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듯 보드라운 당신은
w. 라시솔

 

 

처음 보는 눈에 신기해 하던 마음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것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 눈은 그치지 않았다. 이내 무릎까지 쌓였다. 처음이란 언제나 두려운 존재, 그들에게 겨울은 특히 그랬다. 마냥 이어지던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엄마아, 배고파. 먹지를 못하고 곯다 곯다 배가 툭 튀어 부은 아이는 제 어미의 치맛자락을 잡고 칭얼댔다.

 

 

“열 밤만 지나면 겨울이 끝날 거야, 아가. 그럴 거야.“

 

 

여자는 그의 자식에게 속삭이며 빌었다. 아이에게인지 신에게인지 모를 말을 하며 작게 흐느꼈다. 모두의 마음이 그랬다. 하지만 무심한 하늘, 무정한 계절. 열 밤은 스무 밤이 되고, 스무 밤은 서른 밤이 되고.

 

 

결국은 백 밤.

 

 

모두가 주렸다. 주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라의 가장 탐욕스러운 이조차 끝나지 않는 겨울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물며 욕심 없는 이들이야. 건강이 좋지 않던 이들부터 픽픽 쓰러져 나갔다. 그렇게 쓰러진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굶어서, 얼어서 죽었다. 꾸준히 씨를 뿌렸지만 그치지 않는 겨울은 싹을 틔우지 않았다. 더러는 뿌릴 씨조차도 먹어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그들의 우두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왕이라 부를 수 있는 제사장, 린는 말갛게 어여쁜 소년이었다.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은 그의 어린 어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아름다운 제사장, 상냥한 왕. 그 누구도 린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이 주려 가며 그의 먹을거리를 챙겼다. 그러니 린이 홀로 죄를 느끼며 자책하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가 아닌 그 자신으로부터일 것이다.

 

 

자신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이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린은 죽어가는 모두를 안았다. 싸늘하게 체온을 잃어가는 이들의 몸을 너무나 많이 안았다.

 

 

린은 울었다. 그의 무능에 울었다. 인간 하나, 그 존재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너졌다. 그는 그에게로 쏟아지는 모든 배려를 물리쳤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한 린은 풀을 씹고 끓인 물을 마셨다.

 

 

다시 백 밤. 겨울은 물러가지 않았다.

 

 

여전히 누구도 왕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왕 자신을 제외하고. 그는 손수 돌을 옮겨 제단을 쌓았다. 사람들은 감히 린을 돕지 않았다. 어린 왕이 어떤 기분일지는 누구도 완전히 알지 못하였으나,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겹이나 받쳐 입은 옷 안의 몸에서 땀이 밸 정도로 그는 열심히 일했다. 다시 몇 밤이 지났다. 그의 큰 손이 얼고 부르터 피가 배어나올 때 즈음, 옮긴 돌이 쌓이고 쌓여 재단이라 부를만 한 것이 될 때 즈음. 린은 한번 크게 앓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붉은 사이, 얼룩덜룩한 열꽃이 피었다. 린은 흐린 눈으로 꿈을 꾸었다. 흰 까마귀가 그의 앞에 서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까마귀는 총총 뛰며 린을 피하다 결국, 그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린은 희게 피부가 일어난 손을 뻗어 어깨 위의 까마귀를 쓰다듬으려 했다. 쓰다듬었다. 눈이라도 만진 것 처럼 찼다.

 

 

눈을 떴다. 목이 갈라져 가뭄인 듯 말랐다. ‘몇 날이나 지났는가?’ 린의 곁을 지키던 이가 금세 대답했다. ‘열두 밤이 지났습니다.’ 휘청한 몸을 일으켜 린은 문을 열었다. 날씨는 어떠한가?

 

 

“여전히 춥습니다.“

 

 

아아. 린은 상처투성이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홑겹의 자리옷은 벽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막지 못했다. 사무치게 추웠다.

 

 

“기도를 해야겠다.”

“준비할까요?”

“제단 위에, 성막을 모실 것이다.“

 

 

그가 손수 쌓은 제단 위에 천막이 세워졌다.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침구, 섬세한 짜임의 옷가지, 약간의 마른 고기. 전부 왕조차 구하기 힘든 귀한 것이었다. 그것들로 천막 안을 어여삐 꾸미고 하나의 틈도 남지 않도록 밀랍을 발라 봉했다. 그리고 다시 천을 덮고, 그 위에 다시 두터운 가죽. 린은 맨 위의 가죽을 손수 덮었다. 부드럽고 단단한 그 위를 오래오래 쓸었다.

 

 

매일매일 기도했다. 재단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백 날과 백 밤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겨울을 물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통이 좁은 소매 사이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몇 겹의 옷을 껴입어도 겨울의 칼바람은 모든 천을 뚫고 린을 괴롭혔다. 다시 몇 날과 몇 밤이 지났다. 린은 여전히 재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제발 저들을 굶기지 마시옵고, 저들이 얼어 떨게 하지 마시옵고,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소서. 파리하게 언, 잔뜩 부르튼 입술로 중얼거렸다.

 

 

먼 곳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누구일까. 누구의 죽음이기에 그리 슬피 우누. 어찌 죽었는가? 얼어서인가? 굶어서인가? 주려 지친 누군가가 그대를 해하였던가? 코끝이 시큰했다. 하필 나같은 자가 왕의 자리에 앉아서. 보다 하늘의 소리를 잘 듣는 이가 왕이었으면 겨울이 이리 오래지 않았을 것을. 그들의 아픔이 모두 제 탓인 양 마음이 아렸다. 린은 고개를 숙였다. 회색의 돌바닥 위 몇 방울의 얼룩이 생겼다.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났다. 먹구름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저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우르릉 소리를 냈다. 쏟아지듯 눈이 내렸다. 함박눈보다 지독한 진눈깨비였다. 바위가 울리는 듯 한 소리를 내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질척한 눈은 바닥에 쌓이질 못하고 고였다. 린은 제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홀로이 꿇어앉은 린의 옷이 차디찬 눈에 젖어갈 때 즈음, 천둥 대신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천막이 찢어져 있었다. 린이 손수 덮은, 가장 두꺼운 가죽까지 단번에. 추위에 곱은 손을 덜덜 떨며, 린은 제단 위로 올라섰다. 초 하나 넣어두지 않았던 천막의 안에서 따스한 색의 불빛이 새어나왔다. 조심그레 틈을 벌리고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놀랄 만큼의 온기가 온 몸을 감쌌다. 겨울이 찾아오고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던 훈기. 마치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가 노곤히 녹는 것 처럼. 린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침상 위에 길게 누운 한 이.

 

 

연분홍의 겉옷을 걸친 이는 얇은 차림이었다. 아니, 하늘하늘해 보이는 그 안으로 몇 겹을 껴입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으나······, 하여간에 린보다는 얇은 차림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떨기조차 않는 기색. 린은 가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왔어?“

 

 

그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으나 이미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막의 안을 가득 채운 빛의 발생지를 보지 못하였으나 이미 근원를 알았다. 꽃을 보지 못한 지 수 없는 날들이 흘렀으나 그의 얼굴을 보고 당장 꽃을 떠올렸다. 감히 그의 눈을 보지 못하고 턱 즈음을 바라보며, 린은 향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오셨습니까.“

 

 

애써 침착을 가장한, 떨리는 목소리. 온 천막 안이 풀꽃 향과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그는 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말랐네.“

 

 

반짝이는 고운 옷감이 사락이며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그의 간단한 손짓에 상 가득 온갖 음식이 피어났다. 아니, 원래 그곳에 있었으나 이제야 눈치챈 것일지 모른다. 음식 냄새, 린은 덜컥 고인 군침을 따가운 목 너머로 억지로 삼켜냈다, 여린 입 안쪽의 살을 씹었다.

 

 

“제가 당신을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네가 부르고자 하는 아무 이름으로 불러도 좋아. 나는 늘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으니.”

 

 

그는 몸을 일으켜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보드라운 뺨은 꽃잎과 같이 물들어 발갰다. 부드러운 표정을 한 그의 앞에서, 린은 허리를 깊게 숙여 절했다.

 

 

그는 아무 이름으로 부르라 하였으나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린은 그의 앞에 벌이라도 서는 마냥 앉아 있었다. 머리 끝까지 모두 향과 온기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짙으나 짙지 않은 꽃의 향기, 탁자 위에 준비된 목탄으로 글을 썼다. 熏, 따뜻한 연기라는 뜻의 훈. 그는 린의 하는 양을 물끄럼 바라보더니 글자 위에 풀꽃을 얹었다. 薰, 향기로운 연기라는 뜻의 훈. 린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훈,”

“나를 부른 것이지?“

 

 

그는 스스로 다듬은 이름에 대답하며 웃었다. 진한 향이 또다시 터지듯 퍼졌다. 린은 훅 끼친 풀꽃에 또다시 푸욱 담기는 듯 하였다. 온몸이 잘게 떨렸다.

 

 

-*-

 

 

린에게 말랐다 염려를 표한 것은 다만 말뿐이 아니었다. 훈은 자주 소매를 팔락여 온갖 음식들을 만들어 내고 린이 먹을 것을 종용하곤 했다. 다만 한 번도 먹은 적은 없었다.

 

 

린의 앞에 한가득 먹을거리를 나타나게 한 훈은 방긋방긋 웃으며 린을 재촉했다. 여윈 뺨, 마른 손. 린은 제 앞의 유혹으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렸다.

 

 

“왜? 어서 먹어. 내가 널 위해 만든 것들이잖아.”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리지도 않은 제가 먹을 수는 없습니다.“

 

“네가 먹지 않으면 모두 버릴 거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굶는 이들을 먹일 테니.“

 

 

한 마디도 지지 않은 린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결국 훈이 만들어 낸 음식들은 그대로 다른 이들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라면 훈은 짐짓 팔짱을 끼우고, 볼을 부풀리며 말하는 것이다.

 

 

 

“대체 언제쯤 먹어줄 셈이야?”

“굶는 이가 하나도 없으면, 그러면 먹겠습니다.”

 

 

 

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웃는 그 고운 얼굴에 어찌 역정를 낼까, 사르르 녹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조금은 삐친 체로. 훈은 입술을 삐죽였다. 오롯이 너만을 먹이려는 이 마음을 어찌 몰라? 야속한 인간 같으니.

 

 

난데없이 나타난 그는 린을 아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린만을 아꼈다. 처음 린을 만난 그 순간부터 날것에 가까운 호감을 표했다. 제게 쏟아지는 그 무해한 애정을 어찌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린은 그저 그를 흘려냈다.

 

 

“린아, 잠시.”

 

 

그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을 들어 린의 얼굴에 댔다. 와락 다가온 그의 목덜미로부터 향내와 온기가 훅 끼쳤다. 역시 훈薰이구나. 린은 생각했다. 그의 말랑한 손가락이 린의 얼굴을 감쌌다. 칼바람에 에이고 베인 뺨에 닿은 손으로부터 훈기가 퍼져 얼굴을 다 감쌌다.

 

 

“입술이 말이 아니구나.”

“입술이요?”

“그래, 이렇게 다 갈라지구.“

 

 

훈은 린의 언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그의 부르튼 입술을 쓸었다. 거짓말처럼 매끈하게 정돈된 입술. 반짝이는 윤기까지 되찾은 그 입술로부터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훈은 느리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안타깝구나. 어여쁜 입술이건만.”

“어여삐 여겨주셔야 할 이는 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인데요.”

“어찌해? 내 눈에 귀한 것은 너 하나 뿐인 것을.“

 

 

그는 린이 귀하다 말하며, 어여쁘다는 단어보다도 어여쁘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향내가 터져나오듯 맡아지는 듯 하였다. 바짝 다가온 영롱한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겨 버린 탓에, 린은 잠시 어찔한 머리를 하고 눈을 깜빡였다. 시선을 간신히 떼어내긴 하였으나 멀리 두지는 못한 채로, 웅얼대듯 말했다.

 

 

“높으신 분이 어찌 하나만을 귀히 여기십니까.”

“그러면, 내가 다른 이에게도 어여쁘다 귀히 여기면 네가 족할까?“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실은 꿀을 먹어본 지가 얼마나 오래인지 알 수도 없지마는, 린은 입을 다물었다. 꾸욱 문 입술 사이로 꺼슬하지 않은 감각이 느껴져 생소했다. 훈은 여전히 웃은 얼굴이었다. 그리 곱게 웃지만 마시고… 차마 말은 꺼내질 못한 채, 죄책감이 뒤섞인 마음을 하고서 린은 마주 웃었다.

 

 

 

-*-

 

 

훈은 그 자신이 내려온 며칠간은 성막에만 머물러 린을 보내지 않더니, 이내 성막을 나서 린이 가는 모든 곳을 다아 쫓았다. 왕이라 불리는 우두머리의 주된 일은 그것이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어찌하자 함께 논하는 것. 자리에 가만 앉아 우아하기 짝이 없도록 구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몇 겹 되지도 않아 뵈는 옷을 걸치고 팔랑대며 저를 따르는 훈을 염려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훈, 춥지 않으십니까? 제 옷이라도 좀 더 입으시겠습니까?“

“이 겨울을 만든 사람이 나인데,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린은 몸을 돌려 훈의 앞에 섰다. 훈은 어김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린을 보았다. 풀꽃의 향을 내면서. 천연덕스러운 표정, 린은 감히 훈의 어깨를 잡지 못하고 그 주위에서 손을 움직였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많이 죽고 있습니다. 다들 곯습니다. 왜 그냥 두십니까. 원망이 엉긴 말들이 잔뜩 떠올랐으나 차마 훈에게 작은 상처라도 낼까 입밖으로 뱉지 못했다. 한참을 입에서 굴리고 굴리다 간신히 작게 중얼거렸다.

 

 

“훈이 만드신 겨울, 빨리 보내지 않으시고 무엇 하셨습니까.”

“너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진정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어떨까.”

 

 

정말인지 아닌지 모를 얼굴로. 다시 그는 웃었다. 또다시 풀꽃 향이 터졌다. 훈은 앞을 향해 걸었다. 도톰한 입술을 문 채로, 린은 그를 따랐다.

 

 

 

-*-

 

 

린은 방 안의 긴 탁자에 앉았다.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감각은 쌓인 죽간이 대신했다. 자르륵 소리가 나도록 펼친 죽간에 쓰인 글자를 차분히 읽었다. 훈의 시선이 따라붙었음을 알았으나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정말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훈의 입에서 나오게 될 말들에 대답하는 것들이 두려워서?

 

 

“이런 추운 곳 말고, 따스한 곳으로 데려가 준다 하면, 그러면 넌 내 것이 될까?”

“훈이 오셨으니 이제 겨울은 물러갈 테지요.”

 

“내가 매일 맛난 것으로 먹여 준다 약속하면, 그러면 넌 내 것이 될까?”

“저는 먹여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러면… 주신께 너를 내 요정으로 달라 간청해 볼까? 함께 영생을 살까? 그러면 넌 내 것이 될 테냐?”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 ”

 

 

훈은 린의 침상 옆 화분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물음은 화분 안의 씨앗을 향한 것이 분명하여도 들어야 할 이는 저기 저 책상에 앉은 이.

 

 

“아가야, 내가 무엇을 해 주면 린이 내 것이 될까?”

“저는 이미 온전한 제 것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저를 훈에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하면 넌 내 것이다. 이 말이지?“

 

 

이제서야 린을 돌아본 채로, 훈은 물었다. 여전히 화분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여즉 책상 위의 죽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훈이 쓰다듬던 화분의 중앙에서 새싹이 피어났다.

 

 

“대답 안 해?“

 

 

가만한 목소리로 린의 대답을 재촉한 훈은 바닥에 맨발을 디뎠다. 린이 앉은 책상으로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화분의 싹으로부터 잎이 하나씩 돋아났다. 결국 린의 책상 앞에 닿아 그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훈은 린의 숙인 얼굴로 손을 뻗었다, 린은 헉하는 숨을 들이쉬었다.

 

 

“린아, 대답을 하지 않음도 대답인 것을.“

 

 

따뜻하고 보드라운, 말랑한 손. 훈이 다가옴은 그의 기척보다도 먼저 오는 향과 온기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린에게 닿기 직전, 린은 숨을 멈추었다. 화분의 이름모를 식물로부터 연분홍의 꽃봉오리가 맺혔다. 훈은 가칠한, 이전보다야 많이 나아지긴 하였으나 하여간 아직도 가칠한 뺨의 결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고 싶지 않아?“

 

 

훈은 린의 뺨을 쓸던 손을 거두고 상 위에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린은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 마, 그럼.“

 

 

여전히 훈은 아리따운 얼굴로 짙은 향을 뿜어내며 웃었다. 돌아선 훈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따랐다. 그리고 침상 옆의 화분으로,

 

 

풍성하게 만개한 짙은 분홍의 꽃. 화분 위로 봄이 내렸다.

 

 

 

-*-

 

 

곳간에 저장한 감자들 중 싹이 난 것들을 골라 빼냈다. 얼어버린 땅 위에 불을 질러 녹인 후 갈아엎었다. 각자의 바구니 안에 감자의 조각들이 있었다. 다수는 군침을 삼켰다. 독이 있거나 있지 않거나, 당장의 주림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팔이라도 자를 이가 여럿이었다. 지훈은 바구니 없이 린의 뒤만 졸졸 따랐다.

 

 

“겨울이잖아, 린아.”

“언젠가는 봄이 올 테니까요.“

 

“지금은 자라지 않아. 그렇게 정해져 있어.”

“겨울이 지나면 자랄 겁니다.“

 

 

감자를 심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며, 훈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훈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기다리면 겨울은 끝날 텐데. 신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린은 다시 허리를 숙여 땅 안으로 감자 조각을 밀어넣었다. 그런 린의 등에 대고, 훈은 물었다.

 

 

“감자를 자라게 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먹을 거리가 생기면 좋겠지요.”

 

“내가 해 줄까?”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네가 원한다면 해 줄게.“

 

 

통이 넓은, 흰색에 가까운 옅은 분홍의 소매를 걷어올린 그는 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흙을 덮지 않아 빤히 보이는 구멍 안의 감자로부터 줄기가 돋아나고 돋아났다. 땅에 심긴 모든 싹으로부터 그랬다. 심기지 않은 감자로부터도 그랬다. 더러는 구물대며 자라는 줄기에 놀라 들었던 바구니를 놓쳤다.

 

 

훈은 여전히 느리게 걸었다. 그저 타박이는 걸음이었으나 율동감을 느꼈다. 땅으로부터 솟아난 감자 줄기에서 꽃이 피었다. 금세 다 자랐다. 언 땅으로부터 순식간에 수확할 만한 감자가 피어나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누군가 그의 소매를 쥐었다. 더럭 겁을 먹은 탓이겠지, 린은 그의 팔을 토닥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모두는 훈의 주위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밭의 저 끝까지 걸어간 훈은 린을 돌아보며 웃었다.

 

 

-*-

 

 

“난 네가 왜 그렇게 그 어린 것들을 신경쓰는지 잘 모르겠어.”

“저는 훈이 왜 저를 이렇게 신경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흠······, 얄미우니 말해주지 않아야지.“

 

 

넓은 소매에 양 손을 넣어 감춘 훈은 린의 한 걸음 뒤를 따라 걸었다. 린의 발이 디딘 그 자국을 따라, 눈에 선명히 남은 자국을 따라. 큰 발자국 안으로 제 발을 쏘옥 넣어가며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시…”

 

 

훈을 향해 뒤 도는 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훈은 린의 품 안으로 쏟아지듯 넘어졌다. 녹아가는 얼음이라도 밟은 걸까. 덜컥 제게 안긴 따스함을 붙들어 일으켰다. 훈의 따스한 얼굴이 제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향은 린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처 입 밖으로 내어지지 못한 말은 당황해 꿀꺽 삼킨 호흡과 함께 뱃속으로 사라졌다.

 

 

“이제야 나를 제대로 보는군.“

 

 

그는 다시금 달콤히 웃으며 린의 손을 잡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해 굳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린도 잡힌 손을 내치지 않았다.

 

 

린의 발을 따라 걷느라 한 쌍이었던 발자국이 갈라져 두 쌍이 되었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처마로부터 눈이 녹아 떨어졌다.

 

 

 

 

-봄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