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설
w. 사막별

 

 

#1. 出國(출국)

겨울철에 퇴근을 하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보면 빨갛게 언 손을 덜덜 떨다가 엉뚱한 번호를 누르기도 한다. 지금처럼.

관린은 얼어터지기 직전인 두 손을 모아 뜨거운 입김으로 한 두번 불어 대충 녹이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김이 잔뜩 서린 안경을 잠시 벗고, 피곤해서 늘어진 어깨 위에서 무거운 카멜색 코트를 덜어내어 옷걸이에 건 뒤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야, 라이관린. 왜 이제와. 하루종일 나 혼자두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관린을 불만을 토로하는 지훈을 말없이 지나쳐 눈을 감고 뭉친 어깨를 한 손 주먹으로 이리저리 두드리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안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이미 며칠전부터 차곡차곡 챙겨둔 짐 위에 빨랫대 위의 마른 티셔츠를 몇 개 더 걷어 구겨넣었다. 겨울 옷은 부피가 커서 몇 벌만 더 넣어도 가방이 금새 틈새없이 채워졌다.

“관린아, 우리 진짜 여행 오랫만에간다. 그치. 너네 회사가 왠일이냐. 휴가를 다 보내주고.”

“보내줄 때도 됐지 이제.”

관린은 엷게 웃으며 책상 위에 비스듬히 서 있는 지난 여행 사진을 바라다보았다. 웃는 관린 옆의 더 환하게 웃는 지훈은 그 때 촌스럽게 브이를 그렸다가 플래쉬가 터지고 멋쩍게 주먹을 오므렸었다.

“근데 넌 왜 갔던델 또가는거야. 난 안가봤던데에 가고싶었는데.”

“스위스 진짜 좋았는데. 오랫만이네. 아, 나 여권 챙겼나?”

“거기거기. 책상 위에 있잖아. 으이구 하여간. 공항까지 갔다 출발도 못하고 도로 올 뻔..”

“어디보자, 며칠동안 안들어올거니까. 오케이. 전기 다 껐고 가스 중간밸브도 잠갔고.”

느긋한 성미의 관린도 정해진 비행기 시간 앞에서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집을 나서 계단을 흐르듯 내려갔다. 다행히 택시가 제법 있었다.

“난 올림픽대로 싫어.”

지훈은 입을 삐죽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도로위를 빠르게 흐르고 차가운 차창에는 금새 김이 서렸다. 그 위로 뭐라도 그려볼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도로 오므리고 고개를 돌렸다.

차 탄지 얼마 되지 않아 관린은 그새 잠들었지만, 곤하게 잠들어서마저도 온 얼굴에 여전히 피로가 그득했다.

그간 쌓인 피로탓에 공항에 도착하는 한 시간 동안 잘도 잤다. 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는 동안 귓바퀴 근처에 차가운 것이 슬쩍 스쳐지나갔다.

“어? 눈오네.”

“그러게. 이관린 좋아하는 눈이다. 넌 아직도 그렇게 애처럼 눈이 좋아? 하긴 그러니 굳이 추운데 더 추운 거길 가겠다고 이 난리지.”

관린은 멈춰서서 눈을 맞으며 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만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정신없이 출국소속을 밟고 게이트를 찾고 시간맞춰 비행기에 올랐다.

취리히까지 열 두시간.

지훈은 생각만해도 아득해져 혀를 내둘렀다. 지루해서 어쩐다. 책도 손에 안잡히고 그냥 관린이 틀어주는 영화나 봐야지 별 수 있겠나 싶었다.

관린은 털털거리며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 안에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들이 무심히 멀어진다. 하루종일 사람을 볶아치던 회사도, 보일러도 전기도 끄고 나왔으니 빛도 열도 없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집도 다 콩알처럼 작아지다 점이 된다. 곧 그마저도 얼기설기 펼쳐진 구름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젠 두고 나온 짐을 알아채도 정말 돌아갈 수 없다. 왼쪽 손등을 활짝 눈 앞에 펼쳐보고 약지에 단단히 걸린 반지를 확인했다. 이것만 있으면 되지,사실.

지훈도 창 밖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아까 차 안에서 가까이 보이던 도로위의 불빛들은 멀리서 보니 마치 강처럼 흐른다. 추위와 밤과 불빛. 낭만적인 삼중주.

“와. 이 좋은걸 이제껏 너만 봤냐. 오늘 참 좋네. 둘 다 창가에 앉아서 가고.”

지훈은 구시렁거리며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까 차 안에서는 오지 않던 잠이 구름처럼 소르르 밀려왔다. 멀어지는 의식속에 승무원과 관린의 말소리가 파고들었다.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냥 오렌지주스 한 잔 주세요.”

오늘도 콜라를 고를까 잠시 기다란 손가락을 콜라 쪽으로 가누다가 한숨을 쉬며 오렌지주스병 쪽으로 손가락을 휙 돌렸을 관린이 눈 감고서도 선하다. 하여간, 작은데 오래 맘쓰는건 알아줘야해.

“라이관린 너 또 그 영화 볼거지, 나도 보고싶은데 한숨 좀 자야겠다.”

관린은 나른한 눈을 꿈뻑이며 미리 저장해 온 영화를 재생했다.

 

#2. La Cuna (잃어버린 조각)

첫만남은 6년 전. 지금처럼 여행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관린의 옆자리에 앉은 지훈은 자꾸 꾸벅꾸벅 졸면서 관린에게 머리를 기대왔다. 처음엔 말을걸기가 민망해 그냥두었으나, 점차 짜증이 나기도해 깨우려는 찰나 기내식이 나왔다.

“저기, 밥먹어요. 밥.”

관린이 비빔밥, 스테이크? 묻기도 전에 지훈은 입을 쩝쩝거리며 메뉴를 말하고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도로 의자에 기대어 파묻혔다.

“비빔밥.. 비빔밥.”

나보고 대신 받아다달라는거야 뭐야? 뭐 어찌됐든 이제 반대편으로 머릴 기댔으니 다행이네. 저쪽 옆자리는 비었기도하고.

“이쪽은 비빔밥, 저는 스테이크요”

식사가 제 앞의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가 나자 지훈은 부스스 일어나 퉁퉁부은 눈을 부비며 고추장 튜브를 그릇 안에 쭉 짜고 비빔밥을 대충대충 섞었다. 그리고는 볼 한가득 밥을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다람쥐같았다. 관린은 밥먹자마자 겉옷을 이불삼아 덮고 도로 잠잘 폼을 취하는 지훈의 꼴이 몹시 우스웠다.

“되게, 많이 주무시네요.”

“알바하다가 퇴근하자마자 비행기 타가지구..”

“네. 주무세요, 그럼.”

관린은 아이패드에 저장해온 영화를 재생시켰다. 영화제작사 로고가 화면 가득 차올랐을 때, 지훈이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왜 그러세요.”

일시정지.

관린은 이어폰을 빼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기세좋기 말시킨 사람답잖게 지훈은 눈동자를 괜시리 이리저리 굴리며 할말을 골랐다. 기다리다가 답답해진 관린이 먼저 운을 뗐다.

“뭔데 그래요”

“저도, 영화 같이보면 안될까요.”

그 말에 관린은 잠시간 당황했지만 이내 이어폰 한쪽을 건내고 화면 반쪽을 지훈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래요 그럼.”

친화력 한번 끝내주는 사람이네, 약간 민폐 캐릭터인거같기도 하고.

“어? 나 이 영화 알아요. 엄청 옛날거네. 그거 알아요? 2004년도에 굵직굵직한 멜로영화 되게 많이 나온거. 이것도 그 때 나온거잖아요.”

알고요. 몰라도 알 바 아니고요. 이거나 보세요.

관린은 하고싶은 말 대신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고 검지 중지로 두 눈과 화면을 번갈아 가리켰다.

“네엡”

지훈은 그제야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닫힌 입술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도로 뻐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거 누군가한텐 굉장히 절망적인 결말 아니에요?”

“글쎄.. 어떤 사람이요?”

“누군가를 잊고 싶은 사람.”

관린은 지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불이 꺼진 적막한 밤비행기 안에서 지훈의 눈은 옅은 독서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천진한 눈빛. 그리고, 그래서 더 슬프게 들리는, 한밤중 차갑고 무거운 공기 밑으로 가라앉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몇 초의 정적 뒤에 다시 낮게 이어졌다.

“기억을 지워도 안되면, 뭘 버려야 되죠?”

관린은 질문을 던지는 지훈을 빤히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뭘 버릴 생각을 하지말고 덮어버려요. 그 위로”

뭘로요? 지훈은 눈으로 애처롭게 물었다. 막상 그래놓고는 관린과 허공서 마주친 눈길이 따갑고 가려웠다. 행여나 정말로 대답을 얻을까 무서워 고개를 도로 떨궜다.

순간 비행기가 급하게 고도를 바꾸었는지 둘은 온 속 안이 다 출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곧 머리위의 안전벨트 표시등이 깜빡이며 귀가 먹먹해졌다.

지훈은 왠지 모르게 제 안에서 통통 흉곽을 두드리는 심장을 모른 체 하며 침을 꿀떡 삼켰다. 귓속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 서서히 풀리는게 느껴졌다.

관린은 그 새 눈길을 거두고선 이어폰을 지훈의 한쪽 귀에서, 또 제 귀에서도 뽑아 돌돌 둥글게 말며 생각했다.

왜 자기가 물어봐놓고 지레 대답을 피하는거지? 내 조언이 와닿지 않는 방법인건지 아님 어떤 조언이든 겁이 나서 어린애마냥 주저앉아 있을 셈인건지.

아, 은근 신경쓰이게하는 타입이네.

관린은 결국 답답한 마음을 눌러담지 못하고 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라이관린이에요.”

“네?”

“내 이름. 그 쪽은 이름이 뭐에요?”

“지훈. 박지훈.”

“지훈씨는 어디가요?”

“여깄는 사람들 전부 다 런던 가자고 히스로 공항가는 비행기 탄거 아니에요?”

약간 백치미가 있네, 이 사람이. 관린은 피식 웃었다.

“말고. 내려서, 런던 어디가냐구요.”

“저.. 뭐 예약해놓은 호텔에 짐부터..”

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는 꼴이 재미있었다. 어색함을 이기지못해 말이 길어지지만 정직 상대가 대화에 적극적이게되면 뒷걸음치고 숨어드는 그런 성격.

왠지 길고양이 같잖아.

관린의 속에서 문득 장난기 가득한 호기심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자기가 앞으로 저지를 무리한 제안의 이유가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나랑 같이다녀요. 나 무계획으로 와서. 일정짜기 막막해. 예약도 하나도 안했고.”

“내가 관린씨 어떤 사람인줄알고요?”

그 말에 관린은 다짜고짜 지훈 허벅지 위에 제 여권을 툭 얹었다.

“이거, 여행 내내 맡기면 되겠어요?”

“관린씬 날 뭘 믿고요?”

“뭐 잠깐보든 평생보든 어차피 난 누가 어떤 사람인 줄 모르겠고 믿을 수도 없어서요. 상관없어요.”

그 말에 잔뜩 굳어가던 지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적어도 입발린 소리는 안하네.

“그래요 그럼. 근데 버거 좋아해요? 나 아마 런던있는 동안은 수제버거 집만 엄청갈 것 같은데.”

관린은 여전히 조금은 긴장한 얼굴의 지훈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또 쓸데없이 길어지는 말꼬리. 자세히 보니 왠지 좀 귀엽기도 하고.

 

#3. 우리 모두는 어느 새 낯선 곳에 닿아

내릴때가 다되어 지훈은 장시간의 비행으로 퉁퉁부은 발을 회색 운동화에 구겨넣으며 조잘거렸다.

“당연한건데 신기하다니까. 비행시간은 12시간. 근데 내려보니까 3시간만 흘러있는거. 꼭 시간을 거슬러서 도망친거같고. 안 그래요?”

“그러게요.”

귀엽게 생긴게 귀여운 생각만 하고 앉았네. 관린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상단 수납함에서 지훈의 가방을 끌어내렸다.

남의 나라에 발을 들인다는건 늘 귀국보다 한층 더 복잡하고 고단했다. 모든 절차는 기다림의 향연이었다. 입국심사를 하고, 뱅뱅도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수하물을 찾아 내리고.

초면에 가까운 얼굴이라도 꼴에 한나절 비행기에서 면을 익혔다고, 둘이 같이 있으니 그 지겨운 시간들이 조금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도 같았다. 공항을 벗어나니 이제 정말 아는 얼굴은 주변에 서로 뿐이었다.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지훈이 말했다.

“관린씨 근데 진짜 대책없다. 안했다구요? 숙박 예약을?”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도착해서, 지훈은 체크인을 하자마자 뒤를 돌아 관린을 슥 데스크 쪽으로 잡아끌었다.

“나 영어 잘 못해요. 그 쪽 방은 그쪽이 물어봐.”

관린은 유창하게 혀를 굴려 영국 영어를 구사하며 같은 층 다른 방을 잡았다. 부러 약간 으스대는 표정으로 지훈을 돌아보자, 지훈은 밥맛없단듯이 혓바닥을 쭉 내밀었다.

각자 방으로 들어서서 한참 짐정리를 하던 와중에 충전기를 꺼내 무려 컨버터까지 동원하여 충전을 하던 지훈은 갑자기 우다다 관린의 방으로 달려갔다.

“관린씨. 문 좀.”

“왜요?”

방을 들어서자마자 지훈은 관린의 짐가방에 노골적이고도 애처로운 시선을 냅다 꽂았다.

“아 좀, 두꺼운 잠옷 한벌 더 없어요? 여기 난방 왜이래. 내 방만 이래요?”

관린은 무성의하게 잠옷을 한벌 던지며 대꾸했다.

“대체적으로 쭉 이럴텐데. 유럽은.. 여긴.. 어… 라디에이터! 거의 그걸로 난방해요. 한국처럼 바닥 지지는게 아니고.”

“아오. 그리고 샤워부스. 너무 좁아요. 덩치 좀 있는 사람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겠더라.”

“글쎄. 여기 땅값이 살인적이니까. 다닥다닥 좁게좁게. 미니멀리즘. 뭐 그런거 아니려나.”

“관린씨, 나 관린씨한테서 좀 그런거 느껴진다.”

“뭐요?”

“여행 짬밥?”

관린은 마시던 생수를 뿜었다. 아씨. 유럽은 생수도 돈주고 사먹는거라 이것도 다 돈인데.

“지훈씨야말로 내 느낌엔 여행이 일상일줄 알았더니, 처음인가봐요?”

“나 사실, 비행기 처음탄거에요. 국제선은.”

지훈은 그 말을 하며 은근슬쩍 관린의 침대 위 이불을 몸에 돌돌 말았다. 도저히 제 방으로 돌아갈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 지훈씨는 여기 올 때 그것만 해온거죠? 항공권, 숙박권 예약. 맛집 검색.”

관린의 질문에 지훈은 덜 가신 추위에 덜덜 턱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턱 덜덜거리다가 혀 씹겠다. 나 지훈씨 여행 왜왔는지 맞춰볼까요?”

또다시 끄덕끄덕.

“차였죠? 지훈씨.”

지훈은 습관적으로 또 끄덕이려다 흠칫했다. 그리곤 입을 삐죽이며 있는 힘껏 관린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눈치빨라도 이런식으로 써먹으면 살면서 욕 많이 먹을텐데, 라이관린씨.”

관린은 그말에도 빙긋 웃으며 짐정리만 계속했다. 그런 관린에다 대고 지훈은 혼잣말을 했다.

“..사실은. 사귀다 차인거도 아녜요. 짝사랑. 그래도 되게 오래 좋아했는데. 심지어 그 형한테 차인지도 꽤 됐어요. 근데 실연여행을 이제야 온다 내가. 휴학하고 알바로 돈모으느라고.”

그제야 관린은 벙찐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아. 놀랬구나? 제 성향이 불편하시면 같이 안다니셔도.. 뭐.”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내가 놀랜건 그래서가 아니라, 실연했다고 휴학까지해서 여행비 버셨다는 대목.”

“헐. 꽉막힌 사람이네. 나 이래뵈도 그 때 엄청 상처받았어요. 제대로 치료해줘야 된다고, 마음도.”

“근데 어째 좀 그런것치곤 발랄해보인다.”

“그쵸? 진짜 웃긴게. 여행오기도 전에 매일 알바한답시고 고기 불판갈고, 편의점에서 담배팔고, 바에서 맥주잔 나르고. 하루를 이틀같이 살면서 거진 다 까먹었어. 아 맥주 얘기하다보니 맥주 땡긴다.”

“술은 다른날 해요. 이 사람 진짜 첫날부터 피로를 사서 쌓으려고.”

“맥주 마시는데 피로가 왜 쌓여? 풀리지.”

지훈은 대답없는 관린의 뒷통수만 보며 맥주 생각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입맛 그만 다시고, 방에 돌아가서 쉬어요.”

“뭐 왜요. 내가 그 쪽 덮치기라도 할까봐요?”

“아니요. 내가 그쪽 덮치기라도 할까봐요.”

“…거 참. 농담도 살벌하게. 갈게요. 낼 봐요.”

눈치를 있는대로 살피며 뽀르르 도망치는 지훈을 구경하고 곱씹는 재미에 관린은 그 후에도 한참을 피식거렸다.

 

#4. Eyes

“런던. 식상해.”

“비행기 처음타신분이 이틀만에 하실 소린 아닐텐데요.”

“빅 벤, 버킹검, 웨스트민스턴 사원. 다 막상 보니 생각보단 그냥 그러네요. 그냥, 그래.”

“그건 지훈씨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럴걸 아마도? 그리고 또..”

“또 뭐요”

“아, 아니에요”

그 후로 잠시간 이어진 침묵 속에 두 사람 입속으로 버거가 한웅큼씩 뜯겨들어갔다.

“지훈씨. 우리 그거 탈래요? London eye. 오며가며 계속 보이는 그 대관람차. 근데 그거 저녁 여섯시까지야. 탈거면 얼른 가요.”

대관람차의 한 캡슐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들어찼다. 그렇지만 죄다 낯선 언어, 낯선 얼굴들.

지훈은 문득 외로워졌다. 낯선 것들 속에 숨 쉬는 일이, 고작 그게 이렇게나 외로울 줄은. 몇 달 동안 가슴 뒷켠으로 밀어두었던 실연을 이제야 실감했다. 아 공허하네. 딱 이 높은 허공 속에서 덩그러니 서있는 것 만큼, 그만큼.

순간 지훈의 양 어깨 위에 관린의 양손이 떡하니 얹혔다. 그러더니 지훈을 휙- 하고 반바퀴 돌렸다.

“예쁘죠? 야경. 이제 이 안 말고 저 밖을 봐요.”

겨울의 해가 빨리 저물어 좋은건, 이 시간에도 깜깜한 런던을 이 안에서 볼 수 있게 됐단 거.

그나저나 혼자왔으면 진짜 별로일뻔했네. 여러모로.

“관린씨 말이 맞았네. 예상치 못했던거, 기대치가 없었던거. 그런건 또 정말 좋네요. 빌어먹게 좋네.”

“..나태주 시인 풀꽃이라는 시 알아요? 거기서 그러잖아, 가까이서 봐야 예쁘다고. 근데 사실 다 그렇진 않은거같애.”

무슨말을 하려는거지. 지훈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관린의 도톰한 입술을 힐끔 곁눈질했다.

“멀리서 봐야 예쁜것도 있어요. 지금처럼. 저 도시에 도둑놈도 있을거고 이런저런 싸움도 날텐데 멀리선 그런게 안보이니까 뭣도 모르고 그냥 예뻐보이잖아.”

“그래서요?”

“그러니까 가까이 두기 힘들어진건 그렇게 생각합시다. 좋은 모습만 보라고 멀어진거 아닐까.”

지훈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관린의 옆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몇살이에요, 관린씨는?”

“이제 좀 궁금해요? 그런게?”

“궁금해졌어요, 이제야.”

 

#5. L’essentiel est invisible pour les yeux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에 몸을 구기고 앉은 둘은 대낮부터 까쇼 와인과 블랑 맥주를 홀짝였다.

“와 기차에서 이런걸 다 주네, 여긴.”

“형은 참 술 좋아한다.”

“며칠 사이에 형 소리 잘도 한다. 나 엄청 배신감 느꼈다고. 뭐? 나보다 어려? 두 살이나?”

지훈은 두 살이라고 말할 때 손끝에 힘을 주어 캔을 땄다. 그 소리가 꽤 위협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왜. 내 입으로 내 나이 많다고 한 적은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머쓱해진 지훈은 괜히 말을 돌렸다.

“여튼 파리 스튜디오로 1구 쪽 아파트 예약해놓은건 잘한 것 같아.”

“이번엔 그냥 같이 써. 형 숙소.”

둘은 숙소에 짐을 내려놓기 바쁘게 도로 밖으로 나섰다. 낯선 도시의 야경은 늘 아름다웠다. 관린은 유람선 바토무슈 위에 몸을 싣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쳐진 기분을 보니 좋지 못한 내용임에 분명했다. 머리를 식히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차갑고 검은 강물이 넘실거렸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여객선의 바닥에 출렁이며 부딪히는 물소리가 그 사실을 알게했고, 물 위에서 흔들리는 둥글고 노란 불빛들도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증명했다. 잠잠하고 깊은 물은 아무런 직언을 하지 않았지만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지훈과 같이 다니는 날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그 세느 강의 물처럼 주변의 빛을 담아 흐드러지게하고 조용히 어느 모서리고 찾아가 부딪히며 존재를 알렸다. 그 작은 변화를 예민한 관린이 자각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날이 시린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싶지 않았다. 제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어내서 지훈의 목에 칭칭 감아주고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제 마음과,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지훈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았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오는 과정에도 개연성이 필요한걸까. 제대로 된 이유가 없으면 제대로 된 마음이 아닌걸까. 시작이 쉬우면 마음도 쉬운걸까.

그냥 좋아.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상대도 당황할 이야기라 생각했다. 언제부터 뭣때문에 얼만큼 좋아졌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무것도 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 때야 관린은 깨달았다. 본인이 연애는 해본 적이 있어도 사랑을 해본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살면서 그 무경험에 대한 일말의 불만도 없었다는걸.

“넌 여행의 묘미가 뭐라고 생각해?”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안고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지훈이 물었다.

글쎄, 여행은 왜 하는걸까. 세상 어딜가도 사람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긴데.

“잠시라서, 지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서, 일상이 아니라서. 그런거 같아 난.”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목소리는 겨울 바람처럼 맑고 서늘했다. 왠지 속이 시큰했다.

어쩌면 나도 네가 그래서 좋아진걸까. 잠시라서,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어서, 일상이 아니어서.

지훈은 생각에 잠긴 관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손목을 잡고 말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그래, 속이 안좋아? 안되겠다. 여기서 내리자마자 그냥 다시 숙소가자. 관광은 내일..”

관린은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눈을 감고 지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시만 좋아할게. 잠시만 다녀갈게. 아무래도 나는 너를 그냥 지나쳐갈 수 없을 것 같아. 내 발길은 이유도 없이 자꾸 여기에 머무르고 싶어하니까.

말없이 말을 건네는 동안 천천히 맞닿아있던 지훈의 입술이 열렸다. 매섭게 부는 바람이 귓바퀴를 벌겋게 만드는 동안 입술 새로 따뜻한 숨이 섞였다.

넌 참 아름답고, 따뜻하고, 괜시리 나를 눈물나게 해. 이 도시의 야경처럼.

숙소에 들어서서 둘은 약속이나 한듯 서로 옷을 벗어제치고 혀를 얽고 몸을 더듬기 바빴다.

숨도 가쁘고 마음도 가빴다. 새벽이 밝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은 정체모를 불안을 핑계로 샅샅이 애타게 서로를 탐했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이 어둠에 익어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관린아, 나 자꾸 멍청하게 그런 생각한다? 여기 계속 있고싶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언제까지고. 난 이방인인데. 자꾸 욕심이 난다. 욕심의 끝에 좋은 일이 없단 걸 알만큼 자랐는데도.”

지훈이 말하는 ‘여기’가 파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딱하도록 떨렸으니까. 관린의 손을 잡고 싶어하다가 혼자 주먹을 꼭 쥐고 말했으니까.

“있어, 그럼. 있어도 돼, 평생.”

섣부르다 해도 좋다. 내 마음이 그래. 지금 내 마음은 그래. 누가 나에게 찾아와도 너처럼 금새 그리고 많이 반갑진 않을 것 같아. 겪지 않아도 알아.

지훈의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새벽이 올 때까지. 날이 밝아도, 서로 품에 안겨있었고 매일 밤 둘은 마주안았다. 파리에서,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와서도. 사계절이 여러바퀴 돌도록.

 

#6. 萬年雪 (만년설)

불현듯 떠오른 옛 이야기는, 취리히에 도착해서 융프라우에 오르는 산악열차 위에서까지 끊임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마침내, 그리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설경은 놀라우리만치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모든 풍경이 무섭도록 하얗고 눈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려서 눈물이 쏙빠지게 추웠다. 그 와중에 변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분명히 예전과 달라졌다.

“관린아, 춥다. 넌 추운것도 싫어하면서 왜 여길 굳이 또 와.”

지훈의 말은 눈보라가 부는 휘파람 소리에 눈송이와 함께 흩어졌다.

관린은 이를 악물고 약지에 걸린 반지를 빼서 멀리 냅다 던졌다.

몇 초 남짓.

그 찰나를 기점으로 반지는 완벽한 관린의 것에서 이제 절대 되찾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이제 그 반지는 이 산의 눈을 다 녹이거나, 이 산 봉우리를 가볍게 뛰어내린다거나 그런 일들을 감행해야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관린은 허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차가운 두 손으로 더 차가운 얼굴을 가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눈물은 그 시린 감각과 대비되어 괜히 뜨겁게 느껴졌다.

“형, 나 잊고싶어 이젠. 근데 방법을 모르겠어. 얼굴도 목소리도 이미 희미한데 그런 형을 못 잊겠어. 사실 이제 뭘 못잊는지도 모르겠어. 보고싶어. 그래서 죽을것 같애.”

지훈의 담갈색 눈동자에 절망으로 굽은 관린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고, 지훈 홀로 마주한 관린의 눈동자엔 지훈이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왔구나. 그래서..”

“이렇게 멀리에다 버리고 가면.. 여기 다 버리고 가면 괜찮을까? 다 잊고싶은데. 그래야 좀 살 거같은데. 근데 내가 다 잊으면 형은 어떡해. 이제 박지훈 너는 어떡해. 여기서 너만 혼자.”

울음이 숨을 대신했다. 심장 박동소리가 눈발 날리는 속도에 맞춰 거세게 들렸다. 하얗고 차가운 그 곳에서 관린만 까맣게 탄 속을 토해내며 뜨겁게 울었다.

지훈은 그런 관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다정한 그 손길은 머리카락 한 올 헝클지 못했다.

라이관린, 이 바보야. 그러게 왜 하필 골라도 여길골랐어. 버리는건 좋은데, 멀리온것도 좋은데..

그래도 여긴 안돼, 바보야. 내가 녹아 사라져야 네가 행복할텐데. 여기 이 만년설처럼 네 안에서 내가 녹아 없어지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래.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제 그만 다 버려. 이미 들리지 않을 지금 이 말도.

네 마음이 그려냈던 난 이제 여기없어.

관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더이상 지훈은 관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7. 季節が 僕の心を 置き去りにしても
(계절이 나의 마음을 남겨두고 간다고해도)

3년전, 하늘이 회빛이 되도록 눈이 퍼붓던 겨울날, 관린은 괜히 이것저것 사다가 요리를 하고싶었다. 그날은 왠지 그랬다.

관린 나 배고파 P.M 8:20

여지껏 밥 안먹고 뭐했어 P.M 8:20

빨리 집에가서 너랑 놀려고 밥안먹고 일했다 왜 P.M 8:21

얼른와. 그럴줄 알고 닭볶음탕했어. 형 내 요리중에 이거 제일 좋아하잖아 P.M 8:21

형 차 많이 막혀? 왜 아직도 안와? P.M 9:11

박지훈 왜 전화 안받아? 무슨 일이야 P.M 9:23

그 후로도 답이 없던 지훈에게서 갑작스레 전화가 왔다. 아무런 영적 능력이 없는 사람도 불행을 감지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평소와 다를바 없는 전화벨 소리가 왠지 그날따라 심장을 짓이겼다.

“라이관린 씨? 혹시 박지훈씨 보호자신가요?”

“네. 그런데 어디시죠? 왜 지훈이 핸드폰을… 저기요. 지훈이 바꿔주세요.”

“여기 지금 화정대학병원인데 박지훈 씨가 방금전에..”

“박지훈 바꿔. 형 바꾸라고!!!!”

“..지금 응급실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저녁 824분경 올림픽대로에서 일어난 5중 추돌사고로 7명이 숨지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서 치료중입니다.

이 사고로 전복된 버스에서 먼저 구조되어 다른 승객의 구조를 돕다가 화재로 인한 차량 폭발로 숨진 버스승객 박 모씨의 사연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아니야. 뭔 소리야. 아니야. 아니. 아니야.

관린이 응급실에 도착했을 땐, 딱딱하고 좁은 침대밖으로 카키색 야상소매와 낯익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있고 흰 천은 익숙한 이목구비의 굴곡을 가지런히 덮고 있었다.

작년 겨울에 관린이 사준 외투. 같이 쇼핑했던 티셔츠. 어제 택배로 도착해서 처음 입고 나간 바지. 처음만났을 때 신었던 회색 운동화.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모습, 닫힌 눈에 드리워진 기다란 속눈썹, 날렵하게 빠진 코, 도톰한 입술은 온데간데 없고 여기저기 그을린 피부와 그 위에 새로 생겨난 무수한 상처들, 입술에 앉은 피딱지, 퉁퉁 부은 얼굴.

“이 사람 형 아니야. 이게 왜 박지훈이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아 진짜.. 아까 오고 있댔는데.. 아 이러지마.. 나한테 왜 이래 진짜.”

다리가 절로 풀려 찬 바닥에 주저앉았다. 알아서 아무말이나 뱉는 입에서 의미 있는 말들은 입밖으로 하나도 굴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용없는 한탄과 그럴리가 없다는 되뇌임뿐. 그 때 직감했다. 이 삶이 의미를 잃었음을. 어디론가 가버린 지훈도, 여기 남은 관린도.

잠깐사이에, 연락이 끊긴 불과 그 몇십분 사이에. 이 많은 상처가 사람 몸을 뒤덮고, 쉬던 숨이 멎고, 관린이 만든 닭볶음탕을 먹을 수 없게 되고, 같이 웃을 수 없게 되고, 다시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얼굴을 어루만질 수 없게 되고, 다시는 사랑해 라는 말에 대답할 수 없게 되고. 두번 다시.

아무런 인사나 그럴듯한 마무리 없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에. 나만 두고 혼자.

사람을 그렇게 젓가락질하듯 가볍게 찢어놓고도 시간은 잘만갔다. 계절은 잔혹하게도 침착하고 일정한 속도로 흘러갔다.

그 속에서 점차 다 잃었다. 그리고도 못 잊었다.

미안한 때도 있었다. 그 때 부랴부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없었겠지. 살았겠지.

미워한 때도 있었다. 지 목숨이나 챙기니 왜 오지랖은 부리다가.. 내 생각 안했어? 왜 그렇게 너를 아끼지 않고 생판 남을 위해 내던졌어.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연민하고 또 그리워하고.

할 수 있는건 전부 다했다. 계절이 몇바퀴 돌면서 마음에 끝없이 눈이 내렸고 지천의 기억들은 소복히 망각에 뒤덮여 그 위에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낯설었다. 그래도 매일 마음이 아팠다.

잊을 수 없는건 다른걸로 덮어버리라던 말을 지훈에게 하던 지난날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뭣도 모르던 철부지의 오만이었다.

멈춰버린 겨울. 녹지 않는 눈. 그 눈에도 덮이지 않는 마음. 기억을 상실한 사랑.

관린은 지훈과 마주설 수 있었던, 사랑을 말할 수 있었던 때의 본인을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질시했다. 그리고 비웃어 주고싶었다.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멀리 떠나는 법이라고.

 

#8.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그 때에 대한 회상은 사고 이후로 쭉, 지겹도록했다. 늘 삼년 전 그날에 갇혀 살았다. 그 무거운 기억을 담은 반지를 버린 관린은 뒤돌아 다시 건물 안에 들어섰다.

비겁하고도 느린 이별로부터 발걸음을 돌려 두꺼운 유리문 뒤로 홱 숨어버리니 눈밭의 추위는 다른 세상 일이 되었다.

사람 참 간사한게, 마음이 이렇게나 쓰리고 시린데 그래도 몸이 따뜻하니 좋았다. 목숨같던 사랑을 그렇게 몰아치는 차디찬 눈속에 모질게 떼어버리고 돌아가는 길목에도 배는 고팠다. 그러나 속에 뭘 넣어도 허기가 가실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정말 혼자 살아가야하나, 남은 날들을.
관린은 그게 믿기지 않아서 유리문을 도로 열고 나가 반지를 던져버린 그곳에 한참을 더 있었다. 미련한 아쉬움은 발걸음을 쉬이 떼게 해주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있었는지 모른다. 느끼기엔, 마치 영원같았다.

그래서인지 산악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도 공항에 들어설 때까지도, 심지어 비행기에 올라탈 때까지도 관린은 꼭 눈 속에 파묻힌 기분이었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이상한 느낌.

온 세상이 하얗고, 귀에는 그저 먹먹한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졸다가 무심결에 옆자리를 본 관린은 기겁했다.

카키색 야상. 회색운동화. 흩날리는 연갈색 머리카락. 예쁘게 물결치는 눈꼬리, 빚은듯한 콧망울. 새초롬한 입술. 떠나던 날 그 모습 그대로. 나눠 낀 그 반지까지 그대로.

지훈이 형. 형이야?

“당신, 이름 뭐예요?”

남자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뽑고 관린을 보았다. 관린은 얼결에 남자의 손목을 휘어잡고는 재차 물었다.

“이름이 뭐냐고”

“I don’t know what did you say.”
(무슨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What your name?”
(이름이 뭐냐고요)

“…….”

“Please, I want to know your name.”
(제발, 궁금해요 당신 이름)

“…志訓”
(지훈)

“Have you ever been to Korea?”
(한국에 가본 적 있어요?)

“Du tout”
(전혀)

말도 안돼. 관린은 그 후로도 절박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었지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안내방송 하나 없이, 승무원도 없이 비행기는 이륙했다.

관린은 한참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넋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멍하니 앞만 보고 앉은 관린이 신경쓰였는지 지훈을 꼭 닮은 옆 사람이 손가락으로 관린의 어깨를 쿡 찔렀다.

“If you’re not doing anything, Let’s watching the movie together.”
(할 거 없으시면 영화나 같이봐요)

남자는 싱긋 웃었다. 그리곤 이어폰 한쪽을 내밀며 관린 쪽으로 화면을 반쯤 들이밀었다.

관린은 또다시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영화보단 남자를 붙들고 이것저것 계속 묻고싶었다.

어째서 내가 했던 말을 그리 똑같이 하고 있는지.
정말 내가 아는 지훈이 아닌지.
이건 혹시 꿈은 아닐지.
꿈도 아니라면 이건.. 설마..

관린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결국 만사 다 제쳐두고 혼잣말같은 질문을 던졌다.

“기억을 버려도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해야 되지?”

“There is no remedy for love but to love more.”

그 말에 놀란 관린은 엉겁결에 싱그럽게 웃는 남자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어떤 것도 담지 않은 담갈색 눈동자는 맑게 빛났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관린은 그제서야 눈을 사르르 감았다. 부드러운 손같은 고운 햇살이 온몸을 쓰다듬었다.

 

#9. L’attente (기다림)

삼년 전, 지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온통 하얗고 조용했다. 귓가엔 눈보라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손엔 서신이 한편 들려있었다. 생전 본적 없는 낯선 언어로 적혀있었지만 왠지 읽을 수 있었다.

세 명의 생명을 구했기에, 그대는 생과 사이의 경계인 이곳에서 떠나기전 본인의 생사와 관련되지 않은 세가지 소원을 말할수 있다.

한참 고민하던 지훈은 눈을 감고 조용히 읊조렸다.

떠나던 모습 그대로이게 해주세요.
제가 제 이름만은 잊지 않게해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떠날 때 같이 떠날 수 있도록
이 곳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게 허락해주세요.

세가지 소원은 이루어졌다. 대신 나머지 것들을 모두 잃었다.
생의 모든 기억도. 언어도. 마음도. 감정도.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 수록 지훈은 지훈이 아니게 되어갔다. 이 곳을 떠났을 땐, 잃어버린 것들이 모두 되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의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무(無)의 공간에서 무엇을 매일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잊었지만 왠지 그 곳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이 공간에 들어오자 그제야 지훈의 발걸음이 자연히 떨어졌다. 두 사람이 연이어 눈 앞의 비행기에 오르자 아주 오래전부터 휘몰아 치던 눈이 그제야 멎기 시작했다.

 

#10. 또 다시

한참 후에야 그 이상한 비행기는 어디엔가 착륙했다. 그 비행기의 단 둘뿐인 승객이 내렸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손을 맞잡고 걸었다.

나 오래 기다렸어?

기다렸지. 같이 여행가려고.

나랑 같이 여행가면 뭐가 그렇게 좋은데?

잠시가 영원이 되는 것, 지나간 순간이 언제고 되돌아 오는 것, 네가 일상이 되는 것.

 

<작가의 말 – 재미반감, 구구절절 주의>

1. 처음에, 현재시점파트에서 지훈의 대사를 빼도 장면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아실 수 있을거여요
2. 복선은 꽤 여기저기 숨어있습니다. (지훈은 창문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 책을 쥐지 못한다, 비행기에서 둘다 동시에 창가에 앉았다, 관린의 눈에 지훈이 비치지 않는다 등등..)
3. 관린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대신 다른 비행기(?)를 탔습니다. 생전에 영어를 하지못하던 지훈이 여러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곳. 현실이 아닌 곳. 이미 떠난 지훈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곳. 관린이 결정적으로 눈치를 챈 이유는 한국어를 모르는듯 보이는 지훈이 마지막 질문만 알아듣고 대답을 했기때문, 그런 지훈의 눈에 자신이 비치지 않았기 때문. 그의 이 세상 마지막은 융프라우의 그 눈밭이었어요.
4. 겨울처럼 시리고 하얗고 아름다운 이야기, 다 알고 다시 보면 달리 읽히는 글을 쓰고싶었습니다. 읽어주심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