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눈
w. 이브피아제

 

 

서기 2100년, 달이 사라졌다.

2070년 즈음부터 달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현상을 관찰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15년이 지나고 달이 2/3크기가 되었을 때 겨우 달의 내핵에 아주 작은 크기의 블랙홀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냈다. 그러나 블랙홀을 없앨 과학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대비할 수 있는 건 달이 사라졌을 때 지구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달의 소멸은 조금씩 가속화되어 2100년에 달은 완전히 소멸했다.

달의 소멸은 단순히 하늘에 달이 뜨지 않는 것 이상이었다. 달과 지구의 인력은 지구의 자전주기와 자전축에 영향을 주고 있었고 조수간만의 차 역시 달의 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달이 사라진 지구는 기울어진 자전축이 똑바로 세워지고 자전속도가 빨라졌다. 하루는 16시간이 되고 4계절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북극은 더 추워지고 적도는 더 더워졌다.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생기며 인류는 멸종의 위협마저 느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 둔화되었던 진화가 종족의 위기 앞에서 재시작되었다.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고, 높이 뛰거나 날 수 있는 등 이능異能을 가진 인류가 태어났다. 달이 서서히 소멸할 동안 발악하듯 창궐했던 종말론자들은 이능력자들의 등장에 조용히 사라지고, 구세를 말하던 종교단체들은 신의 축복이라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능력자들의 탄생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어느 한 집단이 독점하고 이용하기에는 너무 대규모였다. 물론 국가가 통제를 시도했지만 1세대 이능력자들이 뭉쳐 국가의 통제를 거부하고 초국가적 단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만 정부를 완전히 등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템플이라 부르며 이능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템플은 인류를 위해 자연과 싸웠다. 달이 소멸하고 인류에게 이능력자가 나타난 것처럼 동식물에게는 괴수가 나타났다. 변화한 기후와 자연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했다. 달의 인력이 사라지자 해수면이 균일해지며 홍수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농업, 수산업, 축산업 등 식량산업에 엄청난 타격이 왔고 인구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달이 작아짐을 알아차린 뒤부터 약 30년 동안 준비해왔지만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지구적인 대격변이 어느정도 진정된 것은 달의 소멸로부터 반세기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인구는 반으로 줄어들고, 급격한 기후변화와 지진으로 수많은 공장지대가 파괴되었다. 인류는 문명의 혜택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새로운 지구에 적응해 살아남아야 했다. 템플은 자연재해와 괴수에게서 사람을 구해내며 시작되었다. 1세대 이능력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혼자 깨우쳤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 달랐고 기복도 심했다. 국가의 통제 아래 처음에는 실험대상이 된 사람도, 자신이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일반인으로 살다 죽은 사람도 있었다. 1-2세대까지 이능력자는 전 인류의 1% 정도라고 추정되었다. 그 이능력자들이 모여 인권 보호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이 발전하여 템플이 되었다.

이능력자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두 가지 타입이 있다는 것도 템플이 만들어지고 데이터가 쌓이면서 알려졌다. 그 전에는 혼자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센티넬만이 이능력자라고 생각되었고 자신의 능력을 다 쓰면 폭주하거나 고갈되어 사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정인과 접촉하면 배터리가 충전되듯 능력을 보충하며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처음에는 우연히 발견된 소수의 가이드가 다수의 센티넬을 책임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접촉의 강도와 상대에 따라 가이딩의 효율이 달라진다는 것, 그리고 가이드의 능력은 센티넬과 달리 빠르게 회복되지만 짧은 시간에 지나친 가이딩을 하면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2155. 겨울.

 

“오늘부터 템플 동아시아지부에 배정된 퍼블릭 가이드 라이관린이다. 대만 출신, 나이트, SS, 스물 셋. 앞으로 잘 지내도록. 자, 인사하지.”

“안녕하세요, 라이관린입니다. 한국어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더운 나라에서 온 사람답지 않게 차가운 색의 흰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가 예의바르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파트너가 없는 이유가 궁금해지는 매력적인 외모에 목소리였다. 가이딩 효율에는 등급과 상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신체적 접촉이 깊어질수록 효율이 올라갔기 때문에 매력적인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였다.

관린은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지부에 스며들었다. 잘생기고 매너있는데 심지어 가이딩 능력까지 탁월하니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가이딩을 핑계로 치근덕대는 가이드도 많은 세상에서 신사적인 최소한의 접촉으로 가이딩을 하는 관린은 순식간에 동아시아지부의 보물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관린의 가이딩 효율은 어느 등급의 어떤 사람과도 60% 정도였다. 파트너가 없는 이유는 그거였구나, 하고 모두 납득했다. 그래서 관린은 주로 다수의 센티넬과 함께 가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관린이 오기 전, 동아시아지부의 유일한 명물은 센티넬 박지훈이었다. 동아시아지부가 있는 한국은 10살이 되면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능력 검사를 한다. 그리고 능력이 있을 경우 템플에 들어가거나 정부 요원 후보로서 정부의 감독을 받는다. 대부분은 템플행을 선택한다. 지훈은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몇십 년 동안 수많은 센티넬이 있었지만 지훈은 어린 나이에도 역사에 남으리라 회자되는 어마어마한 능력자였다. 4대 원소인 지수화풍地水化風을 다루고 그 능력의 바닥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훈은 파트너도 없었을뿐더러 웬만해서는 가이딩을 받지 않았다. 혼자 감당 가능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만으로 임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훈과 비슷한 능력자가 한 명만 더 있어도 SSS라는 새로운 등급을 만들어야 할 지 모른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나이트 박지훈! 당장 따라오지 못해?!”

 

열이 잔뜩 오른 지부장의 호통소리가 템플에 쩌렁쩌렁 울렸다. 템플 동아시아지부장의 불같은 성격은 유명해서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지부장의 호통에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지훈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따라 들어갈 뿐이었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라!!! 너 진짜 이따위로 할거야?”

“왜요.”

“왜요? 왜요라는 말이 나와??”

“처리 다 했잖아요.”

“니가 달고 간 스콰이어 세 명 중에 두 명이 다쳤잖아 이 새끼야!!!!!!”

“그래서 방해물밖에 안 되니까 혼자 간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너… 너 이 새끼….”

“다음에는 제발 혼자 가겠습니다. 네? 이만 나가볼게요.”

 

말을 잃은 지부장을 뒤로 하고 쿨하게 문을 닫고 나와버린 지훈의 뒤로 분을 이기지 못한 지부장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저래 봬도 지부장은 지훈을 꽤 예뻐했다. 그런 지부장이 화를 낼 정도면 이번에는 지훈이 좀 심했나 싶었지만, 지훈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견습으로 데려간 스콰이어 놈이 가이드 필요하지 않으시냐며 추파를 던지다 못해 억지로 껴안으려고 했던 것이다. 꼭 이렇게 주제 모르고 설치는 애들이 매년 한두 명씩은 있다. 하지만 고자질도 아니고 굳이 지부장에게 구구절절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싸가지없고 말자, 한 것이다.

지훈이 유명해진 또 다른 이유는 미모였다. 크고 둥근 눈에 봉황의 꼬리처럼 길게 빠진 눈꼬리, 우뚝한 콧대와 깎은 듯한 턱, 애교있는 볼에 꽃잎같은 입술은 생글 웃고 있으면 인형처럼 예뻤다. 10살에 템플에 들어와 퓨필로 시작해서 짧은 스콰이어를 거쳐 나이트가 된 지금까지도 지훈에게 반해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 수도 없었다. 귀여운 연정부터 가이딩을 핑계로 덮치려는 사람까지. 그래서 지훈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벽을 단단히 둘렀다. 예의라고 생각해서,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해서 웃어주기만 해도 호감이 있는 줄 알고 달겨드는 사람에 질리고 질린 지훈은 차라리 아웃사이더 취급 당하는 게 편했다. 다행히 능력이 뛰어나 웬만한 일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고, 아직까지는 가이딩이 절실히 필요한 적도 없었다. 가끔 많은 인원이 투입되는 임무에서 퍼블릭 가이드에게 받는 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지훈과 관린은 동아시아지부의 양대 명물이었지만 접점이 별로 없었다. 통성명을 하고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지만 가이딩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서로에게 가끔 시선을 주게 되는 걸 제외하면 서먹한 직장 동료 그 자체였다.

 

그런 지훈과 관린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었다. 바로 치킨이다. 달의 소멸 이후 인류의 식량사정은 형편없어졌다. 미리 품종을 개량해 둔 곡류가 주요 식량이었으며 육류를 풍족하게 먹기는 어려워졌다. 백 년 전만 해도 서민의 친구이던 치킨은 생닭을 계란과 빵가루에 묻혀 기름에 튀겨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고급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템플은 사정이 나아서 3달에 한 번 정도는 특식으로 나왔지만 1인 1닭은 어불성설, 잘해야 2인 1닭이었다. 그런 동아시아지부에서 유일하게 1인 1닭을 할 수 있는 건 박지훈이었다. 퓨필 시절부터 예쁨받고 자란 지훈의 치킨 사랑은 온 지부가 알 만큼 유명했고 워낙에 능력도 뛰어나다 보니 암묵적으로 지훈이는 한 마리 먹게 해주자, 는 분위기였다. 지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부 사람들에게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어, 치킨 특식이 나오는 날은 평소에 보기 힘든 지훈의 함박웃음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대만에서 자란 관린은 동아시아지부에 와서 처음 후라이드 치킨을 먹어보았다. 그리고 감동했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언제나 느긋하던 관린이 커다래진 눈으로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가며 먹는 모습에 지부 사람들은 폭소했다. 두 번째로 먹어본 치킨은 간장치킨이었는데 그 또한 놀라운 맛이었다. 다음 번에는 빨간 양념치킨이 나올 거라는 얘기에 관린은 석 달 후를 애타게 기다렸다.

관린이 동아시아지부에서 세 번째 치킨 – 대망의 양념치킨 – 을 먹는 날이 드디어 왔다. 하필 그 날 관린은 유독 바빴다. A급 나이트 센티넬 두 명에 스콰이어 센티넬, 가이드 세 명과 같이 하는 임무였는데 스콰이어 센티넬이 긴장한 나머지 능력을 쏟아붓다가 고갈의 위험이 와서 스콰이어 가이드와 둘이 달라붙어 겨우 진정시켰다. 템플에 귀환한 뒤에도 책임자로서 의료실에 보내고 상태가 안정될때까지 지켜보느라 예상 복귀시간보다 한참 늦어졌다. 그리고 그날따라 재료가 부족해서, 관린이 허둥지둥 식당에 도착했을 때 모든 치킨 배식이 끝나 버린 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의 관린을 보고 조리사들은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때 막 치킨을 뜯기 시작했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라이관린 씨, 이거 같이 먹을래요?”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박지훈이!! 박지훈이 치킨을 나눠준다고?! 지훈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재차 관린을 불렀다.

 

“오늘 치킨 다 떨어졌다는데 이거 반 나눠줄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박지훈 씨.”

 

관린은 희희낙락 지훈의 앞에 앉아 사이좋게 양념치킨을 뜯었다. 매콤달콤한 양념치킨이 또 천상의 맛이었다.

 

“와, 이것도 진짜 정말 맛있네요. 한국 치킨은 정말 대단해요.”

“이게 세 번째죠? 뭐가 제일 맛있어요?”

“하나를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셋 다 맛있네요. 아, 지훈씨, 거기 묻었어요.”

“그래요?”

 

입술 주변에 빨간 양념을 묻힌 채 열심히 치킨을 먹는 모습에 관린은 피식 웃음이 터져 티슈를 뽑아 지훈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지훈은 스스럼없는 접촉에 깜짝 놀랐지만 담백한 손짓에 긴장을 풀었다. 사실 지훈은 관린과 크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호감이 있었다. 일단 잘 생겼다. 평생 거울에서 보고 자란 게 자신의 얼굴이라 눈이 높았던 지훈에게도 관린의 외모는 백점 만점에 백점, 흠잡을 곳이 없었다. 갸름하니 대리석 가루로 빚은 듯 희고 보얀 얼굴에 새까만 흑발이 잘 어울렸고, 크게 쌍꺼풀이 진 눈인데도 느끼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미끈한 콧대에 웃을 때 크게 벌어지는 입술이 시원했다. 그리고 관린은 지훈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아서 내심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지부로 배정됐을 때 분명 ‘나이트 센티넬 박지훈’에 대해 들었을 텐데 똑같이 예의바르면서도 여상하게 대하는 점이 좋았다. 한국 치킨 완전 최고라며 쌍엄지를 세우던 모습이 기억나 크게 마음먹고 같이 먹자고 한 거였는데 그걸 빌미로 치대거나 하지 않고 깔끔하게 고마워하며 선을 지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로 관린과 지훈은 조금씩 친해졌다. 말을 놓고 관린은 두 살 많은 지훈을 가끔 형이라 부르기도 했다. 둘이 같이 다니기 시작하니 파트너 자리를 노리다가도 제풀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 편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둘이 파트너가 되는 거냐고 설레발을 치는 사람이 생겼지만 정작 둘은 파트너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관린도 지훈도 나름의 이유로 파트너를 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선을 존중하며 둘은 호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지훈, 오늘 무슨 만화책 봐?”

“어 관린아. 오늘은 이거 보려고. 같이 봐?”

“아니, 난 음악 들을꺼야. 우리 같이 해.”

 

“지훈 형, 오늘 치킨 나와?”

“웅 오늘 치킨 먹는 날! 오늘은 간장 치킨!!”

 

템플 사람들이 이런 대화에도 익숙해질 때쯤,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에서 진동이 발생해 동해에 쓰나미가 몰아칠 가능성이 높다는 예보에 동아시아지부 거의 전원이 동원되는 초대형 임무가 발동되었다. 지훈과 관린이 처음 같이 나가는 임무였다.

 

“센티넬! 모든 스콰이어와 A에서 C 등급 나이트는 재해를 앞두고 날뛰는 괴수를 처리하고 S와 SS등급 나이트는 방파제에서 쓰나미에 대비하라! 가이드는 파트너 옆에서 준비하고 퍼블릭 가이드는 센티넬 두 명에 한 명씩 붙고 나머지는 작전본부에 대기하도록!”

“예!”

“방파제의 센티넬은 나이트 박지훈의 지휘를 따르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방파제에 줄지어 선 템플 단원들은 긴장한 상태로 바다를 주시했다. 감지능력을 가진 센티넬이 외쳤다.

“몰려옵니다!! 재해 규모는 오렌지!!”

레드-오렌지-옐로우-그린으로 나뉘는 재해 규모에서 오렌지면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최대인원이 동원되었지만……. 지훈은 재빠르게 외쳤다.

“물과 바람 능력자를 중심으로 각자 사전에 맡은 영역에서 시작하세요!”

저 멀리서 수평선을 가득 채울 듯 커다란 파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센티넬들은 능력을 끌어올려 물을 움직이고 바람으로 도왔다. 중력으로 붙잡고 바다 밑에서 흙을 움직여 파도를 방해하는 물의 흐름을 만들었다.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최대한 피해가 적게 하는게 목표였다. 지훈은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에 능력을 아껴두며 전체 상황을 지휘했다. 센티넬들은 금방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와 눈에 보이는 크기는 아직 그대로였다.

“가이딩 시작!”

지훈이 날카롭게 외치자 가이드들은 파트너나 임시로 배정된 센티넬의 손을 잡거나 허리를 껴안으며 가이딩을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파도가 작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다가오는 기세가 흉흉했다. 파트너가 없는 센티넬부터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이딩 효율이 떨어지는 퍼블릭 가이드가 그것도 센티넬을 두 명씩 챙기기는 버거웠다. 파트너가 있는 센티넬들이 사력을 다해 파도를 억누르고 가이드는 파트너에게 최대한 밀착하여 가이딩을 했다. 잠시 후 파도가 눈에 보이게 작아지고 파트너가 있는 센티넬도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지훈이 나설 차례였다.

“지부장님, 저 시작합니다.”

이어마이크에 대고 짧게 말한 지훈은 바로 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4대 원소를 다루는 지훈의 능력이 퍼지며 파도의 압력에 눌리던 다른 센티넬들이 숨을 돌렸다. 대부분 혼자 활동했고 가이딩을 꺼리는 지훈이라 항상 최소한의 능력만 쓰려고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체감 상 70% 정도의 출력으로 파도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지훈의 능력을 가까이에서 보는 단원들은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할 것 없이 경악했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훈이 파도를 막고 있는 사이 계속된 가이딩으로 어느 정도 능력을 회복한 센티넬들이 가세했다. 드디어 파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 나이, 트, 다카하, 시. 파도의 위력이, 어떻죠?”

지훈의 질문에 다카하시는 화들짝 놀라 파도를 스캔했다. 느려졌지만 아직 파도의 위력은 상당했다. 이대로 해안선에 도달하면 피해가 발생했다. 민가에 피해가 없을 정도까지 줄이려면 현재의 2/3 정도까지 줄어들어야 했다.

“아직입니다! 30% 는 더 줄여야 합니다!”

“젠장… 지부장님, 지원, 요청합니다!!”

[알겠다. 조금만 버텨! 기운 남은 놈들 다 출동해!!]

출동을 요청하고 지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센티넬들이 한계였다. 폭주나 고갈이 오게 할 수는 없었다. 본부에서 여기까지는 5분 정도 걸렸다. 지훈은 이를 아드득 갈아붙였다.

“모두 철수! 지원이 올 때까지! 내가 버팁니다! 대기!”

단원들을 철수시키고 지훈은 난생 처음 능력을 모두 개방했다. 아까 70%쯤 개방했다고 생각한 건 평소 대비였는지 의식적으로 전부 개방하니 두 배 정도의 위력을 보였다. 자신의 능력에 놀란 것도 잠시, 몸 속에서 무언가 쭉쭉 빠져나가는 느낌에 ‘아 이래서 센티넬은 가이드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버틴 것도 몇 분, 파도는 한 풀 꺾인 상태였고 황급히 도착한 지원반이 모두 달려들어 파도를 목표치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파도가 방파제와 해안선을 후려쳤지만 실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 단원들을 보호했다. 지훈은 이렇게 힘이 빠져 본 건 처음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 앞이 어지러웠다.

“나이트 박지훈, 가이딩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어지러움을 털어내듯 고개를 휘젓고 바라보니 걱정스러운 표정의 관린이 있었다. 지훈은 방파제의 책임자로서 다른 단원을 먼저 회복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관린의 말이 조금 빨랐다.

“책임자가 먼저 회복해야 다른 사람을 챙길 수 있는 겁니다.”

지훈은 포기하고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관린은 마주앉아 양손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크고 예쁜 손에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이 관린의 손에서 밀려들어왔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 기운은 마치 관린처럼 깔끔하면서도 친절했다. 손부터 시작해서 머리로 올라가 전신을 쓸어내리며 순식간에 상태를 회복시켜주는 데 그치지 않고, 능력을 방출할 때 몸 속에서 빠져나갔던 무언가를 채워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속도도, 흐름도 지금까지 받았던 가이딩과는 차원이 달랐다. 놀라서 눈을 떠 보니 관린도 똑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단원들도 놀랐다. 관린은 누구와도 가이딩 효율이 60%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상대의 등급이 낮다면 몰라도 같은 등급이라면 이 정도 속도로 회복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템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1주일 뒤, 관린과 지훈은 지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가 보니 역시나였다.

“상성 테스트 해봤나?”

“아니요.” “아닙니다.”

“왜?”

“…….” “…….”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상성이 좋아 보였고 둘 다 파트너가 없었으면 테스트를 해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관린도 지훈도 상성 테스트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지부 내에 소문이 퍼져 지부장이 직접 물어보는 상황이었다. 지부장 앞에서까지 핑계를 대어 거절할 수 없었던 둘은 결국 지부장 앞에서 상성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효율 101%, 보통 효율이 80%를 넘어가면 파트너로서 상성이 좋은 편이고 100%를 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말문을 잃은 지훈과 관린을 두고 지부장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지으며 둘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이거 100%가 넘는 가이딩 효율은 내가 이만큼 살면서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대단하잖아! 나이트 라이관린은 지금까지 상성 테스트가 항상 60%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 예.”

“지훈이 너도 이런 가이딩은 처음이었을거야 그렇지? 이거 아주 그냥 천생연분 아닌가 이쯤 되면? 나이트 라이관린이 왜 한국에 왔나 했더니 둘이 만나려고 그랬나보네!! 허허허 안 그런가?”

“지부장님, 적당히 하세요. 저희 나가보겠습니다.”

 

웃는 얼굴의 지부장에게 퉁명스럽게 무안을 주며 지훈은 관린의 손을 잡아끌어 지부장실을 나왔다. 밖에서 귀를 기울이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 시선을 전부 쳐내듯 지훈은 성큼성큼 걸었고 관린은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이끌렸다. 사람이 없는 – “자리 좀 비켜 줄래요? 땡큐.” – 휴게실에 마주앉았지만 눈길은 돌린 채 지훈은 말을 꺼냈다. 아까 지부장에게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파트너, 하지 않아도 괜찮아.”

“…….”

“지금까지 너도 나도 파트너 없이 잘 해왔잖아. 파트너로 각인하면 효율이야 더 좋겠지만 지금도 100% 넘어가는데 굳이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형….”

“지난번같이 큰 일 아니면 난 원래 가이딩도 거의 안 받고 잘 살았어. 그러니까 지부장님 말에 괜히 부담갖지마.”

“… 고마워요.”

 

지훈은 이유는 몰라도 관린이 파트너 각인을 하고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지훈 자신도 사람에 질려 파트너라는 관계를 꺼리는 편이지만 관린에게는 뭔가 더 큰 벽이 있었다. 본인이 깨기 전에는 그 벽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 이후로 템플에서는 둘을 묶어서 중요한 임무에 자주 투입시켰다. 썩 달갑진 않았으나 당연한 조치였다. 파트너든 아니든 둘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함께 다녀야 했다. 둘은 한 조가 되어 전보다 크고 위험한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다. 출장도 잦아져 둘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아무도 넘지 않았지만 선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 선을 넘었을 때 둘의 사이가 어떻게 될 지 두려우면서도 지훈의 눈을 바라볼 때, 관린의 손에 닿을 때 심장이 뛰었다.

 

달의 소멸로 4계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인간은 습관의 생물이라 아직도 계절을 말했다. 여름의 끝자락에 여느 때처럼 휴일을 함께 보내던 둘은 옛날 영화를 보기로 했다. <러브레터>라는 일본 영화를 골랐다. 배경은 일본의 홋카이도였다. 천지 가득 눈이 두껍게 쌓인 홋카이도의 풍경이 신기했다.

 

“눈이란 건 정말 신기해. 저게 차갑고 폭신폭신하다는 거지?”

“그러게. 어떻게 저렇게 쌓이는 거지? 눈은 녹아버린다고 하지 않았어?”

 

달의 소멸 이후로 지구에는 눈이 사라졌다. 하늘에서는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비가 내렸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연구에 매달렸지만 아직도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달과 눈이 사라진 지 50년이 넘었고 관린과 지훈은 달도 눈도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둘에게 눈이란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차갑고 하얗고 폭신한 무언가였다. 눈밭에서 죽은 연인에게 잘 지내냐고 외치는 주인공을 보며 관린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보고 싶다, 눈이란 거.”

 

그 표정이 왠지 모르게 애절하여 지훈은 무의식적으로 관린의 손을 잡았다. 사실 센티넬의 능력으로 눈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제법 있었다. 비가 올 때 기온을 낮춰 보기도 하고, 물을 다루는 센티넬이 눈을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했다. 아주 가끔 성공한 케이스가 있었지만 기록에나 겨우 남았고, 눈이 쌓일 정도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성공하더라도 결과에 비해 엄청난 능력을 방출해야 해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지훈은 물과 바람을 둘 다 다룰 수 있었으므로 시도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보여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쉽게 눈을 보여주겠다고 말해버리면 눈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관린의 표정이 부서질 것 같아서. 그 사이 영화는 끝나버렸고 눈에 대한 얘기도 사라졌지만 지훈의 마음 속에는 그 표정과 언젠가 눈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깊게 남았다.

 

몇 주 뒤에, 관린은 1주일의 안식기간을 요청해 대만으로 향했다. 템플에 따로 휴가는 없었지만 재량껏 안식기간을 요청할 수 있었다. 관린이 동아시아지부를 떠난 지 하루만에 지훈은 허전함, 심심함, 외로움을 느끼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관린과 가까워지기 전 십 년이 넘도록 사람과 거리를 두고 혼자가 편하다 생각했는데 고작 몇 달 만에 관린이 없는 자리가 휑했다. 서로 선을 넘지 않도록, 상대의 선을 존중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선은 무너져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느 새 관린이 지훈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관린이 없던 일상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화책을 봤던가? 영화를 봤던가? 무엇을 해 봐도 시간이 느렸다. 느리고 비어버린 시간에 상념이 찾아왔다. ‘관린이도 내가 없어 허전하고 외롭고 심심할까?’ 그렇다고 상상하면 기뻐졌다. 달이 사라지기 전에는 인공위성으로 누구든 지구 어디에 있더라도 실시간 통화가 가능했다고 하던데 그런 도구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관린이 돌아와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1주일 뒤가 두려워졌다.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둘은 언제나 서로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그래도 괜찮은 사이라서 오히려 친밀한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면 관린은, 어떻게 할까? 지훈은 관린에게 매달리는 저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린은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시간을 채우기 위해 지훈은 임무를 늘렸다. 조금씩 지쳐가는 자신을 알고 있었지만 텅 비어 두려운 생각만 드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관린이 돌아오면 지쳤다는 핑계로 가이딩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트 라이관린이 돌아오는 게 내일인가? 오늘은 쉬지 그래? 너 요새 피곤해보인다.”

“괜찮아요. 내일 오면 가이딩 받죠 뭐. 그냥 주세요.”

“… 쯧. 그럼 여기 삼림 체크나 하고 와.”

 

관린이 돌아오기 하루 전, 지훈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부에서 2시간 거리의 삼림을 둘러보는 간단한 체크였다. 혹시 괴수가 나타나더라도 지금까지 해당 지역에서 나타난 괴수는 소형이었기 때문에 지훈 혼자 처리가 가능했다. 소형 자동주행차량에 몸을 싣고 도착지까지 잠을 청한 지훈은 부스스 일어나 체크를 시작했다. 한참 동안 숲을 거닐고 있으려니 또 다시 관린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찰 것 같았다. 순간 파스스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파스스, 에서 시작한 소리는 부드드득, 으로 커지기 시작하더니 으르르 소리와 함께 발 밑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국소적인 지진이었다. 시작한 지진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지진파의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지훈은 바로 몸을 돌려 차량이 있는 장소로 미친듯이 뛰었다. 지부에 연락할 방법은 없었지만 지진을 감지한다면 도우러 오거나 자신을 구하러 올 수 있었다. 그러려면 마지막으로 위치가 기록되는 차량 가까이에 있어야 했다. 헉헉대며 차량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지훈은 숨을 골랐다. 능력이 얼마나 남았는 지 알 수 없지만,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봐야 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땅에 양 손을 대고 능력을 개방했다. 평소와 달리 요동치는 지면이 지훈에게 반항했다. 지훈은 지진파를 상쇄시킬 수 있는 진동을 만들었지만 힘이 달렸다. 최근에는 항상 바로바로 가이딩을 해주던 관린도 없고, 요 며칠 동안 임무를 늘리는 바람에 능력 또한 최대치가 아니었던 탓이다. 순식간에 코 끝에 땀방울이 맺히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지훈이 만들어내는 진동은 지진파에 비해 약했지만 끈질기게 지진파를 물고 늘어졌다. 자연 상태에서는 넓게 퍼지며 소멸했을 지진파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몸부림쳤지만 조금씩 잦아들었다. 머리가 핑 돌고 위가 뒤틀렸다. 어느 새 입술을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지진파가 소멸하고 한 발 늦게 멈춘 자신의 진동에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햇빛이 눈을 찌르는 듯 따갑고 몸 속이 들끓었다. 가이딩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이 정도 상태의 지훈을 가이딩할 만한 사람은 관린 뿐이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정신을 잃었다.

예상대로 템플 지부에서는 지진을 감지했다. 동원 가능한 인원이 당장 출동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고 정신을 잃은 지훈이 쓰러져 있었다. 당장 가이딩이 필요했지만 현재 지부의 퍼블릭 가이드 중 저런 상태의 SS급 센티넬을 가이딩할 수 있는 능력자가 없었다. 웬만한 가이드는 접촉하는 즉시 방전되어 쓰러질 것이 뻔했다. 폭주나 고갈 정도는 아니어서 관린을 기다려 가이딩을 받으면 되겠지만 그때까지 고통을 견뎌야 했다. 지훈은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버텼다. 몽롱한 머리로 관린의 꿈을 꿨다. 꿈 속에서 관린은 다정하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거나,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멀어지거나 했다. 진통제가 떨어지는 사이사이 몸 속이 뒤틀리는 통증이 찾아왔다. 스콰이어 센티넬들이 번갈아 지훈의 옆을 지켰다.

 

관린이 한국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직원이 달려와 템플의 급전이 있다며 나이트 라이관린 맞으시냐 물었다. 내용은 [나이트 박지훈 중태. 가이딩 당장 필요.], 그리고 도착 시간에 맞춰 템플의 차량이 이미 공항에 대기하고 있었다. 템플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야 관린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박지훈 중태 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왜? ‘동아시아지부의 박지훈’이 대체 왜 가이딩이 필요한 중태인거지? 하루만 일찍 왔다면, 아니 내가 대만에 가지 않았다면. 지훈에 대한 걱정과 자책으로 관린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아니, 사실은 템플의 상징이 찍힌 봉투를 볼 때부터 생각이 멈췄다. 10년 전 부모의 죽음을 알린 것도 바로 그 봉투였다. 관린은 템플 소속의 센티넬과 가이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둘은 등급이 달랐지만 사랑하는 사이였고 자연스럽게 파트너가 되었다. 자식은 관린 하나뿐이었고 좋은 부모였지만 그 이전에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 관린은 가끔 저도 끼어들지 못할 분위기를 부모에게서 느꼈고 아마도 그건 파트너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춘기의 관린은 언젠가 엄마와 아빠같은 사이가 될 파트너를 만나는 꿈을 꿨다. 하지만 임무 도중 고갈로 사망한 엄마, 그리고 아내를 살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자결한 아빠의 부고를 한꺼번에 들은 그 날부터 관린은 파트너라는 관계가 무서워졌다. 그런 관린의 마음을 반영한 것인지 관린은 그 누구와도 파트너 얘기를 꺼낼 만큼의 상성을 보이지 않았다. 지훈과의 상성 테스트가 101%의 결과를 보였을 때 관린은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 해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했지만 내심 부끄러웠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파트너를 맺지 않아도 괜찮다며 먼저 배려해주었다.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서운한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파트너를 맺자고 얘기해주었다면 못이기는 척 알았다고 했을 텐데. 그 때 파트너를 맺었다면 지훈이 중태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도 하지 못한 채 템플에 도착했다. “나이트 라이관린!” “왔다, 왔어!” “빨리!!” 템플의 모두가 한 마음으로 관린을 기다린 듯 시끌시끌했지만 관린은 그 누구에게도 대꾸하지 않은 채 지훈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방 앞에 선 지부장이 막아서지만 않았다면.

 

“나이트 라이관린, 정신 차려!”

“… 왜 그러시죠?”

“정신 차리고 들어가. 아무리 상성이 좋아도 둘 다 쓰러지는 사태는 막아야지.”

 

그리고 지부장은 약간의 증폭 효과가 있는 각성제를 건넸다. 관린은 말없이 약을 삼키고 방문을 열었다. 지훈의 옆을 지키던 스콰이어가 꾸벅 인사하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보라 손짓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은 말라 있고 손등에는 링겔이 꽂힌 지훈을 보니 문자 그대로 가슴이 미어졌다. 침대 옆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능력을 활성화시키고 조심스럽게 뜨거운 손을 잡았다. “- 윽!” 바짝 마른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지훈이 관린의 가이딩을 사정없이 쭉쭉 빨아들였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 기세였다. 열에 붉어진 손가락이 꿈틀거리더니 지훈이 눈을 떴다. 흐린 눈에 촛점이 잠시 맞춰지며 관린을 인지하더니 입이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말하지 마요.”

“…고, 시…”

“말하지 말라니까.”

“보고, 싶었, …….”

 

한 마디를 겨우 짜낸 지훈은 다시 혼절했다. 하지만 관린의 손을 꼭 잡은 채 안도한 표정이었다. 지훈의 버썩 마른 목에서 나오는 쉰 목소리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보고 싶었다고? 지훈이, 나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 손으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니 젖은 이마와 그 밑의 눈썹, 감겨 있어도 아름다운 눈이 드러났다. 떨리는 손 끝으로 볼을 쓰다듬고 마른 입술을 건드렸다. 조바심에 입이 말랐다. 빨리 지훈을 회복시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핑계인지도 몰랐다. 나를 보고 싶다고 말한 그에게 좀 더 닿고 싶었다.

지훈의 입술은 뜨겁고 건조했다.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그 틈새로 가이딩을 쏟아부었다. 조금, 조금만 더. 입으로 들어오는 시원하고 달콤한 기운에 지훈은 무의식중에도 입술을 움찔거리며 물을 찾듯 매달렸다. 뜨거운 혀가 더 달라는 듯 관린의 입술을 핥았을 때 관린은 이성을 잃고 지훈을 끌어안고 말았다. 두 팔로 작고 다부진 몸을 단단히 붙잡고 깊이, 더 깊이 입을 맞췄다.

얼마가 지났을까, 지훈의 열은 다 내렸지만 또 다른 열기로 몸속이 뜨거웠다. 관린의 혀가 입 속을 가득 채웠다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가이딩과 함께 관린의 숨결을 들이마시며 마치 몸을 섞는 듯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지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관린의 허벅지가 제 다리 사이를 침범해 고간을 누르고 있었다. 의식하는 순간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 흡,”

눈을 감은 채 정신없이 지훈을 어루만지던 관린도 그 소리에 움찔했다. 둘은 낯뜨거운 자세로 침대에 누운 채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입술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흥분으로 눈가가 붉었다. 당장 가이딩이 필요했던 지훈의 컨디션은 농도짙은 가이딩으로 이보다 더 최상일 수가 없었다. 후닥닥 침대에서 내려온 관린은 차마 지훈을 바라볼 수가 없어 등을 돌려 섰다.

“저, 저기 관린아.”

“미, 미안해요!!”

그리고 그대로 도망가버렸다……. “나이트 라이관, 린…?” 방 앞에서 계속 기다렸는지 지부장이 소리쳐 불렀지만 답할 사람 없는 메아리였다. 잠시 후에 지부장이 방에 들어왔을 때, 지훈은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관리를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은 듯 했다.

 

“……괜찮냐?”

“……아마도요…?”

“그래… 쉬어라….”

지부장은 왠지 모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더니 쯔쯔 혀를 차며 얌전히 문도 닫아주고 사라졌다.

 

 

지훈은 관린과 그 일에 대해 꼭 얘기를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날 이후부터 관린은 지훈을 피하기 시작했다. 지훈도 처음 며칠 동안은 관린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꾸준히 자신을 피하는 관린을 보며 금세 풀이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템플에서는 한 번 중태에 빠졌던 지훈을 배려한다며 혼자 해도 충분한 임무를 계속 배정했다. 관린도 예전처럼 여러 명을 통솔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예전처럼, 아니 그 때보다 더 어색하게 멀어진 채로 시간이 흘렀다. 파트너 얘기가 나올 만큼 붙어 다니던 둘이 노골적으로 멀어진 지 한 달이 넘자 템플에서도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특히 동아시아지부에서는 둘이 파트너로 묶인다면 SS급 가이드를 얻을 수 있는 일이므로 은근히 지훈과 관린이 파트너가 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꺼내면 지훈은 사납게 으르릉거리고 관린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버리니 누구도 정확한 상황을 몰랐다.

 

얼마 후, 템플에 관린이 곧 대만 지부로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애초에 대만 지부에서 한국으로 파견을 나온 형태였고 관린이 온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니 대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관린이라 유일하게 가까웠던 지훈과도 멀어지고 나니 정말 돌아가냐고 물을 만한 사람도 없어 소문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지훈은 그 소문을 늦게 들은 편이었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지훈은 말도 안된다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린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혼자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서운해졌다.

‘혹시 관린도 나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대만으로 돌아갈 리가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친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겠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며칠동안 고민하던 지훈은 어쨌든 관린과 얘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흐지부지한 상태에서 멀어지는 건 싫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대로 관린을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꼴사납더라도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지훈은 지부장실로 향했다.

 

“지부장님, 저 들어가요.”

“오냐. 드디어 왔냐?”

“예?”

“나이트 라이관린이랑 임무 같이 보내달라고 온 거 아냐?”

“헐, 어떻게 알았, 아니 알면 진작에 좀 해주지!”

“밥도 뜸을 들여야 맛있는 거란다.”

“아 뭔 소리에요.”

“쯧쯧,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이놈아. 하여튼 내일모레 당장 보내줄테니 가서 기다려.”

“1박 하는걸로 보내줘요. 저기 어디야 일본에 거기.”

“아이고 예 예 알겠습니다요. 아주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라 어?”

“…… 고맙습니다.”

“그래. 나가 봐.”

 

지부장을 움직여 임무를 받아냈지만 혹시 관린이 거부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 관린과 지훈은 일본 홋카이도에 있었다. 달이 사라지기 전에는 사람 키만큼 눈이 쌓이던 홋카이도에도 지금은 눈이 사라져서 겨울의 홋카이도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므로 몇 년에 한 번씩 상태를 체크하는 임무가 있었는데 거의 반쯤 휴가나 다름없었다. 이런 임무를 최고급 단원인 지훈과 관린 둘에게 맡겼다는 건 임무를 핑계로 놀다 오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일 뒤로 제대로 얘기조차 하지 않았던 둘이라 분위기는 몹시 어색했다. 자그마한 2인용 자동주행차량 안에서 한참 동안 말없이 주변을 돌아보던 지훈이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말을 꺼냈다.

 

“관린아. 전에 같이 봤던 영화 기억나? <러브레터>.”

“어, 응.”

“……너 그거 보면서 눈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눈에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

“말하기 좀 그러면….”

“아빠가, 돌아가신 지 한참 됐는데, 엄마를 보면서 我的雪, My Snow 라고 불렀거든. 아빠는 추운 나라에서 달이 사라지기 몇 년 전에 태어났는데, 아주아주 어릴 때 눈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 엄마는 이제 없는 걸로 자길 부르냐며 싫은 척을 했지만 그렇게 부를 때 아빠가 너무 다정해서 실제로는 좋아했어. 그래서 눈이 보고 싶었어.”

“…그랬구나.”

 

대화가 내려앉고 다시 조용해졌다. 관린은 이번에는 자신이 얘기를 꺼내야 한다 생각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뭐가?”

“그, 지난번에, ……내가 실수한 거.”

“실수?”

“…….”

“진심이야?”

“… 그건.”

“진심이냐고 묻잖아. 너 나한테 키스했던 게 실수였어? 나, 나한테 아무 감정 없는데 내가 매달려서 그런거야?”

“아니, 그건 아냐. 제발…….”

“제발 뭐.”

“… 우리 그냥, 지금까지처럼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안될까? 우리… 좋았잖아.”

“…….”

 

상처받은 표정으로 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후 순찰이 끝날 때까지 차 안은 꼭 필요한 대화 말고는 딱딱하고 아픈 침묵이 가득했다. 지훈은 지훈대로 관린은 관린대로 상심한 채 생각에 잠겼다. 둘은 숙소로 돌아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방에 틀어박혔다.

지훈은 후회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같이 임무에 보내달라고 한 게 아닌데. 그때 그냥 가이딩하다 그랬다고 웃고 넘길수도 있었을 텐데, 실수로 해달라는 그 말이 너무 서운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발, 이라고 말하는 관린의 표정이 외려 저보다 더 상처받은 것 같아서 마치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관린을 닦달해서 내가 얻고자 한 게 뭐였지? 파트너가 하고 싶은 거였나? 그건 아니었다. 관린이 자신과 상성이 제일 좋은 이상 굳이 파트너가 아니어도 관린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단지… 관린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 뜨겁고 갈급하던 입맞춤이 관린도 나를 원하고 있다는 확인이길 바랐다. 기억을 되살리자니 괜히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훈은 모종의 결심을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관린도 잠을 못 이루고 후회에 빠져 있었다. 상처받은 지훈의 얼굴이 눈 앞에 둥둥 떠다녔다. 실수로 생각해 달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그 말을 주워담고 입술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그냥 솔직히 얘기할걸. 나는 파트너가 되는 게 무섭다고. 하지만 너를 잃는 것도 그만큼 무서웠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고. 관린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느정도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상성을 핑계로 ‘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마음을 준 지훈은 너무나도 강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파트너가 되지 않아도, 그 사람과 내가 제일 상성이 좋으니까, 옆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을 깨달았다.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느라 지훈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제 더 이상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내일, 내일 날이 밝으면 다 얘기하겠다 다짐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설핏 잠에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11시 10분 전이었다. 멍한 머리로 문을 열었는데 지훈이 있었다.

 

“엇, 자, 자고 있었어? 미안.”

“아니, 아니야. 괜찮아.”

“…….”

“…….”

“이따 얘기 좀 해. 열두시에 —로 와줘. 알았지? 이따가 봐!!”

 

관린이 아직도 자고 있는 줄은 몰랐는지 지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대사를 외우듯 주루룩 말해버리고 도망치듯 뛰어가버렸다. 그 귀여운 뒷모습에 새벽까지 고민하던 것도 잊고 관린은 잠시 웃어버렸다. 열두시까지는 오래 남지 않았으니 급하게 씻고 뭐라도 먹어야 했다. 지훈이 무슨 얘기를 할 지는 모르지만 관린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지훈이 얘기한 위치는 숙소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들판이었다. 탁 트인 들판이라 멀리서부터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왜 이런 들판에서 보자고 한 건지 궁금해졌다. 관린이 오는 소리를 들은 지훈이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줄 게 있어서.”

“줄 거?”

“내 마지막 선물이야.”

 

그리고 지훈은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지훈의 능력이 소용돌이쳤다. 이제 눈이 오지 않지만 홋카이도는 차갑고 습했다. 그 습기가 지훈을 따라 모여들고, 온도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지훈은 온 신경을 집중해서 섬세하게 물과 바람을 통제했다. 비를 만드는 것도, 얼음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씩 지훈의 주위에 하얗고 작은 무언가가 생겨났다. 하나, 둘, 점점 많이 생겨난 무언가는 하나씩 둘씩 뭉쳐 좀 더 크고 폭신한 무언가가 되었다. 지훈은 눈을 반짝 떠 성공을 확인하고, 입술 안 쪽을 살짝 깨물며 기세를 올렸다. 어느 새 무언가는 휘날리고, 몰아치고, 관린과 지훈의 머리카락에, 그리고 땅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관린은 깨달았다. 지훈은 눈을 만들어냈다.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관린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휘날리는 눈을 받았다. 눈은 아주 잠깐 차갑다가 손 위에서 그대로 녹아버렸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과 지훈의 주변이 온통 희고 차가운 색이었다. 영화에서 본 장관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덮인 그 작은 공간은 손대기 두려울 만큼 하얗고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순간 관린은 왜 아빠가 엄마를 눈이라 불렀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눈을 만들어낸 지훈은 능력을 거두며 휘청했다. 임무와 상관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능력을 써 본 건 난생 처음일 지도 몰랐다. 관린은 놀라서 지훈을 붙들었다.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지훈 형, 괜찮아?!”

“… 괜찮아.”

“피가 나잖아! 가이딩을…”

“됐어!”

 

지훈이 관린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치고 코피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 서슬에 관린이 멈칫하던 사이 고개를 든 지훈의 얼굴은 눈물과 핏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진창인 얼굴에도 그 예쁜 눈에서 보석같은 눈물이 흐르는 광경에 잠깐 얼이 빠졌다. 관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훈은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너 대만 간다며.”

“뭐?”

“우리가 얼, 얼마나 친했는데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안, 흑, 해줄수가 있어?”

“대만이라니?”

“템플에 소문 다 났어, 바보야!”

“…….”

“너가 눈 보고 싶다고 했잖아. 흑, 그래서 마지막 선물로 보여주려고 한 거야.”

“형…”

“… 그리고 넌 실수라고 했지만, 난, 난 아니야. 난, 흑.”

“형,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관린은 다급하게 지훈의 말을 막고 얘기를 쏟아냈다. 돌아가신 부모님, 눈, 파트너, 자신의 비겁함, 지훈에 대한 마음까지.

 

“… 나도 아빠처럼 될까봐 무서웠어. 파트너가 되지 않아도 지훈 형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망쳤어. ……. 내가 비겁했어. 상처줘서 미안해.”

 

관린의 말을 들은 지훈의 눈에서 멎어가던 눈물이 다시 넘쳐흘렀다. 관린은 한 발짝 다가가 지훈을 품에 안고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훌쩍이던 지훈이 관린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음을 그칠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눈을 보고 싶어했는지, 아빠가 왜 엄마를 그렇게 불렀는지 알겠어.”

“… 왜?”

“사랑이니까. 나는 그게 궁금했던 거야. 그리고 이제 알겠어. 지훈이, 我的雪, 내 눈이야.”

“…….”

“눈을 보여줘서 고마워, 지훈. … 사랑해.”

“… 나도, 나도 사랑해. 관린이 네가 없는 일주일이 너무 길었어. …보고 싶었어.”

 

동그랗게 흰 눈이 쌓인 들판에서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키스했다. 지난번의 갈급하던 입맞춤과는 다른, 부드럽고 단단한 키스였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가이딩이 쏟아졌다. 전보다 더 달콤하고, 더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하염없이 키스하다 지훈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둘은 이마를 맞대고 웃어버렸다.

 

“아무것도 안 먹었어?”

“응, 긴장돼서 안 먹히더라.”

“그럼 안 되지. 뭐라도 먹으러 가자. 그리고 형, 나 대만 안 가.”

“뭐?”

“누가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만 갈 계획 같은거 없었어.”

“뭐라고?! 야 라이관린!”

“우리 뭐 먹으러 갈까? 라멘 먹을까?”

“… 아니, 나베 먹자.”

 

눈은 반쯤 녹아내려 땅을 적셨다. 지훈이 마음속에 그었던 선도, 관린이 마음속에 세웠던 벽도 그렇게 녹아내렸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벽을 허물고 선을 넘은 둘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고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을 밟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눈 위로 발자국이 앞으로 계속 함께할 둘처럼 나란히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