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w. 단청

 

 

어린아이의 부정확한 언어 구사 표현에 불편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외국어 실력이 아주 미숙하여 읽기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Dear, Mr. Lai.

How are you? These days in Korea, it is getting very cold and exhausting. How is it that you live in? I heard you deserve it. How is your son Mr. Kuan-lin growing up? I think he’s about the same age as my son, Ji-hoon, so I’ll take him with me on my next visit. I hope Kuan-lin gets along well with my son because it would be lonely to be alone. Then I’ll cut it short. See you next season.

 

Lai 선생 보시게.

잘 지냈는가. 요즘 한국은 날이 많이 추워지고 있어서 몸의 고단함이 크네. 자네가 사는 곳은 어떠한가? 지낼 만은 하다고 들었네. 자네의 아들인 관린 군은 잘 크고 있는가? 마침 내 아들인 지훈과 나이가 비슷할 것 같은데, 다음 답사 때 한 번 데리고 가겠네. 관린이 혼자 지내기 적적할 텐데 내 아들과 잘 지냈으면 좋겠네. 그러면 이만 줄이겠네. 다음 계절에 보세.

 

 

 

 

약속

?

단청 씀

 

 

 

 

LA는 참 멋진 곳입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엄마가 생각이 나서 조금 슬펐지만, 아버지께서는 다음에 엄마도 같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제게 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게 아버지를 따라 다닐 수 있었어요. 비행기에서 승무원 누나가 기내식을 주셨습니다. 어린이 세트를 먹는 저를 보면서 건강하게 자라라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어쩐지 아기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벌써 7살이고 이제 내년이면, 아니 이제 여섯 달만 지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사실 어린이 세트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소시지도 오므라이스도 제가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한국으로 갈 때 또 기내식을 먹을 거라구 하셨는데 빨리 비행기를 다시 타고 싶어요. 기내식이 좋은 것도 물론 있지만! 사실 다정하신 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저는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의연해야겠죠? ?L.A에 도착해서 아버지랑 함께 차를 타고 다녔어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가 아마도 아버지께서 새로 일을 하실 곳인 것 같아요. 엄청 크고 어두운 건물이었는데, 사실 저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 건물 앞에서 못 들어가고 한참을 우물거렸을 것 같았어요. 조금 무서웠어요. 많이는 말고 조금.

 

 

Who are you? 너 누구야?

엄마야!

 

 

그때 만난 남자아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입구에 발도 못 디디고 떨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건물 안에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었거든요. 분명 고양이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그래서 잠깐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여기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일까요? 이제 곧 초등학생이니까 전처럼 울지 말아야지 하구 눈물을 꾹 참고, 소리를 질러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던 것도 꾹 참고 주먹을 쥐었는데 그때 만난 것입니다. 관린이를요.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 너무 멋진 관린이를요.

 

 

Korean? 한국인?

모? 모라구? 너는 너는 뭐니, 너무 놀랐잖아!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Sorry, I can’t speak that language. 미안해. 그 말은 할 줄 몰라.

모라는 거야. 영어 하는 거야? 나 나도 할 줄 아는데! 헬로? 아임 아임 지훈! 어, 왓유얼 네임?

Oh, Hello. I’m Kuan-lin. Lai Kuan-lin. 관린. 라이관린

Kuan-lin? Lai? Kuan-lin??관린? 라이? 관린?

Yeah, that’s my name. J, Ji-hoon? Hi, nice to meet you. 맞아, 그게 내 이름이야. ㅈ-지훈? 안녕, 반가워.

오! 맞아, 내 이름이야. 마이 네임! 하이 반가워! 나이스 투 밋츄!

 

 

관린이를 만나고 나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관린이의 집에서 지냈어요. 그래서 매일 관린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관린이는 분명 저보다 많이 어리고 아직 유치원에 다닐텐데 어쩐지 의지할 수 있는 형 같은 사람이었어요. 햄버거 가게에 가기도 했는데 덕분에 처음으로 햄버거를 먹어봤어요. 세상에 너무 맛있더라구요! 아버지도 제가 관린이와 잘 놀아서 즐거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흘이 지났을 때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서 조금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박지훈, 짐은 다 쌌고?

네, 관린이가 준 것들도 다 쌌어요. 내일 아침 일찍 가나요?

여기서 아침 일찍 나가야 공항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어서 자라. 관린이한테 인사 하고.

네, 인사하고 올게요.

 

 

저는 관린이에게 간식을 잔뜩 받았습니다. 사실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전혀 사주시질 않아서 과자나 초콜릿 같은 것은 신년 행사처럼 먹었거든요. 여기서는 관린이와 함께 다닌 덕분에 과자도 잔뜩 먹고 놀이도 잔뜩 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혼나지도 않았으니, 저에게는 정말이지 기억할만한 여행이었어요. 저는 이번 여행을 제 최고의 여행으로 하기로 정했습니다. 물론, 첫 여행이었지만요!

 

 

지훈, you going tomorrow? 내일 떠나?

아, 관린. 응. 나 내일 투마로우 고.

I want you to live with me.?나는 너랑 같이 살고 싶은데.

쏘리, 너무 긴 말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 나도 재미있었어. 유 앤 미, 인조이! 인조이!

Enjoy? Yeah, enjoy. See you soon. 즐거웠어? 정말, 즐거웠어. 곧 다시 보자

응, 씨 유 순. 그리고 우리, we, 약속하자. Promise.

Promise? 약쏙?

Yes! Promise.

What promise? 어떤 약쏙?

This time, don’t forget! 잊지 말자! 이 시간, 잊지 말기.

….

왜? promise 싫어? No promise?

No, please don‘t forget me. I miss you always. 아냐,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줘. 나는 네가 늘 보고 싶을 거야.

편지 할게. 레터, 레터. 그리고 우리 꼭 다시 meet! 만나, 다시 만나!

Always I will wait for the day we meet again.?I will wait for you. Always. I‘ll promise. 언제나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항상 너를 기다릴게, 언제나. 약속해..

Promise! 약속해!

 

그 날, 둘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관린은 지훈에게 처음 새끼손가락 거는 법을 배웠다. 출국 날 공항에 따라 나온 관린은 아버지의 품의 기대서 지훈을 배웅하며 그제서야 조금 어린아이 같은 눈물을 흘렸다. 관린이 아버지를 붙잡고 우는 것을 지훈은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연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곤 관린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묻곤 했다. 언제 다시 지훈을 만날 수 있는지, 나는 왜 한국에 함께 갈 수 없는지에 대해.

 

 

*

 

 

지훈아, 학교 가야지.

 

그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훈에게 잊을 것은 너무 많았고 앞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엄마 오늘은 저 친구랑 놀다가 올게요. 그래도 되죠?

 

지훈은 입학한 학교에 매우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은 어렵진 않았다. 외동으로 자라서 남들과 어울리기 힘들다고 말하던 아버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지훈은 조용하고 온화하게 친구를 사귀었다. 자연히 친구들은 지훈을 따랐다. 각종 기념일에는 반 친구들의 선물을 받아오고, 주말마다 약속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의 L.A. 공장 건설이 취소되고 지훈의 집은 조금씩 작아지며 이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 지냈던 시간들이 친구들로 뒤덮여가는 지훈은 정말 행복했다. 그래서 그 약속은 차츰 흐려져만 갔다.

 

 

지훈아,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우편함도 좀 보고 올래?

네! 다녀올게요.

 

 

그러나 관린은 계속 지훈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훈의 손에 들린 편지가 그 증거였다. 벌써 한 손에 들 수 없을 만큼 편지의 양은 많아졌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지훈은 당장 내일 친구들과 무슨 햄버거를 먹을 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더군다나,

 

박지훈, 오늘도 편지 왔으면 가져오렴, 아버지가 읽어 주마.

아뇨, 저기…… 네, 씻고 바로 가져갈게요.

 

어색한 아버지와의 시간은 아직 어린 지훈에게 정말 버거운 것이었다.

 

관린에게 편지가 온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지훈의 아버지는 편지가 올 때마다 지훈을 서재에 불러 앉히고 편지를 읽어주었다. 관린은 지훈과 나눴던 대화 말고는 한국어를 알지 못했고 편지의 대부분은 지훈에게 어려운 영어였다. 아버지는 통역을 겸하며 지훈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 한 번 읽어주고, 너도 읽어보라고 종용하고. 하지만 지훈은 편지를 단 한 번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훈에게 그 시간은 제법 고통이었다.

 

 

*

 

 

Dad, is that all right with you? 아버지, 이거 괜찮아요?

Did you write another letter? You never even got a reply. 또 편지를 쓴 게냐? 답장 한 번 받은 적 없으면서.

Please don’t say that, take a look at this letter. 그런 말씀 마시고 편지 좀 봐 주세요.

 

 

관린의 아버지는 요즘 들어 더 자주 속이 상했다. 관린의 건강 때문에 유치원 한 번 보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기억이 그렇게 깊게 각인될 줄은 몰랐다. 지훈과의 짧은 일주일의 만남 이후 관린은 계속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는 자신의 언어가 이상해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교정을 봐 달라고 했다. 어차피 그 아이는 너를 기억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지훈에게 혹시나 편지가 왔을까 우편함을 살피는 일, 그것이 관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관린은 지훈에게 편지를 몇 년 동안 받을 수 없었다. 우편함을 항상 확인하고 편지에 더욱 공을 들이고 보기 좋은 색의 편지지를 사고 자신의 집 주소를 더욱 또박또박 적어서 보냈는데도 한 번도 편지를 받을 수 없었다. 관린은 자주 침울해졌다. 금방 잊혀질 약속이었을까. 그렇지만 관린은 시간이 아주 많았다. 관린을 둘러싼 시간들은 느리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래서인지 관린은 더 어렸지만 더 오랜 시간을 곱씹으며 어른 같이 자라나고 있었다. 관린은 만약 지훈이 잊었을지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훈이 약속을 평생 잊었을 리가 없으니까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지훈도 금방 떠올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린은 지훈의 언어를 배우기로 했다. 지훈의 기억을 일깨워준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자고 정했다. 한국어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배울만한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지훈이 자신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 준 것에 관린은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지훈을 만나면 꼭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하고 싶었다.

 

 

Father, I’m going to learn Korean. 아버지, 저 한글을 배우려고 해요.

Korean??한글을?

Yes, then, I think it would be easier to understand his culture. And I can send a letter better.

네, 그러면 문화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질 것 같아서. 그리고 편지도 더 잘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아들의 건강 때문에 미국에서 시작하려던 사업도 접어두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을 만큼 관린은 소중한 아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글을 배우겠다며 의지를 다지는 관린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 아들은 점점 더 매사에 관심이 없는 아이가 되어갔지만 편지를 쓰거나 한글을 배울 때만은 달랐다. 자신의 이름을 한 번 지훈의 이름을 한 번, 관린은 한참이 걸렸지만 열심히 한글을 공부했다. 자신이 지닌 시간의 모두를 쏟아넣었다. 그래서 따로 교육 기관에 다니지 않았음에도 한글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관린은 그 날의 약속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한국어를 익혀서 지훈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Father! A letter has arrived! In Korea! 아버지! 편지가 왔어요! 한국에서요!

A letter came? In Korea? To you? 편지가 왔다고? 한국에서? 네게?

Yes! It’s my letter! Ji-hoon sent it to me! Here, can you see it? My name is written down properly!

네! 제 편지예요! 지훈이 보내줬어요! 여기, 보이세요? 제 이름도 제대로 적혀있어요!

 

관린의 아버지는 관린이 그렇게 해맑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관린이 한글을 배워서 편지를 보낸 지 딱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관린은 지훈의 편지를 들고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자신이 지훈에게 보낸 기억의 부엉이가 이제야 제대로 도착했구나 하는 기쁨에 관린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더듬으며 그 편지를 온전히 읽었다. 한참이 걸렸다. 관린의 가족은 그 시간들을 웃으며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관린이 편지를 읽다가 지쳐버릴 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모두 원래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지만 관린은 아주 아주 행복했다. 그 날 관린은 따뜻한 솜이불을 가득 덮고 자는 꿈을 꾸었다.

 

 

*

 

 

지훈은 곧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어떠한 문제가 없어 보이던 지훈의 친구 관계가 뒤집힌 것은 관린이 편지를 보내기 일주일 전이었다. 매일같이 놀던 친구들이 지훈을 외면하고, 피하기 시작했을 때, 지훈은 그것이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되던 것은 주체가 어린아이들인 만큼 정도를 모르고 강도가 세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다고 생각했는데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친구는 없었다. 지훈이 선동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혔다는 둥, 사실은 친자식이 아닌데 지훈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둥, 지훈이 공부를 잘하는 건 담임과 모의해서 시험 문제를 미리 받아보기 때문이라는 둥, 근거가 없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무니 지훈은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질투하던 시선들이 그 전부터 있단 것은 물론 알고 있었다. 사소하게 넘겼던 것들이 이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조금도 신경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제나 어른스럽게 지내는 법을 배웠으니까 지훈은 괜찮다고 또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래도 어쩐지 그날은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지훈은 몰래 학원을 빼고 집으로 일찍 들어가다가 관린의 편지를 발견했다.

 

「형아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형아가 참 많이 보고 싶어

같이 놀던 바다도 생각 납요

그래도 형아가 제일 많이 생각 나 여전히 보고 싶고 있어요

학교 잘 다니세요 저도 학교에 가고 싶어요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잊지 않았어요 약속

우리 집 주소는 아래에 적었어요 영어라서 쓰기 힘들어 그러면 잘라 붙이세요 그러면 편지가 도착해

또 편지할게 잘 지내요」

 

오늘은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갈 기운이 없어서 무심코 혼자 뜯어본 편지는 놀랍게도 한글로 적혀있었다. 거의 보고 그렸다고 할 수준의 한글에 지훈은 어쩐지 눈물이 났다. 이 먼 곳에 살고 있는 이 아이가 계속 나를 기억해줬구나. 나는 먼저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나를 계속 생각해 줬구나.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생각을 전하는 한국어에 지훈은 편지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직도 어린 아이인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편지에 감격해서, 그럼에도 나는 계속 그 편지를 무시해왔다는 죄책감에 지훈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지훈은 관린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지금까지 잊어온 것에 대해서 펜을 꾹꾹 눌러서 글씨를 썼다. 미안함 절반, 고마움 절반. 관린과 지훈의 시간은 이제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함께 흐르고 있었다.

 

「Hi kuan-lin!

I’m jihoon! Long time noo Sea! I miss you too! So much!

I want to sew wou soon! Bye bye!!

 

관린아 안녕

나 지훈이 형이야! 우리 진짜 오래 못 봤어 그지 편지 잘 봗았어 나도 네가 참 보고 싶어! 정말루!

곧 볼 수 있우면 좋겠다 안녕! 편지 또 쓸게!!」

 

지훈의 영어는 관린의 한국어만큼 미숙했다. 그리고 한참을 펜을 쥐었지만 많은 내용을 적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관린이 혹시나 자신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할까 꾸불꾸불한 한국어도 덧붙여서 글씨를 그렸다. 지훈은 나름대로 관린의 노력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혼자 컴퓨터를 열심히 찾아가면서 편지를 쓰고 관린이 적어 준 주소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시간이 지훈의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차마 관린이 적어준 것을 다시 잘라서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지훈은 하도 악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편지를 쓰는 시간이 더욱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지훈은 퍽 좋았다. 울적함이 금새 가셨다. 지훈의 기분은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온몸에 담요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참 좋았다.

 

 

*

 

 

「관린아! 날이 추운데 잘 지내구 있니? 오랜만이야 방학식을 하느라구 편지가 많이 늦었어

이제 한동안 학교에는 가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 친구들과 아직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거든 나는 아직 혼자서 책 읽는 시간이 더 나은 것 같아

오늘 한국에는 눈이 왔어! 그래서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었어 (make a snowman!)

아버지도 바쁘시고 엄마도 바쁘셔서 혼자 만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사진을 같이 보낼게! 나름대로 잘 만든 것 같아서 네게 자랑하고 싶어서 엄마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어 눈이 아주 많이 와서 눈사람 키가 거의 나랑 비슷했어!

너도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snow fight!)을 하니? 어떤지 말해줘 궁금하다 ㅎㅎ

아 맞아! 언젠가 내가 대만에 가면 꼭 같이 빙수 먹자 지난번에 네가 보내 준 사진만 봐도 너무 먹고 싶었어 ㅠㅠ

혹시 눈에 젖으면 안 되니까 비닐로 편지를 감쌌는데 잘 도착할지 모르겠다. 제발 안 젖고 도착하기를!

그러면 또 편지 보낼게 건강하게 잘 지내!」

 

 

관린이 한글을 혼자 꾸준히 익혀 온 탓에 지훈은 이제는 영어로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지훈은 관린과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외로운 서로의 시간에 서로의 이야기가 스며들었다. 혼자 지낼 수 밖에 없던 탓에? 더욱 관린의 이야기는 지훈에게, 지훈의 이야기는 관린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없을 때의 지훈에게, 쨍쨍하게 해가 내리쬐는 날씨 때문에 온 종일 집 안에서 보내는 관린에게,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가 모여 큰 버팀목이 되었다.

 

 

「지훈 형에게

잘 지냈어요? 편지는 아주 잘 도착했어요 한국은 많이 춥나요? 여기는 그렇게 춥지 않아요.

나 사는 대만에는 눈도 오지 않고 나는 아직 눈을 본 적 없어요 그래서 snow fight 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형이 보내 준 사진 보고 눈 속에 있는 것 같았어요 눈 가득한 field에 있는 것 같았어

고마워요 항상 형의 마음에 나는 기쁘고 있어요 언제나 보고 싶요 잘 지내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일상이 되고 나서 관린은 지훈에게 항상 대만의 사진과 과자 그리고 선물들을 보내왔다. 그에 비해 지훈은 도무지 보낼 것이 없었다. 무엇을 보내자니 민망할 수준이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내지 않으려니 관린의 호의에 비해서 자신의 호의가 너무나도 조그맣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일 쓸 편지지 사기, 사진 찍고 인화하기가 지훈의 일상에도 자연스러운 것이 될 무렵 지훈은 관린의 편지를 받고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거 사주시면 안 될까요?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여기에 뭘 넣으면 녹지 않게 해 주는 게 맞지요?

아마도 잘 녹지는 않겠지만, 어디에 쓰는데?

저 쓸 곳이 있어요. 정말 정말로 필요해서 그래요. 딱 한 번만요. 안 될까요?

이걸 네가 쓸 곳이 있어? 정말로 필요한 거야?

네, 제발. 한 번만 부탁드려요. 제 소원으로 해도 되니까 한 번만요.

 

어릴 때도 떼 한 번 쓰지 않더니 이제야 떼를 쓰는 거니? 지훈의 어머니는 보냉제와 미니 아이스박스를 카트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훈은 떼를 쓰지 않았었다. 따로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없었다. 의젓해야 한다는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묶어온 지훈이 처음으로 나이대의 아이처럼 돌아간 모습이었다. 지훈의 어머니는 예고도 없던 지출에 가계부를 메꾸기 위해 마트 이곳저곳을 더 돌아다녔다. 그러나 가계부의 구멍 쯤은 어린 아이가 된 아들의 모습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보냉제와 미니 아이스박스를 받은 지훈은 더없이 당당했다. 관린이 보낸 과자나 선물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분명 관린이도 눈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니까 이 선물은 엄청난 선물이 될 거야! 지훈은 자신의 생각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는 빌라 옥상에 올라가서 아직 녹지 않고 보송보송한 눈을 한 움쿰씩 집어서 작고 단단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도 아마 본 적이 없을 거야. 이런 선물은 나만 할 수 있는 거잖아. 지훈은 점점 더 자신이 멋지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이 선물을 받고 나면 관린은 너무 너무 기뻐서 눈물도 막 흘리고 막 웃고 그리고 평생 눈사람을 소중하게 간직해야지! 하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부서진 나뭇가지를 예쁘게 조각 내서 눈도 만들고 코도 만들었다. 윙크를 하고 있는 눈사람이 퍽 괜찮았기에 지훈은 또 한 번 뿌듯해졌다. 추운 날씨에 다시 눈이 내렸지만 조금도 춥지 않았다.

 

 

이거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해요?

어디에 보내는데? 번호표는 가져왔니?

여기 번호표 있어요. 이거 대만으로 갈 거예요.

대만? 국제 특송으로 부쳐주면 될까?

 

 

지훈은 마지막 남은 용돈을 탈탈 털어서 겨우 큰 택배 박스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눈사람과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도 넣고, 신년맞이 기념으로 솜을 잔뜩 붙인 엽서도 넣고, 혹시나 눈사람이 부숴지면 안 되니까 포장재도 한 가득 넣고, 윙크하는 눈사람과 눈사람을 빙빙 둘러싼 보냉제도 함께 택배에 담겼다. 그렇게 더없이 묵직해진 지훈의 마음이 눈사람에게 담겼다. 지훈은 벌써부터 관린의 다음 편지가 기다려졌다.

 

 

*

 

 

Kuan-lin, Here’s your parcel?from Ji-hoon.?관린아, 지훈이가 보낸 택배가 왔어.

Parcel? Not letter? 택배요? 편지가 아니구요?

Open it yourself.?직접 열어보렴.

 

 

지훈의 택배는 꼬박 열흘을 채워서 대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길을 한 번 헤맨 택배원 덕분에 나흘을 마저 채우고 이 주만에 관린의 품에 안겼다. 한 쪽 귀퉁이는 물기에 젖어버린 상자를 받은 관린은 한참 어리둥절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지훈이 뭘 보낸 거지? 이미 물기에 젖어서 손으로도 쉽게 뜯어지는 박스를 연 관린은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어서 살폈다. 지훈에게 온 것이니 소중하긴 한데 왜 이렇게 너덜거리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오다가 비라도 된통 맞았나?

다행히도 엽서 재질의 편지는 젖지 않았지만 엽서에 붙어있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솜은 묵직해져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인 듯 보이는 아이스박스는 큰 콜라 한 캔이 들어갈 크기였는데 틈이 살짝 비틀린 채 테이프가 칭칭 감겨져있었다. 거기서 물이 흘러 나온 것 같았다. 문제의 시발점을 찾았으니 물이 들어있던 이유도 찾아야했다. 관린은 아이스박스를 열자 마자 가장 먼저 물에 젖은 지훈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지훈은 그 사이에 인상이 더욱 또렷해졌다. 젖은 사진을 먼저 마른 티슈에 올려놓으면서 관린은 마저 아이스박스를 뜯어냈다. 설마 설마하는 마음에 아이스박스와 사진을 번갈아 보던 관린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한참을 웃다가 눈물까지 보였다. 결국 지훈의 상상대로 되기는 된 셈이었다. 관린이 울기 시작하자 달려온 부모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상황에 서로 머리만 갸웃하고 있었다. 관린을 달래야했는데 울고 있는 관린은 도무지 슬픈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에 널브러진 박스와 관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관린은 아이스박스 바닥에 붙어버린 나뭇가지를 꺼내며 눈물을 닦았다.

 

 

This is my best present ever. Dad, thank you very much for taking me to L..A.

이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에요. 아빠, 그때 L.A에 데려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관린과 지훈의 시간은 함께 휘몰아치고 있었다. 둘 모두 다시 만나 눈싸움을 하고 빙수를 먹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만 있었다.

기다림조차 소중한 시간이 너무 빠르게 무너졌다. 지훈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포기했고 작은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기까지는 고작 두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박지훈,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 아비처럼 멍청하게 살면 안 돼.

 

바로 이틀 전만 해도 지훈은 관린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사진을 인화해서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갔었다. 첫 편지 이후에는 보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 번도 적지 않았던 지훈이 그날따라 펜을 눌러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으니 우리 어서 어른이 되자는 말을 적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을 보며 지훈은 그 옛날의 기억이 더욱 소중해졌다. 마냥 웃고 떠들었던 그 기억이 자주 지훈을 찾아와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편지를 들고 우체국을 가기로 맘먹었던 밤 지훈의 가족은 결국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체국은 물론 있었지만 지훈은 다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편지를 보내기 위해 써야 할 돈과 시간이 지훈에게는 자꾸만 크게 느껴졌다.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이 자꾸 지훈의 발목을 붙들었다. 지훈에게 관린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지훈은 사소한 것마저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봐야 지훈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결국 지훈이 보내지 못한 편지는 지훈의 마음에 계속 남아 맴돌았다. 그 편지는 때로 지훈을 괴롭히기도 했고 지훈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먼 미래에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다시 만날 방법을 먼저 끊어버렸다는 죄책감. 지훈은 언젠가 관린을 보러 갈 수 있는 날이 오면 꼭 편지를 부치고 관린을 보러가겠다고 다짐했다. 운명처럼 만났으니 꼭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만에 가서 관린이를 만나고 함께 눈처럼 쌓인 빙수를 먹고 다시 함께 웃고 햄버거를 먹으러 가고. 잊혀질 듯 잊혀지지 않는 미래의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 지훈을 맴돌았다.

 

 

*

 

 

지훈이 스무 살이 되는 해였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지훈은 결국 어릴 적 살던 동네로 돌아와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벌써 몇 달 째 지훈은 차곡차곡 아르바이트비를 모았다. 관린의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금방 잊혀져 버렸을 그 약속을 지훈은 계속 되새겼다. 다시 만나, 관린아.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 약속은 지훈에게 힘이었고 또 길이었다. 남들이 갖는 꿈같은 미래, 꿈꾸는 미래에 지훈은 관린과 함께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날씨가 참 추운 날이었다. 유달리도 날이 추워서 몇 년 만의 폭설이었다. 그런데도 버스도 늦지 않았고 심지어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지훈이 좋아하는 삼각김밥 맛은 유달리 인기가 많아서 출근하고 나면 늘 없었는데 오늘은 두 개나 폐기가 나왔다. 이유없이 계속 기쁜 일의 연속인 날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좀 더 기운을 내기로 했다. 이번 달 알바비가 모이면 지훈은 드디어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었다. 생활비를 아끼느라 제대로 밥을 못 먹은 적도 많았지만 그쯤은 다 괜찮았다. 대만에 가면 관린이의 집을 찾아가봐야지. 창밖으로 내리는 폭설을 바라보며 무심한 인사를 한 지훈은 여행사 사이트를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훈

왜 내 이름이? 지훈은 귀를 한 번 후비고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검은 도포자락 같은 코트가 휘날리는 키가 큰 남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남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얼굴. 코가 빨개진 얼굴.

 

…라이관린?

오랜마니야 보고 시퍼써 나 다 나았어 나아서 여기에 왔어

너 뭐야? 너 진짜 라이관린?

지훈 울면서 우스면 엉덩이에 뿔나 나 아는 걸 지훈 몰라요?

그런 말을 어디서 배운 거야 너, 진짜.

보고 시퍼서 욜심히 공부했어 보고 싶었어 지훈 잘 지냈어요?

 

한국말을 연습할 상대가 없어서 어눌하기 짝이 없는 어투. 둘의 첫만남처럼 관린은 지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훈은 울다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기뻤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미리 기뻤구나. 너무 기뻐서 지훈은 정말로 한참을 울었다. 관린의 편지를 처음 혼자 읽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다. 관린은 계속 지훈을 쳐다보고 또 머리를 만져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10년도 더 된 재회인데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다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둘은 운명이었으니까.

 

 

 

 

I will wait for you. Always. I‘ll promise. 항상 너를 기다릴게, 언제나. 약속할게.

Promise! 약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