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雪國)
w. 마들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으하함~ 하품이 크게 나왔다. 첫머리부터 재미없네 뭐 이런걸.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고개를 들다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째림에 목례를 하고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학의 이해.

 

지훈은 막 입학한 공대생이었다. 학교는 대학생이라면 무릇 전공에만 함몰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기초지식은 교양으로 익혀야 한다는 방침 하에 1학년들에게 자기 전공 외 학부의 교양 수업 수강을 필수로 정해두었고, 지훈이 인문학부에서 고른, 아니 정확히는 꿀강의 수강신청을 광탈하고 남은 것을 들은 수업이 바로 문학의 이해였다.

 

아오. 서양문화부터 넣었어야 하는 건데 개빡.

 

지훈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한 번 치켜 쓴 뒤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일본 문학 칸으로 향했다. 이번 과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매주 1회 감상문. 그 때문에 인문학 교양 중에서는 가장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교수가 엄청 깐깐해서 감상문을 파일로 제출하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베낀 건 아닌지 프로그램을 돌려 확인까지 했다. 만일 걸리면 학점에서만 불이익을 얻는 게 아니었다. 첫 과제 제출 이후 대강 짜깁기해서 낸 몇몇에게 쏟아진 질문 폭격은 책을 읽지 않고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기는 없어도 수강신청 광탈자들이 듣게 되는 대형 강의였기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로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던 학우들의 얼굴이,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측은해보일 정도였다.

 

가뜩이나 다른 과목들도 빡센데. 오늘도 술 마시러 못가겠네. 이번만 과제 내지 말까. 지훈은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했다.

 

설국이 꽂혀있던 일본 문학 칸에는 주로 옛날 서적들이 쭉 꽂혀있었는데 의외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낡은 책 냄새가 났다. 나쁘지 않았다. 공대생이지만 책을 좋아하긴 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게 수강하고 있었다. 과제 명분으로 맨날 궤짝으로 술을 들이키는 공대 동기들, 선배들에게서 벗어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훈은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았다. 마시면 좋고 아님 말고. 그냥 그 정도. 화공과가 공대 중 가장 크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떼로 지어 다니며 밤낮 안 가리고 장소 안 가리고 마셔댈 줄 누가 알았냐고 생각했다. 그런 무의미한 시간에 비하면 소설을 읽는 게 차라리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만은 좀 이상했다. 딱히 일본문학에 거리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호불호가 강하게 갈린다는 인간실격도 그러려니 하면서 읽었었다.

 

그게 아마 고3때였지 얼마 안 됐네.

 

그런데 왜 모두가 칭송하는 도입부를 가졌다는 설국을 읽자마자 더 이상 못 읽겠다고 생각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훈은 설국을 제자리에 도로 꽂아놓으려다가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고는 결국 꽂지 않은 채 제 쪽으로 다시 가져왔다. 자꾸 흘러내리는 겨자색 바탕에 까만 체크무늬 남방 소매를 약간 걷고 높은 콧대 덕에 오히려 쫑긋 올라가 절대 흘러내리진 않는 두꺼운 도수 높은 뿔테 안경을 습관처럼 올린 후 창틀에 걸터앉아 다시금 설국을 펼쳤다. 도입부가 다시 등장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창밖에서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왔다. 봄이라 계절이 안 맞아서 그런가. 지훈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설국(雪國)

 

 

 

 

 

 

“눈ㅈ…떠…..눈 좀 떠….눈 좀 떠보세요!”

 

“하악- 하악-”

 

아득하게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관린은 거친 숨을 내 쉬며 눈을 떴다. 시야에 어두운 동굴 밖으로 가득 쌓인 것도 모자라 계속 내리고 있는 새하얀 눈이 들어왔다.

 

아 결국. 꿈이 아니었어.

 

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절망했다. 세상을 다 잃어도 지금 보단 나을 것 같은 감정이 온몸을 짓눌렀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그는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그런 기도를 했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게 해 달라고. 더 이상 하얀 눈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1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雪國)이었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눈〔雪〕이란 것은 정말 신기했다. 관린이 나고 자란 곳은 눈이 없는 곳이었다. 일 년 내내 더운 곳. 비가 왔음 왔지 눈이 올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부턴가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식학교를 세우고 철도를 깔며 관린이 살던 나라는 겉보기에는 풍족해 보였다. 애초에 나라 자체가 원주민보단 청나라에서 온 자들이 활개를 치던 곳이라 일본인들의 신문물을 실제로 많이 반기기도 했다. 그러나 관린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거지새끼가. 저리 꺼져. 이런 새끼랑 같은 장소에서 어떻게 밥을 먹으란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꺼지라고!”

 

 

두려움이 가득 찬 눈으로 식당에서 쫓겨나는 원주민을 보자 화가 치민 관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가 풀었다.

 

관린의 아버지는 청나라―이제는 중화민국―에서 신해혁명을 이끈 자로 혁명 이후 대만민주국(일본이 들어온 뒤엔 더 이상 아니게 되었지만)으로 건너왔다. 대만 원주민들은 원래 한족에 비해 무시당하긴 하였으나 일본이 들어온 뒤로는 멸시에 가까운 모욕을 당해야 했고, 그것은 대만 땅에 살던 원주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신해혁명에 힘입어 한인계 대만인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일본에 대적하여 무장투쟁하였고, 투쟁은 실패했다. 2000여명이 체포되었고 100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엔 투쟁의 선봉에 섰던 관린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관린은 너무 어렸다.

 

 

“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죠?”

 

 

아무리 물어도 어머니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열 밤 만 자고 나면 분명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니었다. 일곱 살이던 관린은 숫자를 100도 넘게 셀 줄 알았다. 열 밤이 지나도, 스무 밤이 지나도, 백 밤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관린이 더 자라고 나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어렸을 때는 고달팠다. 어린 애들의 순수함이란 꽤나 악의적이어서 이해심을 기대할 수 없는 때가 태반이다. 관린은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매일 놀림을 받았고, 그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리고 온전한 사정을 다 알게 되었을 무렵에 그 미움은 일본군을 향해 있었다.

 

 

“무장 투쟁하러 갈 거에요.”

 

 

관린의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말릴 위인이었다면 남편과 함께 대만에 건너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어머니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며 일본에서 수학(修學)할 것을 권유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관린은 일본에서 군사학교를 마쳤고, 중화민국 본토로 떠나려는 찰나에 중국인으로부터 무장투쟁과 관련된 서신을 전달할 것을 부탁 받았다. 그런 연유로 관린은 난생 처음 니가타 현(縣)에 가게 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온통 눈 천지인 바깥 풍경에 휩쓸려 관린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기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신호소인 것 같았다. 그제서야 관린은 눈을 기차 안으로 돌렸다. 저 쪽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열더니 역장님! 역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그 뒤로는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으나, 미성의 목소리가 어딘가 하얀 눈을 닮은 그런 목소리라고 관린은 생각했다. 돌아서서 다시 이편으로 걸어오는 그는 아주 예쁜 눈을 한 소년이었다. 처음엔 아름다운 눈 때문에 소녀인가 착각도 들었지만 꽤 넓은 어깨와 판판한 가슴팍을 보고는 남자가 맞구나 생각했다. 어쩐지 관린은 입이 말랐다. 그 소년은 관린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너무 빤히 쳐다보나 싶은 자각이 든 것은 그 소년의 동행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관린은 황급히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관린의 시야 가득 들어왔던 눈〔雪〕 위로 소년의 눈썹이 두둥실 떠올라 관린은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정신을 차리고서 보니 그저 건너편에 앉은 소년의 옆모습이 창에 비친 것이었다. 하얀 눈밭 위로 둥실 투명하게 비추인 소년의 옆모습이 어쩐지 잘 어울려서 관린은 바깥을 보는 척, 소년의 옆태를 살폈다. 소년과 동행한 남자는 낯빛이 누런 것이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았다. 그는 이내 소년의 허벅지위에 머리를 누이고 누웠는데, 목도리를 이불처럼 덮게 하고 남자의 머리를 연신 쓸어대는 손길이 퍽 익숙해 보였다. 다정함을 넘어 어딘가 헌신적인 느낌에 관린은 쉽사리 눈을 떼기 어려웠다. 어떤 사이일까. 부자(父子)관계로 보기에는 남자가 너무 젊어 보이고, 형제라고 생각하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눈매였다. 가로등이 하나 씩 켜졌다. 창에 비친 소년의 투명한 눈이 따스한 주황빛을 띠었다. 따스한 눈길. 그런 눈길로 소년은 한 시도 쉼 없이 자신의 허벅다리를 베고 누운 남자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어느새 관린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관린은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하얀 눈만은 반짝거렸다. 오늘 서신을 전해주고 여차하면 내일 바로 떠나리라 생각한다. 뽀득거리는 눈을 밟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관린이 나온 문으로 그 소년이 조심스레 남자를 부축하여 걷고 있었다. 같은 역에 내리다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인가. 관린은 잠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품에 들은 서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리고는 앞을 향해 걸었다.

 

 

 

“전해주어 고맙소. 머무실 곳은 정하셨는지요.”

 

 

화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눈바지를 입은 채로 서신을 전달받은 자가 말했다. 관린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추위에 얼어 새빨개진 손을 화로에 가까이 하고는 말했다.

 

“온천장이 있더군요. 이미 짐을 풀어두고 오는 길입니다.”

 

“향후 계획은?”

 

“만주로 갈 계획입니다.”

 

“잘 생각하셨소. 언제 출발하시오?”

 

“여독을 좀 풀고, 이틀 후에 떠날까 합니다.”

 

“행운을 비오.”

 

 

만남은 짧았다. 서신을 전하러 오는 길 추운 날씨에 질려버린 관린은 몰려오는 피로감에 하루 정도 쉬고 이틀 후에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다. 관린의 목적지는 만주였다. 만주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연합군이 일본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그 쪽에 합류하여 투쟁할 것을 벌써 몇 년 전부터 생각해두었고, 군사학교에서 만난 중국출신 학우를 통해 이미 자신의 뜻을 전해둔 터였다. 중국의 호로군. 관린은 그리 갈 생각이었다.

 

기차에서 내려서는 몰랐는데, 서신을 전달하러 오는 길에 이미 관린의 몸은 꽁꽁 얼어버렸다. 처음 느끼는 강렬한 추위에 도쿄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생각하며 관린은 걸음을 서둘렀다. 온천장에 도착하여 배정받은 동백실에 도착하여 고다쓰〔火達〕 안에 들어가니 좀 낫다. 관린은 탕에 몸을 담그기로 한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군가 탕에 있다. 별 생각 없이 몸을 담그는데 웅웅 울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행객이신가 보군요.”

 

 

별 시답잖은 말에 관린은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았다. 관린이 겪어 온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많더라도 그것을 내비치거나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예의바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라 오히려 관린에겐 편한 타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간 만났던 일본인들과 달리 그는 관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희한한 일이라고 관린은 생각한다.

 

“저도 며칠 전에 여기에 왔습니다. 여행 차 왔는데 여긴 그야 말로 눈 천지더군요.”

 

“네 그러시군요.”

 

 

별다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관린은 그러고는 웃어보였다. 그것이 허락의 의미라고 해석되었는지 그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한적한 산골마을이라 그런지 말동무라고는 게이샤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눈이라도 오지 않았다면 산행을 하기에 적합한 곳인데, 이런 눈 속에 산행을 하는 것은 보통 노련하지 않고서야 미친 짓이죠.”

 

“네 아무래도 위험해보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머무시는지?”

 

“저는 이틀 정도 머물 예정입니다.”

 

관린은 왠지 얽히고 싶지 않아 내일 바로 떠난다고 하려다가 어차피 들킬 거짓말인 것 같아 포기하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오. 괜찮으시다면 말동무를 할 수 있을 까요.”

 

“예, 만나게 된다면.”

 

“아 기쁩니다. 어휴 오래 있었더니 조금 어지럽네요. 그럼 내일 뵙죠.”

 

관린은 대답 없이 가벼이 목례만 하였다. 괜히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봤자 이틀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너무 노곤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관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탕을 나왔고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관린은 이름 모를 새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이미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다. 군사학교에서 늘 규칙적으로 생활해온 터라 늦은 아침이 생소한 관린은 어찌 이리 꿈도 안 꾸고 푹 잠이 들었는지 신기하다 생각하며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무언가를 먹기 위해 방을 나왔다. 찬 공기가 깔린 온천장의 화로 근처에 어제 본 그 자가 앉아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 이런. 하필이면. 관린은 다시 뒤돌아 들어갈까 하다가, 어차피 이틀이니까. 생각하고는 네모난 테이블로 다가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아침인가 보군요.”

 

“시계를 보지 않으셨나봅니다. 오전 10시랍니다.”

 

그렇군요. 짧게 내뱉고는 관린은 지배인을 불러 조식 메뉴를 하나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는데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역시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날씨라던가 하는. 어제는 탕의 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 눈이 커다랗고 총기가 있었다. 약간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운 느낌이 드는 큰 눈이라고 관린은 생각했다.

 

“국경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더군요. 그야말로 눈이 천지였습니다.”

 

“아 멋집니다.”

 

 

관린이 이곳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의 감상을 간단히 이야기 하자, 큰 눈을 번뜩이며 남자가 대꾸했다.

 

“네?”

 

관린은 번뜩이는 눈에 놀라 되 물었고 그에 남자가 말하였다.

 

“혹시 그 첫 문장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첫 문장이요?”

 

“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이것 말씀입니다.”

 

“어디에 쓰신다는 말씀이신지.”

 

남자가 함박웃음을 짓더니 자신은 글을 쓰는데, 다음 작품에 그 문구를 쓰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뭐 어려울 것도 없지요. 저는 소설가도 아니고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사토 시마무라입니다. 시마무라 라고 부르세요.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습니다.”

 

 

사토 시마무라? 관린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다고? 아직 이름 없는 무명의 소설가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 멍해졌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관린은 다시 그를 보았다. 관린을 보는 큰 눈이 웃고 있다. 그래 뭐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하고 관린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 저는 라이관린입니다.”

 

서둘러 가명(價名)이라도 지어 알려줬어야 하는 게 아닌 가 관린은 잠시 그런 후회를 했다. 관린의 이름이 특이하여 한 번 쯤 물어볼 법도 한데, 남자는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관린은 그의 커다랗고 형형한 눈이 왠지 모르게 이 설국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좋은 친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좋은 말동무임은 확실했다. 관린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첫 만남과는 달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쪽은 관린이었고 매우 즐겁게 들어주는 쪽이 그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좋은 말동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떠나기로 약속한 날 까지만 해도 관린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였는데, 그 날 늦은 아침을 함께 먹은 뒤로 예상과 달리 관린과 시마무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린은 늦은 아침 이후로 동백실에 머물며 책을 읽다가 바깥으로 나 있는 장지문을 열어 풍경을 구경했다. 회색빛 흐린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커다란 눈이 내려서 눈으로 인해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내려오는 커다란 눈송이 사이로 펼쳐진 산은 비현실적으로 새하얬다. 불현듯 차가운 느낌에 관린은 눈을 문질렀다. 눈송이 하나가 날아들어 관린의 속눈썹에 내려앉은 탓이다. 갑자기 주황 가로등 불빛에 따스하던 그 눈매가 떠올랐다. 특이한, 그러나 아름다운 눈매를 가진 소년. 속눈썹이 매우 길었다. 그 사람의 속눈썹에도 이렇게 눈송이들이 내려앉겠지. 금세 녹을까. 두 볼이 발그레했다. 체온이 조금 높을 것만 같다.

 

아차. 관린은 눈이 쏟아져 내리는 풍경을 보며 그를 떠올린 것에 놀랐다. 살아오는 동안 오로지 머릿속에 대일항쟁에 대한 것들만 가득했던 그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어째서 일까. 낯선 감정에 관린은 문을 닫고는 탕에 잠시 몸을 담그기로 한다.

 

이 마을 때문인가. 머리카락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탕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서신이 아니었다면 무장투쟁이라거나 대일항쟁이라거나 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 같았다. 온통 눈으로 덮힌 산, 고즈넉한 온천, 날 때부터 고요함을 안고 태어난 마을. 외부와 단절된 듯한 느낌이 오히려 평온을 주는 곳. 이내 시마무라 라는 남자와 통성명을 한 일이 떠올랐다. 그 남자야 말로 그런 외부적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이곳과는 이질적이면서도 그런 부분에서는 이곳과 어울리는 것이 기이했다. 본명을 알려준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관린은 생각을 고쳤다.

 

 

“돌아가시오! 돌아가!”

 

엄청나게 쌓인 눈을 헤집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역 근처에 도달한 관린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래고래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옷을 잔뜩 껴입은 역장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면 모르시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기차가 움직일 수 없소이다. 신호소도 모두 눈에 파묻혔소. 돌아가시오.”

 

 

역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양, 역 주변은 제설차로 어지러웠다. 시마무라와 우연히 함께 아침을 먹은 그 날 오후부터 눈이 줄기차게 퍼붓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길이 끊기고 말았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는 걸 이미 아침에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렇게 계획과 달리 폭설로 인해 관린은 그대로 발이 묶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게이샤〔藝者〕 연주나 들어보심이 어떠신지요?”

 

“게이샤요? 저는 그런 것은 좀…….”

 

 

관린이 다시 묵었던 온천장으로 돌아와 길이 끊겼으니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지배인은 설마 했는데 벌써 끊긴 것이냐며 다시 관린이 묵었던 동백실을 내주었다. 짐을 넣어놓고 좀 쉬다가 저녁때쯤 끼니를 때우러 나왔는데 지배인이 권유해온 것이다. 관린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눈으로 인해 발목이 잡힌 것도 모자라 여색(女色)을 즐기라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만약에 하룻밤이라도 치르게 되는 날에는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하룻밤은 책임감이 강하고 올곧은 성격인 관린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그런 게이샤가 아닙니다. 정말 연주만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샤미센〔三味線〕을 아주 잘 켜는 게이샤가 있습지요.”

 

“그래도…….”

 

“예 알지요. 무엇을 걱정하는지. 그 자는 남자랍니다.”

 

“네?”

 

 

게이샤에도 남자가 있던가? 관린은 무척이나 당황하였다. 그동안 도쿄에서 보았던 게이샤들은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는 매춘부와 같았기에 당연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나. 관린은 게이샤를 성(性)적으로만 생각한 스스로가 금세 부끄러워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사실 남자치고는 정말 예쁘장해서 이 산골마을에서 가장 미인인 게이샤이긴 합니다만……. 샤미센도 가장 잘 켠답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생각보다 이곳의 겨울밤은 길답니다.”

 

“예 그렇다면 청해보지요.”

 

 

관린은 조금은 혼미해진 정신으로 그 게이샤를 청하기로 하였다. 왜인지 모를 그 남자 게이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아마 아무리 남자라 해도 게이샤를 청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방에서 기다리시면 보내드리겠다는 말에 관린은 이상한 기분이 되어서는 동백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군사학교를 졸업했다고 해 봤자 관린은 아직 스물두 살 밖에 먹지 않은 청년이었고, 도쿄에서 게이샤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저녁을 먹고 목욕까지 마친 뒤 어떻게 하고 있으면 되나 싶어서 고다쓰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데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더니 남자 게이샤라는 자가 들어왔다. 관린은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게이샤를 보았다. 하얀 타비〔足袋〕가 신겨진 발이 자신의 발보다는 작아보였다. 그 위로 이어지는 수수하게 흰 실로 누빔 하듯 수가 놓인 새하얀 기모노가 마치 눈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별다른 문양이 없는 새빨간 오비〔帶〕가 단정히 뒤로 묶여 있었고, 속깃 역시 하얀색인 것을 보니 항교쿠〔半玉〕가 아닌 게이샤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좀 더 위로 하여 얼굴을 본 순간 관린은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관린이 기차에서 본 눈이 예쁜 그 소년이었다. 화장을 했지만 과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린은 알 수 있었다. 특히 어디서도 본 일이 없던 그 눈꼬리가 확실히 그 소년이었다. 소년은 관린의 헉 소리에 도리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그걸 보고 관린은 왠지 눈밭에서 토끼사냥을 할 때 보았던 토끼의 새빨간 눈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소년은 관린이 자신이 남자라서 놀라 헉 소리를 냈다고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남자이긴 하나 춤을 추고 샤미센을 연주한답니다.”

 

언제 놀랐냐는 듯 능숙하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샤미센 상자를 열어 악기를 꺼내는 모양이 한 두 번의 솜씨가 아님이 분명하여 관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곧 간진초〔勸進帳〕가 울려 퍼졌다. 도쿄에서 언젠가 학우들과 같이 가부키 극을 본 일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 때 들어본 곡이라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관린은 악기에 대해서도, 곡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 남자게이샤가 연주하는 곡이 은근하게 머릿속을 가득히 메워 와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느 새 눈까지 감은 채로 그저 샤미센이 연주되는 대로 마음을 맡겼다. 마치 새까만 밤하늘에 가득 내린 별들이, 은하수가 유유히 흐르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 별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도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러면서도 어딘가 처연하여 애처로운 그런 감정에 관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정말 엄청나다 싶은 생각에 잠겨 한참을 부유할 때 쯤 연주가 끝이 났다. 천천히 뜬 관린의 커다란 눈에 하얀 기모노에 새빨간 오비 차림인 소년이 가득 들어왔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존재는. 관린은 잠시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상하여 악기에서 고개를 들어 관린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 관린은 커다란 손을 들어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엄청납니다.”

 

 

잠시 말을 잃었다가 관린이 겨우 한 마디 꺼내어 놓았다. 그 말에 소년은 또 다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풋 웃어 보인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미성 또한 아름다워 관린은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관린은 문득 이 존재가 자신과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소년은 처음 장지문을 열고 들어선 때부터 관린을 보고 놀랐다. 고개를 들기 전까진 청회색 유카타〔浴依〕를 대충 걸쳐 입은 사이로 비치는 하얀 살결과 커다란 키에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얼굴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이라 놀랐던 것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생각하며 소년은 최선을 다해 샤미센을 연주했다. 소년은 아침에 하는 연주를 가장 좋아했다. 투명한 햇살이 소리에 와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을 사랑했다. 그래서 아침에 하는 연주에 가장 자신이 있었다. 직업이기는 하나 동물원 원숭이 보듯 자신을 보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연회에서의 연주는 정말 싫었다. 연회는 주로 밤에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밤 연주가 자연스레 싫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서 하는 밤 연주는 은하수를 거닐 듯 은근하면서도 영롱한 음색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아, 소년은 연주를 하면서도 내내 놀랐다. 자신의 눈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는 연주를 음미하는 청년. 그 길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때에는 소년의 심장도 파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나른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 청년 앞에서 소년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봤습니다. 남자게이샤는.”

 

 

관린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이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둘 사이의 적막이 그제야 끝이 났다. 소년은 버릇처럼 생긋 웃고는 말했다.

 

 

“원래 게이샤의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초창기 게이샤들은 남자였지요. 그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예인(藝人)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예인인 것이지요. 그러나 시대를 거치며 어쩐 일인지 여자 게이샤가 생겨났고,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썬 남자 게이샤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관린으로선 남자게이샤의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았는데 그 존재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럼에도 그 게이샤가 여자게이샤의 차림을 하고 화장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여자보다 훨씬 잘 어울려 아름답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사실 그런 것들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가장 놀라운 건 자기 자신이었다. 군사학교에서 수많은 남성들과 부대껴온 관린이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남성인 이 소년을 보고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저릿 하며 야릇한 느낌이 드는 것이, 흡사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관린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런 복장을 하고 계신지.”

 

 

대뜸 말을 뱉어놓고는 관린도 스스로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덧붙이자 소년이 생긋 웃으며 그런다. 제가 예의를 다 하지 못하였네요.

 

“유코입니다.”

 

“아. 저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됐건 저의 관객님이시니까요.”

 

“라이관린입니다. 제 이름.”

 

“아.”

 

 

소년은 왠지 단호하게 말하는 낮은 음성이 좋다고 생각한다. 관린은 그의 이름을 듣고는 또 한 번 왜 여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묻지 않기로 한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젠가 물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끊겨서 나갈 수 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일정이 뒤로 밀렸고 하는 수없이 오늘 밤은 꼼짝없이 다시 이 온천장에 묵어야 했지요. 그래서 청했습니다. 샤미센 연주.”

 

“연주가 좋으셨던 것 같아 다행이네요.”

 

“이 마을에서 샤미센을 가장 잘 연주한다고 하더군요.”

 

 

소년은 얼굴을 붉히고는, ‘가장’이라니 그건 장담할 수 없어요. 했다. 왜냐고 묻는 관린에게 자신은 아침에 연주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밤이 연주와는 편차가 있다고 한다.

 

 

“그럼 내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아침의 샤미센이 듣고 싶은데요.”

 

 

또 다시 단호한 목소리의 관린의 얼굴이 너무 곧아서 유코는 차마 오늘 밤의 연주는 다른 날들과 달리 아주 훌륭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럼 아침에 다시 오도록 하지요.”

 

 

관린은 왠지 유코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유코와 오래도록 밤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버릇처럼 생긋 웃지만 그건 정말 직업상의 버릇인 것 같았고, 어딘지 처연한 그 얼굴이, 그 연주가, 어떠한 연유로 그런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남성인데 왜 여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런 복장을 하고 연주를 하는 건지, 춤도 잘 추는지, 노래하는 목소리는 어떤지, 어쩌다 이런 산골에서 게이샤를 하고 있는 건지. 궁금증이 퐁퐁 솟아올라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관린이 그렇게 생각들에 잠겨 있는 동안 유코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멍하니 나가는 유코의 뒷모습, 단단히 매듭지어진 새빨간 오비를 보며, 관린은 붙잡아 두지 않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유코입니다.”

 

“들어오세요.”

 

 

관린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유코를 기다렸다. 사실 관린은 잠들지 못하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자꾸만 귀에 쿵쿵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몸에 문제가 있나, 동상에 걸린 건가, 생각해보다가 아무래도 유코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한 시라도 서둘러 만주에 가야하는데 기차가 오래도록 끊겨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고 서야 관린은 아침에 샤미센 연주를 듣고 싶다고 했던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와 놓고선 고작 남자게이샤 하나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럼에도 마음 한 켠 에선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기 전에 유코를 불러두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아마 더 빨리 자각했다면 유코를 아침에 부르지 못했으리라. 그랬다면 다시는 유코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들어선 유코의 모습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먹색 기모노를 입었으나 오비를 매진 않았다. 그저 남자의 행색이었다. 가발을 쓰지 않아 짧고 어두운 고동색의 본연의 머리색, 화장을 하지 않아 붉은 기가 도는 살색, 입술은 윤이 났으나 붉은 색을 칠하지 않은 탓에 짙은 분홍빛 제 입술색이었다. 그럼에도 묘한 눈매는 화장여부를 떠나 여전히 신비롭다. 기차에서 본 그런 모습이다. 코가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을 하지 않으니 조금은 다부진 코다. 멋지다고 관린은 생각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좋다고도 생각한다. 화장을 한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가면을 쓴 것과 같다면, 화장을 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본연의 아름다움과 처연함이 드러나 청초했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눈은 항상 물을 머금은 것만 같은데, 화장을 하지 않으니 그런 눈이 더욱 부각되는 것만 같았다.

 

유코는 어마 무시한 눈길을 뚫고는 아침나절부터 관린이 있는 동백실로 향했다. 유코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긴 매 한 가지였다. 일본으로 건너온 지 벌써 9년. 춤을 배우고 샤미센을 켜며 지낸 세월 역시 딱 9년 이었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예인으로서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세월이었다. 비록 여자게이샤들처럼 꾸미고 다니긴 하였으나 스스로는 완전한 남성이라고 생각하여왔다. 예쁘장한 얼굴이 이 마을 최고 미인이라 칭송받는 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것은 화장을 한, 타인의 앞에서 가면을 쓴 ‘유코’라는 게이샤 일뿐, 온전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것도 남자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유코는 간밤에 덜덜 떨면서도 내심 아침의 샤미센을 들려줄 일에 설레 이래저래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코는 부러 화장을 하지 않았다. 연회복이 아닌 평상시 자신이 입고 지내는 옷을 입었다. 자신은 여성이 아니기도 했고, 상대가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도 남자고 그도 남자야. 같은 남자에게 설레다니. 내가 잠시 여자처럼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 유코는 그렇게 되뇌며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미센 상자를 들고 가는 그 길은 여전히 두근거려 가는 길 내내 유코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바깥으로 난 장지문을 연 채로 유코는 눈 덮인 산을 보며 능숙하게 샤미센을 무릎에 올렸다. 관린은 그런 유코의 옆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마찬가지로 눈 덮힌 산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유코의 모습을 본다. 햇살이 제법 따사로운 것이 눈이 곧 모두 다 녹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고개를 돌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설산을 보고 있자니 곧 샤미센의 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오는 곡조는 관린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쏟아지는 아침의 햇살과 함께 강렬하게 파고들어 관린의 온 몸을 따뜻하게 채우는 것 같았다. 곡 자체는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지금의 관린처럼 텅 빈 벌판에 가득 내린 새하얀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 그런데 연주가 힘차서 인지, 그러면서도 시원한 겨울의 바람이 가슴을 가득 메우는 것과 같은 느낌에 관린은 저도 모르게 또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야코도리[都鳥]에요. 새에 빗대어 만남을 약속하는 남녀 간의 정을 노래한 것이죠.”

 

 

유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린은 고개를 돌려 유코를 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기다란 속눈썹이 또렷하다. 커다란 눈이 맑다. 눈동자로 비치는 반짝이는 설산이 아름답다.

 

 

“오늘은 점심 연회에 가야 해서 거기 갈 준비를 해야 해요. 이만 가볼게요.”

 

 

유코는 샤미센을 상자에 넣으며 그랬다. 벌떡 일어나 샤미센 상자를 든 유코에게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어 붙잡았다.

 

 

“저.”

 

“네?”

 

“바깥이 많이 추운데 잠깐 몸을 좀 녹이고 가는 게 어떠신지.”

 

관린은 유코가 들어섰을 때부터 새빨갛게 얼은 그의 귀와 코가 신경이 쓰였다. 손끝도 새빨간 것이 얼어 있어 샤미센을 바로 켜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멋들어지게 곡조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렇지만 마음이 쓰이기는 여전했다. 잠시라도 고타츠에 몸을 녹였으면 싶었다.

 

 

“아.”

 

 

유코는 고민했다. 아직 시간은 좀 남아있었다. 워낙에 서둘러 준비하고 아침부터 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샤미센을 연주하는 동안에도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어 힘들었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보냈다가는 그 두근거리는 소리에 자신이 파묻힐 것만 같았다. 어쩌지. 유코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 관린은 고타츠를 살짝 들어 이쪽으로. 하고 말하였다. 조금만. 조금은 괜찮을 거야. 유코는 샤미센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고타츠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느낌이 금세 포근하게 유코를 감싸 안았다. 찬 기운에 관린도 고타츠에 발을 넣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이 있었다. 관린이 불편한 다리를 조금 뻗었다.

 

 

“아.” / “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다다미로 스몄다.

둘의 발이 맞닿은 탓이다. 유코는 놀라서는 얼른 발을 웅크렸고, 관린도 마찬가지고 다시 다리를 접었다. 관린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코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에 있을 때보다 빨개진 귀는 이젠 차갑지 않고 뜨거웠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둘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인사를 주고받았다. 관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코가 보고 싶었다. 살짝 고개 숙인 유코의 속눈썹을 보았다. 눈꼬리가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싶다. 유코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게 말하고 다시금 샤미센 가방을 집어든 유코의 손목이 별안간 붙잡혔다.

 

 

“오늘 밤에도 와줄 수 있나요?”

 

“네?”

 

“춤을 보고 싶어요.”

 

“춤. 알겠습니다. 저녁에 연회가 있어요. 아마 끝나고 오면 자정에 가까울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관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코는 알겠어요. 그럼 정말 밤에… 라며 버릇처럼 생긋 웃고는 바깥을 향해 열어 둔 장지문 밖으로 게다를 신고는 가버렸다. 관린은 눈이 녹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오후가 되자 언제 해가 났냐는 듯 날이 다시 꾸물꾸물 해졌다. 잠시 근처를 거닐던 관린은 시마무라를 만났다. 발이 묶여 어떡하냐며 일정에 차질이 없냐는 시마무라의 예의상의 물음에 관린은 무장투쟁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대충 둘러대다가 어느 새 유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봤는데 말이죠. 정말 신기하더군요.”

 

“이 마을에선 아주 유명한 게이샤 같던걸요. 여러모로.”

 

“남자라서 그런 것인가요?”

 

“그 외에도 유명할 만한 일이야 많지만, 유코에게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 샤미센 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샤미센 연주를 들었나요?”

 

관린은 시마무라의 물음에 매우 구체적으로 자신의 느낌을 설명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느니, 강렬하게 파고드는 느낌이었다느니, 하는 것들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나서야 관린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이렇게 까지 자세히 설명할 만한 일이었던 것인가. 시마무라는 매우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관린은 차라리 이 치 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밤 늦게 찾아온 유코의 몸에서는 술냄새가 강하게 났다. 춤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고 말하며 유코는 휘청거렸다. 관린은 저도 모르게 쓰러질 뻔한 유코를 붙잡고는 조심하라고 이러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하며 고다쓰 앞에 앉혔다.

 

 

“정말 죄송해요. 그 얘기를 하러왔어요.”

 

 

그러고 다시 일어나려는 유코에게 관린은 좀 더 있다가 술이 좀 깨면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고는 하인을 불러 시원한 물을 가져오게 했다.

 

 

“라이관린상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관린은 그냥 ‘관린’이라고 부르세요, 했다. 그럼 관린상이라고 부를 게요. 유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연회 이야기를 한다. 아무래도 제가 남자라 그런지, 여자 게이샤들한테 주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술을 줘요. 느릿느릿 고다쓰에 발을 넣고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유코는 말한다. 다른 게이샤들의 몫까지 제가 마셔주는 일도 다반사죠. 저는 술이 쎈 편이지만 그렇게 마셔대면 저로서도 별 수 없답니다. 오늘처럼 춤도 못 추게 되는 거죠. 그렇게 말하고 눈을 파르르 감는 유코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또륵 흘러내리는 것을 본 관린은 손을 뻗어 닦아주려다가 이내 다시 손을 말아 쥔다.

 

이내 하인이 가져온 물을 내밀자 유코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다시금 춤을 못 춰드려 죄송하다고 한다.

 

“왜 춤을 추게 된 거에요?”

 

 

관린은 어제부터 궁금해진 질문을 슬며시 던졌다. 유코는 어. 하다가 이내 웃어보였는데, 그 웃음이 그동안의 생긋 웃던 버릇과 같은 그런 웃음이 아니라 어디가 매우 부족하고도 서글픈 웃음이어서 관린은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짐작해보았다.

 

 

“저 일본인이 아니에요.”

 

유코는 대뜸 그런 말을 했다. 관린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그런 관린을 보고는 유코는 어딘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조선인이에요. 조선아세요? 알죠, 알다마다요 하는 관린에게 유코는 자신에 대해 천천히 동화책을 읽어주듯 이야기 했다.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미성에, 관린은 유코의 등어리를 토닥여 주고 싶은 것을 꾸욱 참았다. 또한 그런 짓거리를 벌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깊고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코는 원래 조선 사람이다. 조선에서 태어났고 조선에서 자랐다. 일본에 오게 된 것은 유코가 겨우 아홉살 때의 일인데, 그 때만 해도 일본이 조선에서 수탈을 공연하게 하던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저기서 전쟁 중이었고 더 큰 전쟁을 준비하면서 위안소의 운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위안소의 시험 운행을 위해 한국에서 암암리에 소녀를 데려오기로 하였다. 예쁘장하게 생겨 종종 여자아이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 오해로 일본에까지 끌려오게 될 줄은 몰랐다. 엄마를 따라 나온 장에서 길을 잃었다가 납치되어지다 시피 하여 억지로 배에 태워졌던 그 날, 유코는 울다가 실신하였다. 일본에 데려오고 나서야 유코가 남자인 걸 알게 된 일본 군인들은 유코를 하인으로 팔기로 했다. 그 때 장에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어머니인 춤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 때 춤 선생님이 절 사오셨어요. 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전 어느 집의 하인으로 살고 있거나 전쟁에 나가야 했겠죠.”

 

 

그렇게 말하는 유코의 눈이 너무 아름답게 반짝여서, 더욱더 처연해보였다. 그래서 춤을 배우게 되었군요. 관린의 말에 유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샤미센도 배웠죠. 처음엔 게이샤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가끔 항교쿠들과 함께 연회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지만요.”

 

“이런 얘길… 나에게 해도 괜찮은 건가요?”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은 어쨌거나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하는 중이었고 독립군들이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위안소라니.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본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나에게 스스럼없이 해도 되는 걸까? 원래 모두에게 이렇게 하나?

 

유코는 그 질문에 놀랐다. 술이 조금 깨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이 얘기는 춤선생님과 그 아들밖에 모르는 이야기다. 한 번도 남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 왜 술술 털어놓았지. 술김에 그런 건가. 아니면…. 갑작스레 아침나절 고타츠 안에서 발이 맞닿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원래도 달아올랐던 볼이 순식간에 볼이 더욱 뜨거워졌다. 볼을 식히려 자신의 손을 대었지만 크게 소용은 없었다. 볼에서 손을 떼는 순간 시원한 느낌이 볼을 타고 온몸을 돌았다.

 

관린의 큰 두 손이 유코의 양 볼을 가득 쥐었다. 놀란 눈의 유코를 보고 관린은 도리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미안합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말을 흐리며 관린은 사과했다.

 

 

“제 손이 찬 편이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러면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 관린이 귀엽다고 유코는 생각했다. 정말 시원한 손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지.

 

 

“처음으로 얘기한 거에요. 그러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유코의 말에 관린 역시 어쩐 일인지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관린 역시 유코를 기다리는 내내 고타츠 안에서 맞닿은 발에 대해 떠올렸다. 자꾸만 그 장면이 떠올라서 관린은 하루 종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멎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관린에게 이런 감정은 태어나 처음 겪는 것이어서 조금 버겁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머리와는 달리 자꾸만 행동과 말이 먼저 나가서 이런 것이 본능인가 하고 관린은 혼자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에게 있어 비밀이란 독립운동이라던가 항일투쟁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누군가 자기 자신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은 적은 처음이다. 저도 마찬가지였다.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비밀이라는 말에 소년에게 제가 어떠한 의미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관린은 속으로만 삼켰던, 만난 순간부터, 아니 남자 게이샤라는 사람이 소년임을 알기 전부터 해왔던 질문을 내어 놓기로 한다.

 

 

“그럼 게이샤는 왜…”

 

 

줄곧 관린은 속으로만 물었다. 남자 게이샤의 존재를 안 뒤로는 왜 된 걸까 싶어 아직 정체모를, 만나지도 않은 남자에게 질문을 했다. 기차에서의 소년이 그 남자 게이샤란 걸 알았을 때는, 어딘지 모를 처연한 연주를 듣고 난 뒤로는, 계속 묻고 있었다. 왜 인가요. 어째서 게이샤인가요. 비틀거리는 몸을 하고는 자신을 찾은 오늘 밤에도 관린은 대뜸 물을 뻔 했다. 하지만 만난 지 꼬박 이틀째인 자신이 해도 되는 질문 일까,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꺼내어 놓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해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코의 눈동자가, 비밀이라는 말이 용기를 주었다.

 

유코는 질문을 되새겨본다. 왜 게이샤가 되었냐는 질문이다. 이건 오히려 더 쉽다. 마을 사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여행객들도 다 알고 있는 그런 이유다. 유코는 그것이 조금은 신파적인 느낌이라 스스로 말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으므로 직접 묻는 이들에게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해왔다. 그런데 왜 이 분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이유를 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상상하고 싶은 쪽으로 오해하거나 떠들고 다녔다. 유코는 본래 남의 눈을 크게 의식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나서서 그런 소문들에 대해 해명을 하거나 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분 만큼은… 이 분 만큼은….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말씀드리면 될까. 유코는 말을 골랐다.

 

 

“춤 선생님께 아들이 있어요.”

 

 

그 말까지 듣고 관린은 바로 기차 안 누런 안색의 그를 떠올렸다. 더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설마 그와 그런 사이인가. 앞서 나가는 생각을 붙잡으려 애를 써야했다. 그랬음에도 자꾸 쳐지는 입꼬리를 붙잡기란 역부족이었다.

 

 

“저에게 춤 선생님은 은인 같은 분이세요. 결국 남자의 몸으로 어쩌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게 되었지만 이 역시 저의 선택이었죠. 저는 춤이 좋았고, 샤미센 연주가 좋았고, 더 배우고 싶었어요. 현실적으로 선생님 수하에 향교쿠가 되는 편이 그것이 가능토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제 쪽은 쳐다보지 않고 덤덤히 말을 잇는 유코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관린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져 버렸다.

 

 

“저는 그 걸로도 만족했어요. 향교쿠는 연회에 많이 불려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춤과 노래를 계속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게이샤가 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선생님 아들의 병원비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헌신적인 눈빛이었구나. 관린은 기차 안에서 유코의 눈빛에 대한 이유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슬퍼지는 길을 막을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눈앞에 이 아름다운 사람은 한 남자를 위해 게이샤가 되었다.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일지는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아서 관린은 금세 우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오해를 하더라구요.”

 

 

어느 새 고개를 푹 숙인 관린을 곁눈질로 본 요코는 서둘러 말을 붙였다.

 

 

“제가 남자여도 춤 선생님의 아들을 짝사랑해서 병원비를 마련하는 거네 어쩌네 말이 많아요.”

 

 

그 말에 관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요코를 보았다가 생긋 웃으며 자신을 보는 요코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요코의 아름다운 눈매가, 그 눈 안의 눈동자가 오롯이 관린을 담고 있었다. 관린은 자신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 것 같다고 느꼈다.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관린을 뒤덮은 우울감이 말끔히 걷혀지고 아까의 그 용기가 다시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관린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요코는 마음을 놓고는 편히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이 아홉살 때의 일이에요. 그리고 춤 선생님에게는 한 살 위인 남자아이가 있었죠. 춤 선생님께서 절 데려오신 것도 자신의 아들이 생각나서였대요. 처음 왔을 때 전 일본어를 쓸 줄은커녕 말할 줄도 몰랐어요. 선생님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아 집에만 있어서 친구가 많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가 제게 일본어를 알려주었지요. 전 평생을 빚진 거예요.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드님께요. 그런데 제 가장 친한 벗이 죽을병에 걸린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병원비를 벌어다 주는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게이샤가 되었어요. 그 편이 연회에 나가서 돈을 벌기 좋으니까요.”

 

 

긴 이야기를 마치도록 관린은 아무런 말도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차에서 본 건 병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나 보군,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타깝다. 그렇게 한다고 그가 살아날까. 낯빛으로 보건데 왠지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유코의 노력이 헛일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잘 털고 일어난다면 유코도 더 이상은 매여 있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관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코가 매여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러길 바라는지 알아버린 탓이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 눈이, 저 처연한 사람이 저랑 함께이면 좋겠다는 바람. 그런 바람이 담긴 것이다. 관린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목표가 있다. 여기서 이렇게 여자도 아닌 남자에 홀려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유코를 얼른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코는 말없이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일어서는 모습에 흐트러짐이 없다. 어느새 술이 깬 모양이었다. 막상 유코가 간다고 하자 관린은 벌써 마음이 텅 비는 느낌이 들어버렸다. 유코는 관린의 말간 얼굴을 보며 자신이 걱정한 것처럼 오해한 것 같진 않지만 무슨 일에서인지 내적으로 매우 심란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만큼 혼자 있고 싶은 순간도 없다. 그래서 유코는 관린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같았더라면 관린은 유코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린은 그럴 수가 없었다. 술을 핑계로 붙잡아 두기엔 이미 유코가 말짱해져버렸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유코의 존재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제 자신이 낯설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이 유코를 붙잡아둘 관린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는 것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관린은 그저 고개 숙인 인사로 유코의 배웅을 대신하였다. 유코는 별 말이 없이 실내로 이어지는 장지문을 열고는 하얀 타비를 신은 발로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관린은 왠지 유코의 하얀 타비가 하얀 눈길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코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단장을 했다. 연회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연회가 없는 날이었다. 평소였으면 지겨운 연회복을 입지도, 연하게나마 화장을 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이른 아침부터 단장을 마친 유코는 자신의 다락방에 난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고요한 마을의 풍경이 눈으로 가득했다. 이 정도 눈이면 공원은 아예 파묻혔겠군. 유코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오고도 지겹도록 내리는 눈이 평소와는 달리 유코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당분간 기차는 전혀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히로시가 잠시 걱정되었지만 얼마 전 병원에 다녀왔으니 얼마간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내 히로시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자리엔 아득한 목소리가 들어찼다.

 

‘기차가 끊겨서 나갈 수 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청했습니다. 샤미센 연주.’

 

관린의 목소리. 낮고 차분한 목소리라고 유코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날은 조금 들뜬 목소리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유코는 눈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다 일본으로 오자마자 끌려오게 된 이곳은 일찍 겨울이 왔고 오래도록 눈이 가득한 마을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인가? 눈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눈을 싫어했다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았다. 눈이 많이 오면 거동이 불편하다. 특히 히로시를 돌봐야 하는 날은 더 그랬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돌연 눈이 좋아졌다. 눈 덕분에 그를 만났고, 눈 덕분에 그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유코는 난생 처음으로 눈이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 춤이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은 그였다. 그런데 아직 춤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춤을 보여줄 거다. 그게 핑계라면 핑계였다. 유코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같은 성(性)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핑계를 대서라도 그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 어제 자신의 볼을 부여잡았던 그 손길이 좋은 것을 보면 자신은 그이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춤 선생님의 아들인 히로시와도 오랜 시간을 보낸 유코였다. 그러나 히로시에게 드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유코는 그것이 단지 우정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었다. 히로시를 떠올릴수록 관린에 대한 제 감정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전혀 헷갈리지 않았다.

 

 

“유코입니다.”

 

 

관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새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자신의 다짐과, 유코의 타비를 신은 발, 그 신비로운 눈매가 자꾸만 생각이 나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탓에 환청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코입니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관린은 환청이 들리니, 환각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네 들어오세요, 대답했다. 드르륵 하고 바깥으로 난 장지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눈송이들을 배경으로 한 유코가 나타났다. 연분홍 기모노에 하얀 오비를 매고 연한 화장을 했다. 가발까지 쓴 모양새가 영락없이 연회라도 가려는 모습이다. 현실인가, 정말 유코인가 싶어 관린은 주춤주춤 일어나 손을 뻗었다. 관린의 기다란 손가락이 유코의 볼에 닿았다. 아 진짜네. 관린은 또 다시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유코가 버릇처럼 생긋 웃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전의 웃음들과는 달랐다. 관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연회가 있나 보군요.”

 

“아닙니다. 어제 보여드리지 못한 춤을 보여드리러 왔습니다.”

 

 

유코는 이내 들어와 정말로 춤만 보여주고 곧 가버릴 사람처럼 품에서 벚꽃이 그려진 부채를 꺼내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린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에 몽롱한 기분으로 유코의 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게이샤의 춤이었다. 동작들이 모두 크고 화려하다기 보다는 작으며 매우 간결하고 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염함이 느껴지는 동작들에 관린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런 동작들 하나하나가 유코의 특이한 눈매와 특유의 처연함과 어우러져 관린을 매료시켰다. 이런 춤을 연회에서 항상 볼 수 있다니. 춤을 모르는 관린이었음에도 왜 유코가 춤을 배우고 싶었는지, 사람들이 왜 돈을 내고 연회를 열어 그의 춤을 즐기는 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음악이 없는데도 동작만으로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춤이다. 음악이 있었다면 아마 더욱 몰입했을 일이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춤을 추길 마치고 유코는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음에도 관린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가 그제서야 박수를 치며 겨우 말을 꺼내놓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유코는 관린과 함께 아침도 먹고 눈 속을 거닐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춤을 끝내고 나니 관린을 보러 올 수 있었던 핑계는 이것뿐이고 이제는 더 이상 핑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일어섰다. 오늘도 보았으니 이제 되었다는 반쯤은 체념한 마음이었다.

 

 

“식사…하셨나요?”

 

 

관린이 갑자기 물어왔다. 아직 이시면 함께 아침식사를 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좋은 춤을 보여주셨는데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관린이 말했다. 관린은 이대로 유코를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만을 위해 춤을 추는 유코를 보며 관린은 자신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같은 남자에 대해 연정을 품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의 대상이었지 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관린은 그런 면에서는 유했다. 문제는 자신의 항일투쟁이었다. 어젯밤 들은 바로 유코는 춤 선생님 아들의 병원비를 벌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은 만주로 떠나야 하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유코와 결국은 헤어져야 한다.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이다. 춤이 끝남과 동시에 관린의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들이 끊어졌다. 어차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무시하진 말기로, 일단 여기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유코와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 좋아요.”

 

 

유코는 관린이 미소와 함께 제안한 식사자리가 너무나 좋았다. 미소 짓는 얼굴도 정말 좋았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좋아서 왜 일까라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는 걸었다. 커다란 눈송이들이 고요하게 천천히 내려와 여기저기 쌓였다. 유코는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앞서 걸었다. 앞서 걷는 유코의 뒤로 단단히 네모나게 묶인 흰 오비가 정갈했다. 낮은 처마들 끝에 커다란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길을 지나자 길은 점점 산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에요!

 

소리를 따라 관린이 시선을 옮긴 곳에는 삼나무 숲이 있었다. 눈을 옴팡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의 기다란 삼나무들이 가운데 길을 두고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엄청나죠?”

 

“정말 커다랗네요.”

 

 

도쿄 시내만 보다가 이런 숲을 보니 관린은 정말 이곳이 다른 세계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눈이 이토록 많이 오는 곳이라니. 대만을 생각해보면 여긴 정말 다른 세계였다. 여전히 눈은 펑펑 내렸다. 둘은 아무런 말이 없이 숲을 거닐었다. 뽀독뽀독 눈 밟는 소리만이 고요한 숲을 가득히 메웠다. 처음엔 길을 안내하느라 유코가 앞서 걸었는데, 숲에 도착하고 나자 관린이 긴 다리를 성큼 움직여 요코의 옆에 섰다. 유코는 갑자기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저 함께 옆에 선 것뿐인데도 유코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어려워서 더욱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앞서나갈 수 있는 걸음인데도 관린은 줄곧 유코의 옆에 자리했다. 유코의 보폭에 맞춘 걸음, 재촉하지 않고 부드럽게 함께 하는 그 걸음에 유코는 다정함을 느껴 볼이 발그레해졌다.

쏟아지는 눈 사이로 눈 덮힌 산이 보였다. 공기가 맑다 못해 지나치게 시리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길이 한 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좀 더 천천히 걸어서 영영 유코와 함께 걷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관린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옆의 유코를 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 중 커다란 녀석들 몇이 그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길다란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금 사그라드나 싶으면 또 다른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관린이 우뚝 멈춰 섰다. 유코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관린은 아무런 말없이 유코를 마주보고 섰다. 유코는 관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일까 싶어 보는 유코의 속눈썹 위로 관린의 손가락이 조금은 느릿하게 부드럽게 지나갔다.

 

 

“눈송이가 내려앉았습니다.”

 

 

관린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함 속에 울려 퍼졌다. 유코는 어쩐 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관린의 발이 자신의 발과 마주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둘은 우두커니 삼나무 숲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관린의 발이 어느 새 자신의 옆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유코는 고개를 들고 다시 걸었다.

 

그 날 이후 유코는 당연한 듯 관린을 만나러 왔고 관린은 당연한 듯 유코를 기다렸다. 보통 유코는 관린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와서 함께 점심과 저녁을 먹었고, 연회가 있는 날은 연회 가기 전에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연회를 갔다 와서 또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둘은 별다른 말이 없이 함께 장지문을 열어 바깥 풍광을 보기도 하고, 가끔은 함께 샤미센을 켜기도 했다. 관린은 유코에게 배워 발목을 들고 현을 퉁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로 유코가 연주하고 관린은 감상을 했다. 그래서 유코의 샤미센 상자는 항상 관린이 있는 동백실에 있게 되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게 더 좋아요.”

 

 

관린의 그 말에 유코는 특별히 연회가 없는 날이면 부러 화장을 하지 않았다. 옷도 그저 자신답게 입었다. 가끔은 관린과 비슷한 옷을 입은 날도 있어 서로 보고 같은 옷 같다며 웃는 날도 생겼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둘 사이에 대화도 쌓여갔다. 둘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관린은 언제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그것은 유코도 마찬가지였다.

 

 

“궁금해요. 여기서 흔한 이름은 아니니까요.”

 

 

유코는 관린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왔다. 화로에 담긴 불씨를 바라보던 관린은 목소리에 눈을 돌려 유코를 보고는 대답했다.

 

 

“장마에요.”

 

“장마요?”

 

“네. ‘쏟아지는 폭우 속에 갓에 의지하다’ 라는 의미에요.”

 

“헤에. 어딘가 멋진 느낌인데요? 그런데 왜 하필 비일까요?”

 

 

당신의 새하얀 얼굴도, 손도, 투명한 눈빛도 눈을 더 닮았는데. 유코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관린이 하얀 손을 들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일종의 습관인 듯 싶다고 유코는 생각한다.

 

 

“내가 있던 나라에서는 장마에 좋은 의미가 있어요.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적셔지듯 사랑을 흠뻑 받는다는 의미가 있죠.”

 

 

관린은 부러 느릿느릿 말했다. 유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름다운 눈. 눈에 은하수를 박아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해도 좋을 텐데.

 

“아. 사랑.”

 

 

낮은 듯한 미성이 듣기 좋았다. 사랑 두 글자에 관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을 뱉은 유코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사랑. 관린을 보았다. 하얀 얼굴, 투명한 피부가 자신 보다 더 어린 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 싶다. 손을 대면 스르르 녹아내릴 눈처럼 너무 고와서 유코는 도저히 그이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똑하고도 반듯한 콧날과 커다란 눈이 누가 봐도 미남이라 할만 했다. 누구든 그를 보고는 사랑에 빠지겠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그를 담뿍 사랑해 줄 여인을 그려보며 유코는 슬퍼졌다. 나도 여인이었으면.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여인이었다면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저를 구해준 춤 선생과, 그의 아들 히로시와, 저당 잡힌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면 여인이 아니길 다행이지 싶었다. 내가 아니라도 저이를 사랑해줄 사람은 많겠지. 수려한 관린의 외모를 접한 첫 순간부터 유코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름의 의미를 안 순간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관린을 향할 것이라는 생각에 어둠속으로 빨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유코도 말해줘요.”

 

 

관린의 낮은 음성이 심연으로 가라앉던 유코의 마음을 건져 올렸다. 조금은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반짝이던 두 눈이 처연해져서.

 

“뭘요?”

 

“유코 이름의 의미요.”

 

 

단지 처연해 보여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언젠가 올 것 같았던 물어볼 기회가 왔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관린은 정말 궁금했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이 매일매일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발이 묶인 이방인이었을 뿐인데도 관린은 유코가 자꾸 궁금해졌다. 적극적인, 생기가 늘 넘치는, 그러면서도, 가부키화장을 하고 샤미센을 연주할 때면 처연한 그 눈빛이 너무 슬프게 아름다워서 어떤 모습이 더 있는지, 어떤 모습이 유코인지 모르겠어서 자꾸만 궁금해졌다.

 

아.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유코가 살풋 웃더니 다시 관린을 보았다. 그저 바라본 것뿐인데도 관린은 어쩐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별로 뜻이 있는 이름은 아니에요. 사실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도 눈이 엄청 많이 왔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선생님이 제 이름을 유키라고 지어줬답니다. 그런데 유키는 남자아이 이름으로도 쓰이니까 안 어울린다는 거에요. 무조건 마지막이 子로 끝나야 한다지 뭐에요. 웃기지 않나요? 난 남자인데 말이죠. 그런데 유키코는 또 부르기가 성가시다며 유코가 되어버렸어요.”

 

마치 남의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듯, 캬캭 웃으며 말하는 유코가 관린은 왠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럼 눈 인거네요. 그 의미는.”

 

 

관린의 느릿느릿한 말에 남 일처럼 캬캭 웃던 유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가요? 하고 묻는다.

 

 

“눈이라….”

 

 

유코의 동그란 눈에 촛불이 가득 비추었다.

 

 

“사실 지금까진 제 이름이 썩 맘에 들지 않았는데 눈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드는 걸요?”

 

“왜요? 눈을 좋아하나요?”

 

“눈도 좋지만, 우리 둘 다 날씨와 관련된 이름이라서요.”

 

 

그렇게 말하고 관린을 한 번 쳐다본 유코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부끄러워진 탓이다. 창 밖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가끔 눈과 비가 함께 오는 때가 있죠. 이곳에도요.”

 

 

창밖을 향해 돌아선 유코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말이 없다. 관린은 비와 눈이 함께 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비와 눈이 함께 온다고? 돌아선 채 창밖을 응시하는 유코의 뒷모습을 보면서, 창 밖에 비친 유코의 얼굴을 보면서, 섞여 내린다는 눈과 비처럼 자신과 유코의 몸이 엉키는 상상을 했다.

 

눈에서 시선을 옮겨 창에 비추인 관린을 보며 유코는 그렇게 가끔이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비와 눈이 함께 오던 날의 정경이 떠올랐다. 그런 날이면 늘 눈은 쌓이지 못하고 비에 삼켜져 결국엔 빗물이 되어 흘렀다. 눈은 자신(自身)을 잃었다. 관린과 함께하는 그런 날들에 내가 관린에 녹아들어 없어진다면? 그래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정말 내가 사라진대도 가끔이라도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떤 날에는 유코의 다락을 가본 일이 있었다. 다락에서 보이는 바깥 풍광이 참 좋았다.

 

 

“그 날 와타나베상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만났군요. 저는 항상 그 분이 궁금했습니다.”

 

“사실 처음이 아닙니다. 여기 오던 날 기차에서도 그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관린은 아침에는 주로 시마무라와 식사를 하였는데, 어쩐지 시마무라에게 늘 유코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유코의 다락을 간 날 관린은 춤 선생의 아들이라는 와타나베 히로시를 만났고, 그 이야기를 시마무라에게 하던 참이었다. 히로시를 만났을 때 관린은 깜작 놀랐다. 유코는 춤 선생의 집에 살기 때문에 당연히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항상 아파서 누워만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실제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의외로 히로시는 직접 나와 관린에게 인사했다.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웃는 낯이어서 그런지 병세가 많이 사그라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는 헛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헛일이요?”

 

“네. 유코상이 와타나베상을 위해 게이샤가 된 일 말씀입니다.”

 

 

헛일. 관린은 그것이 헛일이 되지 않길 바라는 쪽이었다.

 

 

“그 사람 낯빛이 정말 좋지 않아서 그렇게 지극정성을 들이더라도….”

 

 

시마무라는 더 이상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러나 잇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말에 관린은 마음속으로 제발 좋아지길 기도하며 유코의 맑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 날 유코의 다락으로 올라가기 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히로시가 자신에게 한 말이 있었다. 유코를 데려가 달라고. 자신이 죽고 나면 여기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을 아이라고. 아니 어쩌면 이미 예전부터 여기를 떠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제 유코를 데려가서 남자로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히로시는 유코에 대해 사랑이 가득했지만 그것은 연인간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는 유코를 친아우처럼 여겼다. 자신의 어머니는 유코를 정말 여인처럼 생각한다며 여기 있다간 유코가 몸까지 팔게 될까 두렵다고 히로시는 털어놓았다. 예인(藝人)이라 했다. 자신을 그렇게 칭했다. 관린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유코가 몸을 판다니. 다른 남자 앞에서 새빨간 오비를 풀어내리는 유코가 떠올라 관린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유코는 자신의 어머니를 은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 어머니가 원한다면 그런 일까지 할지도 모른다고 히로시는 걱정했다. 게다가 이미 마을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 남자들도 꽤 있다고 히로시가 말해주었다.

 

 

“제발 데려가주세요. 부탁입니다. 난 알 수 있어요. 유코를 보는 당신의 눈빛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로시는 그렇게 말했다. 유코가 차를 내어올 즈음 히로시는 잘 부탁드린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날 관린의 마음속에 조금씩 그런 생각이 스며들었다. 유코만 괜찮다면 유코를 조선으로 도망시키자고. 자신도 항일투쟁이 끝나면 조선으로 가겠다고. 조선에서 남은 생을 유코와 함께 하자고.

 

 

 

 

 

조선. 유코를 조선으로 도망시킬 수 있을까. 관린은 유코가 조선에 가면 혼자 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관린은 유코에게 짐짓 밝은 목소리로 조선말을 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라 한글을 다 익히지 못해서 말은 할 줄 알아도 쓸 줄은 몰라요.”

 

 

유코의 얼굴이 홍조로 붉어졌다.

 

 

“근데 두 단어는 알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관린의 크고 흰 손을 잡아 손바닥을 펴게 한다. 유코는 크고 하얀 이 손이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닿은 유코의 손길에 관린은 흠칫하고 놀랐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유코는 생각했다.

 

 

“그 중 하나가 제 한국이름이죠.”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거리는 움직임이 지나고 관린의 손바닥에 이역의 글씨가 새겨진다. 봐도 알 수 없지만 관린은 뚫어져라 그 손의 움직임을 따랐다. 글씨를 새기고 곧 손이 떨어져나갔다. 관린의 시선이 계속해서 그 손을 따라갔다. 그리고 곧 유코의 입술로 향했다.

 

 

“뭐라고 읽나요?”

 

“박지훈 이요.”

 

“아. 바찌후?”

 

“박. 지. 훈.”

 

성이 박이고 이름이 지훈이에요. 이어지는 목소리에 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지훈하고 몇 번을 읊어본다. 만족스러운 정도가 되자 유코가 씨익 웃으며 엄치를 치켜들었다. 가부키 화장을 하지 않은 유코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다. 관린은 그를 이제 지훈이라 불러야지 생각해본다.

 

“지훈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관린의 말에 유코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을 때 만요.”

 

그러고 해사하게 웃는 그가 너무 아름다워서 꼭 눈 속에 붉은 꽃이 핀 것을 보는 것 같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다른 단어는 뭔가요?”

 

“네?”

 

“아까 두 단어라고.”

“아….”

 

 

발그레한 볼을 한 지훈의 입이 달싹였다.

 

 

“그건 비밀이에요.”

 

 

어떤 단어일까. 관린은 그것이 매우 달콤한 단어일거라고 짐작했다. 유코의 입에서 나올 그런 비밀의 단어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싱긋 웃는 유코의 낯이 정말 맑은 소년의 그것이라 관린은 또 한 번 다짐했다. 유코를, 아니 박지훈을 반드시 조선에 데려다 줄 거라고.

 

 

 

 

 

“기차가 곧 운행을 재개할 것 같더군요.”

 

 

관린은 젓가락을 멈추고 시마무라를 쳐다보았다.

 

 

“어제 심심해서 역까지 산보를 나갔다가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법 굵은 눈송이들도 잦아들었고, 이대로 눈이 그치면 기차 운행이 가능하다고요. 빠르면 사흘 안에 가능하답니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 얼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벌써 열흘이나 머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요.”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야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얼른 중공군과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문 열흘이 관린에게는 꼭 하루처럼 느껴졌다. 지훈이 있기 때문일 거다.

 

 

 

 

 

“노래요?”

 

“네, 노래요. 노래가 듣고 싶어요.”

 

“저 사실 노래는 배우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춤 선생님 밑에서 있다 보니.”

 

 

관린의 얼굴을 살피며 유코가 조심스레 말했다. 관린은 아쉽긴 하였으나 그저 유코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괜찮다고 하려던 찰나, 다다미방가득 유코의 미성이 울렸다.

 

 

카추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

그나마 맑은 눈은 풀리기 전에

신명께 축원을 라라 드리어 볼까

 

 

가끔 유코가 기분이 좋을 때면 흥얼거리는 그 노래였다. 유코 자신은 흥얼거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관린은 그의 곁에서 여러 차례 그 흥얼거림을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유코가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어졌던 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역의 말로 울려 퍼지는 노래. 관린은 그 말이 조선말이겠거니 생각한다.

 

 

카추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

이 저녁에 온밤을 오는 눈아

내일은 들과 산에 라라 길을 덮게

 

카추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

서러운 이별 눈물 나는 동안에

바람은 들을 불고 라라 날은 저무네

 

카추사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

적막한 너른 들을 차츰차츰이

홀로 떠나가는 라라 내일의 갈 길

 

 

노래를 마치고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유코가 관린을 보았다. 관린은 조금 멍해졌다. 아름다운 목소리. 기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 역장님! 역장님!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노래가 끝이 났는데도 여전히 다다미방 가득 유코의 목소리가 남아서 관린의 귀를 웅웅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자신과 다른 미성의 맑은 목소리. 관린은 유코가 노래를 배우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관린은 매우 기쁘다.

 

 

“좀 별로죠?”

 

 

관린이 아무 말 없이 유코를 보고 있자 유코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유코는 왠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노래를 배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아니하였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랑하는 일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자신을 봐달라고 외쳐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런데 관린이 노래를 청했을 때는 무어라도 불러주고 싶었다. 샤미센을 켰을 때 박수를 치며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던 관린의 얼굴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면 또 한 번 그런 웃음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는 노래라고는 같이 연회에 가서 공연을 하는 게이샤들의 오교쿠가 다였다. 그건 왠지 연습을 하지 아니하여 엉망진창일 것 같았다. 다른 노래… 다른 노래…. 문득 떠오른 노래가 그것이었다. 제목도 알 수 없고, 가사가 정확한지도 알 수 없지만 어렸을 적 유코가 조선에 있었을 때 들어 기억하는 유일한 노래였다.

 

관린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요. 전혀요. 그저….”

 

“그저?”

 

“그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아.”

 

 

스스로 말해놓고는 관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소리가 좋다니. 노래를 불렀는데 이런 칭찬이 어디 있느냐 하고 관린은 자책하면서도 꼭 유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만 같아 떨렸다. 유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부른 노래였다. 그런데 목소리가 좋다니. 생각보다 꽤 엄청난 칭찬에 유코는 좋았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런데 그 노래… 조선 노래인가요?”

 

“네 맞아요.”

 

“사실… 들어봤어요.”

 

“네? 이 노래를 들어봤다고요?”

 

 

9년간 듣지 못한 조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관린이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어봤다고 하자 유코는 놀라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뻤다. 그런 기쁨과 놀라움의 표정이 유코의 얼굴에 가득 떠올라서 관린은 미안해졌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기대를 하게 했다.

 

 

“아 미안해요. 사실 유코가 기분 좋을 때 그 노래를 흥얼거려서… 그래서 그 때 들었어요.”

 

“아….”

 

 

어쩐지 유코는 마음이 살짝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일까. 이상했다. 조선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유코는 생각한다. 조선에 대한 기억보다 이곳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많은데도 아직 조선이 그리운 건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관린은 유코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괜한 말을 꺼냈다고 자책하면서도 조선에 대해 묻고 싶었다. 만일 유코도 조선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조선에 가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 기억에 조선은 매우 따뜻하고 매우 밝아요.”

 

 

관린이 묻기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코가 밝게 웃는 낯으로 관린을 보며 그랬다.

 

 

“비록 9살이었지만, 그 때 걸었던 거리, 들리던 노래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런 것들이 생각나요. 제가 있던 동네는 눈이 이렇게까지 많이 오진 않았어요. 봄과 가을이 길었죠. 따스한 나날들이 꽤 많았어요. 늘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햇살 아래 뛰 놀았던 것이 생각나요.”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유코의 모습은 어쩐지 이 세상사람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의 천사가 저렇게 생겼을까. 하얀 기모노를 입은 유코의 얼굴은 발그레 했고, 풍광을 그려보느라 눈을 감은 채 미소 띤 얼굴은 아름다웠다. 천진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이 정말 천사 같았다. 어쩌면 그동안 본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라 그런지 몰랐다.

 

 

“봄이면 꽃이 가득 피었는데, 제가 살던 곳엔 라일락이 많이 피었어요. 라일락을 아세요? 보라색 조그마한 꽃인데 그 향이 무척이나 아름답고도 신비롭답니다.”

 

“조선에 가고 싶지 않나요?”

 

“조선이요?”

 

 

유코는 놀랐다. 사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가끔 꿈에 나오기도 했다. 그리운 엄마, 아빠, 형제들, 그리고 함께 뛰놀던 친구들도 나왔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던 골목길, 라일락이 잔뜩 핀 담벼락, 그 앞에 졸졸 흐르던 시내도 나왔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도 나왔다. 겨울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이토록 추운 겨울은 아니었다. 따스함. 유코가 조선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그것이었다. 여기보단 따뜻하겠지. 유코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몸도, 마음도, 여기보단 따뜻할지 모른다고.

 

 

“나와 함께 조선에 갑시다.”

 

 

관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코의 손을 부여잡았다. 처음으로 잡힌 손에 유코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다 못해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뿌리쳐버리기에는 서늘한 관린의 손이, 꼭 눈의 온도를 닮은 그 손길이 너무 좋아서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고 꼭 시간이 멈춘 양 가만히 있었다.

관린 역시 놀라긴 매 한가지였다. 자기가 잡은 손임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다시금 손을 뗄 뻔하였다. 따뜻한 유코의 손은 꼭 유코가 설명한 조선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조선에는 가본 일도 없지만 관린은 그럴 것 같았다. 그곳은 왠지 유코처럼 따뜻한 눈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만 같았다. 무슨 용기가 나서 유코의 손을 잡은 건지 관린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유코의 발그레한 볼, 웬일인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손이 잡히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내리깐 눈이 아름다워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유코의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길고 아름답다. 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코를 내려보았다. 어쩌면, 유코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코도 실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매일 같이 나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밤, 자신의 마음을 꺼내어야 한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시마무라에 의하면 곧 기차가 다시 움직일 것 같다. 이곳을 떠나야 할 약속된 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진심을 전해야 했다. 그 전에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조선이라니… 저는 갈 수 없어요.”

 

“왜 갈 수 없다는 것입니까.”

 

 

왜일까 유코는 대뜸 갈 수 없다고 한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갈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눈앞에 히로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일본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울기만 했던 저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옆에 있어준 사람. 친형과도 같은 그가 많이 아팠다. 언제 잘못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 조선은 따뜻한 곳일 테다. 그러나 그런 그를 두고 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안되겠습니다. 히로시를 두고는 갈 수 없어요.”

 

 

예상했던 답변이 나오자 차라리 관린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뿐인 거라면 히로시가 완쾌하거나 히로시를 데려가면 된다. 후자는 무리일 테니 전자에 운을 걸어야 한다.

 

 

“만일 히로시가 낫는 다면요?”

 

“네?”

 

“히로시의 병이 낫는 다면 그때는 저와 함께 조선에 가실 건가요?”

“그러면….”

 

 

히로시만 낫는 다면, 그래서 자신의 병수발이 필요 없다면 더 이상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자신은 춤 선생님에게 매인 몸이긴 하다.

 

 

“전 매인 몸이라서….”

 

“함께 도망갑시다. 내가 도와줄게요.”

 

“네?”

 

 

유코는 휘둥그레 놀라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이 귀엽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저도 압니다. 이곳 게이샤의 삶은 으레 그렇다더군요. 시마무라에게 들었습니다. 도망갑시다. 모를거에요, 아무도.”

 

“하지만.”

 

 

관린은 망설임이 가득한 유코의 얼굴을 보며 오늘 밖에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모든 것을 털어놓자. 그리고 앞으로를 위한 우리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시간은 많지 않다.

 

 

“청할 것이 있습니다.”

 

“청할 것이요?”

 

 

유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밤,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관린의 힘 있는 눈동자가 오로지 유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얼까. 이 의미는. 유코는 너무 떨려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관린의 커다란 눈동자에 자신만이 가득 담겨 있다. 유코는 관린도 자신을 좋아하는 구나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가득 나만을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코 또한 자신의 눈에 오로지 관린 만을 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모습의 관린을 보고 모를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러고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코는 목이 탔다. 관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상 하인을 시켜 물 잔을 앞에 두고도 둘은 물은 마시지 않은 채 말이 없이 서로만 바라보았다.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관린은 앞으로 닥칠 일들이 가늠이 되지 않아 그러하였고, 유코는 왜인지 이 시간이 소중한 시간이 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밖은 이제 사람들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밤과 새벽의 사이의 시간이 왔다.

 

 

“유코가 일전에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었죠.”

 

 

관린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유코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하자 관린이 말을 이었다.

 

 

“이제 내 차례입니다.”

 

 

관린은 호롱불을 켜고는 전등을 껐다. 갑자기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유코는 관린의 얼굴만을 따랐다. 처음에는 어둑하게 잘 보이지 않던 관린의 얼굴이, 이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관린은 바깥으로 난 장지문을 열고는 게다를 신고 나가 확인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안으로 난 장지문을 열어 고요한 탕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타츠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기에. 유코는 관린이 더 작게 말해도 들을 수 있도록 조금 다가갔다.

 

 

“저는 만주로 갈 것입니다.”

 

 

유코는 만주가 어딘지도 몰랐기에 그 말만으로는 관린의 의도를 다 알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지요.”

 

 

그제서야 유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이 분은.

 

 

“전 중국의 대일 항쟁을 위해 여기 왔습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샌 탄식에 유코는 한 없이 제 가슴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항일투쟁이라니. 그와 관련된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된 유코이기에 모를 리가 없다. 그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 그래서 유코는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품은 감정이다. 그런 감정이 오롯이 향하는 그가 그런 일을 하려한다니.

 

“…….”

 

 

유코의 아름다운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득 차올라서 찰랑거렸다. 유코는 꾹 참으려 했다.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이미 먹먹한 목을 가다듬으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관린은 손을 뻗어 그런 유코의 눈물을 훔쳤다. 기다렸다는 듯 주르르 흐르는 눈물이 곧 관린의 엄지손가락에 쓸려갔다. 그랬음에도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유코의 볼을 타고 내리다 고타츠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유코의 모습은 한 층 더 청초하고 처연하여, 관린은 제 목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꼭 가셔야 겠어요?”

 

 

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코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

 

 

단호한 관린의 목소리에 유코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관린은 닦아내려 애썼다. 유코의 눈물을 닦아내는 관린의 손을 유코가 잡았다. 자신의 눈물이 묻은 손, 그 커다랗고 시원한 손이 유코의 온기로 따뜻해져갔다.

 

 

“저도 가겠어요.”

 

 

관린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유코는 가늠했다. 저를 조선으로 보내놓고 항일투쟁이 끝나고 나면 만주에서 조선으로 돌아오겠다고 할 작정이구나, 만주는 위험하니까. 유코는 생각했다. 아마도 히로시겠지. 히로시만큼 어머니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는 이도 없으니까. 히로시가 자신을 도망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리란 것도 꿰었다. 아무리 제가 몸을 팔 위험에 처했다고 한 들, 히로시도 없고 관린도 없는 조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코의 양 어깨가 울음으로 인해 들썩였다. 그러나 혹시나 누가 들을까 유코는 소리 내지 않았다.

 

관린은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유코가 자신을 좋아한대도, 그곳을 따라가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 걸 하고 관린은 후회했다. 유코가 몸을 파는 것은 볼 수 없어 생각한 조선으로의 도망은 사실 유코에 한 한 것이었다. 관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만주행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이 정말 좋아야 다시 유코를 볼 수 있을 거였다. 그래도 유코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남에게 몸을 팔지 않고, 더 이상 화장도 하지 않고,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생각했다. 유코는 어중간한 지금의 자신이 아닌 남자로 당당히 살아가고 싶어 했다. 유코 스스로는 알지 못할지라도 관린이 느낀 것은 그랬다. 만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그런 걸까.

 

 

“거기 가는 것은 안 됩니다. 많이 위험해요.”

 

 

자신의 손을 잡아온 유코의 손을 잡아 내리며 관린이 말했다.

 

 

“알아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목숨이 위험한 곳이란 건… 다 안다고요.”

 

 

유코는 목이 메어 겨우 겨우 말을 이었다. 유코의 눈은 화가 어려 있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유코는 화가 났다. 저도 남자인데 왜 위험하다고 보호하려고만 하는지. 관린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대일항쟁에 참여해야 하는 건 어쩌면 자신이다. 전쟁준비를 위해 자신을 끌고 온 일본군, 그 때문에 송두리째 바뀐 자신의 인생. 화를 내고 싸워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저, 당신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진 몰라도, 제 인생을 바꾸어놓은 그 놈들, 그 놈들을 향해 칼과 총을 들어야 하는 건 저에요. 그러니까 위험해서 제가 조선에 가야한다는 그런 말은 그만 두세요.”

 

 

단호함이 어린 유코의 눈은 강인했다. 이런 눈빛도 가진 사람이었던가. 관린은 놀랐다. 마냥 여인처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사내로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하고서는 자신이 그렇게 보지 않았던 건가 싶어 미안해졌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관린은 유코가 걱정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유코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 수년간 군사학교에 몸을 담으며 거기서 여러 기술을 익히고, 오랜 기간 수련했습니다. 항일투쟁을 위해서요. 그런데 유코는 그런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걱정되는 것입니다. 유코는 총이나 칼을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수련을 해도 늦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 계시라는 것입니다.”

 

 

관린의 차분한 설명에 유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관린이 없는 조선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유코는 이제 관린을 보지 않고서는 하루를 보내기가 어려웠다. 매일 같이 찾아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유코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관린을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 가서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이라도 돕겠어요. 연락책이라도 되겠어요. 그러면서 천천히 훈련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안 됩니다. 조선에 가 계세요. 제가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싫어요. 같이 만주로 가지 않는 한 전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지훈. 제발.”

 

 

어둠 속 관린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어느 새 관린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간절히 진심을 드러내었다. 지훈이라고 불렀다. 몇 번이라도 부르고 싶었던 그의 진짜 이름이, 진심이 튀어나왔다. 차라리 여기서 몸을 팔더라도 목숨은 부지하는 게 나은 걸까. 관린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려했다. 무엇이 더 나은 일인지 무엇이 박지훈을 위한 일인지.

처음으로 관린의 낮은 음성으로 불린 제 조선의 이름에 지훈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것과 같은 기분에 마음이 뭉클했다. 지훈이라 칭한 그 간절함에 다시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았다. 조선의 제 이름은, 본래의 제 이름은, 진짜 제 이름은 오로지 이 사람만이 불러주길. 그렇게 생각했다.

 

 

“전… 이제 당신을 보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워요.”

 

 

지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심을 드러내었다. 호롱불에 비친 따뜻한 주황빛으로 빛나는 눈. 기차에서 보았던 그 따스한 눈빛. 그 눈빛이 이제는 오로지 관린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읊은 마냥 꼭 같은 그런 말에 관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느 새 지훈의 작은 손이 관린의 얼굴에 닿았다. 눈물을 닦는 작은 손이 애처롭다. 처음 만져보는 관린의 볼이 아기 피부마냥 부드러워 유코는 그 사실에 감동한다.

 

관린은 지훈에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만으로 건너오던 날의 이야기, 어느 날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시던 아버지, 혼자 살림을 꾸려 가신 어머니, 대만의 독립운동, 어렸을 적 받았던 멸시와 모욕들, 그 속에서 피어난 대일항쟁에 대한 자신의 꿈.

 

지훈은 가만히 앉아 그런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 이 사람도 슬픈 이야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조용조용 이어지는 관린의 낮은 음성이 좋았다. 장지문으로 시퍼런 빛이 점점 퍼져 들이쳤다. 어느 새 새벽이 되었다. 지훈은 밤사이 관린에 대한 제 마음이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관린 역시 같았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잠시 누웠다. 지훈은 히로시의 병세가 나아지면 관린을 따라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다. 관린의 옆에 있으려면 강해져야 했다. 관린은 기차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지훈 몰래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지훈을 만주로 데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군에 어찌 될지 몰랐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관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양 옆으로 흘러내렸다.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 폭설이 내렸다. 기차의 운행은 또 뒤로 밀렸다. 관린은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이제 감을 잡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 서신을 전달 받은 남자가 찾아왔다.

 

 

“기차에 발이 묶인 게 다행일 수 있습니다. 지금 만주 벌판 도처에 일본군이 쫙 깔렸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더 큰 전투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럴수록 제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가는 길이 위험하여 합류 전에 큰일 날 수 있습니다. 일단 길목을 확보해야 합니다.”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이미 하도 봐서 외워버린 만주 지도이다.

 

 

“여기 이 길목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특히 겨울일수록 눈이 많이 오고 산세가 험하여 매복하기는 좋으나 식량이라던가 다른 문제가 많아 그나마 안전하지요.”

 

“만일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다면….”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그렇다면 역시 힘들 것입니다. 매복할 만 한 지형을 지나면 바로 허허 벌판이어서 전혀 몸을 숨길 곳이 없거든요. 다행이 바로 이 벌판만 넘으면 우리 군대가 포진한 곳이라 안심 할 수 있을 겁니다. 연락책에 이미 말을 해놨으니 아마 맞이하러 올 겁니다. 그들에게는 총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일본군을 막아내고 군대로 데려갈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보거든 바로 총을 달라고 하세요.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 표식.”

 

 

남자는 작은 표식을 내밀었다.

 

 

“이것을 모자에 다세요. 이걸 보고 우리 군대가 구하러 올 겁니다.”

 

 

관린은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역시 자신이 혼자 가는 게 맞았다.

 

 

 

 

지훈은 일부러 관린을 만나면 조선에 대해 이야기 했다. 좋은 곳이니 자신과 함께 가자고도 했다. 그전에 먼저 함께 만주를 갔다 가자고도 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지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관린은 점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 후회되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자꾸만 등골이 서늘해져서 그럴 때 마다 관린은 덥석 유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 눈이 많이 녹기 시작했다. 관린은 지훈 몰래 역에 다녀왔다. 기차가 내일부터 운행을 한다고 하였다. 관린은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딜 다녀오시는 거죠?”

 

어쩐 일로 동백실에 지훈이 와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이 없을 때 먼저 들어와 있는 적이 없었는데. 관린은 조금 놀랐다. 내심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화로가 놓인 다다미방은 훈훈했다.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관린은 긴장이 풀려 지훈에게 몰래 떠날 것을 들킬까 걱정이 되어 몸을 굳히려 애썼다.

지훈은 관린이 만주에 가겠다고 말한 밤 이후로 종종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관린이라면 자기가 만주에 가겠다고 선언한 이상, 자신을 두고 가려고 할 것이 뻔했다. 지훈 역시 점심 연회를 마치고 나서 내일부터 기차가 운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일 관린은 자신을 떠날 것이다. 그것은 관린에 대한 지훈의 깊은 애정으로 인해 가늠이 가능한 것이었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연회복을 입은 채로 함부로 관린의 방에 들어와 앉아 기다렸다.

관린은 지훈의 연회복을 입고 화장한 모습이 오랜만이라고 생각한다.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관린이 지훈의 가발을 보며 말했다. 답답하죠. 지훈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알아챈 건가. 역시 내가 떠나려는 것을 알아버린 걸까.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요.”

 

“네?”

 

 

조금은 당돌한 듯한 지훈의 말투에 관린은 화로의 열기가 너무 센가 싶다.

 

 

“저 씻고 오겠어요.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자겠어요. 연회가 끝나자마자 와서 제 유타카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혹시 여벌의 것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관린을 올려다보는 지훈의 눈에 관린은 홀릴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홀리는 눈. 그런 눈이다. 말없이 여벌의 유타카를 내어주며 관린은 이미 자신은 그 눈에 홀리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지훈이 탕에 들어갔다 오는 동안 관린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바깥으로 난 장지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다. 오늘 밤 내가 나 자신을 이겨낼 수 있을까. 지훈은 맑은 사람이다. 깨끗한 눈을 닮은 사람이라고 관린은 늘 생각했다. 더렵혀지지 않았으면 싶었던 것도 그래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지훈의 감정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 역시 지훈에게 지금은 아무런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왜 자고 간다고 했을까. 지훈은 이제 겨우 열여덟이다. 다 자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아직은 어리다. 아. 안 된다. 관린은 몰려드는 생각들을 없애려 노력했다. 지훈을 안고 싶다고, 그 붉은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 더 기다리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훈은 화장을 씻어내며 내일 아침 관린이 떠나지 못하도록 함께 기차를 타고 다른 곳을 보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문득 시마무라상이 추천해준 지지미〔縮〕 산지가 떠올랐다. 지지미 산지에 흔히 보이는 눈 바래기 광경을 지훈은 좋아했다. 관린과 가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시마무라를 관린 보다 먼저 만났다. 시마무라는 관린보다 며칠 더 일찍 이 온천장에 왔는데, 마침 지훈이 연회가 있어 왔다가 만나게 되었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왠지 이곳사람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여행객이었다. 시마무라는 재밌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몇 마디 나눠보진 않았으나 의외로 감각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관린을 만나러 오가며 자주 마주쳤는데, 그럴 때 마다 시마무라는 딱히 관린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실 2주가 되도록 지훈이 관린을 매일 찾아오니 온천장 사람들을 비롯한 온 마을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했다. 원체 연회에 관심이 없고 산보나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관린만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런 사실이 지훈은 재미있었다. 관린은 저가 엄청난 미남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이 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이렇게 작은 마을에 있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관심을 가지는 게 뻔한데도 자기만 몰랐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혹여 항일운동이니 뭐니 이런 것이 들통났다가는 정말로 큰일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옆에 붙어있는 편이 관린을 위해 나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관린이 게이샤랑 놀아나는 한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워낸 지훈은 다시 열여덟 소년으로 돌아왔다. 관린은 지훈의 그런 모습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그의 입술은 분홍빛이 돌았고, 홍조 띤 피부는 부드러웠다. 작고 말랑한 손도 그랬다. 춤을 출 때 그 작은 손으로 부채를 꽉 움켜쥐는 모양새가 멋있으면서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눈. 처연하게 아름다운 눈매는 왜인지 화장을 하지 않은 편이 더욱 도드라졌다. 더군다나 오늘은.

관린은 지훈보다 한 뼘 가까이 키가 큰 편이었다. 당연히 그의 유타카는 지훈에게 조금 클 수밖에 없었다. 약간 긴 소매에 아래가 끌리는 유타카를 입은 지훈은 너무 귀여워서 관린은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 굴 뻔하였다.

 

자신을 빤히 보는 관린의 눈빛에 지훈은 멋쩍어서 물기 어린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이게 좀 크네요. 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관린은 활짝 웃었고, 훅 패이는 보조개를 보며 지훈의 기분도 좋아져 까르르 웃었다.

 

 

“내일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어요.”

 

 

둘은 고타츠에 들어 앉아 마주본 채로 있었다. 지훈이 말을 꺼냈다.

 

 

“갈 곳이요?”

 

“네. 그러니까 오늘 밤 저와 함께 계셔요. 그리고 일찍 아침을 먹고 함께 역으로 가요.”

 

 

관린은 역으로 가자는 말에 지훈이 자신의 계획을 어느 정도 눈치 챘음을 돌려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차가 내일부터 운행한다는 것을 지훈도 안다는 것일 테다. 지훈은 관린의 살짝 놀란 표정을 보고는 자신의 의사가 잘 전달되었음을 알았다. 저도 다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내일 몰래 떠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지훈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손 잡고 자요.”

 

 

이제 그만 자려고 불을 껐는데 나란히 깔린 위로 지훈이 손을 뻗어왔다.

 

 

“…….”

 

 

관린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참아내는 것이 힘에 부쳐서 였다. 지훈은 관린이 새벽에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옭아매기 위해 손을 잡고 자고 싶었다.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니었다. 지훈은 한 번도 이성과 손을 맞잡거나 입술을 맞댄 적이 없었다.

 

 

“…!”

 

 

어둠속에서 조용히 작은 손이 관린의 큰 손을 잡아왔다. 그런 작은 손의 느낌에 관린은 지훈을 안아주고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기보다 그저 품에 안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런 감정이 들게 하는 손길이었다. 어둠속에 눈이 점점 말똥말똥 해졌다. 관린은 그 새 잠이든 지훈의 얼굴을 보았다. 높고 단단함이 느껴지는 콧대, 아름답고 신비한 눈매, 분홍빛의 입술, 그리고 턱 부근의 아주 작은 점까지. 그 모든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관린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한참이나 달빛이 비추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서늘한 새벽의 기운에 지훈은 문득 놀라 잠에서 깼다. 다행히 잡은 손은 여전했다. 단단히 자신의 손을 감싸 쥔 관린의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좋았다. 관린이 누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일인지 관린은 제 쪽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지훈도 조심스레 관린 쪽으로 누웠다. 지훈은 제 작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관린의 커다란 오른쪽 눈두덩이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크고 깊은 눈, 거기에 언제나 제가 있다는 사실이 지훈을 행복하게 했다. 눈두덩이와 맞닿은 콧대의 시작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손가락이 높고도 아름다운 콧대를 쓸어내렸다. 퍼런 새벽의 빛 사이로 관린의 하얀 콧대의 마지막에 자리한 점이 보였다. 알고 있었다. 아래에서 보이면 더 잘 보이는 점이라 함께 산책하던 때에 지훈은 그 점을 발견하고는 그 날 뛸 듯이 기뻤다. 손가락이 인중을 지나 두툼한 입술을 훑었다. 요 입으로 나를 지훈이라고 불러주었지. 지훈은 왠지 눈물이 차올라서 다시 천정을 보고 바로 누웠다. 모든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지훈은 울음을 참고는 다시 모로 누워 관린을 한참 보았다.

 

 

 

 

“지지미라니, 저는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시마무라상이 말 안 하던가요?”

 

 

예상치 못한 이름이 지훈의 입에서 나오자 관린은 놀랐다. 지훈도 시마무라를 알다니.

 

 

“제가 아마 먼저 알았을걸요? 시마무라상요. 당신보다 좀 더 일찍 여기 왔거든요. 시마무라상이 지지미를 좋아하시더라구요. 이 고장에 온 것에는 그러한 연유도 있다고 하던걸요?”

 

그랬군. 그래서 시마무라상도 지훈을 알고 있었던 것이군. 관린은 시마무라가 지훈을 아는 건 단지 지훈이 이 마을의 유명한 게이샤여서 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는 직접 아는 사이라고 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는 새에 기차는 금세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둘은 마을로 접어들었다. 집집마다 차양이 길게 드리워 있고 기둥이 그 끝을 떠받치는 모양새가 신기했다.

 

 

“이곳은 희한하군요. 도로가 다, 무언가 이상하네요.”

 

 

관린이 놀란 표정 길가에 멈춰서 말하자, 지훈이 까르르 웃으며 그런다.

 

“이 고장에는 예부터 있던 것이에요. 그게 그렇게 놀랍나요?”

 

“처음 봤어요.”

 

“강기[雁木]라고 하는 것인데 눈이 높게 쌓이면 사람이 다니는 통로가 되어준답니다.”

 

“그렇군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둘은 눈 밭 위에 널어놓은 옷감들이 즐비한 곳에 다다랐다.

 

 

“이것이 눈 바래기랍니다.”

 

“눈 바래기?”

 

“눈 위에 천을 널어놓는 것이죠. 실이나 천을 잿물에 담가두었다가 물에 여러 번 헹궈낸 뒤에 이렇게 눈 위에 널어놓곤 한답니다. 이런 것을 여러 번 반복하면 지지미가 되는 것이지요.”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에 관린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눈밭은 하얀 천들이 가득 널려 있어 눈 밭 특유의 반짝임을 잃었다. 그러나 천에 은은하게 스미는 햇살이 아름다웠다.

 

 

“저는 하얀 눈 밭 위에 저렇게 지지미를 널어놓은 걸 보는 게 너무 좋아요. 저걸 보고 있으면, 연회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요.”

 

 

지훈이 조용조용 말했다. 눈 바래기를 보고 있자니, 관린은 지훈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온천장으로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지훈은 오랜만에 샤미센을 연주했다. 바깥으로 향하는 장지문을 열어 둔 채 샤미센 소리를 들으며 관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량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공기 속에, 쏟아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은하수가 하늘의 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득 처음 만난 날의 샤미센 소리가 떠올랐다. 은하수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관린은 샤미센을 연주하는 지훈의 옆모습을 보았다. 샤미센 소리가 눈밭에 부는 겨울바람을 닮아 청량하고 시원했다. 곧 소리가 멈추었다.

 

 

“은하수가 아름답죠.”

 

“이곳의 밤하늘은 유독 더 아름답습니다. 별이 아주 많아요.”

 

“전 이곳의 밤하늘 밖에는 몰라서 잘 모르겠어요. 별이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지훈의 눈 속에 별이 가득했다. 그 눈이 꼭 우주 같다고 관린은 생각한다. 세상 모든 별들이 지훈의 눈에 가득하다고도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람. 우주를 담은 눈이 행복으로 가득할 수 있길,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린은 처음으로 중국의 대일 항쟁과 대만의 독립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했다.

 

“유코짱 안에 있나요?”

 

“네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더니, 장지문이 드륵 열리고 온천장 지배인의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평소 늘 웃는 얼굴이던 그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슬픔, 근심이 가득 들었다. 심상치 않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저… 히로시 군이…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히로시 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지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어서 가봐야 한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훈은 샤미센과 발목을 거칠게 내팽개치고는 장지문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눈물로 가득 찬 지훈의 눈과, 아직 채 마르지 못한 지훈의 머리칼이 관린의 눈앞을 스쳐갔다. 흩날리는 지훈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별들 같았다고 생각했다. 샤미센의 현 하나가 끊어졌다.

 

 

 

 

 

“죽었다는 군요.”

 

 

관린은 밤새 지훈을 기다렸다. 날이 밝고 나서도 지훈은 한참을 오지 않았다. 관린은 일단 뭐라도 먹어야 겠다 생각하며 동백실을 나섰다가 시마무라를 만났다. 함께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관린이 응했다. 온천장 근처 라멘집에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시마무라가 그렇게 말했다. 아 역시. 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쉬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마음이 아팠다. 9년간 지훈이 정붙일 친구라고는 히로시 밖에 없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친구를 잃은 지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자신이 겪어본 적 없는 아픔이어서 관린은 더 마음이 아팠다. 얼른 지훈을 위로해주고 싶었다가도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고민했다.

 

지훈이 오지 않는 동안 관린에게 마을을 떠날 기회는 매순간 주어졌다. 그러나 관린은 지훈을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훈은 관린을 찾아오지 않았다. 관린 또한 지훈을 찾아가진 않았다. 일주일이나 지났을 때 관린은 자신이 직접 가지 않으면 지훈 스스로 자신을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훈의 집에 찾아간 관린은 지훈의 춤 선생님을 만났다. 유코가 안에 있냐는 물음에 춤 선생은 뒷산을 가리키며 그가 히로시의 무덤에 갔다고 했다.

 

“왜 이러고 있어요.”

 

 

지훈은 무덤 앞에 엎드려 있었다. 눈이 쌓여있는 그곳에 지훈은 유타카 차림에 신도 없이 그저 타비 차림으로 엎드려 있었다.

 

 

“….”

 

 

지훈은 관린을 돌아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온 몸이 새빨갛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동상이라도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린은 지훈을 안아들었다. 그제서야 지훈의 멍한 눈에 초점이 들고 눈물이 흘렀다.

 

관린에 안겨 지훈은 자신의 다락으로 돌아왔다. 지훈은 눈물을 흘리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관린은 눈에 젖은 지훈의 타비를 벗겨냈다. 새빨간 발가락들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동상이 걸릴 뻔 했다고 생각했다. 지훈의 이마에 열이 펄펄 끓었다. 춤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관린이 병간호를 하기로 했다. 진즉 지훈을 찾아오질 않은 자신을 원망하며 관린은 물수건을 지훈의 이마에 올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열이 식고 지훈이 눈을 떴다.

 

 

“히로시가 갔어요.”

 

 

관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훈은 누운 채로 말을 이었다.

 

 

“저를 데려가주세요.”

 

“….”

 

“전 더 이상 삶의 목표가 없어요. 돈을 벌어봤자 히로시의 병환을 낫게 할 수도 없어요. 오로지 당신만 남았어요. 당신도 떠나면 전….”

 

지훈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양옆으로 흘러내렸다. 관린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주고는 눈을 감았다. 지훈과 함께 만주로 가도 괜찮은 걸까. 남자가 내민 지도가 떠올랐다. ‘지금 만주 벌판 도처에 일본군이 쫙 깔렸다고 하더군요.’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관린은 제 커다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둘은 기차에 올랐다. 밤 기차였다. 차창 밖으로 은하수가 내렸다.

 

 

“괜찮겠죠….”

 

 

관린의 소매를 잡아오는 지훈의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지훈은 자신이 도망을 치는 것이 들키진 않을까 그것이 괜찮을까 물었다. 관린은 만주에서 지훈이 무사히 중공군에 합류할 것이라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일에 대해 괜찮냐 묻고 괜찮다 답했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둘의 걱정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하수가 참 예뻐요.”

 

 

지훈은 관린의 소매를 잡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관린은 창에 비친 지훈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이 비추는 지훈의 얼굴, 그 아름다운 눈에 또 다시 은하수가 가득했다. 관린은 자신의 소매를 그러쥔 지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지훈의 손이 서늘했다.

 

 

 

 

만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일본을 벗어나 배를 타고 조선의 북쪽으로 들어갔다. 관린은 여기서 지훈을 떼어놓고 가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로 인해 지훈의 원망만 샀을 뿐이었다. 조선의 북쪽은 온천장에 머물 때 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둘은 북쪽으로, 북쪽으로 계속 해서 올라가야 했다. 만주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걷는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오랜 기간 춤으로 단련된 몸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강했다. 그러나 만주의 추위는 지훈이 생의 반을 지낸 곳의 추위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어서 힘들었다. 관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두르지 않고 나아가기로 했다. 어느 덧 남자가 건넨 지도의 지점이었다. 그나마 안전한 길이라던 곳. 일본군이 매복하지만 않았다면 무사히 지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은하수가 아름답다니 너무 웃기지 않나요.”

 

 

둘은 하룻밤 동굴에서 나고 새벽에 걸어서 목적지 까지 가기로 하였다. 밤에 가는 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지만 불빛 때문에 쉽게 들통이 날 수 있었고, 체력이 달리기도 했다. 동굴 입구에 앉아 지훈이 말했다. 피워둔 불을 뒤로 하고 관린은 지훈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지훈의 등어리를 쓸어내렸다. 불 때문인지 지훈의 등짝이 따뜻했다.

 

 

“내일이면 도착할거에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는 설레요.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아요.”

 

 

관린은 별이 가득 담긴 지훈의 눈을 바라보았다. 관린의 눈길에 지훈도 관린을 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가득 담고 있었다. 별안간 별똥별이 후두두 떨어졌다.

 

 

 

 

 

새벽이라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둘은 피곤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관린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했다. 자신들의 뒤편으로 또 다른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지훈은 그런 줄 모르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새벽의 퍼런 빛이 잦아들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얀 눈 위로 누런 빛이 어른거리며 퍼지는 것을 보며 지훈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밟는 소리가 둘 외에 더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지훈은 관린을 보았다. 관린의 눈에 두려움이 일었다. 관린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춰 걸읍시다.”

 

 

관린이 지훈의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지훈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고는 자세를 낮췄다. 약간의 오르막이라 힘들었다. 둘 다 부러 연회색의 옷을 입어서 눈 위로 티가 많이 나진 않았다. 한참을 걸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걸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곧 지도상의 목표 지점이었다. 그곳에 중공군이 있을 거였다. 관린은 조심스레 표식을 미리 달아둔 연회색 모자를 썼다. 어느 새 해가 둥실 떠오르고 눈밭은 반짝거리며 빛이 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관린은 눈 바래기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밭에 반짝이지 않는 하얀 옷감들. 은은히 빛을 삼키던 그 옷감들이 된 것만 같아 불현듯 겁이 났다.

 

순간 앞 쪽으로 짙은 녹색의 옷깃이 보였다. 중공군이었다. 정말 바로 앞에 있었다. 관린이 미리 모자에 달은 표식을 알아본 모양인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더!

 

탕! 탕!

 

 

연속된 두 발의 총성이 눈밭에 울렸다. 달려가던 지훈의 몸과 관린의 몸이 동시에 고끄라졌다.

 

 

“박지훈!”

 

앞서 달리던 관린이 지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은 분명 한 발을 맞았다. 그렇다면 다른 한 발은.

 

돌아본 곳에는 가슴팍을 움켜쥔 채 허리를 숙인 지훈이 있었다. 봉긋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판판하고 탄탄한 남성의 그것이었음에도, 한 번이라도 그 맨살을 보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게 했던 그 가슴팍을 지훈이 움켜쥐고 있었다. 새하얀 눈 위로 뚝뚝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지훈은 관린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상체를 들어올렸다. 살을 짓이기고 뼈를 바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지훈은 관린이 자신의 이름을 매우 정확히 불러줬다는 사실이 기뻐 웃음이 났다. 가슴팍에 난 총상을 지압하기에 너무도 작은 손 틈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관린이 손을 뻗었다. 하얗고 큰 다른 쪽 손은 자신의 옆구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지훈도 손을 뻗었다. 잠시 둘의 손이 맞닿았다. 관린이 지훈의 손을 감싸쥐었다.

 

“사랑. 쓸 수 있는… 두 단어… 그 나머지. 사랑…이에요.”

 

말을 할 때 마다 검붉은 피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지훈의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에 그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우주를 담고 있던 그 눈동자에 담긴 흰 눈 밭과 선연한 피가 함께 반짝이고 일렁였다. 그 안에 담긴 관린이 반짝였다.

 

“지훈! 말하면….”

 

“사랑해요.”

 

“….”

 

“당신을… 사랑합니다.”

 

 

목소리가 아득하게 눈 밭 위로 울렸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였음에도 해야만 했다. 지훈은 말을 마치고 온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궁금했었다. 진정 은애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그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새겨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사랑’ 이라는 두 글자를.

 

관린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말이 달싹이는 입술과 흐르는 피를 타고 전해졌다. 처음 듣는 생경한 단어, 생경한 말이 따스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훈의 뒤에 보이는 일본군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흩날리는 눈발들 사이로 지훈의 모습도 일렁거렸다.

 

지훈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휘청하고 지훈의 몸이 넘어가려 했다. 그 언젠가 무덤 앞에 엎드린 지훈을 안아들었던 것처럼 다시 안아들기 에는 지훈과의 거리가 멀었다. 둘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안 돼!”

 

지훈은 자신의 손과 떨어져버리고 만 관린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참 눈과 닮은 손이었다고, 참 눈과 닮은 사람이었다고.

 

 

탕! 탕!

 

 

다시금 연속된 총성이 지훈의 등어리를 꿰뚫었다. 명중한 두 발의 총알로 지훈의 몸은 종이인형처럼 이제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새하얀 눈발에 새빨간 핏방울들이 꽃처럼 흩뿌려졌다. 털썩 눈밭에 스러진 지훈의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입가로 흘러나오는 핏물이 처연했다. 바야흐로 흐드러지게 핀 꽃이 그만 시들었다.

 

 

 

2

 

 

 

 

 

 

관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을 감고 며칠 밤낮이 지난 후였다. 지훈이 그렇게 된 만큼 관린의 총상도 매우 심했다. 다행이 중공군 쪽에 의사가 있어 급하게 응급처치는 하였으나, 만주벌판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 엔 너무 춥고 위험한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린은 호로군이 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호로군으로서 활동을 했다.

 

관린의 일본군에 대한 분노는 분노의 단계를 넘어 감정을 잃는 단계에 도달했다. 관린의 눈에 일본군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관린은 군사학교 시절부터 사격에 능했다. 그 시절에는 인간이 아닌 표적을 맞췄을 뿐인데도 죄책감에 시달렸다. 관린은 이제 인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당기는 족족 총알은 일본군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한 명씩 쏘아 맞출 때 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탕 탕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관린의 눈에는 새하얀 눈밭에서 새빨간 핏물을 흘리던 그가 생각이 나서,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 같았던 그가 생각이 나서, 처음 만났던 날 새하얀 기모노에 새빨간 오비를 맸던 그가 생각이 나서 그 외에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튼튼하고 단단한 몸이라 상처를 견디면서도 관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속부터 곪아가는 것을 관린이 가장 잘 알았다. 아물기도 전에 총을 쏘아댄 덕에 총상이 깊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총을 쏠 수가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군대에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실은 군대 뿐 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관린은 바로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 곳만 생각하면 따스함이 생각나요.’ 지훈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그럼에도 가지 않았다. 지훈이 없는 조선은 따스한 곳일 리가 없었다. 관린은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 19371, 일본, 니가타新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여전히 그곳은 그러했다. 기차가 신호소에 멈춰 섰다. 역장님! 역장님! 어디선가 미성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차 안은 고요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 속에 기차가 다시 덜커덩 하고 움직였다. 차창 밖 새하얀 눈 위로 땅거미가 지더니 곧이어 주황 가로등이 하나 둘 제 빛을 드러냈다. 창문에 문득 따스한 눈매가, 눈동자가 떠오른다. 헌신적이기 까지 하던 그 눈빛, 따스함. 그것에 관린은 몸을 떨었다.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기차 안은 고요했다.

 

기차 밖에는 사람들이 몇 없었다. 다들 눈바지를 입은 모습이다. 겹겹이 옷을 겹쳐 입고 있는 모습이 자신이 니가타 현(縣)에 왔음을, 설국에 왔음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관린은 쓰게 웃었다. 관린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뽀득뽀득 밟히는 눈이 왠지 정겨웠다. 에치고 유자와 온천. 관린이 들어서자 지배인이 예의바르게 인사하다 말고 깜짝 놀란다.

 

 

“오랜만입니다. 혹시 동백실이 비어있는지요.”

 

“예, 아직 비어있습니다.”

 

 

세월이 무색하게 동백실은 전과 같았다. 다다미 방 가운데에 놓인 고다쓰도, 한 켠에 놓인 화로도 그대로였다. 관린은 동백실에 얼마 되지 않는 짐을 풀고는 장지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은 만주의 살을 에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에 비하면 한 없이 부드러웠다. 겨울 밤, 산이 하얗게 반짝였다. 어디선가 샤미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은하수를 닮은 그런 곡조가 흐르는 듯하여 관린은 눈을 살포시 감고 소리를 즐겼다.

 

‘남자이긴 하나 춤을 추고 샤미센을 연주한답니다.’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관린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는 다다미방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다다미 방엔 자신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으니 생긋 버릇처럼 웃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관린은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침 일찍 관린은 산보를 나섰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조금은 들뜬 목소리가 새하얀 눈 밭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관린의 눈앞에는 하얀 타비를 신고, 단정하게 오비를 뒤로 맨 그의 뒷모습이 있다. 조심스레 눈길을 걷는 그의 모습이 선연하다. 여기에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 눈을 뒤집어쓴 삼나무가 뾰족하다. 어딘가 날이 선 삼나무들에 둘러싸여 관린은 천천히 숲을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관린의 속눈썹에 눈이 날아들었다. 손을 뻗어 눈을 치우려다 관린은 점점 숨이 가빠졌다. 흐느낌이 커지고 고요했던 숲속에 그의 울음이 가득 찼다. 지훈… 박지훈! 이역의 말로 된 그의 이름이 삼나무 숲을 채우고는 나무 나무마다 가득 걸리었다.

 

다음 날 관린은 천 바래기를 보러 갔다. 이제 관린은 강기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이 고장에는 예부터 있던 것이에요. 그게 그렇게 놀랍나요? 까르르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야 시작인지 동네의 눈밭이란 눈밭은 죄다 지지미로 가득했다.

 

‘저는 하얀 눈밭 위에 저렇게 지지미를 널어놓은 걸 보는 게 너무 좋아요. 저걸 보고 있으면, 연회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요.’

 

한 참을 밖을 돌아다니다가 관린은 등에 느껴지는 통증에 온천장으로 돌아갔다. 추운 날에 밖에 있으면 절대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탓인지 관린의 온몸이 열로 들끓었다. 동백실에 들어가 잠시 누우려는데 밖에서 지배인이 잠시 전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들어오라고 하자 장지문이 열리고 먹색 기모노를 입은 지배인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괜히 전하였다가 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전하는 게 좋겠더군요.”

 

 

그렇게 말하고 지배인은 책 뭉텅이를 내밀었다. 잡지처럼 보이는 것이 얇았는데 꽤 여러 권이어서 족히 10권은 되어보였다. 문예춘추? 문학동인지인가. 맨 위에 있는 책의 가운데 즈음 새하얀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사토상이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분명히 한 번 쯤은 돌아오실 거라며.”

 

 

사토라면. 7년 전, 지훈을 만나기 전 만났던, 눈이 형형한 말동무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관린의 인사에 지배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는 동백실을 나갔다. 관린은 다시금 사토를 떠올렸다. 사토 시마무라. 시마무라 라고 부르라 했었다. 글을 쓴다고도 했었다. 자신의 글이 담긴 잡지인가. 관린은 잡지 뭉텅이를 고다쓰 위에 올렸다. 맨 위에 것이 1935년 1월호였다. 그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 아래로 가장 오래된 것부터 가장 최신 순으로 쭉 여러 권이 쌓여있었다. 작년도 것까지 있는데, 그 달이 띄엄띄엄이었다. 관린은 맨 위에 있는 잡지 가운데 끼워진 봉투를 꺼내려다 거기에 쓰인 글을 보았다. <저녁 풍경의 거울> 그것이 제목인 듯 했다. 다시 찾기 편하도록 뒤집어 엎어놓고 겉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당신들의 소식은 이시다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유코의 일은 안됐습니다. 늦었지만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당신들과 함께한 시간은 길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 시간 동안 당신들을 지켜본 나에게는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당신들에 대한 나의 애정 어린 눈길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어쩐 일인지 어릴 적부터 소중한 사람들은 늘 제가 닿을 수 없는 먼 길을 가곤 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당신들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지요.

왜인지 나와 당신 그리고 유코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잘 없었습니다만,

나는 당신보다 먼저 유코를 만났고, 그래서 유코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유코는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는 다정한 친구였지요.

저는 유코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만,

유코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늘 당당했고, 늘 멋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랬음에도 어쩐지 그의 훌륭한 샤미센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당신으로부터 들어 그런 느낌이 날 것이다 상상해 볼뿐이지요.

그래서 유코 역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저와 인연을 맺은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나 가슴 한 쪽이 먹먹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시마무라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그건 일부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에 대해 다 알지 못하고 시마무라도 그러하죠.

당신들의 벗임과 동시에 어떤 면에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으니까요.

성격이 다른 고마코와 요코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간이란 한 면만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당신이 더 잘 아실겁니다.

고마코와 요코를 직접 겪으신 분이니까요.

그런 당신이기에 이것을 읽자마자 이 글이 당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 챌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런 허락을 구하지 않고 글을 내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신들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봐온 나의 마음의 일부라고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당신들을 떠올리며 쓰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으니까요. 이것이 당신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유코를 잃고 많이 힘드실 줄 압니다.

이 글을 통해 저 또한 그랬듯 유코를 추억하실 수 있기를.

 

당신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유코를 떠올리며.

 

– 당신의 벗, 시마무라 드림.

 

추신. 놀라셨을 줄 압니다. 제 이름은 사토 시마무라가 아니라 가와바타 야스나리입니다.

혹시라도 저를 알아보실까 두려워 작은 장난을 친 것이 후회가 되어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신은 매우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다. 관린은 편지를 읽고는 그제서야 다시금 엎어두었던 페이지를 보았다. 작가가 사토 시마무라가 아닌 가와바타 야스나리로 되어 있었다. 야스나리라니. 관린은 도쿄의 사관학교 시절 그가 일전에 쓴 글을 본적이 있었다. 꽤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였다. 그가 야스나리였단 말인가.

 

관린은 고다쓰에 앉아 시마무라가 쓴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피상적인 태도로 서술된 그 글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확실히 자신과 지훈에 대한 이야기였다. 관린은 이미 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던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자신이 지훈을 사랑했다는 것, 그 말을 한 번도 해주지 못해서 그것이 스스로에게 오래도록 한으로 맺혀 있었단 것을 지훈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관린은 지배인에게 부탁해 새하얀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받았다. 눈과 같은 하얀 편지지의 맨 위 칸은 비워둔 채 관린은 담담하게 한 자 한 자 자신의 마음을 써내려갔다. 날짜까지 쓰고 나서 관린은 맨 위 칸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관린은 자신의 왼손을 쫙 펼치고는 눈을 감고 그 날을 떠올리며 오른손 검지로 글자를 새겨보았다.

‘뭐라고 읽나요?’

 

‘박지훈 이요.’

 

‘아. 바찌후?’

 

‘박. 지. 훈.’

 

‘성이 박이고 이름이 지훈이에요.’

 

그 음성은 또렷이 떠오르는데 어쩐 일인지 손에 새겨준 글씨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관린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다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새겨준 처음이자 마지막의 글씨를 기억하지 못하는 저에게 화가 나서 그랬다.

 

관린은 지배인을 통해 조선말을 할 줄 안다는 사람을 만났다. 관린이 박지훈이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글씨를 써주었다. 그 글씨를 보고 관린은 똑같이 따라서 편지지 맨 위 칸을 채웠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이름만큼은, 그의 나라 말로 써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그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관린은 문득 유코라고 불렀을 때 자신을 보던 그의 얼굴과, 지훈이라고 불렀을 때 자신을 보던 표정이 달랐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지훈이라고 불러줄 때마다 행복에 겨운 얼굴을 했다. 왜 지금에서야 알았을까. 관린의 눈물이 편지지 위로 후두둑 떨어져 잉크가 살짝 번졌다. 얼른 유타카 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야스나리가 끼워둔 것을 대신하여 야스나리 작품 부분에 책갈피 대신 그것을 끼웠다.

 

시마무라가 아니랍니다. 그는 야스나리였어요. 지훈. 이걸 읽어보세요. 당신과 나의 이야기입니다.

 

관린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았다. 은하수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 20184, 대한민국, 서울.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학생들의 인사가 대형 강의실 가득 울렸다. 지훈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그 위에 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18학번 화공과 박지훈 학생! 학생은 잠깐 나 좀 보고가요.”

 

웅성웅성 책을 챙겨 강의실을 나서는 소리들 사이로 교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어 지훈의 귀에 꽂혔다. 무슨 일이지? 지훈은 분명 기한에 맞춰 레포트를 제출했다. 크게 잘못 한 것이 없는데 자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은 궁금함에 반은 약간의 두려움에 떨며 단상위로 나아갔다. 교수는 책과 노트북 같은 자신의 집기들을 챙겨들더니 이후에 수업이 없느냐고 물었다. 수업이 있을 리가 없었다. 12시에 마치는 수업이라 이때부터 한 시간은 무조건 점심 공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교수님이 오후에 세미나가 있다고 한 시간이나 일찍 마치는 통에 11시에 끝나긴 했지만. 예의상 묻는 말에 없다고 대답하자 그럼 자신과 잠시 연구실에 가자고 한다. 지훈은 단정하게 알겠습니다. 대답하고는 버릇처럼 검지로 뿔테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린 후 교수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 자네가 제출한 레포트가 꽤 흥미로워서 불렀네.”

 

 

교수는 그 성격답게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네….”

 

지훈은 별다른 할 말이 없어 네 하고는 바닥만 보았다.

 

“아 자네가 잘못했다는 게 전혀 아니니 그렇게 땅만 볼 것 없네. 말 그대로 흥미롭다는 거야.”

 

그제서야 지훈은 고개를 들어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항상 뒷자리에 가까이 앉아 수업을 듣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서 교수님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인문학부 교수님이라니. 이 수업이 아니고서야 지훈이 영영 볼 일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금테 안경 뒤로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이 반짝거렸다. 아 정말 흥미로운가. 도대체 어떤 점이?

 

 

“보통 문학계에서 설국의 주인공인 시마무라를 두고는 다들 뭐랄까. 데면데면 한 느낌이라고들 하거든. 겉돈다고 하지. 고마코나 요코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과 같다고 보거든. 그런데 자네의 이번 레포트를 보면 희한하게도 그와 반대로 썼단 말이야.”

 

“아… 네…”

 

 

지훈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 잘못된 건 아니랬지, 흥미로운 거랬지. 그렇지만 그게 왜 흥미로운 일인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인터넷 감상평을 그대로 베끼면 안 되니까 다른 평론가들의 글이나 그 외의 인터넷 블로그들을 하나도 읽지 않고 쓴 감상평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두고 생각이 다양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라고 교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셔놓고는 갑자기 자신의 의견이 문학계와 다르다고 희한하다고 하는 게 지훈은 더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시마무라의 대사들을 보면 뭐랄까. 아무튼간 그녀들의 인생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고, 어떤 때 보면 잘 모르는 사람처럼도 이야기 하거든.”

 

“아무래도, 교수님 말씀에 따라 인터넷 블로그의 감상평이라던가 하는 것을 아무것도 참고하지 않아서 그런가봅니다.”

 

 

지훈의 대답에 교수님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검지를 지훈의 앞에 내밀고는 아니라는 의미의 까딱까딱 제스처를 보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을 거닐기 시작했다. 지훈은 배가 고파서 곧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약간 괴로워졌다.

 

 

“그 걸로는 설명이 안 돼. 게다가 요코와 고마코가 다른 인격체인 게 이상하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걸음을 멈추고 교수님은 지훈을 쳐다봤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 앞에 선 교수님 뒤로 따스한 봄 햇살이 작렬하여 지훈은 똑바로 교수님을 보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시마무라가 좋아하는 건 둘 다 인 것 같은데, 꼭 두 사람이 두 사람이란 법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지훈은 어쩐 일인지 자신이 말해놓고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수는 이내 너털웃음을 웃더니 자신은 지훈의 해석이 꽤나 마음에 든다며 혹시 이중전공을 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이중전공이라니. 아무리 공대생 치고 지훈이 문학을 좋아한다 해도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전 지금 전공이 좋아서요. 정중히 사양하는 지훈에게 교수는 나중에라도 생각이 들면 말하라고 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지훈은 일단 배가 고프니 뭐라도 먹자는 생각에 학관 지하 식당에 갔다가 식사를 하지 않고 와플만 하나 사서 물고 나왔다. 따뜻한 봄바람에 다들 옷차림이 가볍다. 지훈도 날이 따뜻하다는 생각에 와플을 입에 문 채로 파란 체크무늬 셔츠의 맨 윗칸을 풀었다. 순식간에 와플을 해치운 지훈은 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레포트를 다 썼는데도 왠지 지훈은 설국을 반납하지 않았다. 반납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읽은 부분을 또 읽고 또 읽으며 늘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그런 정도면 한 권 사서 읽을 법도 한데 또 웬일인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낡은 책 냄새가 가득한 일본 고전 문학 칸에 도착하고 나서야 지훈은 자신이 아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지. 그렇다고 사긴 싫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은 자신의 가방에서 설국을 꺼냈다. 얇은 책. 그동안 즐거웠다. 지훈은 그렇게 속으로 안녕을 고하고는 설국을 제자리에 꽂았다. 그랬다가, 첫 구절만, 첫 구절만 한 번 더 읽어보고 그러고 빠이 하자. 왜 인지 그런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서, 다시 설국을 꺼내들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헉. 지훈은 왜 자기가 첫 구절을 읊었는지, 갑자기 왜 이랬는지 놀라며 얼른 설국을 꽂았다. 원래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도서관이다. 놀라서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 워낙 사람이 없는 곳이라 그런지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은 책장에 숨긴 채로 고개를 쭉 빼어 보아도 사람이 없다. 고요한 곳이어서 목소리가 울렸을 거였다.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좀 떨어진 책장에서라도 들었을 거였다. 휴 다행이다.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창틀에 올려놓았던 가방을 챙기려 시선을 옮겼다. 옆으로 가방을 매다가 지훈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뭐가 이상한거지? 무언가 이상했다. 아주 미묘하게 이상해서,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지금 이 공간이 무언가 이상했다. 뭘까. 무슨 일일까. 왜 이상하다고 느꼈을까. 지훈은 설국을 꽂아 넣은 책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이거였구나. 설국은 얇은 책이다. 게다가 오랜 시간 두꺼운 책들 사이에 눌려있어 더 말라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딘가 두툼해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아무것도 안 껴놓았는데? 지훈은 책을 읽을 때 페이지를 기억해두는 편이라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끼워둔 것도 아니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었다.

 

지훈은 서둘러 설국을 꺼내어 펼쳤다.

 

툭.

 

펼치자마자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뭐지? 매우 빛이 바랜 낡은 종이로 된 편지봉투였다. 아마도 먼 시간 전에 순백색이었을 흰 봉투는 누렇게 바래었고 얇아져 있었다. 이게 뭐지? 지훈의 안경 알 속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것은 본 일도 없고 본 적도 없었다. 열어봐도 될까? 지훈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 것일 게 분명한데도 열어선 안 된다는 일말의 도덕심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래, 열어서 본 다음에 다시 집어넣으면 돼. 지훈은 얼른 자신의 도덕심과 타협하고는 조심스레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도 역시 누렇게 바랜 편지지가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혹시라도 바스러지지 않을까 조심스런 손길로 편지를 펼쳤다. 생각보다 단단해서 쉽사리 찢어지거나 할 것 같진 않은 재질의 종이였다. 응?

 

그 안에는 온통 일본어가 가득했다. 지훈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었지만 그 등급이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한자가 뒤섞인 일본어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빼곡한 일본어들 사이로, 맨 위에 보이는 글씨가 지훈을 두근거리게 했다. 분명 한국어였다. 한국어이기만 했더라도 지훈은 놀랐을 텐데, 그 글씨는 분명…. 약간은 비뚤지만 단정한 글씨. 그것은 분명 지훈이었다. ‘박 지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서툰 한글로 쓰인 자신의 이름에 지훈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느라 편지가 툭 털어졌다. 깜짝 놀라 서둘러 편지를 주워들고 어디 찢어진 덴 없는지, 어디 부스러지진 않았는지 이리저리 확인하고 나서야 지훈은 다시금 편지의 첫머리를 보았다. 다시 보아도 분명 ‘박 지훈’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다. 나에게 보낸 편지? 그런 건가? 하지만…. 자신은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른다. 게다가 이 편지지는 매우 낡아 보인다. 지훈은 읽지 못하는 일본어를 후루룩 따라갔다. 가끔 가다 아는 단어들이 히라가나로 나오는 경우가 있긴 했다. 정말 드물게. 그렇게 세 번째 장까지 이르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지하게 많았던 건가. 편지를 세 장이나 쓰다니. 지훈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감탄을 보내며 편지 맨 아래를 보았다. 날짜가 쓰여 있었다. 1937년… 1월… 5일. 37년? 37년이라니. 지훈은 편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눈을 부비려다 안경에 걸렸다. 창틀에 편지를 얹어두고는 안경닦이로 꼼꼼히 안경을 닦으며 지훈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1937년이라니. 그 때 쓴 편지에 내 이름이 있고, 그리고 그 편지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에 지훈은 너무 놀라, 놀랍다는 표현이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세상에 지훈이란 이름은 많다. 어디선가 가장 많은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지훈이 있었다는 통계도 본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1937년에 한국에 지훈이란 이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왠지 이 편지는 꼭 자신에게 온 것이라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는 건가. 공대생인 지훈이 전혀 믿지 않았던 육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믿어야만 할 것 같았다.

 

지훈은 조심스레 편지를 가방에 넣고는 어학 칸으로 가서 일본어 교재를 찾았다. 도서관 외진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어 올려놓고 구글 번역기를 켰다. 일단 박 지훈에게 는 아는 것이니 패스하고…. 지훈은 1년 전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일본어와 한자를 하나씩 꼼꼼히 입력해서 번역기를 돌렸다.

 

 

 

 

– 19371,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아침에 눈을 뜬 관린은 식사 후 다시금 야스나리가 쓴 글을 읽어야 겠다 마음먹었다. 그의 글 속의 요코와 고마코는 확실히 지훈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시마무라에게 털어놓았던 말들, 그 때의 감정들이 떠올라서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탓이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관린은 고타츠 위에 둔 문예춘추 1월호를 집어 들었다.

 

어.

 

이상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뭐지, 뭐가 이상한거지? 분명히 이상했다. 관린의 잘생긴 눈썹이 한 번 꿈틀했다.

 

어?

 

관린은 얼른 문예춘추를 펴보았다. 없었다. 분명 어젯밤 써 내렸던 편지가 없다. 야스나리의 편지 대신 끼워두었던 자신이 쓴, 지훈에게 쓴 편지가 없어졌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관린은 서둘러 책을 내려놓고는 동백실을 꼼꼼히 살폈지만 애초에 짐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다다미 바닥에 올려져 있는 것이라고는 고다쓰와 화로, 이불 한 채가 다여서 뒤져볼 구석조차 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지배인에게 혹시 청소하다 발견한 것 아니냐며 물었지만 역시 편지를 보았다는 말을 듣진 못했다.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지 않은 이상에야 이렇게 사라질 리가 없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관린은 그 뒤로 한 달을 더 머물었다. 관린과 지훈이 떠난 뒤로 마을에는 별스런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사실 별스럽다고 할 수는 없는 소문이었다. 관린이 남자게이샤에 빠져 그와 함께 도망갔다는 소문이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무마시켜준 것은 시마무라였다. 어떻게 무마시켰는진 모르겠으나 지배인으로부터 전해듣기로는 그랬다.

춤 선생은 7년 새 병환으로 유명을 달리 했다고 하였다. 관린은 히로시의 무덤을 찾았다. 누가 돌보지도 않는지 눈이 가득 덮혔음에도 풀이 무성한 것이 티가 났다. 비석을 보니 그 옆이 지훈의 춤 선생이자 히로시의 어머니의 무덤이었다. 관린은 잡초를 뜯어내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관린은 머무는 동안 주로 삼나무 숲을 산책하거나 장지문을 열고 산을 보거나 했다. 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온천장의 겨울을 머문 뒤 봄이 올 것 같은 기운이 돌자 바로 짐을 꾸렸다. 지배인에게 야스나리가 오면 전해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의 대만 주소를 남겼다. 그러고 나서 주저 없이 대만으로 갔다.

 

 

 

 

 

 

– 20184, 대한민국, 서울

 

 

 

편지의 모든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강 번역기를 돌려 해석된 내용은 삼나무 숲에서 산책한 일, 일본의 전통 악기 연주를 들은 일,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한 일, 기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였다. 누군가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편지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박 지훈’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엄청 절절한 내용이었는데, 그 사람은 박 지훈이란 사람을 사랑했던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쉽다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랑한다고, 죽을 때 까지 그럴 것이라고. 잉크가 번진 것이 세월이 오래 지나 그런 것일 것 같긴 했지만 왠지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쉽게 떠올라 괜히 자신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그런 감정적인 부분과 별개로 편지 속 ‘박 지훈’이 자신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시공을 통과할 수 있지 않고서야 1937년에 자기가 저기에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기억조차 없었다. 공대생 박지훈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1937년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에게 쓴 편지가 우연히 그저 우연히 거기에 어쩌다 보니 꽂혀있었고 그걸 자신이 발견했다는 것.

 

다시 꽂아놔야겠지.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왠지 아쉬웠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야. 지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국이 있는 칸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지훈은 번쩍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편지를 써서 저기에 끼우면 그러면 그 편지도 이동할까?

 

에이. 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소리냐 공대생아. 자신이 배운 어떠한 공식으로도 그것은 불가했다. 게다가 그 편지‘도’ 이동한다니. 저 낡은 편지가 이동해서 여길 왔다는 거야? 저건 원래 저기에 어쩌다 보니 끼워져 있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발견한 것뿐이야.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냉정히 생각해보았을 때 지훈은 설국을 며칠이고 붙들고 있었고, 단 한 번도 그런 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편지가 매우 얇아서 끼워도 태가 안 나는 것이면 몰라도, 처음 편지를 발견했을 때 책이 두터워져서 발견한 것이 아닌가. 애초에 편지지 세장이 들어있는데 창호지도 아니고 얇을 수가 없는 노릇이긴 했다. 어쩌면.

 

어쩌면 지훈이 처음에 내린 결론이 오히려 과학적으로 잘못된 결론인지 모른다. 정말로 툭 튀어나온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일정한 규칙에 의해 튀어 나온 것이라면 자신도 그것을 이동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지훈은 낡은 편지를 손에 든 채 도서관 밖을 나왔다. 서둘러 학관에 자리한 문구점에 들어갔다. 하얀 종이 위에 은회색 줄이 그어져있는 밋밋하고 무난한 편지지를 골랐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나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낡은 편지를 펼쳐 맨 밑에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자를 그리다 시피 맨 윗줄에 적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賴冠霖. 괜히 울컥하는 느낌에 지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글씨인데, 그런데 익숙한 느낌에 핸드폰 초록창에 한자사전을 입력하고 손으로 글씨를 써보았다. 뇌관림? 이름도 참 이상하네. 한국 사람인가? 근데 왜 일본어를 써. 일본 사람인가? 갓 관자에 장마 림이다. 참 이상하네. 편지지 위로 뚝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지훈은 울고 있었다. 태어나서 운 기억이라곤 초등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서 운 게 다다. 알지도 못하는 이름에 눈물을 흘리다니. 지훈은 혼란스러웠다. 왜지, 뭐지, 이 기분은? 지훈은 서둘러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히라가나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편지지 한 장의 반도 다 채우지 못했다. 반이라는 말도 하기 어렵게 몇 줄을 겨우 썼다. 지훈이 아는 일어는 매우 기초적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는 짐은 그대로 둔 채 설국이 꽂혀있는 서가로 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설국을 펼쳐 들고는 편지봉투를 넣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꽂았다. 눈을 질끈 감고 얼마가 지났을까. 지훈은 조심스레 실눈을 떠보았다. 설국이 잘 꽂혀있었다. 내 편지가 갔을까. 지훈은 설국을 조심스레 빼어들고는 펼쳤다.

 

빼어들었을 때부터 알았다. 편지는 여전히 그대로 거기에 꽂혀 있었다.

 

 

 

 

 

 

– 19377, 대만, 타카오高雄.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창이었다. 관린이 살던 동네의 지명마저도 일본식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통탄할 일이었지만 관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총상은 더 심해졌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대만에 오자마자 찾은 병원에서 의사가 말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사실 관린은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총소리가 울리던 그 날 이미 자신도 지훈을 따라 죽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린은 소포를 받았다. 상자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보고 관린은 상자 안 물건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분명 책이겠지. 어떤 것일 까 궁금해하며 열었다. 책의 표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雪國』.

 

관린은 점심을 대강 해결하고 나서 책을 집어 들었다. 매우 얇았다. 첫 페이지를 폈다. 전에 읽었던 것과 다른 구절로 소설은 시작되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정말로 썼네. 관린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그 뒤로는 전에 보았던 <저녁 풍경의 거울>과 같은 글이 이어졌다. 기차에 울리는 역장님! 역장님! 하는 목소리, 창에 떠오른 그의 눈매를 지켜보는 남자. 관린이 언젠가 야스나리에게 말했던 내용들이 조금씩 바뀌고 은닉되어 펼쳐졌다. 지훈이 살아있다면 벌써 스물다섯일 것이다. 아직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던 지훈에게 관린은 차마 입도 맞추지 못하였다. 수줍게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관린은 눈 밑이 시큰거렸다. 후텁지근한 대만의 여름 습기로 총상을 입은 자리가 기분 나쁘게 욱신거렸다. 관린은 반년 전 지배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문예춘추를 꺼내보리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20184, 대한민국, 서울

 

 

 

그럼 그렇지. 지훈은 잠시나마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었던 걸까 생각했다. 이 모든 게 헛일이었다니. 고등학교에서 잠깐 배운 일본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 쓴 편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봄바람 때문인가. 요즘 나답지가 않아. 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도로 꺼내들었다. 그리고 낡은 편지를 다시 가져다가 꽂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가를 나섰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지훈은 공대 건물에서 시험을 쳤다. 잦은 시험은 공대생들의 숙명이었다. 대부분의 1학년 공대 과목은 시험이 1차부터 4차까지 있었다. 친구들이 오늘 끝나고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어차피 웬만큼 잘 치지 않는 한 교수님들이 C나 D를 주고 강제로 재수강을 시키려들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런 친구들이었다. 시험이 계속 남아있는데 다들 미쳤군. 9시부터 두 시간동안 시험을 치고 나서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잔디밭에서 술을 까자는 동기들을 뿌리치고 지훈은 내일 있을 시험을 위해 중앙도서관으로 왔다.

 

모든 것에 규칙이 있고 법칙이 있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공대생인 지훈의 세상에는 모든 것에 규칙이 있고 법칙이 있었다. 잠깐. 내가 처음에 그 편지를 어떻게 발견했더라? 생각해보니 편지도 그냥 발견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견된 것이라면, 그 과정과 똑같이 해야 내 편지가 가는 걸지 모르잖아.

지훈은 다시 서가로 걸어갔다. 설국 앞에 섰다. 자 어떻게 했더라. 얼마 전 일이다. 설국을 반납하길 고민하다가 결국 꽂아 넣었지. 그랬다가 어쨌더라… 아!

분명히 지훈은 설국의 첫 구절을 읊었다. 그것도 여기서. 말을 하면 안 되는 이 도서관에서 읊었다. 그렇다면.

 

용기가 필요했다. 누가 뭐라고 타박을 하면 아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지훈은 설국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편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꽂았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간을 그러고 서있었던 걸까. 왠지 간절해진 마음에 전보다 더 긴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지훈은 실눈을 떴다. 책이 여전히 꽂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천천히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책을 꺼내들었다.

 

어!

 

펼쳐보기도 전에 알았다. 낡은 설국 책을 펼쳐서 후루룩 넘겨보았다.

 

편지는 거기에 없었다.

 

 

 

 

 

 

 

– 19377, 대만, 타카오高雄.

 

 

 

관린은 오랜만에 문예춘추를 꺼냈다. 대만으로 돌아와서 거기에 꽂아놓고는 한 번도 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책꽂이 맨 아래 칸에 꽂혀있었다. 맨 아래 칸은 전부 문예춘추가 꽂혀있었다. 야스나리가 료칸에 맡기고 갔던, 관린을 전해주라던 그것들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 뒤로 야스나리는 자신의 작품이 실렸다며 두 번인가 더 문예춘추를 관린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관린은 대만으로 가져온 문학잡지들에서 야스나리의 작품만을 읽었다. 1935년부터 조금씩 연재된 야스나리의 그 작품은 야스나리가 고백한 것처럼 관린과 지훈의 이야기였다. 책을 빼내어 들자마자 무언가 툭 떨어졌다.

 

바닥에는 새하얀 편지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겉에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새하얀 봉투.

 

어?

 

관린은 몇 달 전 자신이 지훈에게 쓴 편지를 떠올렸다. 아. 그게 여기 꽂혀있었네. 이상하네. 그 땐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주워드는 순간, 관린은 이상한 느낌에 다른 손에 들려있던 문예춘추를 떨어트렸다. 종이의 재질이 자신이 사용했던 봉투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크기가 더 작은 것 같다. 그리고 얇다. 이게 뭐지 싶어 관린은 봉투안의 편지를 꺼냈다. 얇다. 한 장. 분명 세 장을 썼었는데.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편지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분명 맨 위에 적힌 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악필로 비뚤배뚤 적힌 그 이름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비일까요?’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관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관린은 차마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얼핏 시야에 들어온 짧은 내용이 금방 끝날 것이 분명하여 그를 망설이게 했다.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지훈과의 산책에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편지 속 글씨들이 일렁였다. 총상을 입었던 자리에 아픔이 느껴졌다. 관린은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햇살이 들이치는 다다미 바닥으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천천히 스며들었다. 다시금 눈을 뜨자 모든 것이 선명했다. 꿈이 아니다. 그렇게 관린의 이성이 말했다. 관린의 이름아래 부분에 햇살이 내려 하얗게 빛이나 보이지 않았다. 관린은 빛이 덜 들이치는 조금 어두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라이관린에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박지훈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당신의 1937년 1월 5일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신은 일본인인가요? 왜 일본어로 편지를 썼나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박지훈은 일본인인가요? 박지훈은 누구인가요?

이 편지는 미래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맨 밑의 날짜를 보고 관린은 깜짝 놀랐다. 2018年 04月 11日 그렇게 적혀있었다. 2018? 2018년이라고? 그럴 리가. 누군가의 장난인가. 관린은 혼란스러웠다. 박지훈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2018년의 박지훈이다. 2018년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시간이다. 게다가 ‘당신의 박지훈’ 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나보고 박지훈이 누구냐고,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미래의 박지훈은 자신이 아는 그 박지훈이 아닌 것일까. 한국이라니.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인들의 단체이름에 간혹 한국이라는 이름이 들어갔던 것 같다. 미래에는 조선이 한국이 되는 건가? 한국인이라고 표기할 정도면 조선이 독립하는 건가? 아니 그 전에 미래에서 편지가 올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쓴 자는 내가 쓴 편지를 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편지가 이 편지를 쓴 사람한테 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관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혹시 몰라 다시금 문예춘추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역시 자신이 쓴 편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이 사람은 일본어가 매우 서툰 것 같다. 글을 쓴 것을 보니 히라가나 밖에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이 아는 박지훈은 글도 배워 쓸 줄 알았으므로 이정도로 서툴지 않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글씨체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일전에 한 번 관린은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악필이 부끄럽다며 얼굴이 빨개졌었다. 설마….

 

관린은 편지지와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편지를 써내려가지 시작했다. 이번엔 최대한 해석이 쉽도록 히라가나로만 쓰자 싶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인지, 대만도 독립을 하게 되는 것인지, 미래의 박지훈은 조선말을 주로 사용하는지, 조선의 상황은 어떤지…. 그렇지만. 관린은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편지를 잠시 중단하였다. 실은 정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정말 미래의 사람인지, 그렇다면 1930년 우리의 만남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당신의 모습은 어떤지, 여전히 고운지, 미래에도 남자로 태어난 건지, 남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은 있는지, 혹시라도, 나를…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건지.

 

관린은 주저했다. 미래의 지훈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관린이 사랑하는 지훈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차가운 만주벌판에 묻고 왔다고 생각했다. 지훈도, 자신의 마음도, 하나 뿐인 사랑도. 그런데 미래의 지훈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가 아닌데. 갑자기 관린은 자신의 지훈에게 미안해졌다. 애초에 편지를 왜 썼나 싶었다. 그래서 관린은 쓰던 편지를 구겨서 버렸다. 그리고 문예춘추를 제자리에 꽂고 그 옆에 새로 온 책인 설국도 꽂았다.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 20184월 말, 대한민국, 서울

 

 

 

4월의 끝자락. 지훈은 한동안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자신의 편지가 어디론가 간 것은 알았지만, 그 편지가 어디로 갔을지 혹시 1937년의 과거로 간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간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다만 만일 나에게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받았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답장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얼른 편지를 읽어보고 싶다. 뭐라고 왔을까. 매일 궁금했지만 현실은 공대 도서관에 처박혀 시험기간 나눠주는 간식을 가끔 받아먹으면서 공학용 계산기나 두드리고 있는 게 다였다. 아 시험 언제 끝나지. 영어 원서를 뒤적거리다 보면 차라리 영어로 편지가 오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곤 했다. 그렇게 어떻게 중간고사 기간을 넘기고 다니 곧 5월이었다. 지훈은 3차 시험이 있기 때문에 곧 또 다시 시험기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중간고사 및 2차 시험이 모두 끝난 기념으로 편지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분명히 답장을 보냈을 거다. 분명히!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이제는 뭐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안하무인 식으로 중얼 중얼 주문외듯 외고 설국을꺼내들었다.

 

어?

 

책을 후루룩 넘겼다. 왜. 왜. 왜?

 

낡은 책의 종잇장은 멕아리 없이 휙휙 넘어갔다. 제법 뜨거워진 봄볕이 내리쳤다. 설국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 19381, 대만, 타카오高雄.

 

 

 

관린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대만에도 겨울이 왔다. 대만의 겨울은 겨울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게 따뜻했다. 총상이 너무 아려서 관린은 그 날도 누워 있었다. 직감적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훈이 떠올랐다. 지훈은 죽는 순간 후회되는 일이 없었을까? 문득 죽음의 낭떠러지 앞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무언가를 말하던 지훈이 떠올랐다. 무어였을까. 마지막 순간 지훈은 미소 지었다. 한 떨기 꽃 같은 그는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입에 담은 채 죽어갔다.

 

관린은 벌떡 일어났다. 후회될 것 같았다. 지훈은 용기를 냈다. 죽을 수 있는데도 끝까지 말하려 애썼다. 고통을 이겨내고. 문예춘추에 꽂아두었던 편지를 꺼내 다시금 읽었다. 어쩌면 이건. 이건 신이 돕는 일인지도 몰랐다. 지훈을 만나게 해주려는 신의 도움. 그런 것인지 몰랐다. 과거의 지훈이건 미래의 지훈이건 모두 그라면. 그가 맞다면 그렇다면.

 

관린은 히라가나로 서둘러 편지를 썼다. 새하얀 눈을 닮은 편지지 위의 만년필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퍼런 쪽빛을 띤 글씨들이 바삐 굴러갔다. 다시 편지를 보낼 수 있을지 얼마나 여러 번 보내질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자신에 대한 것과 저편의 사람이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을 서두에 모두 적었다. 온천장에 묵었다가 지훈을 만난 일, 서로 사랑하게 된 일, 독립운동을 한 일, 그런 것들을 적었다. 그러고 나서 최대한 궁금한 것을 모두 적었다. 조선의 상황, 대만의 상황, 자신의 편지를 어떻게 받게 되었는지, 지훈은 지금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는 지, 하는 것들을 물었다.

그리고. 미래의 지훈이 정말 지훈일까. 관린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사진을 부탁했다. 지금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미래의 지훈에게도 사진이 있겠지. 그것을 동봉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군사학교 시절 사진도 하나 동봉하였다. 잘 도착할까.

 

관린은 처음 했던 것처럼 1985년도 1월 문예춘추 야스나리 작품에 편지를 끼웠다. 그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가주길. 더 이상 후회를 남기지 않게 해주길, 제발.

 

그 날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편지는 그대로 있었다.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관린은 통증이 더욱 악화되는 것 같았고 그저 이대로 죽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20185, 대한민국, 서울.

 

 

 

학교는 축제준비로 떠들썩했다. 3차 시험 몇 개를 치르고 지훈은 도서관에 가보았지만 여전히 편지는 없었다. 왜 일까. 그게 마지막 이었던 걸까. 지훈은 자기가 먼저 편지를 또 보내보기로 결심했다. 지난 번 보낸 편지에 이 편지를 받으셨다면 답장을 달라고 쓰는 것을 깜박했다. 다시 한 번 편지를 보내보자. 그러면 그 사람도 답장을 보내올 거다. 그럴 거다. 설국의 첫 구절을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집에서 써 온 편지를 끼웠다. 그리고 설국이 꽂힌 서가에서 뒤돌아 기다렸다. 휴대폰 시계를 보았다. 꼬박 5분이 지났다. 저번대로라면 이만큼 지나고 나면 편지가 갔어야 한다. 다시 뒤돌아 서가를 보았다. 지훈은 당황했다. 책의 가운데 하얀 봉투의 끄트머리가 비죽이 튀어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아. 탄식하고서 책을 꺼내 편지를 집어들었다. 고르지 못한 겉봉의 글씨. 자신의 글씨였다. 들고 있던 편지 봉투위로 왠지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두꺼운 뿔테안경 아랫부분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였다. 왜지. 또 눈물이 났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일까. 마음이, 내 마음이.

 

그 날 지훈은 집으로 일찍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울창한 삼나무 숲을 누군가와 함께 걸었다. 어마어마한 눈이 뒤덮은 삼나무 숲. 분명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신은 신이 났고 여자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앞서 걷고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었으나 뒤따르는 누군가가 분명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고 자신을 마주했다. 올려다보았다.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키가 꽤 큰 남자.

 

“눈송이가 내려앉았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한 목소리.

 

지훈은 화들짝 잠에서 깨었다. 헉헉 거리는 지훈의 거친 숨소리사이로 그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꿈이지, 삼나무 숲이라니. 편지에 있던 그 숲이다. 키가 큰 남자. 손이 하얗고 커다랬던. 왠지 그 목소리는, 그 목소리는 편지의 주인의 것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훈은 어쩐 일인지 또 울고 있었다. 안 되겠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희망을 걸어보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지훈에게 과거로부터의 편지를 받는 일은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모든 걸 걸고서라도 꼭 다시 편지를 받아내고 말거다.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 19381, 대만, 타카오高雄.

 

 

 

혹시.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하루를 그렇게 손 놓고 보냈던 관린은, 1985년 1월호 바로 다음 편인 문예춘추를 꺼내들었다. 관린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미래로 보내졌을 자신의 편지. 그것을 보낸 날을 떠올려보았다. 문예춘추에서 야스나리의 작품이 시작되는 칸에 꽂았었다. 아무래도 야스나리의 작품이 어떤 통로가 되는 게 분명했다. 편지를 써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 날 지지미 산지에 다녀오느라 오후가 되었다. 지배인으로부터 잡지들을 받아들고 그것들을 읽고, 편지를 쓰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것을 꽂은 것은 결론적으로 저녁. 앗. 왠지 그 시간은 지훈을 처음으로 만난 시간인 것 같다. 기차에서 처음으로 지훈을 의식했던,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던 시간. 그렇다면 한 없이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관린은 저녁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대강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관린은 1월호의 다음편인 문예춘추에서 야스나리의 작품이 있는 페이지를 열었다. 편지를 끼웠다. 두려웠다. 가지 않으면 어쩌지. 관린은 다른 문예춘추들을 제자리에 꽂으러 서재에 갔다. 그리고 문제의 문예춘추도 꽂아놔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거실로 갔다. 문예춘추를 들자마자 알았다. 편지는 거기에 없었다. 약간은 울컥한 기분이 되어 관린은 잡지를 들쳐보았다. 정말 없었다. 그렇다면. 관린이 미래의 지훈에게 보낼 수 있는 편지는 한정적인 게 분명했다. 조금은 울컥한 기분이 되었다. 미래의 지훈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기회가 다시금 주어졌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결국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관린을 우울하게 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관린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 20185, 대한민국, 서울.

 

기대치 못한 새로운 편지에 지훈은 당황했다. 간절히 바라긴 했다. 하지만 정말 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저 편으로 자신의 편지가 도착한 게 분명했다. 진짜였다. 정말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른 공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이 사람도, 이 사람도. 이번에도 편지는 두터웠다. 편지지에서 편지를 쉽게 꺼내기 위해 뒤집어 들었다. 툭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뒤집어진 채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사진인 것 같았다. 사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뒤집었다.

 

세상에.

 

지훈은 서가에서 외마디 외칠 뻔하였다. 흑백사진임에도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귀공자가 같이 생긴 남자였다. 언젠가 국사 책에서 본 듯한 군사학교 옷을 입고 있다. 잘생겼다. 그 말이 절로 나올 법한 남자. 순간 지훈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아 왜 이러지. 지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서가 앞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레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았을 때 흐릿하여 보이지 않던 얼굴, 그 얼굴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사진 속 남자였다.

 

후아. 후아.

 

지훈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편지를 들고는 아무데나 앉았다. 편지 속 그 남자가 바로 꿈 속 그 남자다. 지훈은 마음 한편으로는 그 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그 내용을 꿈으로 꾸는 것처럼, 지훈에게도 편지가 강렬하게 다가와서 그런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과거의 그 지훈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조심스레 사진을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 편지를 꺼냈다. 세 장. 전부 히라가나로 쓰여 있다. 이 사람은 일본 사람이 아니다. 이게 무슨 단어지. 한자로 쓰여 있다. 검색해보니 대만이다. 아 대만사람이다. 과거의 지훈과 일본에서 만났다. 과거의 지훈은 조선 사람이지만 일본에서 살았다. 그래서 지훈이 읽을 수 있도록 일본어로 편지를 썼다. 이 사람은 조선말이라곤 박지훈 세 글자 밖에 모른다. 그리고…. 아 해석이 어려웠다. 아무리 히라가나 투성이라도 어려웠다. 지훈은 그 길로 곧장 학교 근처 일본어 학원을 등록했다. 도서관에서 지훈은 번역기를 돌려 편지를 해석했다. 꼬박 이틀이 걸렸다. 저번과 달리 모두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지훈은 해석한 내용을 공책에 간단히 메모해 보았다.

 

– 편지를 쓴 사람(뇌관림)은 대만 사람.

– 뇌관림은 라이관린으로 읽는다. 라이가 성, 관린이 이름.

– 지훈과는 일본 니가타현 온천장에서 만났고, 지훈은 그곳에 살고 있었다.

– 지훈이 읽을 수 있도록 일본어로 편지를 썼다.

– 관린은 조선말은 박지훈 밖에 모른다.

– 대만은 현재 일본 치하에 있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 관린씨는 둘 다 독립했는지 궁금해 한다.

– 관린씨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지금은 ×

– 내가 어떻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 관린씨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단편 소설이 실린 문예춘추를 통해 이 편지를 보내고 있다.

– 지금의 나에 대해 궁금해 한다.

설마. 지훈은 갑자기 자신의 멍청함에 놀란다. 처음 관린이 보낸 편지의 내용들은 미묘하게 자신이 읽은 설국과 비슷한 부분들이 있었다. 설마. 설마. 지훈은 놀라움으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과거의 지훈이 설국의? 일단 알 수는 없으나 꿈속의 자신의 복장은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게이샤의 복장이었다. 일단 모든 것은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이 사람의 시간은 1938년이다. 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와 달리 마음은 단순했다. 사진을 통해서 본 얼굴, 아직은 나의 전생이 그가 사랑했던 지훈인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이번 생에선 태어나 처음 본 얼굴의 그. 약 80년 전의 사람, 한 세기전의 사람. 그런 사람에게 지훈은 다정함을 느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 사랑을 느꼈다.

 

지훈은 전에 쓴 편지를 참고하여 다시금 편지를 썼다. 내용을 많이 고쳐야 했기에 다시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일본어 학원의 선생님을 졸라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다행이 친절한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아님에도 편지를 자상하게 봐주었다. 그렇게 편지를 쓰는데에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빨리 일본어를 마스터해야지. 지훈은 다짐했다. 그리고 사진을 골랐다. 아 잘나온 사진 없나 잘나온 사진. 거울 앞에 선 자신은 형편이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잘생겼는데. 나는 이렇게 두꺼운 안경이나 쓰고. 과거에 나도 안경을 썼나. 궁금하니 내용을 추가 해야겠다 생각한다. 엄마 나 잘나온 사진 없어? 너 전에 안경 안 쓰고 찍은 거 있잖아 졸업사진인가 그거. 그게 제일 낫지 뭐.

지훈은 어렸을 적부터 눈이 나빠져서 두꺼운 안경을 썼는데 딱 한 번 안경을 쓰지 않고 사진을 찍은 날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사진 촬영 날이 그 날이었다. 안경을 쓰는 애들이 자기는 렌즈 끼고 올 거라고 해대는 통에 괜히 지기 싫어서 자기도 렌즈를 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가 두 시간 동안 렌즈를 못 껴서 눈이 새빨개지고 눈물범벅이 됐었다. 겨우 렌즈를 꼈을 땐 좀 놀랐다. 와 나 생각보다 잘생긴 건지도. 남자애들이 득시글대는 남고였으나 지훈의 그 날 만큼은 난리가 났었다. 선생님들조차 박지훈 맞냐고 몇 번을 물었다. 너 대학가면 꼭 라식이든 라섹이든 하라고 다들 그랬었다. 이게 여자애들이 보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안경 벗고 미모 포텐 터지는 그런 건가 싶어 처음엔 좋았는데 그 날 이후로 과도한 관심이 쏟아져서 지훈은 절대로 안경을 벗지 않기로 결심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던 날이었다.

좋아.

 

지훈은 졸업사진을 비장의 무기처럼 편지봉투에 넣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그 전에 편지를 보내는 것에 성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 왠지 모르지만 그 시간에 가능한 것 같았다. 좋아. 이것도 될까? 지훈은 자신이 좋아하는 초코바의 미니 버전을 봉투에 집어넣었다. 추신도 썼다. 드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입니다. 욕심인가.

 

 

“와.”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초코바로 인해 두툼했던 편지를 끼워 꽂기가 무섭게 편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193811, 대만, 타카오高雄.

 

 

 

아침부터 관린은 기분이 좋았다. 관린의 일상은 서재에서 하루 세 번, 모든 문예춘추들과 설국을 펼쳐 혹시라도 왔을 편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무려 몇 달을 그래왔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라는 것이 그를 버티게 했다. 건강이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편지를 끼워두었던 문예춘추가 봉긋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거실 다다미 방에 앉아 탁자 위에 편지를 올렸다. 새하얀 봉투, 저번과 같은 편지봉투 안에서 비닐로 싼 무언가가 나왔다. 일본말도, 조선말도 아닌 어떤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미국의 글씨였다. 그 아래 작게 적힌 읽을 수 없는 조선말들. 코에 대고 맡아보니 달달한 것이 초콜릿 냄새였다. 그리고 편지를 여니 가운데에 끼어있는 사진. 신기하게 선명한 칼라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회색 양장을 입고 하늘색 체크무늬 타이를 맨 지훈이 있었다.

 

 

“아.”

 

 

입 밖으로 외마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8년 만에 보는 얼굴, 약간 긴장한 듯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그 얼굴은 박지훈이었다. 양장을 입으면 이런 모습이구나, 다부지고 멋있네. 눈매는 여전하구나. 너무 아름답구나. 관린은 무너지듯 울었다. 관린의 울음소리가 아무도 없는 집안의 적막을 깨트리고 마당까지 이어졌다.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자신의 세상에 지훈이 없다는 것이 또 다시 새겨져서 관린은 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지훈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전생의 제가 관린씨의 박지훈인 것 같아요.

꿈을 꿨거든요. 삼나무 숲 꿈.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조선은 1945년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서 지금은 대한민국이라고 부르고 줄여서 한국이라 한다는 설명과, 자신은 대만도 일본의 식민지였는지 몰랐지만 찾아보니 역시 1945년에 독립했다더라.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라. 하는 설명들이 차분하게 쓰여 있었다.

 

제가 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저는 한국의 대학생이에요. 공대생인데 아실 지 모르겠어요. 전 올해 스무 살이에요.

사진을 보아 아시겠지만 남자입니다. 근데 평소에는 안경을 써요.

그리고 자기소개로 이어졌다. 스무 살이라니. 관린의 지훈이 맞이하지 못한 나이를 미래의 지훈은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관린은 매우 행복해졌다. 사진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즉 열아홉 살 때 찍은 것이라고 했다. 사진 속의 옷은 교복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잡다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술술 쓴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 대학교를 가려면 수능시험이라는 것을 봐야 하는데 그게 매우 어려워서 학창시절 공부만 했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공대생이라서 시험을 엄청 자주 본다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시험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신은 여덟 살 때부터 시험을 봐왔다고 했다. 한국이란 곳의 교육은 엄청나구나.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미래의 지훈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관린의 외모를 칭찬했다. 너무 잘생겼다. 정말 이렇게 생겼냐. 포토샵 아니냐. 이 부분은 가타카나로 쓰여있었는데 관린은 포토샵이 뭐지 생각했다. 과거의 지훈은 이런 얼굴을 매일 봤단 거냐. 과거의 지훈이 너무 부럽다. 나도 실제로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하는 말들. 실제로 만나고 싶다. 그 부분에서 관린은 목이 메었다.

 

ps. 드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입니다.

 

날짜보다 더 아래에 적힌 글. 영어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뒤의 글씨는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의 지훈은 생각보다 더 귀여워서 관린은 보조개가 패이도록 웃었다. 비닐을 뜯어 초코바를 입에 가져갔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처음 기차에서 보았던 지훈이 떠올라서, 또 다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함께 식사를 하며 이 집 라멘 별로인 것 같아요 속삭이던 지훈이 떠올라서, 와그작 와그작 초코바를 씹을 때 마다 함께 걷던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 눈이 떠올라서 관린은 또 다시 소리 내어 울었다.

 

 

 

 

 

 

– 20186, 대한민국, 서울.

 

 

 

어느 새 기말고사와 4차 시험까지 끝이 났다. 피를 말리는 시험들이었고 어떤 것은 C가 나올 것 같기도 해서 두렵긴 했지만 지훈은 기분이 좋았다. 내내 기분이 좋아보여서 사람들은 왜 저러나, 조증이 아닐까 그런 소리까지 했다. 지훈은 방학과 동시에 일본을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일본어도 엉망이었다. 그래 알바를 하자. 과외를 해보기로 결심하고는 아파트에 과외전단지를 붙여두었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전단지의 번호가 벌써 없었다. 역시 기분 좋은 일 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이 계속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관린의 편지 때문이었다. 관린은 어쩌면 별 이야기도 아닌 자신에 이야기에 친절하고 다정하게 응해주었다. 군사학교 시절 자기도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정 힘들면 망쳐도 괜찮을 거라고, 인생에 있어 한 두 번쯤 망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그렇다고 망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망했다고 해도 자신은 지훈을 마지막 순간까지 응원해 줄 거라고도 했다. 뻔 한 말들일 수 있는데 너무 다정하게 느껴져서 지훈은 관린이 엄청 좋아졌다. 원래 가지고 다니던 카드 지갑을 집에 두고 지훈은 큰 맘 먹고 모아둔 용돈을 털어 사진을 넣을 수 있는 지갑을 샀다. 그리고 거기에 관린의 군사학교 시절 사진을 꽂아두었다. 힘들 때 마다 그것을 보면 왠지 힘이 났다. 솔직히 지훈은 조금 불안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품어본 게 처음이라 지훈은 ‘내가 게이라니!’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그럼 뭐 어때 하고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어쨌거나 이 사람과는 만날 수 없는 거니까. 하는 체념의 마음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내가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문젠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린은 자신의 외모를 칭찬해주었다. 거울을 보면 네모지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찌질한 모습의 박지훈이 있을 뿐인데, 관린은 자신의 눈 안에 우주가 담겨있다고도 했다. 그 우주 안에 살고 싶다고도 했다. 으. 손발이 오그라들 표현인데도 지훈은 그게 좋아서 매일을 읽었다. 지훈의 책상 서랍 첫 칸은 이제 관린의 편지만이 자리했다. 세 통 뿐인 관린의 편지가 지훈에게 어느 새 국보급 보물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비밀이 되었다. 지훈은 아직은 엉망이지만 그새 꽤 늘은 일본어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림도 그려넣었다. 알아볼 수 있을라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로 향했다.

 

 

 

 

 

 

 

– 193941, 대만, 타카오高雄.

 

 

 

여러 차례 편지를 썼다가 버리고 다시 쓰고 있었다. 지훈의 편지는 정말 귀여웠다. 자신의 일상을 적은 지훈의 편지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었다. 성적이 떴는데 다행이 C가 나오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게 뭐지. 관린은 성적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을 편지에 썼다. 관린은 잘 모르지만 한국이란 나라는 복잡한 곳인 것 같았다. 모르는 직업도 많은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그 와중에 일본에 다녀오려고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아르바이트가 뭐지. 일의 일종인 것 같았다. 편지에 아르바이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언제 일본에 갈 건지도 물었다. 과거의 지훈과 관린이 만난 온천장에 가보고 싶다고도 쓰여 있었다. 관린은 니가타 현의 온천장 주소도 일러주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구나. 관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해쳐나가는 사람. 다시 태어나도 지훈은 여전했다. 무작정 미래의 지훈이 보고 싶었다. 언제쯤 일본에 가려나. 나도 일본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까. 같은 시공 속에 존재할 수 있을까.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림이 있었다. 관린을 그리고 싶은데 자신이 그림을 잘 못 그린다며 토끼 그림으로 대체 한다고 했다. 토끼의 코 부분에 점이 찍혀있다. 관린이 보내준 사진을 매일 보는데 자세히 보다가 코에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렸다고, 정말 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오래되어서 이물질이 묻은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관린은 지훈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터졌다. 거울 속 관린은 약간은 파리했지만 여전히 젊었다. 코에 점이 있는 것이 맞다고 편지에 썼다. 그리고 관린도 그림을 그렸다. 언젠가 달빛에 비추던 지훈을 오래도록 보고 외웠던 그 모습.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엔 그렇게 썼다.

 

지훈이 보낸 편지의 마지막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하루하루 당신이 궁금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또 궁금합니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과거의 나도 그러했겠지요.」

 

 

 

 

 

 

 

– 2018715, 오전 6, 대한민국, 인천공항(Incheon Airport).

 

 

 

관린과는 그 간 한 번 더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전 편지로 인해 지훈은 거울을 볼 때마다 제 턱에 있는 희미한 점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안다고 했다. 나를 오래 지켜보아 안다고 했다. 관린 역시 지훈이 그린 것과 비슷한 토끼 그림을 그려왔다. 토끼의 턱 밑에는 점이 있었다. 거울을 보고는 놀랐다. 아 정말 이런 곳에 점이 있었네. 지훈은 외모에 관심이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날 저녁 식탁에서 지훈은 엄마 아빠에게 점에 대해 물었다. 여태 그걸 몰랐다니 모른 네가 더 신기하다며 두 분 모두 다정스레 웃으셨다. 정말 나를 아니 과거의 지훈을 사랑했던 걸까. 지훈의 마음이 저릿해졌다.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일지 몰랐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하는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지훈이다. 전생의 박지훈. 지훈은 전생의 자신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는데. 전생의 나 말고 지금의 나, 지금의 박지훈을 사랑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어렸을 때부터 모아둔 저금통장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하고 지훈은 7월 15일에 떠나서 3박 4일의 일정으로 있다 올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 자신이 좋아하는 초코바도 몇 개 더 편지에 넣어 보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날 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지훈은 조금 떨리는 기분으로 출국장으로 갔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서 기내 캐리어가 전부였다. 아 궁금하다. 어쩌면, 어쩌면. 한 번 더 온 편지에서 관린이 그랬다. 자신도 날짜를 맞추어 거기에 가겠다고. 동백실이 아직도 있다면 거기에 머물겠다고. 시간은 달라도 어쩌면 처음으로 같은 공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지훈은 가슴이 설렜다. 비행기가 시원스레 창공을 가로질렀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 1940715,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관린은 편지에 답장을 하고는 날짜를 맞추어 바로 온천으로 왔다. 여름에 이곳을 찾는 일은 처음이었다. 항상 눈에 덮여 고즈넉했던 신호소가 여름에는 좀 더 활기찼다. 눈의 고장이던 곳이 푸르른 신록(新祿)으로 아름다웠다. 여름은 이렇구나. 조금 더 지나자 신록이라기엔 우거진 녹음(綠陰)이 펼쳐졌다. 관린은 새삼 감탄했다.

 

지배인이 바뀌어 있었다. 동백실이 다행이 비어있었다. 짐을 풀고 약을 먹고는 관린은 산책을 나섰다. 삼나무 숲까지 가는 길은 늘 눈에 뒤덮여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는데, 한 여름의 그곳은 길게 자란 잡초들과 풀벌레들이 그득했다. 졸졸 흐르는 시내도 있었고, 그 안에는 작은 물고기들도 있었다. 모든 것들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것이구나. 관린은 여름의 지훈의 모습을 그려본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눈 내음이 가득하던 삼나무 숲은 풀과 흙내음이 가득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삼나무들은 깊고도 얕은 그늘을 만들어 냈다. 그 아래 기대 서있으니 온몸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해졌다. 좋다. 정말 좋다. 관린은 유타카 품에서 챙겨온 지훈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정면을 향한 어색한 입꼬리, 아름다운 눈매. 지금 너는 어디에 있을까. 동백실에 있을까? 역에 있을까? 탕에 몸을 담갔을까? 빽빽이 들어찬 삼나무들 틈이 만들어낸 햇살 줄기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관린의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 둘러보아도 숲엔 아무도 없었다. 그 기분이, 그 느낌이 다정하여 관린은 오래도록 서 있었다.

 

 

 

 

 

 

– 2018715,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여기가 신호소인가? 지훈은 기차 바깥으로 얼굴을 빼고는 보았다. 분명 아까 터널을 지났으니 맞을 거였다. 기차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겨울이 아니건만 설국 문학 여행을 온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동백실이 위험해. 지훈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다행이 동백실은 비어있었다. 지훈은 짐을 내려놓고는 설국 문학관을 등진 채 바로 삼나무 숲으로 향했다.

 

여름은 이렇구나…. 편지에도 꿈에서도 지훈이 본 삼나무 숲은 온통 눈이었다. 너무 하얘서 그냥 그게 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는 길목마다 작은 풀 나무들이 우거져있었고, 벌레들도 있었다. 얕은 시내도 있었다. 졸졸 흐르는 소리가 꽤 흥겨웠다. 꿈에서 본 삼나무 숲이 고요하고 고즈넉하였다면, 여름의 이곳은 생동감이 넘쳤다. 지훈은 잠깐 쭈그리고 앉아 시내에 손을 담갔다가 차가운 물에 기분이 좋아졌다. 도망갔다가 이내 다가와 손을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겁 없는 작은 물고기들도 귀여웠다.

 

그렇게 걷다보니 삼나무 숲에 접어들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삼나무숲길은 꽤 길었다. 으 더운데. 지훈은 배낭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 새 미지근해진 물에 목이 더 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코를 찌르는 풀 내음이 상쾌하여 갈증을 조금 해소해 주었다. 지훈이 입은 새하얀 반소매 셔츠가 살짝 땀에 젖었다. 지훈은 역시 땀에 젖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뒤로 넘기고는 손 선풍기를 틀어 셔츠의 목 부분을 들고는 가져다 댔다. 좀 낫다. 그러고서 지훈은 아무도 없는 숲길을 쭉 걸었다. 문득 관린이 떠올랐다. 날짜를 맞춰 와준다고 했는데. 왔을까? 아무래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저 궁금해 할뿐이다. 실제로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의 나는 그 손을 잡아봤겠지? 어떤 느낌이었을까. 손은 클까? 작을까? 손도 하얄까? 제 손을 들어 이리저리 보며 지훈은 생각해보다가 내리쬐는 햇살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훅 끼치는 열기에 지훈은 옆에 있던 삼나무 아래 그늘로 들어갔다.

 

어?

 

삼나무 아래 기대서는 순간 지훈은 그늘이 주는 서늘함과는 별개로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꼭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지? 지훈은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열자마자 나온 관린의 사진. 이곳과 정말 안 어울리는 차림인데, 왠지 또 어울리는 것만 같다. 와 계신가요? 당신도 이 숲에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지훈은 손가락으로 사진 속 관린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전생의 나는 당신의 얼굴도 직접 만져보았겠죠. 당신을 눈앞에 두고 그게 행복한 일인 줄 알았을까요? 이왕이면 오래 보았더라면 좋았겠네요. 지훈은 그렇게 속으로만 두런두런 관린에게 말을 건넸다. 조용한 숲에서는 당연한 듯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숲에서 돌아와 탕에 몸을 담갔다. 날씨가 더운 것과는 별개로 탕의 약간은 미끈한 물의 느낌이 좋았다. 함께 몸을 담근 적도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지훈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으 야하다 야해. 연신 손 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혔다. 날이 더워 그런지 탕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지훈은 마음에 들었다. 여름의 온천도 나쁘지는 않은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탕에서 나와 온천장에서 마련해준 지지미를 입었다. 이게 관린씨가 말한 그 지지미인가? 바스락 거리는 옷감이 몸에 닿는 느낌이 서늘했다. 여름에 입으니 정말 딱이네. 어쩌면 관린의 손도 이렇게 서늘할까. 자꾸만 관린의 생각이 났다.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조차 못한 사람인데.

 

료칸에서의 저녁은 꽤 맛있었다. 반찬이 진수성찬이었다. 이걸 뭐라고 부르던데. 혼자 다 못 먹을 것만 같았는데 먹다보니 다 먹었다. 휴대폰으로 사진도 많이 찍어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 인쇄해서 관린에게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아 삼나무 숲. 숲도 찍었어야 했는데. 왠지 기대어 있던 나무를 찍어서 보여줬어야 하는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에이. 그래봤자.

 

지훈은 창에 기대어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서울 하늘에 비하면 정말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이었다. 여긴 참 공기도 맑고 좋구나. 은하수가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아서 지훈의 눈도 끝도 없는 우주를 담아내는 것만 같았다. 내 눈 속에 살고 싶댔는데. 내 눈이 예쁘댔는데.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오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 1940715,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관린은 숲에서 돌아오자마자 탕에 몸을 담갔다. 총상을 입은 자리가 쑤셔 와서 뜨끈한 탕에라도 담그면 괜찮아질까 싶어서였다. 조금은 낫는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괜시리 아무도 없는 탕의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저기에 지훈이 와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까 숲에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다른 시간에 지훈이 정말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관린은 마음이 혼란해졌다. 과거의 지훈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편지를 보내오는 것은 미래의 지훈이다. 관린은 미래의 지훈도 좋다. 아니 실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 눈 속으로 쓰러지던 과거의 지훈이 겹친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과거의 지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관린은 미래의 지훈으로 인해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이미 죽었어야 할 시점인지 모른다. 그런데 여행까지 왔다.

 

합리화가 아닐지라도 어쩌면 이런 죄책감은 쓸데없는 것인지 모른다고 관린은 생각한다. 과거의 지훈도 미래의 지훈도 모두 박지훈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도 어쩌면 미래에도 지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 결 나아졌다. 관린은 탕에서 나와 하얀 지지미를 입었다. 미래의 지훈도 지지미를 입을 기회가 있을까? 그 시대에도 지지미가 있을까? 관린은 궁금해졌다. 바깥으로 난 장지문을 열어 은하수를 보았다. 겨울보다는 덜 했지만, 여전히 무수한 별들이 흐르는 은하수가 선명했다. 풀벌레 소리가 났다. 마치 샤미센을 연주하듯. 여름의 이곳도 좋구나. 지훈과 여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관린은 그런 생각을 했다.

 

 

 

 

 

 

– 2018717,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어느 덧 마지막 날 밤이었다. 지훈은 창 밖 은하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기념품 샵에서 나온 벚꽃이 그려진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새하얀 편지지가 아닌 무언가 그려진 편지지는 그러고 보니 처음이었다. 다음에는 좀 귀여운 것들이 그려진 것에 써드려야지. 편지지를 사며 같이 사온 우유쿠키를 입에 앙 문채로,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을 총동원 하여 지훈은 편지를 써 내려갔다. 쿠키를 하도 먹으며 써 대서 편지지에 쿠키가루가 묻었다. 탁탁 털고는 세 번째 장을 쓰기 시작했다. 목이 매여 야스다 요구르트를 꿀꺽 꿀꺽 마셨다. 아 이거 엄청 비싼 건데 다 마셨네. 첫 날부터 상세하게 적었더니 편지지를 6장이나 써버렸다. 숲에 갔던 일, 탕에 몸을 담갔던 일, 진수성찬이던 식사, 지지미 산지에 가본 일, 여름이라 별게 없어 속상했다던가 하는 일들, 샤미센 연주를 들은 일, 운 좋게 게이샤의 춤을 본 일 등등. 마지막으로 지훈은 책갈피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앙증맞은 벚꽃 모양의 눈이 내리는 눈 덮인 마을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였다. 뒤편에 LAI라고 새겨 넣었다. 편지를 캐리어에 챙겨 넣은 뒤 지훈은 자신의 책갈피를 들어보였다. 동일한 책갈피 뒤엔 PJH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좋아. 좋아. 지훈의 눈 가득 은하수가 담겼다.

 

 

 

 

 

 

 

– 1940717, 일본, 니가타新潟, 에치고越後유자와湯澤온천.

 

 

 

마지막 밤. 관린은 장지문을 열어둔 채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약속대로 날짜를 맞춰 니가타현에 왔고, 동백실에 머물렀다는 내용으로 시작된 편지 가득 여행이야기가 실렸다. 삼나무 숲에 갔던 일, 탕에 몸을 담갔던 일, 지지미 산지에 간 일, 샤미센 연주를 청해 들었지만 역시 과거 지훈의 샤미센을 따라올 자는 없나보더라 하는 이야기들, 어쩌다 처음으로 연회엘 가게 되었는데, 춤 역시 과거의 지훈이 가장 잘 추더라는 칭찬. 문득 관린은 어쩌면 이번 여행이 자신의 삶에 마지막 여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렇게도 생각했다.

 

 

 

 

 

 

 

– 20188, 대한민국, 서울.

 

 

 

지훈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사진을 인쇄하여 편지봉투에 넣고는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편지를 보내고 와서 지훈은 과외도 하고 여행 다녀온 자료들을 정리하며 여름을 났다. 관린으로부터 편지가 한 번 더 왔다. 약속대로 날짜에 맞춰 여행을 다녀왔다는 관린의 편지에 신이 났다. 놀랍도록 여행 코스가 비슷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첫 날 삼나무 숲에서 내가 기댄 나무에 그도 기댔던 게 아닐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잠시나마 함께였던 것인지도 몰랐다.

 

지훈은 가슴이 뛰었다. 이제는 보통일도, 그냥 넘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지훈은 관린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 19439, 대만, 타카오高雄.

 

 

 

관린은 기다림의 시간을 살았다. 그 간 지훈과 편지를 두어 번 주고받았다. 관린의 하루일과는 평범했지만 그 평범함 속에 가장 특별한 시간은 지훈과 주고받은 편지를 다시 읽고 지훈의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조금 특이한 일이 있다면 관린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변을 수소문해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일주일에 세 번 조선어를 배우러 갔다. 관린에겐 시간이 많았다. 지훈의 한 달이 관린의 일 년인 것 같았다. 편지의 날짜를 보면 그랬다. 그나마 지훈은 일 년이 아닌 한 달의 기다림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관린을 기쁘게 했다. 관린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간을 준 것은 지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지훈에게 쓰고 싶었다. 그렇게 관린은 지훈을 그리며 한국어를 익혔다.

 

관린은 한국어를 익히며 알게 되었다. 마지막 자신의 지훈이 말한 단어는 ‘사랑’ 이었다. 왠지 달콤할 것 같던 비밀의 단어는 달다 못해 너무 달아 씁쓸하기 까지 했다. 지훈의 마지막 모습이,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을 말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관린은 많이 울었다.

 

관린은 삼나무 숲에서의 따스함이 지훈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오히려 그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닌지 몰랐다. 미래의 지훈을 어떠한 감촉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관린의 가슴을 뛰게 했다. 관린은 마음 깊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훈의 편지는 처음과는 달리 발랄함보다 진지함이 짙어졌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는 사실이 관린을 또 한 번 기쁘게 했다. 그 편지들에서는 앳된 사랑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관린 역시 사관학교를 막 졸업하고 지훈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기 때문에 알아 챌 수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던 감정.

 

1943년. 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13년이 흘렀다. 관린은 벌써 서른다섯이었다. 혼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지훈을 만난 그 순간부터 관린에게 혼인에 대한 생각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자신이 혼인하기를 내심 바라셨을지도 모르는 어머니께서 이미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2018년의 한국은 혼기가 늦나? 괜찮은 것일까. 자신은 미래의 지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 미래의 어린 지훈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계속 편지를 주고받아도 되는 것일까. 남은 문예춘추는 세 권. 그리고 설국이 한 권 있다. 네 번의 편지. 관린의 예상이 맞다면 이제는 네 번의 기회가 남았다. 어떤 이야기들을 써 주어야 할까. 지금처럼 맘 편히 일상을 공유하고 웃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관린은 고심하고 고심했다.

 

 

 

 

 

 

 

– 201811, 대한민국, 서울.

 

 

 

새 학기도 어느 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지훈은 잘 말린 빨간 단풍잎과 노란 단풍잎을 코팅하여 편지에 넣어 보냈다. 코팅하다 과 친구를 만났다. 다 큰 남자가 뭐하는 짓이냐고 핀잔을 들었다. 그럼 뭐 어때. 지훈은 마냥 행복했다. 다음 편지에는 꼭 사랑을 고백할 거라고 마음먹었다. 과거의 지훈이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기는 할 거다.

 

지훈은 이제 중국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일본어는 자유자재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까지 발전해있었다. 이제는 그의 나라 말로 편지를 쓰고 싶었다.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다. 과 친구들은 중국에 취업하려 그러냐며 공대생이 외국어 알아서 뭐한다고 자꾸 배운다고 술이나 마시러가자고 해댔다. 지훈은 그런 말들을 가볍게 무시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지훈은 관린의 다정함이 고마웠다. 처음부터 과거의 지훈이 알아보게 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 말이 아닌 일본어를 썼다. 그리고 최근에는 어떻게 배운 건지 한국말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가끔 오자가 있었다. 지훈은 그게 귀여웠다. 언제나 글씨처럼 반듯한 사람인 것만 같아서 너무 사람 같지 않고 가끔 이 사람은 신이 아닐까, 생긴 것부터 성격까지 왜 이렇게 완벽하지 싶었는데 가끔 받침이나 그런 것들이 틀린 것을 볼 때면 이 사람도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 괜히 웃음이 났다. 지훈은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느꼈다. 과거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그런 희망을 안고 있었다. 편지만 끊이지 않는다면 영영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대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194512, 대만, 가오슝高雄

 

 

 

지훈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1945년 일본은 패망했고, 대만은 독립했다. 관린의 한글 실력은 많이 출중해졌다. 이제는 주변에 한글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지훈은 편지에서 자신의 한글 실력을 매우 칭찬했다. 그리고. 근래의 답장에서 지훈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관린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다른 말은 모두 여전히 일본어인데, 그 말만은 중국어로 써서 보냈다. 중국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도 했다. 연말이라 연인들이 많이 보이는데, 자신도 관린을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소소하더라도 함께 밤거리를 걷고 싶다고도 했다. 한국의 연말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로 요란한데, 생각보다 전구들이 반짝이고, 커다란 트리가 곳곳에 많아서 예쁘다고도 했다. 관린이 잘 모를 만한 단어에는 모두 설명을 구구절절 달아 적은 편지. 맨 처음 보냈던 편지와는 달리 점점 편지는 길어지고 있었고, 지훈은 저도 모르게 미래에만 존재할 것 같은 말들엔 설명을 다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쓴 편지라며 이번에는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동봉하겠다는 지훈의 설명대로 편지 안에는 작은 입체 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예쁘네. 카드 가득 커다랗게 삐뚤빼뚤 한 글씨가 자리했다.

「賴冠霖, 我爱你♥」

 

못생긴 글씨로 열심히 쓴 사랑해 라는 말이, 새빨간 색으로 열심히 칠해져 있는 커다란 하트가 모두 귀여워 관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두 번. 편지는 두 번이 남았다. 사랑스러운 미래의 지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많은 고민을 했다. 그의 미래를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것, 그의 미래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끝이 보인다는 것이 관린을 힘들게 했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과거의 지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저도 같은 남잔데 왜 보호하려고만 드나요? 왜 책임지려고만 하나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요.

 

액자에 끼워놓은 지훈의 교복을 입은 사진을 한 번 보았다. 앙 다문 입술, 어색한 표정. 지훈의 인생은 지훈이 잘 걸어갈 것이다. 자신은 과거의 사람에 불과했고 책임져 줄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것도 결국은 과거의 사람인 자신이었고, 미래의 지훈이 사랑을 고백한 것도 결국은 과거의 사람일 자신이었다.

 

걱정으로 사랑을 무시하진 말자.

 

관린은 용기를 내어 한 자 한 자, 적어 내렸다. 너무 많이 적어 외운 그 글자를, 눈밭 위에서 과거의 지훈이 마지막 순간 내었던 그 글자를 적어 내렸다.

 

어쩐 일인지 눈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20192, 대한민국, 서울.

 

 

 

지훈은 머리맡에 상자를 열어 편지를 또 읽었다. 자기 전에 한 번, 일어나서 한 번, 편지를 읽는 게 지훈의 비타민이었다. 낡아서 힘이 없는 편지지에 땀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레 펼쳐들었다. 하도 펼쳐대어 편지를 접은 부분이 약간 해어졌다. 갑자기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평생 가보로 둘 건데 벌써 해지면 안 되는데.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편지를 보다 지훈은 헤실헤실 웃었다.

지훈은 1월과 2월 각 달마다 한 번씩 관린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물론 받자마자 답장을 했다. 1월의 관린의 편지에는 자신도 미래의 지훈을 가슴깊이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읽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한국어를 아직 잘 몰라서 이렇게 썼나? 그렇다기엔 관린은 요즘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과거의 나를 질투하던 한심한 박지훈을 관린씨가 사랑해준다! 지훈은 정말 기뻤다. 아 그럼 이제 우리 1일인가? 근데 날짜를 어떻게 세어야 해? 그런 별스럽지 않은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지훈은 문득 과거의 자신은 어떻게 되었기에 지금의 자신과 이렇게 연락을 하는 지 궁금했다. 물론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 처음부터 과거의 자신은 이미 죽었나보다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이 전생이니 현재 자신이 존재하는 거겠지. 그런데 관린은 어쩐 일인지 과거의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답장을 쓰면서 지훈은 그것을 물어 보았다.

여전히 2월의 편지에도 이상하게 관린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만은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훈은 과거의 자신이 몇 살에 죽었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감기 조심하라고 자신을 염려해주는 다정한 관린 만이 오롯이 2월의 편지에 가득했다. 그래서 지훈은 앞으로 한 번의 편지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지 못했다.

 

 

 

 

 

 

– 194812, 대만, 가오슝高雄.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관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래버티었다고 했다. 대만에 돌아왔던 건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 있던 곳에서 죽을 순 없었다. 지훈에게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훈은 그저 자신과의 설레는 감정만을, 행복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길 바랐다. 그런데 기적처럼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2018년의 지훈을, 2019년의 지훈을 만났다.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지훈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 년의 시간동안 관린은 지훈을 추억할 수 있었다. 그런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만난 의사는 천천히 안부터 썩어들어가는 몸에 서서히 죽어갈 것이라고 길게 보아 3년이라 했다. 그게 1937년. 오늘은 1948년이다. 햇수로 꼬박 10년째를 살아냈다. 미래의 지훈은 관린에게 추억과 사랑과 함께 7년의 시간을 선물했다.

 

1947년에 답장을 쓸 때만 해도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 마지막이라고 고해야 할까. 관린은 고민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지훈은 편지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오지 않을 때쯤 자신을 잊을지 모른다. 그런 마음 편한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온전히 사랑만을 가득 담아 쓴 편지. 지훈이 궁금해 하는 것들은 하나도 답해주지 않았다. 굳이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슬픔은 오직 자신만이 안고 가고 싶었다.

 

그리고 1948년 해가 바뀌고서야 답장이 왔다. 더 이상 관린은 답장을 할 수 없었다. 행복에 겨워 쓴 지훈의 편지는 그간 받은 편지 중 가장 밝은 느낌이었다. 그저 그렇게 행복하길. 관린은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1948년 11월에 야스나리가 대만에 찾아왔다.

 

 

“병색이 짙어지셨네요.”

 

“그래도 용케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의사는 길게 보아 3년이라고 했거든요.”

 

“직접 전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야스나리가 내민 것은 책이었다. 『설국』. 그렇게 쓰여 있었다. 놀라움에 관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결판입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입니다. 직접 찾아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된 완성본은 직접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별안간 눈물을 흘리는 관린의 모습에 야스나리는 놀랐지만 왠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주어진 기회. 관린은 이것이야말로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실을 피하지 말자. 그에게도 알려주자.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눈밭에서 죽어가면서도 사랑을 말하던 지훈이 떠올랐다. 관린은 그제서야 작년에 편지를 쓰던 저는 지훈이 행복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비겁했던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관린은 자신이 죽어서도 지훈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관린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쉬이 끝내고 자신을 잊을 지훈이 아니란 것을. 그랬음에도 숨기려고만 했다. 지훈도 알아야 했다. 지훈 스스로 정리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했다.

 

관린은 만년필을 집어 들어 익숙하게 잉크에 담갔다. 짙고 시퍼런 잉크가 만년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흠뻑 잉크를 머금은 만년필이 새하얀 편지지 위에서 서걱서걱 마지막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린의 얼굴은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20193, 대한민국, 서울.

 

 

 

지훈은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내내 편지를 기다렸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편지는 네 번 째 주에 접어들었을 때 왔다. 월요일이었다. 지훈은 편지를 읽어 내리고 그 주 내내 앓아 누웠다. 수업을 통으로 빠졌다.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른 때보다 좀 더 긴 편지는 과거의 지훈의 마지막을 담고 있었다. 지훈은 게이샤였다. 남자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샤미센을 켰던 거였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 운 나쁘게 조선에서 끌려간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지훈은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렴풋이 왜 설국이 관린과 저의 통로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설국은 어쩌면 관린과 과거의 지훈의 이야기였다. 자신이 레포트를 그렇게 쓴 것도 그제 서야 알 것 같았다.

 

지훈이 마지막 순간 조선말로 사랑한다고 했단 것도 알게 되었다. 담담하고 단정한 관린의 필체가 더욱 진솔하게 다가왔다. 눈밭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전생의 박지훈. 그 와중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박지훈은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관린은 적었다. 관린은 용서를 구했다. 모든 사실을 숨기려 했다고. 자신이 비겁했으며 지훈을 믿지 못했다고. 그리고….

 

지훈이 총상을 입고 죽었을 때, 실은 저도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저는 37년도에 독립운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몸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일찍 죽을 몸이었는데, 당신과의 편지가 나를 이제껏 살게 했습니다.

우리의 편지는 처음부터 횟수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지훈씨가 같은 책으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 올 수 있는 것과 달리,

저는 야스나리가 <설국>에 관한 새로운 글을 쓴 때 마다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 편지의 통로가 된 문학동인지는 그 뒤로는 무슨 수를 써도 통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야스나리가 설국의 완결판을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아마 답장을 하더라도 저는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7년을 선물해주어, 행복을 선물해주어 감사합니다.

저는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예감이 맞다면,

당신의 시대에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시대의 저를 찾아주세요.

 

사랑합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당신이 어떤 시공에 있더라도.

진심을 다해.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관린의 마지막 편지에는 날짜조차 없었다. 지훈은 편지를 읽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어서, 단정한 글씨가 온통 울렁울렁 거려 흐물흐물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열이 펄펄끓었다. 일주일 뒤 열이 내린 지훈은 다급하게 편지를 썼다. 이것만은 읽고 가세요. 제발, 이것만은. 이제야, 이제야 중국어로 모두 쓸 수 있게 됐는데. 이제야. 자꾸만 눈물이 나서 편지지가 군데군데 울고 또 울었다.

 

헬슥해진 지훈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혹시라도 관린이 읽지 못하게 될까봐, 서둘러 보내느라 마치 첫 날 긴가민가 보낸 그 편지처럼 짤막해진 편지가 아쉬웠다. 서가 근처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내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른 설국의 첫 구절을 읊고는 편지를 끼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시간을 맞춰와 보내도 길고 긴 그 편지는 가지 않았다. 매일을 그 시간에 찾아도, 편지는 가지 않았다. 매일을 울어 지훈의 한쪽 쌍커풀이 없어지도록 편지는 가지 않았다. 지훈의 안경이 엉망으로 얼룩져도 편지는 더 이상은 가지 않았다.

 

 

 

 

 

– 201941, 대한민국, 서울.

 

 

 

“4월의 첫 날, 만우절을 기념이라도 하듯, 한반도 전역에 거짓말처럼 폭설이 내렸습니다. 현재도 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서울·경기는 최대 8cm, 강원도 등 일부 지역은 최대 15cm의 폭설이…….”

버스에서 나오는 라디오 일기예보가 눈을 말하고 있었다. 역에서 나와 올라탄 학교 셔틀버스는 기어갔다. 학교 정문에서 내려 함박눈을 맞으며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 편지는 가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이제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1시부터 여러 번 시도했다. 그래도 되지 않았다.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을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얼마나 더 이 짓거리를 해야 괜찮아 질지 지훈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서가에 꽂힌 책을 쳐다보고 있기도 어려웠다. 지훈은 관린에게서 온 편지들과 자신이 쓴 편지를 손에 들고는 중앙도서관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려오는 눈에, 안경에 진 눈물 얼룩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지훈은 걸어오던 누군가와 제대로 부딪혔다.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쭈그리고 앉아 떨어트린 물건들을 주웠다. 부딪힐 때 벗겨진 안경 때문인지 시야가 혼통 흐릿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이 뭉그러니 보였다. 보이는 대로 주워서 한 품에 안았는데 편지와 안경이 없다.

 

편지 어딨지, 편지 어디 갔어.

 

바닥을 더듬거리는데 시야로 슥 디밀어 지는 하얗고 커다란 손에 두꺼운 뿔테 안경이 들려있다.

 

지훈은 안경을 받아들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서며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자신의 안경과 편지를 들고 있는 키가 큰 남자가 들어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커다란 눈송이가 지훈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지훈이 말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