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리24
w. 청조

 

 

1.

 

이 동네는 유난히 이국적인 외모가 많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집을 나와 방향을 꺾는 첫 골목에서 빨간 머리, 두 번째 골목에서 파란 눈, 담장을 따라 걷다가는 노란 머리에 녹색 눈을 마주칠 만큼. 국제학교에 자식 보내려고 이사한 게 아니라 값싼 방을 찾다 보니 그게 우연히 이 동네였던 내 입장에선 정말 외국인인지 외모만 그런지야 관심 밖이었고, 담장에 그려진 유치한 벽화를 지나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촌스러운 컬러 조합의 간판이 영역 내였다. 시급 육천육백 원, 열 시 넘으면 야간 수당 쳐 준답시고 구천 원. 주는 돈이 최저에 못 미치지만 규모가 작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목에 위치한 편의점. 장사 잘되기는 글렀는데 그래서 꿀 같은 알바 자리.

 

그곳의 몇 안 되는 단골 중 하나도 역시 앞서 말한 거리의 행인들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색찬란하지 않다는 것.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을 가졌지만 지나치게 뚜렷한 이목구비가 국적을 흐려 놓는 외모의 소유자. 다른 시간에도 자주 오는 건지 가끔 나와 교대하던 야간 알바생은 그와 눈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나는 어땠냐 하면 역시 알 바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졸지 않게 편의점 종을 자꾸 못살게 구는 손님들 중 하나. 사장이 잠자는 나를 깨워 두 시간 일찍 출근하게 만든 날, 걔가 무성의하게 바코드를 찍는 내 손 아래로 휴대폰 액정을 들이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멤버십은 아까 주셨어야 되는데요.”

 

우선 들고 있던 바코드 리더기를 내려놓고 뻔뻔하게 내민 손을 밀어냈다. 물러 터지게 생긴 상대는 보기보다 꿋꿋했다.

 

“아뇨. 번호 좀 주세요.”

 

한국어도 잘했다. 나는 도로 리더기를 집어 들었다. 알 바 없다고 여겼던 놈의 모국어를 추측하게 되어 심기가 불편했다.

 

“제가 왜요?”

 

카운터를 구르던 우산을 집어 바코드를 찍자 삼천오백 원입니다, 포스기가 명랑하게 합계 금액을 외쳤다. 준공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겨 공사를 진행한 건물 안은 난방을 해도 외풍이 심해 오래 살을 내놓고 있자면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다시 앞으로 다가온 휴대폰을 받는 대신 말려 올라갔던 소매를 내렸다.

 

“관심 있어서요.”

“죄송한데 저는 아니라서.”

“아.”

“삼천오백 원이요.”

 

길지 않은 시간 끝에 휴대폰을 품에 넣은 단골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다. 받아서 포스기에 긁고 계산이 끝난 우산과 함께 앞으로 슥 밀었다. 또 상황이 반복될까 싶어 나는 부르트기 시작한 손을 미리 유니폼 주머니 속으로 감췄다. 단골은 한 팔에 우산을 끼고 카운터 앞을 잠깐 서성이다 나갔다. 유리문이 밀리며 어김없이 내 졸음을 물리치는 딸랑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 안에서 오른손과 부대끼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을 느꼈다.

 

대개 계절마다는 고유의 이미지나 정서가 있다. 대표적으로 광고에서 수도 없이 우려먹는 여름의 청량함 같은 것.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달라서 어떤 사람은 기나긴 장마 때문에 여름을 먹먹한 잿빛으로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햇볕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타는 듯한 피부의 뜨거움과 곁을 뛰어다니던 원색의 체육복들을 여름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이름 붙이자면 지금 같은, 추운 듯 춥지 않은 미적지근한 겨울은.

 

…… 귀하의 서류 전형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후 면접에 대한 자세한 일정은 유선으로 안내드릴 예정입니다. ……

 

구직과 취업 준비의 계절.

 

화면 안의 ‘합격’이라는 글자를 엄지로 문질렀다. 터치에 반응한 스크린이 이전 화면을 나타냈다가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다시 문자 화면을 띄웠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날은 13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사장이 나 같은 알바생 나부랭이에게 일을 버려 두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데리러 가야 했던 날이었다.

 

 

 

 

2.

 

“박지훈 씨, 뭐 해요. 4번 테이블 주문 다 나왔는데.”

“…… 죄송합니다.”

 

컵 가지러 들어왔다 잠깐 숨 좀 돌리는데 고새를 못 참고 굳이 콕 집어 무안을 준다. 매니저 등 뒤에 대고 이를 갈며 플레이트를 들었다. 주방과 홀을 분리하는 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식기 부딪히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여러 사람이 각자 대화하는 소리 등이 한데 엉켜 쏟아졌다. 실례합니다, 목례와 함께 웃음을 보이면 가장 가까운 대화 소리는 멈춘다. 늘 겪으면서도 그 순간의 불편한 침묵엔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아이 둘과 함께 왔던 부부가 나간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바를 담당하고 있는 윤지였다. 멀찍이 떨어진 이쪽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하게 보니 윤지가 프린트된 스케줄 표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 반 타임만 대타 좀 해 주라.”

“언제.”

“화요일. 수요일에 진짜 중요한 시험 있거든.”

 

특별히 일정이 있는 날은 아니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표정이 환해진 윤지는 고맙다며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십여 명 남짓한 홀 직원들 중 일하는 시간은 가장 짧고 일한 기간은 가장 긴 게 나다. 근처에 영화관이 생기면서 레스토랑은 주말이면 평일보다 두 배는 바빴고, 나는 손님이 없을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래서 주말로 옮겼다. 고정적으로는 그랬지만 윤지처럼 대타를 해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시간을 봐서 바꿔 주거나 대신 일하거나 했다. 매니저를 제외하면 크게 나쁜 점은 없었다. 근무 시간에 맞춰 밥도 주고 시급도 센 편이었다.

 

윤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던 날짜 옆의 다른 날짜를 떠올린다. 윤지는 월요일, 목요일을 제외한 평일과 토요일에만 근무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월요일에 대타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이후 면접에 대한 자세한 일정은…… 무의식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때 휴대폰은 라커 안에 넣어 두었는데. 손님들에게 보이지 않는 파티션 뒤 구석이었다. 뒤에서 째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주머니에 손 넣고 있는 거예요?”

 

매니저를 제외하면 크게 나쁜 점은 없다는 말은, 뒤집으면 매니저가 크게 나쁜 점이라는 말이 된다. 큰소리에 놀라 이쪽으로 고개를 튼 아영이가 나와 매니저를 번갈아 한 번씩 보더니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괜찮아 보일 법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니 실패한 것 같았다. 며칠 전 매니저가 주방 셰프에게 가족 여행으로 스키장에 갈 계획이라고 자랑하던 게 떠올랐다. 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휴가가 길어지면 좋을 텐데.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공부 좀만 더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갈걸. 그런 생각도 안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과외로 모든 생활비를 충당할 정도로 괜찮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자취방 월세며 식비 같은 생활비까지 감당하려면 알바를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라도 해야 했다. 그나마 졸업을 앞두고 있어 학비는 빠진 게 다행이었다.

 

사실 오늘 나온 것도 대타다. 여자 친구와 당일치기로 전주에 간다던 민규는 오픈조였다. 마감조가 출근하는 두 시가 조금 지나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걸을까, 버스를 탈까. 횡단보도 앞에서 고민하다 길가로 몸을 틀었다. 평일에 대타를 뛰고 편의점으로 출근하는 날은 대부분 걸어 다녔다. 집 아니면 편의점, 그것도 아니면 레스토랑, 또 아니면 면접 장소인 생활에서 바깥 공기를 마실 일은 그때 말고 별로 없어서 그랬다.

 

편의점까지 약간의 거리를 남겨 두고 담장 앞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친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눈에 익었다. 고집 있게 전화번호를 달라던 갈색 눈의 단골 손님.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걷는데 옆으로 따라 붙더니 결국은 아는 척을 해 온다. 살갑게 출근하냐고 물어오는 걸 씹을 수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별 반응이 없어 무안할 법도 한데 계속 말을 건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저 아직 출근 안 했거든요.”

“네.”

“근데 제가 왜 댁하고 인사를 해요.”

 

단골도 몇 걸음 더 걷다가 앞에서 멈춰 나를 돌아봤다. 좀 쳐다보나 했더니 갑자기 푹 웃는 것이다.

 

“왜 웃어요?”

“웃을 수도 있죠. 귀여운데.”

“네?”

“그럼 지금은 인사 안 할게요.”

 

그러고는 먼저 걸어서 코너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이제 곧 교대 시간이었다. 코앞이라지만 느긋할 만큼은 아니었고, 미리 가서 사장이 부탁한 대로 세탁소에서 유니폼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냥 나비 그림의 행렬이 끝나는 담장 코너 밑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좀 단단히 꼬였다.

 

 

 

 

3.

 

폭설 이후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수직 낙하했다. 고막보다는 피부가 더 예민한지 요 며칠은 종소리보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스미는 한기로 손님을 알아챌 정도였다. 원래 손님 얼굴은 무슨, 매일 와서 똑같은 담배를 사도 못 외우고 안 외우는 게 나였는데.

 

“안녕하세요.”

“어.”

 

그러니까 이런 작은 리액션도 해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뱉은 거였다. 어쩔 수 없이 목만 살짝 숙였다. 단골은 전보다 더 자주 오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얼굴이며 사 가는 품목을 외워 버린 내가 자주 온다고 생각하게 된 쪽일 수도 있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아주 신경을 꺼 버릴 수 있는 부류가 아니기는 했다. 외모든, 하는 행동이든.

 

내 앞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지나친 검은색 스니커즈는 계산대로 향했다. 진열대에 컵라면을 쌓다 말고 카운터 뒤로 들어갔다. 천천히 앞에 와 선 단골이 올린 건 아이스크림이었다. 미친. 추워 죽겠는데 무슨 아이스크림. 그제는 설레임이랑 메로나, 어제는 설레임이랑 누가바, 오늘은 설레임만 두 개. 단골은 며칠째 계절을 무시하는 중이었다.

 

“삼천 원입니다.”

“하나는 드세요.”

 

이 날씨에? 일하는 중에? 내 의문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단골은 씩 웃었다.

 

“이름 제가 전하고 싶은 거라서요. 설레임.”

“…….”

“좋은 하루 보내요.”

 

딸랑 소리를 내며 닫히는 유리문을 멍하니 쳐다보다 뒤늦게 표정을 구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스크림 포장지에 달라붙은 성에가 녹기 시작해 벌써 카운터에 물이 흥건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대충 공용 냉장고에 처넣고 카운터를 닦았다. 정리하다 만 컵라면을 전부 진열대에 채울 때까지 다른 손님은 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 교대 두 시간 전쯤이었다. 보통 그 시간대 손님의 대부분은 이제 출근하러 나온 야간 근무자나 야식 사러 집에서 나온 자취생인데, 어디에서 온 건지 취객이 줄줄이 들어왔다. 일행인 것 같은 넷은 각자 편의점 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과자를 집었다 놨다, 우유도 집었다 놨다, 도시락이며 샌드위치를 집었다 놨다 하는가 하면 한 명은 술이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살 거면 빨리 사고 가든가. 그렇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코끝이 붉어진 한 명이 삿대질을 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담배 한 갑 줘.”

“어떤 거요.”

 

이거요? 대충 가리키는 방향에 있던 걸 짚어 주니 아니란다. 그 옆의 것도 아니라고 하고, 아래 것도 아니라고 하고.

 

“이름이 뭔데요?”

“정대수.”

“아니…… 손님 이름 말고 담배요.”

“저기 저거.”

 

이름을 말해 달라니까. 속으로 욕을 씹었다. 몇 번 반복 끝에 겨우 찾는 담배를 손에 쥐여 주고 나서야 취객 무리는 편의점을 나갔다. 피곤해져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원래 야간에 일하던 동우가 복학한다며 급하게 그만둬서 오늘 나와 교대하는 건 사장이었다. 이따 나랑 다시 교대할 때까지 버티려면 사장도 미친듯이 피곤할 거다. 그냥 가기엔 양심이 찔려서 우물쭈물 백룸에서 비비며 재고 정리를 돕다 가방을 멨다. 냉장고에 넣어 둔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사장은 뒤늦게 나서는 나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봤다.

 

당연하게도 밖은 추웠다. 나는 딱 하나 있는 야외 테이블의 의자를 털어내고 앉았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따서 입구를 이로 문 채 쭉 빨았다. 냉동실에서 한 번 더 얼려진 아이스크림은 녹지 않아 단단해서 입안으로 들어오는 건 공기뿐이었다. 도로 뚜껑을 돌려 닫았다.

 

“졸려 보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의자에 단골이 앉아 있었다. 쥐고 있는 아이스크림에서 시린 촉감이 올라왔다.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쑥 다가온 긴 팔이 내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빼 갔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차림인 게 아무래도 어디 놀러 나가는 것 같다. 국제학교에 애 보내려고 이사한 인간을 제외하면 이 동네의 주민들은 대부분 나 같은 취준생 혹은 대학생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다시 보니 대학생 티가 나네 싶었다. 단골이어서가 아니라 동우랑 아는 사이였나,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단골은 다행히 나를 보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그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줬다 뺏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입꼬리를 쭉 올려 웃더니 코 중간에 걸친 안경을 고쳐 쓴다. 나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이 한적한 교차로도 차가 한두 대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퇴근했는데 미안하지만 저도 물어봐도 될까요?”

“뭘요?”

“들으면 대답해 줘야 돼요.”

“뭔데요.”

 

묻고 아차 싶었다. 궁금해할 필요 없는데. 그는 잠깐 뜸을 들였다.

 

“저 왜 싫어요?”

“싫다고 안 했어요.”

“그럼?”

“관심이 없는 거죠.”

 

단골은 잠깐 말이 없었다. 긴 침묵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지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

“…… 왜요?”

“싫은 게 좋아지는 건 어려운데 새로 관심을 가지는 건 쉬우니까요.”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적당한 온기와 물기를 두른 아이스크림이 손에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주말에는 일 안 하죠?”

“…….”

“다음 주에 봐요.”

 

그리고 몸을 돌려 내가 가 본 적 없는 편의점 뒤편의 길로 멀어진다. 주말에도 일하는데. 여기선 안 하지만. 저쪽으로 가면 뭐가 있더라. 닫았던 뚜껑을 열고 아까와 같은 짓을 반복했다. 입속으로 들어온 아이스크림은 혀와 닿으면 스르르 목 뒤로 넘어갔다. 테이블 위의 손가락 밑으로 까슬하게 걸리는 게 있어 시선을 내렸다. 조잡하게 붙은 오래된 광고지는 색이 거의 빠져 있었지만 글자는 선명했다. 설레임. 감추려는 시도도 마음도 없이 그걸 전하고 싶다던 단골에게는 당분간 같은 이름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 날씨는 여전해서 손이 시리고 머리가 띵했다. 적당히 녹고 부서진 아이스크림은 달았다.

 

 

 

 

4.

 

윤지는 시험을 잘 봤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탱글하게 솟은 광대로 그렇게 말했으니 만족할 만한 점수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오후 발표였지만 면접을 보고 오면서 기대는 사라진 뒤였다. 면접관들이야 원래 그렇다지만, 스치는 시선이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류 합격 때처럼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면접 결과는 문자가 아닌 이메일로 통보한다고 했다.

 

오픈까지 삼십 분 남았다. 윤지가 커튼을 걷어내자 홀 안으로 환하게 빛이 들었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테이블에 시트를 각 맞춰 깔았다. 나에게 유독 깐깐한 매니저는 이런 걸로도 흠을 잡을 사람이었다. 예약이 있는 창가 테이블까지 다 세팅하고 나니 매니저가 홀 구석으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과정보다 준비와 마무리가 중요하답시고 오픈 한 번, 마감 한 번 직원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데 피드백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제일 자주 털리는 건 나였다.

 

“박지훈 씨.”

“네.”

 

사장은 동우의 후임을 어제서야 구했다. 걔는 내일부터 출근한댔다. 미친 셈치고 하루만 부탁한다고 사정을 하길래 낮부터 아침까지 내가 일했다. 편의점에서 퇴근하고 막 눈 좀 붙이려고 누웠을 때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 구했던 오픈조 남자애가 연락을 다 씹으니까 지금 좀 나오라고. 씹어도 될 전화를 이미 받아 버렸으니 거절 한 번 했다가 몇 주를 눈칫밥 먹기는 싫었다.

 

양심이 있으면 오늘은 뭐라고 안 하겠지. 그래도 매니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훑다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타이가 비뚤어졌네요.’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고쳐 매는 시늉만 했다. 주말에 나오지 않는 아영이 대신 진아가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사실 말만 안 했지 거기 서 있던 대부분이 나를 동정할 거였다.

 

눈이 뻑뻑했다. 멍하니 한 자리에 서서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으면 매니저 몰래 민규가 와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걸 몇 번 반복하고서야 원래 내가 나왔어야 할 마감조 출근 시간이 됐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라커에서 휴대폰을 꺼내면서야 떠올랐다. 아, 면접 결과. 스탭 룸 구석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 화면을 열었다. 귀찮아서 읽음 표시만 해 둔 광고 메일들 위로 읽지 않은 메일이 두 개 뜬다. 하나는 면접을 봤던 회사에서 온 것이었다.

 

“뭘 그렇게 봐.”

 

나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스탭 룸 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규가 모니터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야, 다른 회사 가면 되지. 너 공부 잘하잖아.”

 

기대도 안 했지만 진짜 불합격이었다. 나는 오히려 별 생각이 없는데 민규가 눈치를 봤다. 괜찮으니까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실망하면 끝도 없다. 불합격 메일을 닫고 아직 읽지 않은 다른 하나를 열었다. 합격을 확신할 수 없어 지원했던 또 다른 회사의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는 안내였다.

 

 

 

* *

 

 

 

“여기 자주 지나가네요.”

 

겨우 두 번째 마주치는 거지만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맞다. 달리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키만큼 곧게 뻗은 손가락이 내가 등진 레스토랑 쪽을 가리켰다.

 

“집이 저쪽?”

 

아니, 집은 이 앞에 나오는 골목 안.

 

“왜 대답 안 해 주지.”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렇다. 잊었던 면접 결과까지 확인하고 나니 이제 정말 그냥 집에 빨리 가서 자고 싶었다.

 

“인사 안 해서? 출근 안 했을 땐 인사하지 말래서 안 했는데.”

“아오. 제 집 알아서 뭐 하게요.”

“아, 미안. 프라이버시.”

 

아무래도 버스를 탈 걸 그랬나. 버스에서 내리더라도 돌아서 걸어가야 하는 게 자취방의 위치라 오늘도 걷는 걸 택했다. 스니커즈 대신 로퍼를 신은 발은 내가 꺾는 대로 골목 안까지 따라왔다.

 

“그러면 저한테 물어봐요.”

“뭘요.”

“제 이름 같은 거.”

“댁 이름을 왜요?”

“좀 궁금하다고 해 주면 안 돼요?”

“네.”

 

검은색 돌담이 보였다. 저 앞이 내가 사는 원룸인데, 얘는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추더니 나와 내 옆의 빌라를 번갈아 쳐다본다.

 

“집이 여기예요?”

“아뇨.”

“근데 왜 멈췄어요?”

“집까지 따라오게요?”

“따라온 거 아닌데.”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진짜 아닌데, 저도 이 앞 살아요. 빙 도는 길이긴 하지만. 아직 다음 주 안 됐는데 만난 게 반가웠거든요.

 

“그럼 저 반대로 갈 테니까 집에 가요.”

“…….”

“그리고 잘 자요. 피곤해 보여요.”

 

나는 그가 진짜 방향을 돌려 걷기 시작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몇 걸음 걷다 말고 뒤를 홱 돌아보더니 그런다.

 

“저 이름 라이관린이에요.”

 

어제 기온을 무시하고 빨아먹다 결국 탈이 날 뻔한 그 아이스크림과 참 닮은 이름이었다. 부드럽고 하얗고 어쩐지 둥근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르쳐 준 단골은 더 미적거리지 않았다. 나도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가방 앞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녀서인지 차게 식은 열쇠는 열쇠구멍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 헛손질을 하다 문을 열었다.

 

4층 정도만 되어도 창문으로 보이는 골목은 멀어서 한 장의 사진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이불 속에 누워 확인한 일기예보로는 또 눈이 온다고 했다. 빗나간 건 아니었는지 조금 전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한 점씩 하얗게 차올랐다.

 

 

 

 

5.

 

사장이 아프댄다. 사장 부인이 대신 나오지만 점심 땐 가 봐야 한다고 해서 내가 두 시간 일찍 출근하게 됐다. 퇴근도 물론 두 시간 일찍. 시급은 야간까지 그대로 쳐 준다니 좋은 건가 싶었는데 몸이 피곤했다. 일하는 시간이 똑같아도 규칙적이던 흐름이 깨져서 그런 것 같았다. 요즘 지나치게 요구하는 게 많아지는데 그만둬야 하나. 떨어져 가는 담배 몇 종류를 뜯어 채우고 앞을 보자 귀신같이도 설레임이 들어섰다. 저번에 봤던 안경을 쓰고, 그 긴 키에도 길어 보이는 후디와 패딩을 걸치고.

 

평소보다 길게 매장에 머물던 그는 결국 또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집어 왔다. 이번에도 두 개. 뭐하러 그렇게 오래 돌았지. 나는 바코드를 찍고 같은 금액을 말했다. 평소처럼 카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지갑 뒤쪽을 벌려 지폐를 꺼낸다. 손으로 만져 대충 장수를 세려다 말고 유독 빳빳한 한 장을 뺐다. 지폐가 아니라 영화 티켓이었다. 디지털 시대라는 요즘, 대체 어디에서 이런 걸 찍어 주나 싶은 구식의. 그와 나의 대화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 경우는 예외였다.

 

“이건 뭐예요.”

“영화 보자고요.”

“저 시간 없는데.”

“언젠지 보지도 않고 말하는 건 너무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티켓을 다시 한번 봤다. 잉크가 모자랐는지 옅게 찍힌 글자까지 꼼꼼하게.

 

“댁이랑 영화 볼 시간은 없는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제가 밥 사고 커피 사고 술도 사면요?”

 

상대방도 그걸 알았다. 나는 누구나 그렇듯 공짜 밥, 공짜 커피, 공짜 술을 좋아했고 표정 관리를 못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겨우 그 세 가지에 넘어갔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티켓을 쥐고 있던 내 손에 들어간 힘이 필요 이상으로 셌다. 티켓의 주인이 두 개 산 아이스크림 중 하나는 당연한 것처럼 내 몫으로 챙겼다.

 

 

 

 

6.

 

저기요라고 말을 꺼내는 나에게 자기 이름은 라이관린이라고 또 한 번 말해 준 설레임은 이틀 뒤, 퇴근할 때에 맞춰 다시 편의점 앞에 나타났다. 새로 온 알바는 얘랑 아는 사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터벅터벅 걸어나오자 안 그래도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환해졌다. 곧 포옹이라도 할 기세인데 내가 적당히 간격을 두며 걸었다.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는 딱 영화 시작 시간이었다. 광고며 오프닝 뒤로 잘 모르지만 설레임의 취향일 것 같은 풍경과 인물들이 스크린을 지났다. 그가 고른 영화는 재개봉한 로맨스였다.

 

그 다음엔 말한 대로 밥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마시고, 술집이라곤 몇 개 없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 내 3학년 때 단골 술집에 가서 거의 동이 트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다. 안주로는 감자튀김이랑 소시지를 시켰다. 둘 다 취해서 별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났다. 필름이 끊긴 건 아니고 그냥 흐릿했다. 걔가 약속한 대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나, 아닌가. 모르겠는데 집은 잘 왔고 잠도 잘 잤다. 그것뿐이었다면 전부 ‘잘’로 끝났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매니저가 나를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원래도 저것보다 조금 덜할 뿐인 눈빛으로 봤지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까 세 시. 이미 레스토랑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씻고 나와도 이미 십 분 지났고, 집에서 레스토랑까지 택시를 탔는데 또 십 분이 훌쩍 갔다. 어디서 뭘 하고 있어도 뒤에서 콕콕 찌르는 매니저의 시선에 일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마감 때 털리는 건 나였다. 오늘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홀로 모이라고 굳이 지시한 매니저는 나를 지명하지 않고 모든 직원에게 주의를 줬다. 길고 긴 내 험담 끝에 매니저가 다음 타겟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알림음이 두 번 울렸다.

 

“거기 박지훈 씨. 얘기하는 중인데 뭐 해요?”

 

흥분한 목소리였지만 귓등으로 흘렸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처럼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소리만 들렸다. 아. 이……

 

“개새끼야.”

“뭐라고요?”

“개새끼랬다, 개새끼야. 지각한 건 정말 죄송한데 저 좀 그만 갈궈요. 나 관둔다. 월급 제대로 안 주면 노동청에 신고 넣을 거니까 똑바로 넣어요.”

 

좆같은 취업 준비 생활이 끝났다.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좀 추운 회의실 안에서 날 향해 보이던 면접관의 웃음이 진짜였다는 말이다.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 문장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문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자가 휴대폰 화면을 빛냈다.

 

 

 

 

7.

 

볼이 좀 뜨거웠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귀도. 어지럽지는 않았는데 발음은 샜다.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웅얼대니 까만색 머리통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잘 안 들려서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 줘요.’

 

부드러운 어조였는데 살살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다가 훅 열이 올랐다. 목청 높여 꽥 질렀다.

 

‘나도 씨발 연애하고 싶은데! 세상 살기 존나 힘들어서 안 한다고요!’

 

그땐 이미 가게 나와서 집 가기 전이었다. 우리는 애들도 아니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서 어느 상가 건물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단 내 입을 틀어막은 걔가 ‘알았어요, 알았어요’ 했다. 뭘 알았다는 건지 몰랐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감정들이 급속도로 현실 범위를 벗어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바 아닌데 일단 나는 그랬다.

 

‘야.’

 

어쨌거나 나보단 어릴 그 설레임 단골한테 이미 말을 까고 있었고.

 

‘너 사실 입술 되게 뽀뽀해 보고 싶게 생겼다?’

‘어, 진짜요.’

‘나는 막 트는데 너는 그런 거도 없네.’

 

제정신을 유지하기엔 둘이서 깐 병 수가 좀 됐다. 비교적 얼굴도 하얀 채 그대로고, 이상한 말도 하지 않고, 여기까지 나를 안다시피 해서 데리고 왔던 설레임이 한술 더 떴다.

 

‘그럼 해 보면 되겠다.’

 

너무 꽉 쥐어 버린 아이스크림이 넘쳐 나와서 내 손등으로 떨어질 때까지 걔는 입술을 안 뗐다. 솔직히 추워서 어떤 감촉인지는 잘 못 느꼈다. 근데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8.

 

편의점은 몇 주 뒤 잘렸다. 일단은 계속 일할 생각이었는데. ‘다음 주까지만 해 줘라, 지훈아.’ 나름 성실하게 일했는데 왜지. 동네 주민이었던 나는 언젠가 한 번 그 편의점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나 대신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건 몇 번 본 적 있는 사장 딸이었다. 이런 데까지 낙하산이. 진열대를 빙빙 도는 걸 귀찮게 지켜보는 사장 딸은 나를 못 알아봤다. 분명히 가기 전엔 살 게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기억이 안 났다. 그래서 산 게 설레임. 걔는 내가 잘리기 전 마지막 한 주간 오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뭐 물론 왔더라도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조금 아쉬웠다. 그냥.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결정했다는 건 아니고 결심했다. 최종 합격은 했지만, 아직 출근 안 했고 받은 월급도 없어서 이사할 돈이 없다. 여전히 열 걸음에 한 명꼴로 국적 불명의 사람들을 마주치는 동네에 살았다. 끝을 보이는 겨울에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 눈 소식이 예고되었다. 특히 수도권 지역에는 2cm 안팎의 눈이 쌓이겠습니다. 관심 없었다. 골목을 나오는데 볼 위로 차가운 게 떨어지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우연히 마주친 거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

“이제 아예 그만뒀다면서요. 그래서 그냥 인사하는 거예요.”

 

하늘도 하얀데 그 하늘을 배경으로 내리는 눈송이는 더 하얬다. 원래는 하얬던 것 같은 설레임의 얼굴은 약간 붉었다.

 

“저 아직 형 이름을 몰라요. 형은 맞겠죠?”

 

거울이 없어 모르겠는데 아마 내 얼굴도 그랬다.

 

“그리고 번호도 모르네요.”

 

걔는 잔뜩 얼어 있는 것 같은 손을 내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내밀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장면이다. 그때는 그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다가 밀어냈는데 지금은 휴대폰 주인의 얼굴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제가 관심이 좀 있어서.”

“…….”

“지금도 형은 아니에요?”

 

계속해서 눈송이들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 내 자취방이 있는 주택 담장 위로, 대답을 기다리는 설레임의 새카만 머리 위로 포슬포슬 내렸다. 처음에는 체온에 금세 녹아 사라지다가 조금 지나자 아스팔트 바닥에 그랬던 것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젓다가 휴대폰을 뺏어 빠르게 번호를 찍었다. 그대로 걔 코트 주머니에 골인. 마주치는 눈동자를 그렇게 오래 본 건 처음이었다. 투명하고 짙은 갈색의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이번에도 겨울바람으로 차가워진 입술에서는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왜인지 걔가 몸을 굽혀 주지 않아서 아주 가까이에서 떨어졌다 붙었다 했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내쉬는 숨만 축축하게 닿았다.

 

그래도 이 입술과 서로 핥고, 깨물어 보고, 온도를 나누고 싶었다. 춥고 바람 부는 바깥이 아닌 따뜻하고 조용한 어딘가에서 차갑지 않고 말랑하게 되면, 또 맞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