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Minute 上
w. 라엠

 

 

하얗다. 눈이 부신 걸 넘어 아릿하게 시릴 정도로. 지훈은 발밑을 뒤덮은 흰색과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흰색을 바라보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나온 숨이 하얗게 변해 느긋이 피어오르다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지훈의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필드는 반나절 째 끊임없이 내리는 눈에 뒤덮여 본체가 모호하게 변해 있었다. 양 끝에 외롭게 세워진 골대가 없었다면 더욱 알아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훈은 아니었다. 골대가 있든 없든 눈으로 뒤덮였든 아니든, 그가 이곳을 잊어버리거나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뽀득거리는 눈에 의해 한 꺼풀 덮이긴 했지만 발밑에서 잔디가 짓눌리고 구겨지는 이 느낌을 어찌 지훈이 모를 수 있을까. 3년간 수도 없이 밟은 곳이 바로 이 필드인데.

 

지훈은 여기서 있었던 마지막 경기를 기억한다. 1년이 넘게 지났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이곳을 벗어났었는데. 왜 다시 여기로 온 걸까. 햇빛에 반사되어 마구 반짝거리는 흰색에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눈을 감자 스위치가 꺼진 듯 순식간에 모든 빛이 차단되고 암흑으로 잠식되었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 깜박거리며 떠다니는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전히 같은 장소, 같은 자리였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2년 전, 그를 처음 만났던 날로 되돌아갔다.

 

삐익-

 

귀를 때리는 휘슬 소리가 청명하게 하늘을 날았다. 각 팀이 벤치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비장하게 필드로 뛰어들어갔다. 지훈의 팀이 볼 우선권을 가져서 공은 그의 발 앞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훈은 몇 발짝 앞에 저와 마주보고 서 있는 애를 흘끗 올려다봤다. 적어도 머리 하나는 차이날 법한 큰 키와 그만큼 길쭉한 팔다리. 소위 ‘공 좀 찰 법한’ 피지컬이었다. 지훈은 두 눈을 치켜뜬 채 그를 곱지 않게 흘겨봤다. 지훈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관린이 따가운 눈빛의 근원지로 눈을 내렸다. 큼직하고 동그란 두 눈과 곧장 시선이 얽혔다. 그와 눈이 마주칠 줄 몰랐던 지훈은 다급히 눈을 돌렸다. 이번엔 관린이 제 앞에 서 있는 애를 찬찬히 살폈다. 얘가 그… 에이스? 대만에서 유소년 국가대표 팀의 미드필더로 뛰다가 부모님 직장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민이 결정된 후부터 관린은 지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상당 부분 바뀔 자신의 환경과 미래에 대한 목표 등을 생각하다 한국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찾아보게 된 것이다. 한국에선 그들과 경쟁하게 될 테니. 관린이 찾아본 선수들 중 가장 주목받는 한 명은 단연 박지훈이었다. 지훈의 성과에 대해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우수수 쏟아내는 기사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도 지훈이 받는 관심과 주목은 상상초월이었다.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 올해의 유망주 등 요란스레 따라붙는 타이틀도 다양했다. 기사사진이나 지훈의 지난 경기 영상을 봤을 때부터 예쁘다는 생각을 해왔던 관린인데 실제로 보니 더 예뻤다. 자꾸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관린의 시선이 옆얼굴에 콕콕 박혀들어 지훈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어서 경기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며 애꿎은 잔디를 축구화 끝으로 비비적거리며 뭉갰다. 마침내 휘슬 소리가 다시금 필드를 울리고, 지훈은 공을 제 뒷쪽의 공격수에게 패스한 후 관린을 집중 마크했다. 관린은 공을 뺏어오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훈을 제치려 했지만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던 기를 쓰고 막아내는 지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지훈은 매 경기마다 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량을 펼쳤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듯 했고 평소보다 열정이 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미세한 듯한 이 차이는 관린이 공을 뺏고 나서부터 더욱 명확해졌다. 관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차게 드리블하며 상대팀 수비수들을 향해 뛰어갔다. 지훈은 위험을 직감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다 몸을 날려 슬라이딩했다. 철저히 계산된 듯 매끄럽게 필드 위를 유영하던 관린의 발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위치로 훅 들어온 지훈의 태클에 꼬였고, 두 선수는 삽시간에 잔디 위를 굴렀다. 왼팔 전체를 관통하는 쓰라림에 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몸을 사리려 했다면 애초에 태클을 걸지도 않았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프다. 휘슬이 다시금 강하게 귀를 때리고, 심판이 둘을 향해 뛰어왔다. 관린은 제 몸 여기저기를 대충 훑어보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아직 엎어져 있는 지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훈은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관린의 희고 고운 손을 노려보다 오른팔로 팍 쳐내고 일어섰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손이 머쓱할 법도 했지만 관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을 거두었다. 심판은 지훈에게 옐로카드를 받을 수 있는 태클이었다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만일 공을 건들지 않았다면 무조건 옐로카드를 받았겠지만 지훈이 슬라이딩하며 발끝으로 공을 쳐냈기에 심판의 언질로 끝내는 것이었다. 중요한 시즌 경기가 아닌 두 고등학교가 매년 하는 친선경기인지라 굳이 선수의 커리어에 남을 부정적인 판정을 내릴 필요까진 없다는 심판의 배려가 다분히 들어간 처사였다.

 

관린은 심판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의기소침해 있는 지훈을 흘끗 내려봤다. 왼쪽 팔뚝 전체에 붉게 상처가 난 것이 아무래도 넘어지며 잔디에 심하게 쓸린 것 같았다. 슬쩍 봐도 꽤나 아픈 듯 보여 심판은 선수교체를 권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경기를 계속하겠다 말하는 지훈의 모습은 강인하면서도 어딘가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필사적으로 뛰어야만 하는 사람 같았다.

 

그 후 경기는 전반전이 끝날 때 까지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임에도 땀에 푹 젖은 선수들은 각 팀 벤치로 둥그렇게 모여들어 후반전을 시작하기 전의 짧은 쉬는시간을 만끽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타올로 땀을 닦는 등 부산스러운 모습인데 딱 한 사람, 지훈만이 움직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지훈의 앞에는 코치가 딱딱히 굳은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너 대체 뭐야? 거기서 그런 태클을 걸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너 원래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애 아니잖아. 답지않게 왜 이렇게 쓸데없이 공격적이야? 숨 좀 쉬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경기야.”

“…네.”

“혹시 라이관린이라 일부러 그런거냐?”

 

코치의 예리한 질문에 지훈이 움찔했다. 대화는 진전없이 종결되었지만 코치는 질문의 답을 얻었다. 물어보기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은 평소 경기를 뛸 때 냉철함과 평정심을 상당히 잘 유지하는 선수였다. 그런 지훈이 감정적으로 플레이하고 있는데다 한 선수에게만 유독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코치는 진즉에 알아챘다. 지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신경질적으로 물통을 집어들었다. 코치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평소였다면 생각도 안 했을 무모한 태클, 거친 플레이. 다 관린 때문이었다. 지훈은 관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미적지근한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지훈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 대처방법을 알 리도 없다. 어째야 할 지 몰라 더욱 유치하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지훈은 축구를 시작하고부터 한 번도 최고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팀들이 자신을 스카웃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전액 장학금을 약속한 대학들도 많았다. 모두가 저를 주목했고, 제게 열광했다. 그러니까, 라이관린이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혜성같이 등장한 유망주, 대만에서 온 축구 천재. 라이관린을 따라붙는 타이틀은 삽시간에 쏟아져 나왔다. 그를 놓친 건 대만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어떤 기자가 그랬던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망주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그렇게 가벼웠나. 몇 년간 ‘박지훈’ 석 자와 세트처럼 붙어다니던 수식어들은 이제 전부 새 주인을 찾아 떠났다. 지훈은 텅 빈 물병을 사정없이 구겼다. 플라스틱이 우그러지는 소음이 꼭 제 자존심이 뭉개지는 소리 같았다. 경기 시작 전부터 그닥 좋지 않았던 기분이 이젠 한없이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후반전을 위해 선수들을 필드로 불러모으는 휘슬 소리가 울려퍼졌다.

 

경기가 재개되었다. 지훈은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까 잔디에 쓸린 왼팔 때문이었다. 코치는 중요한 경기도 아니니 지훈에게 후반전은 쉬라고 일렀다. 무리하게 뛰다 자칫 더 큰 부상으로 이어져 남은 시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코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관린을 지켜봤다. 길쭉한 다리로 온 필드를 휘젓고 다니며 공격과 수비를 완벽히 해내는 관린은 과연 지훈의 유망주 타이틀을 단숨에 뺏어갈 만 했다. 지훈도 그걸 알아서 더욱 분했다. 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관린 팀의 스로인 기회가 주어졌다. 관린은 공중으로 붕 뜬 공을 향해 가볍게 뛰어올라 깔끔한 트래핑으로 떨어트렸다. 제자리를 찾은 것 마냥 공이 관린의 발끝에 정확히 안착했고, 관린은 몰려드는 수비수들을 피해 이리저리 드리블하다 왼발로 강하게 슈팅했다. 공을 차기 전 허공을 가르는 팔의 각도, 슛 할 위치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눈빛. 완벽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관린의 발을 떠난 공은 순식간에 허공을 날아 골대 오른쪽 구석에 정확히 꽂혔다. 경기의 첫 골, 첫 득점은 관린이 차지했다. 환히 웃으며 제게로 달려드는 팀원들과 장난치는 모습을 지훈이 탐탁잖게 쳐다보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잘하긴 하네.

 

경기는 1:0으로 끝났다. 지훈은 아쉬웠지만 친선경기일 뿐이니까 너무 얽매여있지 않기로 했다. 가방을 챙겨 필드를 벗어나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매끈한 흰 목이 보였다. 천천히 올라가는 시선을 따라 관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아, 미안.”

 

삐딱하게 나간 건 지훈인데 되려 상대방이 사과한다. 관린은 갑자기 잡은 것이 지훈에겐 불편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어깨 위에 올린 손을 거뒀다. 지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까 넘어져서. 팔, 괜찮아?”

 

어눌한 발음에 뚝뚝 끊기는 문장. 지훈은 관린이 한국에 온 지 석 달밖에 안 된 외국인이고, 한국말이 유창할 리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무심코 제 팔을 내려다본 지훈이 대번에 얼굴을 찡그렸다. 다친 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놔둬서 지훈의 팔뚝은 말라붙은 피딱지와 자잘한 생채기로 보기 흉하게 뒤덮여 있었다. 상처를 보자 고통도 상기되는 것 같아 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삐죽였다. 관린은 가라앉은 눈으로 지훈의 팔을 살피다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소독 해야 돼. 나 약 있어.”

 

뜻밖의 말에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린을 올려다봤다.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지훈이 대꾸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렸다. 관린은 더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지훈을 벤치에 앉히고 지훈의 왼쪽에 자리잡았다. 관린이 한 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큰 스포츠백을 뒤적여 소독용 알코올, 솜, 붕대, 밴드 등이 담긴 비닐봉지를 꺼냈다.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한 관린이 경기마다 빼놓지 않고 챙기는 작은 키트다. 능숙하게 솜에 알코올을 묻히는 기다란 손가락을 지훈이 멍하니 쳐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젖은 솜이 팔뚝에 닿자 곧장 치솟는 따가움 만큼은 너무도 생경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알코올의 공격을 받은 지훈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

 

지훈의 왼팔에만 잔뜩 집중하던 관린이 귀에 직통으로 꽂히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지훈은 얼굴이 벌개진 채 주먹을 꽉 쥐고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 아파?”

 

모든 행동을 멈추고 지훈을 기다렸다. 지훈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듣기 전까진 꼼짝 않을 것이었다. 지훈은 조금 민망해졌다. 그렇게 소리지를 것까진 없었는데… 지훈은 흘끔 관린의 눈치를 봤다. 관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올곧이 지훈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다.

 

“아니, 좀 놀라서… 참을만해.”

“아프면 말해.”

 

관린은 꼼꼼히 소독을 마치고 연고를 발랐다. 서늘한 관린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지훈은 움찔거렸다. 관린은 지훈이 아파서 그런 줄 알고 매번 지훈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지훈도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확실히 아프진 않은데 느낌이 이상했다. 연고를 묻힌 관린의 손끝이 살을 느릿하게 문지를 때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더운 것도 아닌데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 했다. 이따금씩 관린을 힐끗거릴 때마다 보이는 긴 속눈썹이며 매끈한 콧날 따위가 지훈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헤집었다. 왜, 왜 이러지. 제 기분을 속 시원히 정의할 수 없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지훈은 관린이 연고를 다 바르고 밴드를 붙일 때까지 얌전히 앉아있다 관린의 손이 제 팔에서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는 관린의 정수리에다 대고 어물거리며 고맙다고 한 뒤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관린은 빠르게 작아지는 지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팔을 내맡긴 채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필드를 누비는 모습도, 적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는 모습도, 전부 예쁘다.

계기는 사소하다. 그 계기가 불러일으키는 결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지만. 그 날 이후 지훈은 어느 것에도 집중을 못했다. 학교 수업 중에도, 연습 때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자꾸만 라이관린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연습마다 실수를 연발하는 지훈을 코치는 매섭게 혼냈다. 중요한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학 축구팀 코치들이 와서 스카웃해갈 선수를 뽑는 경기다. 그리고 관린도 그 경기를 뛸 예정이다. 지훈은 중학교 입학 때부터 꾸준히 희망해온 대학교가 한 곳 있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는 안됐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잘 해야했다. 최고라는 것을 보여줘야했다. 지금 지훈의 가장 큰 라이벌은 라이관린이고, 지훈의 목표 대학엔 둘 중 한 명만 입학할 수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관린을 끊어버려야 했다. 경쟁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지만 반대로 제 약점이 여과없이 보여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지훈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지훈은 관린을 싫어했었다. 축구를 잘해서.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 이유 때문에 관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 삐뚤게 보기 시작하니 모든 구석이 다 꼴보기 싫었다. 그 땐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린이 지훈의 팔을 소독해준 후로 관린을 향한 지훈의 감정은 시나브로 달라졌다. 역시 사소한 계기다. 연고 좀 발라준 게 뭐라고. 하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설상가상 지훈과 관린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는 것 치고 꽤 자주 마주쳤다. 그건 지훈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단체 연습 땐 한 필드를 나눠서 쓰기도 하고, 훈련 도중 연습 경기랍시고 두 팀이 플레이한 횟수도 적지 않았다. 지훈은 관린을 스스럼없이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제 딴에는 자연스럽게 피하곤 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관린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경기 때는 정말 딱 공만 차고 나왔다. 그 밖의 대화도, 교류도 없었다. 그래, 결국 걔랑 나는 이 정도의 사이여야 한다는 거겠지. 습관처럼 되뇌었지만 그 말은 본인에게조차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지훈은 본인의 행동을 합리화함과 동시에 자책했다.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단 좀 괜찮은 애 같아서. 그래서 마음이 쓰이는 것 뿐인데. 꼭 이래야만 하는 건가? 애석하게도 지훈은 뭘 어쩌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눈을 맞추고, 말을 섞고, 친해지면. 그 후에는? 어디까지가 적정선인 건지, 어디서부터가 금지된 건지 지훈은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선에서 절대 멈출 수 없을 것이었다. 한 번 허락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그 한 번 조차 끊어버려야 했다. 지훈은 연습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필드를 빠져나왔다. 등 뒤에 바늘처럼 콕콕 박혀드는 관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관린은 지훈이 저를 일부러 피한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챘다. 그 이유도 알 것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저와 친해지지 않으려 부던히도 애쓰는 지훈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관린은 지훈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꼭 라이벌이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경쟁만 해야 하나? 관린의 답은 no였다. 좀 과장해서 설사 둘이 숙명적인 적수라 할지라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관린은 본인의 선수생활에 지장 가지 않는 선에서 지훈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자신이 있었다. 지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없는건지, 아예 생각도 안 해본 건지. 어느 쪽이든 시도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서 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크고 맑고 깨끗한 지훈의 눈을 보며 말해주고 싶었다. 난 너가 좋다고. 너랑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그 눈을 보며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떠냐고.

 

관린은 새벽연습을 하러 종종 필드에 오곤 했었다. 경기를 뛸 필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고, 혹시 지훈도 연습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가슴 한 쪽에 자리했다. 그런 관린의 설렘이 무색하게 그 시각에 지훈을 필드에서 보는 일은 없었다. 지훈을 못 보는 날이 늘어날수록 관린의 기대감도 점차 사라졌고, 어느새 새벽연습이 몸에 익은 관린은 거의 습관적으로 매일 필드로 향하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생각 없이 연습하러 갔는데 필드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자그마한 누군가가 보였다. 어둡고 거리도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관린의 머리가 저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기도 전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걸어가던 관린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종래엔 거의 뛰듯이 필드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한 관린의 앞에 서 있는 건 역시 지훈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눈이 일찍 떠져서, 오래 잔 게 아닌데 어쩐지 잠도 죄 달아나서, 그래서 몸이나 풀 겸 필드로 나왔는데. 예상치 못한 시각에 등장한 예상치 못한 인물에 지훈은 적잖이 놀랐다. 반가움 반 놀람 반이던 관린의 얼굴이 점차 해사하게 밝아졌다. 마치 늘 둘이 함께 연습해왔던 듯 자연스럽게 지훈에게 같이 연습하자고 권했다. 지훈은 갈등했다. 관린을 끊어내야 한다고 그간 수도없이 다짐했는데. 같이 연습하자는 한 마디에 이렇게나 동요하는 마음이란. 결국 지훈은 관린을 조금도 끊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깊게 생각할 질문도 아니다. 너랑 연습하기 싫다고 거절하면 끝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한 번 쯤은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해도 괜찮지 않을까. 지훈은 관린의 깊은 눈을 올려다봤다. 보채거나 강요하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선택권을 지훈에게 넘기고, 온전히 지훈의 뜻대로 하겠다는 모습이었다. 지훈이 싫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아설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린의 얼굴이 한 층 더 빛났다.

 

계획도 없이 갑작스레 함께 연습을 시작한 것 치곤 꽤나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패스를 차례로 연습하고, 트래핑과 헤딩까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트래핑을 조금 어려워하는 지훈을 관린은 착실히 배려했다. 자존심이 강한 지훈은 자신의 약점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관린이 가볍게 던진 공을 연이어 받아내지 못하자 상대방이 알아채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지경이 되었다. 관린은 시범까지 보여가며 지훈이 트래핑을 어렵게 여기지 않게끔 도와주었다. 지훈은 저가 관린보다 못 하는 게 있다는 것이 쪽팔렸지만 관린이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마치 둘이 같은 팀인 양 다정스레 대해서 어느새 부끄러운 감정은 말끔히 잊어버렸다. 처음엔 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저 재밌고 행복했다.

 

동이 트고 하늘이 완전히 밝아질 때 쯤에야 연습이 끝났다. 둘은 필드 한 중간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스트레칭을 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조용히 휘감았다. 연습 내내 뛰어다니느라 뭉친 종아리 근육을 꾹꾹 누르며 지훈이 툭 던지듯 말했다.

 

“같은 대학 가면 재밌겠다, 그치.”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현실 가능성이 없는 말이었다. 둘 다 그걸 알고 있었다. 관린은 어쩐지 조금 빛을 잃은 듯 보이는 지훈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훈은 애꿎은 정강이 보호대 끄트머리만 연신 만지작댔다.

 

“갈 수 있어.”

 

이상하리만치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휙 돌리니 곧장 관린의 큼직한 두 눈과 마주쳤다. 관린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이었다.

 

“같은 대학. 갈 수 있어.”

 

지훈이 꺼낸 말과 붙여보면 전혀 이어지지 않는, 퍽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지훈은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게 지훈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확고함.

 

관린과 헤어지고 홀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천천히 느릿하게 걸으며 관린이 한 말을 곱씹었다. 같은 대학, 갈 수 있어. 지훈은 그 말을 믿었다. 동시에 부인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고집스럽게 관린에게만 매달리던 머릿속에 그간 지훈을 괴롭혀왔던 것들이 밀려들어왔다. 라이벌, 축구, 경기, 대학, 스카웃, 관계, 경쟁. 그리고 라이관린, 라이관린, 라이관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웅웅 울렸다. 몇 발짝 더 옮겨보지만 결국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양 팔로 끌어안았다. 천천히 호흡하며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다. 가랑비가 내리듯 톡톡, 조금씩 다가온 감정이 어느새 거센 폭풍우가 되어 저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말았다. 결국 지훈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관린아, 내가 널 끊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