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說話)
w. Nothing

 

 

아이야, 지금부터 나는 너에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설화 하나를 들려주고자 한다. 이야기가 제법 길 것이나 네가 듣기에 퍽 흥미로울 것이니 한번 들어나 보겠느냐.

 

이곳으로부터 거리를 셈하기도 아득한 그런 먼 곳에, 작은 나라가 하나 있었단다. 섬은 아니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늘 푸른빛이 가득했고 춘절과 하절, 추절과 동절이 뚜렷하여 사철의 영롱함을 그 어느 곳보다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나라였지. 또한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모두가 풍족히 살진 못하였어도 그 어느 곳들과는 다르게 먹지 못해 배를 곯거나 입지 못해 얼어 죽는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를 다스리던 왕과 왕비의 춘추는 몹시도 무수하시었어. 그러나 애통하게도 춘추만 무수하시었을 뿐, 각전 사이에는 꽤 오랜 시간 아들이 없었다. 여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건 칠거지악 중 하나임이 틀림없으나 비록 딸자식이라 하여도 내리 공주를 생산한 왕비는 자식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웃전뿐만 아니라 대소 신료들의 눈치마저 보며 살아야 했지. 그런 왕비를 하늘도 가엾게 여기셨을 게야. 세자빈으로 궐에 들어와 국모가 되기까지 강산을 세 번 보낸 뒤, 느지막이 왕자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왕실 가장 웃어른이셨던 대왕대비마마부터 저잣거리 어느 골목 코흘리개까지. 모두가 기뻐하였어. 그래. 핏덩이에 불과했던 왕자의 탄생을 앞에 둔 채 기뻐하지 않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울음을 뱉으며 세상에 나와 어미의 젖 한번 물지 못한 주제면서도 국본임과 동시에 왕세자가 된 갓난쟁이를, 모두가 사랑했다. 사가에서도 사내아이를 얻으면 풍악을 울렸을진대 손이 없던 왕실에서 각전 늘그막에 왕세자를 얻게 되었으니 그 아이가 모두에게 얼마나 중하였겠느냐. 하여 귀히 자랐다. 걸으면 부서질까, 닿으면 바스러질까, 바람 불면 사그라질까. 그렇게 대단히 귀히 자랐느니라.

 

왕자는 행복했다고 하더구나. 하기야, 왕실은 물론이거니와 만백성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 그렇듯 그 수없는 사랑에 잠겨 자란 왕자는 제가 받아 누린 만큼 타인에게 베풀 줄 알았고 제가 행복했던 만큼 백성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다짐했었다. 왕자는 제가 가진 다짐을 이루려면 문무를 마다하지 않아야 했고 소양 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어. 꼭 다짐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왕세자의 삶 자체란 그런 것이었지. 허나 왕자는 그런 삶에 있어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태어날 적부터 그리 살아왔었으니 새퉁스럽게 불평을 가질 것도 없지 않느냐. 하여 그렇게 살았다. 대단히 귀히 자라 제가 누린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고자, 제왕으로써 자라나는 중이었다.

 

그렇게 모두를 위해 살아가던 어느 날. 장성한 왕자에게 비창이 찾아왔느니라. 비창이 찾아온 것 답게 그날은 어찌나 추웠었는지, 너른 궁 속 수많은 연못 군데군데 작은 서릿발마저 돋은 겨울날이었다. 왕자는 유독 잠이 오지 않아 애먼 내관과 궁녀들의 수면까지 앗아가며 서책을 탐독하고 있었어. 한참 읽고 있었을까. 감히 불경인 줄 알면서도 잠을 이기지 못한 어린 생각시의 작은 머리가 자꾸만 꾸벅이더구나. 그 조는 모습이 가여워 서책을 막 덮으려는 참이었지. 동궁전 바깥이 심히 소란스러워져 머리를 이리저리 주억거리던 생각시조차도 눈을 뜨고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소란스러움은 동궁전 침전 바로 코앞에서 맺어졌고, 안으로 들어도 좋다는 왕자의 승인이 없었건만 힘없이 밀린 창호문 밖에는 칼바람을 몰고 온 내금위장이 서 있었다. 내금위장은 고개를 숙이고 삽시간 벌어진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한 뒤 읊더구나. 왕께서 급히 찾으신다고 말이야.

 

왕자는 잠도 물린 채 세자 의를 갖추고 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의를 갖추고 있음으로써 왕의 부름에 바로 응답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다행이 아니라 할 수 있었겠느냐. 다 늦은 시간, 궁인들을 거동하여 동궁전을 벗어나 안전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추웠어. 그러나 그 추위보다 더 서슬 퍼렇던 것이 내금위장의 굳은 얼굴이었다. 말없이 안전으로 향하던 왕자는 기어이 구순을 벌렸지. 왕께서는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찾으시느냐고. 내금위장은 답이 없었다. 다만 연이어 드리는 불충은 훗날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겠다고 대답해오기에 왕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안전의 궁인들은 모습을 드러낸 왕자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읍곡하기 시작했어. 왕자는 그 광경에 머리가 다 아파올 지경이었는데 그저 동장군의 기세에 밀려 그런 것이라 여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허연 버선발로 침전의 앞까지 다다르니 동궁전의 창호문 만큼이나 쉬이 열린 침전의 창호문 안쪽에는 늘 그렇듯이 왕자의 아비인 왕이 있었고, 영의정의 손자이자 왕자의 예동인 오랜 벗이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가까이 들라는 왕의 말에 왕자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왕을 마주하고 섰느니라. 왕자의 거동에 몸을 측면으로 물린 오랜 벗은 왕자를 보며 구슬프게도 웃었지. 왕에게 먼저 의문을 꺼내는 건 불경죄였으나 왕자는 묻지 않을 수 없었어. 이 늦은 시간 어인 연유로 찾으시었냐고 의문점을 놓기 무섭게 왕은 눈짓을 했고 뒤이어 궁인들이 왕자에게 달겨들었다.

 

멀쩡했던 세자 의가 벗겨지고, 예동의 비단옷이 왕자의 몸을 감싸고, 예동이 세자 의를 갖추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왕자에게 어찌 이러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왕자는 왕의 앞이기에 차마 악도 쓰지 못한 채 궁인들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기었다. 기어코 제 것도 아닌 비단옷 안에 몸을 욱여넣은 뒤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뒤에야 왕은 말씀하시었지. 나라의 변방을 돌던 북방의 오랑캐가 기어이 수도를 향해 오고 있으니 체면을 생각지 말고 도망치라고. 목숨을 부지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고 목숨을 부지해야 나라도 다시 일으킬 수 있으며 목숨을 부지해야 살아남은 백성이 기댈 곳이 생기는 것이라고. 목숨을 부지해야, 목숨을 부지해야. 왕자는 두말 않은 채 길을 나섰다. 왕의 명령이었으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왕의 말에 옳지 않은 이야기가 단 한 자락도 없었기에 지체할 필요가 없었지.

 

생전 가야 앓을 일 없을 줄 알았던 피난길은 그야말로 단출했느니라. 왕자에게 젖을 물려가며 키웠던 보모상궁과 내관 서넛, 궁녀 몇 명, 열 수지를 다 채우지도 못 하는 호위무사가 다였고 그나마도 눈에 뜨이면 안 되기에 행색은 말할 것도 없었어. 그 피난길은 몹시 고되었다. 몇 되지 않은 인명수라 하여도 결국 신하들이기에, 그들 앞에서 왕자는 의연해야만 했지. 걸핏하면 뒤집어지는 속을 애써 눌러 참아내는 도중에도 으슥한 산을 넘을 때면 몇 번이고 흙바닥 위에 엎드려 울고 싶었어. 왕세자로 태어나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비참함, 북방의 오랑캐들 손에 쓰러져 갈 백성들의 애석함, 왕과 왕비이기 전에 부모인 양친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침통함. 고작 열아홉인 왕자가 모두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를 피난길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왕이 마련해놓은 은신처에 몸을 뉘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었다. 그때 왕자는 거의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어. 헤아릴 수도 없이 긴 길을 두 발로 걸은 것도, 묏자락을 올라탄 것도, 겨우 올라탄 그 뫼를 다시 내려가는 것도, 누군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도. 태어나 겪지 못한 고행이었거든. 그나마 지금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어룽지는 시야와 살을 에는 추위를 모면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쇳덩이 같은 발걸음을 디뎠을 때였다. 분명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였는데, 눈앞에 수십 개의 횃불이 번쩍이더구나.

 

왕자는 그대로 정신을 놓고 싶었다. 별안간 나타난 횃불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어. 낯선 말, 낯선 복색, 낯선 얼굴. 북방의 오랑캐들이었다. 그때 왕자의 한참 뒤에서 따라오던 어린 궁녀 하나가 저도 모르게 왕자가 가지고 있던 세자저하라는 칭호를 입에 올릴 뻔 하였으나 궁녀의 앞에 있던 상궁의 저지로 불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북방의 말에 능한 내관 하나가 앞에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구나. 저희 도련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능한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니 송구하지만 길을 내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이야. 허나 그 북방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왕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디에선가 나타난 오랑캐 하나가 왕자의 목을 내리쳤거든. 그 투박한 손에 정신을 잃은 왕자는 북방으로 끌려갔고 혼절했던 왕자가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삼십 날이 훌쩍 지난 다음, 북방 황제의 후궁들이 거처한다는 어느 궁에서였다.

 

정신을 차린 왕자를 붙잡고 상궁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어. 왕자가 눈을 감고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호위무사들은 모두 죽어 없어졌고 왕자를 따라나섰던 궁녀들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북방 황제 후궁의 궁녀들로, 내관들은 황제에게로.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왕자의 곁에 남은 건 보모상궁 하나였어. 그래서 왕자는 궐을 떠난 뒤 처음으로 보모상궁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지 이레가 되었을 때. 왕자는 죽기를 자처하기 시작했어. 처음부터 검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장검 따위 존재하지 않는 후궁 안에서 보모상궁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목을 달기도 했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황제가 손수 내린 하사품이라며 후궁을 가득 메운 폐물들 사이에서 은장도를 꺼내 손목을 긋기도 했고, 입안에서 씹어 넘기던 음식물들과 함께 혀를 짓씹기도 했고, 차디찬 못 속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가냘파진 목숨을 어명에 따라 기필코 부지하고자 했던 왕자가 어찌 이리 자결을 일삼았다고 생각하느냐. 왕자는 바보가 아니었어. 고국에서 처음 오랑캐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이 왕자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겠으나 침략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나라의 사지 멀쩡한 사내를 죽이지도 않고 끌고 와 후궁에 몸을 뉘이게 했다. 그리고 얼굴 한번 못 본 황제는 자신과 똑같은 사내에게 하사품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폐물을 들여.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하여 왕자는 황제를 만나기 전에 목숨을 끊으려 노력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번번이 실패로 끝을 보더구나.

 

그러니 못에 몸을 던진 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보모상궁 모르게 몇 날 며칠에 걸려 모은 흙주머니를 몸 곳곳에 달고 산책을 나가고 싶다 말하였지. 북방에 끌려온 이후로 툭하면 죽을 생각만 하던 왕자가 밖을 노닐고 싶다 말했으니 보모상궁으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었을 게야. 상기된 얼굴로 바지런히 준비한 끝에 왕자를 궁에서 데리고 나가 이것저것 보여주는 보모상궁을 보며 왕자는 속으로 골백번도 더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북방의 황궁 안에는 명백히 신기하고 진귀한 것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자는 그저 눈을 돌리며 물을 찾았어. 허나 물은 쉬이 눈에 들지 않았고 그렇게 의미도 없이 한참을 돌아다녔을 게야. 어느 커다란 화원에 발이 닿았지. 고국의 말을 할 수 있는 북방의 궁녀가 이 화원 안에는 속국들에게서 헌상 받은 온갖 진귀한 꽃을 모아놓았다며 제 것도 아닌 화원을 자랑처럼 떠벌리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고개를 끄덕이던 끝에 무심결로 눈길을 돌리니, 흡사 강과도 같은 못이 왕자에게 보였다. 왕자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말을 하던 궁녀는 말을 멈추었고 뒤를 지키던 모두가 의아함에 바라만 보고 있었다만, 젖을 물려 키운 보모상궁은 왕자의 뜻을 단번에 알아챘지. 날이 흐르도록 줄곧 도련님이라 잘 불러오다가 끝끝내 왕자를 향해 저하, 외치었고 왕자는 그대로 못 속에 몸을 던졌다.

 

못 속은 거짓말처럼 따뜻했어. 제아무리 극악한 이승이라 하여도 저승보다는 낫다 하였건만, 왕자에게는 아니었다. 몸에 두른 흙주머니들에 귀신들이 달라붙어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인지 뭍과 속절없이 멀어지는 사이, 목구멍으로는 물이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고 온몸 구멍마다 물길이 차는 것이 뚜렷하게 다가올 정도였는데 그 끔찍한 감각들을 모두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한겨울의 못 속은 도를 지나치게 따스했어. 이 따스함이 이승에서 느낄 수 있는 마지막일 터이니 감았던 눈을 떠 수면에 번진 겨울의 해를 바라보려고 했지. 그제야 목 깊은 곳에서부터 토기가 치밀었고 겨우 남아있던 숨자락마저 모조리 사라져 한시바삐 염라의 손을 잡았으면, 싶었던 순간에. 잔잔했던 수면이 잔뜩 일렁였고 금피륙을 걸친 누군가가 왕자를 향해 물속을 가르며 오고 있었다. 그때 왕자는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 일그러진 구순으로 호선을 그렸어. 물속에서 왕자를 잡은 염라의 손이 끔찍스레 따사로운 것이라, 그러했다.

 

못 속에 몸을 던지고 보름이 지난 뒤 왕자는 눈을 떴지. 그리고 이번 자결도 실패로 끝이 났음을 대번에 알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북방의 침전 높다란 천장이 보여서, 고된 몸을 뉘이고 있는 곳이 황제의 후궁이라는 것을 알아서, 무엇을 위하여 이 질긴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왕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누운 자세 그대로 울음을 뱉었어. 머리에 잠식하고 있는 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면서 서러움으로 그저 울고 있던 그때.

 

그래, 그때.

 

보모상궁이 아니고서는 들려올 리 없는 고국의 말로 누군가가 왕자에게 물어왔다. 기침하셨느냐고. 왕자는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와 고국의 말에 눈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어. 동궁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넓은 침전, 침상과 가장 지척에 있는 널따란 창, 겨울 한낮의 해가 거칠 것 없이 들어오고 있는 그 앞에. 웬 사내가 등을 기대고 서 있더구나. 분명 처음 만나는 사내였으나 왕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잔잔했던 못의 수면을 가르고 다가와 드디어 죽어가던 자신을 꺼낸 이가 바로 저 사내라는 걸. 당해내기 어렵게 원망스러웠다. 겨우 꺼뜨려가던 목숨이었고 그대로 죽게 두었으면 되는 것을 기어이 살린 그 사내를 왕자는 죽이고 싶었어. 보드라운 포단을 한껏 움키고 이를 으득이고 있으려니 사내가 다가왔다.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왕자를 한참 내려다보던 사내는 단 한마디,

 

미안하오.

 

그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으나, 그 말을 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선 사내가 침전에서 몸을 온전히 물린 뒤에 왕자는 한참을 울었어.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 왕자의 목숨을 구명한 건 북방 황제의 이복동생 관림이었고 황제가 참 많이 아껴 황궁을 떠날 연치가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곁에 놓아두고 있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황자라는 걸. 허나 그런 것은 왕자와 아무 상관이 없었어. 왕자에게는 그저 목숨을 살려준 원수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내, 관림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길 패전국의 왕자를 왜 구했는지, 못에 몸을 던지던 그 순간 보모상궁이 저하라 불렀으니 패전국의 왕자이다 못해 세자라는 걸 알았을 텐데 왜 아직까지 이 숨통이 붙어있는 것인지, 기력을 찾았을 땐 분명 보모상궁이 곁에 있어야 맞는 것인데 정작 있어야 할 이는 없고 어찌 황제의 아우가 제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인지.

 

마지막으로 죽어 마땅한 제게, 무엇에 비롯하여 미안하다고 사죄의 뜻을 비치는 것인지.

 

이렇듯 묻고 싶은 건 많았으나 그날 이후로는 만나지 못해, 왕자는 알고 싶은 것들을 가슴 어느 구석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죽기를 포기했지. 뒤늦게 깨달은 게야. 비록 지금껏 만나지 못한 황제라 하더라도 그 후궁에 몸을 뉘일 정도인데, 죽는 게 뜻대로 될 리가 없지 않느냐. 그에 더불어 진정한 살붙이는 아니더라도 보모상궁의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 봐도 무방할 제가 그 앞에서 몇 번이고 죽기를 염망하였으니 그 속이 온전할까, 싶었어. 하여 포기했다. 대신 죽은 듯이 살았다. 목숨이 이어질 만큼만 밥알을 입에 넣었고 입이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목을 축였어. 그렇게 조용히 살고 있으니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도 오더구나.

 

겨울의 한기가 떠난 자리에 머물기 시작한 볕이 좋은, 허나 조금 이른 춘절 어느 날이었다. 그 볕에 끌려 모처럼 궁을 벗어났고 내딛어지는 발걸음은 겨울날 보았던 커다란 화원을 찾았지. 제 것도 아닌 화원을 자랑스레 조잘거려 주었던 어느 궁녀의 말마따나 화원 안에는 춘절에 맞게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이 들어가고 있었어. 태어나 처음 보는 나무와 꽃도 있었는데 그게 퍽 아름다워 눈에 담고 있으려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고 있는 주제에 아름다운 건 또 눈에 담으려 하는 현실이 과히 우스웠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자멸하며 웃고 있었지.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 웃으시는 건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썩 듣기 좋은 성음이 울려 돌아본 곳엔 못 속에서 만났던 염라가, 아니, 황제의 이복동생이라는 자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왕자를 쳐다보고 있었지. 아, 그때 왕자는 생각했다. 그래. 이리 조용히 살고 있으니,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도 오는구나.

 

황제가 참 많이 아껴 여직 곁에 놓아두었다는 너를, 내 혀에 묶어 불구덩이에 처넣으면, 그때 가서야 진정한 봄이 오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