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w. 세월

 

 

공기가 푸근했다.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누군가가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입고 왔던 두꺼운 겉옷을 내팽개쳐둔 채 올 때보다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으로 호텔문을 열고 나와 찡그리며 머리 위를 쳐다봤다. 하늘이 맑았다. 그는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비가 안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제서야 미간을 폈다. 인상을 피니 오밀조밀 예쁘게 자리잡은 그의 이목구비가 더 돋보였다. 비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였기에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12월의 대만은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짐의 대부분이 옷으로 채워지는 걸 싫어하는 그는 주로 옷이 얇은 계절에 여행을 하곤 했다. 그래서 캐리어에 도톰한 옷들이 하나하나 자리잡을수록 기분이 정말이지 별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겨울에 낯선 타국으로 발걸음 한 이유는 단 하나, 대만으로 유학을 간 절친의 부름 때문이었다. 박우진을 만나면 여행 가이드로 톡톡히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알려준 주소로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도 길찾기 어플을 통해 부지런히 걸어 우진이 묵고있는 쉐어 하우스에 도착한 그는 초인종부터 눌렀다. 오라니까 막상 오긴 했지만 우진이 안나오고 모르는 외국인이 나와서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해대면 어쩌나 걱정에 빠진 그는 발만 동동 굴렀다. 아, 그냥 오지 말걸 그랬나. 식은땀만 흘리던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성이 나왔다. 키가 크고 하얀 사람의 등장에 멍하니 서있던 그는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진짜 외국인이 나왔네.

 

“어…”

“(혹시 우진의 친구)?”

“네?”

 

중국말 같았는데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그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려하던 상황이 오자 얼굴이 창백히 질린 그를 보며 하얀 남성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몇 초 후에 미소를 띠며 입을 뗐다.

 

“친구, 우진의?”

“으허억, 네..!”

 

낯선 땅에서 만난 낯선 이의 입에서 모국어가 나오자 그는 순간적으로 놀랍기도하고 반갑기도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동시에 어눌한 남자의 발음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우진이 알려준 한국어일거라고 예상해보는 그였다. 문 손잡이를 잡고있던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들이 느리게 남자의 팔 위로 안착했다. 팔짱을 낀 남자는 눈을 살며시 빛내며 물었다.

 

“What’s your name?”

 

이번에는 영어다. 그나마 아는 문장이 나오자 그는 살짝 긴장한채로 한글자 한글자 떠올렸다. 할 수 있다, 박지훈.

 

“마이 네임 이즈 박지훈. 아, 지훈 박.”

 

또박또박 말하는 지훈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의 왼쪽 볼에 보조개가 푹 파였다. 남자의 무표정은 꽤나 차가운 인상이어서 긴장했던 지훈은 웃는 얼굴을 보고 이제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웃는 모습은 무표정과 상반되게 매우 귀여운 얼굴이었다. 남자가 미소를 띄자 지훈도 따라 웃었다. 여전히 왼쪽 볼에 보조개를 지닌 채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I’m Lai Kuanlin.”

“라이.. ?”

“Lai Kuanlin.”

“관린.. 아, 라이관린?”

“Yes.”

 

대답하며 활짝 웃는 얼굴이 예쁘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이같은 얼굴이다. 정색하고 있으면 냉미남인데 표정이 있으면 완전 온미남이다. 눈 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겨서 연인들끼리 가면 안 되는 나라가 이태리말고 오늘부터 대만으로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정도로 처음 보는 분위기의 미남을 보며 어딘가 나른한 느낌이 마치 대만의 장마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름도 라이관린이냐. 지훈이 관린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빤히 응시하면서 대화가 끊겨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정신을 차린 지훈이 뻘쭘해져서 시선을 거두고 짧은 영어로 관린에게 물었다.

 

“어.. 우진 이즈 웨얼?”

“Ah, come here.”

 

관린의 예의바른 손끝을 따라 들어간 쉐어 하우스에선 치즈볼을 먹으며 TV를 시청하는 우진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우진은 지훈을 발견하고서는 치즈가루로 범벅이 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소파에 치즈가루가 후두둑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관린의 미간에 주름이 미세하게 졌다. 그걸 본 지훈은 관린의 그런 깔끔한 점이 맘에 들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처음 본 사람한테 맘에 든다는 표현을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지훈은 관린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오, 지훈이 왔나.”

“야! 너 왜 있었으면서 문도 안 열어주고..”

“누구든간에 열어주면 됐지 와 그라노.”

“그래.. 그래서 갑자기 왜 부른건데?”

“심심해서.”

“허?”

 

지훈의 표정을 본 관린은 피식 웃었다. 관린은 식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기다란 두 다리를 교차시킨채로 서서 그 둘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흡사 문어소시지같기도 했다. 지훈은 관린이 한국말은 못 알아들어도 자신의 세상 제일 썩은 표정을 보고 대충 상황을 이해한건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웃을 이유가 없다.

지훈은 박우진을 노려봤다. 오면서 이런 친구녀석을 가이드로 써먹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지훈은 자신을 반쯤 내려놓고 떼를 쓰기로 맘먹었다.

 

“아니 뭐 관광이라던지 감동적인 재회라던지 그런 거 아니었어? 우리 몇 년만에 봤는데!”

“사내놈들끼리 징그럽게 무슨. 온 김에 밥이나 먹고가라.”

“밥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거든?! 관광시켜달라고 관광!!!”

“아 시끄러워!! 티비소리 하나도 안들리잖아!!”

“으아악 관광!!!!!!”

“야 관린아! 니가 좀 해줘라. 관광.”

 

소리지르며 떼쓰던 지훈과 그런 지훈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문어소시지 관린의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지훈은 놀란 토끼눈을 한 채로 상황파악을 했다. 그러니까, 쟤랑 나랑? 관광? 둘이서? 오늘 처음봤는데? 게다가 쟤는.. 한국말도 모르는데? 지훈은 내가 노린 건 이게 아닌데 싶었다. 그나마 아는 짤막한 영어도 아까 현관에서 다 써버려서 동공지진만 왔다. 이제 남은거라곤 아임파인땡큐 앤드유?밖에 없었다. 오 마이 갓. 아임 낫 파인.. 지훈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 걸 본 건지 관린은 옅은 미소를 띄우며 우진을 향해 나지막히 대답했다.

 

“오케이. 다녀올게 우진.”

“어? 한국말…”

 

관린이 어리둥절해 하는 지훈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엄마야, 어떡해. 나 영어 진짜로 몰라.

 

“가요, 지훈씨.”

“어어? 잠시만..!”

 

어린아이같은 얼굴로 어리둥절한 지훈의 손목을 잡고 하우스 밖으로 달려나가는 관린이었다. 그런 둘을 보며 우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관린이 오랜만에 신났나보네. 이 자식이 귀찮게시리 문도 안 닫고 나가고.”

 

소파에 눌러붙어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 비척비척 걸어가서 현관문을 닫는 우진이었다. 손잡이에 묻은 치즈가루를 보면 관린이 또 한소리하겠지만 그런건 별 신경 안 쓰는 듯 다시 소파로 돌아와 마저 TV를 시청했다. 둘이 어느정도 소통은 되겠지 싶어 큰 걱정은 안되는 우진이었다.

 

 

 

 

거리로 달려나온 두 사람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잠시 멈췄다. 지훈은 상황파악 중이었다. 지금 우리 둘이서 진짜 외출하는건가? 아니 이미 했네? 나 영어도 못하는데 이제 어떡해? 패닉에 빠진 지훈을 보며 관린은 힘들지도 않은지 해맑게 웃고있었다. 그런 관린을 본 지훈은 어이없어서 아무 영어나 꺼내서 관린에게 따졌다.

 

“헤이! 유!!!!”

“미안해요. 달리느라 힘들었죠?”

“…아니, 한국말 잘 아네?! 이렇게나 잘하면서 아까는 왜 안했어요?”

“지훈씨 당황하는 거 귀여워서 그랬어요.”

“뭐라구요?”

“정말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정수리까지 보여가며 사과하는 관린을 본 지훈은 이미 화가 풀려있었다. 언어의 장벽이 없다면야 이 여행은 아무 문제 될 일도 없는데다가 정수리마저 잘생긴 가이드 하나 얻은 셈이니 말이다. 사실 관린은 꽤나 지훈의 취향이었다. 키 크고 마르고 하얀 사람. 웃는 게 선해서 더욱 마음에 든 터였다. 하루정도 같이 다니기에 전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계산을 마친 지훈은 자신만 놀림당한 게 억울해서 아직 화가 안 풀린 척 관린에게 말했다.

 

“..미안하면 오늘 하루 잘해줘요.”

“그래요. 약속할게요.”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관린은 퍽 귀여웠다. 귀여운 행동과 상반되는 기다랗고 남자다운 손가락도 매력적이었다. 섬세한 관린은 이미 지훈의 화가 풀린 걸 눈치챘지만 틱틱대는 지훈이 귀여워서 장단 맞춰주기로 했다. 약간 토끼같은 사람이야. 생각하던 관린은 대만의 전통시장을 발견했다.

 

“지훈씨 혹시 예쁜 거 좋아해요?”

“네?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뭐.”

“하하, 그럼 나 따라와줄래요?

 

뭐지, 지훈은 궁금증이 일어서 관린이 가는 방향대로 졸졸 따라갔다. 분명 12월인데 대만은 지훈의 생각보다 더 포근하다. 아까 쉐어하우스에서 뛰쳐나올때 관린에게 잡힌 손목이 아직도 따뜻했다. 지훈은 전통시장에 들어서서 약간 앞서가는 관린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어디 가는거에요?”

“쉿, 따라와보면 알아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 린은 살짝 신난 게 눈에 보였다. 걸음걸이도 귀엽고 얼굴에선 보조개가 떠나지를 않았다. 관린 자신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를 터였다. 지훈이 잘 따라오나 몇 번 뒤돌아보며 걷던 관린은 한 가게 앞에 멈춰서서 상기된 얼굴로 뒤따라오던 지훈을 돌아봤다.

 

“여기에요.”

 

지훈은 관린의 옆에 서서 살짝 허름한 가게 안에 놓인 엑세서리들이나 조각품, 그림들을 바라봤다. 지훈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대만의 기념품 가게로 보였다.

 

“예쁘네요.”

“이거 봐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에요.”

 

무미건조한 지훈의 눈과 달리 눈에 별을 박은 듯 반짝이는 눈을 한 관린이 신나하면서 가리킨건 눈이 내리는 그림이었다. 그냥 온통 하얀 그림. 그래서 지훈은 별 감흥을 받지 못했지만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대하는 관린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웃으며 예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관린의 질문에 지훈은 조금 생각에 잠긴다.

“눈 본적 있어요?”

눈을 본 적이 있냐고?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사람에게는 당연한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 지훈을 생각으로 밀어넣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면서 누군가에게는 계절이라는 게 당연한 게 결코 아니라는 걸 한번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지훈이었기에 관린의 질문은 깊게 다가왔다. 지훈은 조금 먹먹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겪었을지도, 안 겪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감정이다. 정말 그냥 답답한 감정이다. 그런 지훈은 관린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선 이미 관린과 사이좋게 장갑 나눠끼고 붉어진 콧등을 하고서는 눈사람까지 만들고 있다. 그 와중에 빨간 코를 한 관린은 루돌프같아 귀엽다. 그런 관린이 끌어주는 썰매를 타고싶다고 생각했다.

지훈이 혼자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관린은 조금 당황했다. 혹시 자기가 불쾌한 질문을 한 건가 싶어서 걱정에 빠진 관린은 어찌해야 할지 영문을 몰라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하는 중이었다. 그런 관린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에 빠져있던 지훈은 짧은 시간이 흐른 뒤에 천천히 말했다.

 

“많이 봤어요.”

“아.. 진짜요?”

“어릴때 집에서 나오면 하얀 눈밭에 남겨져있는 발자국을 따라가보곤 했어요. 그러다가 멀리 간 적이 있었는데, 다시 집에 돌아오려고 하니 발자국이 사람들이 지나가서 다 지워졌더라구요.”

 

지훈은 예쁘게 웃으며 관린에게 말했다. 말하는 지훈의 눈이 은은하게 빛났다. 순간 마치 지훈의 눈동자 속에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관린은 속으로만 삼켰다. 눈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예쁘다고 생각했다.
관린은 따뜻한 얼굴로 지훈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답했다.

 

“집에는 어떻게 돌아갔어요?”

“무서워서 울고 있었는데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아저씨가 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주소는 외울 나이여서 다행이었죠, 하하.”

 

지훈은 눈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겪은 것들을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국적도 성격도 계절도 다른 우리가 지금 소통하는게 언어이듯, 언어라면 무언가 전해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담아서 관린에게 눈과 관련된 추억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처음 눈을 본 시간부터 대만 오는 길에 공항으로 오면서 눈을 본 시간까지도. 자신의 시간을 관린과 공유했다.

옆에서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듣던 관린은 기뻤다. 지훈이 자신의 시간들을 공유해 주는 이 순간이 좋고 마치 자신도 지훈이 눈과 함께한 시간 속에 같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제가 눈 보러 한국에 갈게요.”

“네?”

“꼭 갈테니까 기다려줘요.”

“아… 네. 그러죠 뭐.”

“약속이에요.”

 

지훈은 오늘 하루만 이 사람과 약속을 두번이나 했네. 싶다. 사실 지훈은 꽤나 현실주의자라서 낭만적인 것들은 잘 믿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을 공유한 것도 그냥 충동적으로 일은 감정일 뿐 내일이면 지훈의 인생에선 별 지분을 차지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까 관린의 눈 그림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게 그러한 이유다. 어차피 금방 잊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관린이 한국에 눈을 보러 온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거기다가 눈 많이 오는 나라는 천지인데 굳이 한국이라니. 오늘 만난 사이에 그정도는 자신도 그냥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기다리겠다고 대답해버리는 지훈이었다. 정작 무거운 진심을 담은 상대는 배려하지 못한 채 그렇게 가볍게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그날 지훈은 관린이 추천하는 쩐주나이 차도 먹고 시장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해가 저물때 즈음 하우스로 돌아와 우진과 함께 저녁을 먹고 호텔로 왔다. 하루동안 잠깐 온 것이어서 다음날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훈은 서둘러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자야 하는데 무언가 지훈을 맴돌았다. 오늘 눈 내리는 그림이 있던 가게에 들렀던 시간 말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먹었던 음료가 맛있었던 것 정도. 눈을 보러 한국에 꼭 갈 테니까 기다려달라는 그 얼굴이 너무 신나있어서, 그리고 그런 관린의 눈이 어쩌면 슬퍼보여서 지훈은 잠깐 관린에 휩싸였지만 서둘러 빠져나와버렸다. 어차피 한국 가서 길어야 며칠이면 잊어버릴 터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어둠속에서 잠에 빠졌다.

 

 

 

 

지훈이 요란스레 울리는 휴대폰 알람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끄며 부스스 일어났다. 그러고는 머리맡에 놓인 생수를 한모금 넘기더니 약간 인상을 쓰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맛이 왜이래.”

간밤에 히터 때문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의 물 맛 때문인듯 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다소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무거워 보이는 몸을 겨우 일으킨 그는 옷가지들을 대충 집히는대로 주워입고 마지막으로 두꺼운 파카를 걸친 채 집을 나섰다. 벌써 2월인데도 아직 한국은 춥다. 대만에 다녀온지 어느새 두달이나 흘렀음에도 추위에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거운 발걸음의 그가 파카에 대충 팔을 쑤셔넣으며 아파트문을 열고 첫걸음을 내딛은 곳은 눈이 가득 쌓인 보도블럭 위였다.

지훈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서둘러 파카의 지퍼를 올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던 도중 무언가가 지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금 떨어진 위치의 새하얀 눈 위에는 한명의 발자국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호기심이 생겨 따라가보고 싶어진 지훈은 어린시절로 돌아가 커다란 신발 구멍에 자신의 발을 맞춰가며 누군가의 큰 보폭을 따라 전진했다. 걸어가면서 점점 숙인 고개가 아파와서 그냥 가지말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게 아까워 계속 가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을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어쩌면 너무 멀리까지 가서 또 길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이젠 상관 없다. 다행스럽게도 집주소는 외울 나이였기 때문이다. 어린 지훈은 집 주소를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계속 따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발자국이 끊겼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여기가 어딘지 확인했다. 운 좋게도 아르바이트 가는 길이었다. 좀 돌아가야하는 길이어서 평소 지훈이 다니던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하는 카페로 향하는 길 중 하나였다. 지훈은 발자국을 보느라 계속 숙이고 있었더니 뻐근해진 목을 주먹으로 톡톡 치며 횡단보도에 섰다. 저 멀리 앞에서 이미 전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간 사람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검정색 롱코트를 입은 핏이 멋져서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는 남성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지훈이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파카를 만지작거리자 바스락 소리가 났다. 이 추운 겨울에 코트라니. 지훈은 패션보다 생명이 중요해서 절대로 저렇게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3월이 돼서 날씨가 좀 풀리면 옷장에 넣어둔 코트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서둘러 카페로 걸어갔다.

 

들어오면서 본 카페 안에는 새학기가 다가오자 들뜬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도착한 지훈은 서둘러 파카를 휴게실 옷걸이에 걸고 앞치마를 목에 끼우며 카운터에 와서 자리잡고 섰다. 자리에 오자마자 손님이 주문하려고 오는게 보여서 지훈은 앞치마끈을 묶느라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인 채 뭐 드시겠어요? 하고 여쭤봤다. 지훈의 정수리 앞에 서있는 손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지훈은 오늘따라 앞치마 끈이 잘 안 묶여서 허공에서 손을 휘적휘적 하며 당황하는 중이었다.

 

“묶어줄까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지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지훈의 동공이 커졌다. 이 사람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대만에서 만난 우진의 친구였다. 라이.. 라이?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하다. 라이커리? 뭔가 이상한데. 근데 대만에 있어야 될 사람이 갑자기 지금 여기 있을리가 없잖아. 눈 앞의 손님은 자기를 모르는 눈치기에 이 주변 학생중에 그냥 좀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지훈은 놀란 기색을 감추고 영업용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주문하시겠어요?”

“밀크티 하나요.”

“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진동벨 울리면 가지러 와주세요.”

 

진동벨을 건네는 순간까지도 관린은 지훈과 처음 눈이 마주친 이후로 지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진동벨만 건네받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뒷모습을 보자 어디서 봤는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까 횡단보도 건널 때 앞에 걸어가던 코트입은 사람이었다. 지훈은 거봐, 그냥 아까봐서 익숙한 닮은 사람이었네. 하고 안심하며 앞치마를 대충 묶고 밀크티 제조에 들어갔다. 후에 진동벨이 울려서 음료를 가지러 온 관린을 닮은 손님과 마주했을 때 지훈은 다시 기분이 살짝 이상했다. 정작 저 손님은 나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모르는 사람같은데 왜 이렇게 진짜 그사람같지? 박우진한테 전화해볼까? 지금 그사람 한국 와있냐고?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님이 근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몇 번 흘긋 보는줄도 모르고 지훈은 계속 혼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중이었다. 결국 카운터를 나섰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건 해결해야 하는 성격이다.

“매니저님 저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이 한마디를 남기고 휴대폰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가는 지훈을 보며 관린은 피식 웃었다. 자신 때문에 우진에게 전화하러 나간 것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고 바로 자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쿵쾅대며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꼭 쿵쾅거릴거라는 건 아니지만 관린은 그만큼 지금 상황이 즐거웠다. 잠시 후 관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진에게 온 전화였다. 역시 우진에게 전화 걸었나.

 

“여보세요?”

“야 관린아! 너 벌써 지훈이 만났냐?”

“응. 나 지금 지훈 카페야.”

“아니 얘가 방금..”

 

그순간 언제 왔는지 모를 지훈이 관린의 폰을 낚아채서 끊어. 라고 말하고 끊어버렸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웃으며 바라봤다. 지훈은 이 상황에도 웃는 관린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왜 어이가 없는지는 지훈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지훈은 일단 어이가 없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화가 났다고 하기에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기에 화가 날 이유같은 건 없었다. 근데 지훈은 왜 따갑게 쏘아붙였을까?

 

“뭐예요?”

“네?”

“이게 뭐냐구요.”

“눈 보러 왔어요.”

“아니, 왜 나 모른 척 했냐구요. 알아봤잖아요.”

“제가요?”

“방금 박우진이랑 통화하면서 지훈 카페 라면서요. 아니에요?”

“들켰네요.”

 

하하 웃는 관린을 보니 지훈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자신도 픽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은 들어야했다.

 

“그래서, 왜 모른 척 한거에요?”

“지훈씨도 나 모른 척 했잖아요.”

“그건.. 진짜 그쪽이 맞나 헷갈리니까 그렇죠.”

“그쪽이요?”

 

지훈은 입술을 스읍 하며 시선을 피했다. 당황하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름이 기억 안나는 걸 들켜버렸는데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도 라이는 기억하는데.

 

“내 이름 잊어버린거에요? 너무해.”

“근데, 박지훈이랑 그 요상한 이름이랑은 너무 난이도가 다르다고 생각 안해요? 2달이나 흐르면 잊어버릴 법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에? 내 이름이 요상해요? 난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나저나 자신감 쩌시네요. 다시 좀 알려줘봐요. 그땐 말할 영어 생각하느라 정신 없어서 그랬어요.”

“라이관린이요. 근데 지훈씨, 쩌는게 뭐에요?”

“좋은 뜻이니까 걱정 말아요. 관린씨.”

 

관린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지훈은 두 달 전의 대만에서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정말 약속을 지키러 올 줄 몰랐기에, 지훈은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대충 얼버무리려 손가락을 걸어버린 게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눈치빠른 관린이 지훈의 그런 생각을 눈치채고 말을 꺼냈다.

“아까 왜 모른 척 했냐고 물었죠.”

지훈이 말없이 관린을 쳐다봤다.

 

“그거 내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니까 맘쓰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약속해주면 말해줄게요.”

“알겠어요.”

 

지훈은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관린의 손가락에 걸린 지훈의 손가락의 무게가 달랐다. 지훈은 손가락을 걸며 다시는 관린에게 가벼운 맘으로 대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관린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만에서 지훈씨가 가벼운 맘으로 나한테 약속했던 것 알고있었어요.”

“네?”

 

지훈은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난 이야기다. 지훈은 그 두 달동안은 커녕 약속을 한 날부터 그 약속을 잊고 살았었다. 눈 앞의 순수한 청년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진심인 사람에게 거짓된 진심으로 대해버렸다. 주변은 온통 하얀색인데 자신만 새까만 것 같이 느껴졌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지훈은 관린에게 할 말이 없어서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발자국의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이런 상황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다. 그래도 방금 관린과 맘쓰지 않기로 약속해서, 지훈은 최대한 담담해지려고 노력했다. 관린이 알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기때문에 살짝 안색이 어두워진 지훈을 보며 관린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좀 심술이 나서, 나도 안 좋은 마음으로 모른 척 한 것 맞아요. 한국에서는 삐졌다는 표현이었나? 나 삐져서 그랬어요.”

“다 알면서 왜 온거에요?”

“보고싶어서요.”

“네? 저를요?”

“눈이요.”

“아… 네..”

 

단호박같은 관린의 대답이 돌아오자 지훈은 할 말이 없어졌다. 창피했다. 반면에 관린은 지훈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다. 주먹을 꾹 쥐고 참은 관린은 민망해서 복숭아가 된 지훈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관린은 이런 지훈을 놀리는 게 재밌었다. 관린은 지훈이 본인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를거라 생각했다.

 

“아르바이트 언제 끝나요?”

“제가 방금 와서… 네 시간은 지나야 돼요.”

“그럼 끝나면 전화해요. 혼자 돌아다니다가 올게요.”

“아.. 네! 그럴게요.”

“여기 전화번호 찍어줘요. 나도 찍어줄게요.”

 

톡톡톡. 입력하는 자신의 손가락을 빤히 보는 관린을 지훈이 힐끔 올려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푹 거뒀다. 2개월밖에 안 지났는데 더 잘생겨져서 돌아온 관린이었다. 해가 바뀌어서 그런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더 짙어져서 지훈을 잠식하는 중이었다. 지훈은 오늘 아르바이트 하다가 식기라도 깰 까봐 벌써 걱정이 됐다. 이미 마음이 관린한테 묶여있었다. 오늘 대타 맡기고 빨리 눈앞의 청년과 놀러가고 싶었다. 물론 그건 불가능하지만.

“이따 봐요, 지훈씨.”

지훈은 관린이 떠난 문을 멍하니 계속 쳐다보다가 매니저한테 이제그만 카운터로 돌아오라고 한소리 들었다. 이날 다행히도 컵을 깨먹지는 않았지만 계속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주문을 몇 번 잘못받기는 했다. 그래도 시간은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만 흘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훈은 1초가 지나갈때마다 한번씩 행복해졌다. 1초마다 1행복이라니, 정말 사소하고 사치스러운 행복이다. 퇴근시간에 관린에게 전화를 걸 때 즈음엔 행복을 가득 안고 나갈 것이다. 관린에게도 나눠줄 수 있다면 배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자 괜히 간질간질거렸다. 오늘 나 데이트한다.

 

 

 

“나 끝났어요. 지금 나가고있어요.”

퇴근 후 관린에게 전화를 걸며 카페문을 열고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 끝나가는 겨울에 눈이라니. 지금 지훈에겐 관린을 맞이하는 선물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관린에게 빨리 말하고 싶어서 지훈은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보여주고 싶다. 빨리 보고싶다.

 

“관린씨 지금 눈와요! 보여요?”

“같이 보려고 아까부터 못 본 척하느라 힘들었어요.”

“하하, 그게 뭐에요. 어디에 있어요?”

“나 지금 카페 앞에 횡단보도 근처에 있어요.”

“제가 지금 갈게요!”

 

아까 건너온 횡단보도에 관린이 서있는 게 보였다. 지훈은 빠른걸음으로 관린의 옆에 가서 안녕하세요. 했다. 뭐라해야할지 몰라서 인사라도 한거였는데 말하고나니 조금 바보같아서 웃겼다. 아까 인사 할 거 다했는데 안녕하세요라니. 그렇다고 따로 할 말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애매한 사이구나, 우리. 지훈의 생각의 결론은 애매한 사이였다. 그냥 딱 그정도.

 

“별 일 없었어요?”

“아… 주문을 몇 번 잘못받았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니 정말 다행인 것 같이 느껴지는 관린의 말은 신기하다. 지훈에게 그의 언어들은 처음 겪어보는 세계였다. 말하던 새에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관린이 건너자고 손짓했다. 지훈은 기분좋게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이 횡단보도에는 두사람의 시차가 존재했었다. 지훈은 먼저 건넌 관린을 보았고, 관린은 지훈이 있을 카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순간에서 몇 시간이 흘렀고, 지금 두 사람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같이 걷고있다. 시차가 있든 없든 목적지는 결국 같았고 같다.

관린에게는 한국의 추위가 아직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눈이 2월까지도 온다는 것에 감탄했다. 스케줄이 바빠서 2월에 겨우 온 것인데, 눈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우진의 말에 걱정한 날들은 셀 수도 없었다. 눈이 없으면 지훈에게 말할 표면적인 이유가 없어져서 걱정된 것 같기도 했다. 관린은 처음엔 눈을 보러 올 마음이었던 건 맞지만 점점 지훈을 보러 지훈의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갈 만큼 순수한 사람이 느끼는 한국의 겨울을, 그리고 눈을 보러. 관린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지훈의 속눈썹을 보고는 옆에서 걷던 지훈을 멈춰세웠다. 지훈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관린은 천천히 말을 꺼낸다.

 

“눈 좀 감아볼래요?”

“네? 네.”

“잠시만 그대로 있어요.”

 

관린은 손을 들어올려 지훈의 속눈썹 위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성급히 손을 뻗으면 날아가버리는 나비를 만지듯이 느리고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지훈은 이 상황이 갑자기 긴장이 됐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생각도 했다. 다시 떠올리기는 부끄럽지만 관린이 갑자기 키스하면 어떡하나.. 뭐 그런 종류의 생각. 그러나 관린의 손은 섬세한 터치로 정확히 속눈썹 위의 눈만 털고 떨어졌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한 생각이지만 눈을 뜨고 관린의 얼굴을 마주하자 굉장히 민망했다.

 

“눈이 있어서요.”

“아.. 네…”

 

관린은 그러고도 한참을 서서 지훈의 눈을 바라봤다. 지훈은 관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전혀 감이 안잡혀서 주머니 속의 손만 꼼지락댔다. 지훈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지훈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린은 지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많은 말들을 생각했다가 다시 지웠다가 했다. 오늘같은 날에는 최고로 예쁜 단어들만 골라서 가장 좋은 표정과 목소리로 건네주고 싶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날, 눈이 내리는 날. 완벽한 날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발언으로 인해 지훈이 부담을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훈은 이미 관린의 노골적인 시선으로 인해 녹아버리기 직전이었다. 눈사람만 녹는 건줄 알았는데 사람도 녹아버릴 수 있겠다는 걸 느꼈다. 고민하던 관린의 머리가 드디어 멈춘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드디어 그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예쁘네요. 눈.”

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지훈도 지금 내리는 그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느낌상 눈치챌 만한 상황과 말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확신은 못했다. 아직은 현실을 붙잡고 완전히 놓지는 못하는 지훈이었기에 완전히 이 상황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린의 이 발언은 지훈은 천천히 바꿔놓을 것이다. 지훈도 모르는 새에 아주 천천히, 관린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렇게 지훈을 부드럽게 삼켰다. 앞으로 몇 번이고 현실을 놓지 못하는 지훈의 손에게 가끔은 힘 빼도 괜찮잖아, 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듯 달래며 결국 스스로 놓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