우스웠다. 숲은 매우 울창해서 더러는 어둡기 까지 했다. 이끼가 잔뜩 낀 오래된 나무들 덕에 원시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자나무. 소나무보다는 훨씬 더 넓지만 가는 잎을 가진 상록침엽수. 건조한 곳에서는 잘 자라기가 어려운 나무다. 촉촉하게 느껴지는 화산송이 흙을 밟으며 관린은 왜 이곳에 거대한 비자림 조성이 가능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숲 보다 더욱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비자나무 특유의 시원한 향 덕분일 테지. 가이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비자나무치고는 모두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비자나무는 생장 속도가 느린 나무 중 하나였다. 이 정도로 크게 자라려면 정말 몇 백 년의 시간을 이곳에서 살아왔을 것이었다.

“이 나무가 바로 연리지입니다.”

그렇게 비자나무에 감탄하며 천천히 뒤따라 걷다 보니 곧 연리목이 나왔다. 두 그루의 나무가 처음부터 한 나무였던 것처럼 서로 얽혀 결국 하나가 되어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한다. 희귀한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관린은 문득 하이스쿨 시절 배웠던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가 읊은 사랑 시가 떠올랐다.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在地願爲連理枝). 연리지. 연리지 같은 현상이 사람사이에서도 정말 가능한 걸까. 그러니까 나무가 된 거겠지. 관린은 좀처럼 타인과 그렇게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결국은 남인데 왜 자신의 목숨이 잘못될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 마는 걸까. 가장 중요한 건 내 자신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연리목을 한참 신기하게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이드가 설명을 마치고 자리를 뜨자 그를 뒤따랐다. 관린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길 기다렸다. 곧 관린만 그 자리에 남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무와 대화를 시도해 본적이 처음이어서 관린은 주춤했다. 곧 조심스레 연리지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담쟁이 넝쿨이 휘감고 있는 연리지가 꼭 사람같이 느껴졌다. 나무 울타리에 기대다 시피 바짝 붙은 관린이 말을 꺼냈다.

“혹시 라이가의 사람이십니까?”

고요한 숲에는 정적만이 맴돌 뿐 새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후. 절로 참았던 숨이 내쉬어졌다. 역시 나무는 말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참 속으로 말을 걸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분명 나무가 된다고 했다. 원래부터 있던 나무가 또 다시 생겨날 순 없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나무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라고 관린은 이해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린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입 밖으로 다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람이었던 게 아니에요?”

관린의 공허한 외침만 있을 뿐 그에 대답하는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어린 남자 아이가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린은 괜스레 놀라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신이 나무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마치 그 들이 구경이라도 한 마냥,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순식간에 몸이 달아오르고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곧 관린이 떠난 연리지 근처로 사람들의 인영이 보였다.

“엄마 발이 축축해.”

“응 비가 왔었나봐.”

지훈은 조금 앞서 걸으며 살짝 뒤를 돌아 함께 잘 오고 있는지 틈틈이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진짜 발챙이를 닮았단 말야. 지훈은 엄마한테 조잘 조잘 이야기하는 꼬마를 보며 생각하다 낮게 쳐진 나무 울타리 앞에서 멈춰 섰다.

“이게 연리지에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엉켜 마치 원래부터 한 나무였던 양 자라는 나무. 지훈은 설명을 하다말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봐도 봐도 신기하고, 봐도 봐도 경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둘이었던 존재가 만나 하나가 되는 과정. 그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무지만 어떤 마음일까. 이 나무들도 사랑해서 그런 걸까?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갑자기 투닥 거리면 서도 사이가 좋은 부모님이 떠올랐다. 나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엄마 이거 두 개 붙었어!”

발챙이를 닮은 꼬마 덕에 지훈의 정신이 돌아왔다. 지훈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 곳에 존재하긴 하지만 엄청 희귀한 현상이에요. 아주 드물죠. 이렇게 한 나무처럼 자라는 탓에 화목한 부부나 남녀사이의 정이 깊은 것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사랑하는 사람과 오고 싶은 핫플에 꼽혔다더라구요.

부부도 연리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둘이 꼭 맞잡은 손이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비자림을 걷기 시작한 뒤로 저 손을 놓지 않은 부부다. 이런 것이 연리지 같다고 하는 걸까. 지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잘도 갔다. 제주의 가을이 금세 지나갔다. 지훈은 9월동안 7일 정도 해수욕을 할 수 있었다. 몰려오는 손님을 막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여자 친구를 사귀어 데이트를 핑계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저가 부지런해져야 했다. 지훈의 집은 해수욕장에서 가까웠다. 넓고 유명한 해수욕장과 댈 것은 아니었지만 지훈은 집근처 작은 해수욕장이 좋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물이 매우 맑았다. 해가 환히 뜨면 에메랄드 빛 물이 찰랑거리는 것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수심도 적당해서 수영하기에 좋았다. 지훈은 일찍 일어나 아침수영을 즐겼다. 다행이 해가 쨍해서 춥지 않았다. 물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휴학하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관린은 깊어가는 가을 동안 입시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했다. 서울에 있으면 여러모로 편할 텐데 어쩐 일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비자림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날 호텔에 왕칭이 와있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냈다고 했다. 에드워드의 책을 사간 동양인 남자. 소르본 대학에 있던 동양인 중 잘생긴 얼굴로 유명세를 치렀던 남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주변을 탐문해 알아본 결과 그 남자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왔다고 했다.

“설마 소르본에 있나요?”

저는 파리를 떠나 이곳 한국에 있는데 한국 사람인 그 남자가 파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니. 괜히 우스웠다.

“아닙니다.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성은 알아내지 못하고 이름만 알아냈습니다. ‘지훈’ 이라더군요. 그런데…….”

“그런데?”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알아봤습니다만, 개인정보 유출금지라며 인적사항을 알려주질 않았습니다. 해커를 매수해 알아낼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법에 저촉되는 일은 위험해서…….”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문을 등에 업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문제를 만들면 안 된다. 관린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자 왕칭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학교 재학생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내야겠군요. 그 대학 원예학과를 알아보세요. 거기에 가야겠습니다.”

“운 좋게도 이미 정보를 드린 학교들 중에 한 곳입니다.”

그렇게 관린이 다니게 될 학교가 정해졌다.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던 터라 크게 문제는 없었다. 관린이 시험을 치러 서울에 가야했기에 왕칭은 거주지를 옮기자고 했다. 그러나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성은 서울에 가서 지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만 수목원에서 보았던 수국이 핀 돌담길에 서있던 그가, 해바라기 줄기 틈새로 보였던 그가 떠올랐다. 천사 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심지어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한 번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그로 오인해 다른 사람을 붙잡았던 파리에서의 날, 새하얀 꽃이 탐스럽게 핀 나무 옆의 그의 모습 등 생각이 끊이지 않고 나서 신기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를 떠올리는 때도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서 그런가.’

관린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도 했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였기도 했다. 생소한 경험. 그렇다고 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보고 싶다고? 관린은 보고 싶은 게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보고 싶어 하는 건지도 아닌지도 알지 못했다. 이곳에 있으면 한 번쯤은 그를 또 볼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서 제주에 머무는 건데도 정작 스스로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제주에도 겨울이 왔다. 금번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눈길이 미끄러워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어느 새 지훈이 담당하는 일이 되어버린 픽업 서비스. 어떤 날은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날 뻔 했다. 그래도. 그래도 나뭇가지마다 피어오른 눈꽃을 보는 것이 좋았다. 제주도는 답답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확실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렇다고 눌러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지훈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수강신청도 하고 기숙사도 신청했다.

관린은 그 동양인이 다닌다는 학교에 합격했다. 이제 슬슬 이사하셔야 합니다. 이사라 봤자 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관린은 왕칭에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하고 겨울에도 제주도에 머물렀다. 천사를 떠올리며.

 

 

 

 

 

 

 

 

 

 

3

 

 

 

“아- 다했다!”

지훈은 그렇게 외치고는 만세를 한 채 침대위로 누웠다. 창 밖에서 환하게 들이치는 햇살이 하얀 이불위에 누운 지훈의 얼굴에 부셔져 내렸다. 생각보다 강한 초봄의 햇살에 지훈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속눈썹이 갈색으로 투명하게 빛났다. 내일이면 개강이다. 다행이 기숙사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미리 서울로 와서 새로운 하숙이나 원룸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지훈은 어제 밤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했다. 짐은 택배로 미리 부쳤다. 기숙사에 와보니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룸메이트는 미리 와서 짐정리를 해놓은 것인지 텅 빈 지훈의 공간과 달리 옆은 살림살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대강 이불을 꺼내 잠만 자고는 아침에 일어나 내내 짐정리를 했다. 하루 종일 계속 해야 할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저녁이 오기 전에 끝났다.

“으 진짜 힘들다.”

지훈은 팔을 위로 뻗은 자세 그대로 누운 채 중얼거리며 천장을 향하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베이지색 에코백이 눈에 들어왔다. 지훈은 팔을 뻗어 에코백을 집으려 했지만 그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누운 채 옆으로 몸을 움직여 집으려 하다 안 되자, 에이! 하며 벌떡 일어나 에코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침대위에 올렸다.

“결국 너도 데려왔구나.”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책을 펼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것은 에드워드의 가드닝 북이었다. 지훈은 한차례 짐을 부치고 나서 고민했다. 이제 직접 들고 갈 짐만 남았는데 가드닝 북이 애매했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집에 두고 가도 그만이었다. 사실 그 중고서점에서 많은 책들을 샀지만 다른 책들은 모두 제주 본가의 책장에 이미 쳐 박혔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만은 마음에 걸렸다. 아마도 이걸 들고 간다고 하면 엄마가 뭐한다고 쓰잘데기 없는 걸 가져가려고 하냐고 화라도 낼지 몰랐다. 그렇지만.

“조경학에 도움 될 거야. 암.”

지훈은 다시 책장을 덮고는 두터운 표지를 몇 번 쓰다듬으며 그랬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고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 질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냥 수집한 책일 뿐인데 굳이 이 무거운 걸 서울까지 왜 가져가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에코백 중 가장 튼튼한 베이지색 에코백에 가드닝 책만 집어넣고는 어깨에 멘 채로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무슨 보물이라도 든 거냐?”

공항에 데려다준 형이 퉁명스레 물었지만 지훈은 아니 뭐. 하며 얼버무리고는 말았다.

“그래도 가져오니까 마음은 편하네.”

그럼 됐지 뭐. 그냥 맘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꽃샘추위로 어떤 날은 눈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평년기온보다 따뜻하기도 한, 오락가락 하는 날씨가 당연한 초봄.

“아 뭐야 오늘 낚였네.”

기숙사에서 창을 내다보았을 때만 해도 분명히 얇은 블라우스만 입고 나선 여대생들이 많았다. 이 정도는 안 춥겠지.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서둘러 나섰는데 춥다. 너무 춥다. 늦잠을 잔 탓에 강의실까지 딱 맞게 나온 터라 다시 올라가 외투를 가지고 나올 시간이 부족했다. 아 망했네. 지훈은 연신 양손으로 팔뚝을 문질러 대며 강의실까지 걸어갔다.

“자 이제 수강 정정기간도 끝났으니까 출석 부르겠습니다. 김가은.”

“네.”

출석이 불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그나마 지각은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해 볼까요? 오늘 강의자료 안 뽑아온 사람도 있을 텐데, 인쇄실가서 꼭 뽑아오세요. 오늘만 나눠줄게요.”

교수의 말에 지훈은 의기양양하게 가방에서 미리 뽑아 놓은 자료를 꺼내려고 팔에 메고 온 에코백을 무릎위에 올렸다.

“헐.”

“왜 그래?”

지훈의 헐 하는 소리에 옆자리 여자 동기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어 아냐.”

지훈은 제 무릎 팍 위의 베이지색 에코백을 멍하니 보았다. 이건. 천천히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 이 모든 건 늦잠 탓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미리 챙겨둔 까만색 에코백을 들고 나온다는 게 그 옆에 있던 베이지색 에코백을 들고 나왔고 이건.

“가드닝 북. 으.”

에드워드의 가드닝 북이 들어있는 백이었다.

“오늘은 필기할 것이 많습니다.”

아 미치겠네. 늦잠부터 시작해서 옷차림부터 낚이더니. 어느 새 수업에 열중하는 동기를 보고 지훈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동기였다.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굴어서 지훈은 그게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몇 번 싫은 티를 냈는데도 계속 그래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하필 같은 수업이라니. 동기의 손 아래 노란 대학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 한 장만 떼어 달라 그럴까. 지훈은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또 대화를 나눌 거고 잘못했다간 이따 점심까지 같이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으 골치 아프네.

지훈은 조심스레 가드닝 북을 꺼냈다. 그리고 맨 뒷장을 폈다. 하도 여러 번 봐서 알고 있었다. 마지막 장 한 장은 그냥 빈 종이였다.

‘죄송합니다, 에드워드씨.’

지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마지막 장을 부욱 찢은 뒤 가드닝 북을 덮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얼른 뜯어낸 것 치고는 종이는 깔끔하게 뜯어져서 적어도 책이 지저분해 보이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지에서 늘 가지고 다니는 펜을 꺼내 그새 칠판 가득 적히고 있는 필기를 빈 종이에 받아 적었다.

“오늘 실습이래.”

다음 수업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세운이 그랬다. 이번 학기 지훈은 조경 쪽을 좀 더 공부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실습이 있는 원예생명공학과의 조경식물학 과목을 택했다. 그 결정에는 가드닝 북이 한 몫 했다. 지훈은 휴학한 도중 틈틈이 파리에서 사온 가드닝 북을 보았다. 외울 만큼 보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식물을 키우는 것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세운은 지훈과 비슷하게 조경에 관심이 많은 같은 과 학생이었다. 그 덕에 조경식물학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다.

“실습? 다음 주부터 아니야?”

강의계획표에 의하면 다음 주부터 실습이었다.

“문자 못 받았어? 어제 왔는데…….”

그러고는 세운이 제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어. 진짜다. 근데 왜 난 안 왔지.

“난 안 왔는데.”

“네 번호만 조교님이 빼먹으셨나봐. 일단 실습장으로 가자.”

아 뭐야 진짜. 오후로 잘못 맞춘 알람 때문에 늦잠도 자고, 낚여서 옷도 춥게 입고, 그것도 모자라 급하게 들고 나오느라 가드닝 북만 가져온 바람에 맨 뒷장을 떼어 써야 했다. 그런데 실습 알림 문자까지 오지 않다니! 오늘 일진이 좋지 않다. 불길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세운을 따라 나섰다.

실습장에 갔더니 이미 학생들이 꽤 많았다.

“뭐야. 조경학 이렇게나 많이 들어?”

“오늘 A반이랑 실습 겹친 듯.”

분명 몇 명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사람이 많아서 보니 조경식물학A반과 수업이 겹친 것 같았다. 조경식물학은 실습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습장 이용 문제로 반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야 그나저나 사람들이 너 자꾸 쳐다봐.”

“뭐래.”

세운의 말에 지훈은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지만 사실이었다. 지훈도 실습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 왜 자꾸 쳐다 봐 창피해죽겠네. 잘생겼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고 사람들의 눈길 역시 셀 수도 없이 받아왔다. 그래서 당연한 듯 매 학기 예상은 했다. 칭찬을 들으면 기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익숙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지훈은 친구들 앞에서는 센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잘생겼으니까 그렇지 뭐. 라고 으스댔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자꾸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여야했다. 사실 지훈은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일부였다. 지훈이 조경식물학 수업을 듣는다는 소문이 나서 수강생이 늘어났다는 사실도, 친구들 모두 지훈이 실은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써 나눠놓고 같이 실습할 건 또 뭐람.’

지훈은 실습장에 들어찬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 교수 왔다.”

마침 지훈이 이번학기에 배우고 있는 B반 담당인 교수가 왔다. 곧이어 A반 교수도 왔다. 둘은 서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B반 교수가 그랬다.

“어 착오가 있었네요, 제가. 다음 주인데 이번 주로 실습을 잡아버렸어요. 오늘은 일단 불편해도 다 같이 실습을 하는 걸로 합시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오늘은 간단하게 정지작업 실습부터 시작할게요.”

정지작업으로 시작된 실습의 마지막은 모종 심기였다. 식재 실습 전 요령을 익힌다 생각 하고 심어 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작은 화분에 분홍, 하양, 자주, 파랑 등 다양한 색의 꽃들이 있었다.

“히아신스입니다. 구근식물이죠. 비교적 옮겨심기가 용이합니다. 그러나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해요. 식재할 때도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만큼 미리 연습해본다고 생각하세요.”

학생들이 네 하고 저 마다 하나씩 모종을 가지고 제 자리로 왔다. 지훈은 제 앞에 잘 골라진 땅을 모종삽으로 조금 팠다.

“죄송합니다.”

약간은 서툰 억양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히아신스를 옮겨 심다 말고 실습장 학생들이 모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새하얀 피부의 키가 큰 남자. 흰 셔츠에 미색 가디건을 걸친 평범한 차림이었다. 머리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무척이나 잘 생겼다. 지훈은 놀랐다. 이렇게 생긴 사람은 난생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저도 제 외모에 자신감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뭐지 싶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눈이 커서 그런가. 꾸밈없는 모습이 청순해 보이는 것이 실습장 나무들 때문인지 꼭 숲에서 나온 신 같았다. 이 학교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었어? 2년을 넘게 다녔지만 처음 보는 잘생긴 얼굴. 게다가 저랑 달리 모든 게 길쭉길쭉 하다. 팔도 다리도 키도. 아무리 학생 수가 많다지만 이렇게 생긴 사람이라니 소문이 안 날리 없었다.

‘이상하네 왜 몰랐지. 완전 남신.’

갑자기 쏠린 시선에 관린은 조금은 놀랐지만, 담담하게 교수님 앞으로 다가갔다. 관린은 조경식물학 A반이었다. 강의계획서에는 첫 시간은 강의실에서, 두 번째 시간은 실습실에서 수업이 진행된다고 나와 있었다. 수강신청 기간 동안 시간표를 바꾼 바람에 관린에게는 오늘이 첫 시간이었다. 그래서 강의계획서의 날짜를 보지 못하고 착각을 했다. 강의실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제서야 강의계획서 옆 날짜를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날짜를 착각해서 늦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수강신청 안했다 나중에 했죠?”

눈에 띠지 않을 수 없는 외모였다. 수강변경기간에 강의실에 왔다면 분명 기억했을 얼굴. 교수가 묻자 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한다.

“거의 마지막 단계인데 히아신스 모종 옮겨심기를 하고 있었어요, 저기서 모종하나를 가져다…….”

A반 교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췄다. 분명 학생 수에 맞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모종이 없다. 아무래도 변경기간 전 출석부만 보고 모종을 덜 준비한 모양이었다.

“어 모자라네. 아, 저기 아직 안심은 학생 있네. 학생. 이 친구랑 같이 심어요, 오늘은.”

교수의 말에 실습장에 있던 학생들의 눈이 모두 지훈을 향했다. 지훈은 잠시 관린의 외모에 넋이 나가있다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늦게 의식했다.

“학생?”

“……네? 저…요?!”

“네. 아직 안 심었죠?”

지훈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빠른 사람들. 다들 어느 새 심은 건지 모종이 그 새 땅에 박혀있었다.

“아 네.”

“저 학생이랑 같이 심어요.”

“…….”

“학생?”

정말 놀란 것은 지훈이 아닌 관린이었다. 마지막으로 해바라기 밭에서 그를 본 이후 관린은 그를 그려왔다. 시간이 더해 갈수록 관린의 천사는 관린이 깨어있는 시간에만 찾아오지 않았다. 잠든 시간 꿈나라에 까지 종종 나타나는 흰 셔츠 차림의 천사. 그 천사는 항상 관린이 잡기에는 먼발치에 서 있다가 달아나버리곤 했다. 왜 자꾸 그가 꿈에 나오는 걸까. 관린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천사인지 사람인지 조차 모르는데 왜 나오는지 어떻게 알겠어.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천사가 한 손에는 연핑크색의 히아신스가 담긴 화분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작은 모종삽을 들고 저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 저기 가서 어서 심어요.”

“…아 네.”

교수의 다그침에 관린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걸음마다 관린은 제 심장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현실적이던 실습실이 비현실적인 공간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긴 다리로 제게 걸어오는 남자.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보고 있었다. 관린이 제 곁에 다가와 실례합니다, 라고 말할 때까지도 지훈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 네.”

‘아 이 남자 사람이었구나.’

완전히 굳어서는 겨우 한 음절 한 음절 내뱉는 지훈의 모습을 보며 관린은 생각했다. 이제야 이 사람이 천사가 아닌 사람인 걸 알아냈다.

“아 저 이거 해보실래요? 그… 꽃 꺼내는 거?”

히아신스 모종은 영국에서 여러 번 심은 적이 있어 관린에게 익숙했다. 지훈이 화분을 쭉 내밀며 말하자 관린이 아 저 괜찮아요, 지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질 못한 채 그렇게 말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자 여러분 다 했으면 이제…. 하고 들려온 교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헐 빠… 빨리 해야겠어요! 이…이거……!”

아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화분에서 서둘러 구근을 꺼냈다.

“그렇게 꺼내시면 안돼요!”

급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모종을 잡아 꺼낸 지훈에게 관린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어.”

“앗.”

둘의 손이 살짝 부딪혔다. 그 바람에 지훈이 당황해 모종을 놓쳤고 다행이 관린의 커다란 손이 히아신스의 구근을 받아들었다. 관린은 어쩐 일인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모종을 심었다. 관린이 모종을 심자마자 교수들이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야 뭐해. 빨리 가자.”

지훈이 관린이 심은 모종을 빤히 보고 있는데 세운이 와서 그랬다. 아 어. 지훈은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관린은 여전히 쭈그리고 앉은 채로 그 모습을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생각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하기에는 제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거슬렸다.

“아, 저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지훈은 두 손을 모아 관린에게 배꼽인사를 하고 세운을 따라 실습장을 떠나버렸다. 관린은 네, 말하고는 여전히 멍한 채로 있었다. 실습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관린은 제가 혼자 실습장에 있음을 알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아.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지훈은 학관 식당에서 밥을 우겨넣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너 걔 이름 알아?”

“걔? 누구?”

“아까 그 나랑 같이 실습한 애.”

지훈의 물음에 세운이 실눈을 뜨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니.”

관린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름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놀라서는 바보같이 구근도 덜덜 떠는 손으로 심고. 천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늘 그 사람이 나타나고 나면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라니. 그 모든 것은 그럼 우연이었다는 건가. 결국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단 건가. 저주를 푸는 데 있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라면, 그렇다면 더 이상의 관심은 낭비였다.

‘이 학교 학생인 것 같던데 무슨 과지? 나랑 같은 과인가?’

낭비인데.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관린의 머리가, 마음이 이미 그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멈춰지지가 않아서, 이런 생각은 불필요하다는 이성의 소리를 모두 덮어버렸다.

처음 그를 봤던 날이 떠올랐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늘 멀리서만 봐서 몰랐는데 그 눈이 아름다웠다. 자신이 만나온 그 어떤 사람보다 반짝 반짝 거리는 눈이었다. 누군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아보려 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조회를 해볼 텐데.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관린은 갑자기 책을 가지고 있는 남자를 찾는 작업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감사했다. 그 남자가 여기 있다니. 계속 이 학교를 다닐 수는 없을까 생각하는 제 자신에 놀라야 했다.

 

 

 

관린은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파리의 소르본으로 교환학생을 갔다던 ‘지훈’이란 이름의 남학생을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 저주를 풀기 위해 하루 빨리 그를 찾아 책을 받아내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관린은 교환학생을 가고 싶은 척 위장해 관련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곳으로부터 자료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 때문에 관련 부서에 직접 가야 했다.

도착한 국제처는 매우 분주해 보였다. 몇몇 학생들이 뭔가를 적고 있거나 교직원과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거나 했다. 관린은 질문을 하기 위해 직원 한 명에게로 다가가다가 어디서 들은 것만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니까 아직 등록기간이 지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근데 왜 이렇게 늦게 하세요.”

“아오. 답답해라.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휴학했었다니까요? 학과장님도 다 싸인 해주셨는데 왜 학점인정이 안되냐고요.”

“그건 또 다른 문제인 게, 여기 보시면 수강하신 강의 이름이 한국에 열린 거랑 달라요. 완전히 같지 않으면…….”

“그건 학과장님께서 판단하는 거라고 저는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그게…….”

관린은 깜짝 놀랐다. 익숙한 목소리. 저도 모르게 관린은 몸이 그대로 굳어진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

지훈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누군가 자기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에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는 놀랐다. 하늘색 셔츠에 화이트 가디건이 흰 피부에 잘 어울리는 잘생긴 남자.

“그…….”

“조경학!” / “조경학!”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손가락을 뻗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깜짝 놀랐어요. 거기 그렇게 서 계셔서.”

지훈은 핑크 레몬 에이드를 한 입 쪽 빨아 들이키고는 말했다. 빨대가 핑크색 하트 모양이었다. 요즘은 빨대도 이뻐.

“저도요.”

관린은 짧게 대답하고는 웃어보였다. 손에 든 그린티 프라푸치노 컵에 그 새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혔다. 여기 잠깐 앉으실래요? 지훈이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벚나무 아래 벤치를 가리켰다.

“국제처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러고는 빨대를 쪽 빠는 지훈이…….

‘귀엽다.’

관린은 사람을 보고 귀엽다고 느낀 것이 태어나 처음이라 갑자기 저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국제처에 가서 지훈을 발견한 관린은 너무 놀라 왜 또 눈에 보이는 걸까. 잠이라도 든 건가. 꿈인가 하고 제 손을 꼬집어야 했다. 그래도 계속 눈앞에 보이는 그 모습에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보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서 꼭 선물을 받은 것만 같기도 하고 꿈인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대화까지 나누게 될 줄이야. 대답이 없이 멍하니 지훈을 보는 관린을 보며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워…….’

관린은 그런 생각에 잠겼다가 저를 보는 지훈을 보고 겨우 대답했다.

“교환학생을 갈 수 있나 싶어서요.”

“아. 교환학생 관심 있으시구나! 언제요?”

“네?”

“언제 가고 싶으신 대요?”

“아….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아니구요. 그냥 생각 만요.”

“아 그렇구나. 저 교환학생 다녀왔거든요!”

“정말요?”

“네. 파리요!”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얼굴위로 햇살이 비추었다. 다갈색의 머리칼이 그 빛에 반짝였다. 관린은 그걸 보며 충분히 천사로 오해하고도 남을 만 했다고 생각했다. 천사가 아닌 사람이라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으니까. 지훈은 지훈대로 관린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꽃을 심을 때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아기 피부 같았다. 햇빛 덕에 가뜩이나 맑은 피부가 한층 투명하게 빛났다. 게다가 얼굴만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목소리도 좋다.

“아 근데 그 말투가…….”

지훈은 어느새 다 마셔버린 핑크레몬에이드를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는 벤치를 짚은 채 다른 한손을 들어 입을 가리켜보였다. 손이 작아서 그런지 노란 가디건에 폭 파묻힌 것이 꼭 어린아이의 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명화에 그려진 아기천사가 떠올랐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귀여운 사람. 사람이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이 관린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조금 한국어가 서툰?”

“그래 보이나요?”

“아 그게 무지 잘하시는데요, 약간 외국사람 같은 억양이 있어서요.”

전부터 지훈은 궁금했다. 얼굴은 한국사람 같은데, 아니 사실 한국사람 치고는 좀 많이 흰 편이긴 한데, 발음이 꼭 외국사람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저 홍콩 사람이에요.”

“홍콩이요? 헐 완전 몰랐어요.”

재미교포를 생각했는데 아예 홍콩 사람이란다. 지훈은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는 관린을 보았다. 홍콩에는 한 번도 가본일이 없었다. 홍콩 사람들은 다 이렇게 키가 크고 하얗고 잘생긴 건가.

“그래도 한국어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수줍게 말하는 관린에게 지훈은 양팔을 들어 크게 저어보이며 엄청 괜찮아요, 되게 잘하세요! 한 바탕 그래야 했다.

지훈은 요즘 교환학생을 다녀온 것에 대한 행정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교직원들이 생각보다 더 빡빡하게 굴어서 학점 인정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제주도로 바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나. 갔다 오자마자 바로 해야지 행정업무도 편하고 일이 안 꼬이는데 늦게 와서 이러는 건가 싶어 지훈은 휴학을 결정했던 일이 후회되었다. 정 안되면 직접 전화라도 걸어주겠다고 학과장님이 그러셨지만 괜히 귀찮게 해드리고 싶진 않았다. 짜증나 죽겠네.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짜증이 정말로 머리끝까지 차올랐는데 그가 서있었다. 꼭 마법처럼.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제 옆에 앉아있다. 이 아름다운 사람이. 역시 마법처럼.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만 같아 지훈은 아무 이야기나 조잘조잘 떠들었다. 저는 공대생이에요, 그쪽은요? 원예학과시구나. 그럼 혹시 저쪽에 핀 개나리 보셨어요? 끝물인 것 같긴 한데, 아 거의 져가는 것 같긴 하던데 예쁘더라구요. 관린은 지훈의 말에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더러는 묻기도 했다. 이 근처에 사세요? 아 기숙사 사시는 구나, 전 혼자 살아요. 자취? 맞나요? 네 자취요. 목소리 진짜 좋네.

“어. 뭐야!”

한창 관린과 이야기하던 지훈의 바지에 진동이 느껴져서 잠시만요 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통화를 누르자마자 과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어디야? 수업 시작했는데 왜 안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시계를 보았다. 분명 두 시간 공강이었는데. 교직원과 한참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계는 이미 수업이 시작하고 5분이 지났음을 알려왔다. 관린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는 지훈에 놀랐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수업이 벌써 시작했다고.”

“아 어서 가보세요!”

“네 그래야 겠어요. 저… 다음에 또 봐요!”

지훈은 급한 마음에 일어선 채로 그렇게 말하고는 관린에게 꾸벅 인사한 뒤 서둘러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관린은 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또 보네요!”

관린은 국제교류팀에서 교환학생 상담을 받고 나오는 길에 지훈을 만났다. 둘은 서로를 스쳐가다 동시에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지훈이 반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또 본다고.

“네, 교환학생 상담 받으러 왔었어요.”

관린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러시구나. 전 교환학생 다녀온 후기를 제출했는데 그 파일이 이상하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왔어요.”

“아 네.”

그렇고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지만 이제는 제 갈 길을 가야 했다.

“저기요.”

“네?”

“혹시……. 점심 드셨어요?

용기 낸 관린의 말에 지훈이 대답했다. 아직이요!

“정말 그것만 드셔도 되겠어요?”

“네 괜찮아요. 아침을 많이 먹어서.”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사실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와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이미 이른 점심을 먹고는 국제처로 갔던 지훈이었다. 그래서 전혀 시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가 불렀다.

“교환학생 후기라니 다녀오면 그런 것도 써야 하나 봐요.”

“네. 가면 진짜 좋긴 한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에요. 딱 거기 있는 동안만 좋고 가는 거 준비하는 기간이랑 갔다 와서 랑이 되게 피곤한 것 같아요.”

관린은 샌드위치를 넣고 오물거리며 말하는 그가 너무 귀여웠다. 국제처에 가면서도 혹시, 하고 생각했다. 욕심이겠지만 여기서 또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만났다. 찾아온 우연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쉬워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제 앞에 놓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식사를 안 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사실 관린 역시 점심을 이미 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핑계가 없었다. 저야 그래서 샌드위치가 괜찮다지만 지훈은 정말 괜찮은 걸까. 관린의 커다란 눈이 지훈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았다. 그는 정말 귀여웠다. 관린은 이제 인간이 귀여울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기로 했다. 그 인간이 제 눈앞에 이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훈은 관린을 다시 만난 것이 기뻤다. 사실 파일이야 메일로 보내면 그만이지만 그 핑계를 대고서라도 국제처에 한 번은 더 오고 싶었다. 왠지 그곳에 가면 관린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나타나다니.

“조경학 수업은 어떠세요?”

관린이 물어왔다.

“흠. 그냥 할 만 한 것 같아요. 실습은 무지하게 재밌구요.”

“실습이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저야 뭐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아예 처음부터 안 맞는 사람도 있거든요. 흙 만지는 거라던가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많구요.”

“아하. 전 다행이 그렇진 않아요. 원래 꽃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사실 지훈은 조경학 실습 날 만을 기다렸다. 그건 관린 때문이었다. 관린에게 말한 대로 실습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실습 날을 기다린 것은 오롯이 관린 때문이었다.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인데 자꾸 보고 싶고 궁금했다. 만날 핑계를 만들기도 어려운 사람. 국제처에 가면 볼 수 있겠지 싶으면서도 지금은 뭐할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툭툭 튀어나왔다. 그동안 자잘한 실습이 있었지만 고지된 대로 A반과는 겹치지 않았다. A반의 실습 날이 B반의 이론수업 날이었고 B반의 실습 날이 A반의 이론 수업 날이었다. 알면서도 희망을 가졌다. 혹시 모르잖아. 아 그냥 한 번 째고 모른 척 A반 들어가서 들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성이 비죽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 사람이 뭐라고. 너 그 사람이랑 친해?

아니.

물론 아니었다. 두 번 봤는데 친할 리가. 그렇다고 솔직하게 사실은 그 쪽이 궁금해서 실습이 막 기다려지고 그래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괜히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냐, 나 꽃 좋아하잖아. 사실이라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쳐보면서.

관린은 지훈을 눈에 담기에도 바빠서 그런 모습을 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지훈이 저를 쳐다보자 아, 하고는 아무 말이나 꺼내놓았다.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하시는데요?”

“저는…….”

금방 대답할 줄 알았는데 눈꼬리가 예쁘게 휘며 꺄르르 웃더니 지훈이 저에게 묻는다.

“맞춰보실래요?”

“네?”

“한 번 맞춰보세요.”

장난기 어린 얼굴이 신이나 보여서 관린은 갑작스런 퀴즈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음…….”

문득 지훈 너머 유리창 밖에 벚나무가 보였다. 아직 꽃을 다 피우지 못한 벚나무.

“벚꽃?”

“왜요?”

“어……. 사실은 뒤에 보여서…….”

말해놓고 바로 후회했다. 멋진 말로 둘러댈 수도 있었는데. 사실 그래본 적이 없기도 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할 건 뭐람.

지훈은 관린의 말에 뒤를 돌아 창밖을 보았다. 정말 벚나무가 있었다. 작은 꽃잎들이 조금씩 매달려 있었다. 진짜 거짓말 못하네. 투명하고 커다란 맑은 눈. 그 눈을 보며 지훈은 큰 소리를 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하하하 진짜 뭐에요. 거짓말 못하시네요.”

“죄송해요. 근데 벚꽃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사실 벚꽃은 2등이에요.”

“2등요?”

“네. 벚꽃은 다 좋은데 하나가 부족해요.”

하나? 뭘까? 관린은 저도 모르게 지훈 쪽으로 좀 더 다가앉았다. 지훈 역시 마주보고 있던 관린 쪽으로 좀 더 상체를 기울이고는 갑자기 귓속말로 그랬다.

“벚꽃은 향이 없잖아요.”

관린은 갑자기 다가온 그의 얼굴에, 그 귓속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막상 지훈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관린을 보고는 웃었다.

“왜 이걸 귓속말로…….”

빨개진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가리며 관린이 겨우 물었다.

“벚나무가 들으면 속상할 테니까요.”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얼굴을 하고는 당연한 듯 말하다가 지훈은 관린의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든 것을 발견했다. 뭐지. 그런데 왠지. 지훈은 저도 괜히 열이 올라 이온음료 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분위기가 왜……. 지훈은 괜한 마음에 얼른 말을 이었다.

“전 꽃은 향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향기가 좋은 꽃을 좋아하시겠네요.”

“맞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라일락이에요.”

“라일락.”

겨우 가라앉힌 관린이 저가 배운 라일락을 떠올려 본다. 물푸레나무과 식물. 흰색도 있고, 진한 자줏빛을 띠는 것도 있지만 보랏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줄기가 갈라져 자라 옆으로 퍼지는 모양새인데다 작은 키 나무라 얼핏 보면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3m에서 최대는 7m까지도 자란다.

“네. 향이 정말 좋아요. 아 그거 아세요? 학교 뒤쪽에 산말이에요. 그 쪽에 라일락 많은 데가 있어요.”

“산이요?”

“네. 깊이는 안 들어가구 정말 산 올라가는 입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쪽이 다 라일락 나무거든요.”

손짓까지 해보이며 열심히 설명하는 지훈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여서 관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자꾸 미소가 걸렸다.

“저…….”

신이 나 이야기하던 지훈이 갑자기 제 두 손을 깍지를 꼈다 풀었다 꼼지락대며 어쩔 줄 몰라하더니 그랬다.

“네?”

“나중에요, 어. 나중에 거기에 꽃 피면 같이 가보실래요?”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인 고개 이로 보이는 귀와 목덜미가 새빨개져서 그걸 봐 버린 관린의 얼굴도 괜히 빨개졌다.

“아 날씨가 덥네.”

지훈이 고개를 들고는 손부채질을 해댔다. 관린도 그러게요, 하고는 물을 들이켰다.

“저 방금 했던 얘긴 못 들은 걸로…….”

“가요.”

“네?”

“데려가 주세요. 저도 라일락 좋아해요.”

지훈의 얼굴의 기쁨의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또 이름 안 물어봤다. 지훈은 관린과 헤어지고 돌아와 그런 생각을 했다.

‘만나기로 하면 뭐 해. 이름도 모르고 번호도 모르는데. 바보인가.’

그렇게 저를 자책하다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데려가 달라며. 근데 왜 이름도 안 물어봐!’

 

지훈이 수업을 가야한다며 고개를 꾸벅하려다가 아 안 그러셔도 돼요, 하는 관린의 말에 쭈삣쭈삣 손을 들어 올려 흔들흔들 인사를 해보였다. 그러고 돌아서가는 모습이 점이 되어 보이지 않도록 지켜보고 나서야 관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 왜 안 물어봤지?’

관린은 자신이 좀 멍청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관린은 적어도 일처리하나는 똑 부러지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실수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만나기만 하면 뭐에라도 홀린 듯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계산하고 잴 세도 없이 그냥 웃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버리고, 그 예쁜 입으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것을 감상하고 나면 이미 그 사람과의 시간이 다 지나가버리고 난 뒤였다. 다음엔 정말 물어봐야지.

 

 

 

며칠 뒤 관린은 교환학생을 다녀온 학생들이 써낸 감상문을 읽을 수 있었다. 국제처에서 상담을 할 때 파리로 가고 싶은데 어떤지 몰라 다녀온 사람을 알고 싶다고 했다. 상담을 해준 직원은 학교 교환학생 홈페이지에 곧 감상문이 게시될 거라며 거기에 이름과 메일 주소가 있을 테니 그것을 보고 직접 연락해보라고 했다. 그 날로 매일 같이 업데이트가 된 글이 없나 살폈는데 오늘 드디어 원하던 글이 올라왔다.

<파리에서의 낭만적인 생활 _ 박지훈>

파리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감상문을 쓴 사람이 셋, 그 중 지훈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이었다. 박지훈.

관린은 그 글을 대강 읽어보았다. 관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소르본 대학의 정경, 센 강을 산책하던 나날들, Shakespeare서점에 대한 언급. 그 모든 게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관린은 서둘러 메일을 작성했다.

 

 

 

“그래서 식재 실습은 A반과 같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무 묘목은 아무래도 값이 비싸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서 하나를 심는데 여러 명이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 하에 한 번에 실습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설명. 그런 설명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실습을 함께 한다는 것이, 그러면 그 사람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름을 묻지 못했다. 원예학과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굳이 찾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또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늘 상 그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점심을 먹은 이후 가끔 그가 생각이 났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것 마저도 즐겁게 해주는 사람, 만나는 게 기다려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지훈은 가슴이 뛰었다.

‘잠깐. 그 사람 남자잖아. 뭐야. 왜 이렇게 설레는 데.’

지훈은 막상 그 날이 다가오자 두려워졌다. 처음이었다. 이런 감정은. 한 번도 누군가와 사귀어본적도 누군가를 좋아 해본 적도 없었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은 겨울에 눈 쌓인 나뭇가지로 어렵사리 얼굴을 내놓는 동백꽃의 새순에 느꼈고, 아름답다는 감정은 봄날에 새파란 하늘로 나부끼듯 떨어지는 벚꽃에 느껴왔다. 사람에 대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 건 아닌데, 아직 아닌데. 아니 아직?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관린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운 채 아무것도 않고 지훈만 보고 있었다. 정작 지훈이 그런 관린의 모습이 당황스러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다리던 식재실습 날. 관린은 식재 실습을 B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A반 교수가 말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막상 실습실에 왔을 때 저쪽에 서 있는 지훈을 보고 관린은 너무 놀라 제 눈을 부벼야 했다. 곧 지훈 뿐만 아니라 그간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훈은 멀찍이 서서 빤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관린과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 정말 잘생기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훈은 손을 흔들어보였다. 관린 역시 화답하듯 짧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훈은 제 귀가 새빨개진 줄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식재 실습 조는 A반과 B반이 따로 나뉘어졌는데, 사람 수가 애매해서 한 조에는 두 반이 섞여야 했다. 그리고 지훈과 관린은 같은 조가 되어버렸다.

“저번에 둘이 같이 모종 심었었죠? 그나마 덜 어색할 테니 식재 실습도 부탁해요.”

교수의 말에 두 사람 모두 긴장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끄덕 해보일 뿐이었다. 조별로 모이고 나서 식재 실습에 필요한 설명이 이어졌다. 관린은 아예 지훈 쪽 방향으로 서서는 지훈 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었다.

‘아예 안 듣는 건가. 왜 자꾸 봐.’

지훈은 저도 좀 보고 싶은데 그러면 서로 빤히 마주보는 것이 되니까 차마 그러진 못하고 묵묵히 시선을 견뎌냈다. 곧 식재 실습이 이어졌다.

“제가 들게요.”

다소 무거운 묘목을 들고 와야 했다. 묘목에서 가까운 쪽에 서있던 지훈이 가려는데 관린이 나섰다. 관린은 왜 이러지 생각하면서 묘목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또 다시 쿵쾅거렸다. 지훈 옆에 서있던 세운이 지훈에게 저 사람 왜 저래? 계속 아빠 미소하고 너 봐. 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지훈은 뭐가, 대꾸하고는 관린의 뒷모습을 쫓았다.

“자 마지막으로 거름을 주면 됩니다.”

식재 실습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많이 어렵진 않았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사실 뭘 했는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을 의식하느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아.

관린은 아예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영국에서 식재 실습을 하지 않았다면, 몸이 기억하지 않았다면 관린은 실습을 엉망으로 망쳤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둘 모두 다시금 삽을 집어 들었다.

“앗.”

“어.”

맞닿은 손에 둘은 놀라서 얼른 삽에서 손을 떼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둘은 얼굴을 붉힌 채 저마다 삽의 맨 끄트머리를 집어서는 살살 제 쪽으로 움직인 뒤 들었다. 지훈은 제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 그리고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식재 실습을 무사히 마치고 나자 교수가 말을 이었다. A반 교수였다.

“저번에 옮겨 심었던 히아신스 기억나시나요?”

히아신스? 세운이 갸웃거렸다.

“원래 하려던 실습이 아마 어려울 것 같아서. 전에 자기가 심었던 히아신스를 학기가 끝날 때 까지 잘 키워내는 것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전에 심었던 거라면. 관린은 연핑크색 히아신스를 떠올렸다. 혼자 심은 게 아닌데.

“아 그……. 학생들은 같이 심었으니까 어, 같이 키워 봐요.”

교수의 말에 관린과 지훈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훈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세운이 옆에서 속삭였다. 박지훈 동공지진. 병충해가 심하거나, 죽지 않는 한 성적은 비슷하게 나갈 거니까……. 교수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같이 키운다니. 지훈이 마음속으로 오마이갓을 외치고 있을 때 불쑥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커다랗고 하얀, 마디가 뚜렷한 손.

“잘 부탁드립니다.”

관린으로서도 어째야 할지 몰라 일단 습관적으로 악수부터 청했다. 청해놓고는 저도 놀랐다. 지훈이 빨갛고 작은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관린의 손을 잡아왔다.

“저두요.”

잡은 손은 따뜻했다.

 

 

 

“바보, 바보, 바보!”

“아 진짜. 형 왜 그래요. 아까부터.”

기숙사 룸메이트인 후배가 참다 참다 짜증을 냈다. 아까부터 이불을 퍽퍽 쳐대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가뜩이나 넓지도 않은 방에 먼지가 날렸다.

“아 미안.”

지훈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이번에는 베개를 퍽퍽 때렸다. 이렇게 멍청할 데가. 악수를 하고 나서 수업이 끝났다. 번호를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니 그전에 이름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또 아무 생각 없이 헤어져 버렸다. 또! 이렇게 멍청할 데가!

“아 형! 그럴 거면 나가요!”

저도 모르게 누운 채로 이불킥을 날리던 지훈은 그렇게 쫓겨나고야 말았다.

 

“흥흐응 흐응~”

막상 밖에 나오니 달이 밝아 지훈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기숙사 뒤편은 가로등이 없어 매우 어두운 곳인데 달이 어찌나 밝던지 환한 기분이었다. 따뜻한 봄바람. 벌써 4월의 초입이다. 지훈은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산책을 하기로 했다. 밤 산책.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며 주춤하던 발걸음이 곧 다시 빨라졌다.

어?

지훈이 도착한 곳은 실습장이었다. 히아신스를 잘 키워내라니. 별탈은 없어보였지만 딱히 갈 데도 없고 아까 낮엔 이래저래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못 보기도 했고. 그래서 살펴보러 왔는데. 그랬는데 누군가가 있었다.

“누… 누구… 세요……?”

지훈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희끄무레한 형체는 대답이 없었다. 뭐지 누구야.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지만 왠지 발걸음이 절로 향했다. 지훈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이었다.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 아니 어쩌면 귀신인지 몰라. 지훈은 용기를 냈다.

“누구시냐구요!”

“억!”

지훈의 물음에 놀란 남자가 억 소리를 내자 지훈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 했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지훈을 남자가 얼른 일어나 기다란 팔로 안아들었다.

“괜찮으세요?”

“어…….”

관린의 커다랗고 투명한 눈에 가득 지훈이 비춘 것처럼 지훈의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에도 관린이 가득 담겼다. 관린은 안아 든 지훈이 무겁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둘은 서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까워서 서로가 내쉬는 숨이 서로에게 닿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 관린은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이 사람에게 까지 들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놀랐다. 그 순간 지훈 역시 제 심장 뛰는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당황했다. 안겨있다니. 곧 지훈이 말했다.

“그… 너무 가… 가까…….”

“네?”

“얼굴이 너무 가깝다구요!”

그새 새빨개진 얼굴을 홱 옆으로 돌리며 지훈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관린 역시 그 말에 놀라 팔을 떼어버리는 바람에 지훈이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관린 역시 지훈에게 이름을 묻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만날 때마다 멍해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훈이 먼저 실습실을 떠나고 나서 남은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지훈과 함께 심은 히아신스를 보았다. 히아신스가 멀쩡히 자라나야 제 성적은 물론 그 천사, 아니 그 남자의 성적 또한 무사할 수 있었다. 심은 이후로 방치해뒀지만 지금이라도 관리를 해야 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실습일지 몰랐지만 의외로 어려운 것일 수 있었다. 간간히 교수님이 물은 주신건지 관린이 심었던 연핑크의 히아신스는 아직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뭐가 주변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기에는 다음 수업으로 인해 빠듯했다. 그런 연유로 관린은 실습실이 비는 밤에 다시 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날파린데. 설마.’

휴대폰 손전등을 비춰가며 본 히아신스 주변에는 여전히 날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서둘러 꽃대 아래를 살폈다. 뿌리 파리였다. 아무래도 모종이 심겨있던 화분흙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큰일이네.’

흙속에 자라기 때문에 뿌리파리를 완전히 제거하기란 어려웠다. 어쩌지. 흙을 완전히 갈아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할 테고.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었다. 누구냐고.

 

“괜찮으세요?”

“네 뭐.”

지훈이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이 꼭 명화 속에 나오는 얼굴인 것만 같아 관린은 그게 신기했다. 한참 흙을 털어내던 지훈은 문득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관린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 밤에 뭐하고 계신 거예요?”

“아. 히아신스를 보고 있었어요.”

그제야 지훈의 눈에 연핑크색 히아신스가 들어왔다. 아-. 지훈이 짧게 소리 내자 관린이 히아신스를 보며 말했다.

“아까 낮에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와봤는데 어……. 이게 있네요.”

“이거…… 요?”

“아 네. 한국말로…… 아마 뿌리 파리일거에요.”

“뿌리 파리요?”

“네. 뿌리 파리 유층은 흙속에서 뿌리를 갉아 즙을 빨아먹으며 살기 때문에 해로 워요.”

“헐. 그럼 어떻게 해요?”

지훈이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지훈의 목소리에 관린은 히아신스로부터 눈을 떼어 지훈을 보았다. 둥그렇게 뜬 눈이 귀여워 관린은 웃음이 새고 말았다. 미소를 단 채로 관린이 대답했다.

“사실 흙을 바꿔줘야 해요. 약을 뿌린다 해도 흙 안에 있는 유충을 모두 제거하긴 어렵거든요.”

“흙을요?”

지훈은 놀랐다. 아니 가면 갈수록 태산이네. 흙을 어떻게 바꾼담. 여기는 실습장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흙을 빤히 보다가 저를 쳐다보는 관린을 보았다. 달빛이 부드럽게 비추는 얼굴. 처음 봤던 날은 한낮에 풀숲에 나오는 모습이 꼭 아폴론인 것만 같았는데 이제 보니 투명하고 하얀 피부 덕인지 달빛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네 흙을요.”

관린은 저를 보는 지훈에게 웃는 낯을 하고는 그랬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지훈은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히아신스를 보는 척했다. 갑자기 심장이 자기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는 듯 다시 쿵쿵 뛰어왔다.

“그럼 어떡해요.”

간신히 말을 꺼내자 관린이 그런다. 사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방법이요?”

“네. 히아신스는 물에서도 자라는 거 아세요?”

“물요?”

지훈은 가드닝 책을 떠올렸다. 거기에 히아신스도 있었다. 물에 꽂아놓으면 집안에서도 키울 수 있는데 그 향이 꽤 좋으니 시도해보라는 다정스런 첨언도 적혀있었다.

“알아요! 저 알아요, 물!”

관린은 제 눈앞에 천사가 너무도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니 지훈을 마주하고 웃은 이후로 그 얼굴에서 미소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꽃대를 잘라서 물에 담그고 뿌리는 깨끗이 씻어서 새로운 흙이 담긴 화분에 옮겨 심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래도 되는 걸까요?”

“내일 교수님께 말씀드려볼까 해요.”

“아. 네.”

지훈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긁적긁적 거렸다. 관린은 그런 지훈이 귀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했다. 누가 귀엽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저, 혹시 저도 같이 가 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어, 아닌데. 저 하나도 안 바쁜데.”

지훈은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말하느라 관린의 가디건 소맷자락을 꼭 붙들고는 잡아당겨버렸다. 그에 관린이 제 소맷자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알아차린 지훈이 앗 하고 놀라며 얼른 손을 쫙 펼쳤다. 관린은 그 모습을 모고 또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같이 갈까요?”

“네, 네 같이 가요.”

관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훈도 따라 일어섰다. 관린은 이대로 지훈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그건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일어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관린에게 이번엔 지훈이 말했다.

“어. 산책… 좋아하세요?”

 

둘은 실습장을 나와 걸었다. 뒤편은 뭐 별거 없으니까 학교 건물 쪽으로 갈래요? 지훈의 말에 관린이 네,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학교부지가 꽤 커서 다 걷자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지훈은 항상 학교가 큰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학교가 넓은 것이 기뻤다. 조금 경사가 진 언덕을 넘어서니 경제대학 건물이 나왔다. 그 옆으로는 숲이 있었다. 저기 가볼래요? 관린이 말했다. 이번엔 지훈이 네 하고 대답했다.

“밤나무가 많네요.”

“밤나무요?”

지훈은 가드닝 책에 있던 밤나무를 떠올렸다.

“네 밤나무요.”

작은 숲은 고요했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 두 뺨을 간질였다. 숲에서 나는 흙냄새가 싱그러웠다. 관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데 기분은 또 좋았다. 정말 알 수가 없네. 이상하다. 제 옆에서 걷는 지훈을 내려 보았다. 동그란 머리통마저 귀여웠다. 정말 천사인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나서 이런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관린은 실없는 생각이라고 저를 꾸짖었다. 그 순간 저편에 무언가 지나갔다.

“어 저기 보세요. 청솔모예요.”

관린의 말에 지훈이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홀로 선 가로등 아래에 손에 무언가를 든 청솔모가 있었다.

“엄청 귀엽다.”

꾸밈없이 나오는 지훈의 목소리마저 관린은 귀엽게 느껴졌다.

둘은 숲을 나와서 또 한참을 걸었다. 밤이 점차 깊어지고 바람도 점차 싸늘해졌다. 지훈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손으로 양팔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얇은 티셔츠 차림이다. 관린은 제가 입은 두텁고 긴 가디건을 한 번 보았다.

“저… 추우시죠.”

“네?”

지훈은 아무리 잠깐 산책이어도 그렇지 걸칠 것을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저 자신에게 멍청하다고 아까부터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이 남자는, 저를 배려해 긴 다리를 쭉쭉 뻗지 않고 좁은 보폭으로 걷는 이 사람은, 자신이 추운티를 내면 어서 들어가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꾹 참았다. 추워도 이 사람 옆에서 걷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렇지만 막상 들어가라고 하면 싫다고 당신과 걷는 시간이 좋다고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때문에 꾹 참고 있었지만 순간 불어온 바람에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지르고 말았다.

“아뇨. 저 완전 안 추운데. 더운데. 이거 옷이…….”

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관린은 가디건을 벗어 조심스레 지훈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관린이 입고 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사람의 체온. 지훈은 놀라 관린을 올려보았다. 가디건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훈의 어깨위에 꼼꼼히 둘러주던 커다란 손이 일순 멈추었다. 관린은 저를 보는 지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천사 같은 사람. 가슴이 두근거려서 관린은 마저 가디건을 걸쳐주고는 손을 뗐다.

“고마워요.”

지훈이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계속 걸었더니 저는 더워서.”

“…….”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관린의 가디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꼭 관린이 저에게 팔이라도 두른 것처럼 느껴져 그랬다. 곧 지난 번 함께 앉았었던 벤치가 모습을 보였다. 벚나무가 잔뜩 심겨 있는 곳.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이 달빛에 흔들렸다. 얼마 피지도 않았는데 봄바람에 벌써 떨어진 꽃잎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아- 벚꽃 또 못 보겠네.”

괜히 어색한 제 마음을 떨쳐내려 지훈이 부러 크게 말했다.

“왜요?”

“증간고사 기간이잖아요. 끝나고 나면 얘도 같이 져 있을 걸요?”

“…….”

관린은 벚나무들을 보았다. 학교 안엔 벚나무가 많았다. 유럽에 있는 색과 모양새가 화려한 겹벚꽃이 아닌 서양벚나무.

“겹벚꽃이 아닌 건 오랜만에 봐요.”

관린이 지내던 영국엔 대부분이 겹벚꽃이었다.

“아 그래요? 여기도 그렇고 에펠탑 근처도 그렇고 다 이런 벚꽃이었는데.”

“에펠탑요?”

“아. 저 파리에 교환학생 갔었다구 했잖아요. 거기도 겹벚꽃이 흔하긴 한데, 에펠탑 근처에는 꼭 이런 벚꽃이라 어찌나 반갑던지.”

관린은 갑자기 지난 번 만남에서 지훈이 교환학생을 다녀왔다고 말 한 것이 떠올랐다. 어 그러고 보니 왜 까맣게 잊고 있었지? 자연스레 노트르담 근처 서점이 떠올랐다. 그 근처에서 천사를 봤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오해가 아니었던 건가? 정말, 그 때 거기 있었던 건가. 마음이 조금 어지러워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에 함께 앉았던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근데 꽃을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원예학과 맞죠?”

“원예학과는 맞는데 꽃을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잉. 아닌데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제가요?”

관린이 의아해하자 지훈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 뿌… 뿌… 아 뭐더라.”

“뿌리 파리?”

“맞아요, 그거. 짧은 순간에 그걸 캐치해냈잖아요.”

“그게 왜…….”

“그건 관심이 있다는 거니까요.”

“관심요?”

“네, 관심. 관심이 있으니 발견한 거죠. 관심의 다른 말은 애정 아닐까요?”

지훈의 말에 관린은 아아 하는 소릴 내고는 말이 없었다. 지훈은 그런 관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둥그런 보름달.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꼭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다.

관린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지훈을 보았다. 하늘을 보는 지훈을 보고는 저도 따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새까만 하늘, 새까만 밤, 그리고 자신과 천사. 꼭 드넓은 우주 속에 둘만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났다.

“식물에 애정이 많은 사람은 다정하대요.”

밤하늘에 별을 보며 지훈은 그렇게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지훈을 보았다. 오뚝한 코가 정말 멋진 사람. 지훈의 고개가 느릿하게 관린을 향했다.

“보조개가 있네요. 왜 이제야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지훈이 관린의 보조개로 손가락을 뻗었다. 오물오물 거리는 입이 귀여워서 그 입에 예쁜 말만 담을 수 있기를 관린은 어느 새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날 밤, 관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관심의 다른 말은 애정이 아닐까요. 지훈이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만 했다. 관심이 있었다. 계속 생각났다. 이 감정은 적어도 호감, 더 깊이는 어쩌면 사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항상 스스로를 냉정하다고 느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위험했다. 잘못했다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다니. 안 될 일이었다.

그 날 밤, 지훈도 잠을 못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옷장 앞 옷걸이에 걸어둔 관린의 가디건을 한 번 보고 지훈은 빙그레 웃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꺄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꾹 참았다. 비실비실 미친 사람처럼 자꾸만 웃음이 났다. 엄청나게 잘생긴 하얀 남자. 이번엔 같이 밤 산책을 했다. 심지어는 내일 만나기로 했다. 교수님께 함께 다녀오고 나면 히아신스를 옮겨 심겠지? 같이 저녁도 먹자고 할까? 지훈은 신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를 모른다. 아니 그보다 아직도 그 남자 이름조차 모른다. 나도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는데. 뭐 어때. 그거야 내일 말해주면 되지.

 

 

 

다음 날 지훈은 약속장소에 5분 일찍 나가 관린을 기다렸다. 관린은 아직 그곳에 없었다. 정각에 맞춰오려나 보다. 시계가 곧 정각을 가리켰다. 무슨 일 있나? 10분이 지났다. 왜 안 오지? 30분이 지났다. 다리가 아파 벤치에 앉고는 관린의 가디건이 든 종이백을 끌어안았다. 괜히 휴대폰을 보았다. 아차. 서로 번호도 모르지. 멋쩍은 마음에 다시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1시간이 지났다. 잊어… 버린 건가.

3시간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지훈은 알았다. 그가 오지 않을 거란 걸.

 

 

 

 

 

 

 

 

 

 

4

 

 

 

어김없이 중간고사 기간이 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도서관엔 사람이 가득했다. 지훈은 밤을 새가며 시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날 지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수를 찾아갔었다. 히아신스 이야기를 꺼내자 교수는 그거 이미 같이 돌보는 학생이 와서 말하고 갔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지훈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까먹었을 수도 있잖아. 바쁘면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관린을 찾아볼까 했다. 그렇지만 망설여졌다. 처음엔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아주 파렴치한 인간이네. 나쁜 놈. 내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나쁜 놈! 화라도 내야 했다.

나중엔 눈물이 났다. 사실 그 날 저만 기대한 건지 몰랐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약속을 한 것인데 그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릴 만한 그 정도의 것 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그날 밤 산책을 하며 느꼈던 따듯한 공기, 아름다운 밤 풍경은, 그리고 느껴졌던 다정한 눈빛은, 호감은, 모두 제 착각인지 모르는데. 지훈은 그게 너무 슬프고 속상했다. 타인의 마음과 제 마음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사무치게 아팠다.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고는 지훈의 후배인 룸메이트가 혀를 끌끌 찼다. 중간고사 기간 까지 A반과 실습이 겹치는 날은 없었다. 어느 날엔가 수업에 갔는데 강의실 가득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향을 따라가자 한 켠에 물에 담긴 연핑크색 히아신스가 있었다. 괜히 눈물이 차올라서 지훈은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 전화번호도,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인데. 사귄 것도 아닌데, 지훈은 자꾸자꾸 슬프고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보니 시험기간이였다.

운이 좋았는지 이번 학기엔 실습이 많아서 지훈은 비교적 시험이 일찍 끝난 편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지훈은 캠퍼스를 걸었다. 건물 뒤편 외진 길.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 양옆으로 벚나무가 줄지어 서 벚꽃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완연한 봄. 지훈은 자신이 봄의 한가운데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다. 만개한 벚꽃을봐야 완연한 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내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을 꼽으라면 지훈은 단연 이 길을 꼽고 싶었다. 정말 예쁜데 사람들은 본관 건물 앞에 심겨진 벚나무들만 알았다. 그래서 이곳은 꼭 숨겨진 마법세계처럼 사람이 잘 다니질 않았다. 그곳도 예쁘긴 했다. 거긴 벤치도 있고. 앉아서 고개만 들어도 정말 아름답긴 하지. 그렇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터널을 이루는 걸. TV에 나오는 유명한 벚꽃 명소가 부럽지 않은 곳이었다. 흙길이라서 사람이 잘 안다니나. 곧 흙 내음을 머금은 봄바람이 살랑 불었다. 순간 어깨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분홍빛이 도는 작고 여린 벚꽃 잎. 다시 한 번 불어 닥친 바람에 작고 투명한 벚꽃 잎이 속절없이 흘러내려 바닥을 뒹굴었다. 꼭 비처럼 꽃잎들이 내렸다. 손을 펴보아도 잡히지 않았다. 지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홍 벚꽃 잎들이 뒤덮은 하늘은 가운데만 둥글게 새파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름답다. 해마다 피는 꽃인데도 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꽃잎들이 또 파르르 떨어져 내렸다. 제 작은 손을 쫙 펴보였다.

어?

거짓말처럼 작고 얇은 벚꽃 잎 하나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다시 바람이 휙 불려 해서 지훈은 제 손을 꼬옥 쥐었다. 순간 그늘이 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앞을 보았다. 분홍빛 벚꽃 터널을 배경으로 새하얀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커다란 눈에 벚꽃을 뒤로 한 채 선 지훈이 가득 담겼다.

“…….”

“…….”

한참동안 눈을 마주치던 남자가 말했다.

“……. 당신이…… 박지훈?”

그 말에 지훈이 눈을 꼬옥 감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어느 새 지훈의 눈에 맺혔던 눈물방울들이 그 바람에 흩날려 관린의 손등에도 떨어졌다. 꽃잎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지훈은 제 앞에 있는 관린의 가슴팍을 쳤다.

“나쁜 사람. 정말 나쁜 사람. 왜 지금와요. 내가 그 날 얼마나 기다렸는데.”

목이 멘 목소리가 그랬다. 관린은 차마 미안하다고도 하지 못했다.

“같이 라일락도 보러가기로 했잖아요. 그래놓고 왜…….”

관린을 마구 치던 지훈의 작은 주먹이 밑으로 스르르 내려갔다. 관린은 그 손을 붙잡지 못했다. 지훈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관린을 올려보았다. 정말 그 였다. 모호한 표정을 하고는 저를 보는 이 사람은 제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가 맞았다. 지훈은 팔을 벌려 관린을 꼬옥 안았다.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꽃잎이 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지훈은 관린의 어깨 죽지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지훈의 반짝 거리는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근데… 근데 흑. 숨어버리니까, 그럴 수가 없어서, 내가 연락해도 되는 건지 찾아가도 되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구요.”

관린의 얼굴은 겉으로는 무미건조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지훈을 떼어내고 가버릴 수 있을 사람처럼. 지훈은 다시금 관린을 꼭 안고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있는 힘을 다 해 끌어안았다.

“이제 그 쪽 이름도 알려줘요. 전화번화도 알려줘요. 싫어하는 건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 전부 다 알려줘요.”

눈물이 가득 찬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며 그랬다. 관린은 말이 없었다.

“내가 다 알아서, 그래서 당신 찾아낼 수 있게, 다시는 기다리지 않게 다 알려달라구요!”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토해내고 나자 왈칵 쏟아졌다. 목석같이 안겨있던 관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 소리 내어 엉엉 우는 지훈을 감싸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관린은 지훈과 약속이 있던 그 날 아침까지 결국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보니 어두운 밤이 지나고 푸르른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결국 관린은 약속에 부러 나가지 않았다.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는 히아신스를 옮겨 심는 것을 허락받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가 나무가 되는 건 상관없었다. 사실 그동안 딱히 인생이 마구 즐거워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관린은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을 알았다. 눈물로 반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그 사람을 자신이 죽게 만든 것이라는 죄책감이 있었다. 세월의 굴레 속에 그들은 아픔을 안고 살아갔다. 천사 같은 사람. 놀라는 모습마저 귀여운 사람이었다. 제게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해준 첫 사람. 그런 사람을 아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 진척되기 전에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맞았다. 지훈의 마음은 짐작 조차하지 못했기에 제가 그만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알아냈습니다.”

시험기간이 끝나갈 무렵 관린이 묵고 있는 호텔에 왕칭이 왔다.

“어떻게…….”

“지난 학기 까지 교환학생을 다녀온 학생들의 명단을 얻어냈습니다.”

관린은 ‘박지훈’ 이라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매일 확인해보아도 그것은 ‘읽지 않음’에서 더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왕칭이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며 왔다.

“누구던가요.”

“이 사람이 도련님께서 찾으신 후기를 쓴 그 사람입니다. 도시공학과 학생이고 지금은 3학년이더군요.”

왕칭이 내민 사진은 뒤집어져 있었다. 관린은 기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느릿하게 사진을 뒤집었다. 꼬고 있던 다리가 절로 풀어졌다. 사진을 더욱 가까이 했다. 놀란 마음에 사진을 보던 눈을 떼어 왕칭을 보았다. 그가 말했다.

“박지훈입니다.”

제주도가 집이라서 지금은 기숙사에 산다고 합니다. 왕칭의 설명이 흐물흐물하게 들렸다. 그 이였다. 천사라고 생각했던, 단서를 찾아낼 때마다 나타났던 사람. 특이한 눈매가 아름다운, 웃는 모습이 보아 늘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사람. 라일락을 가장 좋아하고 조경학 실습도 재밌어한 사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늘 이름을 묻지 못했던 그 사람. 박지훈. 그의 이름이 박지훈 이었다. 바보였다. 다시 그를 만난 곳은 국제처였고 제 입으로 파리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 왜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 서점에서 책을 샀다고 했지. 어쩌면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을 거였다. 제주도에서 봤던 것도 그의 본가가 제주도였기 때문이구나.

바로 만나고 싶었다. 에드워드가 쓴 책. 그것만 있으면 저주를 풀 수 있다. 어쩌면, 어쩌면 그 사람을 사랑해도 괜찮은 건지 몰랐다. 바로 학교로 향했다 온 몸이 떨렸다. 기쁨과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그 모든 것으로. 학교 구석 구석을 그를 찾아 달리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분홍으로 물든 곳에서. 순간 보조개가 움푹 패이도록 환하게 웃던 관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손을 벌려 벚꽃을 잡으려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며 관린의 머릿속에 혹시라도.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혹시라도 그 책에 저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는 거라면, 혹시라도 그 책이 진짜 에드워드가 쓴 것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에드워드가 만든 그것이 책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혹시라도 지금 까지 찾아낸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저주를 풀 수 없다. 아름다운 것만 담기길 바라는 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를 수도 있다. 나로 인해. 그러면 어쩌지. 순간 지훈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반짝거려서, 너무 아름다워서 관린은 애써 합리화했다. 한 번만, 그 이름만 확인하고 그러고 돌아서자.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지만, 저 사람은 아닐 거니까. 그저 박지훈이 맞는지 정말 그런 건지. 그것만 확인하고 그러고 돌아서자. 나만 내 마음을 숨기면, 사랑이고 뭐고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나만 사랑하는 그런 건 진짜 사랑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상처주지 않을 테니까.

발을 내디뎠다.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서 관린은 침을 삼켜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묻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훈이 울었다. 저를 원망했다. 차라리 원망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를 꼭 안고서는 모든 것을 알려달라고 말하며 울었다. 마음이 벅찼다. 나와 같은 마음인 이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주춤했던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머리위로 벚꽃 잎이 비처럼 내렸다.

 

 

 

 

 

“어디에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게요. 괜찮아요. 아냐. 내가 갈래요.”

전화를 끊고 지훈은 가디건을 걸치고는 현관을 나섰다. 얼굴 가득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훈은 이제 관린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다. 이름, 전화번호, 생일, 집 주소, 원래 나고 자란 곳과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은 이제 당연했다. 좋아하는 계절, 싫어하는 날씨,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 날 지훈은 제 마음을 고백했다. 내가 생각보다 당신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이런 감정은 태어나 처음인데 나랑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이상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인데도,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본 것도 아니었는데도, 지훈은 관린이 좋았다. 전혀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남자라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좋다는 감정이 너무 가득해서 털어놓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 또 다시 사라져버릴지 모르니까, 그러면 말할 수 없게 될까 봐 지훈은 그 모든 감정을 쏟아내듯 내놓아야 했다.

 

관린은 전화를 끊고는 벤치에 앉아 지훈을 기다렸다. 1년 전 그 날. 관린은 솔직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래요, 우리 만나요. 마음속으로는 수도 없이 말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우리 그러지 말고 친구해요, 가 다였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곁에 두고 볼 수 있고 나 혼자라도 좋아할 수 있으니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제 욕심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거절하고 헤어졌어야 했다. 다시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곁에 있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이 사람이 책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옆에 있는 것이라고. 책을 찾을 때 까지만, 그 때 까지만 곁에 있을 거라고.

핑계가 있으니 좋았다. 둘은 함께 꽃구경도 하고 가을엔 단풍도 보러 가고 겨울엔 눈사람도 만들었다. 같이 수업을 듣고 함께 밥을 먹었다. 관린은 지훈의 곁에 있을 수 있었고, 반은 행복했다. 영원히 자신만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짝사랑이라면 차라리 편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훈은 거절당하고 나서도 오롯이 제 마음을 관린에게 쏟아 부었다. 관린을 궁금해 했고, 함께하고 싶어 했다. 관린으로서는 그것이 마음 아프고 힘들었다. 모두 밀어내기엔 지훈과 같이 있는 시간이 이젠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지훈은 술에 취해 관린에게 전화를 했다. 관린씨도 나 좋아하잖아아! 눈에 내가 가득한데 왜 자꾸 아니라고만 해요? 나 다 알아요. 왜? 내가 남자라서 그런 거예요? 뭐 어때. 제가요 웬만한 여자보다 더 이쁘거든요? 라이꽌린! 관린씨이 말해요, 어서 말하라고요오! 나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으흐흑. 전화통에 대고 고래고래 지르던 소리는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술에 취에 잠든 지훈을 업고 오는 것은 관린의 몫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곁을 내주면 안 되었던 거라고 관린은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이었다. 제 욕심에 일을 망치고야 말았다. 사실 다시 돌아간대도 결국은 곁을 내주고야 말 것 같았다.

책을 찾아낸 다는 핑계로 자꾸만 만났다. 책을 찾아낸다는 핑계로 자꾸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차갑게 쳐다보려고 노력하는데 자꾸만 들켜버렸다. 관린씨 지금 저 아빠미소하고 보고 있죠? 돌아선 그를 보며 마음껏 흐뭇한 미소를 지어버리다 관린은 그대로 굳었다. 지훈은 계속 돌아선 채로, 나 다 알아요. 그렇게만 말했다.

책은 이미 뒷전이었다. 관린은 제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책을 찾을 생각은 있는 거냐고. 책을 찾으면 이 사람을 떠날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관린은 책을 찾고 싶지 않아졌다. 책을 찾기 위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계속 찾지 못한 채 이대로 있는 게 좋았다. 그래서 관린은 지난 시간동안 책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훈이 혼자 애태우고 속앓이를 하는 것을 볼 때면 다 말해버릴 까 싶기도 했다. 저, 사실 사랑을 하면 나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지훈씨가 가지고 있는 그 책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저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 모르거든요. 그렇지만 두려웠다. 지훈이 저를 괴물처럼 볼 것을 생각하면 무서웠다. 관린은 그런 제 자신이 어이가 없고 한심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를 좋아하지 않아 줄 걸 바라면서도 한 편으론 저를 괴물처럼 생각하고는 싫어하게 될까봐 그게 두려웠다.

‘나는 정말 구제불능인가.’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아름다웠다. 책의 소재를 알아낸 지 벌써 1년 가까이 지났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겁쟁이처럼 이렇게, 이렇게 피하기만 하고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로만 만족해야 하는 걸까.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계속 무시하면서.

순간 저 멀리 밝게 웃으며 팔을 높이 들고는 팔랑팔랑 흔드는 지훈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관린이 벌떡 일어나며 환하게 웃다가 얼른 미소를 숨기고는 어색하게 한번 팔을 흔들어보였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팔짱을 껴오며 말하는 지훈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놓으며 관린은 지훈씨가 먹고 싶은 거면 다요, 대답했다.

“치사하다. 손잡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 낀 건데 정색하면서 뺄 일이에요?”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이다 그럼 저 이건 잡아도 되죠? 하며 관린의 가디건을 잡고 흔들어 보였다. 관린은 결국 피식 웃으며 그래요, 하고 대답해버렸다. 웃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지훈은 얼른 관린의 보조개를 콕 집으며 한 번! 오늘 한 번 웃었어요! 캬캭 대며 숫자를 셌다.

‘그래, 이대로도 좋아.’

관린은 애써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지훈은 제 옆을 걷는 관린을 몰래 쳐다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를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이대로도 좋을지 몰라. 처음에는 이상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만난 관린은 자꾸만 지훈에게 거리를 두려고 했다. 분명 밤 산책을 하던 날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무뚝뚝해진 관린이 지훈은 속상했다. 하지만 알았다. 관린이 저를 차가운 눈으로 보려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어느 날엔가 자신을 바라보는 관린의 얼굴이 차 유리창에 비쳤던 날 지훈은 알았다. 그는 누구보다 다정한 얼굴로 지훈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밤 산책 때의 그 얼굴과 같아서 지훈은 안도했다. 술에 취해 어디선가 곯아떨어져도 늘 기숙사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귀소본능 쩐다. 단순히 그리 생각했지만 어느 날엔가 술에 깼을 때 너른 등판에 업혀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얼른 다시 잠든 척 눈을 꼭 감으며 눈치 챘다. 그 등이 관린의 것이라는 걸. 그래서 관린의 감정이 저와 같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왜일까. 왜 나를 피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같은 남자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훈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연을 말해주기를. 시간이 갈수록 관린은 더 느슨해졌고 잘 웃었다. 지훈은 그것이 마냥 좋았다. 그 이야기를 해줄 때 까지 이렇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련님.”

“왕칭.”

지훈과의 만남 이후 호텔로 돌아왔을 때 오랜만에 왕칭이 와 있었다.

왕칭은 관린이 책을 가진 지훈을 만난 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았다. 늘 직진하듯 일을 해결해 왔던 관린이었다. 직접 만나고 부딪히고 직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모습들이 늘 당당한 그런 사람.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만큼은 달랐다. 한 달이 지나도록 책을 찾았다는 소식이 없었다. 이상해서 관린에게 묻자 짧게 아직이에요, 라는 대답만 왔다. 왕칭은 관린의 뒤를 밟았다. 처음엔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관린이 박지훈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짓는 표정을 보고는 알았다. 도련님이 사랑에 빠지셨다는 것을. 책을 핑계로 그저 만남을 지속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투명하고 커다란 눈이 두려움을 숨기질 못했다. 왕칭으로서는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차라리 책을 찾고 저주를 푸세요. 그럼 그 분을 계속 만나실 수 있습니다.”

왕칭의 그 말에 관린은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저주를 푸는 방법이 없으면 어떡해요. 제 어린 주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왕칭은 책을 빨리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칭의 독촉에 관린은 그만 전화를 차단하고야 말았다. 관린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직접 오는 수밖에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관린은 태연한 척 말했지만 왕칭이 또 다시 독촉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무슨 말로 핑계를 댈지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숙부님이 눈치 채신 것 같습니다.”

“네?”

“요즘 제게 미행이 따라 붙는 것 같아서 역으로 제가 습격 했습니다. 숙부님께서 보내신 인사였습니다. 숙부님께서 다 알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가문에 비밀로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가문 사람들도 저주를 풀고 싶어 할 터였다. 제가 저주를 풀러 여기 와있다는 사실이 가문의 사람들에겐 응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왕칭의 표정이 이상하다.

“하는 수 없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문의 지원을 받으면서,”

“곧 가문에서 모든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입니다.”

“네?”

“숙부님은 저주를 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관린은 당황하여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만 같았다. 박수를 쳐줘도 모자랄 판에 지원을 중단하다니. 게다가 저주를 깨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왜?

관린의 머릿속에 슬픈 얼굴을 해보이던 가문의 여인들과 항상 화가 나 있던 가문의 청년들이 떠올랐다. 뭐가 문제야 도대체.

“저도 왜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서 제가 급히 왔습니다. 얼른 책을 찾아 저주를 푸셔야 합니다. 지금 숙부님이 책을 없애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설마 지훈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네. 서두르셔야 합니다!”

관린은 얼른 다시 옷을 걸쳐 입고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며 왕칭을 따라 호텔을 나섰다. 숙부의 욕망으로 가득 찬 누런 빛의 눈이 떠올랐다. 신호음이 여러 번 가는 동안 관린의 손톱이 잘근잘근 깨물렸다.

 

 

 

“흐으응~”

지훈은 콧노래를 하며 샤워를 하고 있었다. 주말동안 룸메이트가 집에 내려가 기숙사엔 저 혼자였다. 덕분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는데 밖에서 누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지훈은 서둘러 마저 거품을 씻어내고는 수건으로 얼른 물기를 닦은 뒤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쿵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려 대는 통에 지훈의 마음이 괜히 급해졌다. 뭐야. 옆집인가? 뭐 빌려달라고 하려는 건가. 욕실을 나와 문을 열려는데 책상위에서 휴대폰이 반짝 거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위협적으로 쿵쿵쿵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댔다. 그러더니 곧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야?’

이상했다. 이곳은 외국인 기숙사가 아니었고, 외국어가 들릴 이유가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10시. 이 시간에는 여기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 방문이 불가했다. 뭐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 지훈은 얼른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네 관린씨.”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지금 기숙사 안이에요?

“네. 근데 이상해요. 밖에 누가 온 것 같아요.”

관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와 있다니. 왕칭에게 더 빨리 가달라고 눈짓을 하고는 말했다.

“지훈씨. 파리의 Shakespeare&Company에서 산 책 있죠.”

지훈은 깜짝 놀랐다. 이 책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알았지? 이걸 어떻게…….

— 그걸 챙겨요. 그리고 어서 나오세요. 밖에 와있는 사람들한테 절대로 책을 넘겨줘서는 안 됩니다. 그 자들은 위험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관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잠시 고민했다. 이 책을 알고 있는 관린과 밖에 있는 사람들. 어쩌면 관린도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훈은 짧은 순간 고민을 끝내고는 얼른 책상위에 있던 가드닝 북을 들어 검정색 에코백에 집어넣었다. 베이지색 에코백이 튼튼한데. 그런데 보이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눈에 보이는 자켓을 아무거나 걸치고는 관린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 조경학 실습이 있었던 실습장 뒤편의 도로가로 오세요. 데리러가고 있습니다. 5분 내로 도착해요.

“네.”

전화를 끊고는 지훈은 어깨에 에코백을 멨다. 밖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끊이더니 곧 삐삐빅 하는 전자음이 들려왔다. 지훈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도어락을 열고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으 어째. 지훈은 크게 나 있는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방충망이 달린 창까지 열고나니 아직은 시원한 밤의 봄바람이 훅 끼쳤다. 바깥은 벌써 새까맣게 어두웠다. 지훈은 원래 4층에 있는 방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룸메가 휴학을 하면서 방이 바뀌어 어쩌다 보니 2층을 쓰게 되었다. 창 옆에 있는 배관이 튼튼해 보였다. 그 아래는 화단이다. 해볼 만했다. 휴대폰을 에코백에 넣고는 창밖으로 몸을 꺼냈다. 비교적 넓은 난간 위에 서서 지훈은 팔을 뻗어 배관을 잡았다. 가드닝 북의 무게가 쏠려 순간 몸이 휘청했다.

‘엄마야!’

후 죽을 뻔 했다. 안도의 숨을 내쉰 채 지훈은 배관의 마디마디를 밟고는 천천히 내려갔다. 무서울 테니 되도록 아래는 보지 않았다. 그저 온 정신을 내려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곧 땅에 거의 이르러 폴짝 뛰어내렸다. 갑자기 거칠은 중국어가 들려왔다. 지훈의 방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온 몸이 떨렸다. 지훈은 어깨에 멘 가방은 끈을 힘을 주어 쥐고는 얼른 새까만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지훈이 실습장 뒤편 도로에 도착했을 때 까만 벤츠 옆에 관린이 서 있었다. 지훈의 인영이 보이자 관린은 얼른 뛰어 지훈에게 갔다.

“지훈씨.”

“헉……. 헉……. 어떻게… 된 거에요?”

달려오느라 숨이 차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별안간 중국어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에서 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일단 타요!”

관린의 말에 지훈은 얼른 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이 올라타자마자 차는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죠.”

“지훈씨 미안해요. 이제부터 설명할게요.”

관린은 검정 양복의 사람들이 더 이상 차를 뒤쫓아 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어쩌면 평화로웠던 시간들은 다 끝난 걸지도 모른다. 관린은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우리 가문은 저주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정을 통하게 되면 나무가 되고 말아요.”

피하려고 했다. 피해왔다. 그렇지만 무수히 연습해 본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이 사람 앞에서 내가 말해야 한다면 그런 거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싶어서 수도 없이 연습한 말. 그 말을 결국 꺼내고야 말았다. 지훈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그래서…….”

지훈은 관린의 말을 단숨에 모두 믿었다.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저에게도 일어났던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이미 경험해서였기도 했고, 관린의 얼굴과 말투가 너무도 진실해서였기도 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훈은 관린과 작년에 함께 같던 라일락 숲을 떠올렸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지훈이 억지로 끌고 간 학교 뒤 얕은 산에 자리한 라일락 숲. 라일락이 보이지 않는 곳부터 벌써 그 향이 진동하여 두 사람은 그 향에 이끌리듯 걸어갔다. 얼굴에 표정은 없었지만 부러 보폭을 줄여 지훈에게 발을 맞춰 걷는 관린의 모습이 여전해서 반가워 눈물이 날 뻔 했던 날이었다. 숲은 고요했고, 아무도 없었다. 홀리듯 걸어간 그곳엔 라일락 나무가 가득했다. 짙푸른 숲은 보랏빛으로 가득했고, 매혹적인 향은 싱그러운 풀내음, 풋풋하고 신선한 흙내음과 섞여 한층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신비한 빛깔과 몽환적인 향에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관린은 천천히 라일락 나무 아래로 걸어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가득 핀 라일락꽃에 하늘마저 보랏빛으로 물든 느낌. 지훈은 저와 같은 것을 느낄 관린의 모습에 행복했다.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한참 만에 입을 연 관린의 순수한 놀라움에 지훈이 매우 기쁘기도 했던 날이다.

“지훈씨는 만약에 죽으면 뭐가 되고 싶어요?”

다시 오래도록 라일락을 바라보던 관린이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훈에게 물었었다.

“죽으면요? 음……. 전 죽으면 귀여운 강아지요. 우리집에 있는 강아지 정말 상팔자거든요. 살쪄도 칭찬받는다니까요. 저도 부잣집 강아지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관린씨는요?”

“저는…….”

발랄하게 대답한 지훈과 달리 보랏빛 꽃으로 가득 찬 커다란 눈을 하고는 관린이 천천히 그랬다.

“라일락 꽃이요.”

“네? 라일락이요?”

“네.”

매번 저를 피하려고만 했던 관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먼저 했던 질문. 그리고 제 질문에 대한 대답. 그 때는 그저 이사람의 말에서 꼭 라일락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고 그렇게 그저 아름답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 걸 물었던 건가. 지훈은 문득 보랏빛 라일락 꽃이 그 향기가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제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관린의 모든 순간들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었다. 어떤 마음인지도 짐작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몰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확실히 믿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려워했을 지도 모른다. 저를 사랑함으로 인해 나무가 되어 사라져 버리면 그러면. 지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눈물이 제 무릎위로 툭툭 떨어졌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였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나는 맨날 재촉하기만 하고. 자책하는 지훈의 얼굴이 관린의 커다란 손에 의해 들렸다. 그 손이 지훈의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마요. 모두 내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난……. 그저 지훈씨 옆에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지훈씨가 날 어떤 마음으로 보는 지 다 알면서도, 더 용기 내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

지훈은 관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관린이 말을 이었다.

“사실 지훈씨가 들고 있는 그 책. 그것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물건입니다.”

“네? 이…게요?”

지훈은 놀라서 제 어깨에 멘 에코백을 앞으로 들었다. 이게 왜? 보통 책이 아니란 것을 알긴 했다. 평범한 책은 아니었다. 지훈은 파리에서 이 책을 가지고 왔던 날을 떠올렸다. 제 손에서 다시 생기를 찾았던 말린 꽃, 그 꽃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난 콩깍지, 제 꿈에 나왔던 청록색 코트의 남자, 그가 있던 정원에서의 경험들. 마법과도 같던 믿기지 않던 일들이. 그저 즐겁게만 여겼는데.

“그 책을 쓴 사람이 가문에 저주를 내린 사람입니다.”

“네?”

“제가 찾은 단서들에 의하면 그 책에 제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럴…리가…….”

지훈은 혼란스러웠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거야, 진즉에 책을 보여 달라고 하지.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지만. 마법 같은 나날들을 선물한 청록색 코트 아저씨. 그 사람이 저주를 내린 사람이라고? 게다가 이 책에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쓰여 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지훈이 이 책을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저주에 대한 이야기도, 그 저주를 푸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제가 그 책을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그렇지만.”

지훈은 책을 꺼내 내어놓았다. 「The True Love」. 금박의 책 제목이 어둠속을 달리는 차안에서 유달리 빛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에드워드의 후손이 기억하고 있던 제목과 일치했다. 관린은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보는 지훈의 옆모습에 불안이 가득 담겼다. 저주가 풀린다면 그렇다면 나와 관린 씨는 마음껏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훈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 책 그 어디에도 그런 방법은 써 있지 않다.

관린은 재빨리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건. 꽃나무에 대한 그림, 그리고 자세한 설명. 가드닝 북이었다. 제목 때문에 소설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책에 관린은 당황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그림도 글씨도 모두 직접 그리고 쓴 것이었다. 정성이 가득한 책. 정말 이 책에 끔찍한 저주를 풀 수 있는 주문이 적혀있단 건가.

“도련님. 서두르십시오, 뒤에 벌써 차가 따라 붙었습니다.”

“최대한 따돌려주세요 왕칭.”

관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강 넘기기 시작했다. 자세히 읽기에는 페이지가 꽤 많았다. 책을 넘기기 전까지 어서 저주에 대해 쓰여 있는 페이지를 찾아내야했다. 책의 중반부에 이르자 딸기가 나왔고 후반부에 이르자 수국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는.

“아카시아?”

그게 다였다. 책의 맨 뒤에 붙어있는 종이봉투를 열어 살펴도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저, 그 안에 말린 꽃이 들어있었어요. 그게 제 손에서 살아났어요. 7일 동안 살다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콩깍지가 나타났죠. 거기에 햄스태드라고 쓰여 있어서 그래서 저택엘 갔었어요.”

“설마.”

“파란 문의 3층 다락까지 있는 집요. 그 집 정원에서 내손이 닿자마자 아카시아 나무가 꽃을 피웠죠.”

관린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꽃이 피지 않았던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날 정원에 지훈이 왔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그게 다예요.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내용에 힌트가 있을지 몰라요.”

관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라일락은 야외를 좋아하는 식물로서 실내 보다 정원에 키우기에 적합하다……. 겨울의 추위를 겪고 나야 오히려 꽃을 제대로 피울 수 있다……. 줄기에서 잘라내면 하루도 못 가 시들기 때문에 꽃다발로 만들기 어렵다……. 이건 아니야. 페이지를 넘겼다. 일조량이 좋고 배수가 잘되는 곳을 골라 심어야 한다……. 벚나무는 전정을 싫어하므로 되도록 잘라서는 안 된다. 잘 못해서 잘려나갈 경우 균이 침투하여 그 부분의 가지가 말라죽기 쉽다……. 아 이것도 아니야.

아무리 제대로 읽어봐도 그 안에는 어떤 힌트도 없었다. 순서대로 글자를 이어붙이면 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이대로. 안 돼. 그럴 리 없어. 어느 새 관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가드닝 북을 적셨다. 하도 오래전에 써서 그런지 책의 잉크는 좀처럼 번지질 않았다. 관린은 서둘러 책 위의 눈물을 닦아내고는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무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차츰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가슴에 자꾸만 무거운 돌덩이가 쌓이는 듯 답답해져갔다.

옆에서 그런 관린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저주를 풀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쓰여 있지 않다는 걸 알았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관린씨 눈에는 보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두워지는 관린의 얼굴을 보며 지훈의 눈에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끼익-

별안간 자동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멈췄다. 두 사람 모두 책을 보느라 앞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두 사람 눈에서 눈물이 양 볼로 흘렀다. 지훈은 얼른 그것을 닦아내고 밖을 보았다. 양 옆에 방파제가 있고 바로 앞은 넘실대는 바다였다.

“죄송합니다. 따돌린다는 게 그만.”

왕칭이 말했다. 막다른 길이었구나.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관린은 짤막하게 대답하며 눈물을 닦고는 차에서 내렸다. 별 수 없었다. 지훈도 제 에코백에 다시 가드닝 북을 넣고는 따라 내렸다. 칠흙 같은 어둠. 타고 온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곧이어 관린의 차를 따라오던 검은 차량의 앞문이 열리고 운전기사가 나와 뒷문을 열었다. 조금은 거만한 움직임으로 내리는 자는 숙부였다.

“라이관린.”

“…….”

“네가 저주를 풀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일을 꾸며왔다니. 왜 몰랐을까.”

지훈은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관린은 지훈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고는 제 뒤로 지훈을 숨겼다.

“용케 책까지 찾아내다니. 놀랍군.”

“왜.”

관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적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관린은 알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저주를 푸는 것을 왜 막고자 하는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관린은 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저주를 푸는 것을 막으려 하십니까.”

“너는 왜 저주를 풀려 하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주로 인해 가문의 많은 남자들이 사라졌고, 남겨진 사람들은 괴로움의 시간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뱃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누군가는 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그 말에 숙부가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이 소름끼쳐서 지훈은 관린의 옷소매를 더욱 꼭 붙들었다. 관린이 손을 뻗어 그런 지훈의 손을 꼬옥 쥐었다. 악수 이후 처음 잡는 손에 지훈은 두려운 와중에도 떨렸다. 관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되던,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단순히 다른 놈들이 머저리 같아서 너를 후계자로 택했다고 생각하나?”

숙부는 갑자기 다른 이야길 꺼냈다.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 왜…….”

“네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멍청하게 그깟 감정에 휘둘려 목숨을 잃는 한심한 인간이 아니라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지.”

“같은 부류라니.”

꼭 쥔 관린의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하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겠나. 네 눈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샀어. 쓸데없이 저주를 풀겠다고 죽은 네 아버지처럼 가문을 어지럽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나온 아버지 이야기에 관린은 놀랐다. 아무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질 않았다. 설마, 설마 이 자가 아버지를?

“당신이 아버질!”

“아 물론 그건 아니야. 네가 손 쓸 필요도 없이 그는 나무가 되어버렸다. 에드워드에게는 늘 감사하고 있지.”

“감사라니!”

“기회를 주겠다. 저주를 푸는 것을 멈춰라. 그 책을 이리 내.”

숙부는 손가락으로 지훈의 에코백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지훈은 뭐라고 말하는 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손가락질에 아무래도 가드닝 북을 달라고 하는 건가 생각하며 관린의 뒤로 완전히 숨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제 뒤의 바다를 보았다. 넘실대는 시꺼먼 바다가 고요한 만큼 무서웠다. 다시 얼른 고개를 돌려 관린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주를 풀고 말 것입니다.”

“그깟 사랑이 뭐가 중요해. 라이관린. 너는 네가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당연하다니…….”

사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집안은 부유했고, 자신 뿐 아닌 다른 사촌 형제들 모두 당연한 듯 펑펑 돈을 써댔다.

“우리가 받은 건 저주가 아니야. 축복이다. 에드워드는 저주를 내리면서 동시에 더 큰 축복을 내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다. 왜 우리 가문이 손 댄 무역업이 성하기만 했는지, 그로부터 손을 떼고도 왜 우리가문이 늘 풍족한지 네 까짓 게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 당연하다. 에드워드는 사랑 대신 부(富)를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저주가 풀리면 그와 동시에 재산도 바닥나버리고 만다는 이야길 하는 거다.”

숙부가 심각하게 말했다. 아. 그래서.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간 가문 내에서 저주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지 않았던 것도, 티끌만한 단서더라도 직접 찾아나서야 했던 것도, 모두 어쩌면 저주가 풀리는 것을 막고 싶어 하는 쪽에서 손을 썼기에 그랬던 것인지 몰랐다. 저주를 풀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저도 모르는 사이 가문 내에는 그런 알력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라이관린. 너도 이제 내 편에 서!”

사랑과 부를 맞바꿨다. 가문의 부유함. 그 모든 것이 축복이라니.

“사랑이 없이 어떻게 재력이 축복이 될 수 있어?”

“뭐?”

“그런 건 빈 껍데기에 불과해! 라이가로 온 여자들을 봐.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아. 남자들은 어떻고. 그 많은 돈을 물 쓰듯 써대고 심지어 약까지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역시 행복하지 않지. 당신 아들도 마찬 가지 잖아!”

관린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탕- 하는 총성이 들렸다. 모두 놀라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헐! 어… 어떡해요! 저 사람은 누군데 저래요.”

지훈이 놀라 물었다. 왕칭이 누군가에게 붙잡힌 채로 있었다. 그리고 왕칭을 붙잡고 있는 자가 하늘로 한 발의 총을 쏘았다.

“그 아들 여기 있다.”

히죽 히죽 웃으며 왕칭을 잡고는 총을 겨눈 채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오는 이는 라이진이었다. 저 사람의 아들입니다. 관린은 지훈에게 짧게 설명했다.

“가문에서 서열도 낮은 네가, 감히 내 행복을 논해? 어이가 없군. 그 책 빨리 내 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을 쏘겠다.”

“도련님 괜찮습니다. 제 희생으로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윽-”

“닥쳐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왕칭의 목을 한 팔로 조르며 라이진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말 인진 모르겠지만 책을 달라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관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다고 왕칭을 죽게 놔둘 순 없다.

“지훈씨.”

“네.”

“이 책, 무슨 일이 있어도 넘겨주지 마세요. 알았죠.”

“네? 그치만…….”

“내가 일단은 숙부한테 가야 일이 끝날 것 같아요. 왕칭을 죽게 할 순 없어요.”

“관린씨…….”

지훈의 눈에 차오른 눈물을 미리 훔쳐내고는 관린이 말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숙부가 책을 찾으러 온 걸 보면 분명 그 안에 저주를 풀 수 있는 힌트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절대로 넘기면 안돼요. 내가,”

목이 메어 관린은 한 번 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반드시 돌아올게요.”

“아아 안돼요!”

“걱정 말아요. 나 믿죠? 한 번만 믿어줘요.”

지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린은 천천히 지훈의 손을 놓았다. 어떻게 되던 놓지 않으려 했는데. 순식간에 다짐이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지훈은 눈앞에서 멀어지는 관린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저에게 화가 나 눈물이 흘렀다. 왜 이런 저주를 건거에요 아저씨. 만나지도 못한 에드워드를 원망했다.

“왕칭을 놓아주세요.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관린은 숙부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숙부는 환하게 웃으며, 잘 생각했다. 하고는 두 팔을 벌렸다. 가문의 본가가 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살게 되었을 때 숙부가 환영한다며 저를 안아주던 일이 떠올랐다. 그 때도 관린은 숙부가 싫었다. 그 모든 게 내 감이었나. 쓰게 웃으며 관린이 숙부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관린씨!”

“윽-”

“책을 어서 내 놔.”

숙부는 관린이 다가오자 안지 않고 얼른 목을 휘감은 뒤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관린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지훈에게 유창한 한국말로 말했다. 안돼요, 안돼요, 지훈씨! 관린이 안간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저주를 영원히 풀지 못하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네가 책을 주지 않겠다면 이 아이도 죽고 결국 너도 죽을 거야. 빨리 내 놔!”

“안 돼, 안 돼 도망가요, 난 괜찮아요. 도망쳐요 지훈씨!”

“어, 어떻게 내가 그냥 가요…….”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군. 빼앗아!”

숙부의 명령에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다른 차에서 사람들이 내려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악 이러지 마세요! 이거 놔! 지훈은 에코백을 품 안에 안아들었지만 건장한 남자들 여럿에게 당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좋아. 이 아이를 결박해.”

숙부의 말에 남자들이 관린을 잡아 양 팔을 뒤로 묶고는 재갈을 채웠다. 관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관린씨! 관린씨!”

책을 빼앗긴 지훈 역시 관린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다른 남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숙부는 품에 총을 도로 집어넣고는 책을 받아들었다.

“고맙군. 저주를 풀 수 있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내 손에 가져다 바치다니. 아주 잘했어.”

무릎이 꿇린 채 노려보는 관린의 눈을 마주하고는 숙부가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 손님도 고맙고.”

남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이거 놓으라며 울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지훈에게도 한 마디를 해보이고는 숙부는 책을 든 채 시꺼먼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자, 다들 인사해. 영원한 저주를 위해, 우리 가문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숙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드닝 북을 높이 들었다. 「The True Love」칡흙같은 어둠속 그 제목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와 동시에 숙부는 힘껏 책을 바다에 던졌다.

풍덩-

“아! 안 돼! 안돼에!”

지훈이 울부짖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관린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책은 그 무게가 무거웠던 만큼 깊이깊이 시꺼먼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탕탕탕- 그것도 모자라 숙부는 품에 넣었던 총을 다시 꺼내 자신이 책을 던져버린 그 곳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

“속이 다 시원하군. 이제 걱정 없이 발 뻗고 누워 자겠어.”

숙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이진 옆을 지나며 놔 주고 차에 타, 명령했다. 라이진은 입맛을 다시며 왕칭을 놓아주었다. 오랜 시간 목이 졸렸던 왕칭은 힘없이 스르륵 쓰러졌다.

“라이관린을 재우고 차에 태워!”

그 말에 남자들이 완강하게 발버둥치는 관린을 겨우 제압한 뒤 흰 수건으로 그의 코와 입을 막았다. 이내 기절한 관린이 차에 태워지는 것을 보며 지훈은 관린씨하고 소리 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 다들 돌아가자고.”

차에 올라타며 한 그 말에 모두 지훈을 놓고는 차에 올랐다. 지훈은 풀려나자마자 그들을 뒤쫓았지만 센 힘에 붙잡혀있어서 그만 팔다리에 힘이 금세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돌아가는 차들을 보며 지훈은 목이 쉬어버려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끄윽 대며 울었다.

언제 그렇게 시끄러웠냐는 듯 고요한 그곳엔 파도만이 철썩 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5

 

 

 

겨우 정신을 차린 왕칭이 지훈을 데려다주었다. 지훈은 오는 차안에서 내내 울었다. 돌아와서도 주말을 꼬박 앓아 누웠고, 그 다음 주가 되어도 수업에 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형 진짜 왜 이래요. 제주도 갔다 와야 되는 거 아니예요?”

룸메이트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도 없이 아파서 겨우겨우 괜찮아 라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양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는 진짜 오늘 나 학교 갔다 와서도 이러면 형 응급실에 데려갈 거예요. 하고는 이마에 얹어놓은 수건을 다시 찬 물에 담갔다가 쭉 짜서 정성스레 올려주고는 나갔다.

지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눈앞에서 종적을 감춰버린 라이관린, 그리고 제가 빼앗겨 없어져 버린 가드닝 북.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제 탓인 것만 같아 지훈은 너무 아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저로 인해 저주를 막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훈은 꼭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거길 따라가서는. 관린씨 말을 듣고 도망갔어야 했는데. 차라리 책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어야 했는데. 별의 별 생각들이 지훈을 괴롭혔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 봤자 그 모든 일들이 이미 벌어져 버렸고 이미 지나가 더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지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한나절 그렇게 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진동이 울려 잠이 깼다.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 설마?

— 접니다. 왕칭.

 

 

 

“안 먹겠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나십니다.”

“숙부에게 전하세요. 이럴 바엔 죽이시라고요.”

“후. 알겠습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갔다. 여기가 어딘지 알 길이 없었지만 관린은 아마도 홍콩 본가 소유인 한국 별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홍콩 본가였다면 자신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관린은 탈출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지하실인지 방 안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고, 나가는 문은 단 하나였는데 이중문 이었다. 저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러 오는 사람들조차 이 안까지 들어오질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날카로운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식사용 스푼이나 포크도 꼼꼼히 가지고 가버리니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걸까. 해가 들 질 않으니 알도리가 없었다. 방안엔 시계조차 없었다. 제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자고 일어난 것만 세 번. 그렇다고 3일이 지났다고 단정하기조차 어려웠다. 그 때 쯤 숙부가 왔다.

“널 왜 죽이지 않은 지 알아?”

“그냥 죽이세요.”

“넌 그 아이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아이만 없다면 넌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테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 그 보다 이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설마, 설마 지훈일, 지훈일 해칠 거예요?”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살아. 너도 봤잖아.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숙부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 눈앞에서 그 책이 가라앉는 걸 똑똑히 보았다.

“며칠 더 여기서 생각해 봐. 감정 없이 부를 쌓는 것에 대한 재미를 나와 함께 느끼는 것에 대해 말이야.”

말을 마치고는 웃어대며 숙부가 방을 나갔다. 관린은 그 날부터 더 이상 탈출을 시도 하지 않았다. 숙부의 말이 맞았다.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이상, 자신은 지훈을 더 이상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수액을 좀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는데 들어봄직한 목소리가 방 밖에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먹을 것을 모두 거부했다. 그 때문에 숙부가 보낸 건가. 곧 하늘색 옷을 입은 남자 간호사가 두 명 들어왔다. 방문이 도로 닫혔다. 키가 큰 남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그 모습에 관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왕칭!”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왕칭의 말에 관린이 옆에 선, 키가 좀 더 작은 간호사를 보았다. 설마. 마스크로도 가리지 못한 눈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오로지. 하늘 색 옷을 위로 벗어내자 흰 셔츠가 나왔다. 그러고선 그가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지훈!”

“나에요.”

“여긴 어떻게……!”

“왕칭이 데려왔어요.”

그 날 지훈은 왕칭에게서 도련님을 만나 뵙게 해드리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물론 왕칭 역시 몰래 잠입하는 것이었다. 오는 내내 왕칭은 그랬다. 오늘 밤만 입니다. 앞으로는 어려울 수 있어요. 가문의 힘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지훈은 그저 고개를 한두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마지막이라니. 그럴 순 없었다.

관린은 눈앞에 지훈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순간 방안 곳곳에 설치된 CCTV가 떠올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것을 올려보았다.

“상황실을 통제했습니다. 다른 화면과 바꿔치기 한 덕에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바깥 경비가 삼엄해서 도저히 도련님을 모시고 나갈 수가…….”

“나도 잘 압니다. 이것만도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지훈씨도 나오셔야 합니다. 수액을 맞는 최대한의 시간을 설정했습니다만 그 이상은 위험합니다.”

“네.”

그 새 울먹이던 지훈이 겨우 대답을 했다. 왕칭은 두 사람을 보고는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마스크를 끼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서로를 눈에 담기만도 바빠 둘은 아무런 말없이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입술도 까칠하고. 아팠던 거예요?”

관린의 말에 지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관린씨야 말로 이게 다 뭐에요. 가뜩이나 말랐으면서 더 말랐어.”

지훈이 관린의 손목을 붙잡고는 말했다. 제가 아팠단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지훈은 마른 얼굴을 하고 있는 관린 때문에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지, 왜 안 먹고 버텨서는.

“아니에요. 나 괜찮아요.”

“거짓말. 수액 맞아야 할 정도이면 얼마나 안 먹은 건데요.”

관린은 제 눈앞에 지훈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뻐 활짝 웃어보였다.

“난 정말 괜찮아요. 지훈씨야 말로 많이 아팠던 사람 같은데.”

걱정 어린 관린의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해서 지훈은 울컥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이라니. 이 사람과 마지막이라니. 관린의 엄지가 부드럽게 눈물을 닦고 지나갔다.

“왜 울어요. 이렇게 만났는데.”

“모르겠어요. 울면 안 되는데, 모든 게 일렁거려서 당신을 온전히 담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요.”

지훈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며칠 간 아팠던 게 틀림없다. 관린은 제 마른 모습은 생각도 않고 지훈의 까슬한 입술만이 신경 쓰이고 속상했다. 관린은 지훈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1년 전, 지훈이 관린을 안았던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지훈이 관린의 품에 쏙 들어가 안겼다. 지훈은 관린의 심장이 제 심장 못지않게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맞닿은 몸이, 저를 폭 안은 그 품이 좋아서 지훈은 행복했다. 관린도 지훈의 뛰는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금세 마지막이 올 줄 알았다면 이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안아줄 걸. 제 감정을 억눌렀던 시간들이 부질없이 느껴져 관린은 웃음이 났다. 한참 안고 있던 관린이 제품에서 지훈을 천천히 꺼내어 놓았다. 눈물을 그친 지훈의 얼굴을 커다란 눈에 가득 담으며 관린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 밤.”

“…….”

“내가 당신을 안아도 될까요.”

지훈의 커다란 눈이 점점 커졌다. 관린의 양팔을 붙잡고 있던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관린이 따스한 눈빛이 오롯이 지훈만을 향했다.

“관린씨, 안돼요.”

겨우 겨우 지훈은 단어들을 내어놓았다. 당연한 말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함께 밤을 보내더라도 아무 일이 없을 거였다. 사랑이 없었다면 지훈은 얼마든 관린과 밤을 보내어 주었을 것이었다. 저만 사랑했다면 그렇다면 관린이 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그랬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누구보다 이제 관린의 마음을 잘 알았다. 관린은 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그 마음을 내놓은 적은 없었지만 그의 손길이, 그의 눈빛이, 그의 모든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돼요. 알잖아요. 그러면 나무가…. 나무가 된다는 거. 관린씨를 잃을 순 없어요.”

“지훈씨.”

나즈막히 말하는 관린의 목소리가 따뜻해서, 너무도 상냥해서 지훈은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 때문에 저주를 풀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나보고…….”

“지훈씨. 그건 지훈씨의 탓이 아니에요. 아마 거기서 내말대로 도망쳤다 해도 금세 붙잡혔을 거예요. 그건 지훈씨도 잘 알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지훈씨가 마음아파선 안돼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지훈씨 앞에 나타난 게 잘못이죠.”

“아니에요.”

지훈이 외마디 그랬다.

“그게 왜 잘못이에요.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평생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을 거라구요. 당신은 내게 선물과도 같은 사람인데. 으흐흑.”

관린은 눈물 흘리는 지훈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더는 울지 않길 바라서, 그리고 제 눈물을 지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지훈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제 마음이, 제 마음이 더 아파요.”

눈물을 참으려 띄엄띄엄 전한 말이 소리가 되기 전에 울림이 되어 관린의 품에 안긴 지훈의 몸으로 전해졌다.

“그러니 오늘… 당신을 안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럴 순 없어요. 그래선 안돼요.”

지훈은 관린의 품에서 벗어나 관린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말했다.

“알잖아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거.”

그렇게 말하는 관린의 눈이 가득 찬 눈물로 반짝였다.

“이렇게 오면 돼요. 이렇게 몰래. 우리… 우리 만날 수 있어요 계속.”

관린의 양팔을 붙잡은 채 지훈은 목이 꽉 막히는 것을 겨우 참아가며 말했다. 그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관린은 커다란 손으로 지훈의 얼굴을 잡고는 또다시 엄지로 눈물을 훔쳐냈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써 웃어보였다. 지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관린의 손을 타고 흘렀다. 관린은 말을 하는 대신 천천히 손을 떼어 지훈의 양 어깨를 붙잡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훈의 눈 가득 눈물을 흘리는 관린의 모습이 담겼다.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어요.”

“으흐흑.”

지훈이 흐느꼈다. 관린은 계속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또 다시 겨우 말을 꺼냈다.

“우리의 봄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관린의 손이 바빠졌다. 정작 제 눈물은 닦을 줄 모른 채 지훈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처럼.

“…기다려달라고, 꽃 피는 봄에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흐윽…….”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 있다고.”

“…….”

“약속을… 할 수가 없어요.”

어렵사리 꺼낸 말. 관린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맑은 눈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담고 싶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서. 숨죽여 울던 지훈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근데 그게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기다릴게요.”

겨우 진심을 꺼내어보였다.

“…….”

“언제고 기다릴 수 있어요. 이번 생에서 안 된다면 다음 생에서도 기다릴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요.”

그렇게 말하며 지훈은 손을 뻗어 관린의 목까지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기다리면 올 수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다음 생이 찾아온다 해도, 그런다 해도 안 될 일인지 몰랐다. 그렇지만, 그가 없는 세상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만 같아서, 지훈은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 마지막이…….”

관린은 간신히 한마디를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바닥. 눈물이 떨어진 부분들이 더욱 어둡게 물들어갔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지막 순간 까지 제 눈 가득 지훈을 담고 싶었다. 그래야 했다.

“행복할 수 있게 해줘요.”

“…….”

“당신으로 가득할 수 있게 해줘요.”

“…….”

“지훈씨를 잃은 삶은 나에게도 의미가 없어요. 부탁이에요.”

“…으흑.”

눈물이 흘러 지훈의 입술을 적셨다. 관린은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처음으로 맞닿은 두 입술이 뜨거웠다. 입을 떼고 나서 관린은 천천히 지훈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지훈이 작은 손이 관린의 셔츠께로 닿았다. 허리가 잘록하게 떨어지는 지훈의 맨 몸이 아름다웠다. 서로의 나신을 마주한 채 관린은 말했다.

“오늘을 잊어요.”

“안 돼요.”

“밤이 지나면 날 잊어주세요.”

“…으흑. 그럴 수 없어요.”

“할 수 있어요. 더운 여름이 지나고, 어느 새 가을이 지나가고, 추운 겨울까지 지나고 또 다시 봄이 오면.

“…….”

“그럼 새로운 봄을 만나야 해요.”

“…….”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훈의 어깨에서 관린이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고 더욱 천천히 팔을 벌렸다. 지훈 역시 천천히 그 품에 안겼다. 관린의 기다란 팔이 지훈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내가 말했던가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당신이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

“내게, 와줘서 고마워요.”

관린은 지훈의 온 몸 구석구석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가 흘린 눈물도 함께 묻어있었다. 지훈 역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임을 알면서도 사랑을 택할 수 있는가. 지훈은 그런 사랑이 저 자신에게 와버렸다는 것이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도 깊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서, 그래서 함부로 등 돌릴 수 없는 감정. 그것은 깊은 슬픔이자 잊을 수 없는 현재가 될 것이었다.

관린은 제 품에 안긴 지훈을 부드럽게 어르며 제 마지막을 예감했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무가 될 걸 알면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이 멍청하다고,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참았다. 몇 번이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두려웠다. 제 마지막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오히려 후회로 가득했다. 매일 매일 순간순간 마다 말해줄 걸. 그래도 오늘 밤 자신은 후회했을 텐데. 관린은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지훈의 감은 속눈썹 위에 입을 맞추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지 못했던 그 말을 꺼내어 놓았다.

“사랑…해요. 사랑 합니다.”

그 말에 지훈이 다시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달뜬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했다. 충분히. 다시 와줘요. 나를 잊지 말고 와줘요, 기다릴게요. 지훈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간간히 말했다. 관린 역시 열기 어린 목소리로 화답했다.

“당신 곁에… 꽃으로 오겠습니다.”

 

 

 

 

 

“으음…….”

푹신한 시트 위로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전신에 느껴졌다. 잠이 깬 지훈은 옆을 더듬었다.

“…….”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지훈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봤을 때 침대가 꽤 넓었어. 그러니까 아마도. 지훈은 몸을 옆으로 움직여 팔을 뻗었다. 천천히 더듬던 팔이 점점 빨라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관린씨.”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나신인 제 몸. 그리고…….

널따란 하얀 침대 위에는 오로지 지훈 뿐이었다.

 

지훈은 울면서 옷을 입고 탈출하려 했지만 결국 숙부에게 들키고 말았다. 관린이를 어쩐 거냐며 화를 내던 숙부는 금세 상황을 인지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을 또 하고 말다니. 네가 관린을 죽인거야. 네가. 중국으로 쏘아붙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지훈은 그 의미를 알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들어줘선 안됐는데. 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더라도, 그래도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걸로 족했어야 했는데. 지훈은 왕칭의 부축을 받고 나오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몸살에 영양실조라고 했다. 왕칭은 그 뒤로 보이질 않았다. 제주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셨다. 뭘 하고 돌아다니기에 몸이 이 지경이야. 어머니가 우시는 걸 보면서도 지훈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마치 모든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그 얼굴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며칠 후 지훈은 퇴원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을 꼬박 먹었고 약도 먹으라는 대로 다 먹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무언가를 거부할 힘도, 무언가를 무시할 여력조차 없었다.

“휴학하고 제주도로 와.”

“…….”

“응?”

“여보. 퇴원도 하는데 괜찮을 거요.”

“당신이 애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학교는 마칠게요. 이번 학기 끝나면 내려가요.”

지훈은 아무런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어머니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럼 너 생일 까지 우리가 여기 있을 게.”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었다. 갑자기 지난 생일이 떠올랐다. 억지로 관린을 끌고 가 했던 생일 파티. 같이 노래 불러주셔야 돼요. 알았죠?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 왜 멈추는 데요? 노랜데 뭐 어때요. 사랑하는 지훈이 생일 축하합니다. 해주세요, 아 빨리요. 제 조름에 관린이 억지로 불러줬던 노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관린은 웃고 있었다. 촛불만이 밝히던 어두움 속에서 그 커다란 두 눈 가득 저를 담고는 웃었다. 그 사람을 내가……. 내가…….

“으흐흑.”

왈칵 터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별안간 터진 눈물에 가족들은 모두 놀랐다. 지훈은 엉엉 울었다. 그 깊이를 알 길이 없는 깊은 슬픔의 초입에 이제야 들어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지훈은 눈물을 멈추질 못했다.

 

 

돌아온 지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 갔다. 그동안 운 좋게도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대리 출석을 해준 덕에 입원 기록 까지 제출하면 출석 때문에 학점을 못 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들은 항상 밝고 쾌활했던 지훈이 어떤 일에든 무덤덤해지자 무언가 큰 일이 있었나보다 싶으면서도 나서서 묻질 못했다.

“지훈아 너 생일 날 집에 갈 거야?”

세운이 물었다. 지훈의 이번 생일은 토요일인데다 금요일은 공강이어서 제주도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우리랑 그 날 같이 밥 먹을래?”

“필기 정리해야 해서 바빠.”

“야 그래도 생일인데…….”

다른 친구가 말을 꺼내려 하자 세운이 얼른 팔로 그를 막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친구는 한숨을 내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지훈은 관린을 매일매일 떠올리려 노력했다. 관린이 생각나면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얼굴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며칠이 지났다고 그 선명했던 얼굴이, 커다랗고 투명한 눈이, 기다란 속눈썹이, 오똑했던 코가, 뭉근하게 닿아오던 통통한 입술이, 다정했던 목소리가 자꾸만 잊혀지려해서 슬펐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질 거라면 지훈은 시간을 멈추고는 오로지 관린의 기억 속에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지워져가는 관린과 달리 저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런 주제에 그럴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은 제 생일을 더 이상 기념하고 싶지 않게 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흘러 생일 전 날이 되었다. 지훈은 하루 종일 공강인 덕분에 아침부터 기숙사에서 친구들로부터 받은 필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형 뭔 놈의 에코백 장사해요? 이거 좀 다 치워요. 저는 집 내려갔다와요.”

“아 어 알겠어.”

룸메이트의 잔소리에 지훈은 필기 정리를 마친 노트북을 덮고는 에코백이 쌓여 있는 쪽으로 갔다. 많긴 하네. 쓸 만 한 것만 뺴고는 버려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버릴 것과 놔둘 것을 분류했다.

어?

버리려고 분류한 회색 에코백에 무언가 걸려있었다. 그것은 제 침대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지훈은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이건.

“으컥, 푸엣취!”

침대에서 쭉 끄집어낸 그것으로부터 먼지가 떨어져서 지훈은 재채기를 해댔다. 잿빛 먼지가 엉겨 붙은 그것은 베이지색 에코백이었다. 지훈은 창가에 서서 가방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래서 찾아도 없었구나.’

지훈은 가드닝 북을 잃었던 날이 떠올라서 또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볼 때마다 이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마지막 희망이 떠오를 것만 같아 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안에 중요한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려 에코백을 벌려 안을 보았을 때였다.

“어?”

지훈은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내뱉었다. 잔뜩 구겨진 종이. 이게 뭐더라. 아! 맞다! 그거였다. 언젠가 실수로 책과 대학노트가 든 에코백이 아닌 가드닝 북을 가져갔었다. 그래서 그날 별 수없이 맨 마지막 장에 비어있던 페이지를 떼어서……!

‘가드닝 북을 전부 잃은 게 아니었어!’

지훈은 얼른 손을 집어넣어 그 종이를 꺼냈다. 꾸깃꾸깃한 것을 조심스레 살살 펴 들었다. 반가움에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났다. 그래도 일부는 있었어. 괴발개발 쓴 지훈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뭐…뭐야!”

갑자기 검정 펜으로 쓴 글씨의 배경이었던 흰 종이에서 무언가가 금빛으로 빚나며 위로 올라왔다. 올록볼록 올라오던 그것은 한글의 형체였다. 곧 지훈의 필기가 그 금빛 글씨로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훈은 너무 놀라 종이를 떨어트렸다. 그러자 금빛으로 반짝이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지훈은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어 바지에 벅벅 닦아내고는 다시금 종이를 들었다. 곧 금빛으로 빛나는 활자가 위로 볼록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쫙 펼쳐보았다.

‘설마, 설마!’

지훈은 천천히 금빛 글씨를 읽어보았다.

“너의… 생일에… 내리는… 장마?”

너의 생일에 내리는 장마를 맞으라.

설마, 설마 이게 바로 저주를 풀 수 있는 그 단서일까? 확실해 보였다. 가드닝 책 어디에도 저주와 관련된 글은 없었다. 그리고 빽빽이 가드닝과 관련된 글만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만이 오직 빈 종이였다. 그렇구나! 여기에 쓰여 있던 거였어! 분명 처음 책을 샀을 때만 해도, 필기를 하던 때만 해도 어쩐 일인지 새하얗게 비어있었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은 빛나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마지막 장마 내 생일……. 지훈의 생일은 5월 29일로 늦봄과 초여름 그 어디 매에 존재하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장마를 맞지. 어떻게 비를 맞지. 지훈은 얼른 인터넷을 켜서 날씨를 확인해 보았다, 5월 29일, 5월 29일 날씨, 내일 날씨……. 아. 지훈은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비를 맞을 수가 없어. 내 생일은 왜 5월 29일이어서는! 장마철이라면 쉬운 일이었을 텐데. 창밖을 내다보고 지훈은 다시금 절망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내일이 된다 해도 도저히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지훈은 며칠 간의 날씨를 확인했다. 쨍쨍한 빛이 쏟아져 내리는 맑은 날씨. 적어도 일주일동안은 맑을 예정이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비가 올 거야 와야 해. 지훈은 모든 포털사이트와 뉴스의 날씨 페이지를 뒤졌다. 모든 곳에서 맑음을 말하고 있었다. 아냐, 아니야! 외국 사이트 까지 가서 찾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다. 이렇게 맑기만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여서 지훈은 화가 났다.

“아아 말도 안 돼!”

지훈은 그렇게 외치고는 애꿎은 책상만 쾅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훈은 검색창에 이렇게 저렇게 쳐보았다. ‘오월의 장마’, ‘오월 비’. ‘오월에 비가 오게 하는 방법’……. 그 중에서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추려서 포스트잇에 적었다. ‘5월 말 아이들과 함께 분수대에 놀러갔네요. 꼭 비가 오는 것 같았어요.’, ‘호스를 가지고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비가 오는 것 같죠.’, ‘호랑이 장가가는 날인가 봐요. 날이 맑은데 갑작스레 비가 와서 놀랐어요.’, ‘스콜은 증발량이 많은 열대지방에 자주 내린다.’

‘꼭 한국에서만 비를 맞아야 하는 게 아닐지 몰라.’

지훈은 그런 생각에 세계 날씨도 찾아보았다. 오늘 출발해서 내일 중 도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지훈은 검색 결과에 놀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놀랍게도 내일의 날씨에 비는 없었다. 믿었던 동남아시아도 전부 맑거나 흐린 정도였다. 중국에도 비오는 곳이 없다니. 심지어 그렇게 비가 자주 오는 영국마저도 내일은 맑음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지훈은 노트북을 덮고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 제발, 신이 있다면 제발 내일 비가 오게 해주세요. 지훈은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지쳐 쓰러졌다.

 

얼마를 잠든 것일까. 눈을 떠보니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5시 반. 지훈은 일찍부터 나설 준비를 했다. 어제 쓴 포스트잇과 방수팩이 든 비닐 가방을 챙겨서는 나섰다. 먼저 학교 인근에서 보았던 화원에 갔다.

“저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저한테 물 좀 뿌려주실 수 있으세요? 호스로요.”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이른 아침부터 와서 물을 뿌려달라는 것이 꺼림칙하여 거절했지만 지훈의 간곡한 부탁에 알겠다고 하고는 호스로 물을 뿌려주었다.

“가운데를 막아서 비가 오는 것처럼 해주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보이면서도 화원 주인아저씨는 지훈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지훈은 비닐 가방을 꼬옥 끌어안아 젖지 않도록 한 채 한참동안 내리는 물을 맞았다. 온몸이 쫄딱 젖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지훈은 감사합니다. 하며 꾸벅 인사하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주인아저씨는 안됐다고 혼잣말을 하고는 혀를 찼다.

다음으로 지훈이 간 곳은 커다란 분수대가 있는 공원이었다. 분수대 운영 시간에 맞춰 도착한 지훈은 아직 오전이라 아무도 없는 분수대근처에 비닐 가방을 내려놓고는 흠뻑 물을 맞았다. 따뜻한 5월 말이라지만 이른 아침부터 물을 맞고 이곳에 온 터라 연신 재채기가 나왔다. 공원관리인이 끄집어내도록 지훈은 물을 맞고 서 있었다. 그 입술이 온통 새파래졌는데도 연신 괜찮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지훈에 공원관리인도 혀를 끌끌 찼다.

‘이것도 아니라니.’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지훈은 어지러웠다. 정말 비를 맞아야 하는 것일까. 진짜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여야만 하는 걸까.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하도 물을 맞아 지훈의 온 몸이 열로 들끓었다. 그럼에도 지훈은 제 몸이 그런 상태인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걸었다. 바가지를 들고 꽃에 물을 주는 카페 직원에게도 그 물 좀 저에게 뿌려주세요, 말을 걸었다. 물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는 그런 부탁을 하는 남자에 사람들이 놀라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지훈은 겨우 겨우 온 곳을 돌아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지훈은 관린과 함께 자주 앉았던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학교는 한산했고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 새파랗고 맑아서 지훈은 그것이 한 없이 원망스러웠다. 비 좀 내려주지. 비 좀.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속으로 그렇게 한탄을 하던 지훈의 눈에 하늘이 흐려지고 벚나무가지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5월 말 벚나무는 이미 꽃잎을 보두 떠나보내고 녹색의 잎사귀로 가득했다. 푸르른 생명력. 그것은 봄의 마지막 자락을 떠나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려는 모습이었다. 아. 봄의 끝. 문득 지훈은 관린의 말이 생각났다.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어요……. 우리의 봄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아. 무거운 추가 가슴팍에 맺혀 있는 듯 먹먹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관린씨 말대로 정말 그 날이 우리의 마지막 봄이었나 봐요. 순간 지훈은 관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잠깐만.

지훈은 벤치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아직 해가 하늘에 걸려있었다. 지훈은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디에 남아있던 건지 모를 벚꽃 잎이 한 장 팔랑 하고 떨어졌다.

 

헉…헉….

지훈은 숨을 고르며 겨우 멈춰 섰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서 숨이 찼는데도 지훈은 정작 숨이 차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초입부터 향이 났다. 다행이다, 아직, 아직 있을지 몰라. 지훈은 걸음을 재촉했다. 곧 그곳이 나왔다. 관린과 함께 왔던 그곳, 관린이 제게 차갑게 군 뒤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게 물었던 그곳, 보랏빛 향기가 가득한 라일락이 잔뜩 심겨 있는 그곳. 들어서면서부터 알았다. 아직 향은 남았을지 몰라도 꽃은 이미 거의 져버렸단 걸. 바닥에 수북히 나뒹구는 라일락 꽃들이 알려주었다. 이미 주변의 흙과 동화되어 제 몸을 땅에 맡기어 버린 꽃의 흔적들도 수두룩 보였다. 5월에 만개하는 라일락은 사실상 지금이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무들은 이미 꽃을 떼어내고는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을 꽤 달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연보랏빛 카펫을 깔아 둔 듯 변한 숲길을 따라 지훈은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꽃잎들이 발에 밟혀 흙이 좀 더 푹신하게 느껴졌다. 분명 꽃은 여기에 수북이 떨어져 있는데 더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

천천히 양옆을 살피며 걸어 들어가던 지훈은 순간 멈추었다. 거짓말처럼, 꼭 기적처럼, 제 눈앞에 아직 연보랏빛 꽃을 가득 달고 서 있는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단 하나의 꽃송이도 떨어지지 않은 듯 정말로 꽃으로 가득해서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애처로왔다. 지훈은 조심스레 나무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에 천천히 손을 뻗으려는데 봄바람답지 않은 센 바람이 휙 불어왔다.

“아…….”

그 바람에 라일락 나무는 기다렸다는 듯 제 몸에 피워낸 꽃들을 아낌없이 흩뿌려주었다. 연보라색 꽃들이 저마다 우아한 향을 내며 지훈의 머리로, 어깨로, 발등으로,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양팔을 들고는 라일락꽃들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꽃비. 꽃비였다. 보랏빛 꽃비가 사랑스러운 향으로 한참을 내렸다. 꽃으로 오겠다고 했다. 분명 그랬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훈의 눈에 안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랏빛이던 온 세상이 일순 금빛으로 변했다. 지훈은 얼른 제 앞에 서 있던 라일락 나무로 다가갔다. 단 번에 모든 꽃을 떨구어 낸 나무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온 빛에 온 숲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레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이 천천히 매끄러워지고 있었다.

‘아아, 설마.’

지훈은 이제 양팔을 벌려서 그 언젠가 처럼 나무를 꼭 끌어안았다. 도망을 가버릴 것만 같았던 그의 모습에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를 붙들어 안았던 것처럼, 온힘을 다해 꼬옥 끌어안았다. 비교적 얇고 둥근 형태를 하고 있던 그것은 곧 점차 두꺼워 져서 지훈의 팔이 절로 더욱 벌어졌다. 거칠거칠 했던 표면이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몸이 되었다. 위로 뻗었던 가지들이 천천히 사라지고 가장 두꺼웠던 두 가지만이 남아 팔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했던 온도가 언젠가 느꼈던 따뜻한 체온으로 변해 지훈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지훈.”

지훈은 나무를 꼭 끌어안고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느라 그것의 형체가 변하는 줄도, 제 팔이 벌어진 것도 알지 못했다. 속으로 무수히 제발을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안고 있던 그에게 따스함이 느껴졌다.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으면서도 한 없이 다정한 그 목소리. 매일을 꿈에서도, 깨어서도 그렸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에 지훈은 천천히 안았던 팔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투명하고도 새하얀 피부가 아름다운,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그가, 그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날 밤 한참을 만지고 기억하려 애썼던 그 얼굴이었다. 지훈은 서둘러 비닐 가방에서 방수팩 안에 들어있던 관린의 가디건을 꺼냈다. 처음 밤 산책을 함께 했을 때 저를 감싸 안아주었던, 오래도록 지훈의 장롱에 자리를 차지했던 그 가디건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 이제는 지훈이 관린의 맨 어깨에 그것을 걸쳐주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너른 어깨에 가디건을 꼼꼼히 걸쳐주는 지훈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차서 흘러내렸다. 그가 지훈의 얼굴을 커다란 손을 부여잡고는 엄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다시 헤어진데도… 그런다 해도…….”

“…….”

“꽃으로 당신 곁에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