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e, Sweet
w. 럼

 

 

배경은 가로수길 초입에서 조금 걸어 들어간 골목의 작은 초콜릿 공방, 오후 열두시.

 

분명히 말하는데, 라이관린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밝은 시간에, 밝은 곳에 얼굴 팔리기 딱 좋은 곳. 피해야 마땅했을 곳에 관린이 부러 한껏 제 나이 그대로 꾸미고 나온 것은 정말로 의외의 일이었다. 요즘 관린은 의외의 일을 꽤 자주 꾸미고 있었다. 예를 들면 부드러운 인상의 코트와 니트를 입어본다던가. 매일 같이 초콜릿 공방에서 초콜릿을 한 상자씩 산다던가. 연애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해본다던가.

 

이 일도 벌써 일주일째다. 입이 달아서 초콜릿을 자주 먹지 않을 뿐더러,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해도 일주일째 매일 한 상자씩 사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처음에 산 한 상자는 그래도 다 먹었다. 과연 그 쇼콜라티에의 얼굴만큼이나 달콤한 맛이었다. 그 얼굴에 빠져 벌써 초콜릿을 일곱 상자나 사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비슷한 시간대에 가서 공방의 문을 열었다. 또, 달콤한 향. 달콤한 얼굴.

 

 

“어서 오세요.”

 

 

관린은 오늘은 진열대로 가지 않고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명함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그 명함에 적힌 작은 글씨만 읽었다.

 

 

“이 번호로 연락해도 될까요?”

“네?”

“사적으로.”

 

 

그 말에 그는 수줍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Lie, Sweet

  1. 럼(@RUmine_pw)

 

 

 

 

다시, 배경은 신사역 8번 출구에서 골목을 따라 5분 정도 들어온 거리. 일주일간의 연애, 지훈은 딱 그만큼 애인에 대해 파악했다.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데에 비해 의외로 자신보다 두 살 연하라는 점, 적극적으로 대시한 주제에 의외로 비밀스럽고 내향적이라는 점, 그리고 돈이 엄청나게 많은 집안의 자제라는 점. 첫 번째는 서로에 대해 알자며 말을 꺼냈었고 뒤의 두 가지는 그동안 관린의 언행을 통해 지훈 스스로가 알아낸 점이었다.

 

 

“형. 안 추워요?”

 

 

관린이 코트를 여몄다. 어제 눈이 온 탓에 날씨가 또 제법 추워졌다.

 

 

“패딩 입고 오지 그랬어. 어디 들어갈까?”

“형 만나는데 코트 입어야죠. 나 코트 입은 게 더 예쁘지 않아요?”

“글쎄 뭘 입어도 예쁠 거 같은데.”

“형만 할까요.”

 

 

함박웃음을 피운 관린이 지훈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지훈은 자신의 따뜻한 손바닥으로 관린의 손끝을 감쌌다. 물론 관린에 비해 손이 작아서 역부족이었다. 관린은 샐쭉 웃으며 그 모양새를 보다가 자신의 손으로 지훈의 손을 전부 감싸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은 따뜻한 편이었다.

 

 

“주머니에 진작 손 넣고 있지 그랬어.”

 

 

관린이 머쓱하게 웃었다.

 

 

“형 손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훈은 또 수줍었다. 관린을 이끌고 골목 안쪽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갔다. 지훈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관린은 달려가 지훈이 앉도록 의자를 빼주었다. 그의 친절에 지훈이 미소를 지었다. 관린은 코트의 단추를 풀고 앉았다.

 

 

“형 뭐 마실래요?”

“나는 아메리카노. 아이스.”

“추운데?”

“여기는 따뜻하니까.”

“다른 건 괜찮아요?”

“응. 이따가 저녁 먹을 거니까.”

“그럼 주문하고 올게요.”

 

 

관린이 카운터 앞으로 가서 주문을 했다. 지훈은 물끄러미 관린을 보았다. 손목 아래를 다른 손으로 받치고 카드를 건네는 움직임까지 친절과 배려가 섞여 있었다. 관린의 그런 점이 훈은 마음에 들었다.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관린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관린은 두 손을 모아 지훈에게 ‘미안, 잠깐만’과 같은 제스처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지훈은 관린의 그런 점에서 그가 내향적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곧 관린이 다시 카페의 문을 열고 추위를 털며 들어왔다.

 

 

“추운데 밖에서 통화를 하고 그래.”

“실례 같아서.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요.”

“아냐 난 괜찮은데 너 추울까봐 그렇지.”

 

 

봐, 그새 손 또 차가워졌지. 지훈이 관린의 손을 끌어다가 매만졌다. 온기가 전해졌다. 관린이 지훈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형 손 따뜻해요.”

“너 손 뎁혀주려고 그런가봐. 손이 왜 이렇게 차.”

“형한테 손잡아 달라고 할 핑계 만들려고 그런가 봐요.”

 

 

관린이 능글맞게 웃었다. 마침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지훈이 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얼그레이 한 잔.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스 초코 시킨 거 아니었어?”

“저 사실 단 거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하긴 관린이 제 입으로 단 것을 좋아한 적은 없긴 했다. 그동안 공방에서 그 많은 초콜릿을 사간 걸로 미루어 짐작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지훈은 어딘가 의문스러웠다.

 

 

“그럼 그동안 초콜릿은 왜 그렇게 많이 샀는데?”

“형 초콜릿은 정말 맛있어요.”

“공방 오려고 샀던 거야?”

 

 

관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럽다는 표현이었다.

 

 

“계기는 그랬지만 진짜 좋아한다니까요, 형 초콜릿. 좋아서 샀어요.”

“그렇다고 말하기엔 너 진짜 이상할 정도로 많이 샀거든. 초콜릿에 돈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어딨어.”

“왜요. 저는 진짜 좋아서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그래야 형이 저 기억할 것 같았어요. 몇 십만 원에 형의 눈에 들었으면 충분하죠.”

 

 

관린은 태연하게 웃으며 차를 한 입 마셨다. 지훈은 관린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린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사탕 발린 말 같기는 해도 관린의 모든 말은 분명하게 진심이 들어있었다. 지훈은 관린이 여러모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해서 지훈이 관린을 수상쩍게 보는 눈초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관린은 찬 손으로 지훈의 손을 쓰다듬듯 주무르며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지훈은 밖에서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웠는데 관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형, 내일은 뭐해요?”

“내일? 별 거 있나 공방에 계속 있겠지, 퇴근할 때까지. 왜?”

“내일도 보고 싶어서요.”

 

 

관린은 참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지훈이 관린의 고백을 승낙한 이후로 이렇게 매일, 관린은 지훈이 있는 곳에 와 시간을 보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참으로 달콤하지 않을 수 없는 연인이었다.

 

“물론 형이 시간이 안 된다면 말구요.”

 

 

게다가 그는 시간을 내달라고 강요하는 법도 없었다. 지훈을 가장 먼저 두고 나머지 것들을 생각했다. 지훈은 관린의 모든 말과 태도에서 사랑을 느꼈다.

 

 

“관린아 내가 시간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네가 괜찮나 해서.”

“저는 언제든 괜찮죠.”

“일은 없어? 그러니까 너 하는 일 같은 거.”

 

 

지훈은 아직도 관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일주일 된 연애가 그랬다. 관린은 다정해도 좀처럼 자신에 대해 먼저 말하는 법이 없어서 지훈은 이따금 제가 먼저 물어봐야할 때 괜히 조심스러웠다. 관린은 잠시 대답 없이 웃었다.

 

 

“여행 차 한국 온 건 아니라면서.”

 

 

지훈이 처음 관린의 이름을 듣고서 물었었다. 외국인이었어? 관린이 그렇다고 대답했었을 때 지훈은 조금 불안한 눈치를 보였었다. 나 장거리 연애는 자신 없는데, 하고. 관린은 그에 한국에 오래 머무를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딱 거기까지의 정보를 지훈은 가지고 있었다.

 

 

“저 그냥 집안 사업 돕고 있어요.”

 

 

관린이 괜스레 뒷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나름 지훈의 예상 안에 있던 답변이었다. 그렇다고 놀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훈은 역시, 하고 생각하면서도 놀라며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모금 빨았다. 관린이 더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눈치여서 지훈은 더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아무 때나 이렇게 나와도 상관없는 거야?”

“괜찮아요.”

 

 

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훈은 짐짓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관린은 그런 마음을 읽은 듯 따스한 미소로 대답했다.

 

 

“형이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순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해 올 때마다 지훈은 더 따질 수가 없었다. 그게 걱정이라도 말이 쏙 들어갔다. 네?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물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어쩜 사탕 발린 말을 해도 저렇게 위화감이 없을까, 관린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보고 싶다고 그렇게 시간 내도 돼?”

“형한테 쓰는 시간은 아깝지 않으니까요.”

“바쁘진 않아?”

“괜찮아요.”

“근데 너 또 전화 오는데.”

 

 

테이블 위에 뒤집어둔 관린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관린은 들어서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진동이 멎을 때까지 관린은 보고만 있었다. 지훈의 시선도 자연스레 관린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받지 않은 전화가 끊기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 받아도 돼?”

“괜찮을 거예요.”

“너 너무 일이 뒷전인 거 아니야?”

“당연히 일은 뒷전이죠. 형이 먼저인데.”

“말이나 못하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지훈은 어쨌든 관린이 좋았다.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말이 싫을 리가 없었다. 오글거린다는 말을 잊을 만큼, 사랑스러운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런 게 관린의 매력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솔직해서 좋았다.

 

 

“형 저녁은 뭐 먹으러 갈래요?”

“아.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어떤 고기?”

“삼겹살?”

 

 

천진하게 대답하다가 지훈은 문득 실수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과 자신이 내뱉은 선택지는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지훈이 서둘러 정정하려 입술을 뗀 찰나, 관린이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갈까요?”

 

 

 

 

자리를 옮겼다. 지훈이 앞장서서 찾아온 곳이었다. 지훈은 관린이 아무래도 걱정되었다. 관린은 또 익숙하게 의자를 먼저 빼주고 지훈을 앉혔다. 지훈은 이따금씩 관린이 드라마에나 나오는 재벌가의 아들에 오버랩 되어 보였다. 이런 음식을 왜 먹어, 할 것처럼 생긴 그런 인물들. 물론 관린이 실제로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찌됐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지훈의 선택이었으므로. 관린은 지훈의 선택에 막말을 할 성격은 못됐다.

 

 

“무슨 생각해요?”

“응?”

“아까부터 나 계속 보고 있잖아요.”

 

 

계속 걱정하며 눈치 본 것이 관린에게도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관린은 앉아서 코트를 벗어서 옆의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 두었다.

 

 

“형 은근히 저 어려워하나 봐요.”

 

 

관린이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부정할 타이밍도 놓쳐서 지훈은 그저 손사래만 쳤다. 그런 건 아닌데, 하고 어설프게 중얼거리면서.

 

 

“아직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만난 지 이제 일주일이잖아요.”

 

 

사람 좋게 웃는 관린에 지훈은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관린은 그렇다고 지훈이 미안해하길 원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애쓰는 거 아니야.”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갔다. 진짜로, 애쓰는 거 아니야……. 지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관린은 그저 웃으며 지훈과 자신의 앞에 수저를 세팅했다. 컵에 물도 따라 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혹시라도 내가 불편하게 하면 말해줘요. 난 형이 날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불편한 건 아니고. 아직도 너를 잘 모르겠어.”

“저를요?”

 

 

조금 놀란 눈치로 관린이 되물었다. 지훈은 제가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관린은 잠시 눈을 내리 깔고 가만있었다. 두 손을 겹친 채로 엄지를 쓸던 관린이 다시 고개를 들고 지훈을 볼 때까지 지훈은 내심 긴장한 채로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 해요, 형.”

“…….”

“다 물어봐요. 내가 다 답해줄게요. 뭐가 궁금해요?”

 

 

그리고는 자상한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고로 저 진짜 고기 좋아하는데, 관린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지훈은 반색하며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지훈은 계속해서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관린을 마주하고, 말을 나누었다. 약간 들떴는지 지훈은 말이 빨라지고, 많아졌다. 시끌시끌한 주변 분위기에 물들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관린은 지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기를 좋아했다. 말이 많아지니 입이 말랐다. 지훈은 금세 물이 담긴 컵을 비웠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웃으며 관린을 보았다.

 

 

“술 시켜도 돼?”

“그럼요.”

 

 

그러고 보니 관린을 만나고 술을 까는 건 처음이었다. 지훈은 술이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준다는 말을 믿는 편이었다. 실제로 사람을 사귈 때의 경험상 그래왔기도 했고.

 

곧 상 위에는 소주 두 병도 올라왔다. 지훈은 능숙하게 병을 흔들다가 아차, 싶어서 관린의 눈치를 봤다. 관린은 그저 계속 평온하게 웃으며 보고만 있었다. 지훈은 슬금슬금 병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왜요, 귀여운데.”

“뭐가 귀여워 이게.”

“형 편해보여서 좋았는걸요, 뭘.”

 

 

지훈은 몸을 슬쩍 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계속 고기 먹자고 한 거 후회하고 있어.”

“왜요?”

“너랑 안 어울리는 거 같아.”

“그게 뭐에요.”

 

 

관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지훈은 꽤나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삼겹살보다는 스테이크를 먹어야 할 것 같고, 소주보다는 비싼 와인이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인데.

 

 

“너랑 있으면 되게 티비에서만 보던 사람이랑 있는 느낌이야.”

“저도 그런데. 형 되게 제 연예인 같아요. 예쁘고, 반짝반짝하고.”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사뭇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관린의 말에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뭐야 그게, 하고 지훈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

“나 너한테 환상 같은 거 가지고 있나 봐.”

“환상?”

“그 왜,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 고기 집도 처음 와보는 그런 부잣집 도련님 같은 느낌. 다른 세상 사람 같고.”

“그래서 내가 어려웠어요?”

“응, 뭔가 격식 차리게 되는 느낌?”

 

 

관린은 지훈 앞에 놓여 있던 소주를 가져와 자신이 따고, 지훈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나 진짜 어지간히도 형 앞에서 잘 보이고 싶었나 봐요.”

 

 

관린은 잔을 들어보였다. 지훈도 따라서 들었더니 관린이 잔을 부딪쳐 왔다. 고개를 틀어서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꺾으면 안 돼요, 관린의 말에 지훈은 마시던 것을 뱉을 뻔했다. 관린은 금세 잔을 다시 채웠다. 지훈이 내려놓은 잔에도 술을 다시 따랐다. 또 한 잔이 비워졌다.

 

 

“어려워하지 마요. 격식 있을 사이 아니잖아요. 나 형 애인인데.”

“너 되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왜요, 부담스러워요?”

“아니, 좋아.”

 

 

익숙하진 않지만. 어쨌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관린은 지훈의 생각보다 소주를 잘만 마셨다. 달콤한 말만 뱉는 입으로 쓴 것이 잘도 들어간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 혀에는 초콜릿처럼 단 것만 닿을 줄 알았는데.

 

잔이 비워지고 병이 쌓일수록 분위기도 쉽게 무르익었다. 관린은 그래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게 관린답기도 했지만, 어쩐지 빈틈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은 서운했다.

 

 

“관린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계속 완벽해?”

“형 조금 취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내 앞에서도 예의 바른 모습만 보이냐고.”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니까 좀 더 허물없이 대할 수도 있는 거잖아. 반말도 하고.”

 

 

술이 들어가니까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지훈이 말을 놓을 때, 관린은 당분간은 자신은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되, 존댓말을 하겠다고 했다. 그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지훈은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관린하게 말했었지만 사실은 그게 마음에 걸렸었다.

 

 

“너도 사실은 내가 어려워서 그러는 거야?”

 

 

술은 비슷하게 마셨는데 관린은 변함없었다. 얼굴색도, 정신 상태도 완전히 멀쩡했다. 지훈은 자꾸 자신만 취하는 것도 억울했다.

 

 

“형이랑 오래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지훈은 양 손으로 턱을 받쳤다. 실실 웃음이 났다.

 

 

“너는, 되게, 솔직하고 좋게 말을 한다.”

 

 

근데 관린아. 나는 네가 솔직한 건지는 모르겠어. 말이 사람을 다 표현해주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아직 본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봐.

 

 

“이만 일어날까요? 취한 것 같아요, 형.”

 

 

 

 

 

방백. 어차피 극의 인물은 둘. 관린과 지훈이면 충분했다. 지훈의 부재가 성립된다면 이것은 분명한 방백이었다. 관린은 계단을 내려갔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검은 색이었다. 조명이 밝은 것도 아니었다. 때깔 좋은 수트 차림이었다. 시원스레 머리도 넘겼다. 관린은 제게 어울리는 이 차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비슷한 차림의 남자가 관린에게 비아냥거렸다. 관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관린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밀착해왔다.

 

 

“왜 아직 안 가고 있어요.”

“너 기다린다고. 오늘도 몇 명이 너만 찾았는줄 아냐?”

“저 손님 안 받거든요.”

“알아, 인마. 다 알고도 찾는 거지. 안 되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관린은 한숨을 푹 쉬며 팔을 풀어냈다. 지훈을 만나고 오면 제 꼴이 더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다소 저기압인 관린을 보고 남자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래서 연애는 잘 풀리냐?”

“무슨…….”

“너 연애하잖아, 요즘.”

“어떻게 알았어요. 마담이 그래요?”

“너 얼굴 안 비춘다고 불만이 많다니까. 그래서 연애는 잘 돼 가냐고.”

 

 

관린이 얼굴을 쓸었다. 절로 한숨이 또 나왔다. 관린은 바로 가서 애꿎은 장부만 뒤적거렸다. 별 거 없어, 네가 안 와서. 남자가 관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관린은 소리 나게 장부를 다시 내려두었다.

 

 

“저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애인이?”

“네.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란 부잣집 아들인 줄로 아는 것 같아요.”

“너랑 잘 어울리긴 하는 설정이네. 부잣집 아들인 건 맞고.”

 

 

관린은 남자를 째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제대로 된 집안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어요.”

 

 

사탕 발린 말과 가식적인 혀로 벌어먹는 사람이 아니라. 관린은 제 진심에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이 건네는 말들을 의심한 적은 많았다. 나는 이 말에 얼마만큼 진심을 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두려웠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을, 그저 습관적으로 건네는 건 아닐까.

 

 

“방금 그 말 들으셨으면 마담은 꽤 서운해 하셨을 거야.”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관린이 대꾸하려는 찰나 안쪽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관린을 알아보고는 달려와 한쪽 팔을 걸었다. 관린은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한껏 미소를 지었다.

 

 

“라이, 그동안 왜 안 보였어?”

“개인적으로 좀 바빠서요. 보고 싶었어요?”

“당연하지. 라이 보려고 오는 건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

“그것도 바빠서요. 다음에는 오시면 제가 꼭 모실게요.”

“약속 했어.”

“그럼요. 조심히 들어가요. 밖에 추우니까 잘 여미고 다니고.”

 

 

관린은 손수 외투를 여며주기까지 했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가라고 배웅을 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시 홀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관린은 웃음 가득했던 표정을 풀었다. 입 안에서 뭐라 욕을 읊조린 것도 같았다.

 

 

“연락처를 줬어?”

“줬겠어요? 뜯겼죠.”

“가끔 너 보다보면 여자 안 좋아한다는 거 안 믿겨.”

“형 뭘 모르네요. 여자에 관심 없으니까 일이 그나마 편한 거예요.”

“그러냐.”

 

 

관린은 생각에 잠겨서는 데스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몇 번이고 반복했다.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다 한참 후에 입을 뗐다.

 

 

“뭐가 그렇게 문젠데.”

“어디까지 솔직해져야할지 모르겠어요. 아니, 제가 솔직한 면이 있긴 있나 싶어요.”

“좋아한다며. 그건 진짜 아니야?”

“진짜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그 형한테 하는 말도 다 습관인가 싶고.”

“복잡하네.”

“자꾸 선을 긋게 되나 봐요. 형에게 실수할 것 같아서. 그래서 형이 서운해 하는 거 같은데.”

“너 되게 자신 없구나.”

“맞아요.”

 

 

사실은 제가 다 문제에요.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게 문제에요. 관린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숨기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꾸며낸 점도 많았다. 격식이 있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 더럽게 노는 곳의 안주인의 아들로 들여져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자랐다. 그 돈으로 자신을 꾸몄다. 온갖 깨끗한 척을 해보려 해도 결국은 진짜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뱉는 말도 돈이었고, 자신을 향한 사랑도 돈으로 쳤다. 그랬던 제가 이제 와서 지훈을 향해 사랑을 운운하는 것에 자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애가 용인해 줄 가능성은?”

“애초에 그걸 어떻게 말해요.”

“넌 어차피 손님 안 받잖아.”

“그렇다고 호빠 관리하는 일 한다고 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그럼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던가.”

“절대 싫어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관린을 보았다. 관린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답이 없긴 했다. 많은 것이 숨긴 아슬아슬한 연애가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모든 것에 솔직해지자니 지훈의 경멸이 두려웠다. 남자는 관린을 두고 퇴근했다. 관린은 그 밤에도 기계처럼 듣기 좋은 말을 뱉었다. 자본주의로 물든 혀를 놀렸다.

 

 

 

 

관린은 새벽에 퇴근하고 바로 잠이 들어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지훈에게 연락했다. 식탁 위에는 지훈의 공방에서 사 왔던 초콜릿이 있었다. 다크 초콜릿을 꺼내 물었다. 씁쓸한 맛이 혀에 맴돌았다. 지훈의 초콜릿은 대체로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는 단 맛이 덜했다. 다소 생소한, 날 것의 맛이었다. 카카오 빈의 함량이 높기 때문이라고 일전에 지훈이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 관린이 그 초콜릿을 먹었을 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었다. 결코 본질의 맛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조금 일찍 퇴근하려고. 나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

 

지훈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관린은 바로 답장했다.

 

‘어딘데요?’

‘너네 집.’

 

관린이 어떡하지, 싶어서 답장을 한 글자도 치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고만 있었다. 아직 고민을 하는 중인데, 전화가 왔다. 관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말할 것도 없이 지훈이었다.

 

 

“관린아, 바빠?”

“아뇨.”

“데리러 올래? 나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서.”

“형 근데…….”

“응?”

 

 

진짜로 우리 집에 오려구요? 관린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말았다. 드레스룸 한 구석을 보았다. 뜯지도 않은 선물이 그렇게나 많았다. 당장 어떻게 처리할 수는 없는 양이었다. 관린은 드레스룸의 문을 닫았다.

 

 

“아니에요. 금방 준비하고 갈게요.”

“응. 천천히 와.”

“네 이따 봐요.”

“그래.”

“아, 형.”

 

 

관린이 전화를 끊으려다가 다급하게 지훈을 불렀다. 멀어지던 목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

 

 

“응? 왜?”

“사랑해요, 진짜로.”

 

 

수화기 너머로 지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해사하게 웃는 표정이 상상되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뭐야.”

“좋아한다구요.”

“나도. 이따가 봐.”

 

 

지훈은 전화를 끊었다. 관린은 빠르게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차분해 보이는 옷을 골라 입었다. 머리를 만지지도 않았고,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다. 관린은 지훈에게 문자를 남겼다.

 

‘지금 출발해요.’

 

 

 

 

 

“금방 왔네?”

 

 

지훈이 관린의 차에 올라탔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관린은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그건 뭐에요?”

“아, 이거 너 줄 거. 초콜릿. 단 거 안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게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지훈은 들고 있는 상자를 열었다. 작고 네모난 초콜릿이 네 개 들어 있었다. 지훈은 그 중에서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서 관린의 입 앞에 가져갔다. 초콜릿을 들고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관린이 입을 살짝 벌려 받아먹었다. 그렇게 달진 않아도 꽤 여러 가지 맛이 났다. 신 맛도 있었고, 쓴 맛도 있었고, 본연의 단 맛과 고소한 맛도 있었다. 관린은 입 안에서 한참 초콜릿을 굴리며 사뭇 진중하게 맛보았다.

 

 

“그게, 시중에서 파는 거랑 맛이 많이 다를 거야. 거긴 워낙 가공을 많이 해가지고.”

“괜찮아요. 저는 형 초콜릿 좋다니까요. 진짜잖아요, 꾸며낸 게 아니라.”

 

 

지훈이 화색을 띠었다. 관린의 입에는 묵직한 맛이 한참을 맴돌았다. 그 여운이 좋아서 몇 번이고 입맛을 다셨다. 그 맛이 사라져갈 때 쯤 지훈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어제 내가 한 말……. 조금 취해서 한 말, 생각해 봤는데. 네가 그러고 싶으면 당장은 편하게 안 대해도 괜찮아. 내가 어제 조금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형 저는요, 계속 형한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관린은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입이 탔다. 지훈은 차분한 표정으로 상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제 생각을 많이 했어요, 형에게 많이 솔직하지 못했나.”

“내 말은 네가 솔직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물론 제가 형을 좋아한다고 한 말 중에 거짓은 없어요. 당연히 없어요. 근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못 보여준 게 많잖아요.”

 

 

관린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지훈을 보았다. 바로 눈이 마주쳤다. 관린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어렵게 말을 뱉었다.

 

 

“사실은 반말도 하고 싶었고, 격식 없이 대하고도 싶었는데 그게 더 어렵다, 형.”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 지훈의 어깨의 고개를 묻었다. 긴장하고 있던 지훈은 참았던 숨을 뱉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더 민망해지는 관린이었다.

 

 

“왜 웃어요.”

“너 너무 귀엽다.”

“사실은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데, 형이 생각하는 그런 멋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나는 별로 상관없어.”

 

 

말로 자신을 꾸미기는 수천 번이었지만 말로 자신을 내려놓는 건 처음이었다. 관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훈의 손이 관린의 뒤통수를 감쌌다. 아이를 어르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관린아.”

“응?”

“좋아한다는 건 진짜야?”

“말할 것도 없이 진짜야.”

“그럼 됐어.”

 

 

관린은 자신을 쓰다듬던 지훈의 손을 잡고는, 그 손을 내리며 고개를 살짝 들어 지훈의 볼에 입 맞췄다. 귓가에 들리는 쪽, 하는 소리에 지훈은 그대로 얼었다. 관린은 얼굴을 옮겨 지훈과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마주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였다. 고개를 살짝 꺾어서 승낙을 구했다. 지훈은 그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고, 호흡이 통하는 틈으로 혀가 오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길지는 않은 키스였다. 관린은 마지막으로 지훈의 젖은 입술 위에 다시 한 번 도장을 찍듯이 입을 맞추었다.

 

 

“형 나랑 같은 맛 난다.”

 

 

같은 초콜릿을 먹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감춰 물었다. 관린은 지훈이 손 부채질을 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한 초콜릿의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