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맛나요
w. 다소다

 

 

Q. 뉴욕 타임스 ‘가보고 싶은 세계 100대 레스토랑’ 선정. 2019 미슐랭 가이드 서울 3 스타. 영국 잡지 보그가 선정한 ‘차세대 스타 셰프’. 어린 나이에 전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유와 소감은?

A. 과분하다. 나 혼자서는 절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묵묵히 뒤에서 따라와 준 W 레스토랑의 형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우리 가게 성우 형이 매니저를 자청했다. 셰프 일도 힘들 텐데 그저 감사할 따름.

 

Q. 음식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A.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사랑.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할 상대를 떠올리면서부터 요리는 시작된다.

 

Q. 요리 실력 외에도 잘생긴 외모로 주목받고 있다. 여러 방송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데, 관련한 향후 계획은?

A.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실력에만 이목이 집중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에 (웃음).

 

요리와 사랑은 관심과 기다림의 미학이란 점이 닮았다는 라이관린 셰프.

100여 명의 평론가가 극찬한 그의 요리는 매주 금요일 W 레스토랑에서 만날 수 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라이관린 셰프님, 감사합니다.

 

 

 

00.

 

“외모 관련 질문은 어딜 가든 꼭 하는구나. 뭘 그런 걸 물어봐.”
“우리가 여간 잘생겼어야지.”

 

백미러로 운전석의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어린 눈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 관린도 얕은 미소를 지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실력보다 외모로 주목받는 거 싫어서 그렇죠. 열심히 노력해서 쌓은 걸 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커서, 형도 알잖아요.
다시 말하면 외모는 노력 없이 타고났다는 거네? 농담을 툭 던진 후 말로 다정히 그러안는다. 알지, 너 열심히 해온 거. 형이 다 알지.

 

“수고했어. 오늘 스케줄은 이제 끝.”

“형도 수고하셨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세요.”

“아냐, 운전하는 거 워낙 좋아해서. 뭐 어디 들릴 데 있어? 도중에 내려줄까?”

“그럼 저 잠시 병원에 다녀와도 될까요?”

 

왜? 어디 아파? 빨간불에 차를 멈춘 성우가 걱정스럽게 돌아봤다. 관린이 머뭇대자 성우의 질문이 늘어난다. 저번에 말한 손목? 아니면 요새 독감 유행이라던데, 그거야?

별 건 아니고. 관린이 이마를 문지르며 답했다.

 

“코가 막혔거나 입안에 뭐가 생긴 것 같아요.”

“코나 입? 왜?”

“오늘 아침부터 아무 맛이 안 느껴져요.”

 

*

 

원인 불명의 ageusia 상태.

스트레스 의심.

 

낙서하듯 휘갈겨 적은 글씨를 한참 쳐다봤다. 의사를 한번. 다시 진료 차트를 한번. 의사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외관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아요. 간혹 그런 분들 계시거든요.

‘스트레스 의심’에 까만 동그라미가 여러 번 그려진다.

 

“이건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정신과랑 연결해 드릴까요?”

“지금 말씀하시는 ‘이건’이 뭔데요?”

 

아. 의사의 짧은 탄식과 함께 휘갈긴 글씨가 하나 더해졌다.

 

원인 불명의 ageusia 상태 (미맹. 미각 소실)

 

 

 

 

금요일에 맛나요

w. 다소다

 

 

 

01.

 

최근 방송이나 기사에서 자주 보이시더니, 부담감이 크셨나 봐요. 덧붙이는 의사의 사견이 비꼬듯 느껴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근래의 밤은 이불이 아닌 걱정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으니.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본연 그 자체로는 아무 연관도 없는 재료들을 엮어다 하나로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요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과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손 안에서 작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 성취감 하나만 보고 쉽지 않은 길을 달려왔다.

처음에는 유명세가 그저 즐겁고 감사했다. 월세를 겨우 내던 가게가 번듯한 ‘레스토랑’으로 불리고, 금박의 글씨로 이름 앞에 ‘셰프’를 붙여 명함도 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라이관린’ 네 글자가 지고 있는 무게가 버거워졌다. 부정적인 편견과 기대감. 어느 쪽이든 관린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될 뿐이다.

 

 

홀 담당 재환이 주방에 들어와 머뭇거린다. 눈이 마주치자 재환의 고개가 홀 쪽을 향해 까딱 움직인다.

 

“15번 테이블에서 알리오 올리오가 너무 짜다고, 담당 셰프 좀 보고 싶다 하시네.”

 

그거 다섯 팀 동시에 조리한 거 아니야? 다른 분들은 아무 말이 없는데, 저 손님만 자꾸 짜다 그래. 재환의 말에 옆에 있던 진영이 거들었다.

 

“꼬투리 잡고 싶어서 그런 거지, 뭐. 괜히 색안경 끼고 컴플거는 손님들 많잖아.”

“아마 그 손님 말이 맞을 거예요.”

 

맛을 못 느낀 지 근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기존의 레시피대로 만들었지만, 간도 못 보고 만든 요리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색안경은 다른 손님들이 끼고 있는 걸지도. 관린이 앞치마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셔츠를 맨 윗단추까지 잠그고 해당 테이블 앞에 섰다.

 

“금일 총괄 셰프 라이관린입니다.”

 

부드러운, 그러나 강단 있는 목소리. 핸드폰을 보던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잡지에서만 보던 그 사람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알리오 올리오는 짜기 어려운 요리인데, 그렇죠?”

 

기대 많이 하고 왔는데 실망이네요. 지훈은 핸드폰 액정 속 기사 제목을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한국을 대표하는 셰프, 라이관린.’ 힐난조의 말을 내뱉는 붉은 입술이 연신 혀로 축여진다. 흑요석 같은 두 눈동자도 관린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 비난하는 입장이면서 뭐가 그렇게 불안하대. 관린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세요?”

 

제가 없는 말 지어내는 거 같으신가요? 저도 요리 배우는 학생이에요.
지훈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어 번 쳤다. 관린의 시선이 자연스레 지훈의 손에 집중되었다. 아, 말랑한 손등 위 자잘한 상처가 그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손가락 뼈대도 굵은 편이네. 관린의 흐릿해진 동공이 산만한 정신을 그대로 담아냈다. 허. 이번엔 지훈 쪽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여전히 멍한 관린의 얼굴에 파스타를 내밀며 말했다.

 

“셰프님이 한번 드셔 보세요. 염전을 담아낸 심오한 연출이었다면 인정합니다.”

 

셰프님이란 호칭 중 일부러 ‘셰프’를 조금 작게 말했다. 나노 단위의 무례함을 알아챈 것일까. 관린의 정갈한 눈썹이 사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잠시 인상을 쓴 채 머뭇거리던 관린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짜네요. 윗니와 아랫니가 채 마주치기도 전에 내뱉은 한 마디. 음식을 대충 씹고 넘긴 관린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

 

“돈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의 바른, 동시에 무미건조한 태도. 지훈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지금 누굴 진상 취급이야? 욕지거릴 내뱉고 싶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쏠린 이목에 말을 아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에 ‘레스토랑’이 붙은 가게들의 의자는 하나 같이 왜 이리 무거운지. 치렁치렁한 테이블보와 무거운 의자 사이로 겨우 빠져나가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팔뚝에 힘이 잔뜩 들어간 관린의 손이 느껴졌다. 균형을 되찾은 지훈이 살짝 목례를 하며 손을 빼냈다. 뒤돌아서는데 다시 팔뚝에 큼직한 손바닥이 느껴진다.

 

 

“… 정말 짜네요. 더럽게 짜요.”

“네?”

 

와, 짠맛이 입안에 가득해. 지훈의 팔을 잡았다 놨다. 다시 잡았다 놨다.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관린이 ‘신기하네’를 연발한다.

 

 

“요리 배우는 학생이라 했죠?”

 

슬슬 무서워지고 있는 차에 지훈에게 불쑥 질문이 들어왔다. 저랑 같이 일하실래요?
왜요? 뜬금없는 제안에 지훈은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궁금한 마음 반, 황당한 마음 반을 담아.

 

“아무래도 당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왜요? 이번에는 황당함만 담아 되물으려다 참았다. 대신 좀 더 적절한 질문을 선택했다.

 

“… 너 미친놈이지?”

 

 

02.

 

강의실 뒷문을 열고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빈자리를 찾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빼고 앉으니, 대휘가 입 모양을 뻐끔거린다. ‘지각이 특기야?’
‘뭐’. 지훈 역시 입 모양으로 대답한 뒤 가방을 내려놨다.

 

“오늘은 왜 늦었어?”

“밤에 잠을 설쳤어.”

 

픽. 소곤거리던 대휘가 비웃음을 흘린다. 이유도 가지가지야, 하여튼. 입술을 얄밉게 내밀어 보이곤 필통을 열었다. 필통 한구석에 금색 글씨가 박힌 명함이 유독 빛났다. W 레스토랑 셰프 라이관린.

밤잠을 설친 이유가 바로 이 명함 때문이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새로운 진상 퇴치방법인가? 그 사람 대만에서 유학했다더니, 중국어로 된 비속어 아냐? 니 취팔러마 같은. 번잡한 마음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W 레스토랑?”

 

대휘가 명함을 볼펜 끝으로 톡톡 치며 아는 체를 했다. 아, 과제 때문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냈을 고급 음식을 먹어보세요. 과제란 틀 안에 여러분의 동경과 낭만을 담아 스스로에게 선물하세요. 비싼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도 먹고, 세계에서 손에 꼽힌다는 진미를 먹어보는 거야. 아니면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는 디저트도 좋아요. 과제를 핑계 삼지 않으면 그대들은 평생 그런 경험을 시도조차 안 할걸?

교수님의 설명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W 레스토랑의 라이관린 세프였다. 이 쪽 업계에선 흔치 않은 자수성가 스타일. 제과제빵 학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달에만 드문드문 등록해야 하는 지훈에게, 관린의 삶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의 제약은 노력으로 이길 수 있어. 누구나 아는, 그러나 쉽게 믿지 못한 주문. 그것을 마법처럼 실현해 준 라이관린을 자신도 모르게 롤 모델로 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동경은 하루아침에 짓밟혔다.

 

“와, 너 과제 하러 왔다니까 명함 준 거야? 나중에 물어볼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아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대. 같이 일 하자던데.”

 

에엥? 엉겁결에 큰 소리를 낸 대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위 눈치를 한번 본 후 다시 입모양만 벙긋거린다. 너랑? 왜? 지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몰라. 시큰둥한 대답과 함께.

롤 모델에서 미친놈으로 전락하기, 참 쉽다 그치? 중얼거리며 명함을 사선으로 찢기 시작했다.

 

“야야, 그렇다고 그걸 찢어? 아깝게.”

 

대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중에 연락해서 과제에 간단한 인터뷰라도 넣던가 하지. 점수 잘 나올 텐데. 명함을 찢던 손이 멈칫한다.

“아버님이 한 번만 더 0.5, 1.0 같은 샤프심 학점 받아오면 연 끊는다 하셨다며. 그리고 이번에도 학점 1점대면 너 학사경고 아니야? 여태 지각 많이 해서, 과제라도 고퀄로 제출해야 어느 정도 커버할 텐데.”

 

친하게 지내자는 말, 좀 수상하긴 한데 지금은 네 성적이 더 수상하잖아. 학생이라곤 믿을 수 없는 성적표.
빵야. 대휘의 입에서 쏜 총알이 지훈의 가슴에 콕콕 구멍을 낸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나. 쓰라린 양심을 부여잡고 지훈이 책상에 엎드렸다.

 

 

03.

 

“매일 주방을 정리정돈해요. 바쁠 땐 양념을 보지도 못하고 바로 넣어야 하거든요. 때문에 항상 있던 위치에 놓는 게 중요해요.”

 

순서가 뒤죽박죽이면 소금 넣을 곳에 설탕 넣고, 그런 실수가 허다하니까. 관린의 설명에 따라 작은 노트에 바지런히 글씨가 채워진다. 매일 정리 정돈. 울퉁불퉁한 글씨체를 쳐다보던 관린이 살풋 웃으며 묻는다. 제가 도움이 좀 되고 있나요?

지훈이 대답 대신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관린이 자신의 양손을 마주 비비며 덧붙였다.

 

“많이 먹어요, 지훈 씨.”

 

격식을 차리지 않은 편안한 복장. 요새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는 퓨전 치킨 집에 거품 가득 생맥주. 어젯밤에 열심히 읽은 책 ‘유쾌한 인간관계’ 속 멘트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건만, 여전히 뭐가 그리 불안한지 지훈의 두 눈이 좌우로 도륵 굴러간다. 지훈 씨 치킨 좋아한다 하지 않았어요? 다리를 떼어 지훈의 앞에 놓으며 관린이 물었다.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늘어지는 말꼬리를 따라 기다란 속눈썹도 천천히 깜빡거린다.

 

“셰프님은 안 드세요?”

 

머뭇거리던 지훈이 물었다. 관린은 아까부터 목 부위 하나만 접시에 올려놓고 턱을 괸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잘 먹네. 엄마가 아들 보듯 뿌듯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첫 만남 때와 동일 인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호의적인 태도도 신경 쓰였지만, 밥 먹자고 만나 놓고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꽤 부담스러웠다. 혹시 식사 하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으니 관린이 고개를 젓는다. 배 안 고프시면 그냥 카페에서 봤어도 괜찮은데.

배가 안 고플 리가. 열흘이 다 되어갈 동안 관린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무 맛이 없는 무언갈, 그저 살아있기 위해 우물거리는 것은 전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관린에겐 지금 절실히 ‘맛’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법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고민하던 관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저… 실은 제가 식사 방법이 좀 특이해서… 지훈 씨 도움이 필요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지훈이 손에서 포크를 놓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관린을 쳐다봤다. 딴에는 준비 자세인 모양이다. 그 모습에 입꼬리를 살풋 올리고 지훈의 작은 손가락을 하나 감쌌다. 첫 만남 때 느낀 것이 맞다면, 이 사람과 접촉한 상태에서는 맛이 느껴져야 한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치킨을 한 입 먹었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자극. 당황한 표정의 지훈을 보며 관린이 환하게 웃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 엄청 맛있어요.”

‘맛’이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유희인가. 그리고 그 기쁨을 일깨워 준 이 사람을 나는.

 

“지난번에 했던 아무래도 지훈 씨가 필요한 것 같다는 말, 취소할게요.”

 

저 지훈 씨가 필요해요.
반드시.

 

 

04.

 

원래 보조 셰프를 구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그 날 지훈 씨의 야무진 행동이 마음에 들었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다만 오늘 보셨다시피 제가 요새 심리가 많이 불안정해서, 옆에 누가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일하면서 같이 식사 정도만 해주세요. 아, 그리고 이 사실은 지훈 씨와 저밖에 몰라요. 레스토랑 형들도 모르는 사실을 지훈 씨에게 알리는 건, 그만큼 지훈 씨를 믿기 때문인 거 아시죠?

 

“그럼 우리 금요일에 만나요.”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오는 차가운 관린의 손에 한 번. 당신이 필요해요를 잇는 ‘지훈 씨 맛있어요’에 두 번. 가출한 지훈의 정신은 관린의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제 자리에 돌아왔다.

코트 안주머니 속이 문득 불편했다. 더듬거려 손에 걸리는 것을 꺼내니, 언제 서명했는지 모를 계약서가 들어있다. 혀의 마법사라 불린다더니. 말로 부드럽게 옭아맬 뿐만 아니라 내 혀마저 움직일 수 없게 조종당한 기분이야. 계약서를 펼쳐 낯익은 듯 낯선 문장들을 되새겼다.

 

라이관린 (이하 ‘갑’) 과(와) 박지훈 (이하 ‘을’) 는(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지훈의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계약서를 읽어나가던 관린이 멈칫했다.

“지훈 씨를 갑이라 적을까요?”

“… 저 무급인가요?”

 

돈 주는 쪽이 무조건 갑이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니 마주한 얼굴에서 웃음이 터진다.
지훈 씨는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제게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하던 그 얼굴이, 순간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도 꼬리가 생긴 듯 살짝 간질간질했던 것 같고.

정신이 몽롱했던 탓 일 거야. 합리화를 하던 지훈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지훈 씨, 저는 이제 집입니다. – 라이관린]

[우리 앞으로 좋은 사이 만들어가요. 금요일에 뵐게요. – 라이관린]

 

미쳤어. 박지훈 이젠 제정신인 때가 없는 모양이구나. 지훈은 간질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침대에 엎드렸다. 짜증나. 나지막한 웅얼거림과 함께.

 

 

05.

 

“요 며칠 텐션 낮더니, 이제 완전 극복했나 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관린에게 성우가 넌지시 물었다. 보조 셰프 들어와서 좀 편해? 관린이 눈썹을 올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싱겁게 답했다. 뭐, 그것도 맞고.

 

“그냥 기분이 좋아.”

“지훈 씨랑 너랑 잘 맞나보네.”

 

둘이 만나기만 하면 주방에서 하하 호호 웃음꽃 잔뜩 피우더라. 옆에서 진영이 거들었다. 지훈 씨가 손도 꽤 빨라. 솜씨도 좋고.

응. 우리 지훈 씨 일 잘해. 관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행동도 빠르고, 똑똑하고, 심성도 고와.”

 

홀 쪽을 향해 있는 창 너머, 가게로 들어오는 지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제법 추운 날씨 탓인지 양 볼과 코끝이 빨갛다. 흑, 백, 적. 삼색이 한데 어우러진 지훈의 얼굴을 보며 관린이 덧붙였다.

그리고 귀여워.

 

*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자 지훈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다. 남은 한 손으로 야무지게 식사하는 모습에 입 꼬리가 귀를 향해 스멀스멀 움직인다. 지훈의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손바닥에 가득 감싸 잡았다. 자신의 것과는 다른, 따뜻한 체온이 온 몸에 퍼져나간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네요.”

“일취.. 좋은 뜻이죠?”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과장된 관린의 몸짓을 따라 하며 지훈이 헤실 웃는다. 형체도 없는 그 웃음이 볼에 닿아 간지럽힌다. 아무 말이나 빨리 내뱉지 않으면, 웃음이 혀까지 간지럽힐 것 같아. 괜스레 볼을 긁으며 관린이 물었다.

 

“내일은 뭐 해요, 지훈 씨?”

“저 내일은 공부해요. 곧 기말이라.”

 

왜요? 지훈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궁금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관린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말로 짧게 대답했다. 그냥요. 그냥.
얼버무리니 잠시 바라보던 지훈이 관린 대신 설명을 늘어놓아 정적을 메운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시험이 끝나요. 그 후로는 방학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요. 제과제빵 자격증 다시 공부해 볼까 고민 중이에요. 아, 시험은 실기 위주인데…

 

손에 갑자기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말을 멈췄다. 관린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지훈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실기 위주인데? 다음 말을 재촉하듯 관린이 물었다. 여전히 돌아오는 지훈의 답이 없다. 태평히 밥을 먹던 관린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관린이 빠르게 손깍지를 풀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지훈 씨. 습관적으로 그만. 연신 사과하는 관린을 보며 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메워졌던 손가락 사이사이가 휑하게 느껴져,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 그럼 제가 좀 도와줄까요?”
 

방금 있었던 일 사과의 의미로. 저 이래 봬도 꽤 유명한 셰프에요. 널스레에 살짝 경직되어 있던 지훈의 입꼬리가 풀어진다. 푸흐. 터지는 맑은 웃음.
이번에는 지훈을 따라 웃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여 아무 맛도 안 나는 음식을 입안 가득 채워 넣었다. 순간 손이 아닌 다른 곳이 맞닿길 원한 자신을 책망하며.

 

 

06.

 

[XX 오피스텔 00동 0호. 재료 잔뜩 준비해 놨어요 ? 린 셰프]

 

연이어 사진 두 장이 도착했다. 한 장은 가게만큼 넓은 주방 조리대, 관린을 닮은 하얀 아일랜드 식탁과 그 위 여러 식재료들. 다른 한 장은 러시안 고양이와 그를 쓰다듬는 관린의 손.

 

[함께 기다리는 중. 도착하면 1층에서 연락 줘요. – 린 셰프]

 

문자에서도 묻어나는 다정함에 광대가 솟아난다. 셰프님 고양이 키우시는구나. 사진을 다시 한번 화면에 띄웠다. 화면 한구석에 위치한 뼈마디가 얇은, 가늘고 기다란 손. 관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맞물리게 올려놓았다. 당황하여 제대로 보지 못한, 어제의 손깍지는 대충 이런 모양이었겠지. 솔직히 화가 났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손깍지가 ‘습관’이라는 관린의 말이. 특별한 사이도 아니면서 그것에 분노하는 자신이.
너무 신경 썼던 탓일까. 마트에서 아줌마와 수다 떨며 깍지를, 경비 아저씨와 반갑다고 인사차 깍지를. 온 세상 사람들과 번갈아 손깍지를 끼는 관린이 꿈에 나왔다.

라이관린의 유일이 되고 싶어. 어쩌다 이렇게 욕심과 삽질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걸까. 본인을 향해 혀를 두어 번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자 식재료들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라벤더 향의 향초를 피우려다 문득 시원한 향이 좋다는 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파란색 향초를 새로 꺼내 불을 붙였다. 짙은 머스크 향. 이게 지훈 씨가 말하던 시원한 향이려나. 고민하는 사이 지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1층 도착이요 ? 지훈 씨]

 

전부터 느낀 거지만 지훈의 문자는 간결하다. 간혹 지훈이 세상의 모든 시행착오를 다 겪어본 듯 툭툭 말을 내뱉을 때가 있는데, 그 말투와 문자가 꼭 닮았다. 지훈 씨는 타인에게 정을 쉽게 안 주는 사람 같아. 막 함께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 재환이 농담조로 던진 말 또한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관린 역시 처음엔 지훈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속은 꽤 여린 사람이야.”

“2일 사이에 꽤 친해졌나 보네.”

 

진영의 말에 관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은 좀 어색한데, 그냥 느껴져.
지훈 씨랑 내가 손을 많이 잡아봤거든. 싱겁다는 듯 웃는 형들의 얼굴을 회상하다 보니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인기척에 지훈이 뒤를 돌아봤다. 추운데 뭐하러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지훈의 입 모양에 따라 하얀 꽃이 피었다 사라진다. 그냥요. 아파트 현관의 두꺼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뻐끔뻐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문을 열어주며 관린이 덧붙였다.

 

“조금 더 빨리 보고 싶어서.”

 

추운 날씨 탓인지 지훈의 귀가 유독 붉다.

 

 

*

 

 

“여기서 설탕을 넣을까요?”

“음. 교수님이 외형도 평가하시나요? 그럼 올리고당으로 단맛과 윤기를 내는 것도 좋아요.”

 

오. 탄식과 함께 작은 손이 야무지게 움직인다. 나란히 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그런 지훈을 바라봤다. 까만 두 눈. 그 안에 담긴 흰 그릇들이 별처럼 빛난다. 좋아하는 것을 향한 열정과 열망 그리고 행복. 전염성이 강한 그것들이 관린에게로 번져나간다.

과도한 연습량으로 인해 손목 인대가 자주 늘어났었다. 편히 쉬라는 의사의 당부에도 요리가 너무 하고 싶어 이로 칼 쓰는 법을 연구할 정도였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이 지금의 지훈 씨와 같았을까.

 

“셰프님.”

 

별안간 지훈이 관린을 부르며 옆을 돌아봤다. 간 좀 봐주세요. 지훈이 음식을 담은 그릇과 함께 나머지 손을 내민다. 평소와는 달리 다섯 손가락을 전부 펼친 채로. 입매를 당겨 웃으며 손가락 하나하나를 맞잡았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잠시. 요리에 대한 관린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훈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큰 눈에 관린이 오롯하게 비친다. 지훈의 눈을 통해 본 자신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향한 열정과 열망 그리고 행복.

전염성 강한 그것들에 완전히 물들어버렸다.

 

 

07.

 

크리스마스이브와 양식 레스토랑. 둘의 조합은 커플들에게 있어 찰떡일지 몰라도, 종사자에게는 매우 개떡 같다. 하루 종일 허리 한번 못 펴고 일한 것 같아. 스트레칭을 하니 허리에서 굵게 뚝 소리가 난다.

 

“어이구, 많이 힘들었죠 오늘.”

 

앞치마를 대신 정리해주며 관린이 눈썹을 팔자로 내린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가 금요일이라, 우리 지훈 씨 고생했네. ‘우리’ 지훈 씨. 이름 앞에 붙은, 어감마저 몽글한 단어. 속으로 천천히 곱씹으니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옆머리를 만지는 척 귀를 가리는 지훈을 보며 관린이 아랫입술을 꾹 눌러 웃음을 참았다.

 

“오늘 고생한 기념으로 스스로 선물을 주고 싶어요.”

 

맛있는 음식 먹고 싶은데. 말끝을 흐리며 지훈을 쳐다봤다. 꿈뻑거리던 지훈의 눈이 가운데부터 휘어진다.

 

“같이 갈까요?”

 

셰프님 저 없으면 식사 못 하시잖아요. 답지 않게 능글맞은 대사까지. 웃음기 잔뜩 실린 지훈의 말이 귓가에 넘실거린다. 이번엔 관린이 옆머리를 만지는 척 귀를 가렸다.

 

*

 

고단했던 탓인지 술이 빠르게 들어간다. 제법 열이 오른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식혔다. 앞에서 관린이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지훈 씨? 그렇게 묻는 관린의 발음도 잔뜩 어그러졌다. 함께 마주 보며 실없이 웃었다. 웃음을 내뱉을 때마다 술기운도 함께 뿜어 나온다. 자-. 관린이 한 손엔 술잔을 쥔 채 다른 손을 내민다. 볼을 식히기 위해 잠시 떼었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이제는 당연한 손깍지.
기분 좋아.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룸으로 된 일식집. 옆 방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던 주변이 몸을 낮추니 일순 고요하게 느껴진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앞자리의 관린을 올려다봤다. 관린이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분 좋아요? 음식을 먹지 않음에도 손을 맞잡은 채. 지훈은 대답 대신 새끼부터 검지까지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기와 손끝의 감촉이 번갈아 가며 몽실거린다.

 

“되고 싶은 것과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누군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혼자 선을 긋고 살았다. 의지가 약한 놈이라 그래. 아버지는 그런 지훈을 보며 혀를 찼다. 의지도 희망이 있어야 생기죠. 그때마다 지훈은 차오르는 말을 삼켜냈다.
요즘 세상에 빚 있는 게 흠은 아니라지만, 청춘의 덫은 될 수 있다. 실기 학원, 시험 응시료, 재료값이 포함된 전공 수업료. 공부할 시간을 줄여, 공부할 돈을 벌었다. 지훈에게 있어 의지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동기 중에 준영이. 걔 유학 갔다 오자마자 S호텔 주방장 밑으로 들어갔대”

“이 바닥에서 이름 좀 알리려면 해외 유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야.”

“나는 그런 거창한 거 바라지도 않아.”

 

아버지 가게 안 망하고 이어받으면, 그걸로 만족하련다. 지훈의 농담에 동기들이 웃는다. 지훈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아닌 것들은 술과 함께 넘겼다.

 

“근데 셰프님은 제가 되고 싶은 걸 될 수 있게 만들어줘요.”

 

세계적인 셰프님 밑에서 일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고. 덕분에 기말시험도 잘 보고. 그러니까 자꾸 분수에 맞지 않는 걸 욕심내게 되네.
머리를 쓰다듬던 관린의 손이 뒷목까지 짧게 타고 내려왔다. 흐르듯 귀 옆 볼을 지나 지훈의 턱 끝을 잡고 엄지로 문질렀다.

 

“또 어떤 게 욕심나요?”

 

우리 지훈 씨가 욕심나는 거 내가 전부 갖게 해줄게요. 지훈이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진짜? 약속해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눈을 잔뜩 휘어 접은 채. 얼굴을 바짝 붙여 연거푸 묻는다. 알싸한 술 냄새가 여린 숨과 함께 관린의 코앞에서 살랑인다. 고개를 끄덕이니 아기 같은 손가락이 관린을 가리킨다.

 

“셰프님.”

 

장난기 어린 지훈의 눈이 관린의 콧대를 타고 내려간다. 간지러운 시선이 입술에 닿자 지훈이 물었다. 안 돼요? 대답 대신 턱을 비틀어 입을 맞췄다.

 

 

08.

 

“잘 잤어요?”

오늘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 아직 잠이 덜 깬 지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추워. 지훈이 칭얼거리듯 관린의 가운 안으로 파고든다.

 

“그러니까 어제 잠들기 전에 옷 입으라 했잖아.”

“옷 입을 체력을 남겨주던가.”

 

베게에 머리만 대면 바로 뻗게 만들어놓고. 웅얼거리는 지훈의 코끝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서로를 껴안은 채 게걸음으로 식탁까지 이동했다. 지훈 자리의 의자를 빼고 손짓하니 장난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이번엔 지훈이 맞은편 의자를 빼고 손짓한다. 관린을 먼저 앉힌 후 그 위에 비스듬히 앉아 목에 팔을 둘렀다. 아직 추워요. 머리를 쓰다듬는 관린의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파인다.

“오늘 출근은 몇 시에요? 어제 발주 넣은 양파 조금 부족할 거 같다고, 함께 장보기로 했잖아요.”

“아, 맞아.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출발해요 우리.”

“오늘은 퇴근하고 집에 가서 잘게요. 벌써 몇 주째 금요일 날 퇴근하면 월요일까지 셰프님 집에서 지냈으니.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 같…”

 

말하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관린의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볼 안쪽을 집요하게 헤집더니 방금 입에 넣은 빵을 가져간다. 피식 웃고 다시 빵을 뜯어 넣는데 여지없이 키스가 따라온다. 솜사탕을 냇가에 씻던 너구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텅 빈 입을 벌린 채 관린을 쳐다보니 키득거리며 웃는다. 맛있어. 그런 관린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럼 주말에 데이트할까요? 오랜만에 남이 해주는 음식 먹어요, 우리.”

“어, 저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봐둔 맛집 있어요.”

 

아, SNS에서 봤었는데. 이름이 뭐였지. 좁아진 지훈의 미간을 꾹 눌러 펴주었다.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검색해 보면 되죠.”
“오. 셰프님 머리다, 머리.”

 

서로의 볼을 맞댄 채 검색 엔진을 켰다. 초록색 검색창을 누르니 자주 검색했던 단어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ageusia, 미맹 원인, 미각 소실, 미맹 치료방법.

 

관린이 빠르게 화면을 넘기며 물었다. SNS 어디서 봤어요? 허나 돌아오는 건 답이 아닌 질문.

 

“미맹?”

 

그게 뭐예요?

 

*

 

그러니까, 스트레스로 인해 맛을 못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저와 신체가 닿으면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거네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절 고용했고. 마침 보조 셰프가 필요할 때에 야무진 제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거짓말하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말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뭘 믿고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했겠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성의 뒤를 쫓지 못한 생각들은 그저 버겁고 또 버겁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훈 씨.”

 

처음엔 지훈 씨도 과제 때문에 저랑 일한다고 했었으니. 채 끝맺지 못한 관린의 말 한마디. 단어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마음을 찔러, 정제되지 못한 감정들이 결국 흘러넘친다.

 

“… 우리는 서로의 목적에 의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네요.”

“세상에 목적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어요.”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셰프님 곁에 있어야 하는 게 맛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아닌 ‘박지훈’이어야 했던 적, 한 번이라도 있으세요?

 

답이 없는 관린을 보며 지훈이 헛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을 한소끔 고른 후 침실 한 구석 널브러진 옷을 입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적어도 제 사랑은 맹목적이었어요, 셰프님.”

 

 

09.

 

‘W레스토랑, 연이은 악평. 매출액도 눈에 띄게 감소해…’

‘라이관린 셰프, 돌연 모든 일정 취소. 왜?’

‘꽃미남 셰프의 예상된 말로? 얼굴만 믿더니 결국 실력 뽀록났네. 네티즌의 냉담한 반응’

자극적인 기사, 폭력적인 댓글들. 노트북을 덮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무거운 머리. 그 무게에 맞지 않게 텅 빈 생각들만 쏟아져 나온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는데, 멋대로 쥐여주곤 그 무게를 견뎌내라 하죠.”

 

내 명성과 권위. 때로는 그것들에 압사당할 것 같아요. 유난히 고단해 보였던 날, 관린이 지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웅얼거렸다. 여린 숨을 따라 관린의 가슴이 부풀었다.

멋대로 밀어 넣은 나의 마음. 그것들에 눌려, 셰프님은 그때처럼 아슬아슬하게 숨을 쉬고 있을까. 책상 한쪽에 접어놓은 계약서를 펼쳤다.

 

사생활을 비롯한 업무적 기밀에 대하여 누설을 일절 금한다.

상호 간의 신뢰가 깨질 시, 이 계약은 언제든 파기할 수 있다.

 

신뢰와 계약이 밑받침되어야 하는, 그 정도의 사이.
손익이 맞는 시점까지만, 빌려주었던 것을 나는 오롯한 내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욕심내지 말걸. 여태껏 그랬듯이 선을 긋고 포기했어야 하는데. 내 잘못이야. 여러 번 되뇌어도, 원망과 울분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프고 아리다. 지훈은 도려낸 듯 허한 가슴을 붙잡으면서도 관린을 생각했다.

*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핸드폰을 뺏어 들며 재환이 혀를 찼다. 텅 빈 관린의 시선이 핸드폰을 따라 재환의 얼굴로 올라간다. 귀신 나오겠다, 관린아. 뒤 따라온 성우가 거실 불을 켜며 말했다.

 

“밥도 안 먹었지? 형이랑 죽 사 왔어. 데워줄게.”

“한시라도 더 빨리 먹이고 싶어서 그냥 시판용 사왔어.”

 

절대 끓이기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니다. 진영이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가게는?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 그대로 갈라진 질문을 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성우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잠시 쉬기로 했어. 형들도 휴가 좀 다녀오려고.”

“… 가게까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뭐라 했어요?”

“관린아, 그런 거 생각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마. 지금은 너 몸 하나만 생각해.”

 

제대로 된 도구 살 돈이 없어서, 각자 집에서 엄마한테 혼나면서 조리 도구 몰래 가게로 가져와 쓰던 날들 잊었어? 처음부터 다시 쌓으면 돼.
뭘요? 모래성 같은 위상이요? 건조한 웃음을 지은 관린이 마른세수를 했다.

재환이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일단 먹고 나서 얘기하자. 성우가 관린의 어깨를 두들기며 일어났다.

 

“되고 싶은 것과 될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그렇게 살아왔대. 그래서 포기가 너무 쉽대”

“누가?”

 

진영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관린이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과, 원치 않은 걸 안고 사는 사람. 우리는 같은 듯 다르다고 생각했어.”

 

맛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이용가치가 충분한 사람. 처음엔 그랬다. 그래서 조금씩 커지는 지서로의 마음을 ? 애초에 원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 그러안고 가야 한다 생각했다. 지훈 씨는 포기가 쉬운 사람이니. 다행으로 여겨졌던 그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관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소린지 대략 알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사람은 서로 달라서 끌리는 거야.”

 

진영이 현관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가. 이젠 네가 갖고 싶은 걸 가져, 관린아.

 

 

10.

 

집 근처 큰길가로 나오니 익숙한 차가 보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차 문을 열었다. 온기와 함께 달큰한 냄새가 훅 풍겨온다. 왔어요? 조금은 야윈 관린이 반갑게 맞이한다.

 

[지훈 씨, 우리 마무리할 이야기 있지 않나요? – 관린 셰프]

 

마무리. 그 한 단어에 심장이 나락을 헤맨다. 목도리를 매다가 눈물이 쏟아져 끝을 전부 적셨다. 행여 눈 부운 게 티가 날까 봐 이 추운 날 얼음찜질까지 하고 나왔건만. 평소와 같은 관린의 태도에 아래 눈꺼풀이 다시 시큰거린다. 이대로 입을 열면 분명 울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바라봤다.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상자가 불쑥 품에 들어온다. 뭐에요? 당황함을 담아 물으니 관린이 그저 웃는다. 곰돌이가 그려진 상자. 그 안에 들어있는 수제 막대 과자. 투명한 포장지로 낱개 포장된 과자를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이게 뭐냐고요.

 

“제가 맨 처음 만들었던 요리가 이 막대 과자였어요. 기념일에 짝사랑 상대를 주려고.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그 생각 하나로 온 부엌을 다 뒤집었어요.”

 

옅은 보조개가 관린의 볼에 파인다. 과자 하나를 집어 포장을 벗긴 후 지훈에게 내밀었다. 모자람이 없는 맛.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빈 공간이 서글프다.

 

“이젠 혼자서도 요리 잘 하시네요. 병이 다 나으셨어요?”

“아뇨. 여전히 아무 맛을 못 느껴요. 그래서 여전히 맛을 느끼게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

“곁에 있어야 하는 게 꼭 지훈 씨여야 했던 적, 한 번이라도 있냐고 물었죠. 제 곁에 필요한 건 맛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 생각에 변함은 없어요.”

 

다만, 그 역할이 지훈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함께 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지 않는 순간에도. 지훈 씨는 제게 맛을 알려줘요. 오늘 지훈 씨를 생각하며 만든 이 과자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에요. 가게도, 요리도, 명성도. 다만, 이번에는 제가 원하는 것들만 손에 쥐고 싶어요. 그러니까 저도 분수에 맞지 않는 거 욕심낼래요.”

 

혀의 마법사. 새삼스럽게 관린의 별명이 떠올랐다. 혀 끝에 실리는 말랑하고 다정한 말들이 그동안 고민했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꾸며준다.
눈물과 올라가는 광대를 숨기기 위해 자꾸만 고개가 내려간다. 욕심내도 괜찮아요? 관린이 함께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홧홧한 귓가에 관린의 말이 맴돈다. 허락해 주세요. 능글맞은 목소리가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귀를 살짝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약속해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눈이 휘어져라 웃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관린이 재촉한다.

 

“어떤 걸 욕심내고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제 손가락은 아까부터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거 말고”

 

관린의 목에 팔을 두른 후 말을 이었다.
그 다음 차례부터 해요, 우리.

 

*

 

 

Q. 서울시 선정 이달의 레스토랑 top 20. 한국 V 잡지 선정 ‘차기 미슐랭 스타 후보’ 5위 등. 독특한 컨셉의 이색 레스토랑으로 많은 주목을 받으며, 개점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놀라운 기록들을 세우고 있다. 소감은?

A1. 이젠 별로 놀랍지 않다. 그보다 더한 기록들도 세워봤기에.

A2. 이런 솔직함이 우리 레스토랑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웃음)

 

Q. 요리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1. 사랑. 오직 그것뿐.

A2. 더 나은 실력. 더 나은 메뉴. 더 나은 무언갈 향한 주제넘은 욕심.

 

Q. 두 셰프 모두 요리 실력 외에도 잘생긴 외모로 주목받고 있다. 여러 방송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데, 관련한 향후 계획은?

A1. 지훈 셰프와 공동 출연인 프로그램만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우리 셰프님 잘생긴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니까.

A2. 방송은 좀 … 외모에 너무 이목이 과하게 집중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A1. … 정정하겠다. 방송 출연 계획 아예 없는 걸로.

 

메뉴는 셰프들이 만들고 싶은 요리로만 구성되어 있다. 영업시간 역시 매주 편의에 따라 다르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것 같은 이 레스토랑. 대신 이곳의 셰프들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요리를 만든다.

이들의 요리는 매주 금요일 레스토랑 ‘Greed*’ 에서 만날 수 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라이관린 셰프님, 박지훈 셰프님, 감사합니다.

*Greed – 탐욕, 식욕, 욕심