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w. 모뷰

 

 

5.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조금 낡은 듯한 철제 문 앞에서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괜히 빗물에 젖은 바닥을 우산 끝으로 두어번 두드려 본다. 맞게 찾아온 것 같긴 한데.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서도 어쩐지 계속 주저하던 지훈은, 고개를 들어 -황민현 변호사 사무실- 이라고 쓰여진 나무 명패를 올려다보았다. 명패가 붙은 문 꼭대기에는 작은 종모양의 방울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빨간 리본이 달린 방울 장식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허름한 철제 문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노크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훈은 그러지 않기로 하고 그냥 문을 밀어 젖혔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다면 문앞에서 괜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은 지훈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매끄럽게 열렸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지훈의 뒤로 딸랑, 경쾌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어서오세요-”

 

 

 

지훈이 문을 밀고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저를 향해 밝게 인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고 있던 우산을 탁탁 털어 한쪽에 세워두려다 말고 지훈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지훈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단정한 스웨터 차림의, 지훈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는지 한 손에는 자그마한 분무기를 든 채였다. 남자의 등 뒤로 난 창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지훈의 시선이 천천히, 햇살이 반쯤 드리운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지훈의 시선이 멈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지훈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황한 남자가 제게로 달려오며 괜찮으세요? 묻는 것이 보였지만 지훈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턱끝을 적시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손님? 손님? 제 몸을 흔드는 남자의 목소리도, 주머니 속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멈추지 않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 시리고 아팠다. 그런데도 제 눈이 제 것이 아닌 것 마냥, 아무런 감각 없는 유리알처럼 느껴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눈물들이 투명한 길을 그리며 점점 번져 나가는데도, 지훈은 솟아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눈물을 떨구는 지훈의 머릿속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아아, 드디어-

 

만났구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W. 모뷰

 

 

 

 

 

한참만에야 겨우 눈물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힌 지훈은, 접대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는 지훈에게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컵을 내밀며 말했다. 허브티예요, 이거 드시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거예요. 지훈은 말없이 그가 내민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따뜻한 머그컵을 손에 쥐고 입안에 차를 한모금 머금으니 그제서야 왈칵 터졌던 감정들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런 지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훈은 마치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꼈다.

 

지훈은 가까이서 그와 마주보고 앉은 후에야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자의 두 눈은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무언가가 담겨 있지 않았다.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시선이 제가 있는 곳 근처에 어렴풋이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라이관린, 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민현의 사무실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황변호사님은 빗길에 차사고가 나셔서.. 좀 늦으신다고 하네요. 죄송하다고.. 시간 괜찮으시면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셨어요.”

 

 

 

제게 전하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지훈은 내내 주머니 속에서 울리던 핸드폰이 민현의 전화였음을 깨달았다. 아.. 네, 그럴게요. 지훈은 최근 동업을 하던 친구와 임차권을 두고 법적 분쟁이 생겨 변호사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절친인 진영에게서 아는 선배라며 민현을 소개받았고, 전화로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사무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훈의 머릿속에서 민현에게 의뢰하려던 내용들은 까맣게 잊혀진 지 오래였다. 지훈의 모든 관심은 오직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로 쏠려 있었다.

 

 

 

지훈은 연신 찻잔을 홀짝이면서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지훈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도 지훈이 차를 마시며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려주고 있는 듯 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흘끗거리며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던 지훈은, 몇번이나 주저한 끝에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저..”

 

“네?”

 

“저는 박지훈이라고 해요. 친구 소개로 황변호사님을 만나러 왔고..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얼마전까지는 꽃집을 했었어요.”

 

“아.. 네. 그러시구나.”

 

 

 

조금은 뜬금없는 지훈의 자기 소개에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 없이 웃는 얼굴로 지훈의 말에 화답해주었다. 단지 클라이언트의 사연을 경청하기 위한 것이라기엔 남자가 제게 지어보인 그 미소가 너무 다정하고도 따스해서. 지훈은 더더욱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제가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대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엔, 다른 어떤 것도 지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훈은 다급해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두서없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저..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어디선가 절 보신 기억이 없으세요? 아니.. 얼굴은 모르시겠지만, 목소리나.. 이름같은 거라도. 아무거나.. 저랑 관련된 것 중에 생각나시는 거 없으세요? 정말 그냥,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지훈의 난데없는 질문세례에 남자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예의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지훈이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대답에 지훈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그래도 한바탕 눈물을 쏟은 후라 더 빠져나갈 기운조차 남아 있질 않은데. 혹시나 했던 기대마저 허무하게 날아가고 나니 지훈은 무슨 말을 더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얘기해봤자 어차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겠지..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말들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추스리려 애써봐도 쉽지 않았다. 지훈이 아무 말이 없자 마음이 쓰였는지 그가 지훈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건네왔다.

 

 

 

“혹시.. 아까 우셨던 게.. 그거랑 관련이 있는건가요?”

 

“아…”

 

 

 

지훈은 얼른 대답하려 했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훈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가 다시 물었다.

 

 

 

“제가 아시는 분이랑 닮았다거나.. 그런건가요?”

 

“아.. 아니예요.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해요, 제가 보시다시피.. 눈이 이래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전에 절 보신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을 오래 나눈 게 아니면 아마 제가 기억을 못할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지훈에게 미안해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도 오늘 이 문을 열고 나서 그를 처음 보았으니까. 과거에 만난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그래도 지훈은 그가 절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얼굴을 보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김없이 또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지훈은 손끝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괜찮으세요?”

 

 

 

지훈이 또다시 울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남자는 지훈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네. 지훈이 애써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말없이 티슈를 건넸다. 지훈이 그것을 받아들려는 찰나, 딸랑-하는 방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민현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지훈은 받아든 티슈로 얼른 눈가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현은 지훈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며 거듭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지훈은 괜찮다고 말하고 민현의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민현에게 사건 내용을 말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상의하는 와중에도 지훈의 신경은 온통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깟 돈 몇푼 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오랜시간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사람이었다. 그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민현의 설명을 듣는 도중에도 지훈은 반대편 책상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곁눈질로 몇번이나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저를 향해 웃어보이는 얼굴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곧게 뻗은 눈매, 도자기같이 흰 피부, 남자답고 선이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 그러면서도 어딘가 처연함이 서려 있는 불투명한 눈동자.

 

몇번이고, 몇번이고 그를 눈 안에 담으면서 지훈은 확신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지훈은 당장 이 순간 눈을 감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가 20년간 매일 밤 꿈에서 보아온, 틀림없는 그 얼굴이었다.

 

 

 

 

 

4. 단 한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지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 꿈을 꾸었다. 꿈은 늘 같은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낯선 방 안, 흰 옷을 입은 자신이 침상 위에 누워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 앞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깊고 검었고, 굳게 다문 입매에서는 강인한 위엄과 기품이 풍겼다. 그는 자신의 손을 꼭 붙든 채, 금방이라도 빛이 꺼져버릴 듯한 캄캄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다음..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그 때..

 

 

 

지훈은 가빠오는 숨 사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사내는 끊어져가는 제 숨을 못내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꽉 맞잡아쥔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된다, 안돼. 그런 소리 말아라. 어찌 나를 두고 이리 가려 하는 것이냐.

 

-다음 생에.. 다음 생에서 꼭..

 

 

 

제가 마침내 숨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다다를 때면, 사내는 저를 붙잡고 괴로운 듯이 소리내어 오열했다. 사내의 등 뒤에 난 창밖으로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꿈은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고통에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이 닫힌 눈꺼풀 사이로 흐려져갈 때쯤, 지훈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깬 후에는 언제나 해일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비애의 여운에 온몸을 잠식당했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런 밤이면 지훈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꿈의 여운에 젖어 한동안 울어야 했다. 떨림이 남은 몸을 오래도록 찬물에 씻어내봐도, 저를 바라보던 사내의 비통에 찬 그 얼굴과 눈빛만큼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단순한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과 감각들. 지훈은 오랫동안 그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가슴속에 간직하며 지냈다.

 

 

 

그러다, 지훈이 막 스무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지훈은 똑같은 꿈에서 똑같은 슬픔과 함께 깨어났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날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꿈에서 깨어난 지훈의 머릿속에 불현듯 모든 기억들이 휘몰아치며 되살아났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단숨에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차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기묘하고도 강렬한 감각이 지훈을 사로잡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지훈은, 한참 만에야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어떤 본능에 의해 그 꿈이 자신의 전생이었음을 깨달았다. 사내와 함께 했던 이전 생의 기억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난 것이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지훈의 안에.

 

너무도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지훈 스스로조차믿기 힘든 얘기였지만 결코 거짓도, 환상도 아닌 현실이었다. 그것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했다. 지훈은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사내와 제가 지난 생에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인연으로 엇갈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제가 그에게 어떤 약조를 했었는지. 그 구슬픈 기억들의 회오리에 지훈은 그 밤을 긴 눈물과 오열로 지새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지훈은 늘 기다려왔다. 기억 속의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다시 만나야 했다. 반드시, 다시 만나야만 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고 필연이었다. 제게는 하나의 생을 넘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었다. 기다리면 언젠가, 어떻게든 만나게 될 거라고. 남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지훈은 가슴 한구석에 간직해둔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민현의 사무실에서 처음 그 남자를 보았던 그 날, 그의 얼굴에 시선이 멈췄던 그 찰나. 지훈의 눈에서 떨어져 내렸던 눈물은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를 발견했다는 자각에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훈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가 왜 울고 있는지를 몰랐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이 흘러나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저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마저 다 멈춘 것 같았다. 눈앞에.. 그가 있었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 눈을 몇번이나 다시 감았다 떠봐도 꿈이 아니었다. 지훈의 머릿속에는 오직 운명이라는 단어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나긴 생의 경계를 뛰어넘어 마침내, 그를 만난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지훈은 하루가 멀다하고 틈나는대로 민현의 사무실을 찾았다. 민현과 상의할 내용이 있다는 핑계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시덥잖은 핑계에 불과했다.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 논의할 내용이 없었다. 게다가 민현은 사무실을 비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지훈은 민현이 없을 때에도 불쑥 사무실을 찾아가 제가 왜 왔는지에 대해 매번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되는 구차한 변명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늘 별다른 말 없이 지훈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소파로 지훈을 안내하고는, 변호사님이 오실 때까지 편하게 계시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 지훈은 그곳에 하릴없이 눌러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곤 했다. 한동안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직도 지훈은, 가만히 그를 보고 있다가도 갑자기 제 의지와 상관없이 주륵, 눈물이 흘러내려 당황할 때가 있었다. 여전히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었다. 왜 그런지는 지훈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시린 눈에서 멍하니 눈물이 떨궈져 나왔다. 그럴 때면 지훈은 혹시 그가 알아챌까 싶어 황급히 소리를 죽이고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런데도 관린은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번번이 다가와 위로하듯이 저를 달래주곤 했다. 제게로 슥 내밀어지는 티슈와, 향이 좋은 허브티. 죄송해요. 지훈이 말하면 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겨우 눈물이 멈추고 나면 지훈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도 했고, 가끔 떠오르는대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했다. 어떻게든 그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제멋대로 저를 찾아오는 지훈이 귀찮게 느껴질 법 한데도, 관린은 한번도 지훈에게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관린은 항상 제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늘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겨주는 관린에 도리어 지훈이 조금 멋쩍어질 정도였다. 첫 만남때부터도 느꼈지만, 원래가 천성이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지훈은 새삼 생각했다.

 

 

 

그러기를 며칠째, 오늘도 지훈은 민현이 없는 사무실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지훈을 신경쓰이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관린의 오른손 약지에 자리한, 은빛 반지였다. 그 전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반지의 존재에 지훈은 자꾸만 그곳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관린을 불러 물었다. 그래도 며칠 얼굴을 봤다고 마냥 어색하기만 하던 분위기가 처음보단 조금 풀어진 느낌이었다.

 

 

 

“저.. 관린씨.”

 

“아.. 네?”

 

“좀 실례되는 질문이긴 한데..”

 

“뭔가요?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혹시.. 애인이 있으신가요?”

 

 

 

지훈이 관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톡톡, 가리키며 묻자, 관린이 아아-하는 소리를 내며 웃어보였다.

 

 

 

“네. 있어요. 지금은 해외에 나가 있긴 하지만요.”

 

“아..”

 

 

 

지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에 띄게 얼굴이 굳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관린이 알아채지 못하는것이 다행이었다.

 

 

 

지훈은 수년간 꿈 속의 그 남자를 찾아 헤맸지만, 막상 그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의 지훈에겐 오직 그를 찾는 것만이 전부였으니까. 그 다음 일이야,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할지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고작해야 그 정도로 여긴 게 다였다. 마침내 찾은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앞을 볼 수 없는 것도, 그런 건 아무래도 다 좋았다.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지훈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었다.

 

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못했을까.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그를 찾아 헤맸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지훈은 허탈해졌다. 오랜 기다림이 이대로 다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며칠동안 사무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애인이 있다면 여기서 제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훈은 밥도 먹지 않고 며칠을 암담한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지훈은 다시 만난 그와 사랑하고 싶었다. 아니, 이미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우스운 얘기일 테지만, 지훈에겐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모든 게 다 부질없는 바람이었던 걸까.

 

그러나, 저를 향하던 그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 눈동자를 떠올리며 지훈은 꺼져가던 생각의 불씨를 되살렸다. 꼭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지훈은 전생에 그에게 진 빚이 있었다. 그 빚을 갚는 것 또한 이 오랜 기다림의 의미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토록 긴긴 기다림에 애타하지도, 그를 만난 순간에 그렇게 애달프게 눈물 흘리지도 않았을 거였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훈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민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관린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훈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며, 오지 않아서 기다렸다는 그의 말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떨려오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며칠 만에 보는 다정한 그의 미소에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듯 했다. 역시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그렇게 쉽게 그를 놓을 수는 없었다. 지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관린이 내어준 허브티를 마시며 지훈은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사실 저.. 관린씨한테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요.”

 

 

 

그 말에 관린은 조금 뜻밖이라는 듯이 지훈을 돌아보았다. 정작 지훈은 관린을 보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때..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하셨잖아요. 주제넘는 말이지만 제가.. 관린씨한테 친구가 되어 드리고 싶어요. 관린씨랑 더 알아가고 싶고.. 얘기도 많이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싶고.. 저는 그랬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서 매일 여기 찾아왔던 건데.. 혹시 관린씨가 싫으시다면 이제 더 오지 않을게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별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관린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미련없이 떠날 생각이었다. 그의 곁에서 친구라도 되고 싶다는 명분이 말도 안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말을 마친 지훈은 고개를 떨군 채 관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앞으로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는 오늘도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지훈 씨는 좋은 사람 같아요.”

 

“……”

 

“앞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것들로 알 수 있는 게 더 많거든요.”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관린은 어느새 제 앞에 앉아 허브티가 든 머그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든 머그잔에서 오늘따라 유독 더 감미로운 향이 풍겼다.

 

 

 

“그럼…”

 

“왜 제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훈 씨가 친구가 돼준다면 당연히 전 너무 기쁠 것 같은데.”

 

 

 

그가 웃어보였다. 지훈은 놀람과 동시에 안도했다. 그가 볼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입을 얼른 손을 들어 가렸다. 지훈이 확인하듯 정말이예요? 묻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오늘부터 그럼 우리 친구인 건가요?”

 

“아.. 그런가요? 전.. 전 다 좋아요. ”

 

“그럼 지훈씨, 오늘 우리 집에 놀러올래요?”

 

“집.. 에를요?”

 

“안그래도 곧 문닫을 시간이라서. 오늘 황변호사님도 안들어오신다고, 정리하고 바로 퇴근하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제가 이렇게 비오는 날은 밖에 돌아다니긴 좀 힘들고.. 지훈씨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요?”

 

 

 

가슴이 뛰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세차게. 지훈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리하고 바로 갈까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따라 지훈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훈은 문을 나서는 그의 한쪽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같이 걸었다. 관린의 손에 들린 우산 밖으로 비죽 나온 한쪽 어깨가 온통 젖어 들어갔지만 지훈은 아무래도 좋았다. 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설렘이었다. 택시를 타고 관린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지훈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린을 바라보았다.

 

저녁 뭐 먹고 싶어요? 지훈 씨가 먹고 싶은 거 해줄게요. 사소한 일상의 일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훈은 입술을 꼭 깨물어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지훈은 애써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매끄럽게 빗길을 달려갔다.

 

 

 

3. 다시는 없을 너라는 계절

 

 

 

관린의 아파트는 깔끔했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관린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듯 했다. 지훈은 조금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들로 채워진 거실은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서성이는 지훈을 향해 관린이 말했다. 편하게 앉아 있어요. 저녁 금방 할게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관린이 차릴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찬찬히 집안 풍경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관린이 사는 집이구나. 제가 알지 못하는 지난 시간들의 일부를 관린이 이곳에서 보냈다 생각하니 지훈은 어쩐지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한눈에 둘러본 관린의 아파트는 보통의 여느 집들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집안 어디에도 사진이나 액자가 놓여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일 먼저 지훈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거실 한켠에는 커다란 책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훈은 호기심에 이끌려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책장에는 점자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지훈은 그 중 몇권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물론 지훈은 그것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관린의 손끝이 책장마다 남겼을 지난 시간의 흔적만큼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지훈이 한참 점자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쯤, 관린이 부엌에서 지훈을 불렀다. 준비가 다 됐다는 말에 지훈은 보고 있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놓고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관린이 만든 음식들은 하나같이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지훈은 몇번이나 맛있다고 말해주었고, 그럴 때마다 관린은 고맙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짧은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관린이 허브티는 그동안 실컷 마셨을 테니 이번에는 커피를 내려주겠다고 한 덕분이었다. 지훈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관린이 내온 커피의 맛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제가 살면서 마셔본 커피들 중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훈은 속으로 몇번이나 감탄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와보니까 어때요?”

 

“좋아요. 집도 예쁘고.. 저녁도 너무 맛있었어요. 커피 맛도 좋구요.”

 

“지훈씨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잠시 둘다 아무말 없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거실에는 조용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지훈 쪽이었다.

 

 

 

“저.. 관린씨.”

 

“네.”

 

“제가 이런 거 여쭤보는 게 좀 조심스럽긴 한데..”

 

“아니예요. 지훈씨가 묻는 거면 다 괜찮으니까 그냥 말씀하세요.”

 

“눈..은. 언제부터 그러셨던 거예요?”

 

“아..”

 

 

 

지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린을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묻고 싶었지만 차마 쉽게 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저 어렸을 때. 한 두 살인가? 그 때쯤에 무슨 병을 심하게 앓아서.. 그 때 이후로 이렇게 됐다고 들었어요. 어머니 말로는 그 이후에 저를 데리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절 보시더니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 하셨다더라구요.”

 

“업보.. 요?”

 

“네. 제 눈이 안보이게 된 게,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대요.”

 

“……”

 

“흘려 들으면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저도 그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왠지 모르게 신경이 좀 쓰이더라구요. 제가 만약 전생에 뭔가 나쁜 짓을 해서 그 벌로 눈이 안보이게 된 거라면.. 이번 생에서는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법조인이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물론 법전을 못보니까.. 판사나 검사가 되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그 쪽 일에 종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책도 찾아 읽고 공부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금 황변호사님 만나게 된거고,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거예요.”

 

 

 

관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법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담담하게 전해온 얘기에 오히려 감정이 북받친 것은 지훈 쪽이었다. 그동안 제가 관린을 야속하게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줄곧 곁에서 관린을 지켜 보면서도, 지훈은 가끔씩 그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모든 걸 다 기억하는데. 그토록 오래 기다려서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왜 당신은.. 날 기억하지 못해. 왜 날 알아보지 못해. 다음 생에 만나자고.. 그 때 다시 사랑하자고. 그렇게 약속했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을 생각하면 이렇게나 애틋한데. 아직도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날 보고 웃을 수가 있어.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어쩔 수 없이 관린이 밉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관린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지훈은 그동안의 원망들이 눈녹듯이 사라져 내림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한없이 죄스럽고 미안해졌다. 제가 알지 못했던 지난 세월 동안 관린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을지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미어져오는 까닭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렇게나 착한 사람인데.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어떻게 빛이 보이지 않는 그 모진 삶을 견뎠을까. 지훈은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모든 게 다 당신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했던 건, 어느새 흐르기 시작한 눈물 때문이었다.

 

 

 

“지훈씨, 또 우는거예요?”

 

 

 

관린의 길고 흰 손가락이 더듬더듬, 지훈의 얼굴을 타고 올라오더니 번져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관린은 난처하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말했다.

 

 

 

“지훈 씨가 절 볼때마다 우시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왜 울어요. 저 때문에 마음 아파서 그래요? 저 행복해요. 진짜예요. 저 지금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왜 지훈씨가 울어요.”

 

 

 

모르겠어요. 나도 왜 당신만 보면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왜 이렇게 가슴 한 구석이 아리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지훈 씨가 울면 제가 마음이 안좋아요.”

 

 

 

관린은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팔을 뻗어 제 품으로 지훈의 등을 끌어당겼다. 혹여라도 부서질까 싶은 연약한 것을 다루듯, 천천히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 품에서 지훈은 울고 싶은 만큼 울었다. 지난 생의 업보에 대한 속죄가 모두 그의 몫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 무게를 제가 대신 짊어질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렇게라도, 제 눈물로라도 나눠 가질 수 있었으면 했다.

 

 

 

“오늘까지만 울어요. 그리고 내일부턴 저한테 웃는 얼굴만 보여준다고 약속해요.”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지훈은 관린의 품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에 스치는 그의 향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정말 맞구나, 내 사람. 다른 공간의 다른 시간이지만 지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을 품에 안은 이 남자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려온 하나뿐인 제 사랑이자, 영원을 약속했던 정인임을.

 

 

 

 

 

 

그 날 이후 지훈은 매일같이 들르던 민현의 사무실 대신 관린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지훈은 관린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파트 앞에서 기다렸다가, 관린이 퇴근해 돌아오면 그때서야 같이 집으로 올라가곤 했다.

 

 

 

둘은 관린의 집에서 주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마주 앉아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최근엔 지훈이 관린이 읽고 싶었지만 점자로 구하지 못했다던 소설책들을 가져와 관린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관린은 지훈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소설 속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관린과 함께하는 시간은 꿈보다도 더 꿈 같아서, 언제나 눈 깜짝할 새에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다. 하루하루가 믿을 수 없을만큼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날도 지훈은 소파에 앉아, 관린에게 읽어주기 위해 가져온 소설책을 펼쳐놓고 보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지훈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관린을 불러 전화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관린은 방에 핸드폰을 두고 나온 것 같다며, 가서 대신 좀 받아달라고 지훈에게 부탁했다. 지훈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관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관린의 집에 벌써 여러번 왔지만 관린의 방에 들어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관린의 방은 거실과 마찬가지로 단정하고 깔끔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찾기 위해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다, 지훈은 이 집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액자에 끼워진 사진 한장을 발견하고 홀린 듯이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바다를 배경으로 애인과 함께 찍은 듯한 관린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낯선 이와 나란히 선 관린은 그의 말대로, 정말 행복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돌린 곳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베개 두개와, 스탠드 옆에 세워놓은 컵 두 개. 그리고 침대 발치에 놓인 슬리퍼 두개가 차례로 보였다. 봐서는 안될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를 무시한 채 거실로 나왔다. 마침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에서 나오던 관린과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

 

 

 

“핸드폰 못찾았어요?”

 

“아.. 어디 구석에 빠진 것 같은데 제가 막 뒤질 수가 없어서.. 못받았어요.”

 

 

 

지훈이 대답을 둘러댄 것과 동시에 울리던 벨소리가 멎었다. 지훈의 얼굴은 좀전과 달리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관린이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다급하게 그를 붙잡는 지훈의 목소리가 좀더 빨랐다.

 

 

 

“관린씨.. 혹시 애인이랑 같이 사시는 거예요?”

 

“아.. 같이 사는 건 아니고. 가끔 여기 와서 며칠 있을 때도 있어서요. 물건 같은 건 갖다놓는 편이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요?”

 

“그럼 제가 여기 오는 게.. 혹시 애인 분이 아시면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예요. 지훈씨는 친구잖아요. 친구가 집에 자주 놀러온다고 하면 그 사람도 좋아할 걸요. 그러고 보니 얼마 안남았네요. 2주 뒤면 돌아오거든요. 지훈 씨한테도 소개시켜드릴게요.”

 

 

 

그 순간 머릿속에서 둔탁한 뭔가가 징,하고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행복한 꿈에 젖어 잊고 있었던 현실의 그림자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발목을 잡아챈다. 관린은 지훈과 함께 있을 때 애인에 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관린의 애인이 곧 귀국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자신은 더 이상.. 이곳에 친구로서 찾아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훈은, 그래서는 안됐다.

 

왜냐면, 관린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쌓여갈수록 지훈은 관린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알면 알수록 지훈은 그의 모든 것이 더 좋아졌다. 지훈은 전생의 기억 속 그의 모습이 아닌, 지금 이 생에서의 라이관린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 이런 마음으로는 그와 그의 애인 곁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

 

2주.. 라고. 지훈은 무의식적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관린과 보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지훈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묻는 관린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지훈은 오늘은 일찍 들어가보겠다며 관린의 아파트를 나왔다. 깨질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슬픈 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

 

“야. 박지훈.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아. 뭐라고 했어?”

 

 

 

지훈은 카페에 진영과 마주앉아 있었다. 딴 생각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지훈은 진영이 재차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진영을 돌아보았다.

 

 

 

“사람 불러놓고 왜 딴데 정신이 팔려있어. 하여튼.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그 사람 말이야. 애인 다음주면 돌아온다며.”

 

“어.. 그랬지.”

 

“정리한다면서. 아직 못했어?”

 

“응. 며칠만 더 있다가.”

 

“어차피 정리할 거 뭐 그렇게 질질 끌어. 빨리 해버리고 가자니까. 가게 문제도 다 해결됐다며.”

 

 

 

오후의 햇살이 나른하게 창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학 동기인 진영은 지훈이 꿈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관린과 관련된 모든 얘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지훈은 하릴없이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만 휘휘 저어댔다. 진영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질질 끌수록 너만 더 힘든거야. 그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며. 직장도 있고, 애인도 있고. 이미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 인생에 갑자기 니가 끼어들어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이제 와서. 좀 모진 말 같지만, 하루라도 빨리 니가 떠나주는 게 그 사람 위하는 거야.”

 

“알아, 나도.”

 

“알면 빨리 정리하고 가자. 가서 다 잊고 새출발 하는거야. 야, 넌 억울하지도 않냐. 그 사람은 너 기억도 못한다며. 니가 평생 그렇게 찾아 헤맨 사람인데, 너 기억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랑 사귀고 있고. 너 혼자만 그렇게 평생을 다 바쳐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

 

“너 마음 정하는 데 도움되라고 이렇게 말하는거야. 나도. 잘 생각해.”

 

 

 

진영의 말이 전부 다 맞았다. 지훈이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던 건, 진영의 말이 하나도 틀린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그 날 이후, 관린과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그의 곁에서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진영은 얼마 전부터 가족과 함께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훈이 꽃집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캐나다에 함께 가자고 진영이 줄곧 저를 설득해왔던 터라, 지훈은 관린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되면 진영을 따라 캐나다로 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진영의 고모가 캐나다에서 가게를 운영하시는데 그곳에 일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있었던 지난 일들은 다 잊고, 캐나다에서 진영과 새출발을 하면 그래도 모든게 조금 괜찮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준비는 진영이 대충 다 마쳐 놓은 상태였다. 남은 건 지훈의 확답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훈은 관린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해서 미뤄오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며칠만 더. 하루만 더.. 그렇게 미루고 미루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책 한권만 더 읽어주고, 그리고 가자. 이야기가 아직 다 안 끝났으니까. 결말까지 다 읽어주고 나면 그 때 정말 말할거야. 그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서라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와의 행복한 시간을 이대로 영영 끝내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자꾸만 지훈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는 시점에 와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망설여봤자 지훈이 내릴 수 있는 답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지훈은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진영을 마주보았다. 이제는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굳게 마음 먹은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지훈이 물었다.

 

 

 

“비행기, 언제랬지?”

 

 

 

 

 

2.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관린이 만들어준 음식들은 근사했다. 목이 메어 지훈은 그것들을 삼키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고 관린에게 맛있다고 몇번이나 말해주었다. 저를 향해 웃어주는 관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서였다.

 

여느 때처럼 거실로 나와 커피를 마시며 창문 밖을 내다보니 일찌감치 밤이 깊어 있었다. 어느새 내려앉은 겨울의 공기가 제법 싸늘했다.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눈이 오려나..

 

눈 오면, 걷기 많이 미끄럽겠네. 위험하지 않을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지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훈씨, 여기서 뭐해요. 바람이 찬데. 안으로 들어가요.”

 

 

 

어느새 등뒤로 다가온 관린이 지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관린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소파에 관린과 나란히 앉은 지훈은 어제까지 함께 읽던 책의 남은 결말 부분을 마저 읽어주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마지막 문장을 소리내어 읽은 지훈이 조용히 책을 덮었다. 관린은 어딘가 생각에 깊이 잠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말, 마음에 들었어요? 지훈이 묻자 고개를 젓는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가만히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훈은 금세 눈물이 차오르려 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그와 함께할 이야기가 더는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또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지훈은 눈가에 힘을 주고 고개를 위로 젖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물을 참는 것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지훈의 양 뺨을 축축하게 적셨다. 지훈씨..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관린이 제 이름을 불렀다. 그는 공기로 알고, 향으로 알고, 소리로 안다고 했다. 지훈이 울 때. 멀리 있어도 다 알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한동안 안 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또 울어요.”

 

“관린씨.”

 

“네.”

 

 

 

관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지훈이 관린을 불렀다. 지훈은 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얼굴 앞에 멈춘 관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제 얼굴.. 만져볼래요?”

 

“얼굴..이요?”

 

“네.”

 

“그래도 괜찮아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의 허락이 떨어지자 관린의 길고 흰 손가락이 천천히, 지훈의 얼굴을 더듬어 내려갔다. 이마부터, 콧대를 지나, 도톰한 입술을 훑어 내린다. 지훈의 입술선 위를 덧그리듯 매만지다, 입꼬리 끝에서 옮겨간 손가락이 이번엔 보드라운 뺨 위에 머물렀다. 두 뺨을 온통 적신 눈물에 관린의 손가락도 덩달아 젖어들어갔다. 관린은 잠시 멈칫하는 듯 했지만, 곧 다시 전체적인 얼굴 선을 따라 손끝을 움직여나갔다. 무척 조심스러우면서도,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세심한 손길이었다. 지훈은 눈을 감은 채 그 손길에 가만히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이내 지훈의 얼굴에서 찬찬히 손을 거두어들인 관린이 말했다.

 

 

 

“전부터.. 궁금했어요. 지훈 씨는 어떻게 생겼을까. 분명 엄청 예쁠 것 같았거든요. 물론 제 상상이지만.”

 

“그랬어요?”

 

“네. 근데 이렇게 만져보니까 알겠어요.”

 

“어떤데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예뻐요.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술도. 다.”

 

“지금 나한테 아부하는 거예요?”

 

“정말이예요. 전 다 알 수 있어요.”

 

 

 

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넘기려던 저와 달리 관린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지훈은 아무말도 더 할 수 없었다. 눈물이 온통 앞을 가려 목이 메이고 입술이 젖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안 울면 더 예쁠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 얼굴에 눈물이 이게 뭐예요. 다 젖었잖아요.”

 

“…….”

 

“어떻게 해야 지훈씨가 안 울까. 내가 어떻게 할까요. 알려줄래요?”

 

“관린씨.”

 

“네. 말해요.”

 

 

 

나 관린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

 

관린씨는 아마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관린씨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해왔어요.

 

관린씨는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치만 관린 씨가 날 기억하지 못한대도, 모든 걸 다 잊었대도 상관없어요.

 

내가 관린씨를 찾았으니까. 이렇게 찾아서 다시 만났으니까. 약속을 지킨거니까, 난 그걸로 괜찮아요.

 

잠시나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잖아요.

 

앞으로 언제든지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을 테니, 나한텐 그걸로 충분해요.

 

관린 씨. 나,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조금,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슬퍼요.

 

우리가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당신을 일찍 찾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번 생엔 엇갈림 없이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왔어요. 미안해요.

 

우린 이번 생에도 인연이 아닌가봐요.. 관린씨.

 

 

 

전부 다 그에게 전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참을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려왔다. 먹먹해오는 가슴을 견디려 입술을 물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심장 한쪽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더 적나라하게 전해져올 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슬펐다. 꿈에서조차 느껴본 적 없는 절절한 슬픔이었다. 지훈은 제 뺨을 감싼 관린의 커다란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관린도 지훈이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는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제 손에 부벼지는 지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닿을 듯이 가까운 곳에 관린의 얼굴이 있었다. 거실은 고요했고, 서로의 숨결이 스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눈물에 달아오른 뺨이 뜨거웠다. 눈을 감고 작게 호흡을 고른 지훈이 천천히 젖은 제 입술을 관린의 입술 위로 겹쳤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고 서로의 숨이 맞닿았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밀어내지 않았다. 관린이 흠뻑 젖은 지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맞붙이자 부드럽고도 뜨거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조차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입술이 머금어지고 혀가 엉켰다. 지훈이 흘린 눈물이 온통 번져 입술과 턱 주변이 미끌거렸다. 관린은 그조차 아랑곳 않는다는 듯 흘러내린 눈물을 핥고 입안 구석구석을 달래주었다. 그러다, 숨이 차올라 힘겨워하는 지훈 때문에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였다.

 

관린이 지훈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지훈 씨.”

 

“…….”

 

“저를.. 좋아해요?”

 

 

 

나를.. 연모하느냐.

 

 

 

그러자 언젠가 같은 것을 묻던 기억 속 관린의 음성이 거짓말처럼 겹쳐져 들렸다. 그때도, 지금도. 제 마음은 같았지만 지훈은 대답해줄 수 없었다. 사랑해요. 당신을. 그때도, 지금도 내 마음은 변함없어요. 그치만.. 이 생에서 당신은 내가 없어도 행복할테니까. 아팠던 기억은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당신은 좋았던 기억들만 간직해줘요. 그리고 꼭, 행복해줘요. 지훈은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을 부딪히며 관린의 셔츠 단추 위로 손을 올렸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모든 게 다 마지막이었다. 오늘 이 밤이 지나면 어차피 다 의미없이 사라질 기억이 될 거였다.

 

 

 

“지훈 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안아줘요.”

 

 

 

지훈이 말했고, 관린은 지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그 손을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지훈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겨 더 깊이 혀를 얽었을 뿐이었다. 지훈이 하나씩 단추를 풀어내려가는 동안에도 입맞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관린은 지훈의 몸을 천천히 소파 위로 눕혔다. 눈물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쓸어주며 관린이 말했다.

 

 

 

“오늘.. 자고 가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관린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찾아 물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관린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이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길고 슬픈 밤이 될 터였다.

 

 

 

관린의 손이 제가 입고 있던 니트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 찰나, 지훈이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시린 색의 밤하늘이었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1.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다음날 아침, 관린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일으켜보니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관린은 몇번이나 침대 위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어디에도 지훈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지훈 씨..? 어디 갔어요? 소리 내어 지훈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도 지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드는 불안한 생각에 관린이 더듬, 더듬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습관처럼 버튼을 찾아 누르니 현재 시각과 함께 음성 메시지 1통이 도착해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왔다. 관린은 서늘해져오는 가슴을 애써 부정하며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8시, 30분에 도착한 1건의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안내메시지를 재차 확인한 관린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관린의 예감대로였다. 귀에 갖다댄 핸드폰 너머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린 씨, 어.. 저예요. 박지훈이요.

 

이렇게 말도 못하고 갑자기 떠나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가능하면 말해주고 싶었는데.. 관린씨한테 말하고 떠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가기로 했어요. 미안해요.

 

관린 씨. 저는 사실 관린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오래.. 관린씨를 좋아했어요.

 

그치만, 그 이상을 더 바라는 건 제 욕심일 뿐이라는 걸 알아요. 그러니 혹시라도 관린씨가 저에게 미안해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는 친구랑 같이 캐나다로 갈 거예요. 거기서 가게를 열 거고, 예쁜 집도 얻을거예요.

 

지난 일은 다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어.. 아.

 

죄송해요.

 

마지막이니까,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그래도 관린씨가 행복하다고 하니까 정말 다행이예요. 앞으로도 계속 관린씨가 행복했으면 해요. 진심으로요. 관린 씨가 행복한 거, 그게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제가 가장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한가지만 더. 관린 씨가 살면서 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주면 고맙겠어요. 아, 저는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그냥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즐거운 시간이었구나, 좋은 기억이었구나.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도 관린 씨와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관린 씨, 이제 정말 가야할 것 같아요. 시간이 다 됐나봐요.

 

 

 

……

 

행복하게 잘 지내요, 안녕.

 

 

 

삐-

 

더 이상 저장된 음성 메시지가 없습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끊겼다.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려놓자마자, 관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겉옷부터 챙겨들었다. 핸드폰만 주머니에 챙겨 넣은 채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금방 집앞에 도착했다. 급하게 차에 올라탄 관린이 곧바로 목적지를 말했다. 공항이요, 공항. 가주세요.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관린은 볼 수 없었지만 차가 막히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사에게 물으니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있다고 했다. 관린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늦으면.. 어쩌지. 비행기가 언제 뜨는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무작정 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택시가 공항을 향해 달리는 내내, 관린은 메시지 속 떨리던 지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리누르려 애써도 감출 수 없던, 목소리에 묻은 울음기. 그리고. 가봐야 한다는 말과, 잘 지내라는 마지막 말 사이를 메우던 먹먹한 그 공백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택시가 공항 앞에 멈춰섰다.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겨우 차에서 내렸지만 관린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사람들이 길 한가운데 멍하니 선 제 곁을 부딪히며 지나갔다. 관린은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 혼잡한 공항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훈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제발.. 제발. 지훈이 받기를 기도하며 관린은 애타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때, 지훈은 출국심사를 받으러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줄에 서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려 꺼내보니 관린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지훈은 망설였다. 처음엔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벨은 또 울렸다. 두번째에도 받지 않았다. 세번째에도, 네번째에도. 지훈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핸드폰을 뒤집어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하지만 다섯번째 벨이 울렸을 때, 지훈은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는거면 어떡하지, 문득 관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주저하다, 지훈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관린 씨?”

 

-지훈씨. 지금 어디예요?

 

“저.. 지금 공항인데.”

 

-나도 지금 공항 앞이예요.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지금 공항 앞에 내렸어요. 근데.. 어디로 가야되는지 모르겠어요.

 

“관린 씨, 그게 무슨..”

 

-지훈 씨가 와주면 안돼요? 나 여기 있을테니까. 여기.. 어디냐면.

 

 

 

위치를 말하는 관린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멀어져갔다. 지훈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줄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야, 박지훈, 어디가! 박지훈! 뒤에서 당황한 듯 저를 부르는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가 여기 왜.. 어떻게. 달리며 내다본 공항 유리창 밖으로는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지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관린이 말해준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하자 지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후들거려오는 다리를 꾹 참고 더 빠르게 발을 내딛었다. 마침내 게이트 가까이에 다다르자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관린이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눈발이 코트와 머플러 위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지훈은 관린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관린씨!”

 

“지훈씨.”

 

 

 

지훈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 관린의 목을 껴안았다. 차가운 바깥 공기에 얼어붙은 그의 몸에서 첫눈의 냄새가 났다.

 

 

 

“뭐하는 거예요. 왜.. 왜 여기 와있어요.”

 

“모르겠어요, 나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 지훈 씨를 놓치면 평생, 아니 다음 생에도 또 후회할 것 같아. 가지 말아요 지훈씨,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요.”

 

 

 

아아-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울음을 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훈은 관린의 품에서 마음껏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좋아해요.”

 

“……”

 

“좋아해요, 당신을.”

 

 

 

 

 

저를.. 연모하십니까.

 

내 온 마음을 다해 그대를 연모한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그리 할 것이다.

 

 

 

 

 

망설임 없는 두 입술이 맞닿았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을 축복하듯 첫눈이 아름답게 그들을 감싸며 흩어져내렸다.

 

두 번의 생을 돌아, 마침내 하나로 맞닿은 인연이었다.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