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VE EXPRESS
w. 떼떼떼뗴

 

 
눈 오는 날 우산 안 쓰기. 지훈이 자신의 초능력으로 누릴 수 있는 낭만이었다. 열기를 내뿜어내는 초능력은 눈이 지훈의 몸에 가까워지면 사르르 녹게 만들었기에. 덕분에 지훈은 비라면 질색하던 행동을, 겨우 눈이라는 이유로 쉽게 하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눈송이들은 지훈의 손바닥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 안겼다.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 푹. 그 모습을 보던 지훈은 급하게 손바닥을 오므리고는 달렸다.

 

 

 

 

 

 

 

THE LOVE EXPRESS

 

 

 

 

 

 

 

기다란 눈사람 같다.

 

지훈에게 관린의 첫인상은 타이페이 스노우맨이었다. 덥디 더운 나라에서 어떻게 결빙 초능력자가 있을까 했더니. 관린의 하얗고 말랑한 얼굴을 보면 이해가 되었다. 지훈은 관린의 웃는 얼굴 위로 출근할 때 봤던 눈송이들이 겹쳐보였다.

 

 

관린은 대만에서 온 빙결 능력자였다. 대만과 한국에는 물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들이 없어 이와 관련된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대만에는 빙결 능력자 두 명, 한국에는 불 능력자 두 명이 있었다. 양국의 센터에서는 능력자를 한 명씩 교환하기로 했다. 지훈이 아닌 다른 능력자가 대만으로 가고, 관린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지훈과 관린은 수력발전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따듯한 나라의 친구들은 냉기를 반가워했다. 한여름에 관린이 이따금씩 그들의 머리 위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주면 열기를 식히기 딱이라며 좋아해주었다. 친구들의 놀라움이 섞인 감탄에 신이 나, 관린은 어떻게 하면 눈사람을 더욱 귀엽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때마침 개봉한 애니메이션에 관린이 원하던 형태의 눈사람이 나와 그 캐릭터를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그 캐릭터는 관린에게 초능력과 관련된 좋은 추억의 상징이었다.

 

관린이 어쩌다 보게 된 지훈의 핸드폰 배경화면에 바로 그 캐릭터가 있었다.

 

“오! 저도 그 캐릭터 좋아해요.”

“올라프? 올라프 좋지. 귀엽고 차갑고. 지금처럼 더울 땐 차가운 걸 봐야 살 것 같아서.”

 

저도 귀엽고 차가우니까 좋아해주면 안되나요? 관린은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문장을 뻣뻣하게 삼켰다. 지훈은 찬 속성을 지닌 여러 가지를 좋아하면서도 관린이 빙결 능력자라는 사실을 까먹은 듯이 굴었다. 그럴 때마다 관린은 숨이 턱턱 막혔다. 지훈과 자신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마음속에까지 세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관린은 애써 표정을 풀고 올라프 이야기를 꺼낸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더위로 헥헥대며 힘들어하는 지훈에게 깜찍한 초능력으로 열기를 식혀줄 생각을 하니 금세 입꼬리가 올라가고 보조개가 드러났다. 주변에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없었기에 관린은 미리 핸드폰 카메라를 셀카모드로 설정해놓았다. 거울을 대신해서 지훈이 머리 위에 만들어진 눈사람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용도였다.

 

막상 지훈의 머리 위에 눈사람을 만들려고 하니 관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훈의 핸드폰에 있는 올라프보다 사랑스러운 눈사람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관린은 심호흡을 하고 손을 놀렸다.

 

하나, 둘, 셋.

 

어? 관린은 눈사람이 사랑스럽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새가 없었다. 지훈을 향한 관린의 눈사람은 만들어지자마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지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형, 형, 형. 지훈이 형.”

“응? 관린아 왜?”

 

지훈의 눈을 마주한 순간 관린은 지훈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관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의아해하면서도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짓에 관린은 울컥했다. 형을 향한 내 마음은 눈사람처럼 닿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리게 하지 않을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지. 관린씨, 부탁해.”

 

처음에는 따뜻한 곳에서 오신 귀한 능력자라고 과한 친절을 베풀어주더니. 이제는 대놓고 물건 취급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근무는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대만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을까 싶어 꾹 참았다. 아쉬운 사람은 지훈이 있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은 관린이었다.

 

혼자만 남아있게 되었을 때, 관린은 손에 얼음조각을 쌓았다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대부분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큰 몸짓을 유지하던 조각들은 관린의 발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신이 만든 얼음조각들을 발로 깨뜨리기. 관린은 그동안 이런 방식으로 화를 풀곤 했었는데, 이번엔 화가 가라앉는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찰팍. 관린의 발이 다시 바닥으로 향하는 순간, 얼음 조각들이 물웅덩이로 변해버렸다. 아. 관린이 외마디 소리를 냈다. 바닥에 꽂혀있던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설마했더니 정말 지훈이었다.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관린은 아랫입술의 끄트머리를 꾹꾹 누르고 꽉꽉 씹었다. 아프다는 느낌이 불안을 잠재워주지는 않았다. 지훈은 관린을 잠시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뭐 좀 마실까?

 

 

 

 

지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관린은 핫초코를 주문했다.

 

“형… 오늘 영하에요.”

“괜찮아. 내 손에서 나오는 열기면 금방 뜨거워져.”

“그러면 얼음 녹아서 맛없어지지 않아요?”

 

또 한 번의 걱정 어린 물음에 지훈은 싱그럽게 웃었다. 괜찮아, 그런 맛으로 먹는 거야. 그런 맛이 대체 뭔지. 지훈과 정반대 성향의 초능력을 가진 관린은 알 수 없었다.

 

 

“관린아, 내가 너 괴롭히는 사람들 혼내줄까?”

 

그런 맛을 즐기던 지훈이 갑자기 꺼낸 말이 무척이나 강렬해서 관린은 음료를 뿜을 뻔했다.

 

“정말요?”

“응, 정말.”

 

흐흫. 관린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 꼭꼭 힘주어 대답하는 지훈이 사랑스러워 절로 이상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왜 웃기만 해. 얼른 네- 라고 대답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내 복수를 허락해줘.”

 

얼른. 지훈이 부러 관린을 향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폭 튀어나온 지훈의 볼을 눌러보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관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지훈의 위로는 언제나 옳았다.

 

 

 

 

 

결국 관린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센터로 향했다. 그러니까, 자기들 파티하는 데 내 초능력을 사용해달라는 거지?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좋아하시네. 거친 말이 나가는 마음속과는 반대로 관린은 고분고분 요구를 따랐다. 너무 커서 거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작아 눈에 안 보이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눈송이를 뿌려댔다. 짜증이 최대치로 올라오는 순간이 오면 지훈을 생각했다. 입을 꾸욱 다물어서 볼살이 더욱 말랑해 보이던 지훈.

 

지훈을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던 관린의 눈앞에 그 주인공이 나타났다. 오힝?

 

“너가 내 복수 허락해주기로 했잖아.”

 

아니, 제가 언제요… 당황스러워하는 관린의 손은 여전히 눈송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훈은 그 위로 손을 가져다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관린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훈은 관린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맞잡은 손에 관린이 만들어내던 눈송이는 물방울로 바뀌어 비를 내렸다. 악!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뒤로하고 지훈은 관린의 손을 잡고 센터 밖으로 나왔다.

 

 

 

 

“저 징계 받고 대만으로 돌아야 될지도 몰라요.”

“물 다루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빙결 능력자 교체하려면 절차가 복잡해서, 센터에선 너 못 보내. 걱정 마.”

 

지훈은 관린이 왜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그 불안을 없애주었다. 아 그렇네요. 해맑게 웃는 관린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았다.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를 망치고 왔네요.”

“눈이나 비나, 둘 다 화이트 아닌가? 어쨌거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들어준 거야. 너 잘못한 거 없어.”

 

나한텐 너 자체가 화이트 크리스마스이지만. 언제나처럼 하얗고 말랑한 관린을 보던 지훈의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관린도 지훈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센터에서 해방된 것보다 지훈과 함께 있는 게 더욱 기뻤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게 될 줄이야. 광대가 위로 올라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무작정 찾아들어간 영화관에 지훈과 관린의 자리는 없었다. 지훈은 관린을 끌고 나온 김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영화 같은 거 안 봐도 괜찮다는 관린을 보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텔레비전 밑 서랍에 있는 많은 디비디들이 생각났다.

 

“우리 집에서 볼까? 영화.”

“정말요? 진짜? 와 대박이다…”

 

그게 그렇게 기쁠 일이야? 여러 감탄사들과 함께 밝아진 관린의 얼굴을 보면서 지훈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니 더욱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 많은 부분을 관린에게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깨달을 때마다 닫아버렸지만.

 

 

 

 

우왕. 우와.

 

관린의 고개는 지훈의 집안 구석구석을 담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도 관린의 눈에는 전부 특별해 보였을 텐데. 집안 군데군데 놓여있는 인형에 관린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지훈이 형은 심지어 집도 귀여워…

 

관린이 집안을 구경하는 동안 지훈은 곧장 디비디부터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이 중에서 뭘 보지? 지훈은 선택권을 관린에게 넘기기로 했다.

 

“관린아, 이리로 와서 보고 싶은 거 골라.”

“전 형이 보고 싶은 거면 다 괜찮아요.”

 

내가 그걸 못 정하겠어서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겠니. 지훈은 잠시 어쩌지- 고민하다 결국 선택권을 운명에 넘겼다. 서랍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디비디 위로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다가 스탑!을 외쳤을 때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멈출 타이밍을 정하는 건 관린에게 맡겼다.

 

“적당할 때에 스탑해.”

 

거기 앉고 싶으면 앉아도 돼. 앗, 넹. 관린은 소파를 손으로 눌러만 보다가 허락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소파에 앉았다. 관린은 끝이 분홍빛으로 물든 지훈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스탑을 외쳤다. 선택된 디비디는 <폴라 익스프레스>였다.

 

“우리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어. 옆에 있는 디비디는 <모아나>거든.”

“추워서 얼면 형이 다 녹여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 말에 지훈은 한쪽으로 입을 당겼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관린의 장난을 받을 때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푸린 나왔당. 형도 닮은 거 알아서 푸린 인형 집에 놓아두었던 거죠? 아닝. 모르는뎅. 지훈은 고개를 장난스럽게 갸우뚱하며 디비디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관린은 입꼬리를 들썩거리며 오는 길에 산 치킨을 세팅했다.

 

“자막 한국어로 해도 괜찮지?”

“등장인물들이 영어로 말하면 괜찮아요.”

 

지훈은 잠시 리모콘을 들고 가만히 있다가 영화를 재생시켰다. 그러고는 곧장 물티슈로 손을 닦고는 치킨을 입에 넣었다. 와 역시 지훈이 형 잘 먹네요. 관린이 입맛을 다시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남 먹는 거에 집중하지 말구 화면 봐.”

 

관린은 지훈이 자신에게 미묘한 선을 그을 때마다 온몸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왜 우리가 남이에요? 남인데 왜 집에 들여보내준 거예요? 등등 여러 물음표를 단 문장들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관린은 화면으로 눈을 돌리는 행동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지훈은 정신없이 치킨을 먹으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관린은 이리저리 정신없었다. 영화에, 치킨에, 제일 중요한 지훈까지. 동시에 여러 가지를 눈에 담으려니 벅찼다.

 

그 와중에 관린은 치킨의 양념이 코에 묻은 지훈을 보게 되었다. 닦아줘도 되나 고민하다가, 같은 곳에 한 번 더 양념을 묻히는 지훈을 보고 살짝 닦아주었다. 땡큐. 지훈은 짤막한 감사인사를 전할 뿐, 관린을 바라봐주지는 않았다.

 

관린의 손길이 닿을 수 없었던 지훈의 손은 양념 범벅이 되었다. 지훈은 양념이 잔뜩 묻은 자신의 손이 열기를 뿜어낼 때의 자신의 손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완전 빨갛게 되었네. 지훈의 손이 온통 붉게 물들 때까지도, 영화의 등장인물은 여전히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주는 거,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어주는 거. 진짜 별로야.”

 

영화를 보여주려고 했던 거지 내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지훈은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그랬겠지만, 초능력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되는 거잖아.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종이가 순식간에 타서 없어졌던 경험 이후로 알게 되었거든.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가족들한테 능력이 발현된 상황을 정신없이 풀어놓았는데 아무도 안 믿는 거야. 너가 착각한 거 아니냐고. 사실이라면 우리 앞에서도 불을 붙여보라고. 아직 어떻게 능력을 발현시키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내가 내 방 물건들 온통 태워버리고 나서야 가족들도 내가 초능력 있다는 거 믿어준 거지.”

 

그때 가족들은 놀라서 소리 지르고 화재 경보음은 머리 아프도록 울리고.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마구 외쳤지. 이제서야 믿어주는 거야? 이 잿더미를 보고서야? 내가 말했었잖아, 사실이라고. 지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다가 바로 없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지훈의 눈은 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막상 눈동자는 과거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했다. 관린은 영화관에 빈 좌석이 없었던 것이 새삼 행운이었다고 느꼈다. 지훈의 집에도 오고, 지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까. 관린은 조심스럽게 지훈의 손을 잡았다. 지훈에게 받았던 위로만큼 안정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지훈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손을 타고 전해지기를 바랐다.

 

둘은 오래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손 사이에 차오르는 습기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어느새 엔딩에 다다랐다.

 

One thing about trains : It doesn’t matter where they’re going. What matters is deciding to get on.

 

정말 중요한 건 기차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네가 기차를 탔다는 거야. 지훈은 관린과 자신의 손 사이의 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관린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과거의 소음들이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관린의 눈빛은 어떠한 결심을 담고 있었다. 관린은 영화에서 동심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는 대신, 지훈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 대한 용기를 얻었다. 이제는 내 마음을 눌러두지만은 않을 거야.

 

 

 

 

 

 

 

센터가 물을 다루는 능력자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관린은 엄지손가락을 자연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빨리, 빨리 지훈을 만나야 했다.

 

“형! 소식 들었어요? 물 초능력자가 센터에 들어왔대요.”

 

관린은 지훈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졌다는 생각에 불안한데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속이 탔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활동 못하는 거 아녜요?”

“뭐 그럴 수도.”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관린의 얼굴에 지훈은 누가 보면 너가 물 다루는 줄 알겠어- 라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관린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지훈은 관린을 못 말린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작업에 투입될 만큼 능력을 쓸 수 있으려면 훈련을 오래 해야 하는 거, 너도 알잖아.”

 

너랑 나랑 함께할 시간, 아직 많이 남았다구. 지훈은 관린을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뭐 그런 걸로 속상해하고 그래. 이번엔 지훈의 위로에도 관린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관린은 지훈처럼 여유롭게 굴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럼 형이랑 저랑 능력 페어로 묶이지 않는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는 사이 만들어요.”

 

저 형 좋아해요. 형은 저 어떻게 생각해요? 지훈은 자신을 향한 관린의 곧은 눈빛에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같은 공간에 계속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도 지훈은 관린을 계속해서 피했다. 관린이 자신에게 고백할 때, 지훈은 관린을 처음 본 날 봤던 눈송이들을 떠올렸다. 눈송이들을 우산을 쓰지 않고서까지 반겼던 건 지훈 자신인데. 정작 눈송이들이 자신을 향해 오면 피하게 되었다. 관린과의 관계에서도 지훈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눈송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

 

 

 

 

 

 

 

어느새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한참 지나, 설 연휴를 앞두고 있었다. 지훈은 관린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관린은 붉은기가 도는 갈색의 머리카락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붉은 사람이네. 관린은 문득 그날 지훈의 손을 잡았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지훈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들이 잔뜩 들어있는지. 관린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눈으로 보이는 행동을 같이 하고 나서도 안 믿어주는 건 좀 지쳐요.”

 

설 연휴 동안 생각 정리해서 말해줘요. 계속 서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 함께할 시간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그제서야 지훈은 아차 싶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주는 거,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어주는 거. 진짜 별로야.

 

진짜 별로인 건 나잖아.

 

 

 

 

지훈은 설 연휴 동안 특선 영화 대신 관린과 함께 봤던 영화를 다시 봤다. 그날 먹었던 치킨도 시켜 먹었다. 답지 않게 치킨 다리를 들고 멍 때리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을 붙여 태워먹기도 했다.

 

 

길다면 긴 고민 끝에 관린을 마주하고도 지훈은 바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관린은 지훈의 귀나 볼이 새빨간 걸 알아채고 기다려주었다.

 

 

“우리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

 

지훈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관린은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지 않고 집중해주었다.

 

“한 쪽이 완전히 타버리거나 얼어버릴 수도, 두 쪽이 충돌해 물이 될 수도 있겠지.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근데 그런 건 다 안 중요한 거 같아. 나도 그냥 열차를 타 보려고.”

 

마침내 마주한 지훈의 눈동자는 관린을 가득 담고 있었다. 여태까지 나누었던 감정들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구나. 꿈이 아니구나. 관린은 과거의 어느 날처럼 지훈을 힘껏 껴안았다. 두 손을 관린의 등 뒤에서 맞잡고 더욱 깊게 안겨오는 지훈에 관린은 울컥했다. 형을 향한 내 마음이 드디어 닿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